주일설교

길 없음

아빠와 함께 2025. 3. 9. 17:54

길 없음

2025년 3월 9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19-20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성소, 휘장 같은 것은 성막, 혹은 성전 안에 있는 겁니다. 성전이나 성막은 유일하게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유일한 성전이나 성막을 걷어치웠버렸습니다. 성전을 거부했습니다. ‘휘장은 곧 예수님의 육체’입니다. 인간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육신이 살해당할 때, 비로소 하늘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길이 없습니다. 인간들의 생각들이 길을 틀어막아버린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줄곧 따라가면 자신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요 13:36)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거절당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에 베드로의 처소가 그때는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이는 곧 현재는 인간을 위한 처소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처소가 마련되면 그때 다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시겠답니다. 이게 바로 ‘길’입니다. 즉 ‘길’이란 인간들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에게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있음’을 지켜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모든 가치와 의미, ‘나 있음’에 비롯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증거하게 됩니다. 인간들의 가치란 자신의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나 보상을 가지는데 있습니다. 남들에게 당당하게 내세울 것이 있는 ‘자기 있음’의 위용을 갖추는 것이 인간들이 세상 사는 즐거움이요 이유입니다. 문제는 이런 ‘있음’의 가치를 가지고 천국을 넘보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창세기 3:19로 이미 규정되어 있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따라서 인간은 이 규정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다른 처소를 넘보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아들의 나라’입니다.(골 1:13) 이는 예수님께서 초대장을 보내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인간이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도리어 천국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이처럼 ‘있음’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로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이미 ‘길이 성립되는 그 성막’자체를 인간들을 기피했기 때문입니다. 덩달아 천국 가는 길도 치워버린 바가 된 겁니다. 그렇다면 없는 천국 길이 어떻게 해서 마련되는 것일까요? 창세기 15: 9-10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하었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개체로 되어 있는 제물을 그 가운데를 쪼개입니다. 그리고 그 쪼개진 두 면을 마주보도록 배치합니다. 그러면 그 안에 ‘없음’으로 나타납니다. 그게 길입니다. 즉 길이란 있음이 죽어서 쪼개짐을 마주하면서 나타납니다. ‘제물의 있음’ 안에만 길이 포함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 쪼개진 제물 사이로 한 밤중에 횃불이 지나갑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하나님께서 지나가신 겁니다. 한 밤중에는 인간이 노동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입니다. 그 횃불는 하나님이시기에 제물은 곧 신체성으로 나타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렇게 해서 ‘길’이란 하나님의 자신의 구원에만 충족되는 조건입니다. 그 나타난 길을 따라 가신 예수님은 이미 사전에 아버지 하나님과 이야기된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데리고 있을 자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렇게해서 예수님은 처소가 마련되면 자신이 데리고 싶은 사람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 성령을 보내십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1-22)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란 철저하게 인간의 무신앙심을 들추어내시는 일입니다. 즉 인간의 육신은 아무리 해도 ‘믿음’이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막 6:48-49)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간주했다는 것은 평소에 제자들은 전혀 믿음없음을 반영하시는 겁니다.

게다가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에게 가겠다는 베드로는 도중에 실패하고 맙니다. 마태복음 14:29-31에 보면, “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율법에 의해서 철저하게 죽은 자에 불과하기에 그들의 믿음, 소망, 사랑도 다 헛겁니다. 이런 자들을 구원하는 것은 곧 ‘말의 내용과 말하는 행위의 내용이 다르다’는 원칙에 준해서 이루어집니다. 즉 인간들이 성경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믿겠다는 것은 진정한 성경 내용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은, 예를 들면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셔서 그것을 결과로 죽은 성도에게 주어진 결과입니다.

즉 인간이 진리를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알게 된 것이 곧 진리가 되는데, 이로 인해 인간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성도의 가치는 ‘예수님 증거’입니다. 모세가 이런 인물이었습니다. 모세가 속한 율법의 공간과 일반 이스라엘이 속한 있는 공간의 차이로 인해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써야했습니다. 그 수건이 오늘날 성령입니다.(고후 3:18)

성도는 이제는 성령 안에서 ‘나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자유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두에게 예수님의 행하심을 증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7강-히브리서 10장 19-20절(길없음)250309-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19-20절입니다.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길’이라는 것이 제시되어 있는데요. ‘길’이 있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는 이쪽 세계는 이제 수명이 끝났다, 여기에 대해서 희망을 전혀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죠. ‘길’이 있다는 것은 ‘빠져나오라’라는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하면 여기 ‘성소’라는 말이 나오고 그다음에 ‘휘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소와 휘장은 바로 성전에 있는 거죠. 성막, 성전에 있는 요소가 됩니다. 성전과 성소에서 휘장이 찢어지게 되면 기존의 성소 기존의 휘장은 쓸모없는 게 돼요.

실체가 드러나면 모형은 날아가는 겁니다, 없는 겁니다. 성소가 없고 성막이 필요 없다는 말은, 인간 속 기존의 공간은 그 효과가 끝났다는 거예요. “지정된 이 세상의 어느 곳에 가면 구원 받습니까?”가 삑~,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성소와 성막은 공간이기 때문에요, 기존의 공간 자체가 쓸모없는 공간이 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공간 말고 다른 공간으로 가려면 길을 따라서 가면 되는 겁니다. 길을 따라나선다는 말은 ‘내가 태어났던 이쪽 세상 공간은 내가 깔끔하게 포기했다’라는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 처소에 가면 되지 않겠느냐?

문제는 그 처소가 있기는 있는데 우리가 끼어들 장소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서 가려고 했어요. 그때 ‘따라오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거기서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오겠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길’은, 인간이 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주님이 내려오는 ‘길’이 유일한 ‘길’이에요. 인간은 ‘길’ 자체가 없어요. 가로막혀 있습니다. 인간이 있을 처소는 하늘나라 어디에도 없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을 받을 만한 처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도 없습니다.

인간을 받지를 않아요. 인간은 하늘나라에 끼어들 입장이 못 됩니다. 천국이라는 것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인간에겐 없어요. 하나님에게는 천국이 있는데 인간에게는 없어요. 이걸 구분 좀 해주시길 바랍니다. 인간이 가야 될 곳은 지옥만 있을 뿐이지 인간이 갈 수 있는 천국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천국 보내겠다는 것은 전부 다 구라입니다. 교회가 그동안 거짓말해 온 거예요. 교회의 하나의 컨셉이 되죠. 교회도 하나의 사업이니까 유지하기 위해서 돈 받고 하려면 구라를 쳐야 해요. 하늘나라에는 인간이 갈 곳이 없어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야박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천국에 갈 그런 잽이 못 됩니다.

‘길’이라는 것은 성전에서 시작해서 ‘길’이 나오는 거예요. 그 성전이 바로 예수님이시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이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몽땅 그 성전 되신 예수님을 버렸잖아요, 배척했잖아요. 그러면 인간이 거할 처소가 없는 것은 너무나 지당한 이야기예요. 천국을 인간이 배척해 놓고 천국에 가요? 이건 앞뒤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골로새서 1장에 천국과 주인을 합쳐서 표현한 것이 ‘아들의 나라’라고 이야기해요. 천국을 다른 말로 하면 ‘아들의 나라’예요. 그런데 그 아들을 인간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나가!” 하고 내쫓았잖아요. 이미 천국을 내쫓은 거예요. 천국을 내쫓아 놓고 어딜 가요? 교회 와서 천국을 간다? 성당 다녀서 천국을 간다? 이거는 뭐, 말이 안 되죠.

그러면 천국엔 누가 가느냐? 처소가 마련되고 마련되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그 결과물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올 때 당도 된 그 사람만 천국에 가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다시 오겠다는데 안 오면 어떻게 되느냐? 안 오면 천국이 없는 사람이죠. 뭐 간단한 이야기 아닙니까? 안 오면 천국이 없는 거예요. 네 자리가 없기때문에 안 오신 거예요.

이런 점에서 보면 성경이 엄청 쉬워요. “목사님 저한테는 왜 성령이 안 옵니까?” 자리가 없으니 안 왔죠. 초대권이 없으니 안 왔죠. 그거 뭐 어렵습니까? 간단한 문제거든요. 그래서 이 성경은 처소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해서 성령에 의해 쓰였습니다.

성경이 성령에 의해 써졌기 때문에, 주님께서 처소를 마련해 준 자만이 알아듣는 책이 이 성경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온 사람은 이 성경 내용을 굉장히 귀하게 여기고, 궁금하게 여기고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성령이 안 온 사람은 성경 자체에 대해서 천시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천시하듯이, 그리고 관심이 없듯이. “뭐 바쁜데 성경 볼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이러쿵저러쿵, 구시렁거리면서.

오늘 본문에서 인간에 의해서 버림받은 성전, 그 버림받은 성전에서 ‘길’이 나온다는 말은, 사실 인간 쪽에서는 버림받았으니까 누구 이야기냐 하면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에요.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육체가 찢어지는 것이 어떻게 그게 길이 되는지를 논리적으로 파악해야 해요.

인간에게는 ‘길’이 없는데, ‘길’이 아예 없는데 예수님의 육신이 쪼개짐으로써 거기서 없는 길이 어떻게 생기는가? 처음에는 예수님이 깨진 그 ‘길’을 따라 아버지께 갔죠. 이제 인간은 못 따라가요. 베드로도 못 따라가요.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성과를 근거로 처소를 마련하면, 이야기가 잘 되면 주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데려가는데, 예수님이 하나님과 이야기한 내용이 요한복음 5장에 미리 나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말해요. “아버지 내가 원하는 사람을 뽑아서 특별히 내 곁에 둘 수 있는 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즉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내 곁에 두고 영생 복락 얻도록 찾아가겠는데 아버지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아버지 답변이 “그런 모든 것은 내가 너한테 일임했으니까 네 마음대로 하세요.”(요 5:21-22) 그러니까 그다음부터는 예수님께서 자기 영을 보내요. 예수님의 영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보내시면 “네 처소가 있다. 네 처소가 마련되어 있어. 내가 성령의 권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너를 위로 잡아당길 거야.”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강제로 잡아당기듯이 “너를 뽑아낼 거야.” 치과에서 강제로 이를 뽑아내듯이. 버티지요. 하지만 뭐 강제로 뽑아내는데 버틸 수가 없어요. 그렇게 강제로 뽑아내는 거예요. 강제로 뽑아낼 때 “주님 가겠습니다.” 이런 인간은 없어요.

주님의 성령이 찾아와서 나를 데려가겠다고 할 때 “예, 저를 데려가세요.” 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신이 예수님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 거부한 육신의 능력도 만만치 않아요. 버팁니다. ‘우리 딸내미 시집가는 거 보고 가겠습니다.’ 라든지, ‘이번 일만 마치고 가야지 지금 가게 되면 너무 아쉽습니다. 못 가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버티는 거예요.

버티는 그것을 주님께서 감안합니다. 버티는 그것도 결국 못 버티게 주님의 육신을 가지고 우리 육신을 대신해서 무사히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그 성공한 방법에 대해 이미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람의 제사를 통해서 제공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10절에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뭘 쪼개는가? 9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제물로 놓는데 그냥 놓는 것이 아니고요, ‘그 중간을 쪼개고’, 중간을 내는 거예요. 같이 있으면 중간이 없잖아요. 둘로 쪼개면 중간이라는 게 생겨나요. 그러니까 이 중간이라는 것은 ‘없음’입니다. ‘없음’의 자리를 만들기 위한 겁니다. 양쪽에 강변이라는 게 있어야 그 중간에 강이 생기잖아요.

오른쪽과 왼쪽 둘로 해 놓고는 마주 보게 해요. 마주 보게 함으로써 그 빈공간은 마주 보는 제물의 신체 자체에서 발생됐다는 거예요. 제물의 신체는 뭐냐?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신체거든요. 예수님의 신체 안에 빈공간이 생긴다는 이야기에요. 빈공간이 생기게 해 놓고, 그다음 17절에 보니까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해가 져서 어둡다는 말은 인간은 노동하지 않고 하나님만 노동 한다는 겁니다. 인간이 노동 하게 되면 인간은 생각하게 되고, 인간은 자기를 의식하게 되죠. 영적이라는 것은 뭐냐? 영적이라는 것은, 자기 생각을 버릴 때 모든 것이 영적으로 감지가 돼요.

왜 우리가 이 땅에서 영적인 것을 감지 못하느냐 하면, 내 생각이 멈추지 않기 때문이에요. 나를 포기하는 순간이 나에게 찾아오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육적이에요. 육적이라는 말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게 되어 있어요.

52일 만에 윤석열 대통령이 구치소에서 나올 때, 그걸 보고 있을 때, 그걸 눈으로 보잖아요. 생각이 들잖아요? 그 생각이 드는 순간에 ‘아, 윤석열 대통령이 풀려나왔구나.’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생각이 안 나죠. 왜냐하면 내 의식이 살아있는 한 영적 생각은 차단되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나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요 14:6)라고 아무리 성경에서 이야기해도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시큰둥한 이유가, 그 ‘길’을 내 생각이 틀어막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나의 가치는 나의 노동에 있다. 내 노동과 그 보상이 나의 가치고 의미다.’ 이 말이죠.

어떤 할머니가 병이 들었어요. 그런데 자식들이 안 찾아옵니다. 할머니가 화가 났어요. “이것들이, 내가 너희들 키운다고 이렇게 애를 썼는데 이젠 나를 박대하고 천대해?” 할 때 그 할머니는 전혀 영적 생각을 못 해요. 영적 생각을 느끼지 못해요. 왜냐하면 자기 노동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 노동과 대가를 생각하기 때문에 영적 생각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 세계의 모든 가치는요, 자기의 노동과 거기에 대가를 노리는 자기 생각이 전부에요. 이게 자기 가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가치는 증거에요. 누구를 증거하느냐, 누구를 증거하느냐? ‘너 말고 너의 존재는 누구를 증거하느냐’에요.

“너 지금 육신 있잖아. 너 지금 존재 있지? 그 ‘있음’은 ‘없음’을 증거하라고 인간을 만들어 놨다는 거예요. 그 ‘없음’은 제물을 쪼개야 나와요. 있는 제물을 쪼개서 쪼개진 반쪽과 반쪽을 마주 보게 해서 ‘있음’에 집중해 평생을 살아왔던 인간들로 하여금 내 속에 ‘없음’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길’이 되는 거예요.

없다는 것, 내 속에 ‘없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나는 내 ‘있음’이 너무 강렬해서 내 속에 ‘길’이 만들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동안 몰랐던 겁니다. 여러분, 이따가 식사하면서 대화해 보세요. 대화라는 게 뭡니까? 나 ‘있음’과 너 ‘있음’이잖아요.

나 ‘있음’과 너 ‘있음’이 있으면 대화가 되고, ‘있음’에서 나오는 것은 내 노동의 대가 같은 게 나와요. 그러면 주고받는 게 뭐냐? 옛날 군사들이 네가 들고 있는 창과 내가 들고 있는 창을 마주치면 창, 창, 창! 소리가 나죠. 내 존재의 가치의 ‘창’ 네 존재 가치의 ‘창’ 이거 다들 누구 증거하느냐? 자기 잘남의 증거입니다.

자기 잘난 게 없을 때, 내세울 게 없을 땐 어떡하느냐? 묵언 수행, 침묵해요. 가만히 있습니다. 사람이 말 안 할 때는 분명히 캥기는 게 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애도 말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엄마 나 수학 100점 맞았어.” 이게 뭡니까? 노동의 대가를 자신의 가치로서 전시하는 거죠. 나 백 점이다, 그때만 말해요.

그런데 수학 0점 맞았다, 묵언, 말을 안 합니다. 내세울 게 없어요. 그러니 인생이라는 것은 남한테 내세울 만한 것을 꾸역꾸역 내부적으로 차근차근 끌어모으는 그러한 시간 보내기, 이게 인생이죠. 자기 노동의 가치, 그걸 인생의 가치로 보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증거죠. 그 빈 자리가 그냥 비어 있기만 하겠어요? 창세기 15장 17절에 보면 밤중에, 밤에는 하나님만 노동합니다, 인간은 노동하지 않아요, 그 밤에 횃불이 그 사이로 지나갑니다. 마치 ‘길’인 것처럼, 마치 ‘길’이 된 것처럼 지나갑니다.

그런데 지나가는데 마주 보는 제물은 이미 쪼갰기 때문에 죽었어요. 그러면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 한 건 뭡니까? ‘죽어야 비로소 길이 열린다.’ 어느 누가 그걸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의 육체로서 그걸 표현한 거예요. “나라는 제물이 쪼개짐으로써 비로소 내가 ‘길’이 된다”라는 거예요. 길이 되는 겁니다.

죽음이 없으면 ‘길’이 안 되는 거예요. 왜? ‘있음’이, 그 자기 자랑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 노동의 대가가, 하나님이 천국으로 가는 처소를 마련하는 그 ‘길’을 내가 틀어막는다니까요? 내 구원을 내가 틀어막아요. 나 ‘없음’으로 가는 게 아니고 나 ‘있음’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고요.

예수님마저 ‘없음’으로 갔는데, 예수님마저 죽음으로 아버지께 갔는데 무슨 고집이 있어서 나는 안 죽고 가련다, 하고 버티고 있으니까 이게 하나님 처소에 합당치 않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는 것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이 더러운 곳에서 깨끗한 곳으로 가는 그 코스를 그대로 답습하고 반복하기 위해서 주시는 겁니다.

그냥 멀쩡하게 “나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 많이 했습니다.” 이러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죽지 아니하면 갈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안 죽으려고 버텨요. 왜? 죽으면 내 잘남의 증거 자체가 날아가 버리잖아요. 평생 살아왔던 노고와 나의 모든 노력이 죽는 순간에 무효가 돼버린다니까요? 이건 참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모독이잖아요. 교회 다니고 지옥 가고. 무슨 이러한 파탄 날 부질없는 짓을 하겠어요?

처소라는 게 창세기 3장 19절과 대비가 됩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 보면 아담에게 저주를 내리기를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인간이 사는 처소는요, 흙이고 그 흙에 같이 녹아져서 하나가 되고, 그 다음엔 끝나요.

인간이 기억하고 있는 처소는 오직 이 땅, 흙으로 된 이 땅만 처소인 줄 알고 있어요. 그 처소의 일부가 인간이라는 몸뚱이입니다. 이 몸뚱이가 세상과 결합되는 것은 논리상 당연한 거죠. 우리가 천국 간다는 것은 상당히 이질적입니다. 흙으로 된 인간이,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살다가 흙으로 죽는 인간이 질적으로 흙이 아닌 요소, 질적으로 흙이 아닌 예수님의 영광의 나라에 합류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신화는요, 인간 편에서 썼어요. 그리스·로마 신화에 프로메테우스라는 신이 나오는데 그 신은 인간을 두 번이나 도와줍니다. 프로메테우스라는 신이 인간을 왜 도와주는지는 몰라요. 신에게는 맛없는 고기를 주고 인간에게 맛있는 고기를 주기 위해서 제물의 겉과 속을, 그 품질을 바꿔요.

예를 들어 중국산을 가지고 포대갈이 하듯이 한 겁니다. 내용물은 중국산인데 겉에는 한국산이라고 표기하듯이 한 거지요. 신들에게 제사할 때 속임수를 썼어요. 뼈와 살코기를 나눈 뒤, 가죽으로 살코기를 덮고, 남은 지방을 모아 뼈 위에 덮는 식으로 한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신에게 제사할 때 뼈만 태우면서 향기만 맡는 그런 제사는 신이 받고, 진짜 알짜배기 고기는 인간이 맛있게 뜯어먹도록 작당을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그게 한 번이고 또 한 번은 바짝 마른 식물 속에 불을 담아서 인간에게 전했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를 도와줬어요. 그래서 이 신화의 특징은 뭐냐? 자꾸 인간을 도와줘요. 그 신화의 연속성이 종교라는 겁니다. 교회, 성당, 불교나 이슬람이나 자꾸 인간을 도와줘요.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최고의 사랑은 인간을 죽여주는 거예요. ‘있음’ 자체가 말썽꾸러기기 때문에 있는 인간을 죽여줍니다. 뭐 가만있어도 늙어 죽겠지만 가만히 있어도 늙어 죽는 그것은 소용없죠. 살아있을 때 성령을 통해서 그 인간을 죽여주는데, 성령이 죽여준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율법을 통해 그 인간을 율법의 희망이 없는, 율법에 의해서 죄로 죽은 자로 간주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너 죽은 자야. 나는 너를 죽은 자로 본다고! 그러니까 너도 나처럼 너 자신을 제발 죽은 자로 좀 봐. ‘나 죄지었다. 그런 죄를 지으면 안 된대.’ 이렇게 후회하고, 반성하고, 회개하지 말고…”

이미 죽은 존재가 죽은 짓을 하는 게 그게 뭐가 이상해요? “‘바르게 살면 하늘에서 상급을 받을 건데…’ 쓰잘데 없는 그런 짓들을 하지 말고, 이미 율법을 준 것은, 넌 어떤 무엇을 하든가 이미 죽은 자다.” 그 말이에요. 얼마나 도발적인 발언이에요. 인간에게는 도발적인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의 모든 신화와 종교는 어쨌든 간에 인간을 도와주려고 해요.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거예요. 프로메테우스의 속임수를 간파한 제우스 신이 화가 나서 인간 세계와 프로메테우스에게 벌을 내립니다. 프로메테우스를 꽁꽁 묶어요. “죽음보다 더 센 고통을 주어라.”

그래서 죽음보다 센 고통이 뭘까? 산 채로 코카서스 산에 묶어놓고 독수리를 보내서 계속 간을 쪼아서 먹게 하는 거예요. 간을 빼먹으니까 죽어야 하는데 프로메테우스는 신이기에 불멸의 존재에요. 다음날 되면 간이 재생해서 또 생겨요. ‘재생병원’이라는 이름이 많잖아요. 간이 재생되면 독수리가 또 간을 쪼아먹는 거예요. 죽는 거보다 더 심한 벌이 뭐냐? 고통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 고통이 불멸이라는 거예요.

그다음에 인간에게 준 벌이 뭐냐? 안에는 계략이 들어있고, 밖은 매력이 있는 존재를 보냅니다. 그게 판도라에요. 여자입니다. 여자를 보냈다는 게 인간 세계에서 징벌의 일종입니다. 매력적이라서 덥석 물었는데 안쪽에서 물었던 인간이 물리게 되어 있는 구조…, 지금 여자분들이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표정들인데요.

물었다고 생각했는데 물렸어! 그것도 평생 물렸어! 인간에겐 징벌이라는 거예요. 이건 교훈인데요, 조심하라는 뜻이에요. 자, 조심하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신인데 널 도와줄게.’ 이 말이에요. 자꾸 인간을 없앨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존재에 의해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신화 쪽에서 자꾸 도와줍니다.

그 신화의 끝장이 뭐냐? 신학이에요. 총신, 장신에서 배우는 신학. 신학은 신화의 일종인데 사람을 도와주는 걸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 이 무서운 이야기예요. 인간이 만든 신학으로써 종교를 만들어서 구원시키고자 하는 이 애씀이 신화의 반복이라면, 그러면 예수님 쪽은 어떻게 하는가?

예수님 쪽은 이렇게 도와줍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일체 믿음이 없게 만들어요. 믿음 없음의 그 끝장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그것, 그게 바로 하나님이 일으키는 기적입니다. 마가복음 6장 48절에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새벽 두 시쯤 되는 것 같아요. 배는 풍랑 속에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풍랑 속에 있는 제자들이 탄 배에 저 육지 쪽에서 바다 위를 걸어서 옵니다. 제자들이 “유령인가?” 이랬어요. 자, 여기서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베드로가 나오는데요. 같은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인 것을 인정 못 해요. 왜? 예수님은 그 전에 물 위를 걸은 적이 없기때문에 유령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다음에 베드로가 또 물 위를 걸어요. 29절에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걷는데 베드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 바로 물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것은 성공했는데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은 실패했어요.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요 8:31). 왜 너 자신을 바라보느냐고 이렇게 책망을 하시는데 이 기적은요, 모든 기적은 ‘인간에게는 결코 믿음이 성립될 수 없다’라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예수님이 찾아와서 우리에게 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믿음이 생성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산 채로 천국에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개코도 믿음도 없이 뭘 가요?

주님의 계획이 이런 계획입니다. 세 사람이 있습니다. 그중에 두 사람은 바보고 한 사람은 똑똑해요. 그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하나님과 전화 통화를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구원받는다고요? 여보세요?” ‘여보세요’를 줄이면 “엽때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 아,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사해서 그걸 믿으면 구원받는다고요?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천국 가서 봬요.” 하고 전화 통화를 했다는 말이죠, 이 바보 같은 사람이.

그러니 또 다른 바보 같은 사람이 “야, 그 전화 나도 바꿔줘.” 전화 바꿔줬어요. “하나님, 저도요, 저한테도 이야기해 주세요. 어떻게 구원받는다고요? …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씻어서 죄가 없어지고 깨끗한 사람 돼서 합류한다고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끊었어요.

그걸 보고 세 번째 똑똑한 사람이 “그 전화 나도 하게 줘.” “여보세요, 하나님! 저 세 번째 사람인데 하나님…” 그러다 똑똑한 사람이 보니까 그 전화기가 원래부터 고장 난 전화기에요. 똑똑한 사람이 화가 나서 “너희 둘이 짜고 나 병신 만들었지? 통하지도 않는 전화기 가지고 마치 하나님과 통했고 은혜받은 것처럼 그렇게 조작했지? 너희가 언제까지 날 놀릴 셈이냐?” 바로 이런 상황까지 주께서 몰아붙입니다.

인간이 교회에서 하는 모든 짓거리가 원래 통화가 안 되는데 마치 남들에게 통화가 잘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이 있는 것처럼, 쉬지 않고 기도하면 기도에 응답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조작하는 그 집단 단체가 교회가 되고 만 거예요. 불통 전화입니다.

똑같은 상황이 성경에 계속 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기적이란 ‘있는 것’들로 하여금 전혀 신앙이 없다는 것을 밝혀내는 그것이 기적이고,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있는 것’들로 하여금 절대로 ‘없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 단지 ‘있다’는 그 이유때문에 ‘없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없음’에 들어가지 못하면 천국 가는 ‘길’에 낄 수 없다는 걸 분명히 하는 그 작업이 하나님의 기적이에요.

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 이삭과 두 아들 사이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큰아들이 와서 “아버지, 저한테 남아있는 복은 없습니까?” “없다!” “왜요?” “네 동생한테 다 줬다.” 여러분들이 똑똑한 에서 같으면요, 이렇게 따질 수가 있어요. 여러분 다 똑똑하니까 이렇게 따질 수가 있다고요.

“아버지, 아버지잖아요. 아버지의 소유권이 등기로 되어 있는 재산이잖아요. 아버지가 마음만 먹으면 ‘내가 네 동생한테 속았다. 그러니 그거 취소하고 반반으로 나누라’ 하시든지(속은 쪽 잘못도 있는 것이니까), 아니면 ‘네가 큰아들이니까 내 재산 다 네가 가져가라.’라고 얼마든지 아버지 마음대로 변경이 가능하잖아요.”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주인이니까.

“변경이 가능하니까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재산을 저한테 넘기세요.” 그러나 아버지 생각은 뭐냐? “이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한 일이기 때문에 축복을 이미 준 이상 그 축복과 저주를 변경 못 한다.” 그렇게 나올 때 똑똑한 형인 에서가 뭐라고 하겠어요?

“하나님 빼고 이야기합시다. 아, 미치겠다, 정말.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없는데 자꾸 하나님 거론해서 마치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조작하지 마세요. 왜 아버지는 자꾸 자신을 속입니까?” 그때 아버지가 뭐라고 하겠어요? “내가 등신이라서 그래.” 내가 등신이라서 그렇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십자가 옆에 강도 둘이 있잖아요, 똑똑한 강도와 머저리 같은 강도. 똑똑한 강도는 “살아서 우리를 구출하면 당신 믿어줄게”(누가복음 23:39) 이게 똑똑한 강도입니다. 지금 예수님 본인도 자기 몸을 못 추려요. 그런데 머저리 같은 강도는 같이 죽어가고 있는 입장에서 죽어가는 예수님 보고 “주님, 저 살려주세요”(눅 23:42).

산 사람 보고 살려달라고 해야지 다 죽어가는 초라한 입장에서 뭘 살립니까? 등신 같은 강도는 “난 예수님 믿었다.” 이렇게 되는 거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똑똑한 강도는 뭐라고 했습니까? “둘이 잘 논다!” 둘 다 헛짓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했어요. “네 아들 이삭을 바쳐라.” 이삭을 바치러 갑니다. 그때 이삭이 말합니다. “아버지, 여기 불쏘시개도 있고 라이터도 있는데 제물이 없네요? 제물이 왜 누락 되었습니까? 왜 빠져있습니까? 왜 제물은 여기 없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주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창 22:8) 이게 굉장히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네가 제물이야”라고 왜 말을 못 해요? 네가 제물이라는 말을 왜 못하냐는 말입니다. “내가 너 잡을 거야.” 그러면 그 소리 듣고 이삭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버지 저를 잘 잡아 잡수세요.” 이렇게 하겠습니까?

“나 아버지하고 안 놀아. 나 산에서 내려갈래. 아버지 혼자 누굴 잡든지 난 내려갈래. 미쳤지 내가. 이 자리가 내가 따라올 자리가 아닌데 내가 왜 따라와? 진짜 아버지는 완전히 돌았어. 잡아도 양을 잡고 소를 잡아야지. 그동안 날 사랑한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었었었었어? 나를 왜 잡아?”

하나님이 미쳤는지 하나님 믿는 본인이 미쳤는지, 하나님이 미친 것은 알 길이 없고 아버지가 미친 거죠. 그 소리 들을 까봐서 아브라함이 말을 안 합니다. “주께서 친히 준비하시겠지.” 이건 비겁한 변명이에요. 결국 ‘없음’의 자리가 똑똑한 ‘있음’을 배척하고 그 ‘없음’에 합류하는 식으로 하나님은 천국 갈 백성을 뽑아내십니다, 뽑아내셔요.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29에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상당히 어려운 말씀이에요. 요한복음 10장 2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자, 불통된 전화지만 그 전화기로 이 음성, 시그널이 왔다고 칩시다. 그럴 때 이걸 오케이, 하고 받아들일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자기가 할 게 없으면 안 믿습니다. ‘나는 뭘 하면 됩니까?’ 할 때 너는 할 것이 없다는 그것이 자기에게 모욕처럼 느껴져서 내가 할 것이 없으면 그다음부터 인간은 불안해지기 시작해요. “내가 교회 50년 다녔는데 제가 또 뭘 해야 합니까?” “0년 동안 다니면서 네가 한 것은 다 취소하고 앞으로도 네가 할 것이라곤 없다.” 이것이 우리에게 믿음의 기쁨을 줍니까, 아니면 초조감과 불안감을 제시하는 거예요? 어떻게 됩니까?

할 것이 없으면 내 있음을 천국의 있음으로 전환시킬 어떤 근거가 아예 박탈되기에 그것처럼 불안한 것이 또 없어요. 그러면 이 말씀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미 주님께서 다 이루시고 그 결과로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이걸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말의 내용과 말하는 사람의 내용이 다르다는 뜻이에요. 말을 할 때 그 말의 내용과 말하는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서로 같지를 않아요. 예를 들어서 “나는 구원을 원합니다.” 할 때 그 ‘구원’을 원하는지 ‘구원받은 나’를 원하는지 인간은 공용해서 써요. 그러나 주님은 이걸 나눕니다.

나눠서 따로 사용하는 거예요. 지금 말이 어렵게 되어버렸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어요. “집사님! 제가 집사님께 돈 얼마를 갚아야 합니까?” 그 집사님이 하는 말이 “목사님이 주시는 돈이 제가 받아야 할 돈입니다.” 그러면 백 원짜리 하나 주면서 “이겁니까?” “맞습니다, 그거 맞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위에서 말한 예에 비춰서 설명해 보면, 내 생각이라 하는 것은 빚을 갚아야 할 분의 생각이 쓰나미처럼 밀려와서 그것이 후차적으로 나한테 생각이라는 결과물을 낳게 된 거예요. 이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믿음은 내가 뭘 믿어서, 성경을 믿어서, 피를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 자체가 주님께서 완전히 믿지 못하는 우리에게 자신의 믿음을 우리에게 쑤셔 넣은 거예요.

쑤셔 넣으니까 그때부터 내가 나를 건사하려고 구원받으려고 시도하는 그것과는 완전히 격이 다른, 대조가 되는 새로운 믿음이 내 속에서 발생이 되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결과적으로 발생이 돼요. 철저하게 격리지요. 철저하게 나 ‘있음’이 구원받는 것은 일체 격리되고, 내 안에 내가 죽고 난 뒤에, 주님 쪽에서 생겨난, 내게는 없고 주님에게만 있는 그 주님의 결과물이 내 속에 새로운 나 ‘있음’으로 우리한테 발생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길입니다, 이게 길이에요. 이미 그 사람은 길 속에 길에 의해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내 믿음의 능력이 아니고 주님의 믿음의 능력이지요, 권능입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은 나의 ‘있음’을 사수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이기적인 요소가 되는 겁니다.

어떤 노래인데요.

You can checkout any time you like,
(언제든지 체크아웃을 할 순 있겠지만,)
But you can never leave.
(영원히 떠나지는 못할 겁니다.)

<호텔캘리포니아>(Eagles, 1976)라는 노래의 마지막 가사에요. ‘이 호텔에서 맛 들이고 장식하고 여러분 속에 삽입된 이 모든 즐거움은 잠시 들락날락할 수는 있어도 이 즐거움을 다 버리고 몰랐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 모습을 노래 가사로 묘사한 거예요.

인간은 그 ‘있음’의 세계에서 주는 축복에 이미 푹 젖어 있습니다. 여기서 승부를 걸고, 실패하지 않고 남을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갑니다. 거기서 웃고, 거기서 절망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구치소에서 나올 때 탄핵 찬성하는 쪽에서는 휴~하고 한숨을 쉬면서 어두운 분위기가 연출되었어요. 탄핵 반대쪽에서는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면서 승리라도 한 것처럼 하고요.

이게 ‘있음’과 ‘있음’의 세계의 게임 법칙이고 즐거움 아니겠어요? 우리가 그 즐거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나요. 아니 안 벗어나려고 하는 거예요.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 교회 와서 기도하잖아요. 제발 우리 자식만큼은, 나만큼은, 우리만큼은 행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잖아요. 통화도 안 되는 그 전화기를 붙들고 “주여, 주여~!”

원래 휘장이 성소라 하는 것은 율법입니다. 성경에서 상당히 어려운 대목인데 이 율법의 특징은 율법과 같이 있으면 죽게 되어 있어요.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난 토요일에 전화했어요. 그 내용을 그대로 말씀드릴 테니 여러분도 같이 생각해 보세요.

요한복음 20장 17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지려고 하니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즉 “만지지 말라. 네가 만질 육체가 아니야. 이 육체는 이미 부활한 육체기 때문에 부활 안 된 육체는 만질 수가 없어.” 이것은 격리지요.

“요한복음 20장은 그렇게 되어 있는데 왜 도마는 손가락 가지고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 자국과 손의 못 자국을 만졌습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예수님은 똑같은 부활체인데 한쪽은 만지지 말라고 했고 한쪽은 왜 만지게 했습니까?

답변을 해드렸지요.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에는 뭘 생각해야 하느냐? 두 공간을 생각해야 해요.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잖아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의 그 ‘있음’의 공간으로 하나의 집합이 형성돼요. 수학의 개념으로 하나의 집단이 형성된다고요.

‘있음’의 그 있는 것끼리는 아무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공간. 그런데 그 공간 말고 다른 공간이 있어요. 이것은 뭐냐? 죽었던 자, 죽었다가 부활한 그 공간이 따로 있어요. 이것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의 문제가 아니라 이쪽 공간에 있는 자는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저쪽 공간에 침투할 수 없고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해 줘요.

‘만지지 말라.’ 네가 속한 공간과 이쪽 공간이 다르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도마에게는 만지게 하느냐? 그것은 이쪽 공간에서 저쪽 공간의 인물을 초청한 거예요. 허락을 한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쪽 공간에서는 저쪽 공간에 접촉을 못 하는데 이쪽 주님이 부활한 공간에서는 접촉하면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공간에 접촉을 허용할 수 있는 권한이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있는 겁니다. 그것도 십자가를 통해서.

이 공간 문제, ‘내가 얼마나 착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런 개인적인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니에요. 구원은 공간 문제에요. 서로 합칠 수 없는 공간인데 어떻게 공간 이동이 성립하느냐? 이건 기적이지요. ‘있음’이 어떻게 ‘없음’의 공간에 들어가겠어요? 안 되잖아요.

그런데 고린도후서 3장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가 율법과 함께 있었어요. 모세는 이미 죽은 자예요. 율법과 함께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인데 하나님께서 40일 만에 다시 모세를 세상에 보냅니다. 세상에 보내면서 모세가 한 행위가 이쪽 공간, 율법 속에 있는, 율법과 동행하고 있는 모세, 그리고 율법이 전혀 없이 그냥 육체, 흙이 될 수밖에 없는 육체 붙들고 끼리끼리 모이는 그 공간 사이는 만남이 안 돼요. 그 영광의 차이 때문에.

그런데 고린도후서 3장의 사도바울 설명에 의하면 모세가 얼굴을 가리는 데 썼던 그 수건이 만날 수 없는 두 공간 사이를 연결해 줬다는 거예요. 모세가 그 얼굴에 수건을 덮어서 그다음부터는 전하면 다 죽어야 할 율법인데 안 죽는 상태에서 그 전달 체제가 원활하게 제공되었던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고린도후서 3장 끝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6-18).

이제는 모세율법의 그 수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 바로 성령이 그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에녹이라는 사람이 안 죽고 올라간 그 이유를 알겠지요? 하나님이 동행하면 이미 에녹은 죽은 자예요. 죽은 자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해서 이 인간 세계로부터 동행하는 그대로 안 죽고 그냥 올라갈 수가 있었던 겁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고요.

말씀이 오게 되면 일단 이 땅의 인간을 죽은 자로 간주해요. 숨끊어지는 그런 죽음 말고요. 죽은 자로 간주하는 거예요.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일체 너의 믿음 소망 사랑이 다 헛방이라는 것으로 간주하고 주께서 말씀을 통해서 주게 되면 나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나의 증거는 더 이상 소용없고, 주님의 증거가 죽어 있는 나를 통해서 발산되도록 하는 조치가 성령의 조치입니다.

간단하잖아요.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 죽은 육체의 하나의 의상이에요. 옷이라니까요! 주님의 옷을 입고 있다고요. 그걸 동행이라 하잖아요. 끝으로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됩니까?” 역시 그 이야기가 나와야 하겠지요.

고린도전서 9장에 그게 나옵니다. 이거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바울의 자기 이야기에요. 20-21절에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무슨 뜻입니까? 성령 주셔서 여러분을 끌어내셨습니까? 그렇다면 네 맘대로 사세요. 네 맘대로, 네 맘대로 사세요. 나를 증거하지 않으면 되니까요. 나 잘났다, 나 이렇게 믿음 좋다, 나 이렇게 전도했다, 나 목회 이렇게 했다, 이런 것 좀 안하고요, 나 자식 잘 키웠다, 그동안 고생해서 이만큼 건사했다는 이런 소리 안 하고 그냥, 그냥 네 맘대로 사세요.

왜? 주님은 우리를 양으로 여겨서 주님이 우리 자신을 영원히 놓지도 않고, 영원히 악마에게 빼앗기지도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할 일이 내 증거가 아니고 주님 증거하는 것으로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이 있는 그런 수건이 되게 해 주옵소서. 양쪽 공간에 다 속해있는 그런 즐거움을 허락해 주옵소서. 이것이 주님 주신 자유인 것을 마음껏 주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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