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 속의 인물
2025년 3월 19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8:56-61
(8:56)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무릇 허하신 대로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빙자하여 무릇 허하신 그 선한 말씀이 하나도 이루지 않음이 없도다
(8:5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옵고 우리를 떠나지 마옵시며 버리지 마옵시고
(8:58) 우리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여 그 모든 길로 행하게 하옵시며 우리 열조에게 명하신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시기를 원하오며
(8:59) 여호와의 앞에서 나의 간구한 이 말씀을 주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있게 하옵시고 또 주의 종의 일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일을 날마다 당하는 대로 돌아보사
(8:60)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8:61)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
솔로몬의 자신감 넘치는 기도가 나옵니다. 현재 자기 시대에 이스라엘이 태평스럽다는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 말씀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현 이스라엘 상태는 모세 율법에 의해서 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복으로 덮혀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겁니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율법을 제대로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현 이스라엘 모습은 하나님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일치되어서 하나님께서 극히 만족한 가운데 주어지는 축복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넉넉하게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만족해서 자기 백성과 더불어 계시면서 태평스러운 상태를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솔로몬은 덧붙여 기도하기를, 우리 이스라엘은 이 축복된 상태를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 율례를 위반하지 않으면 된다는 겁니다. 솔로몬의 이러한 기도는 모세 율법의 체제 안에 합당한 조건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인간의 소유의 넉넉함이 본인들이 하나님 말씀에 부합되도록 완전하게 살았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의 일이 자기 백성의 풍족한 삶에서 멈출까요? 욥의 경우를 통해서 보면, 하나님께서 더 추진하고 싶은 일이 더 있습니다. 특히 소유의 넉넉함을 곧 복받을 만해서 받는 복이라는 인식에 변화가 일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2:15에 보면,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의 최고 관심사가 소유로 가득 찬 자기 모습입니다. 그런데 소유의식이 하나님께서 추진하시려는 율법의 지속적인 취지를 방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소유의식을 피하고 인간의 죄악된 마음에 직접 다가서십니다. 소유가 넉넉하게 되면 마음도 덩달아 훌륭할 것이라는 오해를 낳게 마련입니다. 만사가 형통하면 하늘에서 보기에 자신의 마음이 별 문제가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리게 됩니다.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 나라가 엉망이 된 것은 솔로몬 때에 누렸던 그것을 당연하게 소지할 자격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이후에 선지자들이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관심이 멀어졌음을 전제로 선지자들이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모세 율법에 대한 최종적 위반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는 민수기 16장-17장에서 고리 자손의 반란으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고라와 그 모든 무리에게 말하여 가로되 아침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가 누구인지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 보이시고 그 자를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되 곧 그가 택하신 자를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리니”(민 16:2-5)
즉 고라 자신들이 주장은 이러합니다. 자신들도 다같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만이 자신들을 다스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너는 되고 우리가 왜 안 되는데?”라는 논리를 들고 나오는 겁니다. 이런 태도는 율법의 근원에 도전하는 동시에 율법 안에 어떤 특정 인물이 살아 있음을 노출시키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마치 이 세상 많은 사람 중에 아브라함만을 선택해서, 복과 저주를 결정짓는 기준으로 삼는 방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다윗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복입니다. 개인적으로 율법을 지켜서 개인적으로 결과적인 복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국가적인 단위의 복은 다윗 언약에 준해서 등장하는 특별한 인물에 의해서 성사됩니다.
마치 어떤 가정에서 선천적으로 눈이 먼 언니와 둘이 멀지 않는 여동생에게 피아노를 치게 하면서 부모는 그 둘 눈을 감기게 한 상태에서 훈련합니다. 눈에 뜬 상태에서는 들릴지 않는 특수한 음을 감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러한 경우가 다윗에게도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소년일 때, 하나님은 다윗을 다음과 같이 사용하셨습니다.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청컨대 다윗으로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 16:22-23) ‘악신이 나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족스러운 상태를 위해 일하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다른 이는 못하고 오직 한 사람, ’다윗‘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다윗의 뿌리는 모세 계통, 모세 라인이 아닙니다. 다른 줄기입니다. 곧 ’이새의 줄기‘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사 11:1-2)
■이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그 분의 일하심으로 인해 극히 하나님의 만족을 충만한 세계상이 다음과 같이 펼쳐집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이러한 상태는 인간의 소유성에서 기대할 만한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끄집어낸 것은 그들로 하여금 율법 안에 갇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율법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인 것임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율법 안에서 무자비한 저주의 힘이 작렬하게 됩니다.
㉰그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자비한 힘과 같이 작용하는 ’무한한 자비‘입니다.
이 두 가지를 다 겪으신 분이 바로 새언약의 주인공이 되십니다. 애굽에서 빠져나온 그들이 이제는 율법에서 빠져나옵니다. 죄인으로 드러난 채로 말입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5-16)
즉 예수님의 피만이 하나님을 만족하시고 하나님의 안식하시는 온전한 세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소유로 자신을 꾸미려고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2강-열왕기상 8장 56-61절(언약 속의 인물) 250319-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8장 56-61절입니다.
열왕기상 8:56-61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저가 무릇 허하신대로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빙자하여 무릇 허하신 그 선한 말씀이 하나도 이루지 않음이 없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함께 계시던것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옵고 우리를 떠나지 마옵시며 버리지 마옵시고 우리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여 그 모든 길로 행하게 하옵시며 우리 열조에게 명하신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시기를 원하오며 여호와의 앞에서 나의 간구한 이 말씀을 주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있게 하옵시고 또 주의 종의 일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일을 날마다 당하는대로 돌아보사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찌어다.”
솔로몬이 뭔가 단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것은 뭐냐? 자기 시대에 와서 이스라엘의 상황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온전하게 지켰을 때 주어지는 최상의 상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넉넉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다 우리에게 주셨기에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이 성취될 때 우리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넉넉함을 주셨고, 하나님쪽에서 얻은 것은 ‘안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데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족할 때는 안식(창 2:2)해요. 현재 하나님이 안식하는 상태인 것을 두고 솔로몬은 어떻게 그 근거를 댔느냐?
열왕기상 8장 61절에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하나님마음과 우리 마음이 하나가 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는 거지요. 이러한 넉넉함, 풍족함은 이미 모세 때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시면서 약속했던 것인데 그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 주어졌고 그것을 누리고 있다고 여깁니다. 솔로몬 왕은 그점에 대해서 장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기도는, 이런 상태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모든 복이 계명과 법도와 율례에 준해서 그 결과로 주어진 것이기에 이 율례와 계명과 법도를 계속 잘 지키게 되면, 곧 말씀을 주야로 지키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라고 인정을 받아서 오늘날의 이 상태가 지속될 것이다.’라는 것이 솔로몬의 기도에 담긴 내용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이러한 내용으로 기도할 때 모세에게 준 계명이 어떻게 자기 시대에서 실현태로, 실현된 상태로 현재 주어졌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열왕기상 8장 56절에 나옵니다.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저가 무릇 허하신대로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태평을 주셨다. 제가 아까 이야기한 대로 ‘안식’이지요. 솔로몬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있을 때 이스라엘이 요란스럽게 말썽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으로, 편치 못한 것으로 치자. 그런데 모든 전쟁이 마감되고 아무 사고도 없이 태평하다는 그 말은, 하나님이 지금 이 상태에 대해서 대단히 흡족해하고 만족해하고 안식의 마음을 백성들과 더불어 갖고 있다는 것으로 봐도 좋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과연 지금 솔로몬이 보는 대로 솔로몬 이후도 이스라엘 백성이 태평했느냐 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안식이 지속되었느냐?’ 그렇지 않았어요. 모세를 통해서 주었던 그 말씀이 현재 솔로몬 입장에서는 자기 대에서 완성이 되었다고 보는데 자기 시대를 지나고 난 뒤의 이스라엘 형편은 어떻게 되었는가?
과연 전쟁이 더는 없었을까요? 하나님이 늘 함께 하면서 만족해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잖아요. 지금 솔로몬이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요, ‘현재 풍족하게 누리고 있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최고경지에 이른 우리 마음 자세’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우리들 마음가짐, 이거 계속 유지하자.’ 그렇게 된 거예요.
왜? 모든 것이 넉넉하니까. 그런데 솔로몬이 메시아 아니지요? 솔로몬을 통해서 모든 말씀이 스톱이 된 것이 아니지요. 중지된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추가적인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주어지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뭐냐 하는 거예요.
솔로몬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만족하는 안식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왜 이렇게 성급하게 지금 이 상태가 최고 상태라고 생각하느냐? 솔로몬은 인간이 갖고 있는 풍족함과 넉넉함을 축복이라고 보고, 그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은 전에 모세에게 준 율법을 지켰을 때 주어지는 그 축복이 지금 자기 시대에 와서 완성을 봤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넉넉하게 잘 살고, 아무 전쟁도 없고 그러니 사람들은 싱글벙글하지요. 이런 상태가 되면, 이렇게 우리가 잘 살면 이것은 곧 뭐다? ‘우리 마음에 어떤 하자도 없고, 어떤 죄의식도 없고 죄짓는 것도 없다. 우리 맘이 지금 착하다.’라고 장담할 근거가 된다는 거예요. 뭔가 일이 잘 될 때는.
그런데 솔로몬이 모르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소유와 상관없이 우리 마음가짐에 직접 찾아든다는 거예요. 그런데 소유의 넉넉함이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복음 12장 15절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하고는 상관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 가정이 남 보란 듯이 연봉이 10억 넘고, 싱글벙글 화목하고, 아픈 사람도 없고요, 그래서 돈 많으니 나쁜 짓 할 일도 없잖아요. 그럴 때 예의상 ‘아, 이것이 하나님의 복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지요. 자기 맘이 흐뭇하겠지요.
그렇게 자기 맘이 흐뭇할 때 하나님의 복이라는 그 근거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를 본인이 돌아봐야 해요. 만약 그 소유가 없을 때도 내가 하나님만으로 족하다고 할 수 있는지를 봐야 해요. 이 일을 하나님은 욥을 통해서 이미 했습니다.
자식들 신앙생활 잘하고, 자기는 물론이고 자식들도 소유가 넉넉하고요, 몸 아픈 것도 없어요. 그 많은 재산 관리하면서도 피곤한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것들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갔습니다. 마귀가 장담에 장담을 했지요.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소유에서 오는 겁니다, 하나님!” 아예 마귀가 하나님에게 한 수 가르치려 든 거예요.
“욥은 그렇지 않다.” “아닙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욥도 네가 건드려 봐라.” “제가 건들겠습니다. 몸도 건강도 건드리겠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원망하는지, 안 하는지. 과연 욥의 마음이 만족하는 마음인지.” 그것이 욥기에 나오지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소유성에 의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는 그 취지가 방해받고 있어요. 만사가 형통하고 소유가 넉넉할 때는 자기가 지금 착하고, 마음가짐이 어질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무랄 것이 없어서 ‘에라, 복이나 받아라.’ 해서 복 주는 줄로 착각한다, 그 말이에요.
그런 경우는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일어나요. ‘오징어가 먹고 싶은데’ 그런데 우연히 오징어를 샀더니 이건 예상 밖으로 맛있어요. 그럴 때 어떤 생각이 들어갑니까? ‘역시 사람은 마음가짐이 착해야 해.’ 갑자기 내가 원하는 소유가 들어올 때 그것을 무엇과 연결하느냐 하면, ‘역시 인간은 한결같이 착하고 마음이 어질고 나쁜 짓을 안 해야 해. 그래야 이렇게 맛있는 오징어가 들어오는 거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소위 행운이라는 것이 왔을 때. ‘행운은 그냥은 없어. 행운은 착한 사람에게나 필연적인 거야.’ 이런 주장을 한다는 그 말이지요.
여기서 솔로몬왕 그 후의 사정이 어떻게 되었는가? 솔로몬은 모르고 우리는 알고 있어요. 이스라엘이 엉망진창이 되었지요. 엉망진창인데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잘 먹고 잘살았던 그때의 그것이 원래 자신들이 받아야 할 합당한 것인 줄로 오해하고 있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왕 시대에 낙을 누렸고 풍성함을 누렸던 그 소유가 인간성을 완전히 버려 놓은 거예요. 이스라엘을 망친 겁니다. ‘소유가 넉넉하기에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복을 받을 만하다.’라는 것이, 솔로몬왕 그 이후에는 특권층, 불과 2퍼센트밖에 안 되는 귀족층의 마음가짐이었어요.
“뭐가 문젠데? 하나님 잘 믿고 있는 거야.”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잘 믿는데?” “봐라, 우리 집 재산 많잖아.” ‘하나님을 잘 믿기 때문에, 내가 신앙이 좋기에 복을 주셔서 우리가 잘 산다’는 이것이 이스라엘의 특권층, 10퍼센트도, 5퍼센트도 안 되는 일부 계층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솔로몬왕 그 이후에 빈부격차가 확 벌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권력을 가진 자가 외부의 권력과 결탁이 되면 거기에 소위 모든 축복이라는 재물이 쏠리게 되어 있어요. 정보를 선점하는 상류층에 의해서 백성들은 소유를 획득할수 있는 기회마저 다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그 때 누가 등장하느냐? 바로 선지자가 등장하는 거예요. 자,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세율법의 취지가 과연 소유의 넉넉한 것으로서 ‘나는 지금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할 수 있는가를 따져봐야 하겠지요. 그 예가 민수기 16장에 나옵니다.
제가 민수기 16장의 예를 드는 것은, ‘모세의 율법과 계명과 율례를 위반했을 경우가 딱 이런 경우다’라는 사례가 민수기 16장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1-2절에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과 함께 일어나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모세를 거스리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모세를 거스린다. 자, 우리가 율법과 계명을 오해하는데 제일 크게 오해하는 것이요, ‘이 계명은 제가 지키도록 되어 있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를 수십 년 다니고, 모태신앙이고 유아세례도 받고, 조상 대대로 몇 대째 신앙의 가정이라도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이 ‘율법과 계명은 내가 지켜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고, 내가 그 계명을 위반했다. 회개해야지. 헌금을 더 해야지’ 혹은 ‘이것은 잘 지키고 있으니까, 내가 착하게 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살림살이를, 소유를 늘려주셨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율법과 계명의 위반이 어떤 경우를 이야기하느냐?
‘모세 너는 되고 왜 우리는 안 되는데?’ 이 내용이 율법과 계명에 함축된 내용입니다. ‘이 계명을 사적으로 내가 지키면 된다’가 아니라, 그래서 계명을 못 지킬때 그것이 위반이 아니라, 율법 자체가, 계명 자체가 특정 인물로 쏠리게 하는 것, 그것이 계명 안에 들어 있는 핵심이에요.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계명 안에 라인이 있어요. 여러분, 라인 알지요? 라인댄스 그런 것도 있잖아요. 계명 안에 라인이, 줄이 있어요. 계명 안에 어떤 줄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계명 안에 특정 인물의 줄기가 응집되고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명? 너나 나나 다 하나님의 계명을 같이 줬으니 그걸 잘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고 못 지키는 사람은 복 못 받는다’라는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율법에 내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이는 겁니다.
그것을 보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민수기 16장 1절에 나온 대로 고라, 다단, 온 이런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이 사람들 땅 갈라져서 다 죽었습니다(33). ‘모세를 왜 건드리느냐?’ 한 거예요. 그런데 고라 자손과 함께 당을 지은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민주주의적이지요. 그들의 말을 직접 들어봅시다.
민수기 16장 3절에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이 모세와 아론아, 이렇게 된 거예요.
뭐 어느 특정 계명 위반하고 그런 거 없죠? 고라자손은 레위 지파입니다. 말씀에 대해서는 남을 가르쳤기 때문에 도사에요. 그러니까 ‘너나 나나 똑같다.’라고 거예요. 너만 되고 나는 안 된다는 것을 계명과 율법과 윤리를 통해 못 찾아내겠다는 거예요. 그 못 찾아내는 게 율법에 대한 반란이에요. 하나님에 대한 반란입니다.
그러면 특정인, 모세죠, 모세 언약에서 모세 외에 다른 사람의 특징은 뭐냐? ‘모세가 가져온 그 율법에 대해서 다른 사람은 지킬 수 없다’가 되어야 해요. 지켜서 모세와 맞먹으려고 하지 말고 못 지키는 존재로서 모세 주위에 배치되어 있어요.
왜 모세만이냐? 왜 하나님께서 모세만이라고 하느냐, 이 말입니다. 창세기 12장,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그 많은 인간 가운데서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사 특정 인물에 준해서 축복과 저주, 복이 오고 복이 안 오고 하는 일을 일어나게 하는가?
이삭도 마찬가지고요. 이삭을 통해서 거짓말한 야곱한테는 복을 주고, 거짓말하지 않은 형한테는 저주가 주어지는 이런 불공평한 일이 왜 일어나는가? 그건 이삭 마음대로죠. 이삭이라는 특정 인물, 아브라함이라는 특정 인물, 야곱이라는 특정 인물, 그 인물들이 특정 인물이 되어야 할 이유를 모든 인간들은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근원적으로 말씀을 어떻게 지키든 이미 죄인입니다.
왜 그런 상태냐? 그걸 미리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의 언약은 두 겹으로 된 붕어빵이에요. 붕어빵 안쪽에는 무자비한 힘이 들어있어요. 그리고 붕어빵 껍데기는 무한한 자비가 있어요. 이렇게 겹이 두 겹으로 되어 있어요. 안에는 앙꼬가 들어 있고, 밖에는 밀가루 탄 거 있잖아요. 그렇게 붕어빵처럼 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뭘 먹으려고 하느냐 하면 ‘말씀 지키면 복 받는다.’ 해서 그냥 붕어빵 껍데기부터 도전해요. 자기가 붕어빵을 먹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언약의 인물들 모세 같은 경우 또는 다윗 같은 인물, 그리고 새언약의 예수님의 인물들에게는 하나님의 무자비한 저주와 심판을 체험토록 하셨습니다. 욥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 왜 이유도 없이 저에게 이렇게 고난을 주십니까?” “네가 택한 자거든.” 그런데 택하지 않은 인간들은 그걸 몰라요. 인간에게는 ‘말씀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킬 경우에만 저주받는다’라는 이게 해당 사항이 안 됩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 쪽에서 아무리 거룩한 말씀, 고결한 말씀, 숭고한 말씀을 줘도 인간들은 배짱이에요. “내가 안 들었다~!” 하면 끝나는 거죠. 전도하면서 “이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면 전도 받는 사람의 처리는 아주 깔끔해요. “하나님이 없다면 당신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구라죠? 거짓말이죠? 우리 헤어집시다.”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도 없어지는 거예요. 말씀도 없어진다면 굳이 그 없는 하나님의, 근본도 모르는 이런 잔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택한 자 빼놓고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 깊이 들어있는 심성입니다.
하나님이라는 것은 내가 필요로 할 때만 ‘한번 믿어볼까?’ 이런 것이지, 나라는 존재보다 먼저 하나님의 존재가 계셔버리면 내가 어떻게 꾸겨지고 망가져도 나는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왜? 나는 후차적 존재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게 싫은 거예요. 인간 속의 악마가 그게 싫은 거예요. 그래서 달리하면 인간들은 그게 싫은 거예요.
인간에게는 내가 소중한 거예요. ‘하나님만 기쁘면 나는 어떻게 되든 관계없다.’ 이게 싫은 거예요. 이유도 없이 싫어요. 따라서 교회 나와서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믿습니다.’ 하고 말씀 지켜보다가, 주일 날 교회 나오고, 십일조도 하고 ‘선교하겠습니다’ 해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 한 60년 다녀보지만 나올 때마다 늘 갈등이 생기는 것은 뭐냐? ‘하나님이 없다면 내가 교회 나오는 이 짓도 안 해도 되잖아. 내가 왜 쓰잘데기 없는 일을 하느냐?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넉넉한 소유잖아.’ 내 건강과 내 소유다, 이 말이죠.
새해 1월 1일, 또는 정월 대보름날 방송사들이 정동진 가서 해 뜨는 거 찍으면서 리포터가 인터뷰하잖아요. “MBC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무슨 소원을 빌었습니까?” “그야 올 한 해도 우리 가정 화목하고 무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나라에 대해서는요?” “그냥 경제가 좋았으면 합니다.”
이런 걸 주로 이야기하지 “하나님이 계신다면 나는 어떻게 망가져도 상관없어요.” 그러면 MBC에서 인터뷰 끊어버립니다. 편집 처리해 버려요. 내 존재가 우선이지, 내 존재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지, “하나님만 있으면 내 존재가 어떻게 박살 나도 나는 기쁘고 즐거워요.” 이런 인간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율법 줬잖아요. 율법 줬는데 그 내용이 뭐냐? 지키면 복을 받고 못 지키면 저주받는다고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걸 지키려고 한 거예요. 율법을 지키려고 했는데 그걸 지키는 이유가 뭐냐?
율법 지키면 내가 좋은 거예요. 그런데 고라 자손이 하는 말 잘 들어보세요. “너는 되는데 왜 나는 안 되는데?” 이게 기분 나쁜 거예요. 왜 사람 가지고 장난치느냔 말이죠.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이 애굽에서 나왔잖아. 그런데 너는 되고 우리는 왜 안 되는데?”
이거 인간이 평생토록 연구해도 풀리지 않는 난제입니다. 그 난제가 우리 안에 암세포같이 들어있고 나이 들수록 이게 점점 커집니다. 어린 애들도 물론이고요. 점점 암세포가 커집니다. 엄마가 “만화영화 보여줄게. 김치 하나만 먹어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애가 논리적이진 않지만 이야기하죠. “김치 안 먹고 만화영화 보고 싶어요.” ‘김치 먹는 나는 되고 김치 안 먹는 나는 왜 안 되는데?’ 이렇게 논리적이진 않지만 속마음은 이래요. ‘내가 먹기 싫다는데 왜?’ 이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하나님이 있다.’ 보다도 ‘내가 여기 있다.’를 궁극적으로 믿습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모세와 함께 있는 거예요. 얻을 걸 얻겠다고.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매트릭스>(The Matrix, 1999)라는 영화에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요. ‘네오’라는 주인공에게 ‘모피어스’가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함께 내밀어요. “파란약 먹으면 너는 너무나도 행복하고 빛나고 아름다운 이 세계에 그냥 있을 것이고, 만약에 빨간약을 먹으면, 해가 빛나고 산천초목이 있고 이 천국 같은 아름다운 세상이 하나의 조작된 세트장, 영화 세트장 같은 가상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진짜 세계는 기계가 만든 세계가 아니라 인류가 종말을 맞이한 어둡고 침침하고 처참한 환경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파란약 먹고 그냥 행복하게 살래, 빨간약 먹고 현실로 돌아올래? 시뮬레이션의 가상 세계 말고 현실로 돌아올래?”
이렇게 할 때 그 주인공 ‘네오’라는 사람이 네오(NEO), NEW, 예수님이죠, ‘네오’가 빨간약을 먹어요.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가 애굽에서 노예지만 그것이 현실의 전부라고 여겼던 거기서 살래, 네가 율법 먹고…” 빨간약이죠, “…율법 먹고 율법의 세계, 말씀의 세계, 진짜 세계로 갈래? 어느 쪽 할래?”라고 한 적이 없어요.
왜? 강제로, 강제로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어요. 모세 따라서 강제로 나왔어요. 왜 강제냐? 애굽 당국자가 히브리인들을 못살게 굴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가 없게 만들어서 나왔어요. 그걸 누가 아느냐? 이 고라 자손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알아요.
“애굽에 있을 때 새하늘과 새땅, 그 약속의 땅을 향하여 우리는 나왔다.” 나왔는데 문제는 뭐냐? “모세 너는 되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데?” 이 문제가 풀리질 않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빨간약 먹고 나왔던 그 현실이 또 하나의 세상 현실의 일부라는 사실, 또 갇힌 시뮬레이션, 가상 세계라면 어떡할래요?
‘애굽이라는 것은 엉터리다. 애굽에서 나와서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 세계가 진짜 세계다.’ 하고 율법을 먹었는데 율법 먹고 난 뒤에 ‘율법 세계 그것도 진짜 세계가 아니고 가짜’라면 그때는 누가 책임집니까? 목사가 책임질 거예요? 지금 십 초 지났습니다. 이거 심각한 문제예요.
세상에 있다가 교회로 나오면 천국에 간다고 했는데 천국이라는 이것이 가상, 조작된 세계라면 그거 책임 누가 질 거예요? ‘야, 말씀 세계, 복음의 세계가 다다.’ 그 복음이 또 하나의, 이 세상에서 만들어낸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조작된 세계라면 그 사달을 누가 어떻게 처리하려고요?
“뭘 이야기하시고 싶은 겁니까?” 하나님의 절차는, 애굽에서 나오면 율법안에 집어넣어요. 그다음에 그 율법안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복음의 세계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안에서 ‘모든 인간은 안 되고 율법이 지향하는 단 한 분만은 된다.’를 기존의 율법안의 인간들이 깨닫지를 못했던 거예요. 모세를 깨닫지 못했듯이 깨닫지를 못한 거예요.
솔로몬이 그걸 깨닫지를 못한 거예요. 솔로몬은 풍족해요. 이게 하나님의 안식인 줄 아는 거예요. 지금 태평하니까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모르는 것이 뭐냐? 아버지 다윗을 통해서 다윗의 자손이 나와야 비로소 율법에서조차도 벗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은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애굽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 궁극적인 죄인의 모습이 뭔가를 율법안에서 발견케 해주시는 거예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죄가 없어요. 하나님이 없으면 자기밖에 없는데 자기가 모든 걸 결정하면 옳은 결정이지 뭐가 죄겠어요? 판단도 내가 하는데.
율법이 없으면 죄가 없어요. 따라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준 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롬 3:10)다는 거예요.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모세율법에 의하면 몽땅 다 무자비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자로 알려주기 위해 율법을 준 겁니다. 그들이 마땅히 율법의 위반자라는 걸로 준 거예요. 그 위반의 절정의 지점이 뭐냐? “모세 너는 되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데?”라는 의문점이 우리 내부에서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율법을 줬다’라고 했죠? 그러면 율법 받아 놓고는 이제 죄인이잖아요. 그 죄인에서 율법 자체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은 어떤 식으로 빠져나오는가? 그건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솔로몬 시대에서는 다윗의 언약이 솔로몬보다 앞섭니다.
아까 모세 언약에서 “모세 너는 되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데?”라고 나오죠. 그러면 다윗 언약도 마찬가지예요. “다윗 네 가문은 되는데 왜 우리 가문은 안 되는데?” 똑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이것을 쉽게 말씀드리기 위해서 한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딸 둘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선천적인 병 때문에 장님이 되었어요. 그 딸이 눈은 안 보이는데 이상하게 음감이 굉장히 발달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 딸을 피아니스트로 만들기 위해 어릴 때부터 강한 훈련과 교육을 시킵니다.
그런데 눈이 멀쩡한 동생과 함께 교육 시키는 데 수건으로 눈을 가려서 보이지 않는 상태로 피아노를 치게 해요. 장님인 언니가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두 자매가 똑같이 눈이 보이지 않는 입장에서 경쟁적으로 연습을 시킨 거예요. 눈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음감이 더 발달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런 식으로 훈련을 시킨 거예요. 사무엘상 16장 14-16절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을 번뇌케 하온즉 원컨대 우리 주는 주의 앞에 모시는 신하에게 명하여 수금 잘 탈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수금은 목재로 만든 현악기인데 줄이 여덟 개에서 열 개쯤 악기에요. 다른 사람이 하는 악기는 소용없어요. 다윗이 수금을 치니까 악신이 떠나요. 23절에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다윗은 되고 다른 사람은 안 되는 거예요. 왜냐? 다윗은 눈을 감고 장님인 채로 피아노를 치도록 특별하게 훈련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자신의 몸은 망가졌는데 다윗의 음률은 나와요. 그 음률이 뭐냐? 하나님에 대한 유일한 찬송이 되고, 그 찬송을 받으신 하나님은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시편 150편 1-4절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찌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찌어다.”
조건이 있어요.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 때의 그 조건은 뭐냐? 율법과 율례와 계명을 짜내면 거기서 한 인물이 나오는 조건이에요. 다윗 언약을 짜면 다윗의 후손이 나옵니다. 우리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계명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느냐? 사적인 원칙 말고, 집단적 단위, 국가 단위의 거룩과 의를 성립하고 요구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국가 단위라고 하는 것은 뭐냐? 국가의 책임자가 등장해야 해요. 그 책임자가 바로 다윗인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사야 11장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1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이새’가 누구냐? 이씨 집안과 관계없습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예요.
하나의 줄기가 나오는 거예요. 이새의 줄기는 모세 언약과 관계없어요. 그런데 모세 언약과 관계없는, 이새 그 사람은 모세 라인이 아니에요, 모세 라인 말고 모세 라인 바깥의 다른 줄기가 개입되면서 주인공이 모세에서 뭐로 바뀌는가? 다윗에서 바뀔 때예요.
거기서 하나님의 신이 나옵니다. 이사야 11장 2절에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이렇게 나오는데 그렇게 나온 결과가 얼마나 완벽한 세상인지 6절에 보면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가장 이상적인, 전혀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안식,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세상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데요, 인간은 자기 개인적인 소유가 하나의 복 받은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그게 아니에요. 소유가 방해해요. 하나님 생명의 천국을 이 소유가 방해해요.
소유 말고 직격탄으로 모세율법과 다윗 언약이 오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모세 계명에 의해서 날 때부터 극단적인 죄인 그 자체인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 자체가 뭐냐? “예수님은 되는데 왜 우리는 안 됩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거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에베소서 2장 14절, 15절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절에 보면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율법과 계명을 짜버리니까 거기서 예수님의 피가 나오는 거예요. 독특한 그 분의 피가 나와요. 다른 피는 안 돼요. 뭐 A형, RH 마이너스,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예수님의 피가 나오는 거예요. 그 피가 하나님의 안식을 만족시켜서 하나님은 영원한 안식의 나라 천국을 그런 식으로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우리가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복 받기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왜 예수님만 되고 우리는 아니 되는가’를 통해서 우리가 궁극적인 죄인인 것을 발견하고, 이러한 모든 화평과 천국행이 예수님의 피 때문에 발생된 결과인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