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율법의 이중성

아빠와 함께 2025. 4. 2. 22:14

율법의 이중성

2025년 4월 2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9:6-9

(9: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9: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9:8)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쪽에서 먼저 솔로몬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성전에서 행한 솔로몬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라는 것이 솔로몬이 은근히 요구한 대로 수용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솔로몬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시키는 방법으로 받아주시는 겁니다. 이는 솔로몬이 기대하는 것보다 솔로몬이 거부할 만한 내용까지 추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 추가적 내용이 곧 ’조건‘을 거시는 방식입니다. ’솔로몬이 원하는 것+ 하나님의 조건‘입니다. 이 ’조건‘이 담긴 취지가 뭘까요?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과 상대하면서 조건이 추가시킴으로 말미암아 ’기도한 자의 응답‘이 아니라 ’기도 받아주시는 분의 응답‘으로 바꾸시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기도라도 하나님의 자신이 기도로 전환하시는 방식입니다.

그 예가 출애굽기 32:30-34에 보면,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세는 애써 백성의 마음을 대신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자 되고자 중간에 나서보지만 끝내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용서를 용서할 마음이 없습니다. 심지어 모세는 생명책이 기록된 자기의 아름까지 포기할 의사가 있다는 식으로 비장하게 나오지만 하나님의 뜻은 단호하십니다.

이는 인간에게 용서받을 권리나 요구할 입장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인간은 죄와 더불어 저주받을 대상임을 분명히 할 필요 있습니다. 비록 인간들이 이점에 불편하겠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계속 죄가 드러날 경우에 해당되는 자들을 제외시키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이끄십니다. 

여기에는 율법에 대한 더 심도있는 이해가 이스라엘에게 찾아든 상황을 통해서 명확히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분명 창세기 17:11-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즉 육신의 할례만 있으면 자동적으로 구원될 자처럼 이해될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에서 육체에 새겨지는 할례말고 또 다른 할례를 겨냥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이 마음에 대한 할례는 그 뒤 선지자를 통해서 계속 강조됩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4) 그렇다면 과연 마음의 할례가 되어 있는지 모르는지 어떻게 알까요?

예레미야 6:10에 보면,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의식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의식을 죽은 의식으로 규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계시의 능력이 찾아든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아무리 말씀을 주고 율법을 주더라도 인간은 본질상 달라지지 않습니다. 잔소리도 안 통해서 체벌한다고 해서 마음 바뀌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7:36에는 제대로 마음 할례받은 자가 그렇지 않는 자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할례 받은 자나 못받은 자나 다 망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렘 9:25)
결국 율법이란 인간에게는 용서할 만한 요소와 구원되거나 영생얻을 그 어떤 조건이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스라엘 역사 중간에 끼어든 겁니다.(갈 3:17) 그렇다면 누구에게 주어지는 겁니까? 하나님의 아들에게 구원이 주어집니다. 다윗에게 전한 언약이 바로 이 언약입니다.(삼하 7:14)

즉 하나님의 그 아들이 아니면 영생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 속에는 육신의 족보를 지우고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됨으로 현실을 이끌고 조성해 나시기는 겁니다. 그 예가 바로 출애굽기 11:5에 보면,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유월절 양‘이 장자로 들어서면서 하나님과 아버지 관계가 됩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출 4:22-23)

이 아들됨을 위해 ’마음 할례‘가 되어야 합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탕후루라는 중국식 간식이 있습니다. 생과일에 설탕으로 코팅해서 먹는 겁니다. 율법을 통해서 인간의 의식이 실은 죽은 의식임을 알리고 그것을 소재로 주님의 유월절 생명(피)로서 코팅하면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아브라함 언약+ 율법= - 율법+다윗 언약=새언약‘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구원을 위해 하나님에게 용서 받아내는 현실 이해가 얼마나 기만적인 일인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4강-열왕기상 9장 6-9절(율법의 이중성) 250402-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9장 6-9절입니다.

열왕기상 9:6-9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 전이 높을찌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 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열왕기상 9장 3절에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그래서 ‘성전에서 내가 너와 만날 것’인데 거기에 어떤 조건을 붙입니다. 어떤 조건인가?

열왕기상 9장 4-5절에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응답은 하나님 자신이 기도한 그 응답이라는 사실이에요.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그 응답을 하나님이 내림으로서, 모든 시작과 과정과 끝이 하나님 안에서만 완성되고 완료되도록 하나님은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솔로몬이 기도를 했고, 그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응답하셨는데 기도의 내용과 그 응답의 내용이 달라요. 더 확장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세요.” 솔로몬이 기도했지요. 기도했는데 그 기도의 내용은 안 망한다는 조건 하의 기도에요. 이스라엘이 안 망한다는 조건.

그런데 응답은 뭐냐? 망한다는 조건이 딱 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높은 성전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이렇게 납작하게 되었는가?’ 할 정도로 되게 만들겠다”라는 겁니다. 그러니 기도한다고 해서 그 응답을 내 응답으로 수용하거나 내 소유화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는 하게 하시되 응답은 하나님 뜻에 의해 스스로 응답하기 때문에 내 기도 응답이라고 내가 챙기지 말고, ‘네가 기도함으로써 주님의 응답 속에 네가 포함된 것을 기뻐하라’라는 말입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까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라는 것을 솔로몬이 기도함으로써 파악하게 되지요.

우리가 기도한다고 따로 내 것이 생겨난다는 그런 것은 하나님에게는 있을 수 없다. 기도해서 뭘 챙기고, 내 것이 되는 이런 경우는 없다, 그 말입니다. 기도 함으로써, 우리가 뭐가 부족하고, 뭐가 누락되어 있고, 기도하는 그 마음 자세에서 ‘기도하는 나는 어떻게 하면 안 망할까?’ 하는 그 꼼수가 기도하면서 들통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했잖아요. 주께서 봐주세요.” 이런 것은 하나님 앞에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이 일치되는 대목이 그겁니다. ‘네 아비 다윗’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걸 ‘다윗언약’이라 하는데 하나님께서 솔로몬으로 성전을 짓게 하시고, 다윗이 앉았던, 하나님이 다윗에게 허락했던 왕 자리에 솔로몬을 앉혀서 솔로몬으로 그 성전에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 있음과 그 성전에서 한 기도 내용은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되는데, 그게 공통점이에요. 그렇게 부합되는데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위와 그리고 성전의 설립, 그 존재를 근거로 솔로몬 네가 모르는 다른 것까지 알려줄게. 너희는 결국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성전은 망한다.”라는 그런 새로운 내용이 추가 되는 겁니다.

물론 조건부로 되어 있지요.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안 지키면…”이라는 말조차도 안 했으면, 굳이 그런 말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기를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구원해 주실 거지요?”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느냐? “그래. 그 점은 내 생각과 같구나. 믿으면 구원받는 것은 맞는데 예수님을 제대로 안 믿으면 지옥 간다.”

굳이 “제대로 안 믿으면 지옥 간다.”라는 그 말씀을 안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이 계속해서 이런 식이에요. 왜 인간이 제시하는 것과 하나님이 응답하는 것이 서로 범위가 달라져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인간으로서는 구원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은 구원될 자격이 없습니다.

이걸 인간 쪽에서 인정을 안 해요. 인간은 천국 갈 권한이 없습니다. 이걸 인간 쪽에서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천국을 만들기로 하시고 천국의 백성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이나 생각이 같아요. 그런데 그 백성에 내가 필히 끼어든다는 그 생각은 하나님에게는 없습니다.

그런 조로 나온 것이 ‘다윗의 자리’에요. 시편 89편 3-4절을 통해서 일단 말씀드리겠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셀라)”

내 종 다윗에게 그렇게 맹세하신 거예요. 그리고 시편 89편 26-28절에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저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진짜 머리가 총명한 사람은 어떤 낌새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은 다윗 자손이어야 하는데 그 다윗 자손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에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면 육신이 있는 인간의 아버지가 누구냐? 인간의 육신의 아버지는 인간이지요. 하나님이 아니지요. 그래서 육신의 아버지를 갖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 바꾸는 그 작업이 사무엘하 7장 13-14절에 나옵니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거예요. 일방적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그 아들을 하나님이 다윗 언약을 통해서 낳겠다, 생산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하에서만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수 있고, 그 성전은 하나님과 아들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이제부터 복잡해져요. 어떤 점에서 복잡한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다는 그 낌새, 징후, 징조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은 이스마엘 외에는 자식이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자식이 없는데 “네 자손…”라고 해요. 자손이 없어도 자식을 못 낳아요. 어떻게 아느냐? 부인이 아기를 못 낳아요. 불임여성입니다.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전무합니다, 없습니다. 육적으로 모든 능력은 이미 다 소실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만큼 많을 것이다”(창 15:5).

그리고 약속에 의해서 이삭을 줘버립니다. 이삭을 주게 되면 이삭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약속의 자식으로 인해서 약속된 아버지가 되어버려요. 그 아버지의 역할이 뭐냐? 그 자식을 죽이는 거예요. 졸지에 아브라함은 하나님 역할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식을 죽이고, 그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나는 그 아들만이 천국 백성으로 삼는 유일한 아들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육신에서 나오는 모든 지혜와 지식은 다 소용없지요. 다 소용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모세 율법과 계명을 지켰으니 너희도 지키라’라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듭니까? ‘지킬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런 느낌이 들지요. 지킬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자, 여기서 하나님은 그걸 모르실까요? 알아요. 하나님이 율례와 법도를 백날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다는 거예요. 말로 한다고 인간성 달라지지 않습니다. 매 때린다고 사람 되던가요? 옛날에는 부모가 자식 때렸어요. 나무란다고 사람이 되던가요? 때려도 안 돼, 말로 해도 안 돼. 인간의 특징은 어떻게 해도 그 본질이 안 바뀐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 지옥 같은 삶을 삽니다. 지옥 같은 삶을 살아요. 그래서 소망이 뭐냐? ‘칵! 죽어버리겠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칵!’이 들어가요.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버리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인 지옥입니다. 이것은 살아도 지옥, 죽으면 제대로 지옥.

하나님께서 말씀을 줬는데 그게 왜 안 먹히느냐? 자기의식이 살아 있으니까 말씀이 안 먹히는 거예요, 자기의식이 살아있으니까! 말씀이 먹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말씀이 우리 의식을 죽여버려야 합니다.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는 계시는 계시가 아닙니다. 무능력한 계시지요. 능력 있는 계시는 나를 죽여버립니다. 나의 의식을 죽여버려요.

이런 일은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의 모습과 같습니다. 화가는 현실을 그리지 않습니다. 화가는 자기의 붓과 캔버스를 가지고 객관적 현실을 지워버리고, 주관적인 예술적 혼으로 캔버스를 채우지요. 현실을 그대로 담으려면 사진 찍으면 그만이지요.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고 그림을 그린다는 말은 이런 겁니다.

‘당신들이 보는 현실과 화가인 내가 보는 현실은 이토록 다릅니다. 다른 현실을 구경해 보실래요?’라고 하는 이것이 예술성이 있는 그림의 가치고 특징이에요. 어떤 만화가는 말하기를 AI가 그린 그림을 보고 역겹다고 했어요. 그야말로 추잡하다는 뜻이지요. 그게 그렇게 아름다워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보고 있는 현실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 현실 속에 있는 나를 보는 것, 나를 볼 때 나의 의식을 가지고, 현실을 볼 때 나의 의식을 가지는 것, 하나님은 그걸 이미 죽었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보는 이 현실을 뭐로 바꿔버리느냐 하면, 말씀의 현실로 바꿔치기합니다. 하나님은 주관적인 예술가예요.

인간은 말로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때리면 되겠지.’ 때리고 멸망시킨다고 인간 되지를 않아요. 백성 되지를 않습니다. 말씀으로 나오지를 않아요. 그에 대한 고민과 갈등, 그것이 출애굽기 32장 30-35절에 모세와 하나님의 갈등으로 나옵니다.

모세가 기도하지요. 여기서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인간이 드린 기도에 응답하되 인간이 모르는 것까지 채워져서 응답이 주어진다는 사실, 그렇게 해서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았다.’라는 소리를 일체 못하게 만드는 그것이 하나님이 방법입니다.

산 아래 있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애굽의 신을 만들었다는 말이지요. 출애굽기 32장 30절에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모세는 “너희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 줄 수도 있지 않겠느냐? 내가 기도할게.” 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32장 31절에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다른 백성이 한 그 행동을 모세가 대변하면서 마치 자기가 죄를 지은 것처럼 사죄를 먼저 합니다. 그리고 32절에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이 말은 “하나님이여, 저 모세를 구원하셨잖아요. 구원받은 내 이름 포기할 테니 그 대신 백성들의 죄는 용서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응답이 어쩌면 성경 전체의 난제, 제일 어려운 문제의 해답일 수가 있어요. 저는 그렇게 보는데요.

지금 모세 쪽에서 요청한 것은 뭐냐 하면, ‘나를 담보로 해서 나를 제거하든지 하시고 백성은 용서해달라’라고 하면서 모세가 은근히 기대한 것은 이겁니다. “그래. 네가 그 정도로 나오니 그걸 봐서 내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줄게.”

그런데 출애굽기 32장 33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라고 되어 있고 여기서 어렵지요. 모세는 죄를 안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 너 빼놓고 다 지워버린다’라고 하지 않아요.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세 너 빼놓고 지울게”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게 어려워요. 출애굽기 32장 34절에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천사)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보응(報應)이라는 것은 죄의 용서를 말하는 게 아니고 반대입니다. ‘내가 너를 심판하는 날에 반드시 그 죄를 심판하리라.’ 그래서 때가 되면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의 만든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출 32:35).

여기서 응답은 뭐냐? “죄를 지은 주제에는 처벌만 있을 뿐이다.” 이게 응답이에요. ‘죄를 지었으면 처벌만 있을 뿐이다.’ 용서는 없습니다. 괜히 십자가 들먹여서 ‘회개하면 십자가 피로 용서해 준다.’라는 그런 환상은 갖지 말아야 해요. 우리는 원천적으로 죄 용서받을 권한도 자격도 없고 기대할 자격도 없어요.

민수기 21장을 보면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죠. 원망하니까 불 뱀을 보냈죠. 민수기 21장 8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라고 했어요. 여기서 산다는 것이 용서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한시적으로 살려주는 거예요.

자, 이것이 엄청나게 어려운 이야기인데, 어려운 이야기니까 어렵게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쉽게’가 안 돼요. 아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아버지 나라에,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지상에 아들을 만드는 작업은 죄지은 자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아들이 생겨요.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요, 때린다고 달라지지 않으니까 결국 모든 인간은 아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언약, 아브라함한테 그런 일이 있었잖아요. 아브라함과 이삭, 그 아브라함 언약, 그다음에 어디로 가느냐 하면 다윗언약으로 가요.

다윗언약으로 가는 데 그 중간에 율법이 놓여 있어요. 이런 게 어려운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8-9절에서 분명히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했단 말이죠. 육신은 안 돼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율법은 약속과 약속 사이, 그 중간에 끼어드는 것이지 율법보다 먼저 준 약속을 취소하기 위함이 아니란 말이죠. 하나님의 뜻을 더 뚜렷하게 만들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율법이 들어가서 약속을 취소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 율법안에 어떤 내용이 있느냐 하면, ‘죄지은 인간은 어떻게 해도 용서되지 못한다.’가 들어갑니다.

여러분, 이 내용을 한 번 조합해 보세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요. 아이큐가 200이라도 잘 안될걸요? 그 구성에 대해서 힌트 같은 것이 나와 있거든요? 그 힌트를 제가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7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2-13절에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누구든지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게 영원한 언약이다.’라고 했지요. 창세기 17장 14절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할례는 할례 언약입니다. 율법이에요. 아브라함에게 준 율례와 규례입니다. 그런데 할례 행하라고 해놓고는 예레미야 9장 2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날이 이르면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라고 해서 할례를 행한 자나 행하지 않은 자나 다 망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신명기 30장 6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육체적 할례를 행하라고 해놓고는 그다음에 그 할례를 두 종류로 분리시켜요. ‘육체의 할례’와 ‘마음의 할례’가 있는데 ‘육체의 할례’는 백날 해 봐야 소용없고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건 여러분이 많이 들었던 로마서 2장 28-29절이에요.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할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할례인지 육신의 할례인지 그걸 무슨 수로 아는가? 예레미야 4장 4절에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내가 마음의 할례를 행했는지, 육체의 할례만 행했는지 그걸 어떻게 내가 구분하느냐? 구분하는 방법은 예레미야 6장 10절에 나옵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말씀에 담긴 진짜 뜻을 못 알아보면 육신의 할례를 백날 행해도 소용이 없고, 마음의 할례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들통나게 만든다는 거예요.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통나게 만드는 말씀을 추가적으로 계속 줘요.

그렇게 해서 아까 본 예레미야 9장 25절에 보면 ‘할례받지 못한 자나 할례받은 자나 다 멸한다’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다 멸한다는 뜻이에요. 어느 누구도 마음의 할례받은 자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육체의 할례는 받죠. 그거 뭐 수술하면 되니까.

그런데 마음의 할례는 계속해서 안 된다, 안 된다…, 쪽으로 이스라엘 역사가 나아가고 있는 거예요. 모세가 이야기해도 원망하고, 갈수록 뭐가 확실해지느냐 하면, 인간은 백날 회개해도 용서받지 못할 성깔이 그 안에 들어박혀서 회개 자체가 안 되고 반성도 안 될뿐더러 본인도 본인의 마음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식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계속해서 진척해 나가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율법의 기능이 기능대로 작동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말한 것처럼 여기에 율법과 상관없이 아들이 되어버리는 사태가 일어나죠. 사무엘하 7장 14절 “다윗 언약에 입각해서 내가 아버지 될게.”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 근거는 출애굽기 4장 22-23절 보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벌써 출애굽의 모세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아들로 단정 지었습니다. 아들로 단정 짓고 난 뒤에 그다음에 모세를 죽이려고 하죠. 모세 아들이 할례를 안 했다고 모세가 숙소에서 죽습니다. 죽으니까 아내 십보라가 얼른 가서 아들 할례를 행해서 아들이 산 게 아니고 아버지 모세가 살아요.

왜냐하면 모세와 아들 사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기 때문에요. 여기에 어떤 낌새가 있어요. 지금 애굽에 내려가서 백성을 구원할 때 구원하는 방식에 대해서 먼저 모세 가정에 그 방식을 하나님께서 주입시켜 놨습니다.

그게 출애굽기 11장 5절에 나옵니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큰 곡성, 전라남도 그 곡성 아니죠. 애통하는 겁니다. 장자를 다 죽이는 거예요. 왜 죽이냐? 육신에서 난 장자기 때문에.

육신에서 난 장자에 육신적인 할례를 행하라는 말은, 율법이 들러붙었다는 뜻인데 율법이 들러붙었다는 자체가 뭐냐? 율법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라, 이미 죽은 자라는 거예요. 죽은 자가 무슨 수로 들러붙어 있는 율법을 지킵니까, 죽었는데! 율법은 아브라함 언약의 의미를 산출하기 위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왜 인간은 안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중간에 끼어든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율법의 뜻은 이렇습니다. 널 죽인다는 겁니다. ‘정녕 죽으리라.’ 그걸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거예요. 너 죽었다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주님의 공무집행’이라고 봅니다, 인간을 죽이고 장자만 살리는 집행.

며칠 전에 새벽에 운동하고 내려오면서 길을 가는데 뭔가 드라마에서 많이 봤던 끈이 있어요. 가만히 보니까 폴리스 라인, 큰 컨테이너 차에서 길옆의 나무 걸쳐서 노란색 줄이 쳐져 있다는 말이죠. 밑에는 ‘공무집행’이라고 되어 있어요.

폴리스 라인, 공무집행의 특징이 뭐냐? 내가 조사하겠다는 뜻이에요. 수사하겠다는 뜻입니다. 낱낱이 수사하는 방법은 율법으로, 하나님의 공무집행입니다. “마음의 할례 행했어? 안 했어? 저주, 지옥에나 가라.” 간단한 문제에요.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출애굽기 11장 5절에서 장자 다 죽입니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공무집행이죠. 다 죽이는데 누구 집의 장자는 안 죽이는가? 할례를 행한 장자는 안 죽여요.

그게 출애굽기 34장 20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찌며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찌니라.” 집안에 태어난 장자는 다 대속해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 율법을 계속 끌고 가는 이유는 율법안에 유월절 사건을 반복해서 그걸 실어 나르는 거예요, 하나님의 공무집행을. “육신으로 태어났어? 죽어라, 인간아.” ‘육신으로 태어난 것은 다 죽이고, 대속한 유월절의 양을 우리 집안의 새로운 장자로 여기는 집안은 살리라.’ 이것이 율법 안에 든 이중성이에요.

‘죽인다. 살린다.’ 그러면 율법의 종착점은 결국 어디냐? 여러분이 다 아시죠. 다윗이 성전 지을 때 뭘 모시려고 성전 지었습니까? 언약궤 모시려고 성전 지었죠. 출애굽기 40장에서 모세와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나는 것도 있지만, 땅에서 만나는 경우도 있어요.

땅에서 만났던 것은 언약궤가 성막 안에 안치될 때 그때 단독으로 하나님이 모세를 만났어요, 그 안에 언약궤가 있기 때문에. 그 언약궤가 안치된 곳이 바로 다윗이 구상한 성전이었고 그 성전을 누가 지었는가? 솔로몬이 지었거든요. 솔로몬이 그 언약궤 안치하고 성전 지어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나타난 것은 “내 아들만 살리라.” 내가 만든 아들만 산다는 거예요. ‘다윗처럼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내 아들이 될 수 없다.’

율법이 뭐냐? 아브라함 언약에서 율법은 할례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아까 마음의 할례를 이야기했죠? 그 마음의 할례를 하면 되죠. 그런데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자기 마음에 할례를 못 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율법의 이중성에서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 분이 나오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무엘상을 한번 생각해 봐야 해요. 사무엘상 17장이 다윗이 골리앗하고 싸우는 대목이거든요. 골리앗과 싸우면서 다윗이 뭐라고 했느냐? 이스라엘은 사울 왕부터 다 육신의 할례를 행했잖아요. 육신의 할례를 갖고 있는 자의 그 무능력성, 육신의 할례의 그 한계성을 골리앗을 보내서 파악하게 해주는 겁니다.

그때 소년 다윗은 어른들보고 “아, 이번 전쟁은 볼 것도 없는데 할례가 없는 인간을 왜 가만두고 봅니까? 이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이지 우리 싸움이 아닙니다. 내가 나갈게요.” 이렇게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마음의 할례를 행했다는 말은 ‘이건 내 싸움이 아니고, 내 인생이 아니고, 내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을 나를 통해서 보여주는 싸움을 하라고 주님이 골리앗을 우리한테 붙여준 겁니다.’라는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소년 다윗이요.

육신의 할례를 행한 사람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능력도 없어요. 육신의 할례를 행해서 뭐 합니까? 막상 덩치 3미터 넘는 거인 보니까 전부 기죽어서 아무 소리 못 하는 거예요. 여기서 다윗이라는 존재는 마음의 할례,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인지를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모델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일단 모델은 등장했어요, 다윗, 그 사람이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 되는 분입니다.

쉽게 하기 위해서 탕후루라는 것으로 예를 들겠습니다. 탕후루라는 것은 과일에 설탕을 코팅한 중국 음식인가 그렇거든요. 물엿하고 한천가루, 설탕, 물, 작대기, 프라이팬 준비합니다. 물 한 컵 부어서 다 달아질 때까지 작대기 꽂아서 뱅뱅 돌려요. 거기에 물엿하고 한천가루, 설탕을 묻히면 된다는데요, 이건 내가 해본 게 아니고 레시피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그러면 안에는 과일인데 바깥은 설탕으로 코팅이 돼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면서 율법의 취지를 버리지 아니하고 율법으로 죄인 된 자를 하나님의 유월절이라는 율법의 이중성에 의해서 제대로 살리는 거예요. 제대로 살리는데 요한1서 5장 12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그 탕후루를 깔끔하게 묘사하고 있어요.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한 번 더요. 너무 간단해서 한 번 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세자로 줄여서 탕후루, 코팅.

하나님은 과일을 먹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과일 + 코팅’ 가짜 아들 위에 있는 진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생명. 그렇게 해서 주님의 간식거리가 돼요. 간식거리 정도가 아니죠. 하나님이 받으시는 음식이 되죠. 양식이 됩니다.

자, 이야기가 이렇게 되어 있으면 이제 남은 것은 딱 하나에요. 이겁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손질해도 안 되는, 그렇게도 말 안 듣는 우리, 무슨 식으로 하늘나라의 탕후루가 되느냐? 그것만 남았죠. 그것만 남은 거예요. 바로 다윗 자손이 되기 위해서 율법에 속한 자로부터 버림받은 분, 미움받은 분이 장자가 되는 그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그게 신명기 21장 16-17절이에요. “자기의 소유를 그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로 장자를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아, 인간의 육신적인 뜻에 의해서 장자로 세우지 말고, 미움받더라도 장자는 장자로 세워야 한다는 거예요. 장자는 장자 값으로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장자의 특징을 신명기에서는 ‘미움받는 자’라는 거예요, 미움받는 자. 하늘나라의 탕후루가 이렇게 제조되는 거예요.

장자는 기원이고 근원이고, ‘기력의 시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이 축복할 때 르우벤한테 그렇게 이야기했어요(창 49:3). 처음 시작, 없는 데서 처음 시작한 거예요. 예레미야 2장에도 그런 말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악이 있는데 그 악이 뭐냐? 생명의 근원을 너희가 잊어버린 거예요(렘 2:13).

그러니까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말고, 진짜 생명은 스스로 기원으로부터 아들을 창조해 나가는 거예요. 방법은 골로새서 2장 11-12절에 나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탕후루, ‘함께’, 네가 주되심의 재료가 되어서 더러운 죄인이 주님의 생명, 유월절의 피로 코팅이 됨으로써 같이 하나님의 장자가 된 자만이 다윗 자손이 누리는 영생, 천국의 백성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9절에서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장자가 되게 하심이니라.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장자 되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이삭 그 관계를 가지고 이삭이 이스마엘 제끼고, 육으로 난 것 제끼고 약속의 아들 이삭이 장자가 된다는 걸 보여주시고, 그 인간들의 육신이 왜 장자가 되지 못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430년 후에 율법을 집어넣어서 그 율법을 통해 어떤 인간도 썩었고, 구원될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마지막 새 언약에 예수님을 보내서, 장자를 보내서 비로소 장자의 나라를 완성시킨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율법’ = ‘-율법+다윗 언약’ = ‘새 언약.’ 오늘의 수학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이 어느 하나 빈틈없이, 차질 없이, 공무 집행을 일궈 나가시는 것에 감사합니다. 절대로 죄를 용서하지 않고 오직 이용하신다는 사실,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해 주신 이 작업, 이 공무 집행만이 천국 백성 됨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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