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성전에서 나오는 죄

아빠와 함께 2025. 3. 13. 08:42

성전에서 나오는 죄

2025년 3월 12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8:46-49

(8: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8:47) 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8:48)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8:4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시며
(8:50)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저희를 사로잡아 간 자의 앞에서 저희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다는 대전제를 놓고 봤을 때,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더나아가서 죄를 인식하는 것도 죄요,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고 기도하는 것도 죄는 되는 게 아닐까요? 이래도 죄요 저래도 죄라면 굳이 죄 용서해 달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성전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기도한다는 것이 의미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는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결코 출발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죄가 뭔지도 모르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본인이 죄인 것을 알 경우에만 죄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돌아옴’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애굽이 살던 히브리인들은 죄를 몰랐습니다. 그저 애굽 나라 안의 히브리인으로서 차별받는 것이 힘들고 괴로울 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애굽당국에 의한 가혹한 압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죄인입니다”는 의식에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약속의 땅 밖의 세상은 하나님에게 ‘적국’에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적국의 땅으로 살게 하시는 것은 ‘돌아옴’을 성사시키기 위함입니다. 단지 적국 땅에서 사는 게 힘들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찾는 의식’없이 사는 것이 힘들어서 돌아오는 ‘돌아옴’을 성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돌아옴이 불편의 삶을 풍족한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이 없이 사는 삶에서 ‘죄의식을 가득 품은 의식’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실질적으로 ‘적국’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는, 본인들에 있어 ‘죄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 접어들면서 그들은 열 번씩이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민 14:22) 왜 이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반발했을까요? 그들에게는 ‘애굽’을 적국으로 인식하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고 이스라엘 나라가 정착이 되면 비로소 죄인식이 율법에 준해서 주어짐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성막(성전)을 주신 겁니다. 이 성전에 나오므로서 다음의 기본적 원칙에 대해서 이해해야 했습니다. “범죄치 아니하는 자가 없사오니” 결국 하나님께서 성전에 나오는 자신들의 죄인식에 대해서 기도하게 하신 것은 ‘범죄치 아니하는 자가’가 없으며 이스라엘의 일상이 이 범죄하는 일상을 드러냄을 받아들이기 위함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본인의 생각에서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제사를 통해서 성전 바깥의 일상을 지배당하는 겁니다. 이는 참된 죄란 성전 안의 제사를 통해서 정해진다는 말입니다. 성전 안에는 놋제단이 있고 성전 제일 안쪽에서 천사의 문양이 있는 지성소가 있어 서로 일련의 절차를 잇게 하는 공간구조입니다.

놋제단과 지성소까지 나아가는 실체는 ‘뼈가 꺽여져서는 아니되는 제물’입니다. ‘뼈’란 문에 보이는 대상체로서 그 함축된 사물성을 표현하는 겁니다. 즉 ‘뼈’라는 것은 누구라도 신비로운 것이 아닙니다. 동물 제물이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동물 제물을 ‘꺽어져서는 아니되는 뼈’라고 묘사하므로서 ‘눈에 보이는 형식의 신비’를 창출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12:46에 보면,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민 9:12) 이미 죽을 것, 굳이 뼈을 꺽거나 아니꺽거나 제사드리는데 별 차이가 없어 보일 겁니다. 하지만 인간 자신이 자신들을 ‘뼈의 집합체’로 간주하면서 ‘제물의 뼈’와 특별한 의미 대조를 보이게 됩니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시 35:10) “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주께서 사자 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오니 나의 명이 조석간에 마치리이다”(사 38:13) 반면 의인의 뼈는 꺽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 34:19-20) 이러한 대조가 제공하는 최종 의미는 요한복음 19:32-36에 나옵니다. “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즉 죽음에도 두 종류가 있다는 겁니다.

죽어 마땅한 죽음이 있는 반면에 의를 드러내기 죽음이 따로 있습니다. ‘의를 드러내는 죽음’ 이외의 모든 죽음은 ‘죄를 드러내기 위한 죽음’입니다. 이는 죄인이면서도 죄가 아닌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죄된 것’으로 드러내는 ‘의인의 죽음’입니다. 따라서 성전에서만 나오는 이러한 권능으로 부여받는 자들은 반복적으로 자신의 본래 자리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 자신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죄 용서의 능력’ 작렬한다는 겁니다. 반면에 성전에 없는 ‘적국’에 해당되는 자들은 그냥 내어버려 두십니다.(롬 1:24) 그렇다면 성전이 불타 버린 그 시대에 죄인이 용서받기 위해 어디에 와서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은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고 여긴 바를 자빠뜨리는 그 사건의 지점, 즉 십자가의 권능이 작렬하는 바로 그 순간을 통해서 자신이 근원적으로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만이 주님께서 내어버려두지 않는 성도입니다. 신비로움이 ‘뼈’라는 사물성을 통해서 드러나기에 인간들이 평소에 생각해 둔 모든 신비로움은 다 떨어져나가는 허상같은 겁니다.

일관되게 육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과 계명을 보내어 늘 우리의 생각을 토막내게 되면 그 토막남을 통해서 반복해서 근원적인 성전제사와 자신과의 관계성이 유지되게 됩니다. 이 작업 또한 주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대로 사는 삶을 통해서 십자가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1강-열왕기상 8장 46-49절(성전에서 나온 죄) 250312-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8장 46-49절입니다.

열왕기상 8:46-49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시며.”

여기에 ‘돌아오는 것’, 두 종류의 ‘돌아오는 것’이 있어요. 하나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그 땅, 그 지역에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는데 그곳은 적국의 땅이지요. 적이 사는 땅에서 다시 주께 돌아오는 것, 공간적으로 약속의 땅에서 살다가 범죄함으로 인하여 적군의 땅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주께서 열조에게 주신 땅, 주님의 성과로 있는 그 땅으로 돌아오는 거죠.

그다음에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 비록 몸은 적의 땅에 살지만 마음은 적의 땅을 흠모하거나, 사모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함께했던 그때 그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 이 두 가지의 ‘돌아옴’이 있습니다. 본문에 ‘적국’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적국의 역할을 무엇인가?

적국의 역할은, 자체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고 하나님께서 쥐락펴락 자기 백성을 다루는 데 있어서 보조물, 혹은 조교 같은 역할이 적국의 일입니다. “너 어디 갔다 왔어?” “적국에서 살다 왔습니다.” “왜 갔지?” “우리가 죄를 지어서 그랬습니다.”

다시 돌아올 때 ‘죄를 지었습니다’ 혹은 ‘죄를 안 지었습니다’를 두고, ‘나는 하나님이 계시는 땅에 살지 못하고 적국으로 갔다 온 그 경험으로 봐서 나는 죄지은 것이 맞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나님께서는 듣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특수한 것인데요, 이스라엘이 애굽에 갔다가 거기서 빠져나왔습니다. 애굽에 갔다가 빠져나왔을 때 그 백성들에게는 ‘죄’라는 개념은 없었어요. ‘애굽에 사는데 왜 우리가 애굽 땅에서 살아야 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그냥 살면 되지.’

아직 ‘죄’라는 개념이 없기에 하나님의 ‘적국’이라는 개념도 그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적국’의 그 역할을 제대로 하게 만들었어요. 바로가 히브리인들을 압박해서 노예로 만들어서 힘들게 살게 했습니다. 그럴 때 히브리인들은 ‘우리가 죄를 지어서 힘들게 산다’가 아니라 그냥 ‘힘들게 산다’부터 먼저 튀어나왔어요.

‘힘들어서 못살겠다. 너무 사는 것이 어렵다. 하나님께서 좀 편하게 살면 되지 않을까?’ 그 때는 ‘죄’개념은 없었어요. 사는 것이 힘들고 고역스럽다는 거기에 마음 가 있지 ‘그래, 우리가 죄를 지어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거야’라는 그런 마음은 없었습니다. ‘사는 게 힘이 드는데 고생 좀 덜하게 도와달라’고 했을 뿐이에요.

즉 애굽이 하나님의 ‘적국’이라는 개념도 없었습니다. 왜? 그때는 이스라엘도 없기때문에, 그냥 히브리인들의 집단이지 이스라엘 나라라는 것이 없기에 ‘적국’이라는 것도 없어요. 오늘날 이 대한민국, 앞에 한 글자 더 붙입시다, “아!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그 대한민국이 성도의 적국입니까? 대한민국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기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외국에서 어떤 스포츠 경기를 하는데 거기서 우리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경기장에 태극기가 올라가면서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동해물과 백두산이~” 외국에 살면서 고국을 그리워하던 한국인들이 가슴에 저절로 손이 올라가면서 조국애가 펄펄 넘치지요.

그러면 그들이 미국이나 캐나다, 중국이나 그 밖의 외국에서 왜 삽니까? ‘우리가 죄를 지어서 외국에서 삽니다’ 그런 인식을 할까요? 그런 인식이 없지요. 그런 생각을 못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이거에요. ‘죄’는 하나님이 만들어 내는 겁니다.

‘죄’는 하나님이 만들어 내요. 인간은 죄를 몰라요. 왜?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모릅니다. 죄의 근원에 대해서 죄를 모릅니다. 인간이 아는 것은, 내가 지금 사는 게 ‘행복하냐, 불행하냐? 힘드냐 편하냐?’ 그것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 애굽 자체를 적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따로 애굽 땅에 살던 히브리인들의 집단을 이스라엘 나라로 만들어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광야를 지나면서 그들 마음 속의 본심을 드러냈어요. 그게 뭐냐? “애굽으로 돌아가자”(민 14:3, 4) 그렇게 열 번이나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민 14:22).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 아홉 번, 열! 베드로 예수님 세 번이나 부인한 그것은 뭐 배신도 아니지요. 열 번이라니까요. 10 빼기 3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열 번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살던 대로 살게 그냥 두지, 우리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살던 대로 살래’ 이것은 교회 30년 나오나, 40년 나오나, 50년 나오나, 혹은 4대째 신앙, 5대째 신앙, 목사 가정이고 뭐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심지어 교회 나오면서 교회에 앉아 있는 마음가짐이 뭐냐?

‘왜 자꾸 나를 힘들게 하십니까, 주님? 좀 편하게 살게 해주면 안 됩니까? 교회라는 이 먼 데까지 왜 또 오게 하십니까?’ 그걸 보면 이스라엘은 양반이지요. 왜? 이스라엘은 열 번밖에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수시로 원망하지 않는 척을 하면서 원망합니다. 어떻게 원망하는가?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이런 거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오늘 말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워요. 솔로몬이 기도합니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이 자체가 말이 앞뒤가 안 맞습니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러면 ‘주께 범죄함으로’라는 이 뒷말은 삭제해야 하지요.

인간이 늘 범죄하고, 사람의 모든 것을 범죄인데, 항상 범죄하는 사람인데 새삼스럽게 여기서 ‘주께 범죄했다’는 말이 여기에 적혀야 하는가? 인간은 자기가 죄지을 때만 죄인인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가끔은 ‘아이고, 내가 잘못된 일을 했네.’ 어떤 일을 통해서, ‘늘 잘해 왔지만 그 순간만은 실수해서 잘못했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정녕 죽으리라’ 한 것이 창세기 2장 17절의 말씀 아닙니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사람들은 “예, 성경 말씀이니 믿습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이미 주의 말씀이니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데 세상 살다 보면 “주님이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또는 주님을 거론하면 하나님께 대드는 것 같은 티가 나니까 혼잣말로 “아이고 힘들어라! 세상살이 왜 이렇게 힘들어?”라고 하거든요.

자기가 죽어 마땅하다는 그 원칙이 실생활에서 왜 안 맞는가? 주부가 시장에서 낙지를 사서 손질하잖아요. 낙지를 통째로 고추장에 넣는 사람은 없어요. 칼을 들고 낙지 다리를 토막 내지요. 낙지는 통째로 죄인이고 죽어 마땅함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계명을 칼로 사용해서 낙지(우리)에 토막을 낼 때마다 비로소 우리는 ‘아, 내가 범죄했구나.’ 그것을 아는 거예요.

‘범죄 했구나’라고 안다는 말은, ‘우리가 범죄 한 것을 인식할 그때만 죄고, 나머지는 선방 했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죄인임을 인식할 때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해요. ‘내가 다른 것은 나쁜 일 안 했는데 이것만은 나쁘다’라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되고, 애초부터 나는 범죄 했는데 범죄 한 그것에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다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간섭하니까 ‘아, 내가 그 점에서 잘못되었구나’라고 인식하는 겁니다.

말을 이렇게 길게 했지만 시편 51편에서는 그것이 간단하게 되어 있어요. 다윗이 간음과 살인죄를 지었을 때 누가 봐도, 본인이 봐서도 마찬가지로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다윗이 평소에는 간음과 살인을 안 했어요. 그때만 잘못한 거예요.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모친에서 통째로 죄인으로 태어났다(시 51:5)고 규정을 해버려요.

그것은 무슨 뜻이냐? 나와 하나님의 만남에서 하나님 쪽에서 나를 죄지은 자, 근원적으로 죄인, 죄지은 자로 순간순간 나타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의로움이 순간순간 나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에는 뭐도 품고 뭐도 품었느냐 하면, 죄도 품고 있고 하나님의 의도 품고 있어요.

죄도 품고 의도 품고 있는 이것을 합쳐서 하나님께서 제사법으로 만들어놓고 공간적으로 성전 안에서 반복을 시킨 겁니다. 죄와 의가 같이 있는 것, 죄의 근원도 그리고 의의 근원도 지금 성전 안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솔로몬이, 너희들이 뭔가 죄라고 인식이 되거든 그걸 그냥 ‘죄지었습니다’ 하지 말고 어디로 오라는 말입니까?

성전으로 오라는 말이지요. 성전으로 오게 되면, 죄를 인식케 하는 그것도 성전에서 나온 능력이고요, 하나님의 작용이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죄지었을 그때만 죄지었다”가 아니라 “나 자체가 근원적으로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다’는 그 범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성전에 올 때마다 다시 한번 확인하고 다시 한번 되새기는 기회가 되는 거예요. 이게 솔로몬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도대체 성전에 뭐가 있기에 거기서 죄가 나오고 의가 나오는가? 성전은 어떤 과정, 절차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절차를 위해서 출발점과 도착 지점이 성전 안에 있어요. 출발점은 성전의 입구, 또는 성막의 입구라고 봅시다.

성막의 입구에 제단이 있어요. 제단은 시작 지점이고 마지막 도착 지점이 있습니다. 도착 지점이 지성소에요. 제물을 태우는 그 놋제단과 지성소의 둘 사이가 연결이 되어 있어요. 옛날 국민학교 미술 시간에 전화기를 만든 적이 있어요. 한지를 붙인 두 컵을 실로 연결해서 진동을 통해서 소리가 전달되는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제단에서 시작해서 지성소에 도착하도록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성소의 무늬가 천사로 되어 있어요. 이것은 신비입니다, 신비. 그러면 그 신비가 도착 지점인데 신비로운 공간에 도착하기 위해서 제단에서 실제로 양이나 염소의 제물을 잡거든요.

그때 사람들이 제단에서 죽어 나가는, 그 불에 태워지는 제물을 보고 그게 신비라고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것은 눈에 보이니까요. 지성소의 천사는 안 보여요. 보이는 것은 뭐냐? 제물이 그냥 불에 타는 거예요.

그것을 신비롭게 보려면 지성소에서 능력이 와야 합니다. 지성소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지성소에서 정보, 소식이 와야 제단에서 불에 태워지는 것 자체가 이 지상의 눈에 보이는 식의 신비인 것을 비로소 파악을 할 수 있어요. 제물이 제단에서 죽는 그것이 신비로움이라는 그 말이지요.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겠죠? 보통 교회가 신비로운 이야기를 하잖아요. 사람이 신비로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육을 믿고 있지 신비는 믿지 않는다는 소리예요. 왜냐? 보고 있으니까. 죄를 고백할 때, 내 죄가 사해진다고 할 때 죄를 고백하는 나는 느껴지고 감지되는데 죄 사해지는 그것이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그건 사람들이 안 믿게 돼요.

뭘 믿느냐 하면 “하나님, 저 죄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약속대로 내 죄를 사해 주세요.” 하고 돌아서면서 ‘죄 사하는 거 뭐 누가 봤나, 그거? 죄 사해 주면 고맙지. 죄 사함 없는 것보다는 낫지.’ 왜? 죄 사함을 받아야 구원받기 때문에. 그러나 확실한 것은,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분명히 약속대로 죄를 고백했다는 이것은 저도 알고 하나님도 아는 것이 맞죠? 저는 이걸 믿습니다.” 하고 자기가 죄 고백하는 것을 믿고 돌아가 버려요. 죄 사함은 모르겠고, 솔직하게 그건 모르겠고 ‘내가 죄를 고백했잖아요.’ 그것만 건지고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는 “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왕상 8:46) 이렇게 할 때 ‘주여, 저의 죄를 용서해 달라’ 요청하는 본인은 믿는데 뭐는 안 믿느냐 하면,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이걸 못 믿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논리상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어 버리면 내가 기도를 하나 안 하나 내 죄가 없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거든요. 왜? 범죄 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기때문에. 죄짓고 돌아서고 또 죄짓는다는 것은 본인도 너무 인정하는 거잖아요. 이미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다고 결정 난 이상 그다음부터 내 할 도리는 뭐냐? 수시로 생각날 때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것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여러분이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가 잘 안될 겁니다.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3-3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린 그 광경인데요. 이미 다른 강도 둘의 뼈를 꺾었어요.

꺾고 난 뒤에 군병들이 와서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뼈가 뼈가 아니고, 그 뼈가 영이라는 거예요. 뼈가 신비라는 겁니다. 이걸 사람들은 믿지를 못해요. 두 종류의 뼈가 있는데 꺾이는 뼈와 꺾이지 않는 뼈를 하나님께서 준비했다는 이 사실이 신비로움이에요. 그러니까 신비로움을 아는 방법은 내가 꺾여야만 하는 사물성, 하나님께서 내가 하는 헌금이나 기도를 보는 게 아니고, 주께서는 나를 함축된 하나의 사물성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나의 사물성, 사물 있죠, 물건, 물체 그 사물성을 함축해서 그냥 뼈라고 하는 거예요, 뼈.

그리고 나를 하나님께서 뼈라고 본다면 다른 사람도 뼈에요. 전부다 뼈들이에요. 우리가 살점이 있더라도 살점을 발라내고 다 뼈로 본단 말이죠. 인간 안에 뼈가 있다는 걸 누가 부정합니까, 아무도 부정 못 하죠. 그런데 그 뼈가 두 종류가 있다는 거예요. 꺾어질 뼈가 있고 꺾어지지 않아야 할 뼈가 있다는 겁니다.

제단에서부터 지성소까지의 절차, 거기서 진행되고 있는 뼈는 꺾어서는 안 될 뼈에요. 그게 성경 어디에 나오냐? 출애굽기 12장 46절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12장 46절에 보면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찌며.” 같은 출애굽의 유월절에 대해서 민수기 9장 12절에도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왜 뼈는 꺾지 말아야 하는가? 그건 시편 34편 20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왜? 그분은 의인이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거예요, 의인.

그래서 성전 안에서 제사 절차에 의해 이동 중인 그 제물은 바로 인간하고 차별되는 꺾어지지 않는 뼈를 소지한 그 분의 자체적인 활동으로서 신비로운 천사의 그림이 있는 지성소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 꺾어지지 않는 뼈만 지성소를 만날 수가 있어요, 들어갈 수가 있다고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뼈라고 규정하는 것은 시편 35편 10절에 나옵니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해서 자기 자신을 뼈라고 규정을 해요. 그리고 이사야 38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는데 병이 들었을 때 스스로 고백하는 겁니다. 죽기 전에 유언처럼 남겼는데 38장 13절에 보면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주께서 사자 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오니”

곧 “나의 뼈가 꺾였습니다. 나는 박살 났습니다.” 다시 제가 풀이한다면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냥 하나의 사물입니다. 뼈들이 조립된 것에 불과합니다. 평생 살아오면서 그 인생을 다 발라내면 남는 것은 앙상한 뼈만 남아있는 이것이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 뼈를 꺾으십니다. 왜? 왜 꺾느냐? 하나님께 바쳐질 그분만이 뼈가 꺾어지지 않는 것과 대조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 사실을 군병들이 모르고, 그 강도 둘의 뼈를 꺾었어요. “다음 사람 이제 꺾자. 빨리 일하고 퇴근해야지. 어? 죽었네? 뼈 꺾을 것도 없다. 안 꺾어도 돼.”

그들은 무심코, 무심코 행동했어요. 무심코 행동했는데 출애굽기, 민수기 그리고 시편 34편의 그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한테는 ‘저분이야말로 진정한 의인이다.’ 다시 말해서 의인인데 뭐가 신비냐? 의인 같으면 뼈가 꺾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결코 죽어서는 안 되는 분이다.’ 그 말이에요, 죽어서는 안 되는 분.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은, 주님은 나와 비교해서 ‘나는 죽어야 하지만 주님은 결코 죽어서는 안 되는 분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분에게 일어난 일, 그분의 존재 자체를 나와 비교해서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이에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구원받는 이유가, 주님과 나를 비교해서 더는 내 생각을 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쁘게 인정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성도입니다.

왜? 그분만이 제단에서 지성소까지 가셨기 때문에, 그걸 완성했기 때문에 우리는 끼어들 수도 없어요. 내 인생 아무리 뛰어다녀도 하나님은 인정 안 해줍니다. 뭐 자식 먹여 살리려고 시장이고, 학교로 뛰어다녀도 주께서는 와장창 꺾어버리죠.

그런데 이 성전 자체가 오게 되면 하나님께서 뭘 주시느냐 하면, ‘안 죽어야 할 내가 죽는 이유는, 이 의인이 죽음으로서 너희들이 모르는 그 죄, 그걸 뿜어내는 거’예요. ‘너희는 죄인’이라고 권능으로, 능력으로 찾아가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의 죄를 몰라요. 인간은 자기의 삶이 ‘불편하다, 행복하다, 편하다, 넉넉하다’ 이것만 생각하지 내가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은 아무도 몰라요. 이건 능력을 받아야 해요. 권능을 받아야 해요. 어디서 나오는 권능? 그 어디서 나오는 권능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죄를 생각할 때마다 성전으로 오라, 이 말이에요. “그냥 있지 말고 성전으로 와!”

성전에 오게 되면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내가 죄를 지은 게 아니고 애초부터 나는 죄가 뭔지를 알리기 위해 쓰여야 할 인물로 이 땅에 출생했다’는 사실을 또 재확인하는 거예요. 왜? 범죄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도 없기때문에.

오늘 본문에, 처음에도 이야기 했지만 ‘적국’이라는 게 있어요. 적국은 뭐냐? 적국은 성전이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일을 보조하게 되죠. 그들에게는 왜 그런 기회를 안 주느냐? 그들에게는 성전이 없기때문에 내어버려 두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시는 겁니다.

지난 낮 설교 끝에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20-21)

고린도전서 9장의 그 대목을 읽어드리고 이렇게 요약해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네 마음대로 사세요.” 그 말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라고 이해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내어버린 자입니다. 내어버림을 당한 자예요. 얼마나 평소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걸 소원했겠어요? 거기에 면죄부를 주니까 완전 신바람이 나는 거예요.

‘내어버려 뒀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전의 권능이 없다는 말이에요.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다는 겁니다. 그냥 내어버려 두는 거예요. 낙지 손질하는 그런 칼질을 안 했다는 뜻이에요.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목사님 설교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면 목사를 한 번 바꿔보면 어떻습니까?” “복음 아는 목사로 바꾸면 참 좋죠.”

이건 없는 이야기지만 제가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바꿔보면 참 좋겠죠.” 그러면 내가 언급을 합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아는 복사로 바꿨는데 복음 아는 그 목사가 집도 없고 절도 없고, 사모님도 돈 안 벌고, 모아놓은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면?”

전에는 목사에게서 복음이 안 나온다고 ‘이 교회에서 나갈까? 목사를 바꿔야 하나?’ 이렇게 하다가, 이제 목사에게서 복음은 나오는데 목사님 자체가 생활이 안 될 때, 사택부터 해서 목사 가정 생활비 다 대겠습니까? 교인들이 눈치 보죠. 교인들은 한 네댓 명 되고, 목사님의 최저 생계비가 200만 원은 돼야 하는데요? “교인 다섯 명이라 치고 한 사람당 40만 원씩 내고, 복음 들으면서 이 교회 계속 남아있을 사람 손 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죠.

이게 뭐냐면요, 제가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게 돈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 딱 세 개만 이야기할게요. 첫째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거예요. 두 번째, 자기를 위해 살려면 돈이 필요해요. 첫째와 둘째가 기본이에요.

그러면 교회 복음은 뭐냐? 취미 생활이에요. 어디서 들통나는가? 복음 전하는 목사 온 건 맞는데 가진 돈이 하나도 없어요. 그럼 매번 나눠서 내는데 그것도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매달 40만 원씩 내야 돼요. 그때는 “아이고, 내가 거리가 멀어서…” 슬슬 하나둘 빠지다가 나중에 다섯 명 다 빠지고 그 교회 시마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전에 “복음이 없어서 고민이다.” 하더니 “복음이 있는데 왜 또 나가십니까?” 역시 복음보다는 돈, 꽃보다는 청춘이죠. 복음보다는 돈. 이 성전이 없어져요. 성전이 없을 때 그럼 어딜 향하여 기도합니까? 분명히 이 말씀은 성전을 향해야 한다는데 성전이 없어진다면? 이제 이스라엘 망하면서 성전이 없어져요. 없어지면 어디로 가서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은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32-3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게 걸림돌이라는 거예요, 걸림돌. 어디 가서 기도하느냐? 내가 자빠진 곳에 가서 기도하면 돼요, 내가 자빠진 곳. 다시 말해서 ‘나는 복음을 사랑한다.’ 복음을 사랑하는 거 맞아요. 복음이 너무 좋기때문에. 그런데 복음을 사랑함으로써 무엇과 충돌되느냐 하면,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와 충돌을 일으키는 거예요.

복음을 사랑하는 것은 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거든요. 예레미야 17장 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아무도 모른다는 거예요. 사람이 복음을 사랑할 때 이건 부패하지 않는 마음인 줄 알고 있어요.

정말 복음을 안다는 이것, 그것조차도 낙지를 손질하듯이 아주 싹둑싹둑 절단을 해버리죠. 이것마저 죄라고 끊었을 때 “나는 복음 아는데 죄입니까?” 하고 슬퍼할 문제가 아니고, 이게 감사와 기쁨으로 바뀌려면 ‘복음 안다는 나 자체가 복음에 대한 걸림돌로서 드러났다.’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그 장소가 ‘내 이름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제가 이 순간 받았습니다.’ 하는 고백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론은 뭡니까? 또 똑같아요. “네 마음대로 사세요.” 왜?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분류 체계는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십자가라는 기도 장소, 나를 제대로 아는 십자가의 권능은 주님의 철저한 분류 체계에 의해서 주께서 관계되어 있는 그 사람에게만 ‘하나님 성전 안에 네가 놓여있고, 성전이 네 안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나머지 사람은 그냥 내어 버려둬요.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분류 체제에요. 지금 분류하는 작업을 합니다. 아, 주님 바빠요, 되게 바빠요. 그러면 성도는 알죠. 내 자리가 없어지고 다른 자리가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아니 뭐합니까?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는데.

또 잊어버려도 괜찮아요. 왜? 주님 쪽에서 먼저 만나주시기 때문에요. 주님 쪽에서 하나님의 성전 안에 죄도 있고 의도 있다는 거, 그리고 그런 권한은 주님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성도에게만 계속 알려주시면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계속해서 권능을 주시기 때문에, 버려두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가?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은 주님의 일방적 소관이십니다.”라는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신비로움입니다. 이게 신비에요. 그래서 전에 그런 이야기 했죠. 자기 생각을 하지 않는 순간 모든 것이 영적으로 보입니다. 모든 것이, 이 세상 자체가 주님 혼자 일하시는 신비로운 세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를 회개했으니까 이제 죄 아니라고 여겼던 적도 있었고, 내가 죄라고 여기기에 그게 죄인 줄 아는 그런 오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죄와 의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주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준 사실인 것을 이제는 기쁘고 고맙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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