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가연성 존재

아빠와 함께 2025. 3. 27. 08:57

가연성 존재      

2025년 3월 26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8:62-66

(8:62) 이에 왕과 왕과 함께 한 이스라엘이 다 여호와 앞에 희생을 드리니라
(8:63)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을 드렸으니 곧 여호와께 드린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이만이라 이와 같이 왕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전의 낙성식을 행하였는데
(8:64) 그 날에 왕이 여호와의 전 앞뜰 가운데를 거룩히 구별하고 거기서 번제와 소제와 감사제의 기름을 드렸으니 이는 여호와의 앞 놋단이 작으므로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의 기름을 다 용납할 수 없음이라
(8:65) 그 때에 솔로몬이 칠 일 칠 일 합 십사 일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로 지켰는데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의 온 이스라엘의 큰 회중이 모여 저와 함께 하였더니
(8:66) 제팔일에 솔로몬이 백성을 돌려 보내매 백성이 왕을 위하어 축복하고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는데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과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인하여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

제사를 성립하는 데 있어 성전은 ’태우는 기능‘을 보여줍니다. 희생 제물을 태우는 이유는, 하나님 보시기에 추잡고 더러운 존재들과는 함께 하실 수 없음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제사라는 것이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발상이 아닙니다. 이방민족들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는 모세언약, 즉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 자신의 생각입니다. 이는 인간들이 진리를 찾기 위한 애씀이나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제사는 솔로몬 왕에 의해서 ’언약 안‘에서 이루어졌기에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시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오로지 ’언약‘만 즐겨 받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 언약실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소 22,000마리와 양 120,000 마리가 성전 안에서 불태워지기 위해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총 제사장의 숫자는 38,000명이었습니다.(대상 23:3) 그 중에서 대략 10분의 1이 근무조로 투입될 것이니 대략 2,000명 내지 3,000명의 제사장이 동원되어 14일 동안 제물처리에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모세 언약과 다윗 언약이 주어졌지만 신약에 오면 새 언약에 도달됩니다. 새 언약과 옛 언약의 차이점 중의 하나는, 옛 언약이 객관적이고 형식적이고 사물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은 바로 이런 객관적이고 형식적이고 사물적인 것과 단절된 언약이 됩니다.

단절되는 이유는 객관적이고 사물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바로 인간의 육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 한계가 있는 겁니다. 소 동원하고 양 동원해서 구현하고 표현하려는 것이 결국 에는 한계에 이르고 또 다른 언약이 필요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의 주관을 겨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과정이 솔로몬 이후에 멈추지 않고 신약 시대의 새언약으로 달려가는데 그 와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관된 원칙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로서 나타나셔서 제물을 태우는 방식으로 제사를 받으시는 이유는 항상 처음으로 되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2:7에서 나타난 인간의 근원은 ’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인간의 본디의 사람 주관이 더럽혀졌고 그 결과로 나타난 맨 처음 현상이 옷을 만들어 자기를 가리고 입히는 것이었습니다. (창 3:7)

성전이나 성막에 불이 준비되어 있고 제물은 필히 그 제단불 속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의 ’붙태우심의 정당성‘ 때문입니다. 이 정당성만 계속 남기고자 하시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 역사 내내 불태움의 장치와 기능을 더불어 가야 하는 이유는, 인간을 보는 하나님의 원래 입장과 관점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솔로몬이 대규모로 드린 제사는 화목제입니다. 레위기 7:15-17에 보면, 화목제나는 감사제와 서원제나 자원제로 되어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희생의 고기가 제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특히 화목제가 여타의 제사와의 차이점은 제사드린 자가 불을 경유한 제물의 일부를 제사장과 더불어 먹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는 화목제는 모든 제사를 마감하는 취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번제나 소제나 속죄제나 속건제의 제물에 대해서는 일반인이 먹을 수 없지만 화목제물에 대해서 허락이 됩니다.

모든 제사가 하나님에 의해서 흡족하고 수용되었다는 점이 화목제 의의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이 제사들의 의미가 한 인격으로 함축이 됩니다. 그 분은 다음의 두 가지 화목제 요소가 부각되는 분입니다.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 모든 처소에서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레 3:17)

’기름+피‘가 가능한 분은 기름부어진 메시야와 그 분의 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목제물‘이라고 신약 성경은 알리고 계십니다.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요한일서에서는 이 화목제물을 하늘이 내려주신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왜 인간의 육에서 나오는 것을 거부하실까요? 그것은 ’육에서 영‘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육은 불질러져야 마땅합니다. 실제로 객관적이고 형식적이고 사물적인 것으로 언약을 표현한 구약시기에서 다니엘 세 친구는 실제로 불 속으로 들어갑니다.(단 3:22) 이것은 양이나 짐승으로 대체되든 제물이 직접 인간의 몸으로 대체될 경향이 보이는 식으로 최종 언약, 최종 화목제로 나아가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7-8)

마태복음 3:2에서는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온 것은 어떤 인격분이십니다. 곧 예수님의 육신이 나타나신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육신에 나오는 피와 살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십니다.(요 6:53) 인간의 육 속의 주관은 예수님의 주관에 나오는 영으로 불태워져야 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행 2:2-3) 오늘날 성도의 삶은 이미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성령의 불이 타오르는 자리 속에 사는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서 육의 소욕이 성령님에 의해서 일체 거부당하고 있음을 주관적으로 경험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3강-열왕기상 8장 62-66절(가연성 존재) 250326-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8장 62-66절입니다.

열왕기상 8:62-66

“이에 왕과 왕과 함께한 이스라엘이 다 여호와 앞에 희생을 드리니라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을 드렸으니 곧 여호와께 드린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 이만이라 이와 같이 왕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전의 낙성식을 행하였는데 그 날에 왕이 여호와의 전 앞뜰 가운데를 거룩히 구별하고 거기서 번제와 소제와 감사제의 기름을 드렸으니 이는 여호와의 앞 놋단이 작으므로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의 기름을 다 용납할 수 없음이라 그 때에 솔로몬이 칠일 칠일 합 십 사일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로 지켰는데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의 온 이스라엘의 큰 회중이 모여 저와 함께 하였더니 제 팔일에 솔로몬이 백성을 돌려 보내매 백성이 왕을 위하여 축복하고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는데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과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인하여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

우리가 지금 본 이 광경,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뭔가 하고 있지요. 뭘 하고 있느냐?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를 이렇게 크게 드리는 이유가 뭐냐, 왜 이런 일을 하느냐? 현대인들에게는 납득이 안 되고, 용납도 이해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그렇게 할 일이 없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제사하는데 그렇게 국력을 낭비해서 되는가?’ 하는 겁니다.

“여호와께 드린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이만이라”(63) 요새 한우 한 마리가 소매로 천만 원 하는데 그 비용이 굉장하지요. 요즘 같으면 ‘이렇게 제사함으로써 우리에게 돌아올 이익은 뭐냐?’ 아마 그것부터 따질 겁니다. 왜냐하면 현대국가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집단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이익이 없는 일은 자진해서 용납을 안 할 거예요.

종교 행사에 이렇게 막대한 비용과 많은 사람을 동원한다는 것은 요즘 국가로서는 비효율적이에요, 낭비적이고요. “어떻게 이런 미신에 인간의 노고를 허비하느냐?”라고 지도자는 욕을 아주 많이 얻어먹을 거예요. 그런데 66절에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과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인하여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다시 한번 정리 해보면, 지금 이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이들이 진리를 찾느냐? 아닙니다. 이들이 생존을 원하는 겁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이들이 자기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이들이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이들은 지금 ‘언약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게 현대인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모세 언약이라는 것, ‘모세에게 준 율법 안에 그들은 지금 놓여 있기에 여호와께서 즐거워하셨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62-63절에 “이에 왕과 왕과 함께한 이스라엘이 다 여호와 앞에 희생을 드리니라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을 드렸으니.”

‘화목제’나 ‘희생’은 솔로몬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백성들의 의견도 아니에요. ‘이런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다.’라는 것도 아니에요. 화목제는 모세언약 안에서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린 지시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그 지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한다. 총괄해서,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게 해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

‘언약 안에 있지 아니하면 나는 더러워서 너희를 안 받는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를 만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내어준 아이디어 안에 있지 아니하면 네가 아무리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추잡하다고 단정 짓겠다. 더럽다고 단정 짓고, 부정하다 여기겠다. 그런 부정함과 더러움으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

만약 여러분이 천국에 갔는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천국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12) 할 때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사되는 것, 그것이 천국 생활인데요, 그렇게 만나려면 깨끗한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도 깨끗해져 있어야 하겠지요.

깨끗해지는 데 있어서 구약에서의 한계는 뭐냐? 아직 언약이, 다윗언약 그리고 모세언약까지밖에 없기 때문에 새언약, 완성된 언약이 없는 때에요. 완성된 언약은 나중에 옵니다. 솔로몬 때까지의 모세언약과 다윗언약에 있어서의 한계는 형식적이라는 거지요.

언약의 형태가 형식적이에요. 그러면 마지막 최종언약은 뭐냐? 형식적이 아니고 그 형식이 깨어져 버립니다. 형식적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겠습니다. 객관적이다. 그러면 나중에 오는 새언약은 뭐가 되느냐 하면, ‘객관적’의 반대말, ‘주관적’으로 언약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인간이 내세우고 만들어내는 형식과 물질적인 눈에 보이는 객관성이 문제가 아니고 더 근원적인 문제를 향하여 주목하고 겨냥해서 마지막 언약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주관, 인간의 마음이 문제가 있었다.’라고 하는 거예요. 솔로몬처럼 소 2만 2천 마리, 양 12만 마리 드려서 하나님과 영원히 만날 수 있다면, 천국 갈 수 있다면 돈 많은 사람들은…, 물론 양의 공급량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어쨌든 성의껏 내놓을 수 있는 물질적이고 형식적인 행위를 내놓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형식과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것과 사물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중간 과정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중간과정으로 사용하면서 그 객관적이고 물질적이고 형식적인 것 속에서 뭔가 나중에 올 새 언약 쪽으로 넘기고, 넘기고, 이동하고, 이동하고, 흘려보내는, 그 변함이 없는 원칙 같은 것이 예수님의 새언약까지 도달되게 하셨던 겁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화목제’라고 되어 있어요. 제사가 보통 5가지가 있어요. 번제, 소제,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가 있거든요. 번제란 다 태우는 것이고, 소제라 하는 것은 그 재료가 식물성이고, 속죄제라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죄를 지었을 경우, 속건제는 이웃에게 죄 지었을 경우입니다.

그러면 화목제는 뭐냐? 앞의 네 가지 제사를 다 치르면서 하나님께서 “네가 드린 제사에 대해서 내가 인정한다.” 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의사전달을 포함시키는 제사가 화목제입니다. 화목이라는 것이 평화롭고 다정하게 모이는 형식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들끼리 모이는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마저도 같이 참여해서 “제사는 이 화목제로 마감하자.” 그렇게 끝내자고 하면서 마무리로 하나님의 참여 취지가 들어 있는 제사를 화목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속죄가 다가 아니고 번제가 다가 아니지요. 마지막 화목제까지 이끌어져야 하나님께서 인간을 받는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면 마지막 하이라이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화목제와 다른 제사의 차이점이 뭐냐? 다른 제사는 일체 제사한 자가 제물의 고기를 먹지 못해요. 먹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제사에서 제사장은 먹을 수도 있지만 제사장 말고 일반 백성은 어떤 제물의 고기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화목제에 대해서는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의 떡과 고기를 같이 먹을 수가 있어요.

먹을 수 있는 이유가 뭐냐? 성전에서 이들이 지금 화목제를 드렸잖아요. 성전이 뭐 하는 곳이냐? 모든 제물을 다 불로 태우는 기능이 있어요. 그래서 성전 초입에 이미 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2만 2천 마리의 소, 그리고 12만 마리의 양은 전부 다 대기하고 있어요. 불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굉장히 형식적이고, 눈에 보이니 객관적이고, 그리고 양과 소니까 물질적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뭘 하느냐? 제물을 바치는 그 인간들도 2만 2천 마리의 소와 12만 마리의 양 속에, 그 사이의 중간중간에 끼어들어라, 그 말입니다. 거기에 끼어들어야 하는 거지요.

그게 화목제물과 다른 제사의 차이점이에요. 다른 제사는 그냥 제물만 태우지만 화목제는 세 가지로 되어 있어요. 하나는 감사제, 그리고 서원제, 자원제입니다. 감사제는 제사를 받아주시는 것에 대해서 마땅히 감사해서 그 제물에서 나오는 떡과 고기는 하루 만에 다 소진해야 해요. 하루 동안에 다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음식을 같이 먹을 때 남겨두면서 그다음 날까지 갈 수 있는 화목제는 뭐냐 하면, 서원제와 자원제입니다. 레위기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찌니”(레 7:15-17).

서원제와 자원제라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서원하는 경우, 자원제라 하는 것은 아무 목적 없이 기뻐서 그냥 드리는 거예요. 감사제는 하나님께서 화목제로 요구하는 바라면 자원제와 서원제는 자기가 원해서 합류되는 요소가 있어요. 그것으로 인해서 제물을 하루 만에 다 먹어도 되고 사흘이 되기 전에 다 먹으면 돼요.

그런데 이 제사라는 것이 제물을 잘게 쪼갠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도 아니고요, 반드시 불에 태워져야 해요. 화목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제도 번제를 거쳐서 화목제가 되니까요. 속죄제도 마찬가지로 불에 태운다는 거예요. 그러면 화목제물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뭘 거쳐서 나오는 음식들인가? 불을 통과한 음식을 제사장이나 서원한 사람이나 하나님마저 함께 먹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취지가 예수님을 포함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구절이 신약성경에 몇 군데 나옵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화목제물로 세웠다는 말은, 예수님도 그 화목제물의 일부로 가담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확정된 그 공간에, 화목제물이니까, 예수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자들도 거기에 합류시키는 그 상태에 대해서 아버지께서 이미 재가했다, 허락을 받았다는 거예요. ‘더러운 인간이 천국에 들어올 수 있도록, 내가 행한 거기에 같이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 이미 아버지의 허락이 났다.’ 이것을 한꺼번에 표현해서 ‘화목제물’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말이지요.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사이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거예요. 요한1서 4장 10절에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고 하시면서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화목제물로.

그러니까 예수님 혼자 달랑 나 잘났다, 하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화목제물로서 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원받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원하는 택한 자도 참여할 수 있는 공간, 여지를 주셨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그 말입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 수많은 백성들이 성전 앞에 모였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2만 2천 마리의 소와 12만 마리의 양을 바쳤다는 그 말은, 제물만 바치고 구경한다는 것이 아니고 근본 화목제물의 취지를 계속 살리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화목제물 제사 그 자체에 참여한 것이 돼요.

자원제든, 감사제든, 서원제든 화목제물에 참여하는 조건하에 그들은 그 현장에 모여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양과 소 제물들, 너희나 불에 타 죽어라.’ 그러면 안 되고, 불에 타는 제물들 틈에 같이, 양과 소 틈에 끼어서 끌려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불에 태워지기 위해서.

“양! 너무 밀지 말고! 지금 같이 빨려가고 있는 거야. 어이 소! 자꾸 밀지 말라니까. 이번에는 내가 들어갈 차례야. 너는 나 다음이라니까.” 사람이나 짐승이나 심지어 산의 나무까지 그 특징이 뭐냐? 모두 가연(可燃)성입니다. 불에 타는 성질이에요.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는데 떨기나무 앞에서 만나는 그 대목을 가지고 제가 간단한 문제를 내겠어요. 2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불에 타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불에 타지 않는 것은 불 그 자체입니다. 불 자체는 타지 않아요. 그래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불은 불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그 불을 계속 지피는 기능이 성전 기능이고, 거기에 대기되어 있는 제물들은 성전 불 기능, 그 화력을 키우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겁니다.

양 그리고 소, 인간들은 관람하고 있지만 거기에 같이 섞여 있다고 보면, 이들은 다양성 있게 각자 개성이 있고요, 살아온 환경, 요즘 말로 하면 DNA가 다 다를지라도 그들은 태양열 집열판같이 또는 해바라기같이 한 쪽만 바라보면서 성전에 끌려가는 그 모양새 그걸 하나님께서 흐뭇하게 보시고 즐거워하셨다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어이! 거기 7646번 소의 다음에 있는 당신! 어느 대학 나왔어?” 이런 걸 묻지를 않아요. 어차피 불쏘시개니까. 이게 과장된 게 아니에요. 형식적이고 사물적이고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이 구약의 다니엘 3장 22-2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여러분, 이게 장난으로 보이십니까? 성전이 없어도 성전 기능은 살아 있어요. 불은 사라지지 아니하니까요. 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물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다니엘 세 친구가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까 거기 누가 기다리고 있는가? 주님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전부다 가연(可燃)성 소재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불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누가복음 12장 49절에 보면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예수님은 방화범입니다. 온 천지에 다 불 지르러 왔어요. 청송? 뭐 그 정도가 아니에요. 안동, 길안, 의성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온 천지에 불을 질러요. 불을 던지러 왔어요, 예수님은.

불을 던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내가 여기 있다.’가 되잖아요. ‘나’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구약적 방식으로서 뭐냐? 형식적이고, 물질적이고, 그리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있던 장소가 바빌론에 의해서 불타버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있던 성전이 바빌론에 의해 불타버려요.

그리고 마지막에 주님 재림하실 때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 심판, 유황불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곳은 영원한 불이 피어나는 지옥 불에 들어가는 거예요. 보세요, 하나님이 일을 할 때 얼마나 일관성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한다, 하면 하십니다. 불로 다 태우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불로 태우는가? 구약에서는 형식적으로 우리가 가연성 소재이기 때문에 다 불에 타버리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로 태우는 이유가 뭐냐? 우리를 창세기 1장 2장으로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1장 2장에서 인간은 어디서부터 왔느냐 하면, 흙에서부터 왔어요. 흙에서부터 왔으니까 그냥 흙으로 돌려보내는 그것이 하나님이 마땅히 하셔야 할 일인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흙인 주제에 인간이 자기 몸에 어떤 연출을 해요. 제가 대전 강의 시작하기 전에 잠시 그 이야기를 했는데요. 인간의 옷은 무엇이냐? 인간의 옷이라는 것은 자기 내면에 있는 자아를 바깥에 형식화시킨 것이라고 했어요.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옷을 만들어 준 적이 없어요. 자기가 수치를 느끼고 ‘나 그다지 수치스럽지 않다’라고 인간 내부에서 뭔가 조작해서 바깥으로 사물화 된, 또는 객관화 된, 형식화 된 것이 옷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조선 시대 때의 여성들 옷을 보세요. 얼마나 단아합니까? 아주 단아하죠.

어떤 코미디 프로에 이런 게 있었어요. 신입 판사가 현대 여성처럼 옷을 좀 가볍게 입고 출근했어요. 그걸 본 부장 판사가 “판사가 됐으면 옷을 좀 품위 있게 입어야지.” 그러니까 신입 판사가 그다음 날 출근할 때 뭘 입고 왔느냐? 히잡을 쓰고 왔습니다. “이 정도면 조신합니까?”

조선 시대 때 여성은 남성이 원하는 여성이어야 하기 때문에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이 원하는 신비감을 바깥으로 노출시키지 말고 옷 안에 포근히 담아야 해요. 그걸 조신하다고 했어요. 여러분, 조선 시대 때 여성 한 번 보세요. 한복 입은 것 보세요. 얼굴 빼놓고 머리부터 발까지 다 가려져 있잖아요. 그럴 때 “참 단아하다, 여성답다.”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연출이거든요. 조작이다, 이 말이죠. 불에 타 봐야 정신을 차리지.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자신의 가치가 자신의 손에 의해서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다.’라고 그런 방식으로 자기를 감추는 식으로 살아가는데 그걸 ‘문화’라고 해요. 또는 문명이라 합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나 죄인 아니다.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다.’ 그 자기 가치를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형식을 통해서 한껏 높이는 것인데 그 문화를 하나님이 뭐로 다 태워버리느냐? 불로써 다 태워버리는 겁니다.

제사도 마찬가지예요. 오늘 본문에서는 제사드렸다고 하나님께서 흐뭇해 하셨지만 이것은 아직 중간 과정의 언약이고, 마지막 언약까지 계속해서 진격하고 추진하는 데 있어서 무슨 과정을 밟는가? 이사야 1장 1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그러니까 점점 더 인간의 객관을 보는 데서부터 인간 내면의 주관을 지목하고 그걸 겨냥해서 찾아가는 식으로 언약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뭐로 커버합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자기를 조작하는 것 외에는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객관화된, 형식화된 종교 형식으로 계속해서 “선을 넘지 마세요. 여기까지만 들어오세요, 하나님. 우리 열심히 제사드리고 절기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가 이스라엘은 불바다가 됐단 말이죠.

미가 6장 6-절에 보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그게 말짱 다 소용없다는 거예요. 언약을 인간이 지키는 게 아니고, 언약이 인간을 요구하죠. 옛날 언약 말고 점점 새 언약으로 진척되고 있는, 나아가고 있는, 전진하고 있는 그 언약으로 인하여 주님께서는 이 많은 제물, 2만 2천 마리의 소와 12만 마리의 양을 압축시켜서 하나의 인물화 시키는 쪽으로 제대로 된 제사의 마감 ‘화목제’를 달성하고자 하시는 거예요. 형식주의, 객관주의, 사물주의를 다 제거하고!

‘콘클라베’라고 있는데 그게 천주교의 교황 선출 제도입니다. 추기경들끼리 집단 생활하면서 교황이 선출되면 바티칸 성당에서 흰 연기가 피어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약속을 해놓고 교황 선출을 하는데 투표할 때 기도를 해요. “하나님, 내가 투표하는 이 사람이 하나님의 교황에 맞는 사람이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면서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습니다. 개표가 끝나면 담당자가 뾰족한 걸로 꿰어서 연기 때울 때 같이 태워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게 바로 아직도 하나님께서 철폐해 버린 그 형식주의, 객관주의, 사물주의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드디어 신약에 들어오면 새 언약 시대가 시작이 됩니다. 그럴 때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마태복음 3장 2절에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 당시 유대인들은 천국 가면 객관적이고 천지개벽적인 뭔가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단 말이죠.

그런데 거기다가 세례 요한이 과감한 발언을 해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런데 실제로 온 것은 예수님의 몸이 달랑 왔는데요? 예수님 몸이 왔다고요. 예수님의 몸이 왔는데 그 몸이 천국이라고 알아본 사람은 없었어요. 결국 예수님의 그 몸이 죽습니다.

죽는 이유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화목제는 인간의 어떤 육의 행위, 행동으로도 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의 육을 통해서 보여주신 거예요. ‘인간은 어떤 종교적 행위를 해도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그겁니다.

왜? 인간은 자체가 더럽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은 그것도 모르고 아직도 모세 율법 들고 제사드리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러면 ‘구약에서는 다니엘 세 친구가 불 속으로 들어갔는데 참 감사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불속에 안들어가고도 예수의 피를 믿어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라고 생각하신다면 지금 엄청난 오산을 하고 있는 거예요.

불속에 들어가지 않고 구원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약 시대에도 그러냐? 신약 시대도 마찬가지죠. 제대로 된 불을 받죠. 사도행전 2장 1-3절,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자, 한곳에 모였으니까, 오늘 본문에 있는대로 2만 2천 마리의 소와 12만의 양이 대기했던 그 대기 장소에 우리가 모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러니까 우리가 불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불이 우리에게 찾아온 거예요, 성령의 그 불이.

불이라는 말은, 내가 있는 자리를 불로 없애버리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객관적으로 우리가 육체가 있어서 육체를 없애버리지만, 물론 양이나 소의 제물이 대신했지요, 신약에 오면 우리의 정신, 우리의 육체 말고 우리의 주관이 있는 그 장소를 하나님의 성령의 불로서 그냥 없애버려요. 없애버리면 나 있던 자리가 불이 사라지지 않는 자리, 성령이 있는 자리,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끗함을 받고 주와 더불어, 함께 있는 화목제물에 참여한 자가 된다, 이 말입니다.

구약의 모세 율법을 다시 한번 정리해 드릴게요. 모세 율법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되 그냥 그대로 만나지 못하고 절대적인 요건을 갖춰야 만나는데 그 절대적인 요건이 뭐냐? ‘내가 퍼붓는 진노의 불에 너희의 그 자아가, 주관이 타버려야 만날 수 있다.’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다 타버리고 만날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양을 대신 제단에다가 태우는 겁니다. 태우는데 다 태우되 뭐는 남겨둬라? 피는 남겨두는 거예요, 피와 기름은.

화목제를 언급할 때 레위기 3장이 언급되는데요, 3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 모든 처소에서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기름과 피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로 기름 부은 자의 피, 기름 부은 자의 피로 너희들의 제물이 결국은 압축이 되고, 압축된 그 제물의 압축분이 하나의 인격자로 전환될 때 화목제는 완성된다, 그 이야기입니다.

기름 부은 자, 피 흘린 분이 누굽니까? 기름 부은 자가 메시아거든요. 기름 부은 자, 메시아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아주 친절하게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네게 생명이 없다.”라고 하니까 따라왔던 사람이 다 가버렸어요.

극한의 친절을 베풀었건만 그들은 “어렵도다.”하고 다 가버렸어요. 여러분은 왜 안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진리 찾기? 그런 거 없어요. 뭐 하나님 찾기? 아닙니다. 그런 거 소용없어요. 생존하기? 물론 안 되죠. 자기 의미 찾는 거? 그건 애초부터 아니고.

진리 찾기가 아니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 찾기가 아니고 ‘하나님 안’에서. 뭐 하나님이 집 나간 가축, 짐승도 아니고요. 하나님 안에 있는 거예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게 발견되어서 구원받는 겁니다. 육인데 육에서는 영이 나올 수가 없어요. 더러워서 안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창세 전에 의논하고 합의 보기를, 육으로 구원받을 수 없으니 이 육을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육을 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야기가. 이야기가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뭘 감수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내부 투쟁을 감수해야 해요.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아들은 기꺼이 아버지한테 버림받는 그것을 해야, 육에서는 일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걸 분명히 해줘야 예수님의 육에서 나오는 그 예수님의 주관, 영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영원히 아들의 나라에 같이 있을 수가 있는 철두철미한 완벽한 하나님의 논리가 성립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과 백성들이 한 것이 뭐냐? 초막절 7일에다가 낙성식 7일을 합해서 14일 동안 제사를 드렸어요. 하도 제물이 많아서 14일 동안 치렀는데 그러면 오늘날 어떻게 예배를 드립니까? 요한복음 4장 20절에 나옵니다. 아직도 사마리아 여인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말은 “우리는 그리심 산에서 드리고 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데 어느 공간, 어느 시간대에, 어떤 인물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가 됩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합니다. 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너 말이야, 너. 나와 네가 같이 있음으로써, 네 속에 성령이 계속 일어남으로써 그게 신령으로, 영적으로 예배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주님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늘 죽을 때까지 쓰임 받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적 예배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성도보고 “당신 요새 뭐 하고 있어?” 물을 때 ‘나는 뭐 한다’라고 답변할 게 아니라 좀 정확하게 말해서 “나는 성령 안에서 주님의 지시 받고 산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이걸 해서 뭘 주님께 더 바치는 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그 사랑 안에서.

그러면 주님의 사랑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갈라디아서 5장 17절의 일이 벌어집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 이걸 액자로 하나 만드세요. 돈 한 10만 원 주면 만들지 않겠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일체 안 돼요. 취직? 끝났어, 끝났어. 장가? 안 돼. 내가 원하는 장가 안 되고, 내가 원하는 취직은 안 돼요. 성령의 소유물이 되기 때문에 성령을 드러내기 위해서 결혼할 때 되면 해야 하고, 취직할 때 되면 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 하죠.

모든 일이 성령께서 시키는 대로 화목제물 아래서, 주님의 피를 경유한, 이미 내 자리는 없음이 확실해진, 주님의 자리만 있어서 아버지께 받는 음식을, 예수님과 함께 그 살과 피를 먹어가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밀고 당기면서 육체의 소욕을 허용하지 않는 그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이익과 우리의 욕망과 생존의 의지를 위해서 주께서 계신 게 아니라, 그건 다 불쏘시개 불로 태워야 마땅한 추잡하고 더러운 것이라는 그 안목을 저희들도 갖게 해주시고, 더러운 것은 안 받는다는 천국의 일관된 취지에 의해서 이미 십자가 피 안에서 하나님의 깨끗함을 얻은 자로서 주의 공로만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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