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더러운 세상

아빠와 함께 2025. 3. 9. 10:23

20250307a 울산강의-역대기하(10강) 11장 2절 : 더러운 세상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11장, 12장을 하겠습니다. 역대하 10장부터 르호보암이란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솔로몬의 아들로서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차기 전체 이스라엘을 인수인계 받은 왕으로 등극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으로 등극했지만 열두 지파 가운데 두 지파만 이 사람을 왕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열 지파는 르호보암을 왕으로 인정하지 안 했습니다.

그렇게 인정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역대하 10장 15절에 보면,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난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기에 아히야란 선지자가 등장하지요.

이스라엘 왕이 있는데 그냥 혼자 통치하면 되는데 여기에 아히야란 선지자가 툭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단단한 통치에다가 푹 쑤시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통치에 있어서 왕이란 이스라엘 전체를 관장해요. 이 아히야란 선지자뿐만 아니고 모든 선지자는 그 인간 왕의 통치에 포함이 안 돼요. 외부인 같은 그러한 요소가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아히야란 선지자가

솔로몬 당시에 솔로몬이 우상을 섬기고, 아내를 많이 두고 그렇게 했는데 그것이 백성들 입장에서 솔로몬은 완벽하고 완벽한 최후의 왕, 이스라엘이 가장 완전한 이스라엘 될 때나 나타나는 왕처럼 솔로몬이 그렇게 보인 겁니다. ‘이제는 왕 한 분만 있으면 되지 선지자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모든 이스라엘에 속한 것은 솔로몬에 주신 하나님의 지혜에 속하면 오케이, 그걸로 이스라엘은 완전하다. 여기에 다른 요소가 끼어들 필요가 없다.’ 왕이란 온전한 통치니까요.

그런데 솔로몬이 뭐로 통치했느냐 하면, 솔로몬이 지혜로 통치했어요. 지혜로 통치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함이 나올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이걸 기대했거든요. 이것이 안 나왔습니다. 아는 건 많은데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뻐하심에는 이것이 해당이 안 됩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냐? 지혜로 통치하면 될 텐데 솔로몬은 기도하기를 지혜로 통치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했지만 결과적으로서는 지혜로 통치한 것이 아니고 왕이 지혜를 소유했어요.

왕이 지혜를 소유해서 왕의 공간으로 이게 마감이 된 거예요. ‘지혜가 나한테 왔고, 다른 사람들은 지혜를 소유하지 않고 나만 지혜를 소유했으니까 내가 소유한 하나님의 지혜로 너희들은 통치를 받아라.’ 솔로몬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솔로몬이 우상을 만들고, 많은 이방나라 여자를 하지 전까지는 선지자가 없어요. 솔로몬의 특징이 선지자가 없다는 거예요. 이상하죠. 그만큼 완전했다는 겁니다. 초반에. 초반에 완전했기 때문에 선지자가 와서 토 달 게 없어요.

지금 뭐가 문제냐 하면 솔로몬이 지혜를 소유했다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지혜로 통치받기를 원했어요. 지혜를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소유하면 교만 돼요. 소유가 교만과 오만으로 가는 이유가, 소유를 하게 되면 어떤 공간이 생기느냐 하면 나의 공간이 생기고, 나의 공간은 필연적으로 뭐냐 하면 나를 위한 공간이 돼요. 나의 공간에서 나를 위한 공간이 됩니다. 나를 위한 공간에, 그 안에 자기 자신을 둡니다. 여기에 자기가 위치해 있어요. 자기가 들어가 있어요.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만의 공간에 자기가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은 그걸 오만이라 하는 거예요. 자만.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준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솔로몬에게 오만과 자만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확대시키면서 지혜가 원래 원했던 거룩적 노선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축복을 내 소유로 삼는 그런 노선으로 노선이 두 갈래로 갈라질 필요가 있어요.

솔로몬의 전기와 후기가 있다면 솔로몬의 전기는 오롯이 지혜로 통치 받아서 모든 것이 거룩했어요. 그런데 솔로몬이 두 조각나는 겁니다. 지혜로 받아야 될 텐데 어느새 지혜가 나만의 지혜가 되고, 이것이 지혜를 내가 소유한 게 돼요. 남들이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공간에 내가 거기에 거주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한다. 나는 복음을 알기를 원하다. ‘어? 저게 복음 맞다. 저게 복음이다.’ 그래서 복음을 아는 순간 나는 복음을 소유하게 돼요. 소유하게 되면 복음을 소유한 그 공간 안에 자기가 거주하게 됩니다. 거주하게 되면 이거는 뭐냐 하면 주님의 노선과 따로 노는, 따로 가는 노선이 돼버려요. 오만한 게 되죠. 누가 쿡 찌르고 들어온 사람이 없습니다. 복음을 알고 성경을 아는 자기만의 공간을 자기를 위해서 잘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고 지키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게 바로 솔로몬 이후의 르호보암이었습니다.

르호보암은 솔로몬한테 대단한 나라, 많은 하나님의 지혜와 많은 백성과 많은 재력을 가진 힘을 가진 나라를 인수인계 받았어요. 그리고 르호보암은 거기에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솔로몬이 범죄 하고 난 뒤에 하나님의 나라를 솔로몬이 갖고 있던 솔로몬의 전기, 지혜로 통치했던 그 나라를 두 조각내기로 작심하시고 평소에는 선지지가 없던, 솔로몬에게 직접 지시한 선지자는 없어요.

없고 솔로몬에게 불만이 많은 여로보암이라는 일종의 노가다 십장이죠. 모든 국가적인 공공사업의 책임자 되는 여로보암에게 아히야라는 선지자가 찾아갑니다. 그게 바로 열왕기상 11장 36절에 나오는 데요.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이거는 등불에 관한 것이고요.

29절,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여기서 우리가 의문점은 뭐냐? 왜 아히야 선지자가 직접 솔로몬 왕에게 지적을 안 하느냐 이 말이죠. 솔로몬 이후에 나오는 르호보암과 그 뒤의 왕들은 선지자가 왕에게 직접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솔로몬 당시에는 솔로몬에게 직접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왜 그런가?

그것은 솔로몬을 통해서 이미 다윗언약의 최종적인 정점, 최종적인 최고점의 풍성한 축복을 솔로몬은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으로 주의하면 앞으로 더 잘될 것이란 게 없어요. 솔로몬이 그 정점에 이릅니다. 솔로몬에게 선지자가 새삼스럽게 이야기를 안 한다는 것은, 솔로몬이 경험했던 최고 하나님의 경험은 이제부터 부셔지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추락하는 일만 남아 있어요. 내리꽂는 일만 남아 있다고요.

그래서 솔로몬을 하나의 표준으로 잡고 그 솔로몬의 부귀영화가 작살나는 그 노선을 통해서 도대체 인간은 무엇에 문제가 있는지를 하나하나 그 속에 들어있는 더러움과 추잡스러움을 들춰내는 첫 스타트가 솔로몬입니다. “내가 많이 줬지? 내가 많이 뭤잖아.”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에서 미사일을 줬는데 미사일 한 발 가격이 1억이에요. 1억짜리 스팅어 미사일을 줬다고요(FIM-92 스팅어(Stinger) 휴대용지대공미사일).

그 미사일은 대전차용 간편한 미사일로 300발을 쐈는데 부셔진 러시아 전차는 280대에요. 거의 백발백중에 가까워요. 한 발에 1억짜리 그것을 그냥 줬어요.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를 금융적으로 지원할 때 대출해줬습니다. 유럽은 빌려줬는데 미국은 그냥 줬어요. 그러면 초반에 그런 최상의 품질을 가진 미사일을 우크라이나가 선물로 받았을 때 그때가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최고 정점이었어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그게 드디어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추락하기 시작하니까 뭐가 없어요? 고마움과 감사가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고마움과 감사가 없어져버렸어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한 그 복이 위상이 어느 정도까지 올 수 있다는 것은 솔로몬 본인도 놀랄 정도에요.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나, 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솔로몬아, 받아. 이거는 너한테 주는 거야. 네 아버지와 내가 약속한 거야.” 하나님의 언약이 품고 있는 최고의 영광스러움을 네가 누릴 대로 다 누려봐. 그 누리는 영광을 과연 인간인 솔로몬이 그걸 지탱할 수 있을까? 해봐. 안 되지요. 하나님 쪽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 자체에 문제 있었던 겁니다.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를 제대로 소유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 자체가 인간에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11장, 솔로몬이 우상을 섬기는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우상 섬기는 것을 가만 지켜보지 아니하고 어떻게 했느냐 하면,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34절) 이렇게 돼 있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솔로몬이 착해서 준 복이 아니고 아버지 다윗언약에 의해서 다윗에게 준 약속을 하나님 쪽에서 스스로 지켜내기 위해서 최상급의 최상의 복을 다윗의 이름으로 솔로몬에게 준 거예요.

이제 솔로몬이 할 일은 뭐냐? 그걸 망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지혜는 뭐가 아니다? 지혜는 거룩이 아니다. 지혜는 거룩이어야 해요. 그런데 지혜가 거룩이 되지 못하고 여기에 솔로몬이나 인간이 끼어드니까 인간은 그 지혜를 자기 소유화시켰다 이 말이죠. 소유화되면 이건 뭐냐? 나의 공간이 되고, 그 공간 안이 나를 위한 공간이 돼요.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 자체,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는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말씀의 대행자거든요. 그래서 솔로몬 후기 이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냈다는 말은, 다시 옛날 다윗처럼 회복시키려고 선지자를 보낸 게 아니고 인간은 인간대로 망치고 선지자는 선지자대로 망치는 이유가 도대체 인간 본인도 모르는 어떤 죄들이 네 안에 작동하고 있는지 알리기 위해서 선지자를 보내는 거예요.

오늘날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는 이유가 딱 이거에요. 내가 나를 위한 공간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일에 열중해서 그래요. 자기 일에 열중하는 것은 자기 안의 공간은 자기 의미와 자기 가치를 계속해서 증진시키는 데 거기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나만의 공간이에요. 솔로몬과 똑같아요. 솔로몬이야 부귀영화나 누리기나 했지 이거는 누리지도 못하면서 자기세계밖에 몰라요.

다시 말해서 어느 인간도 선지자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내 공간은 내가 알아서 책임지고 할 테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일이나 볼 일 보고 나는 내 일 볼 일보고 오겠습니다.’ 이런 식이에요. 선지자가 찾아와서 푹 쑤시고 들어온다는 이 자체는 이거는 기적입니다. 이런 행운이 없어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왜 하나님이 나에게 특별히 관여해주십니까? 이런 횡재가 어디 있어요? 하나님의 간섭받는 사람이 뭐 흔한 줄 아세요? 거의 없어요, 하나님의 간섭받는 사람이.

내가 문장을 하나 적어보겠습니다. ‘인간이 자기 일에 매진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건방진 일인 것을 인간은 모른다.’ 자기 공간에 자기가 딱 들어앉아서 바깥으로 나올 생각을 못합니다. 누가복음 23장 28절, 29절에 이런 말씀 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끌고 가고, 시골에서 올라오는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잡아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님은 쫓아가고 그걸 보면서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애통하게 여겼느냐 하면 여기 성경대로 하면 자기 가슴을 치면서 애통했다는 거예요. 저럴 분이 아닌데. 동정심이 막 일어난 거예요. 애처롭기 짝이 없고.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객관식으로 할게요. ①고맙다. 너희라도 위로해주니 참 힘이 나네. ②다들 자기 일에 바쁜데도 와서 내 일이 중요하다고 여겨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니 앞으로 너희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③나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 딸을 위해 울어라. 몇 번입니까? 그냥 운 게 아니고 가슴을 치면서 울었어요.

사람의 동정심과 사람의 애정을 그런 식으로 어디 있어요? 주님이 너무 매정하지 않습니까? 기껏 생각해줬는데 그냥 아무나 보고 웁니까? 그만큼 동정심이 가서 관심이 있어서 그냥 우는 척하는 게 아니에요. 가슴을 치면서 울었는데 요새 말로 “어디서 질질 짜고 있어? 너를 위해서 울어. 너희 집구석을 위해서 울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얼마나 차가운 반발입니까? 반대 반응이에요. 예상도 못했어요. ‘나를 위해서 울지 마라. 지 분수도 모르고 니 앞가림이나 해. 니가 더 심각해, 니가. 나 보고 동정하지 마. 네가 심각하다고. 네가 왜 나 보고 우는데? 우리는 편안히 있는데 예수님 혼자 고생한다고? 너희들 있는 자리가 과연 편안한 자리일까? 과연 그게 안심해도 괜찮은 자리일까? 어떻게 너는 네 집구석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해. 네 존재 공간에서 네가 왜 못 빠져나와?’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러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고 복음을 안 듣는 이유가 뭐냐? 자기 일에 정신 팔려서 그래요. 자기 공간에 매진해서 그래요. 그게 오만인데. 그게 시건방지기 짝이 없거든요. 왜? 그거는 거룩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자체가 문제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게 추잡스럽고 더러워요.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과 생각은 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거예요. 본인이 더럽다는 생각을 못해요.

이런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든 장치에 갇혀 있다. 우리는 이 안에서 모두 죄수들이다.” 이게 어떤 노래냐 하면, Eagles가 불렀던 그 노래의 가사에 이게 나옵니다. 인간세계 자체가 대한민국 자체가 미국 자체가 인간들이 만든 아이디어, 제도, 장치에요. 그러니까 레미콘이 돌아가잖아요. 그 안에 갇혀 있어요. 그걸 상징적 세계라 합니다.

인간은 모조리 인간이 만든 사회조직 안에 스스로 갇혀 있고 그 안에서 모두가 죄수들이란 말이죠. 이 가사를 보면 우리 죄수들은 그 안에 주인, 곧 짐승을 위한 날마다 파티를 열어야 되는데 그 짐승은 날카로운 칼로도 죽지 아니한다. 상당히 의미 있는 가사지요. 집에 가서 들어볼만한 노래지요. 기타로 6분이 넘는 연주곡이에요.

우리는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이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 아니에요. 선지자가 쪽에서 인정한 적이 없어요. 인간들 자기들끼리 인정한 거예요. 탄핵을 하니 마니, 이건 인간들이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레미콘 돌아가는 통 있지요. 아니면 오일장 장터에서 뻥튀기 하는, 그 안에 막 돌아가지요. 그 안에서 태어나서 그 안에서 돌다가 그 안에서 모퉁이에 보면 요양병원도 돌아가고 있어요. 거기서 치매 걸려 죽어요. 바깥으론 못 나옵니다. 갇혀 있어요.

그러면 선지자가 여기에 왜 동원되는 겁니다. 우리를 원래 우리 자리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선지자는 어느 자리? 솔로몬 자리? 아닙니다. 그거는 솔로몬 이후의 왕들은 솔로몬의 부귀영화를 탐을 냈어요. 이건 선악과 탐내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나 솔로몬 이후의 왕들이 하는 일은 점점 더 깊이 있게 추락하는 거예요. 와아 깊이가 있네, 이러거든요. 복음 이야기하니까 제삼자가 ‘야아 깊이가 있다’ 아무 소리 안 하고.

점점 더 어디까지 떨어지는지, 하나님께서 그 일을 벌이십니다. 왜냐하면 언약이란 게 그래요. 언약이란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획을 밀어붙이는 게 언약이에요. 그러니까 언약대로 인간은 망해주셔야 됩니다. 자기세계에 몰두하면서 이만하면 됐다고 하면서.

솔로몬이 범죄한 이유가 본처가 칠백이고 첩이 삼백이라 했어요. 천 명이란 여자를 거느렸는데 거기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어요. 바깥에 있는 이방나라의 인질 조로 사돈을 맺고 그 자녀를 이 안에 둠으로써 재력으로 또는 군사력으로 그 나라를 통치하는 비용보다도 그 나라에 중요한 공주를 인질로 함으로써 훨씬 더 비용이 싸게 먹히지요. 외교정책이죠.

문제는 그 공주들이 오면서 그냥 여호와 믿으러 오지 않고 자기 친정의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 그 당시에는 미국 같이 큰 나라니까 하늘의 복을 받은 나라니까 이스라엘 나라에 시집온 거예요. 따라서 솔로몬은 인질로 잡았지만 그쪽 시집보낸 그 나라는 스파이를 보낸 겁니다. 자기 나라에서 섬겼던 신을 그대로 왕궁에서 그 신을 섬기는 거예요. 그렇게 솔로몬을 지혜를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솔로몬이 물론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데 창세기 3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부자가 죽을 때 자식들 모아놓고 유산 나눌 때 큰아들은, 둘째는, 셋째는 이렇게 하잖아요. 큰아들은 촌에 있는 논밭을 네게 해라. 둘째 아들은 살고 있는 집을 네가 해라. 셋째 아들은 내가 빚이 10억 있는데 네가 대신 해라. 이렇게 나온다면 셋째 아들 기분 되게 나쁠 거예요. 그렇지요. 빚을 남기는 유산이 어디 있느냐.

주님께서 뱀과 여자와 아담에게 각각 유산을 남깁니다. 무슨 유산을 남기는가? 공통된 유산을 남겨요. 그게 뭐냐? 저주를 남겼어요. 그 저주의 유산의 일부가 우리고요. 우리는 그 유산을 대물림해서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적으로 보면 인생이란 벌 받는 중이다. 이게 인생입니다. 어떤 노력을 해도 이 벌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왜? 하나님이 주신 벌이기 때문에.

그래서 벌 받으면서 어떻게 감사와 기쁨이 나올 수 있는가? 벌 받는 중이란 소식을 내가 뭔데 나한테까지 일부러 성령님을 통해서 또는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주는 이 복이 보통 복이 아니에요. 왜냐? 남들은 모르지만 우리 원래의 자리를 알게 하실 정도로 우리한테 심히 관심이 많다는 뜻이에요. “너 벌 받고 있는 거야.” “고맙습니다.” “네가 육체의 힘든 것, 어떤 근심걱정도 네가 못 벗어나.” “고맙습니다.”

그런데 유산을 주는데 유산이 뱀과 여자와 남자가 다 달라요. 남자한테 뭘 유산으로 줬느냐? 이걸 줬어요. 창세기 3장 17절, 이 순간 여자들은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아내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뱀이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을 때 꼬신 게 아니고 여자가 따로 있을 때 뱀이 찾아오게 하는 그러한 뱀의 방식을 하나님께서 다 지켜보고 계셨던 거예요.

이렇게 돼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남자와 여자가 부부잖아요. 처음에 창세기 2장에서 한 몸이잖아요. 이렇게 되면 남자와 여자는 타인이 돼요. 남이 돼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아담아, 너는 네 몸에서 떨어져나간 여자의 말을 들었다.’ 그러면 뭐냐?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 누가 끼어들었단 말입니까? 여자의 말이 끼어든 거예요. 여자의 말이 끼어들면서 누가 덩달아 끼어듭니까? 뱀의 말이 같이 통으로 겸해서 끼어든 게 돼요.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아 왜 같은 인간의 말을 듣고 사느냐,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인간은 누구 말을 들어야 돼요? 계명과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지요. 그래서 다윗에게 언약을 줬잖아요. 그러면 인간 입장에서 이렇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꼭 고집해서 들을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같은 인간들끼리 말을 들으면 되지요. 인간의 말 들어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하고 가정이 화목할 수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이렇게 반발 나올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솔로몬 짝이 나는 거예요. 말씀을 많이 아는데 이게 거룩으로 이어지지 않은 거예요. 거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거룩으로 나타나지 않음이란 뭔 뜻이냐 하면 모든 게 모든 행동과 마음과 말과 태도, 생각 전부 다 추잡스럽고 더럽다는 거예요. 인간에게 나오는 것은 모든 게 더럽고 추잡다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따라서 인간에게는 살 권한도 없고, 추잡고 더러운데 무슨 살 권한이 있어요. 인간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권한도 없고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는 그런 자격도 안 돼요. 추잡고 더러운데 나온 언어의 나열과 행동과 태도를 보이는데 모든 게 추잡고 더러운데 무슨 응답을 해요. 뭘 들어줍니까? 안 들어주지요.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아까는 조용했지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어떤 사십 대의 여자 초등학교 교사가 수업 중에 있는데 학교 운동장에 검은 세단차가 오더니만 그 선생님을 불러내서 남자 넷이 납치해서 차에 태우려고 하니까 그 여자 선생님이 도망갔어요. 도망가니까 끝까지 따라와서 납치해 갈 때 그때 그걸 본 아동들 칠십 명이 우리 선생님 내라고 뒤따라갔어요. 부산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우리 선생님, 왜 데려가’ 했어요.

여기서 묻습니다. 누가 나쁩니까? 여자를 납치한 남자가 나빠요, 안 그러면 그 뒤따라가는 아동들이 나쁩니까? 어른들끼리 하는 일에 우리가 관여할 게 뭐 있나, 아동들이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고 우리 선생님 살려달라고 했고. 결국 그 남자 네 사람 다 잡혔어요. 한 사람은 목사고 세 사람은 같은 교인, 남자 집사님인데 이 초등학교 여자 교사가 돈을 떼먹고 도망친 거예요. 돈을 안 갚은 거예요. 그런데 그 내막을 아동들 칠십 명이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지요. 아동들 칠십 명 따라가면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 선생님 살려주세요’ 기도했을까요?

인간은 자기가 존재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추잡고 더럽습니다. 인간이 동정 받을 가치도 없고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도와달라고 입을 벌려서 할 수 있는 그런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분수를 몰라요. 모든 게 선물인데 그걸 몰라요. 그런데 누가 봐도 그 납치한 사람은 나쁘고, 돈은 몇 억 떼였겠지만. 목사까지 왜 그러냐? 큰 교회는 돈 빌리고 안 갚고 그런 게 있어요. 타인을 이용해야 자기가 사니까.

이 비슷한 사건인데 확실한 내막에 대해선 내가 자신 못합니다. 또 확실한 내막도 모르면서, 이러는데 하여튼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사건 일어나도 거기서 선한 사람은 있다, 없다? 어떤 사람도 선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인생이란 자체가 벌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선한 척하는 사람들 굉장히 많아요. 정말 안 더럽고 안 추잡한 사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같은 인간들의 말을 듣고 살아요.

인간들의 말은 그렇게 잘 들으면서 선지자의 말씀, 성경의 말씀, 성령의 말씀은 안 들어요. 왜? 왜 안 듣지요? 글쎄 그 이유가 불분명해요. 왜 성경말씀을 안 보고 왜 성령께서 쓰신 성경의 말씀을 안 듣느냐 말이죠.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무슨 말씀입니까?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분명히 여러분 기억하고 있지요, 그 말씀 있다는 것.

그런데 어떤 돌싱인지 아가씨인지 나이 사십 가까이 서른다섯 되어 솔로에 나갔다칩시다. 27기 영숙으로 나가서 27기 영수와 만나서 테이트권을 사용하면서 하는 말이, “광수씨 할 말이 있는데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대번 편집되어 잘리겠지요. 갑자기 쑥 언어폭탄을 당한 남자가 뭐라 하겠어요? “저 영숙씨 이 자리는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는 자리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면 영숙이란 사람이 하는 말이 인간과 인간이 말하는 회담은, 트럼프와 젤렌스키나 푸틴이나 어떤 회담도 전부 다 하나님 보시기에 추잡고 더러운 이야기밖에 안 나옵니다. 어떤 것도. 같잖은 이야기밖에 안 나와요.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들 하는 모든 대화는 내가 만들어서 내가 그 안에 기거하고 있는 그 세계를 어떻게 지켜내고 그 안의 나를 어떻게 살려 내느냐와 관련돼 있는 그러한 발언, 그러한 내용만 나오게 돼 있어요.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앞에 커피가 있는지 쌍화탕이 있는지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게 바로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이야기에요. 두 사람 둘 다 타락한, 그러니까 망가진 더러운 솔로몬의 재탕이죠. 여기에 누가 끼어든다 했습니까? 선지자 아히야가 끼어듭니다. 역대하 12장에 보면 선지자 아히야 말고 11장 2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누굽니까? 스마야 나오지요. 아히야 시절은 가고 스마야로 가죠. 12장 7절에도, “여호와의 말씀이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어떻습니까? 너와 나, 추잡고 더러운 인간과 인간 사이에 누가 끼어듭니까? 선지자 끼어들지요. 썩어빠진 솔로몬의 재탕 속에 하나님의 다윗의 언약이 여전히 살아서 여기서 작용하고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 언약의 선지자가. 이 끼어듦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이 거룩이란 개념에 대해서 정리를 해줄 필요가 있어요.

거룩: 깨끗함, 이렇게 되잖아요. 왜냐하면 거룩이 아닌 게 추잡고 지저분하고 더럽다 이렇게 되겠지요. 거룩은 반대말입니까, 뭡니까? 깨끗함이 되지요. 그런데 사람 속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 속에는 어떤 게 들어있냐 하면 선악지식이 들어있어요. 그러면 거룩함이란 뭘 벗어나요? 선악지식 말고 깨끗함, 선악지식을 벗어난 깨끗함이 주어져야 되겠지요. 선악으로 깨끗한 것은 지저분하고 더러우니까. 선악과 관련 없는 선악체계 말고 따로 존재하는 깨끗함이 주어져야 되겠지요.

그게 어디 있느냐 하면 모세의 율법 안에 들어있습니다. 출애굽기 27장 21절에서 21절 누가 읽어주시겠습니까?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성막 안에 뭐가 있지요? 등불 있지요. 보통 성막 밖에도 등불이 있잖아요. 그런데 위치가 어디 안입니까? 세상 인간들 추잡고 더러운데 있는 등불 아니고 특별한 등불이 어디 안에 있습니까? 성막 안에 있는 등불, 성막 안이라는 특수한 공간 안의 등불이기 때문에 그 등불은 거룩으로 빛나는 등불이 돼요. 거룩 안에 있는 등불이죠.

이 등불을 모세언약에서 다윗언약으로 넘어오면서 다윗의 등불이란 이름으로 이스라엘 속에 계속 그것을 작용할 수 있도록 내가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건 아까 보셨지요. 열왕기상 11장 36절에 내가 다윗의 등불을 거기 둔다고 했지요. 나라가 쪼개지든 추잡고 더럽든 관계없이 다윗의 언약은 등불로써 빛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등불의 의미는 뭐냐? 10분 후에 하겠습니다.

 

 

 

20250307b 울산강의-역대기하(10강) 11장 2절 : 더러운 세상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성경을 치워버린다, 성경을 안 본다. 그러면 남는 건 뭐냐? 그럼 우린 어디 안에 속하는가? 성경이 없다고 했을 때 인간은 어디 안에 속하는가? 인간은 바로 이것 안에 속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시간 안에 속해져 있습니다. 시간은 인간에게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해요.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한다는 걸 다른 말로 고치면, 여전히 자기에 대한 집착성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 안 죽었다’ 이 말이죠. 배가 아직 열두 척 남아 있다는 거예요. 건물 열두 채 같으면 괜찮아요.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 때려죽여도. 이게 뭐냐? 시간이 해결할 거예요. 미래에 언젠가는 내가 희망의 파랑새를 볼 것이고 행복을 쥘 것이다. 그러면 선지자의 말씀은 뭐냐 하면 아주 야속하게도 이미 시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살아보면 알 것이다. 살다보면 뭐가 되도 뭐가 되겠지.’ 말씀은, ‘아니야 시간은 말씀 안에서 끝났어.’ 끝났다는 거예요.

성경을 안 보는 이유가 자기 미래의 희망을 여전히 남겨두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잘되는 그 미래상을 내가 일찌감치 접기 싫은 거예요. 포기하기 싫은 거예요. 근데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그 등불 있잖아요. 다윗의 등불은 어디 안에 있다 했습니까? 세상에 있지 않고 어디 안에 있다? 성막에 있지요. 이 성막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에요. 그 성막의 설계도가 시내산 위에서 온 거예요. 하늘에서 온 거예요.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왜? 인간의 머리는 추잡고 더럽기 때문에. 인간은 신전을 짓지 성막을 지을 수 없어요.

솔로몬이 여자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그 성전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신전으로 전락한 거예요. 신전으로 전락했다는 말은 여호와는 신이 아니란 말이 아니고 여호와는 여럿 신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여럿 신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골라먹는 재미가 있지요. 서른세 가지 아이스크림 같은 경우에. 여호와를 선택하든 다른 신을 선택하든 그건 내 마음대로다. 그러한 골라먹는 대상으로 전락한 게 여호와였어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란 부동산이니까, 그리고 백성들이니까. 하나님은 그게 바로 추잡고 더럽다는 생각, 그 희망을 갖는 자체가 추잡고 더러운 거예요.

예를 들면 추잡고 더러운 게 뭐냐 하면 앞으로 교회 교인수가 얼마나 늘어날 것인가, 이게 추잡고 더러운 짓이에요. ‘앞으로’란 뭡니까? 시간은 이미 말씀에서 지배당하고 있는데 앞으로란 미래에 대해서 내가 어떤 연결고리를 만들어보겠다는 거예요. 나와 관련된 내 의미와 관련된 미래를 따로 어떤 노선을 형성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사는 재미고 보람이라는 겁니다. 장래가 결정됐다면 내가 굳이 살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렇게 나오거든요.

내가 살 이유가 없다는 고백이 누구 고백이냐 하면 바로 사도 바울의 고백이에요. ‘주님 제가 추잡고 더러운 세계에서 언제까지 있어야 됩니까? 빨리 데려가 주세요’ 이게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어요. 왜냐? 이 세상은 새 언약에 의해서 보게 되면 모조리 추잡고 더러운 거예요. 추잡고 더러운 중에 가장 추잡고 더러운 것은 바로 우아하고 고상하고 성스럽고 희생적인 것, 이것보다 추잡고 더러운 게 없어요.

인간은 선악지식을 갖고 있잖아요. 그러면 인간의 추잡고 더럽다고 하는 것은 흉악한 악질과 사기, 살인, 간음, 흉포한 폭력적인 것, 인간의 머리에는 이걸 악으로 규정한다고요. 거기에 비해서 약한 자, 이런 것을 선으로 봐요. 인간은 선이 없는데. 인간은 선이 없어요. 정녕 죽어야 마땅해요. 그런데 인간은 선을 행하면서 어떤 노림수를 갖고 있느냐 하면, ‘저 착할 테니까 죽이지 마세요. 바르게 살 테니까 죽이지 마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저 죽이지 마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제가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추잡고 더러운 거예요. 이게 어디서 꼼수를 부리고 있어. 이게 다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성막은 죽은 자만 받는 장소에요. 심지어 제사장도 죽은 희생의 피를 바르고 그 성막에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산 자는 못 들어가는 곳, 산 자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이걸 하나님께선 친절하게 유월절로 알려줬습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유월절 날 집마다 모든 명패가 똑같다고 했지요. 똑같은 명패를 달았어요. 이 씨 집안, 권 씨 집안 이걸 단 게 아니고 우리 죽었어요, 우리 죽었어요. ‘우리 집안은 죽었습니다’ 명패가 달린 것 보고 천사가 와서 ‘죽었데. 넘어 가.’ 넘어간다고 passover유월절. 그냥 넘어 가, 그게 유월절이잖아요.

오늘날 성도의 명패는 뭡니까? 죽은 예수님의 이름을 앞에다 세우는 거예요. 십자가를 앞에 거는 거예요. 십자가에다 어느 교회, 이런 것 좀 하지 말고 그냥 십자가. ‘울산제일교회’ 이런 것 좀 하지 말고, ‘교우의 집’ 하지 말고 그냥 십자가. ‘저 이미 죽었어요’를 내세우는 집이에요. 죽었다는 말은 뭘 죽었다? 시간상 이미 끝 속에 시간이 끝났을 때 생겨나는 공간 안에 속했다는 뜻이에요. 그게 바로 언약 속이에요.

언약은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더럽다고 규정 내렸다. 언약이 한 것은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이미 마땅하다고, ‘정녕 죽으리라’ 죽어 마땅하고 더럽다고 이미 규정을 내린 것이 언약이고 그 언약책이 무슨 책입니까? 구약이고,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신약이 언약책이에요. 그래서 신약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내 피를 마셔라’해요. 피는 어떤 경우에 발생하는 겁니까? 피는 멀쩡한 데 생기는 겁니까? 막 헌혈할 때 생기는 겁니까? 뭔가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살의 주인공, 피의 주인공이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생겨나 언약의 공간이 있어요. 새로운 공간. 새로운 공간 안에 네가 들어와야 네가 바로 모든 시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게 새 언약이에요. 방금 언약은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더럽다고 했지요. 이 언약이 신약이 되면 이렇게 바뀌어요. 성령님은 시간 속의 모든 것을 더럽다고 규정했다. 왜냐? 성령은 누구의 영이냐 하면 고린도후서 3장 끝에 보면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에요.

성령이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찾아왔다는 거예요. 찾아와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나는 인간 보기에 이미 죽었다는 세계에 살고 있는데 이 세계가 바로 영생의 세계고 천국이다.’ 그 이야기를 성령이 하시는 거예요. 왜 죽이는가? 시간 속에 있는 것은 모조리 다 추잡고 더럽기 때문에 이거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그래도 안 봅니다. 성경을 치워버려요. 성경을 치우면 아까 이야기했지만 그걸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을 치우면 남는 것은 이거에요. 시간이란 무색, 무취, 그것도 정도 없는 무정한 의식뿐. 어떤 의식? 뭔가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의식. 이게 바로 인간세계에서 시간이에요. 세상에서 이해하고 있는 시간은 뭐냐? 과거에서 미래로 뭔가 흘려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걸 인간은 의식적으로 의식하고 있어요.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인간이 어떻게 의식하느냐? 인간 속에 기억 속에 지나간 일과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일과 앞으로 고대하는 일, 이 세 가지가 인간 의식 속에 있으니까 그 셋을 나열해보면 시간이 강물처럼 흐르는 거죠. 그래서 내가 있는 한 시간의 지배를 받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있다는 말은 내 속에 기억이 있다는 말이고, 내 과거를 생각 안 할 수 없는 거예요. 과거를 모르고 미래 모르는 그걸 치매 환자라고 합니다. 자기 아들보고 ‘아저씨 누구세요’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제가 하는 말은, 시간이란 그 자체가 내가 누구냐를 알려주지 않고 있다는 거예요. 과거의 나만 의식하고, 현재의 나만 의식하고 앞으로 잘될 것을 미래 상상하는 나니까 결국은 나나나나, 나, 나, 나 하루 스물네 시간 꿈속에도 생각하는 것은 오직 나뿐인 거예요. 나만 생각하는 거예요. 뭐가 없으면? 성경 치워버리면 나만 생각한다고요.

누가 피를 흘리고 누가 살이 찢겼는지 그건 내가 안 죽었잖아,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 해도 또 거기다가 ‘나는 안 죽었어요.’ 선악과 따먹었다 해도 ‘나 선악과 구경도 못했는데 왜 자꾸 나한테 …’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나는 내 할 도리만 하고 잘하고 있습니다, 이러고 있다고. 성경 모르면.

로마서 5장 보겠습니다. 성경을 본다는 것은 세상이 끝났을 때 그다음에 세상이 다 망하고 난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새삼스럽게 세상을 보게 하는 안목이 주어지는 게 성경입니다. 세상이 다 끝나고 난 뒤에 끝. 세상은 규정되었어요. 더럽고 심판받아 마땅한, 멸망 받아 마땅하다고 이미 다 죽은 세상이라고 결정 난 뒤에 세상을 다시 보는 거예요. 왜 인간은 죽어 마땅하지? 왜 나는 죽어 마땅하지? 왜 한 평생 사는 게 이렇게 힘들고 괴롭고 어렵고, 왜 이렇게 공포스럽고 무섭고 떨리고 두렵고 염려걱정이 늘 찾아오는 이유가 뭐지? 그걸 다시 보게 되는 거예요.

로마서 5장에 보면 7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이렇게 돼 있지요. 이게 인간이 생각하는 선악체계의 한계입니다. ‘그래도 희생하는 의인이 있잖아. 그래도 선인이 있잖아.’ 그런데 바로 그게 뭐다? 그게 죄라는 거예요. 참 이게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자체가 죄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나 악합니다’ 하는 게 악이라는 거예요.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게 악이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것을 어느 시점에서 이야기하느냐 말이죠. 네가 죽고 난 뒤에 이야기하느냐, 아니면 안 죽으려고 지금 아부조로 하는지 그걸 따져보자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다른 말로 내가 시간을 끝내고 죄인이라고 하는지, 아니면 아직 내 시간이 남아 있을 때 구원의 시간의 남아 있을 때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십자가 피 외에는 희망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구사함으로써 내가 나를 건져보려고 하는 그런 아부성 발언이냐 이 말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도 착한 일이고, 내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도 착한 일이다.’ 그거는 선악체계지요. 이거 아부성 발언이지요.

지난 일요일 오후 때 갈릴레오 갈릴레이 자술서를 제가 설교시간에 읽어드렸잖아요. 그 점을 보충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태양이 도는 게 아니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겁니다. 이 갈릴레오 갈릴레이 말 맞아요, 틀려요? 질문 자체가 애매한 질문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1632년입니다. 어떤 답변을 할 때 이게 지혜와 지식이 맞았기 때문에 답변을 해요, 아니면 어떤 요령으로 하면 내가 더 살 수 있느냐, 그래서 미래에 희망으로 내가 살아남는 존재가 되느냐? 그걸 고려해서 답변합니까? 어느 쪽입니까?

지혜는 거룩이 안 되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지혜가 거룩이 안 되는 이유가, 다시 말해서 인간은 살아서 성막 안에 못 가는 이유는 같은 말로 인간이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이 거룩이 안 되는 이유는? 똑같은 말이에요. 그 안에 뭐가 끼어들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바로 솔로몬의 육체가 끼어드는 거죠.

인간세계에서 죄의 원천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위적인 죄, 두 번째는 자연적인 죄, 충동이죠. 욕망, 욕심, 악마의 능력 이런 거죠. 그러면 인위적인 죄가 자연적인 죄에 포함될까요, 따로 놀까요? 이미 포함돼 있어요. 이걸 성경에선 뭐라고 하느냐? 이걸 육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에서는. 육 자체가 이미 악마가 접수했어요. 육은 주인이 있는데 육의 주인은 누구냐 하면 악마입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 죽기를 무서워해요.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왜 죽으면 안 되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까, 왜 여러분 죽으면 안 돼요? 늙어죽는다는 것은 다 아는 지식이죠.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아무도 거기서 반대 안 합니다. 반대하지 않고 다 동의한다는 것은 적어도 인간세계에선 진리잖아요. 진리인데 진리에 거역하고 모순되는 행동을 왜 합니까? 이게 모순 아닙니까? 이상하잖아요. 진리 같으면 진리를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살고자 하지요? 왜 역으로 나가지요, 왜 억지를 부리지요? 누가 억지를 부리게 합니까? 그걸 인간은 모른다니까요.

죄 지어서 교도소 갔습니다. 교도소 가면 죄수잖아요. 그래서 교도관이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고 죄수로 대우하니까 죄수들이 기분 나빠하는 거예요. 그러면 본인이 죄수라고 말은 거짓말이에요, 참말이에요? 본인이 자연적으론 죄수 맞는데 인위적으로 그래도 양심은 있고, 남한테 착한 일했습니다. 선악체계가 작동하니까 이게 인간이 자연스럽지도 못해요.

제가 수요일에, 죄수 주제에 왜 구원을 넘봅니까? 이게 말이 돼요? 죄인이면 어디 갑니까? 지옥 가야지요. 천국을 왜 넘봅니까? 이게 딱 걸린 거예요. 누가 해요? 악마가 인간의 정신과 모든 육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게 티가 확 나는 거예요. 이게 교회에서 죄인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데 교회 바깥은 뭐냐 하면 어릴 때부터 부모를 잘 섬겼습니다. 이게 무슨 추잡고 더러운 짓이에요.

‘어릴 때부터 부모 말 잘 들었습니다.’ 뭔 뜻이에요? 그걸 둘둘 둘러서 이야기하지 말고 딱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뭔 뜻입니까? ‘나 더 살고 싶어’ 이 이야기라니까요. 그걸 빙빙 어지럽게 돌려서 이야기해요. 남은 죽어도 남은 망해도 남은 실패해도 나는 성공해야 돼. 왜? 어릴 때부터 부모를 공경했기 때문에.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추잡고 더러운 짓이에요.

아까 말씀드렸지만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원래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이미 죽은 자로 봐요. 살 권한이 없는 존재로 봐요. 살 권한이 없는 존재로 규정하는 이유는 간단히 이래요. 언약 안에 그러니까 예수님 언약 말고 새 언약 말고 그전에 율법 안에 성막 안에서 피가 있는데 그 피는 어디서 나온 피일까요? 성막 바깥뜰에 장치가 있는데 제단이 있지요. 제단의 기능은 뭡니까? 제물은 족족 다 죽이고 태우고 난리도 아니지요.

여러분들이 제물과 감정이입을 해보세요. 저 어린양 불탈 때 얼마나 뜨거울까, 이런 생각해봤어요. 여러분 오징어, 물론 맛있어요. 요새 오징어 얼마나 비싼지 한 마리에 8000원 한다면서요. 오징어가 석쇠에 얹어 연탄불에 구울 때 날 잡아 잡수세요, 팔 벌리고 죽던가요, 어떻게 하던가요? 감을 수 있는 것은 다 감지요. 오징어 다리가 열 개입니다. 여덟 개면 두 개 누가 떼어먹었다고 생각하세요. 다리가 오므라들면서 그게 오징어 볼 때 고통으로 감정이입이 되잖아요. 오징어야 해물이니까 인간과 덜 닮아서 그런데 그러면 양은요? 염소는, 소는요?

양을 잡으라 하는 것은 자기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나 개를 잡으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왜? 내 이름을 거기다 얹으니까. 개 죽었다고 장례 치루고, 우리 집 개 죽었다고 부고장도 내고. 부고장 내고 개 장례식에 참석 안 하면 인간관계 끝납니다. 단절됩니다. 네 결혼식 때 부조한 것 다 게워내. 그걸 절교라고 하죠. 개 때문에 절교하지요.

하나님께서 양과 소와 염소라는 것은 이게 인간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가축이기 때문에 그래요. 친히 기르시는 양이에요. 양 중에 하나 잡았다는 말은 너희 중에 하나 잡았다는 뜻이에요. 양 중에 잡거든 양이 빠진 그 자리가 너의 자리에요. 내 자리인데 빠져버려요. 내 대신 양 죽으면 내 자리가 이미 시간을 초과해서 시간을 넘어선 거예요. 모든 끝 시간을 넘어섰어요.

사랑 중에 제일 큰 사랑이 무슨 사랑입니까? 이건 뭐 개그도 아니고. 끝 사랑. 이게 아가에 나옵니다. 아가 8장에 나오는 건데 찾아보겠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 취소하고 싶다. (끝 사랑, 그것 취소) 8장 6절 누가 읽어보세요. 얼마나 사랑에 대해서 어떤 묘사를 했는지 사랑 해놓고 네모에다 어떻게 묘사했는지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여호와의 불, 여호와에서 출현되는 하나님의 맹렬한 그 심판의 불은 이 세상에서 사랑을 던져주고 이 세상으로 하여금 그걸 간접 체험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어디서 내 사랑을 함부로 건드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까 고린도전서 1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뭘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는 그 말씀이나 아가서 이 말씀이나 똑같아요. 사랑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죽음에서 나와요. 나를 죽여주는 게 사랑이라고요. 내가 죽는 게 사랑이 아니고. 이런 것도 참, 다 적어야 돼.

‘내가 죽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나를 죽여주는 것이 사랑이다.’ 천국에의 초대에요. “가자, 내 집으로.” “어디로요?” “거룩한 곳으로.” “그곳이 어딘데요?” “산 사람은 못 들어오는 곳으로.” “어머나, 나 더 살아야 되는데.” “시간은 없어. 끝났어.” “하나님은 안 살아보고 시간을 어떻게 압니까?” “내가 다 살아봤거든.”

왜? 내가 시간을 지배하기 때문에. 언약이 지배해요. 시간은 우리가 하기 나름대로 미래가 결정되는 게 아니고 이미 말씀대로 미래는 확정 났어요. 그러면 성도가 살아 있는 것은 죽은 채로 살아 있는 거예요. 이번 수련회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박테리오파지 기억납니까? 밖에는 단백질 껍질이고 안에는 그냥 DNA 덩어리만 있는 것. 성도는 안에는 뭐만 들어있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만 들어있고 껍데기는 아담으로부터 받은 육신의 껍데기만 그대로 있고.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와 똑같은 구조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껍데기 이제는 좀 벗으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디모데후서인가 보면 죽을 때 되니까 사도 바울이 신나서 제대한다는 기쁨 때문에 이제는 나의 갈 길을 추잡고 더러운 데서 고만 안 싸돌아다녀도 되니까 나는 너무 좋다. 이제는 주님과 얼굴과 얼굴로 마주볼 것이고, 고린도전서 13장에 지금은 육체 때문에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주님 얼굴을 만나볼 날을 기다리니까 내가 너무 설렌다, 마음이. 말리지 마. 설렌다, 기쁘다.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의 영이 나로 하여금 우리에게 이제는 미래에 주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내 육신을 벗을 날이 온다고 했어요. 고린도후서 5장에는. 지금도 주님과 함께 있는데 이 육신 때문에 추잡고 더러운 자연적인 욕망, 죄 있는 요소가 가득해서 자꾸 주님을 말해야 될 건데 세상적으로 육신의 본성, 자연적인 본성 쪽으로 끌려가니까 결국은 성령께서 우리를 책망해주시면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오지만 다시 주님 사랑을 회복하겠지만 그러나 그때까지 그 사랑으로 돌아오기까지가 너무 힘들어요.

아까 두 가지했지요. 자연적인 죄와 그리고 인위적인 죄를 주님께서 어떻게 해결하는가? 그 모든 시간을 언약에다 담아서 언약 안으로 들어오게 하면 우리는 시간이 어떻게 진척하던 간에 그것은 우리 육체가 망해도 싸다, 라는 그 점에 깊이를 더 해가면서 얼른 이 육체를 벗어나면 좋겠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주께서 주의 가신 곳으로 끌려가게 되지요.

인간의 죄라는 것은 쉬운 예로 이렇습니다. 여러분 마요네즈 있잖아요. 마요네즈 튜브 짜면 마요네즈 나오지요. 그런데 쓰다보면 말랐을 때 끝까지 짜면 뭐가 나와요? 케첩 나옵니까, 마요네즈 나와요? 마요네즈 나오지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나이 구십 될 때까지 끝까지 짜면 죄 나옵니다. 그 죄가 무슨 죄입니까? 선악체계지요. 바르게 살겠다는 그 선악체계. 힘들게 살겠다는 선악체계. 그거는 구실이고 진짜는 뭐냐? ‘나 살고 싶어. 나 죽기 싫어.’ 그거 나와요.

출애굽기 34장 6절,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여기 보세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신다는 말이 무슨 취지로 이 말씀하신 거예요? 원래는 너희들이 노하기를 더디하실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뭘 줬느냐 하면 돌 판, 하나님의 율법을 주시면서 그 노함을 계속 유보시키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자애롭고 은혜롭고 자비로운 모습이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 들을 때 잘 들어야 돼요. 오히려 그 자비와 사랑이 되게 무서워야 돼요. 사랑보다 더 무서운 게 없어야 돼요. 아까 아가 8장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뭐 같이 무섭다? 지옥처럼. 저주가 나오는 불처럼 사랑이 나온다 했어요. 그러니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것 ①귀신. ②사기 당함. ③공개적으로 망신당함. ④사랑. 몇 번이에요? 사랑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는 나로부터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김수희가 불렀던 노래(애모) 가사에 그런 게 있지요. 그대 앞에 서면 왜 나는 커지느냐? 아니지요. 그대 앞에서는 왜 나는 작아지느냐. 그대가 너무 좋아서 나는 그대 앞에 서지 않고 어디 서겠다? 뒤에 서겠다. 옛날 초콜릿 광고 어떻게 했습니까? 사랑의 달콤함을 묘사하기 위해서 초콜릿 한 입 물더니만 여자가 남자의 수트 안에 숨고 얼굴만 반쪽 내밀면서 ‘달콤해요’ 하면서 초콜릿 이름을 이야기하든가 하지요.

사랑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무래도 좋아요’ 이 말입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얼굴 보니 다들 그렇게 살고 있거든요. 별 내세울 만한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고.

역대하로 들어가 봅시다. 역대하 르호보암에서 두 가지 요소가 다 나옵니다. 하나는 르호보암이 타락한 솔로몬의 모습이 나와요. 맨 육체적인 육체를 그대로 인수인계 받았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그 자식이기 때문에 범죄한 솔로몬의 모습이 르호보암 밑에 깔립니다. 기본이에요. 깔리면서 희한한 일이 생겨요. 깔리면서 제삼자 누굽니까? 스마야 선지자가 여기서 끼어들지요.

우리 이야기로 보세요. 우린 아담의 기본 육체를 받아요. 받으면 우리는 누구 위주로 삽니까? 철저하게 나 위주로 삽니다. 솔로몬까지는 너무 심하고 솔로몬만큼 잘 되기를 바라는 건 너무 욕심 같고 그저 삼성 정도, 현대 정도는 그거는 누릴 만하다. 뭐 이 정도하지요. 그런데 이게 내가 평생토록 일구어낸 내 공간이잖아요.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어려운 말로 맹아적 자기 공간. ‘맹아적’이란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씨앗 같은 것, 원래 원초 씨앗이 싹을 틀 때 맹아(萌芽)라 해요. 내 세계의 맹아는 씨앗은 나에요. 그래서 어떤 어렵고 힘들더라도 나를 거기서 철수를 못 시킵니다. 내 힘으로 내 세계를 빠져나온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아무리 해도 내 세계에서 빠져나오질 못합니다. 맹아적 공간이에요.

이걸 누구한테 인수받았어요, 르호보암은? 솔로몬한테 인수받았어요. 그러면 여러분한테 오늘 공부를 했으니까 물어봅니다. 솔로몬에게 인수받은 것 이게 맹아적 자기 세계죠. 르호보암, 자기가 왕이니까. 그러면 솔로몬을 통해서 이것 말고 또 딴 것 받은 게 없을까요? 있지요. 그게 뭐다? 다윗언약이에요. 다윗언약의 절정은 솔로몬의 부귀영화가 그게 정점에 이르렀지요.

이제부터 남은 것은 뭐냐? 솔로몬의 후손들에게 남은 것은 그것이 어떻게 와르르 바닥까지 무너지느냐 그 작업에 누가 끼어들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끼어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이 아는 죄 말고 하나님이 아는 죄로 유도하고 있어요. 언약이. 인간이 내가 판단한 선악 말고 심지어 내가 선도 악이 된다는 그 깊이까지 성령께서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쁩니다, 죄인입니다, 나는 악한 자입니다’ 그 말도 죄라는 거예요. ‘내게 언약이 왔습니다’ 그 이야기해야지 ‘나는 나쁜 인간입니다’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게 아니에요. 언약이 내게 찾아왔습니다. 찾아왔다는 말은 나는 이미 죽은 자로 다뤄지고 있었고, 언약이 하는 일에 말려들었습니다. 언약이 하는 일은 뭐냐? 우리로 하여금 숨 끊어지는 일 아니고, 여기서 ….

죽음이란 두 가지 있지요. 생물학적으로 자연적으로 숨 끊어지는 것, 또 하나는 율법 앞에서 우리가 뭐로 드러나는가?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 이게 죽음입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것. 나는 선을 원해도 내 속의 악이 선을 이겨서 내가 선하지 못한 것, 이게 죽음이에요.

인간의 숨 끊어지는 것, 이걸 두려워하는 것은 악마가 하는 짓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드러나는 것은 이거는 언약이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이에요. 어디까지 가게 하는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죠. 십자가 앞까지 이끌어내요.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가셨으니까 그걸 답습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그러니까 갈수록 십자가가 사랑이라는 것, 주께서 언약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면 어떻게 내가 십자가까지 십자가가 크게 보이기까지 이끌림을 받겠는가? 이거는 하나님이 찾아왔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자랑할 것은 뭐밖에 없다? 십자가밖에 없다.

지금 르호보암은 어느 위치냐? 그 신약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걸음마, 그 단계를 이제 솔로몬부터 바닥까지 내려가는 첫 단계를 르호보암이 한 거예요. 르호보암에 뭐가 있다? 두 가지가 다 나타나요. 하나는 뭡니까? 르호보암이 교만 떤 거예요. 그게 11장에 보면 1절에,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와 베냐민 족속을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 팔만이라” 엄청 많지요.

원래 고대국가에 있어서 근대국가도 마찬가지지만 상비군의 숫자가 전체의 1% 이상을 잘 못 넘어요. 상비군 숫자가 1% 넘으면 국가재정이 파탄 납니다. 여기서 군대라 하는 것은 상비군이 아니고 준상비군, 농사짓다가 소집하면 가는 것, 그것도 전체 인구의 20%, 남자 열 명 중에 세 명 정도만 되지 그 이상은 못 뽑게 돼 있어요. 국가재정 상태가 그래요. 무기도 사야 되지요. 군에 가버리면 농사는 누가 짓습니까? 전쟁 이기고 농사는 망치고, 그러면 경제적으로 손해가 돼요.

그런데 여기에 십팔만 왔다니까 어떻게 돼요? 엄청나게 많은 거예요. 그 당시 인구라면. 남쪽 유다만 생각했는데도. 한시적이죠. 그때 누가 끼어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인간적인 양성된 신학교 출신 목사 같으면 뭐라 하겠습니까? “임금님이여 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해서 이기게 해주셨습니다.” 이럴 건데 이거는 다윗언약 노선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반드시 솔로몬 이후의 나라는 이스라엘이 망해야 된다는 쪽에서 왔기 때문에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임금님 싸우지 마세요.” 그래서 르호보암이 싸웠습니까, 안 싸웠습니까? 안 싸웠어요.

그런데 점점 더 르호보암 후대에 들어가면 누구 말 안 들어요?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선지자 말을 안 들어요. 지금은 초반이니까 걸음마 단계니까 말을 들어요. ‘아이고, 착하기도 하여라.’ 세상에 이상하게 말씀을 듣다니. 여기 12장 5절에 보면, “때에 유다 방백들이 시삭을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라” 시삭이란 적인데요. 12장 1절에,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희한한 광경이죠.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한데 여호와의 율법을 왜 버립니까?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면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면 되잖아요. 그게 왜 안 되지요?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면 덩달아 누가 강해져요? 이 나라는 내 공간이다. 내 삶의 공간으로 이게 전환돼요.

여러분들이 말씀을 사랑해주시니 고마운데 하나님이 각자 26억, 45억, 86억 주게 되면 그 돈 관리하는 시간이 많이 빼앗기기 때문에 금요일 이 시간에 나올 수 있어요, 없어요? 돈도 안 되는 걸 왜 참석합니까? 돈이 안 되잖아요. 돈이 말해주는 사회에 돈 집에 86억 있는데 이걸 굳이 왜 해야 되느냐 말이죠. 혹시 미신에 빠져서 이것 안 하면 86억 날아갈까 싶어서? 그런 걱정은 하지 않겠지요?

르호보암도 솔로몬의 육체를 인수인계 받았어요. 솔로몬의 범죄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뭡니까? 아담의 범죄를 그대로 보여주지요. 그래서 뭔가 잘 먹고 잘 살면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면 지금 교회를 착실히 다니고요 말씀 잘 듣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십자가는 버렸습니까?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 되겠는데 ….

지식이 우리를 나를 죽은 자로 만드는 게 아니고 도리어 지식이 나를 산 자로 굳건히 한다는 거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거룩은 죽은 자와 함께 있을 때 거룩이에요. 이게 본모습인데 우리의 타락한 신체는 자꾸 하나님 없이 내가 살아 있잖아. ‘거울 봐. 내가 살아 있잖아. 살아 있는 한 나는 더 살고 싶어.’ 이게 우세가 돼 있단 말이죠.

그럴 때마다 스마야 같은 선지가가 임해서 잔소리를 해야 되는데 여기 보면 6절에,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가로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 여호와께서 저희의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저희가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대강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으로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고 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르호보암이 솔로몬만큼 영광을 찾겠구나. 아닙니다. 시삭이 올라와서 치는데 9절에,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몰수히 빼앗고 솔로몬의 만든 금방패도 빼앗은지라” 빼앗기니까 르호보암이 놋으로 금방패가 있던 자리를 지키게 했어요(10절). 이게 얼마나 서글프고 초라한 결과입니까.

좀 겸비했으면 금방패라도 안 빼앗기면 좋겠는데 빼앗길 대로 빼앗기고 마음은 겸비하고 이렇게 초라하기 짝이 없는 놋방패를 했다. 이거는 뭡니까? 그거라도 고마운 줄 알아라. 지금 우리가 밥 세 끼 먹고 사는 것, 오늘 다이어트 한다고 두 끼 잡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잠잘 자리 있다는 것 이거라도 어딘 줄 알아라, 이것들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의 하나님의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신 그 흔적으로 여러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생각과 우리 생각이 이처럼 차이 나는지를 몰랐습니다. 내가 살고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했는데 주께선 그것조차 죄라고 규정하시고 친히 찾아오셔서 그걸 지적해주시니 늘 말씀의 지적받는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없는 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울산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그림자  (0) 2025.04.06
좁혀진 길  (3) 2024.12.08
지혜의 확장  (1) 2024.11.04
번제로 통치  (5) 2024.10.06
가로막는 주님  (1) 2024.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