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하나님의 그림자

아빠와 함께 2025. 4. 6. 09:09

20250404a 울산강의-역대기하(11강) 13장 5절 : 하나님의 그림자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13장, “여로보암왕 제 십팔 년에 아비야가 유다 왕이 되고 예루살렘에서 삼년을 치리하니라”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왕입니다. 남쪽에 있는 나라가 유다지요. 아비야가 왕이 되고, 그렇게 시작됩니다. 근데 아비야가 여로보암과 더불어 전쟁을 합니다. 3절에, “아비야는 택한바 싸움에 용맹한 군사 사십만으로 싸움을 예비하였고 여로보암은 택한바 큰 용사 팔십만으로 대진한지라”

아비야는 사십만, 여로보암은 팔십만. 배가 되는 군사로 한 번 붙자고 합니다. 먼저 시비 거는 쪽은 남쪽 아비야가 여로보암에게 도발을 하는 겁니다. 전쟁을 하자. 전쟁을 해야 된다. 사십만으로 팔십만을 도발해서 북쪽 이스라엘, 그러니까 대한민국 군대가 북한 인민군과 붙어서 인민군 오십만이 죽어요.

그러면 도대체 전쟁이란 게 뭐냐? 전쟁은 왜 하는지 이것부터 우리가 따져봐야 되겠지요. 전쟁이란 망가진 인생의 내막을 들춰내는 것. 망가졌는데 왜 망가졌는지를 전쟁이 아니면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직장생활 전쟁이죠. 직장 내에서 전쟁하기 싫어서 퇴직하려면 보통 주위 사람들이 많이 말리죠. 회사에서도 말리고. 여기는 전쟁터지만 바깥은 지옥이다. 지옥보다는 전쟁이 낫지 아니하냐. 전쟁이 없으면 망가진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든지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전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전쟁은 죽음을 현실로 불러들여서 극단적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것.’ 죽음을 현실로 들였으니까 이 모습은 어떤 모습이냐 하면 극단적이죠. 부부싸움하고 말 안 할 때, ‘너 죽고 나 죽자’하죠. 상당히 극단적이죠. 너 죽고 나 죽자는 말은 살아남은 자가 정당하고 죽은 자는 정당치 않다는 걸 여기서 확인해보자는 뜻이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전쟁 없이 만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모두가 전쟁입니다. 네가 옳은지 네가 의로운지 내가 의로운지 붙어봐야 아는 거죠. 붙어봐야 아는 것은 하나의 협의, 거래, 흥정, 양보할 것, 협상 이렇게 되는데 전쟁은 그 정도가 아니고 극단적이에요.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누구 하나 죽자. 극단적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패배해서 우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 존재가 보잘 것 없는 존재, 소멸되어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을 이 잘난 내가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굴욕적인 모습이 너무나 참담해서 우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시험에 떨어졌을 때. 승진시험, 대학입학시험, 또는 자격시험에 떨어졌을 때, 또는 애인과 헤어졌을 때, 그리고 자녀가 아플 때 슬프지요.

슬픈 이유가, 나라는 가치가 애걔 기껏 이것밖에 안 되느냐는 자괴감 같은 겁니다. 전제가 뭐냐 하면 나 잘났는데, 내가 잘난 것과 내가 사회에서 확인할 때는 그걸 손에 쥘 수가 없지? 나는 잘 났는데 내가 잘난 만큼 세상은 그걸 인정 안 해준다는 거죠.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이 전쟁을 통해서 자기 확인하는데 수긍이 안 돼. 분노가 발생하죠. 화가 발생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강의를 완전히 결론부분을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천국은 초청해야 들어갈 수 있다.’ 초청 안 하면 들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세계의 전쟁은 인간과 인간 간의 전쟁이에요. 모든 전쟁은 인간과 인간 간의 전쟁이죠. 그래서 인간 간에 전쟁이 왜 일어나는가? 초청받지 못한 데에 대한 화풀이 차원이죠.

전쟁을 누가 하느냐 하면 내가 보기에 나 잘났는데 왜 하나님은 나를 천국에다 초대를 안 해? 그러면 ‘하나님 딱 기다려. 내 평생 당신 욕하며 살 거야’라고 하면서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몸짓이고 사고방식이에요. 초청받지 못한 자의 격분, 화풀이, 현실에 대한 분노.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이미 천국에 초청받아서 일방적으로 구원이 된 사람은 남과 싸우겠어요, 안 싸우겠어요? 싸울 이유가 없다니까요. 싸운다는 것은 상대를 이겨서 내가 얼마나 잘난지를 확인을 하는 목적으로 싸우는데 내가 잘났느냐, 못났느냐 신경도 안 쓰고 일방적으로 천국 와, 내가 시도하지도 않은 결과를 일방적으로 제공을 해버리니까 굳이 남 멱살 잡고 싸울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천국에 입성한 이것은 사람 대 사람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의해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초대하니까. 근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설정이 안 된 사람, 그러니까 레일이 안 깔렸어. 설정이 안 되어 남 신앙 생활하는 그것 흉내 내고, 남 구원받은 것 그대로 시도하고. 남이 이래서 구원받았다 하니까 그대로 따라 해보는 몸부림.

그 사람은 나름대로 지금 전쟁 중이에요. 구원이 안 됐으니까 악을 써서라도 악바리처럼 기어이 구원을 따내야겠다는 독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교회에서 뭘 해요. 하여튼 전도를 하든지, 헌신을 하든지, 예배 참석하든지 하는데 그게 분노에 입각해서 하게 됩니다. ‘하나님 이래도 날 구원 안 할 거요’ 하나님께 대드는 겁니다.

역대하 13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설정돼 있는 아비야라는 사람, 남쪽 왕, 남쪽 대통령. 반면에 북쪽 여로보암은 하나님과 레일이 안 깔려서 관계가 없어요. 남쪽은 언약적 관계가 설정돼 있으니까 언약, 북쪽은 언약이 없으니까 비-언약. 이 전쟁은 언약과 비-언약의 전쟁의 양상을 역대하 13장은 보여줍니다.

언약적인 관계가 있는 것과 언약적 관계가 없는 사람이 전쟁을 할 때 어떤 인식의 차이를 보이는가?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전쟁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실체가 어떤지, 또는 인간은 왜 망가져야 하는가를 들춰내는 방식이 전쟁을 하는 거다.

그래서 언약이 있는 사람한테는 뭐가 없느냐 하면 인생 패배라는 게 성립이 안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로마서 14장 7절의 말씀처럼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내 것도 아닌데 실패라는 게 성립이 안 되죠. 인생이 내 것이라면 인생 조졌다, 실패했다가 되는데 남의 것으로 실패, 성공이란 개념 자체가 수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남의 인생인데 걱정, 근심을 왜 하느냐?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내 것도 아닌데 왜 걱정, 근심이 드느냐? 바로 이게 하나님의 초청이라든지 언약관계가 우리가 평소에 늘 유지하면 참 좋겠습니다만 인간이란 게 육신의 욕망이 있어서 이걸 자주 까먹어요. 육신의 욕망이란 뭔 뜻이냐 하면, 글자는 육신의 욕망이라 했지만 사실 진짜는 ‘욕망에 조정당하는 육신’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못해요. 욕망에 조정당하는 육신이에요.

이게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DNA입니다. 도킨스라는 사람이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책을 썼잖아요.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뭐냐 하면 DNA가 현실화된 게 인간의 육신이라 했어요. 유전자 속의 DNA가 활성화된 게 인간의 키, 성격, 나이, 체중, 얼굴모양, 지문 이렇다. DNA의 정보가 확산되게 되면 우리 안의 인체가 되는 겁니다.

이게 DNA 절대주의고, 인간의 욕망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 DNA가 스스로 자기를 번식하려는 욕망에 의해서 인간의 몸은 모든 욕망은 움직이게 돼 있다. 먹는 것, 그리고 성욕, 그리고 꾸미고 싶은 욕심, 모든 욕심은 우리 내부의 DNA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번식하기 위한 일환으로 나타나는 양상들이다. DNA 일원주의, DNA를 최종 하나로 볼 때 나타나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병 같은 것, 성격 같은 것, 동일한 환경에서 똑같은 조건을 줘도 사람의 성격이 다 차이 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내장돼 있는 DNA의 정보의 차이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똑같은 감기약인데 어떤 사람은 낫는데 어떤 사람은 안 나아요. DNA 유전자의 차이 때문에 수술하든지 약을 먹어도 안 낫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약 안 먹어도 낫는 사람이 있고 그런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요. ‘인간은 죽어도 DNA는 죽지 않는다.’ DNA 불멸설. 자식은 부모의 50%를 닮고, 그 밑으로 가게 되면 12.5%, ⅛로 줄면서 부모의 유전자를 이어받지요. 그러면 사람이 배우자를 선택하겠다는 것은 내 DNA의 조정에 의해서 생식의 요건의 보여주는 일이죠. 그렇다면 이기적 유전자란 책의 내용대로 한다면 그 사람에게 진리는 뭐가 진리냐 하면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살고자 하는 게 진리라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딱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살고자 하는 거예요. 진리가 뭐냐? 내가 살아남는 게 나한테는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살아나고 난 뒤에 배부르게 행복하게 그건 나중 문제고, 기반에 깔려있는 진리는 내가 살아남는 거예요. 근데 성경에서 볼 때 진리는 뭐냐 하면 ‘정녕 죽으리라’입니다. 반대지요.

네가 늙어죽는 게 아니고 네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음이 네 안에 내포돼 있다는 사실을 주께서 그걸 삽입해서 퍼뜨린 거예요. ‘그것 봐. 백 년 살아도, 구백 년 살아도 죽잖아. 내 말 맞아, 안 맞아?’ 그거에요. 죽이는 이유는 네가 살 가치가 없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우리는 가치 없음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적으로 인간에게는 죽는 게 타당하고 죽는 옳아요. 백 년 동안 시커먼 소와 팔십 년 동안 시커먼 소, 어느 쪽의 색깔이 까맣습니까? 이건 질문 자체가 안 되는 거죠. 백 년을 지내든 이백 년을 지내든 새카맣기는 새카마니까. 인간의 죽음을 색깔로 검은 색이라면 팔십을 살든 요양병원에서 죽든 그냥 객사하든 그건 별 의미 없어요. 죽는다는 것은 똑같으니까요.

문제는 왜 죽느냐 하는 거예요. 동그라미 세 개 그릴게요. what 무엇이죠. how 어떻게? 세 번째, why 왜? 인간이 태어나서 주관의 폭이 좁을 때(어린아이) 하는 것은 뭐냐? 무엇을 하느냐? ‘욕망아, 욕망아 네가 무엇을 하고 싶으냐?’ 이런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DNA의 욕망이 살고자하는 욕망이 인간의 육신을 조정하지요. 뒤에서 배후 조정해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욕망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그 욕망이 뭐냐? 무엇을 해야 내가 재밌고 행복하냐? ‘무엇’을 생각해요. 그런데 나이가 청소년기 지나고 어른 돼 가면 무엇을 한데 그 방법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내가 원하는 욕망이 요구하는 걸 달성할 수 있지, 라고 생각하는 것, what. 그런데 인간이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게 있어요. ‘내가 왜 이 짓을 하지?’

어떤 사람이 돈을 많이 벌었어요. 자기 소원대로 가정도 화목하고 애들 공부도 잘하고 항상 웃음이 넘쳐요.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해도 내 욕망대로 다 했는데 욕망은 무엇을 안 가르쳐주느냐 하면 DNA는 DNA 본인도 몰라요. 뭐냐 하면 ‘왜 이게 행복해야 되나, 왜 행복해야 되지?’ DNA가 이걸 왜 못 가르쳐주느냐 하면 DNA가 살아 있다가 존재하고 있다로 존재로 시작하기 때문에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살아 있으면 뭐가 나옵니까? 욕망만 나와요, 욕망. 욕심이라기보다 욕망. 욕심보다 더 근원적인 게 욕망이거든요. need 필요한 것, 하고 싶은 것, 내가 이런 걸 원한다는 것, 왜? 그건 몰라요. 그건 알 수 없다니까요. ‘왜 그걸 원하는데’ 하면, “내가 원한다니까.” “니가 왜 그걸 원하는데?” “몰라.” “그럼 너는 네가 누군데?” “그걸 내가 모르겠다니까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다만 이것 하고 싶고, 저것 하고 싶고, 이것 먹고 싶고, 운동하고 싶고, 놀고 싶고, 잠자고 싶고 이런 것만 있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감춰져있다고요. 이걸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뭐냐? 하나님의 언약의 초청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방나라의 특징이에요. 이방나라의 신은 뭐가 빠졌느냐 하면 언약이 빠져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빠져있어요.

그래서 신을 고를 때 골라먹는 재미가 있습니다. 내 욕망을 충족시킬 신을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거예요. 저 신의 이름으로 하면 응답할 것 같고 뭐 될 것 같은 이런 것. 내가 DNA 살아 있기 위해서는 나는 신에게 이런이런 기도하면 그 신은 들어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의성에 불났을 때 많은 사람이 기도했어요.

‘하나님, 시원하게 비 한 번 내려주이소.’ 내가 비를 왜 내려줘야 되는데 이유를 대라. 이유 없지요. 이유 없어요. 자기 사는데 지장이 되는데. 그럼 내 사는데 지장이 되기 때문에 비 내려달라 하면 뒤의 말은 들을 필요 없어요. ‘니가 왜 살아야 되지?’ 내가 살아야 된다는 그 자체가 비-언약이에요.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살면서 죽었습니다. 살려고 오신 게 아니고 죽었어요. 그래서 살려고 교회 나오는 것은 전부 다 우상숭배입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똑똑하게 기억합니다. 한 한 달 전에 했어요. “윤석열 대통령 구속됐는데 우리 성도는 어떻게 기도해야 됩니까?” 질문을 했어요, 서울에 가니까. 이걸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기독교신자로서 사회현실에 어떻게 참여해야 됩니까, 이렇게 고상하게 하지만 노골적으로 딱 깨놓고 이야기해서 ‘윤석열 대통령 살리려면 어떤 기도를 하면 됩니까’ 이런 이야기죠.

여러분, 암만 봐도 언약적 아니죠. 그럼 언약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알려드릴게요. 언약적으로 우린 어떤 입장이냐 하면 예수님이 왕이십니다.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는 왕의 신하 내지는 백성들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리스도고 왕이시니까. 우리의 임금이고 왕이란 말이죠. 그리고 성도는 신하, 백성들이고.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왕으로 계십니다.

그러면 이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 언약관계가 신하와 백성들은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 있느냐 하면 하늘에 있는지라. 빌립보서 3장 20절. 그러면 성도는 이미 나라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미 나라가 있지요. 성도는 이미 백성이잖아요. 예수님의 백성이죠. 이게 언약적 관계, 예수님의 왕국이란 말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땅에 살면서 이미 천국 백성생활 아니 하면 죽어서도 천국 갈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이미 우리는 소속이 돼 있는 거예요.

그러면 비-언약은 뭐냐? 비-언약은 언약적으로 지옥 갈 사람, 비-언약은 네 자로 이게 바로 ‘민주주의’에요. 여러분들이 오해할 수 있는 게 있는데 뭐냐? ‘민주주의는 선거제도로 구축된다’ 이렇게 하잖아요.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선거제도가 아니라 다양성이에요. 다양성을 인정하는 걸 민주주의라 합니다. 북한? 민주주의 아니죠. 다양성이 없으니까. 스탈린? 민주주의 아니지요. 나치? 아닙니다. 미얀마 군부? 아니지요. 아프리카에 독재국가 많지요. 이슬람 국가도 마찬가지고. 튀르크에도 마찬가지고.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아니에요. 민주주의는 인간의 다양성, 다시 민주주의라 하는 것은 비-언약이라 했지만 민주주의는 딱 이거에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 구성되는 거예요. 여기 신이 끼면 안 돼요. 하나님이 끼면 안 됩니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 구성되는 게 민주주의입니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나라, 이게 민주주의 국가에요.

그럼 윤석열 대통령은 어디 속합니까? 성령 받았어요, 그 사람? 비-언약 국가에 속하잖아요. 우리는 어디 속합니까? ‘우리’란 말을 굳이 해야 되는지 그건 모르겠는데 우리는 어디 속하지요? 우리의 시민권은 이미 하늘에 있잖아요. 그러면 여기는 민주주의가 아니고 우리나라에는 왕이 있어요. 일방적인 왕이 있다고요. 왕의 지시와 명령과 특히 왕의 능력, 초청장을 날리는 능력, 천국으로 초대해주시는 그 능력, 하늘나라로 낚싯대로 잡아당기는 성령의 능력, 충만 그걸로 구성돼 있는 게 바로 천국입니다.

에베소서 2장 21절, 22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전은 뭐냐? 성령으로 전부 다 하나가 돼 있는 성령으로 밀집, 연결돼 있는 상태가 바로 지금 이 육신에 있는 이 모습 안에 성령으로 인하여 하늘나라, 이미 시작된 천국 생활이에요. 천국 생활을 성경에서는 여러 대목에서 이 관계를 이렇게 이야기해요.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초청해주신 사랑. 이걸 사랑이라 하고, 이걸 부사로 이야기하면 ‘불러주심’ 또는 ‘부르심’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불러주시는 거예요. 매일같이 불러주시는 그 사랑, 그 관계로서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님과 같이 연결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이 비-언약의 세계, 지옥이죠. 비-언약, 인간들만 있는 악마의 종만 있는 욕망의 종만 있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은 어떤 목적과 기대로 살았을까요? 이 땅에서 살 생각이었어요, 죽을 생각이었어요? 예수님이 지니고 있던 육신은 마리아의 육신입니다. 따라서 이거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담보고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고 했으니까 예수님의 육신도 그 육신과 함께 이 땅에서 어떻게 돼요? 필히 죽어야 될 육신을 갖고 오신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 성령을 입었거든요.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때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성령이 왔다 이 말이에요. 그럼 성령이 온 상태에서 죽을 육신을 가지고 아버지가 맡기신 일을 다 하고 그다음에 육신 떠나고 부활되면서 만지지 말라. 나는 새로운 하늘의 형상, 영광스런 형상을 입게 됩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럽게 새롭게 달라진 육신은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나와요.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환상 봤는데 그때 육신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다니면서 봤던 그 육신 아니에요. 그래서 너무 놀라서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육신 앞에 엎드려서 죽은 자처럼 되지요. 그 육신을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의 형상, 또는 하늘에 속한 형상, 하늘의 영광의 형상이라 하고 전에 있던 예수님의 몸을 흙에 속한 형상, 흙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육신, 인간들이 그렇게 아까워하는 DNA, 그 육신과 교체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교체가 돼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전쟁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전쟁을 하신 거예요. 그 전쟁에 대해서 전쟁에는 적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적이 있어야 되잖아요. 예수님의 적의 주장은 뭐냐 하면 개인주의, 개인 위주였어요. 이게 마태복음 4장에 또는 누가복음 4장에도 나오지요.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 갔을 때 누굴 만나느냐? 악령을 만나요. 악마를 만나요. 그 악마가 예수님에게 테스트를 하고 유혹을 할 때 어떤 관점에서 하느냐 하면 ‘네가 잘 돼야지’ 하고 개인주의를 공략해요.

“아무리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도 네가 못 되면 안 되잖아요. 네가 잘 돼야 할 것 아니냐. 기도 좋지. 금식 좋은데 밥 먹고 해야지. 굶으면서 할 필욘 없어. 그리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 역할하려면 사람들의 호응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한 번 기적 보여줘. 높은 데서 뛰어내려서 기적 보여줘 봐. 수많은 팬들이 메시아 왔다고 추종할 걸. 그때는 네 목회 성공하는 거야.”

보세요. 첫 번째 시험도 그렇고 두 번째 시험도 뭡니까? 전부 다 개인적이잖아요. 세 번째 시험도 마찬가지에요. 이 세상 모든 것을 나랑 더불어서 공유하자. 이 세상 모든 권세와 권력을 나랑 공유하자. 마귀가 예수님한테 이런 시험을 한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도 이 시험을 벗어날 위인이 없습니다. 선지자고 어떤 누구도 이 시험에서 탈피하는 데 성공한 위인은 아무도 없어요.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날고 기고 신앙이 어떠니 해도 자기의 신앙으로 악마의 늪에서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네가 마음은 원하되 육신이 약하구나” 인간의 육신 속에는 마음으로 한다고 육신이 움직이고 그런 게 아니에요. 마음보다 인간에게 더 센 게 있어요. 인간 속에 있는 죄가 인간의 착하고자 하는 의보다 항상 이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있어서 이미 내부 전쟁은, 이런 게 더 적절하다고 생각되는데, 인간의 내부 전쟁, 내면 전쟁, 마음의 전쟁, 갈등 이것보다도 인간의 주관이란 말이 저는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주관은 한 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주관 수정에 들어가요. 주관 조정, 수정, 또는 개선, 또는 발달. 주관의 조정과 수정과 개선과 발달.

일곱 살 때 주관, 아홉 살 때 주관, 열두 살 때 주관, 열여섯 살의 주관이 어떻게 됩니까? 그때그때마다 다 다르지요. 오십 때 주관이 달라요. 아까 식사하시면서 권사님이 이야기했는데 중요한 말 하셨는데 이런 말했어요. 그때는 진심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언제요? 몇 살 때? 한 오십 살 때 진심이었지요. 그런데 지금 육십 때부터 이게 진심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오십 대가 진심이 아니었다는 육십 대는 진심입니까? 나중에 칠십 되어 오십 대가 진심이 아니었다고 단정했던 육십 대의 진심은 칠십 대에 보면 그게 진심이 아니지요. 그걸 가지고 시건머리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걸 이 변화, 아무리 해도 죽을 때까지 자꾸 변화되는 이 마음의 전쟁, 이것은 뭘 이야기하느냐? 인간의 주관은 그때그때 점점 더 상황 따라서 바뀌고 달라진다는 거예요. 인간의 주관은. 그런데 주관이란 말이 왜 좋으냐 하면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바뀌더라도 내 주관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아무리 내 마음이 바뀌어도 한결같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날 지키겠다는 것, 나는 내가 정당해야 된다는 것, 나는 가치 있다는 것은 주관이 바뀔지언정 변하지 않고 이게 한결같습니다. 비-언약적으로.

역대하 13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지금 언약적 관점을 갖고 있는 아비야가 언약이 없는 북쪽 여로보암 왕에게 하는 이야기가 이번 전쟁을 실시할 수밖에 없는 정당성이 있다. 뭐냐 하면 너희에게는 소금언약이 없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강의하면서 몇 가지 알아야 될 게 있어요. 소금언약이라는 것, 그다음에 13절에 보면, “여로보암이 유다의 뒤를 둘러 복병하였으므로 그 앞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있고 그 뒤에는 복병이 있는지라” 이 두 가지는 꼭 아셔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과 비-언약과의 전쟁에 있어서 소금언약복병, 하나 더 알아야 한다면 나팔, 이 정도.

여기서 다시 한 번 아까 한 것을 정리해보면 전쟁은 왜 일어나야 되는가? 전쟁은 극단적인 것, 다시 말해서 극단적인 것은 다른 말로 죽음이죠.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살아 있는 쪽이 정당하고 죽은 쪽은 틀려먹었다는 것으로 그렇게 측정할 수 있는 방식이 전쟁이었다. 입시전쟁도 마찬가지고, 전쟁.

지금 강남 같은 경우에 여섯 살 때 영어유치원 들어가기 위한 보습학원이 생겼답니다. 영어유치원 공납금이 대학등록금보다 더 비싸요. 영어유치원 보내는데 이게 경쟁이 세서 미리 시험을 쳐서 미리 합격한 자만 영어유치원에 갈 수 있다고. 떨어지면 실패자에요. 영어유치원을 왜 가야 되느냐? 영어유치원을 가야 나중에 의대를 갈 수 있어요. 따라서 영어유치원은 그쪽 세계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전쟁이에요. 입시전쟁이에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내가 어떻게 정당하냐는 것은, 내가 어떤 전쟁, 전쟁을 통과하느냐에 따라서 확인될 수 있는 문제라는 거예요. 영어유치원 들어가고 일류 사립초등학교 나와서 국제중학교, 국제학교로 들어가서 나중에 미국의 아이비리그, 하버드나 그런데 들어가는 것, 이게 전쟁을 관통하는 거죠. 일종의 출애굽 후 광야생활이죠. 광야가 뭘 통과하는 거예요. 죽음을 통과하는 생활이 광야생활 아닙니까.

그래서 이 세상의 인간의 만남의 특징은 전쟁 없는 전쟁이 멈춘 한 순간도 없다는 거예요. 모든 연속적인 돌아서면 전쟁, 돌아서면 전쟁이에요. 이게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언약, 인간은 비-언약.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언약 대 비-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하느냐 하면 침투, 삽입, 고정. 언약이 침투해서 그걸 삽입시키면 그 안에 언약이 고정되는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십니다.

이번에 며칠 전부터 후티 반군을 공격한 B2라는 미군의 폭격기에서 60미터 지하에 있는 벙커도 폭파할 수 있는 폭탄을 투하했어요. (GBU-57)며칠 째 지금 후티 반군을 칩니다. 어떻습니까? 정찰기로 침투해서 지하로 들어가는 출입구를 발견해요. 거기다가 폭탄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이란에서 공수된 모든 무기를 그 안에서 자동적으로 폭발해버려요. 그 땅은 후티 반군의 기지는 찢어지지요.

주님의 언약의 목적은 단순히 우리를 죽는 게 아니에요. 죽이는 거라면 가만 놔둬도 늙어죽을 거니까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초청하려고 보낼 때는 언약으로 우리 자아를 찢어버립니다. 찢고 거기다가 소금언약을 장착시켜요. ‘소금+언약’이에요. 소금이라는 속성을 지닌 언약을 우리 속에 찢어놓고 그 안에다가 삽입을 시켜놓고 그다음에 뭐냐? 고정이에요, 고정. 소금의 의미는 고정이에요.

소금언약의 의미는 고정,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한결같음. 이 한결같음의 의미를 함축해서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동결된 세월에 순종’하는 거예요. 동결된 시간에 순종하는 것. 네 나이가 얼마나 되던 어디서 태어났든 어떻게 살았던 간에 하나님의 한결같은 언약에 집어넣어버리면 시간이 동결돼요. 동결이란 말은 꽁꽁 얼어붙었다, 얼음땡. 어떻게 시간이 지나든 안 지나든 간에 너는 이미 확정된 신분자가 되는 거예요. 확정된 관계, 신분, 백성.

거기에서는 이 동결된 시간에 대해서 순종하는 거예요. 왜? 여호와가 임금님이니까. 임금님에게 순종하는 거예요. 정서적으로 흔들릴 이유가 없어요. 감정적으로 부산떨고 유난떨 이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B2 폭격기, 하나님의 폭격기에 의해서 언약을 여기다가 침투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성도로서 제일 신기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인간의 힘으론 악마를 이길 수 없어요. 도저히 돌파할 수 없는 지하, 겹겹이 쌓여있는 악마의 유혹을 어떻게 주님께서 말씀이 찾아와서 나한테 도착이 됐는지 초청장이 새벽탁송도 아니고 어떻게 문 앞에 우리 마음 안에 삽입이 돼 있는지 이게 신기한 거예요. 남들은 그걸 안 믿어요.

기본적으로 내 DNA가 그걸 용납을 안 해요. 복음 같은 걸. DNA는 우리 욕망에서 나와서 ‘네가 살아야지, why 왜 같은 그따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행복해야 돼, 너는. 행복해야 되고 즐거워야 되고 유쾌해야 되고 너는 무조건 잘 돼야 돼. 살아남는 게 승리야.’ 이게 계속 욕망이 가르치는 데 어떻게 그런 두꺼운 악마의 그러한 늪 속까지 이 십자가의 죄 사함이 너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 너는 이제 의롭게 되었다는,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그 소식이 어떻게 나한테 전달됐는지 그게 정말 신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 악마의 싸움에서 주님이 이겼기 때문에 악마가 덮어놓은 모든 지하층까지 뚫고, 뚫고, 뚫고 벙커 안까지 우리한테 도달된 거예요. 10분 쉽시다.

 

 

 

20250404b 울산강의-역대기하(11강) 13장 5절 : 하나님의 그림자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을 통해서 마귀의 수법이 확실하게 드러났어요. 마귀의 수법은 이겁니다. 주님이 하실 문제를 개인 문제로 전환시키는 게 악마의 주특기입니다. 주님만이 결정이 다 돼 있는데 ‘하나님 내가 어떻게 기도하고 뭘 하면 이 복을 얻겠습니까?’ 하는 것. 주님께 이미 넘겨진 문제를 다시 도로 그걸 가져와서 내가 그 동일한 결과를 얻고자 쟁취하고자 시도하게 만드는 마음의 갈등, 이건 백 프로 악마가 우리 안에서 장난치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역대하 이 전쟁 문제 보시면서 골리앗과 다윗이 어떻게 전쟁을 했는지 보세요. 다윗은 비록 소년이지만 다윗은 사람의 전쟁으로 보지 않았어요. 이번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 하나님이 싸우지 우리가 싸우는 게 아니다. 분명히 언급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지요. 시키는 대로 할 때 어떤 마음 자세가 되느냐? 바로 내 개인 문제를 주님한테 넘기면 되는 거죠.

허리가 아프다. ‘어떻게 기도하면 허리가 낫겠습니까?’ 이거는 마귀의 시험이고. 주께서 허리를 아프게 했구나. 주의 뜻은 무엇인가? 병원에 가서 침 맞아라. 그건 뭐 간단한 문제지요. ‘이거 기도해서 낫겠다.’ 기도해서 낫겠다는 것은 개인 문제를 하나님을 끌어당겨서 개인 문제화시키는 거예요. 나에게서 나를 이별시키는 거예요. 추방시키는 겁니다. 나에게서 나를 자꾸 추방시켜서 나를 주님한테 인수인계를 하는 겁니다. 넘기는 거예요.

역대하 13장에서 아비야가 여로보암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요. 이 자세가 어떤 자세냐 하면 말을 한다는 거예요. 전쟁할 때 무기로 하는 게 아니고 말로 하는 거예요. ‘이번 전쟁의 취지는 나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실시되는 전쟁입니다. 북쪽 인민들아.’ 이런 식으로 언급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조목조목 그 근거를 댑니다.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유다 남쪽에는 이런 하나님의 언약이 유지되고 있는데 당신 나라 북쪽에는 언약이 없다는 식으로 그 차이점을 대조해서 유감없이 이야기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까도 이야기한 5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고 했어요. 다윗과 그 자손,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소금언약이란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특정 지파에다 그것을 침투시키고 삽입시켜서 고정화시켰다는 겁니다. 어느 지파에? 레위 지파에 줬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레위 지파에 줌으로써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하면 인간의 노동 없이도 인간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준 거예요. 여러분, 모세가 시내 산 올라갈 때에 그 시내 산에서 뭐하고 밥 먹고 살았습니까? 모세는 제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안 먹었어요. 제가 놀란 것은 마시지도 않았어요. 인체의 70%가 물인데 H₂O 물도 없이 사십 일 동안 살은 거예요.

당신은 무슨 노동을 해서 살았습니까, 라는 말을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요. 그럼 이런 말을 해야 돼요. ‘무엇 때문에 살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사니까 그 말씀 산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말씀을 가진 자도 덩달아 함께 병행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사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처럼 되는데 어떻게 하느냐? 안에서 말씀이 살아 있다면 그 사람은 산 사람이고 그 사람의 몸만 살아 있고 말씀이 없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그러한 명확한 기준이 모세를 통해서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아비야가 이야기하는 것은 거기서 더 발전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소금이 어디 등장하느냐 하면 레위인이 드리는 소제, 레위기 2장에 보면 나오는 데요. 2장 13절에,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했어요. 소금은 침투하고 삽입해서 한결같이 거기에 고정화시킨다. 고정화시킨다는 것은 그 본질이 한결같이 유지된다는 말이죠. 시간 안에서 동결된 시간. 거기에 순종하라는. 그 언약에 순종하라.

인간은 달라져요. 인간은 주관이 바뀌니까 동결이 아니지요. 늘 바뀌니까요. 그런데 바뀔 수밖에 없는 인간 마음에 바뀌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이 소금이라는 물질을 통해서 그 안에 뭔가 들어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는 겁니다. 인간 속에. 그게 소금언약이에요.

실제로 열왕기하 2장에도 20절에 엘리사가 나오는데 엘리사가 지나갈 때 그 성읍에 사는 사람들이 엘리사를 붙들고 여기 물이 썩어서 먹을 수 없는 물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할 때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소금을 던지니까 먹을 물이 되었다는 거예요. 소금이 삽입되어 들어가면 어떤 변화, 질적으로 본질이 변해서 변해진 질들이 고정적으로 연속된다는 한결같이 이어지고 있다는 그런 뜻을 갖고 있지요.

신약에 마가복음에 보면 지옥을 설명할 때 소금 치듯이(막9:49,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지옥은 그렇게 고통스럽다고 했어요. 소금이 들어간다는 것은 한결같다는 거죠. 그리고 마태복음 5장에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너희는 소금이요 너희는 빛이라 했지요. 변하지 않는 속성이 너희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속성,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를 한결같은 복음적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 악마가 그걸 알고 있지요. 악마가 그 성도를 시험하려면 그것을 흩트려놓으려면 악마는 어떠한 술책을 쓰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말씀의 주인공은 누구죠? 하나님이죠. 악마는 그걸 뭐로 바꾼다고 했습니까? 주님에 관한 문제를 뭐로 바꿔요? 개인의 문제로 전환하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 하면 끝나는 문제를 악마는 이렇게 만듭니다. ‘주께서 다 하셨다는 것을 전에는 믿었는데 전에는 진심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없어요. 어쩌면 좋아요.’ 이래 되는 거예요. 갑자기 문제가 뭐로 바뀌어요? 주님께 일임된 문제가 어느새 내가 걱정해야 될 문제로 전환되고 만 거예요. 소금이 없는가요? 소금 좀 쳐드릴까요?

언약은 내 쪽에서 다가간다고 관계가 유지되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다가왔기 때문에 끝까지 주께서 책임져요. 한 번 적어볼게요. 언약에 대해서. 내 쪽에서 주님 쪽으로? 아니지요. 주님 쪽에서 내 쪽으로 확정됨, 이거거든요. 이것을 연약한 육신 속에서 전쟁을 통해서 이 두 개가 어떤 차이 나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영적 전쟁이에요. 우리 안에.

여러분 좀 심심하지요. 갈라디아서 3장 3절을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 말은 성령으로 시작해도 결국 육체로 마친다는 그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성령으로 시작한 자는 육체로 마칠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육체로 마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지금 너의 육신은 전쟁터기 때문에 그래요.

결국 전쟁터에서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가더라도 다시 육체에서 어디로 갑니까? 역시 나한테 이러한 갈등 생기는 것도 성령의 일이었구나. 안에 잠겨있는 우리, 우리 임금님은 이미 확정됐는데 윤석열 탄핵이나 걱정하고 있는 이 육체의 일, 우리 임금님은 요지부동이에요. 우리 임금님은 탄핵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거든요. 어떻게 성도가 세상 재판장에게 판정을 받나. 성도가 재판장을 판정해야지. 성도는 천사마저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이 나와요. 이 말은 뭐냐? 세상의 평가나 세상의 재판에 네가 휘둘릴 하등에 언약적 근거가 없다는 거예요.

로마서 8장에 그런 말씀 나오지요. 누가 너를 정죄하겠느냐? 이미 의롭다 하시는 분은 우리 주님이다. 주님이 의롭다 할 때 극단적 방법으로 했어요. 자기의 죽음을 담보로 내세워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니 내어주신 이가 예수님의 죽음을 담보로 해서 이 자는 건드리면 안 돼, 라고 담보를 해줬는데 누가 너를 정죄하고 흔들어대느냐? 누가 흔들겠어요? 마귀가 흔들지요. 비-언약이 흔드는 거예요. 비-언약에서 흔드는 방법은 뭐냐? ‘성령 받은 성도라면서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느냐?’ 이런 식으로 흔들어대는 거예요. 자꾸 악마의 그러한 조직적인 흔듦에 우리가 마냥 놀아날 수는 없어요.

오늘 역대하 13장에서 아비야가 하는 것은 이 말입니다. 언약이 없으면 그건 이스라엘을 대표할 수 없다. 이스라엘 존재의 의미는 소금언약이 연속적으로 유지되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많은 목사님들이 걱정을 해요. 애는 안 낳지 교회는 안 나오지 이러다가 남아있을 한국교회 없다. 그런 걱정을 하는데 그 사람을 생각해보세요.

교회 머리가 누굽니까? 목사에요? 당회장입니까?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분으로 살아 계셔요. 두 번 죽을 순 없는 거예요, 이제는. 보이는 주님이면 죽이면 되는데 이미 한 번 죽었기 때문에 죽일 수도 없고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살아 계시는 분이 교회의 머리가 된다면 주님이 살아 있다면 교회는 없어진 적도 없고 교회가 작아진 적도 없고 교회가 커진 적도 없어요. 그냥 교회는 교회일 뿐이에요. 몸은 하나일 뿐이에요. 두 개, 세 개 될 이유가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숫자 적다고 걱정할 게 아니고, 과연 교회냐고 다시 물어야 돼요. 한국교회가 교회 맞느냐고 물어봐야 돼요. 교회 꼬라지가 교인수 걱정하는 이게 교회냐, 물어봐야 된다고요. 관심사가 어디 있는지? 악마는 교회 들어와서 주님의 일을 뭐로 바꿨어요? 인간적인 문제로 다 바꿨어요. 전도를 안 해서 교회가 안 된다는 거예요. 시설이 부족해서 탁구장이 없어서 교회가 안 된다고, 노래방기계가 없어서 교회가 안 된다는 거예요. 이웃사랑을 안 해서 구제를 안 해서 교회를 오질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 건 천주교에서나 따져요. 그건 불교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8절부터 9절 보게 되면 여러 가지 이야기가 됐는데 바로 레위 사람들, 북쪽에도 레위 사람들 있었지요. 그런데 르호보암이 인민군이 공산주의 됨으로서 목사들이 내려왔듯이 북쪽에 있는 레위인들이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왜냐하면 성전이 남쪽에 있기 때문에. 레위인이 없으니까 그동안 레위 족속도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웠던 겁니다. 남쪽 신경 쓰지 말고 우리끼리 종교 만들면 되지 않느냐.

그리고 8절에 보면, 너희들이 있는 곳이 성전이 있는 곳이 아니고 금송아지가 있는 우상이 있는 곳을 성전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우리 남쪽에 있는 족속은 아론의 자손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11절에 우리는 성전이 있어서 아침저녁마다 거기다가 불을 피우고 향을 올린다는 거예요. 진설병도 있고. 결국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은 너희 나라에 있는 게 아니고 우리 남쪽 나라 유다 지파를 통해서 주께서 연속적으로 이어지기를 하나님께서 현실적으로 그렇세 실시를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너희 북쪽을 접수할 언약적 자격을 얻는다. 이게 아비야가 여로보암에게 선전포고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말을 북쪽에 있는 여로보암이 귀담아 들었겠습니까? 못 들어요. 악마가 벙커 안에 있으면 말씀이 거기까지 침투가 안 돼요. 마음 밭에 도달이 안 된다고요. 네가 저쪽에서 무슨 소리하든지 언약이고 말씀이고 하나님이 어떻고 저떻고 신경 안 쓰고 이번 전쟁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 것인가, 라는 평소에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했던 그 사고방식을 여로보암은 그대로 실시합니다. 그게 복병이에요. 팔십만 대 사십만으로 붙으면서 여로보암은 복병 전략을 실시했습니다.

복병이란 무슨 말이냐 하면 딱 숨어있다고 상대방이 오만해서 승리할 때 뒤통수치는 것, 배후를 치는 방식이에요. 여로보암이 복병 전략을 왜 들고 나왔는가? 그것은 언약이 없는 사람들은 역사와 전통에서 교훈을 얻어서 그걸 현재에 써먹으려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지식이에요. 지식은 what, 그다음에 how 어떻게 여기서 머물러요. 수단과 방법과 관계없이 why 왜라는 게 없어요. 어떻게 쟁취하면 끝나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의 주관은 뭐냐 하면 왜 사는 게 없어요. 이십 대, 삼십 대, 뭐 사십 대, 오십 대도 마찬가지지만. 어떻게 해서 돈을 버느냐? 무엇 해서 버느냐, 끝. 수단과 방법을 통하지 않고 영끌을 하든지 영영끌을 하든지 하여튼 투기를 하든지 주식을 하든지, 비트코인을 하든지 어떻게 하면 돈 버느냐, 그게 끝이에요. 주관이 그것밖에 안 돼요.

돈 버는데 있어서 내가 돈 벌겠다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목적, 돈 벌기 위해서 노력하면 어떤 성과가 있을 것이다. 기대. 지난 낮 설교에서 목적과 기대가 사람을 망칩니다. 잠 못 드는 밤이에요. 목적과 기대가 사람을 망쳐요. 비-언약적이에요. 언약이 없어요. 내가 한 만큼 나는 얻을 게 있다는 논리입니다. 주의 일이 아니에요. 나만 살면 돼요. 나만 행복하고 나만 여유 있고 내가 부자 되고 그게 끝이에요.

왜 사느냐, 그런 건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런 인간들끼리 전쟁을 입시전쟁부터 해서 모든 전쟁에 그들은 단련되고 훈련되었어요. 배후에 누가 있느냐? 부모님이 계십니다. 부모들이 그들을 그렇게 훈련시켰어요. 전쟁에 이기는 데 교회 가는 게 방해되면 교회도 가지 말고, 말씀 같은 건 관심두지 말고, 실적이 말해주니까. 내가 얻고자 하는 목적이 실적이 그게 정답이지 진리지 뭐 복음, 말씀으로 돈이 생깁니까, 밥이 생깁니까? 그딴 것 뭐하려고 해요. 그런 것은 나중에 돈 많고 죽을 때 돼서 천국 가볼까 할 때나 찾는 거지 젊을 때는 그런 것 찾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애들이 그런 걸 또 찾아요. 찾는 이유가 뭡니까? 목적과 기대를 포기해서 찾습니까? 아니면 목적과 기대를 단 시간에 빠른 방법으로 획득하고자 찬양집회나 기도원에 갑니까? 어때요? 내 역량보다 더 능가할 역량을 하나님으로 획득하기 위해서 인간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믿습니다’하고 달려들어요. ‘내 앞길을 열어주소서, 나의 신랑감은 어디 있습니까?’ 이런 것. 맨날 신랑감 찾아놓고, ‘나는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솔로 나가서 선택하는 사람이 없어요. 실컷 간만 보고.

하나님께서 이 복병을, 그러니까 지식이 뭐냐 하면 옛날 이스라엘이 광야 지나서 약속의 땅을 차지할 때 여호수아 8장 같은 경우에 아이 성 칠 때에 복병 전술로 이겼다는 거예요. 심리전이죠, 심리전. 특히 사사기 20장 22절에서 28절에 나오는 그 복병, 그러니까 정의로운 연합군이 악한 베냐민 지파를 공격할 때 처음에는 정면 돌파하다가 떼죽음 당했어요. 그러다가 정의의 사자라고 자처했던 연합군이 악의 사자한테 패배하고 많은 사람이 죽을 때에 열한 지파가 한 지파한테 당한 겁니다.

그때 그들은 여호와 앞에 언약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주의 뜻은 어디 있습니까, 도대체 주의 뜻은 뭐란 말입니까? 정의가 패배하는 게 주의 뜻이란 말입니까? 결국 이 전쟁을 우리가 할까요, 말까요, 할 때에 그때 주의 지시로 올라가 치되 복병 작전으로 해라. 그래서 복병 작전으로 베냐민 지파를 이겼어요. 그래서 복병 같으면 무조건 이거는 백 프로는 아니겠지만 거의 승리한다, 라는 자신감 같은 것이 이스라엘의 전쟁의 패턴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복병으로 승리한다. 그걸 북쪽의 여로보암이 써먹으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이 복병의 의미를 여로보암, 비-언약의 왕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복병한다고 이기는 게 아니에요. 다윗이 전쟁할 때도 복병했잖아요. 사울이 전쟁할 때도 복병해서 이긴 적이 있어요. 사무엘상 15장 5절에 보면 아멜렉과 전쟁할 때 복병해서 이겼어요.

복병의 의미가 뭔지 이걸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사사기 20장의 전쟁에서 베냐민 지파가 다 죽습니다. 열두 지파로 나왔던 이스라엘이 베냐민과 전쟁해서 내전이 일어나서 한 지파라 궐이 났다. 완전히 작살났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 열한 지파가 큰일 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우리 생각엔 이게 무슨 큰일이냐? 열두 지파가 까불다가 한 지파 못된 지파 있어서 암세포 도려내듯이 도려내게 되면 건전한 열한 지파가 오히려 더 이스라엘다운 지파가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뭘 생각해야 되느냐? 언약을 생각해야 돼요. 언약은 예언입니다. 그 예언은 열두 지파에게 이미 야곱이, 그리고 이미 모세가 열두 지파에게 예언한 게 있어요. 열두 개 지파에게 예언한 것이 예언이 다 이뤄질 때만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복 받는 이스라엘이 돼요. 왜? 그 안에서 언약이 살아 있기 때문에.

예를 들면 아버지지 돌아가면서 유산을 남긴다 합시다. 유산의 조건이 뭐냐? ‘열두 명이 다 살아 있어야 각자 돌아갈 몫이 그게 복이라는 개념이 수립이 된다. 만약에 너희들 중에서 동생 하나가 없어졌다? 그러면 너희들이 받은 것은 복이 아니고 그거는 다 회수해야 된다.’ 그 조건이었어요. 열두 개의 복이 한 묶음 안에 묶여져 있는 예언이고 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하나가 복을 못 받으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느냐? 복이 아니고 저주가 돼버려요. 예언이 취소가 된다고요. 무슨 말이냐 하면 뭘 얻어야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과 고리로 연결되는 그 관계가 복이거든요. 그런데 한 형제가 빠져버렸다? 열둘이 아니고 열하나기 때문에 이거는 다른 형제 열한 명에 간 예언이 오롯이 하나에서 나온, 출처가 하나인 복에서 나오지 않은 엉터리 복이 돼버려요. 그러면 온전한 복으로부터 공격 대상이 되는 겁니다.

베냐민 지파가 궐이 났으면 싫든 좋든 그걸 채워야 돼요. 그래서 복병은 누구한테 쓰느냐 하면 이방민족한테 써야 돼요. 자기 민족한테 쓰는 게 아니에요. 자기 민족한테 쓰게 되면 복 자체가 빵꾸가 나기 때문에. 바구니에 빵꾸나면 아무리 물 채워도 다 새기 때문에 이거는 복이 남아있을 리가 없어요. 그 안에서.

이 점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두 제자에게 복을 주잖아요. 너희가 열두 고을을 다스리라 할 때 그것은 내 것 받는 게 아니고 주님의 것의 할당 분을 우리가 배정받는 거예요. 열두 지파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십사만 사천 나오지요. 열두 지파잖아요. 열두 지파가 성립돼야 그게 온전히 성립되는 거예요. 어떤 지파가 독점적으로 가질 수 없어요. 초월적인 주님에 의해서 내려준 그 복을 내 것이라고 취득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공유해서 받은 거예요. 여럿이 공유해서 받은 복일 때 그게 복이 되는 겁니다. 내 소유의 복은 없어요. 여럿이 주님의 것만 받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그건 언약 이야기고, 북쪽의 여로보암은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을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역대하 13장 13절에, “여로보암이 유다의 뒤를 둘러 복병하였으므로 그 앞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있고 그 뒤에는 복병이 있는지라” 완전히 뒤에 숨겨두고 앞에는 이스라엘 사람과 대화하는 척하면서 뒤로 둘러싼 거예요. 왜냐하면 인원수가 쪽수가 많으니까. 팔십만이니까 사십만 앞장세우고 사십만을 뒤로 두고 완전히 포위해서 승리할 작전을 벌인 겁니다. 옛날에 그렇게 써먹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그 앞에서 아비야는 뭐하고 있느냐 하면 계속 연설하고 있어요. 전쟁할 생각 안 하고 계속 연설합니다. 이번 전쟁을 우리가 시작하게 된 정당성을 말하고 있어요. 15절에 보면,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유다 사람의 소리 지를 때에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이렇게 돼 있어요. “이스라엘 자손이 유다 앞에서 도망하는지라 하나님이 그 손에 붙이신고로 아비야와 그 백성이 크게 도륙하니 이스라엘의 택한 병정이 죽임을 입고 엎드러진 자가 오십만이었더라”(16, 17절) 여기 유다 사람이 소리 질렀어요. ‘와 뒤에도 적이 있다’ 소리 지른 겁니다.

지금 이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지금 남쪽의 아비야는 관심사가 어딥니까? ‘하나님의 성전 있다, 우리에게 언약 있다, 레위인 있다, 하나님의 소금언약 있다.’ 이거잖아요. 이 말은 뭐냐? 우리는 내가 여기 있지 않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주인공으로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로보암은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이 없고 복병할 부대는 많아요. 쪽수, 인구수는 많아요. 그 둘이 전쟁을 벌입니다.

제가 이걸 좀 더 해결책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나눠주는 노래 가사가 있지요. 자꾸 노래 트니까 저작권이 어떠니 했어요. <잊혀진 여인>(임희숙)이란 노래 가사인데 가사를 보세요. 가사에 나오는 주인공이 언약적인지 비-언약적인지 보세요.


긴 잠에서 깨어보니
세상이 온통 낯설고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 없어


이름 나오지요.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지요. 외롭다 이 말이죠.


나도 내가 아닌 듯해라


이것 중요하죠. 남이 불러주지 아니하면 자아가 형성이 안 됩니다. 타인이 없으면 나는 하나의 물체가 돼요. 어떤 친척 모임에 갔을 때 인사도 안 해주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기서 하나의 물체, 빗자루 같은 그런 존재밖에 안 되죠. 너는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이래되는 거죠.


그 아름답던 기억들이
다 꿈이었던가
한바탕 타오른 그 불길이
정녕 꿈이었던가
누군가 말을 해다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을 때는 누군가 타인이 같은 인간이 나에게 말을 붙여줘야 나는 살아 있는 생동감을 느끼는 거예요.


내가 왜 여기 서있는지
화려한 사랑의 빛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그러니까 부부 간에 식사 앞에 두고 아무 말도 안 하고, ‘밥 묵자’ 이러고, 밥 먹고 난 뒤에는 ‘치워라’ 밥 치워라 이 말이죠. ‘우리가 왜 사냐’ 하는 거예요. ‘이게 부부냐’ 이래 이야기할 거예요. 요샌 젊은 사람들 강아지 안고 살잖아요. 강아지와 이야기해요. 안 그러면 인공지능과 이야기하든지.


멀리 돌아보아도
내가 살아온 길은 없고
비틀거리는 걸음 앞에
길고 긴 내 그림자


이게 ‘내 그림자’인데 물리적으로 따질 때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물체가 있어서 빛이 그 물체를 통과 못하고 튕겨 나왔기 때문에 그림자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아비야는 지금 인간들 입장에서는 얼토당토 않는 누구의 그림자를 소개하느냐 하면 주님의 언약의 그림자가 이 전쟁에 드리우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로보암은 복병이니까 뭡니까? 안 보이죠. 안 보이는 방법으로 이기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비야는 지금 안 보이는 분의 그림자가 온통 이 전쟁터를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 현존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전쟁은 무슨 전쟁이라 하느냐? 이 전쟁을 성경에서 어려운 개념 중에 하나인 데요. 이 전쟁을 ‘붙여주시는’ 전쟁입니다. 이 붙여주시는 전쟁의 특징이 바로 이방민족한테는 복병이에요. 왜냐하면 복병이란 보이지 않는 숨어있는 군사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앞장서고 뒤쪽에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 자신의 전쟁에 복병처럼 활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복병처럼 활용하고 있는데 이방민족에게는 뻔히 다 보이죠. 보이니까 좀 시시한 거예요. 예를 들어서 붙여주시는 전쟁의 대표적인 게 이거에요.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나오는데 모세가 아말렉과 전쟁할 때 모세는 전쟁터에 있지 않았어요. 전쟁터가 보이는 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산 위에 올라가서 딴 거 안 했어요. 지팡이 들고 운동했지요. 아론과 훌이 옆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면 저 산 밑에 있는 전쟁이 이스라엘이 이기고 있고, 힘이 빠져서 내리면 이스라엘이 밀리고 있고, 이 전쟁을 한 거예요. 이것은 뭐냐? 보이는 인간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전쟁, 그 전쟁이 붙여주시는 전쟁이에요.

왜 그런 전쟁을 해야 되느냐 하면 지금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을 하게 되면 이스라엘이 백 번 집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쓸 수 있는 무기를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아버렸으니까. 쥐고 설치지 못하게 했으니까요. 인간의 아이디어와 생각에서 인간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모든 자위적인 공격무기나 방어 그런 것들을 주께서 치워버린 거예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식으로 치워버린 겁니다.

한 번 정리해봅시다. 아비야의 전쟁에서 남쪽 유다는 전체가 하나님의 복병 역할하고 있는 거예요. 뻔히 눈에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군사의 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북쪽의 여로보암 입장에서는 ‘너 뭐로 우리한테 이길래’ 그런 식이죠. 그러면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주를 믿는 믿음으로 이긴다’ 이것 맞아요, 틀려요? 복병을 그 딴 소리하면 안 돼요. ‘나의 믿음으로 이긴다’ 이런 소리하면 복병 값이 안 돼요.

복병은 뭐냐? 하나님 품속에서 본인이 사라져야 되죠. 하나님이 나오는 전쟁터에서 나는 있는 둥 없는 둥에서 없는 둥이 돼야 돼요. 주님의 그림자 노릇을 해야 돼요. ‘주님의 그림자’ 오늘 제목으로 이게 괜찮네. 비틀거리는 길고 긴 내 그림자가 아니고 주님의 그림자에요. 술 먹고 비틀거리든 하여튼 내 그림자는 아니에요. 주님의 그림자에요.

주님의 그림자로서 붙여주는 전쟁을 하는데 북쪽 이스라엘은 뭐냐? 하나님이 없잖아요. 없으니까 옛날 과거의 역사와 전통에서 교훈을 얻는 겁니다. 배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술을 차용해서 사용하는 거예요. 축적된 전략기술이 현 전투를 승전으로 이끈다는 게 여로보암의 착상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남쪽은 뭐냐? 자신들은 언약의 그림자에요. 입만 열면 언약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북쪽 군사가 몇 만 명 죽었지요? 오십만 명 죽었지요. 그 점을 끝으로 생각해봅시다. 사람 숫자를 많다고 오십만 명, 여기 누가 보기에도 똑같이 또 사람이에요. 사람 보기에 사람이고, 사람 보기에 사람이고 똑같은 사람이 보이죠. 둘 다 존재하고 있지요. 사십만 명. 그런데 오십만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비-언약이에요.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이 오십만 명, 그럼 언약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안 계시죠. 이 자체가 뭐냐 하면 죽음의 세계지요. 죽음의 세계에서 오십만이 있고, 여기는 언약이 있으니까 이거는 생명이죠. 하나님의 생명. 생명에서 사십만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아비야를 통해서 이 둘이 전쟁을 벌이게 했습니까. 자, 이 전쟁의 취지가 뭡니까? 전쟁의 취지는 죽음과 생명, 두 세계만 이 세상에 존재한다. 인간은 뭐냐? 한쪽은 죽음을 반영하고 죽음의 증거로 있는 인간과 한쪽은 생명의 나라가 있고 천국이 있다는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의 인간들이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생명이 있다는 말은 여기는 언약이 있고, 이쪽 죽음에게는 언약이 없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전쟁은 일관되게 뭐냐 하면 언약과 비-언약이 전쟁을 해서 이거는 전쟁을 하는데 애초부터 이 세상은 죽음의 세계, 지옥과 천국이 따로 형성돼 있다. 처음부터 형성돼 있어서 그것이 숨어있는 두 개의 세계가 지옥과 천국이 현실적으로 어떤 전쟁의 양상으로 나타나는가를 이스라엘 전쟁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끝으로 남아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열두 지파가 온전해야 되는데 지금 남쪽에는 두 지파밖에 없어요. 북쪽은 열 지파에요. 아까 열두 지파가 다 되어야 복이 복대로 가동이 되고 작동이 되는데 두 지파로는 안 되잖아요. 그럼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바로 모세언약에서 다윗언약으로 넘어가면서 지금 다윗 이야기하잖아요. 우리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 있다.

다윗언약에 보면 다윗언약이 열두 지파를 함축해서 초월적인 따로 구성되는 겁니다. 이걸 뭐냐? 왕이라고 해요. 열두 지파가 왕을 뽑은 게 아니고 왕에서 열두 지파가 나왔다 해서 열두 지파가 나온 그 원류, 그 본류를 언약이 발달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 왕 언약이 나와요. 레위 지파보다 더 우월한 더 높은 언약이 왕 언약이에요.

따라서 왕 언약에서 새로운 뭐가 나오느냐? 완성된 열두 지파가 다윗 왕 달성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열두 지파는 끝났고 예수님 왕으로부터 열두 지파가 새롭게 구성되어서 시작되는 그 시작점이 바로 다윗언약입니다. 다윗 왕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이제는 바로 이미 다 이루었던 예수님의 왕 되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자기 사람들, 생명에 속한 사람들이 주님의 그림자가 오늘날 이 세상에서 남은 전쟁을 우릴 통해서 성도를 통해서 하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전쟁터에 우리를 넣어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전쟁은 다 이기고 난 뒤에 하는 벌이는 소속에 관한 전쟁인 것을 감사하게 해주시고 우리가 왕이 되신 주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참으로 백성으로서의 완료된 상태인 것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일에 나의 일이 전환되지 않도록 주께서 지켜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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