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지혜의 확장

아빠와 함께 2024. 11. 4. 09:18

20241101a 울산강의-역대기하(8강) 9장 8절 : 지혜의 확장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생명나무가 있었다는 말은, 영원한 생명이 에덴동산에 심어진 나무가 있음으로써 우리 인간들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알려왔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려오고 동시에 죽음도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었다는 두 개의 상반되는 두 가지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두었던 에덴동산에 그 사실을 담아두었습니다.

인간은 무엇이냐? ‘생명과 죽음 사이 존재’라고 할 수 있어요. 인간은 사이 존재로 해도 되고, 인간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선, 납작한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생명을 보여줄 수도 있고, 인간을 통해서 죽음도 보여줄 수가 있는 거예요. 인간이 생명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생명을 드러내느냐, 아니면 영원한 저주를 드러내느냐? 그게 인간의 역할이에요. 뭘 뿜어내느냐는 그 역할이지 자꾸 가지려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경계라 경계. 인간은 사물과 생명의 경계에 속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인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규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내가 누구냐’라고 내가 생각조차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용하느냐로 끝, 끝나는 겁니다. 마치 컴퓨터게임의 캐릭터 같아요.

게임하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특징이 나타나지 그 게임이라는 연극에 우리가 조연이 되던 주연이 되던 그것은 그 연극을 실행에 옮기는 그분이 결정할 문제에요. 주인공을 하던 낙랑공주가 되던 군졸이 되던 그것은 본인이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여성국악 하는 그 사람들, 사장 되는 분이 결정할 문제지요. 부리는 대로 할 뿐이에요.

그런데 마귀가 들어와서 네 인생 네가 진두지휘하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럴 줄 아시고 내가 주인 될 때 그게 바로 죽음이라는 겁니다. 왜? 원래 인간은 그렇게 안 만들어졌기 때문에. 내가 주인이 될 때 그거는 죽음이고, 우리가 죽음이 될 때 우리는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이 경계선이 날아가 버리죠.

그래서 생명이라는 것은 근처도 못가는 거예요. 생명과 죽음 사이 존재인데 사이에 있어야 될 건데 이미 한쪽이 결정되었으니까 죽음이니까 자동적으로 뭐가 없느냐? 생명이라는 게 없습니다. 생명이 없다는 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생명에 관한 소식을 듣기를 싫어해요. 생명이란 이야기조차도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나 그런 소리 안 듣고 살래. 그런 소리 안 듣고 애 다섯 명 낳고 그냥 살래.” 애 다섯 명 이야기는 KBS <인간극장>에 나왔던 이야기고, 여성국악은 tvN 드라마 <정년이> 속 이야기에요.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고만고만해요. 우리가 가운데 우리가 주인공 역할을 잘했어? 인간이 인간과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긴긴 세월을 한 평생 다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예 생명이 없는 거죠. 빨리 지옥 가느냐? 늦게 지옥 가느냐? 그 차이뿐이지 가는 벡터, 가는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생명은 없다. 죽음뿐이다. 몇 살 때 지옥 가느냐? 칠십에 가느냐? 열다섯에 가느냐? 핼러윈데이 이태원에서 가느냐? 그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예외적인 민족이 등장했습니다. 그 예외적인 민족이 이스라엘이에요. 아주 특이해요. 죽음밖에 없는데 죽음밖에 없어야 되는데 너나나나 똑같이 지옥 가야 되는데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자진해서 합류했습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자기백성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기차 위에 올라탄 그러한 영웅적인 주인공, 언더 씨즈. <언더 씨즈Under Siege>(1992) 모르시죠. 옛날 영화 원, 투, 쓰리까지 나온 게 있어요. 해군장교 특수부대 출신이 인질로 잡힌 자기의 예쁜 조카 건져내고, 테러범에 잡힌 선량한 사람들 건져내는 그런 영화에요.

<언더 씨즈2>에 보면 달리는 기차 위에 올라타요. 그 테러범들은(사탄이죠) 우리 세계다, 라고 좋다 했는데 뭔가 이상하게 낌새가 생명이라는 흔적, 징후가 발생되기 시작한 거예요. 악마는 알아요. 집단으로 단체로 다 지옥 간다는 건 결정된 사실이다. 그건 다 알아요. 왜? 사람은 다 늙어죽으니까. 죽은 데서 다시 살아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인간세계의 진리는 뭐냐? 사람은 태어나면 언젠가 죽는다, 끝. 따라서 죽음에서 모면할 생각하지 마라. 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생각하지 마라. 이게 인간세계에서는 진리처럼 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죽는 게 살아가면서 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여행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미국도 갔다 오고. 누구 얼마 전에 미국 갔다 왔거든요. 너무 힘들어서 눈 핏줄 터진 분 계셔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하고 싶은 것 중에 나열된 것이 바로 TV예능프로에 나옵니다. 얼마나 맛~있게요, 이런 거요. 이혼한 사람, 솔로에 나오는 이런 것. 돌싱들 모아서 선보는 것, 나이 오십 넘어서 마지막 사랑한다고 다시 또 선보는 것. 재미나게 보지요. 어차피 죽을 것 후회 없이 실컷 즐기다가 죽자.

삼성라이온즈와 기아타이거즈의 코리언시리즈 하는 것, 월드컵축구 예선전, 이게 영생 이야기, 복음 이야기보다 왜 그렇게 인기 있어요? 애들 모아서 트롯경연대회 하는 그게 왜 그렇게 재미가 있고, 일본트롯가수와 한국트롯가수가 7:7로 붙어서 하는 그 프로도 돈 수십 억 들여서 만드는 이유가 뭡니까? 어차피 우리는 죽으면 끝, 살아 있을 동안에 스스로 자기를 만족하는 그런 세월을 보내자. 보내려면 뭐가 필요하다? 돈이 필요하다. ‘돈 벌어서 재미나게 살자. 그게 행복이다.’ 이거죠.

이 짓을 인간의 배후에서 누가 세뇌시켰어요. 꽉 지배했어요. 주님께서 이 기차, 죽음을 지시하는 지옥으로 질주하는 이 기차에 생명 되시는 주님이 올라탔어요. 왜 올라탔겠어요? 자기백성을 생명책에, 책이름도 ‘생명’책이라.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백성이 있기 때문에 올라탄 거예요. 그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백성에게 당부한 게 있어요. 이게 뭐냐? “시선 분산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주신 그 율법대로 이 민족을 건져내겠다는 하나님의 그러한 조치에 대해서 주님의 율법을 바라보면 되거든요. 바라보는 방법은 간단해요. 율법이 집결되는 곳이 있습니다. 그걸 만들었어요. 그게 뭐냐? 제사하는 곳이에요. 성막. 감이 오십니까?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았던 그 율법의 집결, 율법의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오고 그곳으로 회수되는 그 자리가 거룩한 자리라고 규정하면서 만들어낸 장소가 방금 뭐라 했지요? 바로 성막, 회막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에 없는 게 있어요. 하나님의 제사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하나님께서 제사하는 공간을 만들었다는 말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이 거기서 이스라엘 사람과 역사를 같이 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거기에 기거할게.” 거기에 함께 있겠다는 거예요. 인간도 있지만 인간 속에 하나님이 기거하는 장소를 하나님 방식대로 지시를 해서 만든 거예요.

지금 오늘 우리가 보는 게 역대하 9장이거든요. 역대하 9장 1절에 보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이렇게 돼 있지요. 솔로몬은 어느 나라 왕이죠? 이스라엘 왕이죠. 솔로몬 소속이 이스라엘이지요. 근데 스바 여왕 소속은 어딥니까? 그냥 스바지요. 스바 여왕이니까. 나라가 한쪽은 이스라엘이고, 한쪽은 이방나라에요.

근데 그 차이점이 뭐냐? 다 같은 인간이다. 그럼 차이점 없겠네요? 다 같은 인간이니까 차이점 없지요. 차이점을 내봐라. 차이점은 하나님이 친히 주신 율법이 있어요. 오늘 기차 속도 안 내겠습니다. 천천히 가겠습니다. 그 율법을 줬다는 걸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공간이 뭐라 했습니까? 회막, 성막. 날씨가 습기가 내려앉으면 저녁 잡숫고 하면 피곤할 수가 있어요. 어쨌든 간에 걱정하지 마세요. 반복해드릴 테니까요.

그 회막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데 보입니까? 하나님이 안 보이잖아요. 하나님이 안 보이는 데 그게 보이는 방식이 안 보이는 걸 보이는 방식으로 구조를 만드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회막에 집을 지어놓고 집은 그냥 가만있잖아요. 한 번 지어놓으면 정지돼 있잖아요. 그런데 그 안에서 어떤 무빙, 움직임이 있어요. 제단에서 지성소까지 뭔가 움직임이 있어요. 그 움직임 따라서 제사장이 같이 따라가면서 그 움직임을 제사장이 조성해냅니다.

그 움직임이 뭐에요? 회막 입구에서 제단, 성막 바깥 입구에서 제단까지, 제단에서 물두멍 지나서 천막 비슷한 입구까지, 입구 지나서 마지막 지성소까지 뭔가 움직임이 있는데 그 움직임이 뭘까요? 제사장이란 사람일까요, 아니면 제사장이 들고 가는 뭘까요? 제사장이 들고 가는 어린양 희생제물의 피입니다. 희생제물이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움직인다는 말은, 율법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활동코스를 그런 식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양을 바깥에서 잡고, 소나 염소의 피를 가지고 피로 압축시켜서 나한테 가져오라, 라는 지시를 하는 그분이 장차 본인이 내린 지시 따라 본인이 그걸 실행에 옮길 분이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실 거예요. 미리 그걸 모형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연극으로 보여주는 장소는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그 지시에 따라 제사장이 움직였지요. 뭔가 고정돼 있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은 누가 지시를 했다는 거예요. 그 장소가 무슨 장소냐? 거룩한 장소에요. 그 장소가 거룩하다면 그 장소에서 생산된 거룩이 성막을 둘러싼 이스라엘에게 파급이 되면 이스라엘 전체가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막에서 파급된 이 거룩이 만약에 이방나라까지 주어지는 기회가 된다면 이방나라 민족이, 또는 어떤 사람이, “우리는 추잡하고 더러운데 저 이스라엘은 거룩한 하나님이 거룩케 한 나라란다. 깨끗한 나라란다. 따라서 우리 이방나라 고향에서 오십 년, 육십 년 사는 것보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저 깨끗한 나라의 일원으로 사는 게 우리에게 거룩과 생명이 주어진다.” 하게 되면 그들은 어떻게 하겠어요? 자기나라, 민족을 배신하고 이스라엘나라에 합류하겠지요.

그렇게 합류된 자들을 이스라엘은 잡족이라고 해요. 이방인인데 이스라엘에게 합류한 사람. 출애굽 할 때 여러분 생각은 이스라엘이 나왔다 하지요. 맞아요. 그런데 다는 아니에요. 대부분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중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믿고 천사로부터 목숨을 건진 자들이 합류할 때 그 이방인들은 합류해놓고 그들도 할례를 행해야 돼요.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내가 합류된 이 세계에서는 지금 내 조상의 혈통은 용납하지 않는 곳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어린양의 취지로 새로운 혈통, 새로운 노선에 들어온 사람만 여기서 용납이 된다. 그걸 아는 사람들이어야 하기 때문에 할례를 행했던 겁니다. 할례를 행하고 그들은 이스라엘 된 거예요.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 칠 때에 이스라엘이 합류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분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기생 라합은 자기의 고향을 버리고 이스라엘에 합류했어요.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에 합류할 만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있음을 버리고 없음에 합류한 거거든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무작정 가출한 거예요.

주님이 지시한 곳 그것뿐이지 지시한 곳에 대해서 어떠한 형태라든지 계획이라든지 전혀 없었어요. 있음이 있음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고, 이쪽 있음에서 있음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고 있음에서 나왔는데 그냥 없음이에요. 없는데 다만 있다는 것은 바로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너를 선택했다.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있으니까 언약이 드디어 구체적인 민족을 하나님께서 만들어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특징은 자식이 몇 명이었습니까? 자식이 처음에 제로에요. 없음이에요. 없는데 그냥 이름만 많은 자식의 아비라 했지 자식은 실제로 없었어요. 없는데 그다음에 하늘의 별 같이 자식이 많아졌는데 그 자식의 조건이 뭐냐?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했던 그 언약에 의해서 재생산된 자만 아브라함 노선에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이름으로 거기에 합류가 되게 돼 있습니다. 그게 로마서 4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을 조상이라 하는데 무슨 조상이냐? 이스라엘 조상? 그건 유대인들이 이야기하는 거고 아브라함은 무엇의 조상이죠? 믿음의 조상이에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믿었던 자들의 조상. 그럼 없는 걸 믿으려면 나는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나는 없어야 되지요. 있는 나에게 시선 두지 말고, 시선을 분산시키지 말고 없는 하나님의 언약이 나를 날마다 내가 생각하지 않는 다른 나로 제조하고 있는 중이에요. 만들어내고 있어요. 자동차 공장에서 도면밖에 없었는데 도면이 살아서 움직이지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했지요. 새 성전에 문양들이 있는데 천사 문양들이었어요. 대구강의인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성전이 나중에 완공 되고나니까 그 그림으로 있던 천사들이 살아서 실제 천사들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거예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냥 밋밋한 그림이에요. 에스겔 41장에서 47장에 보면 새 성전 건축에 보면 문양들, 천사 모양이 있어요. 회랑들 전체가 천사들의 모양새에요. 우리 보기에는 그냥 그림이에요.

근데 그것도 신기하지만 뭐가 더 신기하냐면 거기에 천사들이 새 성전 측량을 하거든요. 측량한다는 것은 벽돌, 나무 뭔가 고정돼 있는 물체일 때 측량이 가능하잖아요. 그런데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그 측량된 물체들이 물체가 아니었어요. 이게 새로운 피조물, 성도가 되어서 전부 다 하늘나라 성전이 되고 말았어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림으로 여겼던 그 천사들이 실제 천사일 것처럼 성전의 하나의 모퉁이 돌, 또는 여러 가지 사이사이 벽돌로 여겼던 그 벽돌이 사람이 되다니, 그것도 천국 가는 사람이 되다니 참 신기하죠. 여러분이 그 신기함의 주인공들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고, 인간의 지혜로 나올 수 없는 지혜가 나와 있어요.

솔로몬 이야기 다시 봅시다. 솔로몬은 소속이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율법이 있다 했습니다. 율법의 특징은 제사 지내는 성막 또는 성전이 있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했습니다. 제사장이지요. 근데 처음에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 제사에 제사장이 움직이지만 신약이 되면 하나님 그분 자체가 움직임을 구약 때는 제사장들이 앞서서 보여준 거예요. 왜 보여주는가?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자기백성을 만들어내요.

역대하 9장 1절 봅시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솔로몬을 시험코자하여”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오늘 이야기는 솔로몬이 그 주변 나라들에게 어떤 소문이 났느냐 하면 지혜가 그야말로 초인적이죠. 인간에게서 나오는 지혜를 월등하게 능가하는 지혜의 소유자다, 라는 소문을 들었던 거예요.

그런데 오늘 역대하 9장에서는 이게 이스라엘이라면, 이스라엘서 솔로몬이 뭘 만들었습니까? 성전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활동한 대로 움직이는 성전이란 말이죠. 여기에 이스라엘 왕이 있는 거예요. 왕은 책임자, 성전 책임자가 왕이에요. 이게 솔로몬인데 역대하 9장에 와서 스바나라 여왕이 옆구리를 치고 누굴 만나는가? 솔로몬을 만나요. 이방나라에 소문나기를 성전이 소문난 게 아니고 많이 알고 똑똑하더라, 라는 이야기를 들은 거예요. 지식이 출중하다는 소릴 듣고 진짜 그런가하고 확인 차 온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연속성, 나와 너 사이에 보다 많이 노력하고 공부 많이 하게 되면 더 똑똑해진다는 이방나라에서는 이게 모든 걸 연속적으로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믿음이 좋아지면 분명히 기도를 나보다 더 열심히 했기 때문에 믿음이 좋아진 것이라 생각하고, “하루에 기도를 몇 시간했어?” 이렇게 묻는 거예요. 이렇게 묻는 것은 그 사람이 평소에 나의 행위의 연속성에서 어떤 결과가 나온다. 그 결과가 지금의 내 자리는 끊어짐이 없이 이어져 있고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이게 이방인 사고방식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상에는 이게 연속적입니까, 불연속적입니까? 이게 연속적이 아니고 불연속이에요. 이게 끊어져있어요. 이게 불연속적이라는 걸 어떻게 아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전에서 뭐가 이뤄진다고요? 성전에서는 그 희생물이 죽지요. 죽음이 있고 그다음에 뭡니까? 없음이 여기 있는 거예요. 없음, 죽음 이것이 성전 안에서 늘 이뤄지는 겁니다. 있는 것을 없애고 있는 것도 사라지게 만들고, 있음이 사라지고 있음이 죽는데 이스라엘은 인간으로선 달성할 수 없는 거룩한 백성이란 규정을 받는다 이 말이죠.

원인과 결과 사이에 이스라엘은 뭘 알아요? 이게 끊어져있다는 걸 알아요. 열심히 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이게 끊어져있어요. 그 끊어짐을 율법에 집결되어 매일같이 끊어짐을 보여주는 게 제사에요. 죽음이 없이는 이어짐이 없으니까 끊어진 게 맞잖아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죽었는데, 죽었다는 것은 끊어졌다는 뜻이거든요.

근데 하나님은 뭐냐? 생명이잖아요. 죽어야 마땅한 우리가 생명 되시는 분과 같이 있다는 것은 생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인데, 죽음과 생명은 끊어져있는데 끊어져있는 것이 어떻게 생명으로 연결돼 있는가? 그것은 다른 흠 없는 죽음이 거기에 개입돼 있기 때문에 이게 생명으로 연결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물론 나 혼자 정리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생명과, 그리고 인간은 이미 선악과 따먹고 죽었어요, 죽음 사이에 끊어져있는데 연결, 생명이 죽음까지 들어오게 한 것은 여기 뭐냐 하면 바로 율법이죠. 율법(제사법)에 의해서 죽음도 생명 안에서 살 수가 있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큰 혜택입니까? 인간은 태어나면 죽는 게 마땅한데 그렇지 않고 죽는 게 아니고 잠자는 것이다, 라는 그러한 평을 받는다는 것은 네가 이미 죽기 전부터 살아 있다는 걸 의미한다는 거거든요. 죽기 전부터 살아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은 잠자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하는 것은 바로 율법이 죽음 자리까지 주께서 제공해서 그래요.

그런데 이 어리석은 스바 여왕은 무엇으로 솔로몬을 하느냐 하면 인간의 지식이 보다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그게 신의 지식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서 시험을 치는데 어떤 시험을 치느냐 하면 이런 시험을 쳐요. “어려운 문제로 솔로몬을 시험코자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니” 선물 많이 가져왔지요.

“수원이 심히 많고 향품과 많은 금과 보석을 약대에 실었더라 저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솔로몬이 그 묻는 말을 다 대답하였으니 솔로몬이 은미하여 대답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와 그 건축한 궁과 그 상의 식물과 그 신복들의 좌석과 그 신하들의 시립한 것과 그들의 공복과 술 관원들과 그들의 공복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현황하여” 4절 끝에 “정신이 현황하여” 정신이 나갔다 이 말이죠.

그리고 선물 더 주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스바 여왕이 질문한 내용이 뭐냐 하면 본인이 궁금한 걸 질문한 거예요. 왜? 출제위원의 한계, 자기 한계를 내놓고 나한테는 한계점인데 과연 솔로몬은 그 한계점을 뛰어넘는지 봤는지 다 뛰어넘었거든요. 자기한테 궁금한 것들이 있었는데 그 궁금한 것을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니까 “야 솔로몬은 진짜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게 이방나라의 한계에요. 스바 여왕이 그렇게 해서 거룩해졌습니까? 아니지요. 솔로몬은 소문대로 소문보다 더 똑똑하더라. 똑똑하면 뭐합니까? 똑똑한 게 대단한 거예요? 똑똑하면 안 죽어요? 스바 여왕이 등장했다는 의미는, 다른 의미 아니에요. 다른 의미가 아니고 어떻게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생명에 접근하게 되었는가? 그게 의미 있다는 거예요.

생명은, 율법을 그것도 인간 쪽에서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율법 주고 생명도 같이 연결되도록 조치한 것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거예요. 왜?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이 있으니까요. 여러분 공중 급유 알아요? 이스라엘이 예멘 후티반군 대할 때 엄청난 거리 무려 천이백 킬로미터 날아와서 조그마한 전투기에 기름을 못 채워요. 공중 급유를 해요. 공중에서 뾰족한 것을 꽂아서 하거든요. 공중 급유를 해서 채워져야 폭격하고. 이번에 이란 폭격할 때도 공중 급유를 한 겁니다.

율법이 바로 그거에요. 율법을 줘야 거기서 죽음에도 생명의 연속성이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만약에 율법이 중간을, 공중 급유기가 공중 급유 싫다고 가버리면 그 비행기 어떻게 됩니까? 추락하지요. 기름이 있어야 날지요, 없는데? 말씀을 안 본다, 말씀에 관심 없다? 이거는 마귀가 그렇게 한 거거든요. 왜 마귀가 율법을, 말씀을 못 보게 하는 겁니까? 공중 급유를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어떤 방법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는 거예요. 세상 있는 것들로 행복하게 살면 장땡이잖아요, 이런 식으로 한 거예요. “네가 남들한테 밀리면 안 되잖아. 너도 성공해야지.” 계속 시선을 분산해요. 몸 건강해서 교회 잘 나오다가 몸 좀 아프니까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네. 나 교회 안 나간다.” 이런 경우, 여러분한텐 그런 경우 없지만, 왜 교회를 안 나오고 말씀을 안 듣지요? 시선을 갑자기 어디에 팔았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자기 단도리하는데 정신을 팔았던 거예요. 공중 급유가 안 됐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바 여왕이 찾아왔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 준 율법이 이스라엘을 패망시켰습니다. 망하게 했어요, 율법이. 율법이 있어서 생명이 와야 되는데 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니까 약속의 땅은 무슨 땅이냐 하면 율법이 율법대로 완성되는 땅이 그거에요.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 사는 조건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간단하지요. 뭐에 시선을 모아야 돼요? 율법에 시선을 모아야 돼요.

율법에 시선에 모은다는 말은 뭔 뜻이냐? 제사 드리는 그 기능의 중요성에 마음을 두어야 돼요. 왜? 제사 없으면 우린 죽었다, 이래야 되는데 좀 살만 하거든요. 살만 하니까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안 내는 거예요. 십일조 안 내니까 레위지파가 밥 먹고 살 수 없어서 사사기에 보면 레위지파가 떠돌이생활해요. 자기도 먹고 살아야 되니까. 떠돌이생활하면서 남의 집에 가서 점쳐주고 사적으로 행운을 빌어주는 무당으로 전락했어요. 먹고 살아야 되니까. 레위지파도 그런데 다른 지파는 말할 것도 없지요.

다시 말해서 땅에 조건부로 들어왔는데 약속의 땅을 자기 소유의 땅인 줄 착각해버린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래서 이스라엘이 율법 버리고 바알 섬길 때 어떻게 됩니까? 땅주인이 내 땅 내놓으라고 해서 이스라엘이 다 포로 잡혀서 이방나라로 보내버리고 그 땅은 비워놨어요. 왜 비워놨느냐? 율법의 완성에 합당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고 땅을 비워놓은 거예요. 땅주인이. 잡초가 나도 괜찮아요.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면 율법의 완성자가 아니면 이 땅에 못 들어온다고 비워놓은 겁니다.

땅주인의 횡포라고 하지 마세요. 땅주인의 정당한 권리행사입니다. 그걸 횡포라 하면 안 돼요. 하나님이 우릴 버리다니? 니가 먼저 버렸잖아, 니가. 니가 시선 분산되어 니가 먼저 버렸잖아. 밥 먹고 사는데 바빠서 말씀이 생명이라는 것을 니가 버렸잖아. 요즘 왜 사는 게 힘듭니까? 사는 게 힘들다는 것은 이방나라가 주장하는 거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는 사는 게 힘든 게 아니고 세상살이가 위험해요. ‘힘들다’하고 ‘위험하다’하고 분간 좀 해야 돼요. 어린애가 밤중에 돌아다니면 힘듭니까, 위험합니까? 위험하잖아요, 그렇지요? 특히 여자 꼬맹이가 돌아다니면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런데 애가 돌아다니는 게 힘들어서 걱정하는 겁니까? 위험하잖아요. 이 세상은 어두움이에요.

이걸 누가 아느냐? 하늘에서 지켜보니까 하나님 자기백성에게 이 세상이 어두워요. 대단히 어두워요. 그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아시느냐?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와봤으니까 알지요. 예수님이 나는 빛인데 세상은 뭡니까? 어두움이다. 그들이 나에게 오지 않는 이유가 어두움이 어두움을 드러내기 때문에 안 오는 거예요. 어둡기 때문에 빛으로 안 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왜 그러느냐? 본인이 어두움을 이기기 때문이 아니라 어두움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빛 된 행하심을 드러내는 차원에서, 쉽게 말해서 빛 되시는 분이 빛으로 강제로 이끌었기 때문에 주님께 왔다고 돼 있어요. 이게 요한복음 3장 19절에서 21절에 그렇게 돼 있어요. 하나님께서 행하셔서 빛으로 왔다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 주께로 불러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지금 방금 뭐냐? 솔로몬의 지혜가 인간의 모든 상식적인 지혜를 능가하지요. 능가할 때 스바 여왕이 반했습니다. 반해서 어떻게 하느냐? 인간으로서 제공할 수 있는 가장 극상의 선물을 솔로몬에게 주었어요. 무엇에 반했느냐? 완전성, 완벽성. 솔로몬에게서 스바 여왕이 발견한 것은 뭐냐? 더 이상 인간으로서는 감히 더 손댈 게 없는 완전성, 완벽성을 솔로몬은 이게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스바 여왕이 이거는 하나님이 아니면 이런 지혜가 오지 않는다고 이야기했거든요.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왕이 되게 하셨도다” 8절에. 첫째 시간에 아주 제일 중요한 구절을 우리가 같이 찾아봐야 돼요. 이거는 꼭 찾아봐야 돼요. 마태복음 12장 42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스바 여왕이 이방인 맞아요. 율법 같은 것 모릅니다. 그러나 스바 여왕이 율법은 몰라도 발견한 게 있어요. 인간에서 더는 나올 수 없는 최상의 완전한 지혜를 스바 여왕은 경험한 겁니다. 완전한 지혜. 그러면 마태복음 12장에서 스바 여왕이 경험했던 완전한 지혜, 최종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분이 누구란 말입니까? 마태복음 12장에서 지금 예수님 본인이에요. 여러분들이 이 도표를 보시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실 겁니다. 이 도표만 보시면 돼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뭘 주셨다? 율법을 주신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심으로써 이스라엘에 왕이 등장했거든요. 다윗 왕 그다음 솔로몬이잖아요. 솔로몬 때에 이 율법의 완성이 극상의 위치에 있을 때 이게 지혜가 된 거예요. 최고의 지혜, 율법의 완성 상태. 그래서 솔로몬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모든 번영을 다 누린 거예요.

그런데 율법이 없는 이방 여인,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만났단 말이죠. 만나서 뭘 봤습니까? 율법에서 나온 것을 모르고 솔로몬이 최상의 지혜자라고 알게 된 거예요. 그러면 이방인이잖아요. 이방인은 결국 뭐냐? 율법을 통하지 않고 극상의 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언제? 심판 때에, 마지막 심판 때에. 율법 줬는데도 그들은 율법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본래적 속성이에요. 그걸 이스라엘이 역사 내내 보여준 겁니다. 인간은 안 돼. 인간은 율법을 못 지켜, 안 돼요. 제사도 건성건성.

말라기에 보면 나옵니다. “이걸 제사라고 해? 치워라 이런 제사. 나 이런 제사 안 받는다.” 말라기에 보면 아주 극단적인 표현까지 했어요. 차라리 똥을 처발라라(말2: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이런 극단적인 표현을 한 거예요, 선지자가. “깨끗해야 될 제물이 더러워서 내가 받겠느냐? 너희들도 안 받을 거야.” 이런 식으로 했다고요. 그러니까 그 당시 제사장들이 우리가 언제 더러운 걸 드렸어요, 이러는 거예요.

말라기가 뭐냐? 구약의 끝자락이에요. 율법의 언약이 깨어져버리면 주어지는 것은 종말밖에 없어요. 이제는 세상이 멸망되는 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았다는 말은 패망의 원인이 돼요. 재앙의 시작이에요. 율법이 있는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것은 이방나라도 그냥 망한 거예요. 그런데 이방나라 남방여인이 스바 여왕이 솔로몬보고 놀래버린 거예요. 그래서 가지고 온 선물 다 주고 극진하게 솔로몬을 높였지요. 솔로몬을 높였다는 말은 솔로몬에 가는 지혜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지혜라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받았다는 말은 솔로몬 당시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준 게 있다는 거죠. 뭘 주었을까요? 붉게 쓸게요. 지혜. 이 지혜를 솔로몬이 쓴 잠언에 보면 뭐냐? 이게 바로 ‘지혜=생명’이다. 내가 이 세상을 지혜로 만들었는데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잠언 8장 그것 보고 첫째 시간 쉽시다.

8장 35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딱 두 경우밖에 없음을 여러분 아시기 바랍니다. 딱 두 경우밖에 없어요. 지혜가 있는 자와 지혜가 들어있지 않는 자,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어요. 제가 제일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죽음과 생명의 경계라고요.

그런데 인간은 조상의 죽음 쪽에 섰잖아요. 그런데 특수한 이스라엘에게는 생명을 주께서 공중 급유하듯이 주신 거예요. 율법을 통해서.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잠언 1장 7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이 말은 여호와 자체가 생명이란 뜻이에요. 한 구절 더하고 십 분 쉽시다. 잠언 3장 15절에서 18절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갑자기 예를 들면 이름이 ‘이 지혜’는 ‘이 진주’보다 귀하다는 그런…. 이상한 예를 죄송합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솔로몬이 경험한 것)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야 생명나무라. 그러니까 율법의 완성은 지혜고 지혜에 속한 사람은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같이 공유해서 누리는 대상자다 이 말입니다. 이제 그것을 어떻게 우리는 그 속에 들어갈 수 있는가, 10분 뒤에 봅시다.

 

 

20241101b 울산강의-역대기하(8강) 9장 8절 : 지혜의 확장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해봅시다.

지혜 자체는 최종성입니다. 최종성이기 때문에 어떤 부정적 요소가 없습니다. 왜? 도달할 걸 다 도달했기 때문에. 지혜 자체가 완제품이라. 생명이니까. 생명나무 과일을 따먹는다, 이거는 선악과 과일을 따먹으려 할 때 범죄한 게 아니고 선악과 구경한다고 죽은 게 아니고 따먹으려고 만질 때 죽은 게 아니고 선악지식 과실을 따먹는 날에는 그냥 죽어버린 거예요.

이 말은 굉장히 슬프게 들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똑같이 생명나무는 따먹으려고 애쓴다고 생명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먹으면 돼요. 그러면 누가 뭐래도 그건 영생이에요. 선악과와 똑같이. 그래서 하나님께선 과일로 표현한 거예요. 생명나무 과일 만졌다고 해서 영생 얻는 게 아니고 먼지 닦아준다고 영생 얻는 게 아니고 그냥 속에 들어가면 돼요. 따먹으면 돼요. 내 살과 내 피를 그냥 마시면 영생이에요. 그게 마지막 언약이고 최종 언약이고 새 언약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을 때는 아담이 살아 있을 때 따먹었잖아요. 그런데 생명나무는 인간이 죽었을 때기 때문에 죽은 인간에게는 생명나무를 따먹을 의사도 없고 그런 능력도 없고 재주도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냥 따먹으라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와 같이 죽은 자가 되셔서 본인이 아버지로 부활되셔서 부활의 능력으로 그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그냥 거저주시는 생명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명령한다고 생명 되는 게 아니고 아예 친절하게 생명을 우리 속까지 집어넣어준 거예요. 이게 최종적인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예수님이 곧 지혜에요. 그걸 한 번 보고 다시 구약 돌아가겠습니다. 골로새서 2장 2절부터 보면,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그다음에 여러분도 잘 아시는 유명한 구절, 고린도전서 1장 19절, 20절, 21절, 24절. 19절부터 보면,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라고 돼 있지요.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21절) 해놓고 24절엔 뭐냐?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랍니다. 누구한테?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나 율법과 상관없이. 유대인들은 율법을 줘도 못 지키는데, 우리도 줘도 못 지켜요. 율법과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지혜가 되는 분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속에 이미 들어오신 거예요.

그러면 신약에 이렇게 나오면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는 별로 필요치 않는 이야기냐? 신약에 고린도전서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끝나는 이야기인데 왜 구약이 이렇게 두껍냐? 구약에 왜 그렇게 할 말이 많으냐? 그것은 인간에게 지혜를 주는 방식, 또는 이방인에게 지혜를 주는 방식에 대해서 신약적인 최종적인 방식을 구약에서도 이미 미리 실시를 한 사람이 있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욥이에요.

욥기에 나오는 방법은 뭐냐 하면, 지혜는 사탄이 개입되지 아니하면 주어지지 않는다. 율법의 완성이 지혜라 했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이 주어져서 율법이 부정적 기능을 해요.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는, 율법 지켜서 구원받겠다하는 그 자체가 오히려 자신의 죄만 노출시킬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제사 있잖아요. 그 제사에서 나오는 희생 제물에 시선을 빼앗기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거기에다가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 다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땅인 줄 알고 이방 바알 섬기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공중 급유시켜서 생명을 주려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기는 거예요.

바알의 특징은 율법이 없어요. 바알이 하는 제사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제사기 때문에 율법과 관련 없는 제사를 드린 거예요. 누가 고린도전서 10장 20절을 읽어보세요.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됐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는 제사가 하나님께 하는 제사가 아니고 귀신에게 하는 제사라고 돼 있지요.

그런데 제사하는 이방인들에게 물어봅시다. 그들이 지금 누구한테 제사한다고 하죠? 신에게, 조물주에게, 하나님께 제사한다 하지요. 여러분 조상숭배가 누구한데 제사하는 겁니까? 아아 어려운 말이다. 불신자들이 추석 때나 설에 제사하고 성묘 가서 제사할 때 누구한테 제사하는 거예요? (귀신한테…) 그거는 우리 쪽 이야기고 저쪽 이야기 제사하는 본인들한테 물어보자.

①조상한테 하는 것이다. 아니면 ②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몇 번입니까? (조상한테…) 아니죠. 하나님께 하는 거죠. 그들이 믿는 하나님에게 조상을 부탁하게 되면 조상이 잘 되면 자기가 잘 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이 없는 인간이 없어요. 하나님 없는 인간이 없다고요. 왜 불신자들은 조상이 잘 돼야 되느냐? 자기가 죽으면 합류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천주교 신자들이 미사 올리는 것도 누구한데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조상한테 하는 것으로 해서 본인이 장차 합류할 그때를 위하여 본인이 본인한테 제사하는 셈이 되지요. 연옥에서 빨리 빼달라고. 이걸 사도 바울은 뭐라 합니까? 이제 우리 편으로 넘어옵시다. 그게 그들의 제사는 귀신한테 하는 것이다.

조물주여, 우리 조상 잘 되고 나도 조상 만나러 갈 때 귀신 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것 귀신한테 하는 거죠. 신에게 하는 거예요. 그걸 간추려서 조상한테 제사하면 우릴 도와준다고 하는데 좀 더 분석해 들어가게 되면, 조상이 우릴 안 도와주는 걸 다 알고 있어요. 다만 조상을 죽게 만들어서 보강하고 있는 그 알 수 없는 신이 지금 조상에게 잘하라고 제사하는 나를 잘해달라는 이야기에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조상이 죽으면 귀신 되잖아요. 그런데 귀신들이 있는 곳에 그 장소제공, 모든 관장하는 귀신보다 더 높은 게 있는데 불신자는 그걸 모르지요. 그들이 아는 지식의 한계는 죽어서 조상들이 어디에 갔다. 그걸 누가 만들었지? 몰라. 모르는데 뭐가 있어. 우리도 거기 합류할 거야. 내가 거기 가면 내 자식들이 날 위해서 조상 잘 되게 해주면 나는 죽어도 귀신 돼도 좋은데 극락 갈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몸 어려울 때, 치매 걸리고 요양병원 갈 때 돈 대고 간호하는 것은 딸이 다 하지만 재산은 누구한테 남깁니까? 아들한테 남기지요. 왜? 내가 죽어서도 제사 덕을 보려하면 제사 지내는 아들한테 부탁하는 게 낫지요. 지금 사태가 이렇습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누구 말대로 믿으셔야 됩니다.

자기를 위해서 예배를 드려도 그거는 귀신한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혜를 주는 방법은 욥을 없애는 거예요. 욥을 없애려면 여기 누가 동원되는가? 사탄이 개입돼야 돼요. 인간이 자기를 그냥 없애려 하면 없어집니까? “내가 괜찮은데 왜 자꾸 없애려고 하지? 나 괜찮게 살았는데 하나님이 날 없앨 리는 없을 거야. 괜찮으니까 아마 계속 유지하려 하실 거야”라는 생각을 욥은 안 해봤겠어요? 욥이 했겠지요.

욥이 자기가 얼마나 엉터리란 사실을 누구의 개입으로 비로소 알게 됩니까? 사탄이 찾아와서 자기를 다룰 때 욥은 자기의 실체를 알게 된 거예요. 악마가. 사탄이 들어와서 욥과 지혜 사이를 이걸 잘라내는 거예요. 욥은 결코 완전한 최종적인 영생을 받을 위인이 못 되는 거예요. 뭐했다고 영생을 따먹어요? 지가 뭐 한 게 있어요? 욥은 한 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욥에게 사탄을 보내서 욥이 가진 모든 것, 건강까지도 몽땅 다 빼앗아버렸죠. 그러나 빼앗아도 하나님께서 특별히 욥에게는 그 목숨만큼은 건드리지 말라고 제한을 걸어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선지자거든요. 이방인으로서의 선지자에요. 이방인의 선지자란 뭔 뜻입니까? 율법의 노선에 관계없이 지혜와 통하는 선지자.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율법이 이스라엘 전체에게 부정적인 기능을 했잖아요. 이방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욥 같은 경우가 욥에게 부정적인 사태를 발생시킨 거예요. 나 스스로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도대체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 건 누구 탓이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하나님께서 애꿎은 나에게 힘든 일과 건강 앗아가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건 영어로 쓰겠습니다. 욥이 지금 난처한 것은 이거에요. 딜레마dilemma에 빠진 거예요. 딜레마에 빠진 욥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은 뭐냐? “죽여주옵소서.” 차라리 이렇게 힘들 것 같으면 나로 출생하지 않았음이 더 낫겠습니다. 이걸 신약에선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한 거죠? 예수님이 가룟 유다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차라리 넌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그 말은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살아 있는 것을 부정적으로 만들겠다. 차라리 안 태어난 게 더 낫고, 차라리 죽는 게 형편이 더 나을 정도로 그렇게 본질에 너를 접근시키겠다는 거예요. 딜레마에요. 욥은 왜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합니까?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왜 합니까? 고민한다고 해서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절망이 자기에겐 더 큰 고통이기 때문에 그래요. 차라리 죽으면 모든 게 해결되잖아요. ‘나 없다’가 되니까. 태어나지 않았으면 아예 없다가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을 선지자로 삼는데 뭐냐? 하나님의 생명과 없애짐, 죽음 사이의 경계선으로 활용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에 누가 개입하고 협조합니까? 사탄이 협조하는 거예요. 악마가. 악마가 와서 욥으로 하여금 딜레마에 빠뜨릴 때 비로소 욥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한 내가 결단코 아니었음을 압니다. 내가 생각한 나 따로 있고, 내가 생각 못한 다른 나를 겨냥해서 그쪽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지요.

그런데 그 다른 나로 들어가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소연만 할 뿐이에요. 그 하소연 중에서 한 마디를 우리가 봅시다. 욥기 28장 12절,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지금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여기서 지혜라는 것은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나타나는 진리 그 자체, 최종적인 것, 완전하고 완벽한 것, 모든 것의 모든 것 그거는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

13절에,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이게 바로 선지자의 기능 아닙니까? 인간의 한계, 인간세계 사회의 한계, 이 땅의 한계를 지금 욥이 대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욥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욥의 세 친구와 차이 나는 점이에요. 욥의 세 친구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댑따 하나님만 거론해요.

실제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탄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욥의 세 친구는 지혜를 말하는 게 아니고 뭘 말해요? 지식을 말하는 거예요. 신학을 이야기해요. “욥아, 잘 들어봐.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고 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 줄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따라서 니가 할 것은 내 죄가 뭔지 알아서 회개하게 되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어디 다단계 차릴 일 있습니까. 니가 잘 될 거야.

이 욥의 친구의 허점은 뭐냐? 이게 지식이죠. 지식의 허점은, 모든 세상 학문의 허점은? 자기 자신을 포기할 줄 모른다. 이게 지혜가 도달한 사람이 아니고 성경 백독 읽고 도달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성경 백독했다, 나는 신학교 나왔다, 나는 목사다.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그 이야기가 결국은 뭐냐? 자기가 자기 방어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방어 작전이에요.

“혹시 물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습니까”라고 일반가정에 들어가서 운을 떼놓고 결국 내미는 것은 ‘도를 아십니까?’에요. 요새는 길바닥에선 안 되니까 물 한 그릇 얻어먹으러 왔다고 하면서 언술을 푸는 거예요. 모든 종교가 다 그렇지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신을 믿으면 되고, 어떤 신학을 갖추면 되고, 어떤 책을 읽으면 되고, 또는 철학자 같으면 성경 이런 것이 나를 지키지 못한다. 나는 철학을 공부하란다, 물리학을 하란다, 화학을 하란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산이 거기 있기에 산에 간다, 엄홍길. 자기가 하는 내가 수고한 그것이 나를 지켜준다는 거예요. 내가 자식한테 잘해주면 자식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말로는 자식 필요 없다, 해놓고는 아프면 전화라도 황공하고, 나이 들면.

결국은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욥도 마찬가지고 그동안 하나님을 나를 지키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자기는 몰랐지요. 그런데 친구는 아직도 내가 하나님 믿는 것은 나를 지키는 방식이라는 것을 본인이 모르면서 하나님 운운하고 있고. 욥은 하나님이 허락한 사탄이 개입해서 들통 나고 보니까 결국 나는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는 하나님이라고 여겼었는데 지금 그게 틀어졌다는 거예요. 그게 불연속성이다.

하나님이 오는 그 뜻을 받아서 나는 이런 것 받았다고 내밀어야 되는데, 그래야 서로 통하고 영생 얻는데 하나님이 의롭고 나도 의로운데 환란 앞에서 내가 내놓을 게 없네. 내놓으려면 지혜를 알아서 이것 때문에 환란 주셨군요, 해야 되는데 뭘 도무지 알 수 없느냐? 왜? Why me? 왜 하필 나에게 이런 환란을 주는지 차라리 내가 죄가 뭔지 알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죠.

그래서 욥기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내가 옆집 과부를 탐을 냈습니까, 내가 도둑질했습니까, 어린 고아를 학대했습니까? 오히려 평소 행동은 그 반대였어요. 혹시 고아 있으면 도와주고, 어른들 잘해주고, 자식들 위해서 잘못하지 말라고 기도해주고. 매사에 자기 보기에 완벽 그 자체였던 거예요.

그런데 그랬던 욥이 욥기 40장에 어떻게 됩니까? 40장에 보면 욥이 이걸 알아요. 내가 지혜를 알았다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거예요. 폭풍 가운데 오신 하나님을 내가 만났데요. 38장 1절,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셨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그전에 하나님 만나면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하고 마음 준비했는데 막상 하나님 딱 만나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재를 뒤집어썼지요. 그리고 말이 쑥 들어갔습니다.

영생은 내 쪽에서 하나님 뜻을 알아서 내가 쟁취하는 게 아니고 만남 그 자체에요. 영생은 만남 그 자체, 내가 예상치도 못한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된 그 자체. 하나님을 예상 못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알던 나를 이제는 기꺼이 버리리라. 왜? 가짜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서 있든지 없든지 죽든지 살든지 어떤 상태라도 의미 없음. 따라서 내가 살아 있다고 의식하는 그 자체에서는 몽땅 다 거짓말만 나와요. 나를 의식하면서 나오는 모든 말들과 행동은 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를 걸 받는 게 아니고 망하게 된 자에게 도달한 하나님의 자기 말씀을 도로 받는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목걸이에다 하나의 구슬로 꿰서 데려가지요. 생명책에 기록된 자를 그렇게 데려간다고요. 생명 속으로 가져가요. 그 예가 나오는데 41장 33절, 지금 리워야단 우리 번역엔 악어로 돼 있지요. 이상하게 생긴 괴물이란 말이죠.

괴물인데 특징이 뭐냐? 33절에 “땅 위에는 그것 같은 것이 없나니”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어요? “두려움 없게 지음을 받았음이라” 이게 뭐냐 하면 영적 존재는 이 지상에 인간들 사는 동네에 있었어요. 영적 존재는 겁이 없어요. 자기 동네 아니니까. 인간들은 매사에 두려움과 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동네가 내가 살 동네기 때문에.

그러니까 영적 존재는 산다, 죽는다가 의미가 없어요. 존재 자체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러나 인간에게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뭐가 주어졌습니까? 육신의 죽음이 주어졌지요. 아담보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했으니까. 흙이 될까봐 두려워서 인간세계에선 두려움뿐이에요. 두려움으로 벌벌 떠는 거예요.

이래도 두렵고 안 해도 두렵고 해도 두렵고. 모든 행동이 두려움으로 둘둘 감은 채로 매사를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미래를 계획하고 두려움 속에서 과거에 대해 후회하고 두려움 속에서 미리 걱정하고 두려움 없는 한 순간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인간의 팔자에요.

그러니까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발견한 건 뭐였습니까? 최고였지요. 모든 걸 알지요. 스바 여왕이 바로 우리 인간으로서 모든 걸 알게 되면 그다음부턴 완벽하기 때문에 뭐가 없어요? 두려움이 없지요. 스바 여왕은 그 점에서 뭔가 크게 오해했습니다. 오늘 방금 보았던 것은 욥기였지요. 욥기에서 욥의 친구와 욥의 차이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기 42장 7절,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엘리후는 빠져요. 세 친구한테만 해당됩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러니 정당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보고 앞에 욥기의 엘리바스나 빌닷 그 친구들한테 이야기한 것 보세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완벽하게 신앙인들입니다. 시작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돌아가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인간의 지혜로 볼 때 도대체 이들의 허점을 찾을 수가 없어요. 논리가 정확하게 하나님 중심주의입니다. 오늘날 캘빈주의 같아요. 캘빈주의보다 더 나아요.

그런데 욥기 42장에서는 정당하지 못하다. 욥보다 도리어 정당하지 못하다고 돼 있는데 우리가 욥기 이 이야기를 다시 보게 되면 욥이 한 이야기 나열하고 욥의 친구 네 명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세요.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상해요. 심지어 욥의 친구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복사하듯이 욥이 이야기해요. 근데 하나님이 보는 관점은 달랐어요. 욥은 정당하고 친구들은 정당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데 욥이 정당하다면 하나님이 욥을 나무라지 말아야 되는데 하나님은 엘리후도 나무라고 욥을 되게 나무래요.

그러니까 지금 욥기를 보는 사람이 어떻게 정리 정돈해야 될지 예선전과 본선이 다른 모양이죠. 예선전 욥이 욥의 친구 이기고, 본선에 가선 하나님과 욥에선 하나님이 이기고 그런 셈이 돼버리지요. 왜 하나님께선 이런 말씀을 하는가? 그 뒤에 8절에 나옵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들 죄가 사해진다 이 말이거든요.

욥에게 뭐가 주어졌느냐? 자, 여러분 욥에게 아까 사탄이 주어졌지요. 그러나 사탄은 몰랐어요.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을 공격할 때에 하나님은 다 생각이 있었어요. 뭐냐? 사탄이 공격할 때 메시아적인 환란을 욥을 통해서 제공하게 만든 거예요. 장차올 예수님의 환란을 욥에게 제공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사탄은 신나서 욥에게 고난을 준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고 사탄으로 하여금 마태복음 4장에서 광야에서 시험하게 했지요. 그 방식이에요.

사탄은 신이 났어. 바리새인, 사두개인 신이 났어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메시아를 더욱더 메시아 되게 만들었어요. 메시아가 메시아답다는 말은 그분의 제사로 말미암아 죄인이 영생을 얻는 다리가 되게 만든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 떠밀렸고 사람이 원치 않은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영생이 주어지는 공중 급유가 가능한 율법의 완성, 지혜 그 자체입니다. 지혜가 곧 생명이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여러분들이 환란을 스스로 만들지 말라 이 말입니다. 환란은 누가 줘요? 사탄이 줘요. 사탄이 어떻게 줘요? 시선 분산, 자기에 대한 치중, 집중, 자기에 대한 몰두, 연민, 내 것 내가 지키기 그런 식으로 살 때 불신자 같으면 관계없어요. 성도라면 그게 그렇게 괴로워요. 그게 딜레마에요. 어찌할꼬? 해결책이 없어 어찌할꼬?

그런데 욥은 하나님에 의해서 살았지요. 뭐냐 하면 요새 같으면 니 모습과 십자가 달린 예수님 모습을 대조하게 만드는 말씀이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을 줘버리면 말씀 안에 십자가 들어있고, 그 십자가 앞에서 나를 다시 한 번 쓰레기로 세우게 만드는 거죠.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 같은 존재에요. 예수님의 증인이에요. 성전에 하나의 벽돌이죠. 이게 욥이에요. 이게 지혜에요.

이제는 뭘 보느냐 하면 솔로몬 봅시다. 솔로몬에게 이방인 스바 여왕이 ‘똑똑하네. 많이 아네.’ 그걸로 끝나고 지 가진 것 많은 보화를 솔로몬에게 주었습니다. 자, 문제는 솔로몬이 메시아냐 하는 문제에요. 솔로몬은 메시아가 아니에요. 왜 메시아 아니냐? 메시아적인 고난이 솔로몬 자신에게는 그것이 나중에 주어지지요. 그것도 자기 이름으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주어지지요. 그걸 전도서 1장에 봅시다.

전도서 1장에 제일 먼저 뭐가 나오지요? “다윗의 아들” 다윗의 복제판, 다윗의 반복, 다윗의 연속. 다윗이 가졌던 그 죄, “나는 모친의 죄에서 태어났다” 그것에 대한 반복이 다윗의 언약적 아들 솔로몬에게도 주어졌다는 이야기가 전도서입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말은 나 전도자, 언약의 전도자가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받았던 언약의 증인으로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이 말이죠.

그럼 이 말 딱 들으면 사람들은, “뭐야, 뭐야. 뭐가 헛된데? 당신은 많이 알았잖아. 당신은 여러 가지 부자였잖아.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었잖아. 그 당시론 장수한 사람이잖아. 당신은 많은 여자를 거느렸잖아. 화려하게 살았잖아. 당신은 모르는 게 없이 모든 걸 알았잖아.” 여러 가지 이야기 나올 거죠.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솔로몬이 할 말이 있는 거예요. 책을 많이 읽어도 피곤하고 많이 의롭고 많이 똑똑하다 할지라도 모르는 사람과 똑같은 인생길 갑니다. 다 헛되고 헛된 길 갑니다. 솔로몬 자체 내의 부정성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파먹고 자기가 스스로 붕괴됨, 파멸되는 것을 대단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허풍이었다는 이것을 다윗언약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받았던 그 언약이 내 위에 작동하고 있고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전도서에 대해서는 희망이 나오겠지요. 희망 보기 전에 우리가 마태복음 25장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1절) 이렇게 돼 있지요. 그대로 써볼게요. 천국은 열 처녀와 같다, 이 말 아닙니까? 천국을 설명하고 표현할 때 내가 열 처녀로 설명해줄게,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이 이야기만 들으면 열 처녀 전부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오해할 수가 있지요. 예수님은 천국을 표현하는데 열 처녀가 필요한데 천국 들어간다고 이렇게 오해할 수 있지요. 천국은 열 처녀와 같으니, 그 뒤의 말 전혀 모르고 열 처녀는 다 훌륭해서 천국 갔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그 뒤에 줄줄 이어져 나올 것 같지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열 처녀를 하나로 봐야 돼요. 왜냐하면 신랑이 몇 명입니까? 신랑이 열 명이었습니까? 여섯 명, 여섯 명 붙는 거예요? 솔로 예능프로 하는 거예요? 아니지요. 신랑은 하나잖아요. 그러니까 맞선프로 솔로, 남자 한 명 나와야 돼요. 여자 몇 명 나와야 돼요? 여자가 여섯 명 나오든지 열 명 나오든지 관계없어요. 그러면 얼마나 재밌게요.

조건을 열 명 쪽에서 달겠어요, 한 명 쪽에서 내밀겠습니까? 한 명 쪽에서 조건을 내밀겠지요. 신랑 쪽에서 조건을 내미는 거예요. 열 처녀가 중간에 쪼개집니다. 쪼개지면 여러분 수학 잘 아니까 몇 대 몇? 5:5로. 4:6, 3:7, 8:2로 쪼개지지 안하요. 5:5로 쪼개진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똑같다. 그 여자 인물, 키, 학력, 성격 일체 안 봐요. 그걸 천국은 인간에게 나오는 조건을 일체 보지 않는 블라인드 면접 멋지지, 뭐. 일체 보지 않음.

자, 이번에 봅시다. 열 처녀가 왔다. 열 처녀가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지요. 한 명의 신랑과 혼인하기 위해서 열 처녀 왔지요. 그러면 열 처녀가 이렇게 있다면 열 처녀 전부가 정열해서 한쪽만 바라보겠지요. 동물에 그런 게 있지요. 미어캣인가 한쪽만 바라보는. 한쪽만 바라보니까 그들을 열 명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는 거예요.

하나로 보는데 신랑 쪽에서의 조건이 뭡니까? 완전히 두 조각나버렸지요. 내부적으로 두 조각났습니다. 신랑과 반드시 이번에 혼인한다, 전부 다 똑같은 심정으로 왔는데 이게 두 조각나버렸습니다. 그런데 뭐는 살아 있어요? 신랑과 반드시 결혼해야 된다는 것은 하나같아요.

그러니까 하나같은 그쪽을 중간에 쪼개는 것은 그들 자체로 “우리 쪼개자. 숫자 너무 많다. 쪽수 많으니까 다섯 명으로 하자.” 자체 회의 의논한 게 아니고 신랑 쪽에서 조건 걸어버리니까 자체적으로 본인이 원하지 않는 두 부류로 갈라져버린 거예요. 갈라지면서 오늘 지혜와 관련돼 있는 게 뭐냐 하면 이쪽 다섯 명을 슬기 있는 자, 다시 말해서 지혜 있는 자고 반대쪽은 어리석은 자 되지요.

그러면 잠언에서 지혜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지혜 없는 자는 죽음뿐이죠. 생명이 없지요. 천국이란 것은 이 쪼개짐에 의해서 천국의 본질이 쪼개짐 안에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천국이란 것은 쪼개짐 없는 천국은 없다는 거예요. 이거는 인간들이 마음의 결심이라든지 우리끼리 가위바위보 하는 게 아니고 조건 거는 것은 오실 신랑이 조건 걸어서 인간과 인간 사이를 쪼개버리는 겁니다. 뭐로? 슬기 있느냐? 지혜 있는 자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들, 저 서울대학 나왔는데요, 전부 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지식 가지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지혜 있는 자가 뭐냐? 결혼식을 밤에 하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열 명 다 알아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슬기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는 지식수준에서는 슬기 있다, 어리석다가 판정나지 않습니다. 똑같아요.

그러면 양쪽 다 신랑 올 때 기름 준비해야 된다는 지식은 있는데 슬기 있음, 지혜 있음은 누가 결정하느냐? 신랑이 자체적인 타이밍으로 결정해버려요. 생각도 못했는데 출제가 나왔어요. 킬러문항이라. 딱 보고 그러니까 기름을 준비해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열 명 다 똑같은 동일한 생각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신랑이 언제 오느냐는 누구 소관입니까? 신랑 소관이죠.

그렇다면 여기 신랑과 혼인한 그 여인들은 자신이 슬기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부 못해요. 왜? 슬기 있다는 그 규정은 신랑의 일방적인 타이밍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자기가 갖고 있던 슬기로 구원된 게 아니죠. 아아,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타이밍, 시간에 관한 문제지요.

마지막으로 전도서 다시 와서 12장 1절 봅시다. 그러니까 전도서 12장 1절 오기까지 전도자 솔로몬은 자기 나름대로의 그동안 인간세계에서 갖고 있던 지혜를 다 풀어요. 다 풀어냅니다. 다 풀어내면서 결론을 미리 이야기했어요. 어떤 인간의 지식이나 행위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헛됨에서 와서 모든 게 헛됨으로 돌아간다. 1장의 해도 그렇게 모든 바닷물도 그렇고 그냥 빙글빙글 돈다. 빙글 도는 거예요. 갑자기 나미 생각이 나는데 <빙글빙글> 나미가 선지자인가요? 똑같이 빙글빙글 돌다가 그냥 몰락하는 거예요.

그러면 빙글 도는 이것을 솔로몬은 어떻게 했느냐? 이걸 시간의 직선화시키는 거예요. 이게 뭐냐? 12장입니다. 1절,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기름을 미리 준비하라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제시한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을 네가 늙을 때 준비하지 말고 청년보고 준비하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네가 태어날 때부터 지혜를 줬다는 겁니다. 주었는데 인간은 자기 자신이 헛되게 사라진다는 것은 감히 생각 못해서 ‘나는 존재한다, 멋있게 존재해야지, 나는 여기 있다, 대단한 존재가 돼야지’ 이러다 보니까 관심사가 어디로 갔어요? 시선이 자기 잘 되는데 몰두해서 미리 준비할 것을 준비를 못한 거예요. 전도서 7장 봅시다. 아하, 내일 결혼식 가야 되는데.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1절) 이게 지혜자 이야기에요. 그럼 지식자 이야기는 뭡니까? 죽는 것보다 돌잔치가 훨씬 낫다. 이건 지혜 없는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고. 지혜자 이야기는 죽는 것이 낫다. 그럼 왜, 왜, 왜 물을 거잖아요. 답변이 뒤에 나와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4절에 지혜자의 마음은 어느 집에 있고?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6장에 거지 나사로와 부자를 생각해보세요. 거지 나사로의 관심사는 아브라함, 하나님의 지혜 완성의 세계, 부자의 관심사는 눈에 보이는 나한테 같이 파티 참석하는 같은 인간들, 너보다 낫잖아, 하는 그러한 인식들 아무것도 말씀이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어요. 십자가 준비되지 않은 사람, 그 사람은 지옥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면서 나는 영생 쪽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혜가 이미 이 땅에 활동하고 있음을 성령이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지혜를 놓치지 말고 십자가만이 지혜인 것을 지혜의 완성인 것을 이제는 능히 감사하고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울산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번제로 통치  (5) 2024.10.06
가로막는 주님  (1) 2024.09.09
성전확장  (0) 2024.07.09
성막과 성전  (2) 2024.06.09
천사의 심판자리  (0) 2024.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