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번제로 통치

아빠와 함께 2024. 10. 6. 09:11

20241004a 울산강의-역대기하(7강) 8장 12절 : 번제로 통치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8장 12절, “솔로몬이 낭실 앞에 쌓은 여호와의 단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
모세의 명을 좇아 매일에 합의한 대로 안식일과 월삭과 정한 절기 곧 일년의 세 절기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더라“ 그렇게 돼 있지요.

어디서 드리는가? 여호와의 단. 뭘 드리는가? 번제. 이 일을 누가 시켰는가? 하나님. 이 짧은 이 문장에서 13절에 사람 한 분 등장합니다. 그 이름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의 명을 좇아서”라고 돼 있지요. 그러면 우리가 물어야 될 게, “모세, 니가 뭔데?” 니가 뭔데 우리에게 명령질이야, 이것부터 우리가 생각해봐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자율성이 있어요. 자율성이 있어서 내 행동의 명령과 지시는 내가 내리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나한테 명령을 한다? 이건 용납하지 않지요. 가족끼리도 마찬가지에요. 어린애라도 부모가 강제로 교육적 차원에서, “그것 먹지 말고 이것 먹어야 돼. 그건 몸에 해로운 거야”라고 할 때 애들은 힘이 없기 때문에 순순히 따라줘요.

그런데 애들 맘속에 원한 쌓입니다. 부모에 대한 원한 차곡차곡 쌓이지요. 왜냐하면 인간이란 껍질에 불과하고 인간 속에는 악마가 집어넣어준 악마의 자율성이 있어요. 악마의 자율성. 다시 말해서 인간은 이미 지시받는 쪽에 있다고. 이미 누구로부터 지시받고 있어요. 여기에 대한 명쾌한 문장 하나 쓰겠습니다. 이 문장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답변을 해보세요.

복음을 버림으로써, 또는 복음을 기피함으로써, 또는 복음을 외면함으로써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도대체 인간은 뭘 얻고자 복음을 거부해요? 여러분들이 정답을 생각했지요. 복음을 버림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로 인한 나의 완전함’이에요. 악마가 추구했던 건 독자적인 자기 완전함이었어요.

사도 바울의 편지,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나 신약에 나오는 모든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 죄라는 것을 굉장히 간단하게 규정했어요. 죄가 뭐냐? 복음을 기피하는 것. 복음을 기피하는 게 죄에요. 그러니까 복음을 기피하는 바리새인, 유대인 보세요. 얼마나 경건하고 얼마나 순수함을 추구합니까?

바리새인들이 광화문에 모여서 데모한다면 오직 그들이 외칠 것은 뭐냐 하면 “순수, 순수, 순수, 순결, 경건!” 이것만 외쳤을 거예요. “저 개 같은 세리, 창기, 저 더러운 것들은 가라!” 적어도 우리정도 돼야 우리 그룹에 들어올 수 있다. 오직 순수, 순결, 경건. 그게 뭐냐 하면 나의 완전함이에요, 나의 완전함.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하는 죄라는 것은 십자가를 기피하는 게 죈데 너희들이 십자가를 기피하는 죄다, 그 정도가 아니라 더 나가요. “너희들은 십자가를 기피하게 돼 있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너희들 마음대로 안 되니까. 자율성, 자율성 하지만 사실은 인간 속에 마귀의 자율성만 있을 뿐이지 인간은 그냥 시킨 대로 할 뿐입니다.

마귀가 인간을 어떻게 시키느냐 하면 복음은 외면하라. 복음을 외면해야 네가 너다울 수 있다는 거예요. 네가 만약에 십자가 복음을 보는 순간 너의 너다움을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마귀는 항상 선택지를 주지요. “네가 너다운 완전을 추구할래, 아니면 쪼다 될래? 네 자체가 남한테 내세울 게 없는 쪼다가 될래, 안 그러면 그럴싸한 내세울 게 있을래?” 그걸 매일같이 언급하지요.

오늘 역대하 8장 12절에 보면, 솔로몬이 낭실 앞에 쌓은 여호와의 단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린다 했잖아요. 이 번제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의 길을 막아버린 게 번제에요. 인간이 순수, 순결, 순진, 정결 데모하듯이 몰려가는데, 어디로? 하나님께로 가는데 그걸 차단시키고 막아버리는 게 번제입니다. 번제란 다 태우는 거예요. 순결이고 순수고 믿음이고 소망이고 몽땅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너 없다. 여기서부터 너라는 존재는 없다가 돼요. 이게 번제요. 태워버리니까 없지요. 없애려고 태우는데, 태우는 이유가 없어지라고 태우는 거예요.

올림픽이라든지 아시안 게임할 때 릴레이 경기하잖아요. 세 번째 주자가 열심히 따라와서 바톤 하나 넘깁니다. 그럼 네 번째 주자가 바톤 받고 뛰잖아요. 그 네 번째 주자가 마지막 구간을 뛸 때 세 번째 주자 어디 있지요? 세 번째 주자 어디 있습니까? 카메라에 나타납니까? 없어졌어요. 없고 세 번째 주자가 전달할 게 있어요. 바톤이죠. 바톤을 네 번째 주자가 들고 결승점에 골인하는 겁니다.

인간이 갖고 있던 모든 율법 실천이 바톤이 어디로 넘어가느냐? 번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넘어갈 때 이제는 너는 여기서 바이바이다. 하나님의 언약이나 넘겨. 언약이나 넘겨줘. 내가 쥐고 달릴 데니까 너는 여기서 화면에서 사라져. 번제의 희생제물을 하나님께서는 받습니다. 번제란 것은 차단, 또는 불연속성, 단절, 쉽게 말해서 막힘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럼 오늘 역대하에서 앞에 쭉 나옵니다만 성전의 모든 제도와 조직을 구비했다는 것, 역대하 8장에서 성전의 모든 게 마무리됐다는 내용이거든요.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그 취지가 뭐냐?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지었어요. 제도부터 확립을 했습니다. 그것과 모세와 무슨 관계있는지 봐야 돼요.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뒤에 솔로몬의 업적, 역할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재판의 상용화, 또는 상시화, 또는 고정적 공간에 대한 확보 이걸 솔로몬이 한 거예요.

성전이란 걸 완공시켜서 놔두고 그 성전에서 번제를 드린다. 번제는 보통 세 가지로 나와요. 상번제, 매일 드리는 것. 그리고 월초에 드리는 것. 그다음에 뭐냐? 3대 절기 때 드리는 것. 월초 또는 다른 말로 안식일. 3대 절기도 안식일에 포함돼요. 이럴 때 번제를 드립니다. 그런데 번제를 드릴 때는 달랑 번제만 드리지 않아요. 반드시 그 앞에 뭘 드리느냐 하면 속건제나 속죄제를 먼저 그리고 난 뒤에 번제 드려요.

그러니까 속건제, 속죄제는 예비제사입니다. 고급식당에서 촌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서울 호텔 같은 데는 한 끼에 십만 원 넘잖아요. 십만 원 넘는 고급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멀건 죽 하나 내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촌사람이 이것 먹고 집에 가자. 아직 제대로 본 음식은 나오지도 않았어요. 먼저 수프 보고 양송이수프만 달랑 나왔는데 그것 먹고 집에 가면 안 되잖아요. 진짜 안 되지요.

오늘날 교인들이 그래요. 예배드리고 집에 가요. 죄 용서받았다고. 지금 뭐가 남아있습니까? “주님, 죄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애들아, 집에 가자. 1부, 2부 다 끝났다 집에 가자.” 주님께서 잠깐만, 불러요. “너 어디 가는데?” “내 집에요.” “니 집이 어디 있어? 다 바쳐야지, 나한테.” 방향을 잘못 본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집에 간다는 것은 단절, 막힘, 차단 이것이 없는 곳으로 가요.

그러나 주께서 구원은 항상 차단, 단절된 곳을 가야 돼요. 왜냐하면 그때부터 구원이 나의 일이 안 되고 누구 일이 되겠어요?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바톤을 주의 일로 넘기는 겁니다. 맨날 교회 오십 년 다니면서 자기 일만 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도 교회 갔다, 예배드렸다, 집에 가자. 다음 주일 날 오면 되잖아. 오늘 오후에 놀러가자. 이런 식으로 전부 다 자기 일만 했지 주의 일로 넘어가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끄는 그 길은 이미 주님 가신 길로 확정 났습니다. 노래도 나오잖아요.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왜 주님께서 먼저 시범을 보여줬느냐 하면 딱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딱 그 길밖에 없어요. 주님 가신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근데 주님은 아버지께 다 바쳤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주님 가신 길 관람을 했어, 관광객들. 여기서 주님 십자가 돌아가시고, 여기 빈 무덤 보이지. 부활하셔서. 너무 안 됐다, 그지? 주님 사랑이 넘친다, 그지? 실컷 구경하고 집에 가는 거예요. 그 길을 가질 못합니다. 왜? 주님 가신 길의 특징은 뭐냐? 인간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길이에요.

주님 가신 길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 가신 길을 가는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본인, 나의 일로서의 구원을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일로 여겼던 그 구원이 늘 실패를 하도록 주께서 조치를 해주십니다. 내 식대로 사는 그것은 구원에 매일같이 실패하도록 주께서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지금 논리가 뭐냐 하면 주님 가신 길은 바톤을 인간에서 어디로 넘어갔습니까? 주님 쪽으로 바톤을 넘겼잖아요. 인간이 감당이 된다, 안 된다? 감당이 안 되지요. 그런데 인간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자율성이 있지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자율성이 있잖아요. 그 자율성은 모든 일은 뭐로 끝나야 됩니까? 항상 실패로 끝나도록 조치를 해주는 겁니다, 실패로.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한다면 죄란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것, 이게 바로 죄가 됩니다. 그러면 뭐를 실패하지 않느냐? 자기 구원에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게 죄가 돼요. 참 쉽지요. 바톤을 넘기란 말이야, 바톤을 네가 바톤을 쥐고 마지막 코스까지 달릴 생각하지 말고 바톤을 주님께 맡기는 거예요. 주님께 맡길 때 우리는 뭐냐? 번제물로 들어가는 거예요. 로마서 12장 1절에 나옵니다, 이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들이 산 제물로 주님께 그냥 넘겨버려라. 왜냐하면 마지막 주님 가신 코스에서는 우리의 싸움, 우리의 원수는 사람이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악한 영과 대결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으로선 감당할 수가 없어요. 마귀를 무슨 수로 이깁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요? 어떻게는 뭘 어떻게 해. 주님께 바톤을 넘겼다니까요.

주의 일 안에 우리가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면 나는 뭘 해도 나의 자율성 때문에 나의 일로 머물기 때문에 주께서는 나를 거듭거듭 실패하게 하신다는 그 대상자가 주의 일에 포함이 돼 있어요. 우리는 매일같이 실패하면 되는 겁니다. 실패도 못합니까? 그 쉬운 걸. 세상에 성공하려하니까 스트레스 받고 힘들지 실패하는데 뭐 그리 힘들어요?

오늘 아침 뉴스에 올해 우리나라 사망원인 1위, 암이에요, 암. 당뇨도 아니고 심장병도 아니고 암이 일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밑에 있던 순위가 5등까지 치고 올라온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자살이에요. 5등까지 올라왔어. 자살을 왜 하지요? 실패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자살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패하지 않겠다는 것, 실패하지 않겠다는 게 죄가 되는 거죠.

실패하니까 본인의 자율성이 자기 안의 마귀가 용서를 안 하는 거예요. 막 책망을 하는 거예요. “왜 등신같이 실패했어. 내가 성공하라 했잖아.” 자기가 자기를 막 책망하니까 이게 서럽다고 실패하고 사기 당했다고 담배에다가 술을, 벌써 제가 담배 안 피우는 걸 알지요. 폼 보면 알잖아요. 술을 바가지로 마시면서 서러워서. 처음에는 술, 나중엔 마약….

“나는 안 돼, 안 돼.” 주님 뭐라 합니까? “원래 안 돼.” 안 되는 게 당연하지요. 그러면 구원에 실패하지 않으려는 게 죄라면, 그러면 주님 안에 들어온 사람은 어떤 고백을 하느냐? 구원에 실패하지 않겠다는 게 죄가 된다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고백을 하겠어요? “왜 자꾸 저를 구원해요? 구원 안 돼야 되는데 왜 자꾸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구원이 나의 일이다, 주의 일이다? 이미 주의 일 된 거예요. 껍데기는 나를 사용하되 구원은 주의 일이 돼요. 왜냐하면 주님 가신 길은, 주님이 아버지와 함께 했잖아요. 그거는 어떤 인간도 주님 구원받는데 보탬이 된 적 있습니까? 열두 제자가 도와줬습니까? 못 도와줬지요.

그러면 한 번 생각해보세요. 주님이 구원받는데 인간이 끼어들지 못했지요. 그러면 내 구원에 내가 끼어듭니까, 못 끼어듭니까? 끼어들면 안 되지요. 그거는 마귀 나라 가지요. 지옥 가지요. 내가 끼어들면 안 돼요. 끼어들지 못하도록 우리로 하여금 은근히 노리는 내 구원을 실패하게 하는 겁니다. 끼어들지 않게 하면서 구원이 되었으니까 내뱉어지는 고백은 뭐냐? “왜 자꾸 저를 구원하십니까?” 오늘 이것 한 가지만 알고 다 주무셔도 괜찮아요.

보통 교회 가면 내가 구원에 대해서 자기 나름 애를 쓴 것을 남한테 드러내요. “나는 구원을 위해서 이것까지 참았다, 이것까지 용납했다, 내가 사업이 망해도 구원은 놓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는데 이런 고백은 뭐냐 하면 벌써 자기 일이 아니에요. 주님의 구원은 아버지의 손에 있는 것처럼 나의 구원은 누구 손에 있습니까? 주님의 손, 주님의 능력으로 넘겨졌을 때나 가능한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논리적으로 전혀 어렵지 않아요. 문제는 내 자율성이 그걸 용납 안 해서 문제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솔로몬이 한 업적이 뭐냐, 역할이 뭐냐? 그거는 성전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어린이공원 만드는 건 다 이유가 있지요. 장래 나라의 기둥이 될 어린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어린이공원. 독립기념관은 뭐 때문입니까? 지나간 아픔과 슬픔을 잊지 말고 교훈으로 삼고자 독립기념관을 만들지요. 독립기념관이 어디 있지요? 천안에. 서울에 하나 더 짓는답니다. 그거는 다 인간에게 필요한 거예요.

그러면 성전은 누구한테 필요한 겁니까? 주님에게 필요한 거예요. 이걸 이스라엘이 오해한 겁니다. 우리 이스라엘 구원하는데 필요하다고 오해를 한 거예요. 성경이 그다음부터 해석이 복잡해지게 되는 거예요. 왜 복잡하냐 하면 이스라엘의 자율성이 끼어든 해석이 난무하기 때문에 성경은 따지고 보면 간단한데 이게 성경해석에 잡것들이 너무 많이 들어왔어요. 다 속아내야 될 것들이 너무 많이 들어온 거예요.

구약성경을 보면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스라엘이 성전 지었을 때 그들은 구원을 받았는데 그들이 우상을 섬겨서 성전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 구원에 힘들고 그들은 망했다. 아주 그냥 편하게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 해석의 기본 논조가 벌써 잘못됐어요. 어떤 논조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그렇게 애썼는데 이스라엘 쪽에서 차버렸다. 이런 논조에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애를 썼었다는 건데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을 건지지요. 구원하지요, 말씀의 완성을. 여러분 라면 끓일 때 생라면 먹고 스프가루 따로 입어 털어 넣고 이렇게 라면 먹습니까? 그렇게 라면 안 먹지요. 라면을 뜨거운 물에 왜 적셔요? 라면다운 라면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죄인을 왜 찾아옵니까? 본인 라면 먹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본인 구원이에요. 하나님이 하나님 구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이용한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해석 하면서 이스라엘이 잘했으면 구원할 텐데, 이러거든요. 여러분, 히스기야 왕이 얼마나 잘했습니까? 잘했지요. 히스기야 왕 때 유월절보다 더 큰 유월절은 없었다고 했어요. 그다음에 요시아 왕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율법 책을 발견하고 율법대로 살았잖아요.

그러면 히스기야 왕이나 요시아 왕이 그만큼 잘했으면 우리 솔직하게 인간적으로 이스라엘은 안 망해야 되잖아요. 그렇게 훌륭한 성군이 나타나서 했으면. 어떻게 했습니까? 어떻게 됐어요? 요시아 왕부터 해서 꼴아 박았습니다. 요시아 왕, 훌륭한 왕은 느고의 말을 듣지 않아서 전사했어요. 하나님이 그 왕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렇게 잘한 히스기야 왕은 나중에 바벨론 사자가 왔을 때 창고 다 보여주면서 ‘우리 집에 냉장고 있다, 우리 집에 차 세 대 있다’ 이러고 있다 홀라당 다 빼앗겼습니다. 금까지 다 가져갔어요, 바벨론에.

뭔가를, 그 당시 인간뿐만 아니고 오늘날 앉아있는 우리들도 뭔가를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 오해가 어디서 온 오해입니까? 하나님 이용해서 내가 천국 가려는 그러한 욕구, 그러한 탐욕이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나 완전해야 돼. 나 죽어서 고생하면 안 돼. 나 내가 너무 아까워. 남은 지옥 가도 나는 천국 가야 돼.” 거기에 대한 우리가 그만한 권한이 있습니까?

성경에 창세기 3장 보세요. 우리가 구원받을 권한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내쳤습니다. 생명나무 따먹지 말라고 내쳤어요. 오늘날은 생명나무는 관심이 없고 교회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우기고 있어요. 생명나무는 없어요. 줘야 먹지 뭐 생명나무 어디 있어요.

생명나무, 여러분 먹고 싶습니까? 생명나무, 여러분 갖고 싶어요? 말씀드릴게요, 생명나무. 생명나무 없이는 그렇게 천국에 못 갑니다. 주님께서 생명나무를 저만큼 치워놨잖아요. 손 탈까 싶어서. 그런데 인간은 생명나무 빼놓고는 다 갖췄어요. 교회 있지, 제직회 있지, 성가대 있지, 교인들 많지. 목사, 집사, 장로 다 구비돼 있지, 선교사까지 파송하는 구색은 다 맞춰놨어요. 사업하는데 이것저것 찾을 때 그때마다 줘야 되거든요.

생명은 어디 있는가? 생명을 주께서 주실 때 어떻게 전달되었는가? 생명은 죽음 안에 있어요. ‘특이한 죽음’ 안에 있습니다. 번제라는 죽음, 번제 드리는 제물의 죽음. 솔로몬이 하는 역할은 그것을 상시화, 또는 상용화, 상시가 적당하지요. 한 장소에 매일같이 그 특이한 죽음을 반복을 하는 시스템, 확정된 시스템을 솔로몬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건물 짓고 그 안에서 제사장, 그다음에 성가대, 그다음에 문지기. 이건 다윗이 만든 제도에요.

제사장+성가대+문지기, 24반을 운영하면서 1년이 열두 달이잖아요. 한 달에 교대로 2주 일하고 다음 차 들어가고. 제사장이 1년에 2주 일하는 거예요. 스물넷 교대근무 들어갑니다. 이걸 정규직이라 합니다. 역대상 27장 1절과 2절에 보면 다윗이 그렇게 다 정해놨어요. 제사장, 성가대, 문지기 이들이 왜 필요하지요? 이스라엘 나라에 이들이 왜 필요하냔 말이죠?

이걸 한 번 생각해보세요. 1923년도 미국의 사회상은 남성 위주였어요. 세계1차 대전 끝나고 난 뒤에 그 시기에 그전부터 남성 위주지요. 왜 남성 위주냐? 그때는 산업화가 고도로 본격적으로 발달되기 전인데 그때 인간들은 토지와 관련된 직업이었습니다. 그걸 농경시대로 보면 돼요. 공장과 기술과 관련된 것 말고 토지와 관련됐는데 미국 서부는 양이나 소를 쳤어요. 특히 소를 쳤단 말이죠.

그걸 카우보이라 합니다. 전부 다 자기 양떼, 소떼 지키려고 권총 들고 그냥 쏘는 거예요. 여성들은 그냥 애만 낳았지요. 애를 낳아야 딸 낳을 확률도 있지만 아들 낳을 확률도 있기에 넓은 초원에 많은 소떼와 양떼를 대를 이어서 업무를 넘길 수 있기 때문에 바깥일은 남성들이 했습니다. 그 시대에 여자들은 교육해야 되고 컴퓨터 배운다는 이런 인식 자체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뭐냐? 옛날부터 인간의 모든 일은 토지, 땅 위해서 본인의 생존과 관련된 일을 했다 지금 그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가족 중에서 인간 같은 인간은 남성, 가장밖에 없어요. 그런데 1923년 지나고 1939년 세계2차 대전 되면서 갑자기 전쟁무기 만든다고 산업화 됐잖아요. 이거는 상식이니까 잘 들어놓으세요.

가족중심에서 남성 외에 다른 가족들 여자, 자식들 있잖아요. 자식들은 뭐가 없느냐 하면 주체라는 게 없어요. 그 당시에. 그래서 맨날 우리 아버지는요, 우리 집안은요, 우리 할아버지는요,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소 쳤어요. 양 쳤어요. 큰 옥수수 밭, 면화 농사지었어요. 이런 이야기,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우리 집안이야기, 옛날 전통 이야기했다고요.

그런데 산업화가 되면서 이 가족들이 도시에 나가서 취직을 하게 됩니다. 취직을 하면서 주체를 누가 주느냐 하면 이 인간사회에서 이걸 시민사화라 하는데 시민사회에서 뭘 주느냐? 너는 이런 인간이라고 주체를 할당을 해요. “너 할 줄 하는 게 뭐 있어?” “이것 잘합니다.” “그래, 그게 네 모습이야.” 주체는 가족이 주는 게 아니에요. 사회가 주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 같은 경우에 가족에서는 주체가 없지요. 근데 그 여자가 나중에 공부를 해서 교사가 되든지 의사가 되든지 판사가 되든지 변호사가 돼버리면 그 여자는 뭡니까? 누구 집 딸이었던 그 여자가 뭐가 돼요? 우리 캘리포니아 주의 훌륭한 검사님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체가 없는 곳에 주체가 힘을 발휘하는 거예요. 이건 뭐냐? 개인주의죠.

그러면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역대하 시대에 이스라엘의 주체성을 어디 있습니까? 역대하 시대에 솔로몬이 성전 지을 때 주체, 나는 누구냐? 그런 것, 나는 누구냐가 왜 거기서 튀어나옵니까? 이스라엘 시대에. 나는 누구냐가 없어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중요하지 나는 누군지는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다, 주체로서 자기를 들어내는 이 시대에 우리가 지금 뭘 보고 있습니까? 역대하 8장을 보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성전 왜 필요하지? 제사장, 성가대, 문지기 이게 우리한테 왜 필요한데요? 쓸데없는 것 왜 필요하지? 그만큼 우리가 주체화됐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다시 농사지을까요? 카우보이 할까요? 카우보이는 이방나라고 이스라엘 속에 어떤 식으로 들어가느냐 이 말입니다. 말씀세계 속에서 우리가 이미 나도 한 가닥 하는 내가 한 가닥을 버리고 어떻게 역대하 세계 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우리가 어떻게 알아듣느냐 이 말이죠.

솔로몬이 한 게 바로 그겁니다. 침묵의 죽음 곁으로 모든 백성을 단일화시켰습니다. 이게 솔로몬이 한 일이에요. 침묵의 죽음, 아무소리하지 않고 죽은 그 번제의 제물 중심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로 모은 겁니다. 근데 그게 번제지요. 매일 드리는 번제를 뭐라 했습니까? 상용화된 상번제지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매일 죽어나가는 그 공간으로 모든 백성을 일체화시키는 그 작업을 솔로몬이 했다 이 말입니다. 침묵의 죽음이죠. 이것으로 이방나라를 이긴 거예요. 큰소리치는 영웅적인 왕을 이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백성들은 어디를 쳐다봐야 되지요? 매일같이 죽어나가고 죽어나가는 번제를 드리는 그 성전을 향하여 바라봐야 되지요. 중심을 바라보는 이걸 역대하 6장에서는 기도라고 하는 겁니다. 역대하 6장을 보게 되면 18절, 솔로몬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나님의 성전도 용납 못하는데 이렇게 거하게 해서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를 들어주세요, 해놓고 22절,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하므로 맹세시킴을 받고 저가 와서 이 전에 있는 주의 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산 자가 통치하는 나라에요, 죽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죽음 안에 계신 분이 통치하는 거예요? 죽음 안에 계신 분이 통치하죠. 이게 바로 생명나라에요. 이게 생명입니다. 생명은 의외로 죽음 안에 들어있어요. 그래서 산 자가 살아 있는 내가 생명을 내 것 만들려는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요. 나 영생 얻어서 천국 갈래, 이게 실패로 끝나는 이유가, 바톤을 특이한 죽음에 넘겨야지 살아 있는 내가 바톤을 쥐고 있으면 하나님께선 그걸 안 받습니다.

그래서 구원할 자를 내가 쥐고 내가 기도하고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을 전부 다 하나님께서 실패로 만드는 그 모든 것이 내 일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실패로 만드는 축복을 해주시는 거예요. 아까 죄가 뭐라 했어요? 실패하지 않는 게 죄잖아요. 실패를 안 하게 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인데 우리가 죽은 자를 만나러 가는데 내가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까 만나 줄 리가 없지요. “제가 철야했잖아요. 금식했잖아요.” 안 만나줍니다. “금식한 네가 살아 있잖아, 철야한 네가 살아 있잖아.” 안 되지요. 할 수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 저 하나님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실패했다고 받아줍니까? 실패는 주님 쪽에서 실패해야지 지가 알아서 실패한 것은 안 받아줍니다. 이게 어디서 꼼수부리고 있어. 이건 왜 그러냐 하면 인간 속에 이미 모순된 요소가 들어있어요. 마귀가 지금 자율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율성을 자기 손으로 뽑아내질 못합니다.

옛날 농경시대 때는 아버지가 나를 대표했기 때문에 내가 주체가 없더라도 아버지 하나 든든하면 그냥 묻혀갔어요. 그게 이방나라지요. 이방나라는 아버지 이름으로 살았던 거예요. 그런데 그 시대가 끝나고 각자도생하는 이 시대에 자기가 주인공이 된 이 시대에 죽음이란 건 터무니없지요. “내가 왜 죽어, 내가 왜 실패해?” 그러니까 정신병자들이 흘러넘치는 거예요.

인간의 내부에 어떤 모순점이 있는가? 이것 말씀드리고 10분 쉬겠습니다. 어떤 노래에 그 모순점을 잘 묘사한 가사가 있어요. 여러분, 제가 가사를 읽어드리면 아하 그 노래, 하고 다 아시는 노래에요.

멀어져가는 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달콤했었지 그 수많았던
추억 속에서
흠뻑 젖은 두 마음을
우리 어떻게 잊을까
아 다시 올 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아 나의 곁으로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러나 그 시절에
너를 또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흐르는 그 세월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이게 무슨 말입니까? 너무 빨라서 잘 몰라요? 이제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별하는 거예요. 이별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겁니다. 이별은 이별이지만 그전에는 얼마나 달콤했었느냐. 그 많은 추억 속에서 흠뻑 젖은 두 마음을 어떻게 잊을까, 해놓고 뒷모습 바라보면서 헤어져놓고 나 외로워서 미치겠다, 이러고 있어요. 그럼 헤어지질 말든지. 헤어져놓고 헤어지면 안 되는데 그럼 나 외로운데,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럼 다시 합치든지. 다시 합치려면 그 사람이 아마 못 잊어서 다시 올 걸.

그런데 다시 오게 되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러고 있다고. 왜? 다시 사랑하게 되면 앞으로 다시 만나서 사랑하는 가운데 재회하면서 앞으로 눈물 흘릴 일만 남아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걸 또 견딜 수 있을까, 이러고 있다고요. 그럼 뭐 어쩌라고? 그 원인이 뭐겠어요, 여러분? 인간은 왜 그래요? 여러분 이야기해보세요. 왜 이렇게 잘라낼 때 잘라내 놓고 자기가 섭섭한 건 섭섭하고 왜 그렇습니까? 왜 이런 모순점이 있는 거예요? 이 노래 여러분 다 알지만 그래도 기분상 안 들어볼 수 없어요. 강의가 노래교실이 돼버렸어. 여러분 가사를 보세요.

멀어져가는 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여기까지. 노래교실 아니니까. 자, 원인이 뭐냐 하면 가사에 보면, 멀어져가는 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가 들어가요.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그다음에 우리 어떻게 잊을까 아 다시 올 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또 나가 들어가요. 언젠가 헤어졌던 그 남자가 나의 곁으로 다시 올 거야. 그래놓고 마지막 또 나와요.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지금 이 모순의 원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의 자율성, 아까 말한 나는 어떤 경우라고 실패하지 않겠다는 것, 이것 누가 집어넣었어요? 마귀가 집어넣었지요. 이거는 사랑도 그렇지만 구원문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무리 내가 인생이 힘들고 어려워도 나는 내 구원을 포기하지 않겠다. 난 주님을 붙들 거야.

주님을 붙든다 해놓고 어떻게 됩니까? 그런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되는지. 이 노래가 <슬픈 인연>인데 일본노래에요. 슬픈 인연의 가사에다가 신앙 그대로 다 집어넣어도 이게 가스펠송이네, 이게 복음성가네. 아까 다 들을걸.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을 미련의 주인공으로 뽑아내야 우리가 속이 시원해요. 누구한테 넘겨줘? 아니에요. 내가 내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거예요. 정말 내가 망해도 나의 가치는 포기할 수 없다. 아아, 이거….

그러니까 이런 인간에게 아까 처음에 제가 뭐라 했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버림으로써 얻고자 하는 건 뭡니까? 정답은 절대적인 나. 그래서 교회도 안 나오고 복음도 안 듣고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그냥 교회에 놀러나 오지 아무것도 안 해요. 왜?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10분 쉽시다.

 

 

20241004b 울산강의-역대기하(7강) 8장 12절 : 번제로 통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솔로몬이 한 것은 성전을 지었다. 성전은 고정점을 상용화해서 매일같이 죽음을 번제를 반복했거든요. 오늘 본문 역대하 8장 13절에 보면, “모세의 명을 좇아” 모세의 명이라 했어요.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모세 네가 뭔데 우리한테 명령을 하느냐, 라고 할 수가 있어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껌뻑 죽었다는 이런 자세로 보면 안 되고요. 시비 거는 쪽으로 성경을 보세요.

왜? 우리의 자율성은 죽을 때까지 계속 있으니까. 그냥 겸손한 척, 순종하는 척하지만 우리가 겸손한 척하는 그 아래층에는 뭐가 있느냐? 헤즈볼라 사령부가 있어요. 주께서는 그걸 겨냥한다고요. ‘네가 뭔데’에요. 모세는 하나님께 붙잡힌바 된 사람이에요. 특이한 죽음 속에서 나온 사람이고 특이한 불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했던 사람입니다.

뭘 경험했느냐 하면 인간의 극단적인 죽음의 형편을 먼저 체험한 사람이에요. 목숨 끊어지는 게 죽음이 아니고 그 죽음 안에서 인간은 완벽하게 살아 있으면서 경험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거예요. 죽는 게 아니고. 인간은 못 죽어요. 그냥 우리 옛날에 할머니 하는 말처럼 “아이고, 눈 감으면 되지” 스카치테이프 발라도 안 돼요.

인간은 산 채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교회 다니든 절에 가든 알라신 믿든 상관없어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채로 무시무시한 죽음을 체험하게 돼 있습니다. 그걸 누가 먼저 체험했어요? 모세가요. 거기서 모세가 체험한 것은 뭐냐?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 그게 해결책도 아니고 대책도 아니라 항상 인간이 죽든 말든 하나님께서 주목하는 것은 말씀이라는 것,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과 언약만을 하나님이 살려낸다는 사실을 모세는 알아냈던 겁니다.

그러면 그 모세의 명에 따라 솔로몬이 중앙시스템을 만들었어요. 특이한 죽음의 상용화에서 두 가지가 나와요. 하나는 산 채로 죽을래, 죽은 채로 살래? ‘산 채로 죽을래’ 이걸 가지고 역사 앞면, ‘죽은 채로 살래’ 이건 뭐냐 하면 역사 뒷면. 이번에 겨울수련회 제목은 <역사의 뒤편>입니다. 솔로몬 시대가 끝나면 역사 전면과 후면으로 이게 쪼개져요.

아까 노래 가사처럼 점점 둘이 멀어져가요. 역사 뒤쪽과 앞이 점점 더 멀어집니다. 멀어지면서 역사 속에 있던 성전은 이제는 그 성전의 취지가 역사 뒤쪽으로 넘어가면서 앞의 성전은 불태워져버리고 맙니다. 역사 속에 등장한 솔로몬 성전은 역사 뒤쪽으로 완성될 성전의 관계는 슬픈 인연이에요. 서글픈 인연입니다.

그래서 역사 뒷면이라 했는데 이것을 아까 강의와 연관시키면 역사 앞면은 인간들이 연속성을 외친다. 역사와 전통, 유구한 역사, 연속성이죠. 시간의 연속성을 외친다. 연속성을 부르짖는다. 그러면 역사 뒤편은 뭐냐? 이것이 연속성이라면 이쪽은 뭐가 되겠습니까? 불연속성 되겠지요.

역사 앞면은 담당이 누구냐 하면 다윗의 혈통적 왕조가 담당해요. 솔로몬 이후에 우리나라처럼 북쪽과 남쪽으로 쪼개집니다. 북쪽은 그들은 연속성을 주장해서 이름을 이스라엘로 지었어요. 쉽게 말해서 신당동 떡볶이 전통을 그대로, 신당동 떡볶이 할머니 돌아가셔도 우리는 간판을 ‘신당동 떡볶이’로 그냥 하는 거예요. 앞에 ‘원조’ 붙여야 돼요. ‘원조 신당동 떡볶이’ 연속성을 주장하는 겁니다.

저 뒤쪽에 역사 뒤쪽으로 불연속성은 뭐냐 하면 불연속성적인 요소를 그걸 새로운 기조로 삼는 것, 귀하게 여기는 것 우리는 이렇게 솔로몬의 나라가 쪼개졌다는 이 사실을 붙들고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아니고 유다에요. 북쪽은 이스라엘, 대부분의 지파 열 지파가 거기 가 있고 남쪽의 유다는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 약간의 시므온 지파도 있는가, 그렇게 나눠졌습니다.

그래서 남쪽의 유다 지파의 특징은 뭐냐? 우리는 이스라엘과 끝났다. 이 끝났다는 사실이 귀하다는 거예요. 왜? 다윗의 등불은 꺼지지 않으니까. 역사는 끝났는데 역사보다 더 센 것, 하나님의 언약의 끈질긴 줄기는 다윗의 등불이라는 이름으로 유다에 촛불이 그대로 켜지게 돼 있습니다.

다윗의 등불은 인간 소관이 아니고 누구 소관이냐? 이것은 언약의 하나님 소관입니다. 하나님이 관리하고, 역사는 누가 관리하느냐? 인간적인 임금이 왕이 이걸 관리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만 알아야 돼요, 둘 다 알아야 돼요? 둘 다 알아야 됩니다. 제가 둘 다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둘 다 설명하게 되면 사도 바울의 편지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에 나오는 내용이 여기서 벌써 나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게 될 거예요. 연속성과 불연속성, 역사의 이면과 역사의 앞쪽 둘 다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사의 앞쪽/전면의 특징은 눈에 보인다. 그러면 역사의 뒷면은 눈에 안 보이느냐? 역사의 뒷면도 눈에 보여요. 앞에 뭐가 보이느냐 하면 권력 서열, 위계 서열이 인간들 속에 감지가 됩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안 보였잖아요. 그런데 사무엘 아들들이 변변치 않으니까 장로들이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왕을 달라 했어요. 그거는 뭐냐 하면 여호와는 눈에 안 보이니까 보이지 않는 왕보다도 보이는 왕을 믿고 싶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친근해지지요?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육신이라고 합니다. 육신은 뭘 갖고 있느냐? 천연성, 내추럴한 것. ‘천연’가죽 이런 것 있지요. 인조가죽 말고 천연가죽. 날 것 그대로, 생 것 그대로, 그 자체, 이걸 천연성이라 해요. 자연적인 것, 이 천연성이 다윗의 등불과 갈라져 나왔지요. 북이스라엘 갈라져 나왔지요. 갈라져 나오면서 이게 육신이잖아요.

천연성을 지닌 육신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짐승으로 바뀝니다. 이 짐승은 처음부터 인간의 육신 안에 무슨 요소가 있다? 인간의 자연성, 천연성은 무슨 요소가 통제하고 지배했다? 짐승이 지배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다니엘서에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자, 여러분들이 짐승이라 하니까 쉽게 이해되실 거예요. 짐승의 특징은 이성보다 뭐가 더 셉니까? 인간의 본능, 충동이 더 센 게 짐승이죠.

먼저 이스라엘부터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있어서 통치 방법은 내부적으로 치안입니다. 외부적으로 국방이에요. 치안과 국방. 왜 사무엘 선지자 당시에 사람들이 왕을 달라한 이유를 알겠습니까? 이 두 개가 되려면 이 둘을 다 책임질 수 있는 하나로 집중이 권력이 있어줘야 돼요. 그 권력자를 왕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왕을 달라, 이 말은 뭐냐? 우리의 내부의 치안이나 국방을 책임질 책임자를 눈에 보이는 인간 중에서 하나 뽑아 달라, 이 말이에요. 그러면 그동안 치안과 국방을 담당할 왕이 없었단 말인가? 없었지요. 사무엘 당시까진 없었어요. 그럼 없었으니까 국방과 치안은 누가 담당했는가? 서로가 담당한 것도 아니에요. 그럼 한 사람이 담당했어? 한 사람이 담당한 것도 아니에요.

그럼 뭐가 담당했어요? 율법이 담당했지요, 율법이. 그냥 율법대로 제사 지내면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나님의 뭘 살린다? 하나님이 자기의 율법과 언약을 살리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하실 일이기 때문에 비록 왕이 없지만 성급하게 덤벼들다가는 그들이 난데없는 대재앙을 만나 망하는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이 해왔다 이 말이죠.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중계역할한 것은 사무엘 같은 선지자, 또는 제사장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그대로 왕 없이 율법대로 다스리면 되잖아. 그런데 왜 왕을 달라 했을까? 믿음이 없는 거예요, 믿음이. 사무엘이 사사 시대 말기입니다. 사사 시대는 인간들이 믿음도 없고 왕도 없으니까 자기 소견대로 무슨 본심을 앞세웠습니까? 짐승적인 충동을 일으켰지요.

그러니까 나라 치안이 엉망이 된 거예요. 힘 센 자가 깡패들이 대장질하는 그런 시대가, 요새 아이티 같은 나라. 뭐 정부가 없으니까 레바논 같은 정부가 없으니까 헤즈볼라가 왕질하고 있잖아요. 온 잡족들이 나라고 정부고 국민은 관계없는데 굴러온 잡족들이 레바논을 쥐고 있다니까요. 헤즈볼라가.

그런데 이건 뭐냐 하면 어떻습니까? 뭔가 치안을 담당한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짐승 같은데 이 짐승 힘보다 더 센 힘을 누구한테 부여해서 그쪽이 경찰권을 가지고 음주운전, 이런 것 단속하고 교도소 만들어서 거기 집어넣고, 상식에 어긋나는 개돼지 같은 그런 짓하는 사람은 강제로 격리조치하고 사형시킬 건 사형시키고 그렇게 해야 이게 무슨 꼴이 됩니까? 나라꼴이 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들이 느끼는 나라 있잖아요. 그 나라가 이방나라에요. 그런데 깡패가 나라 안에만 있어요? 나라 바깥에도 깡패가 있잖아요. 그건 또 뭘 담당해야 돼요? 국방을 담당해야 되지요. 그래서 사무엘은 말하기를 니들이 왕을 세우게 되면 너희들은 그 왕에게 세금 내야 된다. 그리고 그 왕에게 많은 토지를 바쳐야 되고 십일조 바쳐야 되고, 너희들 딸을 궁녀로 사용해야 되고, 너희들 갖고 있던 이것은 내 것이야 했던 것을 왕에게 많은 것을 빼앗겨야 되는데 그래도 좋으냐, 하니까 그래도 좋습니다, 하는 거예요.

왜 왕에게 권력을, 자기 소유를 빼앗겨도(다 빼앗기지는 않겠지만) 좋다 하느냐? 왕이 있는 것보다 빼앗겨서 왕이 가져가는 것이 차라리 왕이 없던 그것보다 훨씬 덜 불안하다 이 말입니다. 왕이 없는 것이 더 불안해요. 하도 깡패들이 난무한 세계니까. 이런 이방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왕이 좋은 게 아니고 결국 누가 좋단 말이에요?

본인의 방식으로 본인의 것을 못 지키니까 어떤 법을 만들어서 나라 같은 나라 만들어서 내 것을 다른 나보다 못된 짐승 같은 인간에게 덜 짐승인 내 것이 빼앗기지 않도록 뭔가 법적인 질서를 잡아 달라, 그래서 왕을 달라했단 말이죠. 그걸 사회계약설이라 하는 거예요. 영국의 철학자 홉스는 말하기를 사회계약설을 처음으로 이야기한 이 사람이, 이 세상은 전부 다 중국 무협소설에 의하면 뭡니까? 강호의 세계, 힘세고 무술 잘하는 인간들이 설쳐대는 이런 세계에서는 인간이 개인적으로 자기를 지키기에 지치지요. 못 지키지요. 지킬 수가 없어요.

이런 국가를 ‘야경국가’라 합니다. 개인의 재산은 개인이 갖되 나라에 치안의 권력과 국방의 권력을 일부 줘서 그쪽이 하는 일은 뭐냐? 밤에 야경 되는 것. 어두운 밤에 술 먹고, 남의 것 도둑질하는 것 있잖아요. 그런 것 소극적으로 치안만 담당하고 나머지 경제활동은 각자 국민들 자기 자율성에 맡기는 그런 나라, 그게 가장 이상적인 나라라고 한 시대가 바로 야경국가입니다. 19세기에 한 거죠. 야경국가, 그 정도만 되도 괜찮지요.

야경국가 잘하고 있는 나라가 있어요. 서울에서 북쪽으로 사십 킬로 가면 있는 나라, 무슨 나라지요? 북조선인민공화국. 다 같이 뭐가 됩니까? 치안은 좋은데 다 같이 뭐가 돼요? 거지꼴은 못 면하지요. 왜 거지 됩니까? 치안은 잘하는데 왜 거지가 되지요? 대외와 무역이 없으면 나라가 꼴아 박게 돼 있어요. 대외적으로 관계가 없으면 나라가 꼴아 박게 돼 있습니다. 일종에 자폐증 증세를 보이는 거예요. 우리는 행복한 나라, 우리 김일성 어버이의 …, 그 자폐증으로 몰락하는, 일종의 종교단체가 되는 거죠.

그러면 현대는 어떻게 하느냐? 야경국가 이래서는 나라꼴이 안 되지요. 야경국가에서 뭘 시도하느냐 하면 국력의 증대를 가져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몸집을 불려주는 대통령을 왕을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라가 수출드라이브 장사해서 남은 이윤 가지고 도로 깔끔하게 놓고, 휘발유세 막 감면해주고, 남아도는 달러로 여러 가지 어린이집 만들고, 노인들 운동하는 기구 더 만들고, 무상으로 교육 다 시켜주고, 의료보험제도 만들어서 하는 나라, 그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부강한 나라 되지요.

그럼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게 뭐예요? 치안에서 뭘 원합니까? 우리나라를 국력을 키워주는 대통령을 원하는 거예요. 그 대통령이 누구냐? 박정희 대통령. 갑자기 이상한 동네 돼버렸네. 동대구역에 박정희 동상이 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치안을 잘해서 그렇게 경상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습니까,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지지리도 못사는 우리를 잘 살게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나라 보세요. 이방나라가 야경국가에서 몸집을 키워주는 우리가 미국처럼 잘사는 맨날 국민소득으로 서열화 시키는 전 세계가 뭡니까? 권력의 서열화, 위계의 서열화. 못 사는 나라에서 와서 우리나라 젊은이는 가지도 않는 아주 험한 생산 환경에다 집어넣고 돈 벌어서 네팔에다 돈 보내고, 캄보디아에 돈 보내고 하지요. 그것도 고생인줄 모르고. 왜? 그래서 월급 1년만 벌면 집 사기 때문에. 시집하고 친정집 다 보내고. 죽으라고 고생하면서 돈 보내면 필리핀 저쪽에 잘 사니까. 옛날에 우리나라가 멕시코에 사탕수수농장에 취직하는 것처럼 하와이 가는 것처럼 똑같은 일을 달성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삽니까? 지금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살지요? 마 이 정도 사니까 여기서 경제성장 멈출까요,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 경제를 스톱시키는 대통령 뽑을까요, 어떻게 할까요? 우리를 더 잘 살게 하는 대통령 또 원하지요. 부자 같으면 더 살게, 가난한 사람 같으면 제발 소득분배가 이뤄지는 다 같이 잘 사는 다 같이 귀족이 되는 그걸 원하겠지요. 그럼 뭐는 원하지 않습니까?

열왕기상 3장 봅시다. 솔로몬 나옵니다. 솔로몬이 두 개로 찢어졌어요. 성전을 지은 솔로몬이 두 겹으로 된 게 찢어졌단 말이죠. 다윗의 자손이 누구냐? 솔로몬이에요. 솔로몬에서 성전을 지었잖아요. 그러면 다윗과 솔로몬 사이에 있었던 다윗언약은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 돼요. 보이지 않는 분이 왕이 돼요.

그런데 솔로몬 아들 있잖아요. 르호보암 그때부터는 솔로몬의 육신적 요소, 솔로몬의 짐승적 요소, 솔로몬의 내면의 죄악된 요소, 이 나라를 그 강한 나라로 솔로몬이 어쨌든 만들었잖아요. 나는 우리 아버지 솔로몬보다 더 강대국이 되겠다고 하는 솔로몬의 보이는 육적인 이방나라적 사고방식을 이어받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등장, 유다고 이스라엘 둘 다 마찬가지에요.

근데 유다는 왜 일찍 안 망했는가? 아까 뭐가 있다 했습니까? 다윗의 등불. 다윗과 솔로몬 사이에 있던 그 다윗언약이 여전히 유다에서는 약간은 오래갔어요. 밧데리가 오래갔다고요. 르호보암 북쪽은 초기에 날아가 버렸고요. 이야기가 복잡해서 미리 말씀드린다만 불연속성, 역사의 뒷면 누가 쥐고 있느냐 하면 바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그것도 참된 선지자죠.

선지자에 두 종류가 있어요. 국가의 백성들의 종교를 안정화시켜서 현재 통치자인 보이는 왕에게 굴복하기 위해서 정책적으로 선지학교에서 월급 줘서 고급공무원으로 양성한 자들이 있어요. 독일의 정책이 그거였습니다. 가장 공부 잘하는 엘리트 뽑아서 공무원제도를 만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했어요. 가장 뛰어난 사람만. 그리고 그 충당은 전 국민에게 1퍼센트를 종교세를 받아요. 천주교든 기독교든 가리지 않고 모든 국민에게 종교세 받아서 그것으로 엘리트 목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한 거예요.

그러면 목사들이 공부를 많이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똑똑하니까 최고 엘리트니까 공부를 많이 했지요. 그 공부 많이 한 게 뭐냐? 성경은 그냥 편집된 거다, 이런 연구나 하고. 자유주의, 성경은 다 째고 합편한 거다, 이런 식으로. 워낙 공부를 많이 하니까. 믿음은 하나도 없고 공부만 했어요. 고급공무원 되기 위해서. 목사란 공무원 밑에 하류 공무원 있어요. 그게 전도사에요. 전도사는 월급 얼마 안 돼요, 모든 권력을 목사가 쥐고 있어요.

그럼 아까 이방나라에선 무슨 서열? 권력의 서열, 위계 서열. 뭘 유지하기 위해서 무슨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국가 자체, 역사 속의 우리가 살아남는 백성이 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질서가 하나로 통합돼야 되고, 그리고 외부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체적으로 힘을 길러야 된다는 일반적인 통상적인 이방민족을 추구하는 것이 북이스라엘, 남유다였습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북쪽이나 남쪽에 누가 활동했다 했습니까? 선지자. 엘리야, 엘리사 및 많은 선지자들이 이거는 다윗언약에 어긋난다, 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참된 선지자들이 많이 죽었지요.

그러면 열왕기상 3장을 왜 보자 하느냐? 거기에 솔로몬의 재판이 나와 있어요. 3장 16절,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여러분 다 알지요. 두 여자가 동시에 애를 낳았는데 자다가 뒹굴다보니까 한 애기가 질식사했단 말이죠.

나쁜 여자가 자기 아기 죽었는데 깨기 전에 바꿔치기했는데, 그때는 CCTV가 있었습니까, DNA 검사가 있었습니까? 아니라고 우기면 그만인 시대에 바꿔놓고 보니까 엄마는 알잖아요. 내 아기인데 저기 가 있단 말이죠. 그래서 솔로몬이 한 그 재판이에요.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가? 누가 죽음(잃어버림)을 자초하는가? 지금 아기는 이미 죽었잖아요. 아기 둘 중에서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면 소송을 한 사람은 저 살아 있는 아기가 내 애니까 돌려달라고 소송을 건 겁니다. 그럴 때 솔로몬의 재판은 하나님의 재판이에요. 하나님의 재판 속에는 바로 언약적 그러니까 성전의 제사의 번제의 취지가 살아 있을 경우에만 이게 인간 재판이 아니고 하나님의 재판이 돼요. 그럼 성전은 매일같이 뭐한다 했습니까? 번제를 드리지요.

번제는 홀라당 다 태워 죽이는 거예요. 그 취지를 담아서 솔로몬이 재판한 거예요. 둘 중에 자기 자식이 죽을 사람 손들어봐라, 이런 재판을 한 거예요. 죽을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솔로몬이 뭐라 합니까? 잘 됐네. 아기 둘로 쪼개자. 쪼개서 반으로 가르면 균등하고 공평한 재판이 된다.

이 재판을 솔로몬이 했잖아요. 그런데 솔로몬의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하나님이 왕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로 재판하는 자리에요. 지혜로 재판하려면 어느 것이 진짜냐, 가짜냐 드러나려면 반드시 어떤 작업이 있어야 되는가? 쪼개지는 작업이 선행돼야 되죠. 쪼개지면 뭐가 날아가느냐?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고, 내 것이라는 게 날아가 버리죠. 그걸 원하는 사람 손들어보세요, 이게 재판이에요.

진짜 엄마가 이렇게 하지요.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제가 잃어버린 쪽으로 하겠습니다. 내 애가 죽었다는 쪽으로 하겠습니다. 솔로몬 왕은 뭐냐? 애를 쪼개라는 판결이에요. 그러면 쪼갠 것을 각자 엄마가 받으면 둘 다 뭘 받게 돼요? 산 걸 받게 돼요, 죽은 걸 받게 됩니까? 죽은 것을 받게 되지요.

그러면 진짜 엄마는 내가 소송을 걸었던 그 취지로 인하여 솔로몬의 판결과 이어지게 될 때 내 소송이 내 아기를 죽게 했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내 쪽에서 내 아기가 없다고 치고 소송을 안 한 걸로 취소하겠습니다. 소송 안 할 걸로 치면 아기를 쪼갤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살아 있는 아기는 누구 아기입니까? 진짜 엄마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의 자식이 되겠지요. 다윗언약, 다윗계약의 취지가 담겨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번제를 요구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재판정을 만들어놔서 인간의 매일 삶이 모든 소송과 모든 원한관계의 문제점이 하나님은 쪼개져서 기다리고 있는데 소위 하나님 백성으로 주장하는 인간은 멀쩡하길 원할 때 그렇게 되면 번제 드리라는 이 취지가 전달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바쳤는데 소위 예수 믿는다는 인간들은 자기 피나 찍어 바르면서 지는 예전처럼 멀쩡하길 원할 때 그게 번제냐, 아니면 그게 구경꾼이냔 말이죠. 그거는 참된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거예요.

계속 말씀을 이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진해서 죽어서 날 데려가세요, 자진해서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안 나오지요. 그래서 이 솔로몬 이후에 성전이 깨어집니다. 어떤 훌륭한 사람이 등장해서 성전을 세우면 되지 않겠느냐? 없어요. 인간치고 구원받을 인간은 없습니다. 제가 수백 번 이야기해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들었는데 인간구원은 마귀구원과 똑같아요. 지옥 없는 셈이 되지요.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을 어디에 활용하는가? 인간을 이렇게 활용합니다. 사라진 것에 대해서 대결상태에 모든 인간은 놓여있습니다. 사라졌다함은 보이지 않는 것. 그러면 신약에서 사라진 분은 누구지요? 이 땅에 오셔서 잠시 얼굴 보이시고 구름 타고 사라진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뭘 했는가? 번제 드리고 올라갔잖아요. 자기 모든 걸 다 바치고 올라갔잖아요. 예수님은 사라진 것이다. 그 사라진 것에 남아있는 인간들은 무슨 상태? 대결상태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이 땅은 뭐냐? 짐승의 상태에요. 교회가 되던 절간이든 그런 건 뭐 논할 필요도 없이 그냥 모든 것이 짐승의 세계에요. 그래서 처음에 제가 첫 번째 강의 때 아까도 물어봤지만 다시 한 번 물어보게 되면 복음을 기피하면서 인간이 얻고자 하는 게 뭐냐? 복음을 외면하고 피하는 의도가 뭐냐? 도대체 뭘 얻고자 복음을 안 들으련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뭐를 잃어버리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치워버려라. 십자가 치워버리고 부활이나 믿겠어. 죽은 다음에 괜찮게 되는 그걸 믿겠어. 십자가는 치워버리고 싶은 거예요. 실패하기 싫어하고 망하기 싫어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내릴 결론은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구원은 우리 일이 아니에요. 구원은 누구 일이냐? 주님의 일입니다. 이런 대결상태를 형성해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이렇게 이걸 대조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럼 대결상태기 때문에 우리 속에 짐승의 심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나를 지키고 나를 버티는 식으로 살아가요. 그게 뭐냐 하면 소위 교회 다니고 장로나 목사라 하면서 맨날 뭘 위해서 기도합니까? 그저 우리나라 지켜주옵소서. 아까 이방나라 있잖아요. 우리나라 몸집 키우는 나라 지켜달라고 통성기도하지요. 구국의 기도해서 여의도광장에 모여서, 요샌 광화문에 모이는구나. 태극기 휘날리는 부대. 동성애 반대, 이런 것.

왜 혼자 하지 여럿이 모입니까? 살아 있는 것들이 모여서 힘이 된다는 그런 공식 같은 게 있어요. 혼자 이야기하는 것보다 여럿이 모여서 합심하면 그게 천지를 진동한다나 뭐 그렇데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죽어, 그냥 죽어. 그냥 죽어버려. 인간이 시위한다고 구원해줍니까? 구원은 누구 일이에요? 우리 주님 일입니다.

그 주님이 뭡니까? 주님 찾아온 건 뭐냐? 하나님, 우리나라 지켜달라는 그것이 바로 뭐냐? 사라진 주님에 대한 대적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한 주장이란 것을 이렇게 같이 묶어서 우리에게 나타날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입니다. “니가 죄인이야, 니가. 니는 왜 보이지 않는 것을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지 않아. 왜 자꾸 보이는 세계를 추구하는 거야?”

이런 성령을 통해서 이게 오게 되면 아까 말씀드렸지만 성도지요. 성도는 두 개 다 있어요. 못돼먹은 자기 자신, 자기 가치, 또는 자기 잘남이죠. 자기 잘남이란 쉽게 말해서 뭐냐 하면 내가 세상에서 일구어낸 모든 성과는 악마의 미끼였다. 개척교회 몇 개를 하고, 박사학위를 따고, 강의를 여러 군데 다니고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뭡니까? 악마의 미끼에요.

그러면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성도가 고백하는 것은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겁니다. “왜 저를 자꾸 구원하십니까?” 이 고백에서 구원의 근거가 자기한테 있어요, 없어요? 자기한테 구원이 없지요. 지금 이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라진 것이 옴으로써, 사라진 것은 주님의 성령입니다. 만약에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자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데 사라진 성령이 십자가가 오니까 졸지에 뭡니까?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결국은 잘난 인간으로 거듭나기를 나의 짐승적인 본능이 계속해서 나한테 집요하게 그걸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그다음에 나오는 고백이 뭐냐?

이런 짐승만도 못한 인간을 왜 자꾸 구원하십니까, 라고 한 것은 바로 사라진 것에 압도된 상태, 십자가에 압도된 십자가의 죄용서와 그 사랑에 압도된 상태가 될 때 이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못돼 처먹은 저를 왜 자꾸 구원하십니까? 아나 사랑이나 먹어라, 인간아. 이게 사랑이야. 사랑에 무슨 이유가 있어요. 내가 해준다는 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그걸 선물이라 하잖아요. 내가 선물 주겠다잖아. 니는 받기만 하면 되잖아.

갑자기 가사가, 왜 자꾸 노래 가사가 나오는지 몰라.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그저 받기만 했을 뿐이죠. 화장을 지워가면서 왁스가 불렀던 노래, <화장을 고치고> 그런데 사라진 것이 와서 계속 발굴해요. 꼭 고고학 발굴하듯이. 계속 어디 있는지 검침하듯이 발굴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나의 짐승성, 나의 짐승적인 본성 이걸 계속 또 찾았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성 또 찾았네. 이것 봐라 하는 거예요.

마지막 중요한 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표제부터 먼저 던지겠습니다. 주제부터. 왜 하나님은 천사보고 번제 드려라 하지 않는가? 천사 시키는 대로 잘하잖아요. 천사는 시키는 대로 잘해요. 뭐 죄 짓고 이런 것 없어요. 마귀 빼놓고. 그럼 천사가 알아서 제사 드리면 받으시면 되잖아요. 왜 그걸 짐승의 마음을 갖고 있는 죽어도 자기를 못 놓고 인간보고 번제 드리고 성전에서 제사 드리고, 제단을 보고 집중하라고 기도하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이겁니다. 주님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와서 올라가면 구원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원하는 구원은 아들로 왔지만 죄인의 모습의 아들이 죄 없이 죄 된 모습을 가지고 인간으로서 구원되는 것을 바로 주님의 구원이에요. 그리고 주님의 구원이 원형이 됩니다.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육신이 있는 자에게 자신이 육신으로 했던 모든 업적, 그 성과가 같은 죄 된 육신을 갖고 인간에게 같은 육신 때문에 효과를 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거예요.

죄? 내 알지. 범죄한 것? 내 알지. 나도 죄 있는 육신으로 왔기 때문에 알지. 네 과거 엉망진창 다 알아. 다 안다고.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의 피로써 없애주는 데 없애주는 조건이 뭐냐? “너 나한테 와. 없애줄게.” 이게 아니에요. “너 날 믿어. 없애줄게.” 이게 아니고 주님이 먼저 죄 있는 육신 속에 들어오신 거예요. 물속에 먼저 세례 받으신 거예요. 주님 쪽에서 먼저 손을 쓴 거예요. 우리보고 오라 한 게 아니고 우리는 못 가요. 왜냐하면 마귀가 가만두지 않으니까. 마귀 안에 있는 우리까지 들어오는 겁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난 뒤에 에스라, 느헤미야 보면 성전을 다시 지어요. 느헤미야는 중건하고. 성전을 중건할 때 조건이 있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뭐하는 사람이냐? 율법을 가르쳤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성전이 성전 되는 유지가 되는 조건이, 너희들 인간이 율법과 무엇의 만남? 인격의 만남이 성사가 될 때 성전도 온전하고 그 성전에서 번제가 온전하고 그때 너는 죄 사함이 된다, 라는 조건을 달성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라, 느헤미야가 이건 뭐 거침없이 율법대로 살기를 원했는데 그중에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에스라 10장 10절, 11절 여러분 들어보시면 이건 진짜 놀랠만한 이야기입니다.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이혼해, 이혼하라는 거예요. 뭐 꼴보기 싫은 여자 이혼하라면 대번에 이혼하죠. 그게 아니고 지금 여기서 미워도 다시 한 번, 신파극 나와야지요. 엄마, 엄마 붙들고 있는, “엄마 없이는 못 살아. 아빠 미워, 미워.” 가슴팍 때리는 그걸 생각해보세요. 엄마가 애한테 정을 줘서 엄마만 따르는데 단지 엄마가 이방여자란 이유 때문에 갈라서, 이혼하라는 거예요.

이 법 오래 가겠어요. 묻는 내가 나쁘다. 이 법 오래 가겠습니까? 오래갈 턱이 있습니까. 그래서 에스라, 느헤미야 지나고 난 뒤에 시마이 됐어요. 성전이고 뭐고 다 날아갔어요. 없어요. 왜 구약의 마지막 모습이 율법대로 해야 성전 된다, 성전을 붙들어야 하나님 오신다는 그걸 왜 강조하느냐? 전에 성전이 왜 망했고, 그리고 동시에 왜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가?

그 사실을 전제로 해서 거기에 누가 뛰어드는가? 우리 같은 연약한 육신으로 뛰어들어서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그 모든 것을 주께서 해내시면서 이것이 바로 주의 일이다. “네가 알아서 구원을 받아? 안 돼. 그런 것 없어.” 주의 일은 인간의 안 됨을 전제로 해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주께서 구원하시는 그 구원은, 구원했다는 그 능력이 성령의 능력이고요, 죽은 데서 살아난 분의 영이 성령이거든요.

그 능력으로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면서 아까 뭐라 했습니까? 사라진 것에 대한 대결상태, 또는 반박, 반란, 대듦 이런 요소를 사라진 분이 이들을 껴안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분이 누구냐? 그분이 바로 여러분 잘 아시는 십자가 지신 분이에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십니다. 그냥 주님이 아니고 십자가, 번제로 막혀있는 주님만 해낼 수 있는 주님만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눈에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양쪽 다 알게 해주시고 우리가 어디에 관심 두고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지도 살펴주시고 우리가 세상에 마음 빼앗겼다는 것을 제대로 지적하시는 그 주님의 성령의 효과가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그것마저 감격 가운데 기뻐하면서 우리가 그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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