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좁혀진 길

아빠와 함께 2024. 12. 8. 10:25

20241206a 울산강의-역대기하(9강) 10장 16절 : 좁혀진 길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10장하겠습니다.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1절) 이렇게 돼 있어요. 세겜은 어디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보다 북쪽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어디 있느냐? 예루살렘은 갈릴리 호수와 사해가 있다면 사해와 같은 지점에 있어요. 요단강이 있는데 세겜은 이쪽에 중간쯤에 있습니다.

세겜은 현재 팔레스타인 서안지구(West Bank, 요단강 서쪽)에 포함돼 있습니다. 주위에는 장벽이 쳐있고요. 하마스는 이쪽(가자지구Gaza Strip, 지중해연안)에 있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로 인하여 둘로 쪼개져 있어요. 서안지구는 상당히 온순한 데고, 하마스는 과격한 데고. 과격한 데가 이스라엘한테 작살났습니다. 서안지구는 주로 올리브 농사짓고 산다는.

예루살렘은 유다지파고 위에 베냐민지파, 그 위에 므낫세, 에브라임 두 지파가 세겜 땅입니다. 열두 지파 가운데서. 거기에 르호보암이 전체 이스라엘이 왕이 되기 위해서 그 열두 지파의 의견들을 모으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평소부터 다윗 때 세바의 난이 있었거든요. 그쪽의 열 지파와 밑에 베냐민+유다(유다가 주종이죠), 이미 이질성을 갖고 있었어요. 세바의 난 때 요압이 평정을 했고, 그래서 그게 잠잠한 줄 알았는데 평정한다고 잠잠하진 않잖아요. 불만들이 있지요.

‘열두 지파인데 어떻게 왕이 계속해서 한 지파가 독점하느냐? 기분 나쁘다.’ 그런 거죠. 권력을 집중하고 있는 사람은 왕이라 합니다. 그러면 왕이 아닌 다른 지파 사람들은 집중되고 있는 왕의 말을 일방적으로 따라야 된다는 데서 자존감이 상하지요. 기분이 좋지 않다 이 말이죠. 그래서 평소에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대해서 감정들이 많았던 겁니다.

솔로몬 이후에 르호보암이 그걸 알고 좋게 해서 유다지파에서 솔로몬 이후에 내가 후계자니까 그냥 왕으로 계속 인정해달라는 식으로 협상하기 위해서 세겜에 올라간 겁니다. 르호보암의 이 말은 솔로몬 이후에 백성의 숫자가 많아지니까 자기는 전체 숫자의 왕이 되고 싶은 거예요. 모든 많은 숫자로부터 추대 받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이 갔는데 여기에 솔로몬 때부터 낌새가 좋지 않았어요. 여기 열 지파를 자칭 대표하면서 유다 지파가 왕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서 반란을 꾀했던 인물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역대하 10장 2절에 나오는데 여로보암이에요. 발음이 비슷하지요. 남쪽의 유다 왕 솔로몬의 후계자는 르호보암이고, 북쪽의 자칭 대표자로 여기는 자는 여로보암이고.

여로보암이 솔로몬한테 찍혔습니다. 왜 찍혔느냐 하면 열왕기상 14장에 보면 이 여로보암에게 아히야 선지자가 찾아가서 예언을 이야기합니다. 예언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걸 하란 말이 아니고 네가 하나 안 하나 그대로 된다는 이야기에요. 큰 차이입니다. ‘예언이 이러니까 네가 실행하라’ 이게 아니고, 네가 실행하든 안 하든 이미 미래는 결정돼 있다는 사실을 여로보암에게 언급한 이야기가 열왕기상 14장 6절에 나옵니다.

“저가 문으로 들어올 때에 아히야(선지자)가 그 발소리를 듣고 말하되 여로보암의 처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체 하느뇨 내가 명령을 받아 흉한 일로 네게 고하리니 가서 여로보암에게 고하라” 흉한 일이 생기는 거예요. 8절에,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내어 네게 주었거늘 너는 내 종 다윗이 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좇으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여로보암이 어떤 반란기가 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고요, 반란했으면 똑바로 반란해야 되는데 반란했던 너도 마찬가지로 망한다는 그러한 안 좋은 소식을 여로보암의 처에게 언급해서 네 남편한테 이야기하라고 아히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보면 이스라엘 역사가 하나님의 예언대로 계획대로 그냥 다 진행해요. 진행하는데 그 예언을 만약에 안 듣는다, 또는 예언을 잊어버린다, 예언을 무시한다, 관심 없다 하고 예언 떼놓고 그 뒤에 인간들끼리 너 잘났느니, 나 잘났느니 한바탕 해버리면 그들이 어떤 활동을 하던 나중에 예언과 맞춰보면 예언대로 돼가요. 그것 참 희한하죠. 예언을 지키는 게 아니고 예언을 무시해도 예언 바깥으로 인간은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과 예언, 예언은 말씀이죠. 말씀 안에서 못 벗어난다.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의 모든 활동은 예언의 진척과정이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예언은 인간들을 갖고 사용한다. 인간의 생각, 활동보다 말씀이 우위에 있다 이 말이에요. 예언은 인간들을 갖고 사용한다. 이걸 다시 이야기하면 예언은 인간들을 사용하고 버린다.

이것을 충분하게 미리 이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이 알게 된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구원은 핵심부분이 이겁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지 아니하면 구원은 없다.’ 이 사실입니다. 이게 바로 시편 22편 1절에 나오는 거예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문장이 모순되지요.

버림받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 입장에선 뭡니까? 구원되지 못했잖아요. 구원되지 못한 상태를 버림받았다는 거예요. 구원되지 못한 상태를 경험하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거는 소위 신앙이라는 것을 기초부터 처음부터 다시 놔야 돼요. 그동안 무슨 생각으로 신앙생활하고, 무슨 생각으로 구원 생각하고, 무슨 생각으로 죽어서 천국 가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그 내용을 건성으로 알고 그냥 대충 알고 자기 구원 욕구는 아주 강렬했고. 빡세게 성경 알면 구원 되겠지, 한 거예요.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차용해요. 성경이란 그 내용을 자기한테 긁어모아서 이 정도 긁어모으면 구원되겠지, 생각합니다. 부지런히 성경 보면서 내게 필요한 걸 다 수집하는데 근본적으로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뜻은 모르고 성경을 너무 건성으로 함부로 알았던 겁니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뭐냐 하면, 달리 이야기하는 것보다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볼게요. 저녁 잡숫고 슬슬 잠이 오니까 질문을 갖고 설명해야지요.

다음 중 어느 것이 심각한 일이고, 어느 것이 사소한 일인가? 두 가지 문항을 하겠습니다. ①하나님의 일, ②나의 일. 어느 것이 심각한 일이고, 어느 것이 사소한 일입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 질문을 꼭 안 다그쳐도 다 아시죠? 심각한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 밑에 인간의 일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말씀을 주셨고 그 안에 인간들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인간들을 쓰고, 그다음에 뭡니까? 갖다버리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오케이’하면 구원이고, ‘안 돼요’하면 저주에요.

하나님이 쓰고 날 버리는 것에 대해서 안 돼요,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일보다 내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만 순식간에 그걸 노출시킨 거예요. 자기 속마음을 그냥 터뜨려버린 겁니다. 제가 여태껏 신앙생활 몇 년 했는데 이제 와서 버림받으면 내 수고가 다 허사로 끝나지 않습니까? 구원보다도 일상의 생활, 내가 이만큼 인생 살기 위해서 내 인생 구축하기 위해서 애썼던 모든 것이 결국 이거는 버려지기 위해서 한 아무 쓸데없는 짓거리만 끌어 모았단 말입니까, 에 대한 반감, 불만, 분노 그런 게 나오지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언급한 게 한 게 있어요.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근거를 내세울 수 없다는 것, 이 자연세계에서. 내가 있다는 것을 이 자연세계, 과학으로 증명할 길이 없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인간의 가장 깊은 속에 들어있는 본성은 하나님을 죽이는 것, 하나님을 죽이는 본성이에요.
세 번째, 네 번째는 구원된 자에게 해당되는 건데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구원받은 사람은 이 두 개의 차이를 겸하여 양면성을 다 갖고 있는 사람. 왜? 하나님의 일이 양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우리한테 복제가 돼요.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나는 구원받으면 누구 일 돼요? 하나님의 일 돼요, 내 일 돼요? 자기 일 되잖아요.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한다는 양면성, 겹쳐지지 않는 이질성을 같이 갖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고,

■네 번째 마지막은 그런 사람은 주님 가시는 그 길을 가기 때문에 이 땅에서 복음을 인하여 고난을 받게 돼 있다. 강남강의에서 그렇게 설명했어요. 혹시 들은 사람 기억납니까? 돌아서만 다 잊어버리고, 또 그런 이야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 줄 알고 몇 번 강조했는데….

오늘 이스라엘의 왕 뽑는 문제에 대해서 르호보암이 나이 많은 선임자, 솔로몬의 신하들한테 묻고 자기와 같이 성장했던 젊은 친구들한테 묻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백성들한테 순하게 해주세요.’ 이거는 나이 많은 사람들의 조언이고, 젊은 사람들은 ‘그래도 백성들 숫자도 많은데 솔로몬의 차기인데 전자보다 못하다면 되겠습니까? 전임자에 대해서 백성들이 존경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솔로몬 왕이 완력으로 통치했다는 뜻인데 그 솔로몬보다 더 대단한 왕으로 인정받으려면 솔로몬보다 더 세게 백성들 다루어야 됩니다.’ 이게 젊은 사람들의 조언이거든요.

그래서 어느 쪽을 택합니까, 르호보암이? 늙은 사람 말 듣는 게 아니고 젊은 사람 말 들어서 세게 나오다가 여기서 어떻게 했습니까? 세게 나오기 위해서 계엄 선포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난 너희와 안 논다 해서 그때 여로보암이 등장해서 이쪽 열두 지파 중에서 열 지파 딴 나라 되고 아래 두 지파는 르호보암 되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나라는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생긴 하나의 단일 나라가 되어야 야곱의 축복이 계속 연속적으로 주어지는데 이 나라에 갑자기 왕이 몇 명 됩니까? 두 명 되었지요. 여기서 오늘 강의에서 결정적인 것, 중요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백성들이 악하다는 거예요. 왕이 악한 것은 백성들이 악하기 때문에 왕이 악하다. 백성들이 악한 이유는 하나님의 예언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악하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악하게 해서 나를 두 조각으로 해서 이도저도 아닌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예언대도 되게 한 이유는, 중요한 게 계속 나와요. 구원이 없다가 아니라 구원이 있어요. 있는데 구원의 통로를 하나로 좁히기 위해서예요.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요 할 때 ‘나’라는 몇 분입니까? 단 한 명이죠. 하나로 좁히기 위에서예요. 하나로 좁히기 위해서 나는 거기서 떨어져나가야 돼요, 안 떨어져나가야 돼요? 떨어져나가야 돼요.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되지요. 낄 데 끼란 말이죠. 낄 자리가 아니에요. 건방지게 이 땅에 태어난 나라는 인간은 구원의 통로에 낄 자가 아닌 거예요.

구원의 통로에서 떨어져나가면서, 그러니까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구원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라고 다 구원이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하나님께 버림받음으로써 구원의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였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자기는 떨어져나갈 때 그럴 때 내 이름으로 내가 구원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확정된 결정된 뜻이다. 이게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이름으로 구원됩니까? 안 되지요. 그런데 그것을 솔로몬은 몰랐어요. 솔로몬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왕이니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백성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다윗이 아는 것을 솔로몬이 몰랐던 거예요. 다윗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된다고요. 그래서 다윗언약은 있지만 솔로몬언약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언약의 취지를 인수인계 받아서 그대로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치는 말씀이 뭐예요?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그 이야기했지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지 아니하면 무엇이 없어요? 구원이 없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범죄 해놓고 자기의 범죄 했다는 그 죄가 뭔지를, 범죄는 했는데 그래서 보편적으로 죽어가고 있으면서 죽어가는 내내 범죄 했다는 내 죄가 뭐지? 거기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아는 바도 없어요. 교회는 열심히 나오는데 도대체 내 죄가 뭐냐, 내 죄가? 알려들어요, 죄가 뭔지?

버림받지 않으려고 하는 게 죄에요. 선악과 따먹은 주체에 마땅히 버림받아야 되는데 버림받지 않으려고 버티는 게 죄란 말이죠. 그 버티는 것은 배후에 누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마귀가 있기 때문에 받쳐주기 때문에 잘하면 구원된다고 자꾸 헛소리를 해대는 거예요, 마귀가. “네 자신이 아깝잖아. 그동안 애쓴 게 아깝잖아.” 이런 식이에요. 사람의 말과 행동은 전부 다 말씀 안에 있다 했지요. 다 버려져야 돼요.

말이란 말은 뭐냐? 인간이 말을 하잖아요. 인간이 말을 할 때는 그 이유가 있어요. 자기가 확보한 것이 있기 때문에 말을 해요. ‘나 잘 키운 애 둘 있다’ 이런 것, ‘아파트 있다, 펀드 넣어둔 것 많아, 통장이 수두룩해, 나 차 태워줄 든든한 내 남편 있어’ 이럴 때 뭐가 나와요? 말이 나와요. 사람들이 누구한테 이야기할 때 이야기 하는 이유는 뒷배가 있어 그래요. 내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퇴직해도 연금 있는데 뭐, 이럴 때 말을 한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욥에게 무엇을 빼앗아 갔습니까? 그 뒷배를 다 날렸어요. ‘아이고, 재산 날려도 몸 하나 튼튼하면 내가 막노동해서라도 벌지’ 이럴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욥은 일할 수 있는 건강까지 어떻게 했습니까? 빼앗아 갔어요. 남은 것은 껍데기, 욥에게 남은 것은 껍데기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 껍데기만 남아 있어도 기 안 죽으려고 욥이 껍데기 안에 그동안 자기가 했던 자기 의로움이 들어있어서 친구들한테 안 지고,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런 식으로 했지요. 그런데 욥기 마지막에 누가 찾아옵니까? 하나님이 욥에게 찾아왔지요. 그때 욥이 뭐라고 고백해요? 입이 있어도 제가 입을 다물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딱 설 때 내 것이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에게 내 것이라는 게 가능하냐 이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에게 너 잘못한 것, 다시 말해서 욥의 친구가 뭡니까? 욥에게 쏘아댄 것은 자기 건강 있고 자기 재산 있기 때문에 그것 믿고 자신만만하게 욥에게 충고랍시고 신앙이랍시고 하나님 운운하면서 해댄 거예요. 그래서 욥의 세 친구 불러다가 너희 잘못한 것을 사과하고, 사과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욥이 너를 위해서 대신 제사를 드리면 그제야 네 죄는 없어질 것이라고 했거든요.

이 말은 이게 욥의 친구에게 이야기한 것 같지만 이거는 하나님 앞에서 욥의 죄를 사하는 방법을 욥의 친구를 동원해서 욥에게 알려준 거예요. 그동안 내가 의롭고 내가 바르게 살았다는 그것이 내가 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욥이. 그러나 하나님은 뭐냐 하면 네가 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함께 했기 때문에 그동안에 네가 그렇게 살아왔다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왔는데 욥은 뭐냐? 자꾸 내가 했다는 거예요. 내가 바르게 했고 내가 착하게 살았고 내가 죄 안 짓고. 앞에 자꾸 ‘내가’ 붙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의 친구에게 욥에게 하라 이 말은, 이것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나밖에 몰랐습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고하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속물을 고대해야 될 입장에서 욥은 선지자입니다. 장차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선지자에요.

우리가 지금 역대하 10장을 보면서 이거는 이스라엘 역사의 정치에 관한 문제구나,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더 근본적인 것을 생각해봐야 돼요. 구원을 한 통로로 모으기 위한 작업, 같은 뜻인데 좁혀지기 위한 작업. 중요한 것 해놓고요. 제가 창세기 19장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소돔과 고모라에 불 심판 일어난 거죠.

일단 질문을 던질게요. 소돔과 고모라에 왕이 있다면 그 왕이 있음으로서 소돔과 고모라에 하늘에서 유황불 안 떨어집니까? 떨어지지요. 왕이 있든 없든 떨어지지요. 그러면 다시 역대하 10장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왕이 있다는 게 그게 무슨 의미에요? 소용없는 거잖아요. 왕이 있으나 없으나 유황불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인데 왕이 왜 있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왕이 있으나 없으나 유황불 떨어진 것이 이미 정해진 일이고 확정난 일이라면, 확정난 일이 아니고 확정난 일이죠. 확정됐어요, 유황불. 나중에 지옥에 가면 지옥 불 기다립니다. 있는 입장에서 사람들 백성들의 관심사가 왕이 있니 없니 차기 대통령 누구니 하는 이 자체가 뭡니까? 유황불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데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겁니다. 윤석열 대통령 다음 누가 되느냐, 그것에 왜 관심을 두지요? 그것도 온 국민이.

얼마나 인간이 악한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주 우습게 여기는 거예요. 시답지 여기는 겁니다. 차기 대통령 잘 뽑아서 우리나라 잘 되죠. 우리나라 잘 되면 유황불 안 떨어집니까, 지옥 안 갑니까?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개무시하는지를 알리기 위해서 왕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이스라엘 내의 왕 문제를. 정해진 예언의 말씀, 확정된 예언의 말씀은 신경 안 쓰고 그들이 백성들이 다룰 수 있는 것, 인간들이 어떻게 조종할 수 있고 변경시킬 수 있고 바꿀 수 있는 그런 현실적 상황에 대해서 인간은 거기다 몰입하고 있어요.

르호보암의 잘못은 나이 든 사람들 말 안 듣고 젊은 친구들 말 들은 게 문제가 아니라 르호보암의 잘못은 이것입니다. 자기가 살고자 하는 거예요. 솔로몬의 잘못은 자기가 살고자 하는 거예요. 살아서 하나님께 버림을 안 받겠다는 거예요. 그게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남은 죽어도 자기는 꼭 살아남겠다는 거예요. 백성들도 마찬가지고 왕도 마찬가지고, 백성이나 왕도 똑같지.

단 한 사람 아히야는 그 시대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어떻게 죽일 꼬만 생각한다는 것이 아히야 선지자의 취지에요. 어떻게 살릴 꼬가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튀겨 먹을까, 볶아 먹을까, 구워 먹을까, 말아 먹을까? 인간을 어떻게 사용해서 버리고 죽이느냐? 선지자의 관심은 그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예언을 받은 선지자 외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아~무 생각이 없어요. 자기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건강하고 잘 사는데 나 살 동안에 평화로운 세상 되기를, 윤택하고 번성한 세상 되기를, 나 잘 살고 덤으로 남도 잘 사는 세상이기를 그것만 추구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그것을 예언대로 악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 혹시 참석하신 분 중에서 살려고 참석하셨는지 모르…….

여기서 우리가 열왕기상 11장을 보겠습니다. 열왕기상 11장에서 솔로몬이 어떻게 행동했는가? 26절에, “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저는 에브라임 족속”이고 쭉 나오지요. 27절에, “저가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는 까닭은 이러하니라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그 부친 다윗의 성의 무너진 것을 수축하였는데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지나가고,

32절에서 왜 아히야 선지자가 열둘 지파를 찢는 이유가 나옵니다.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될 것은 왜 솔로몬이 재산이 모라랍니까, 부귀영화가 약했습니까? 그렇게 잘 먹고 잘 살면서 왜 하나님을 버렸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 버렸을까요? 이건 뭐 솔로몬뿐만 아니고 우리들에게 다 공히 해당되는 이야기죠. 그것은 인간이 산다 할 때 그냥 숨 쉬고 사는 걸 산다고 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을 때 살아 있는 자가 자기가 자기한테만 영향력을 주려고 사는 게 아니에요. 내가 살아 있으면서 뿜어 나오는 그 힘이 남들에게 파급되기를 기대하면서 인간은 살아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지 당신이 나 인정해줘, 인정 안 해줘?” 남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인간은 살아 있는 겁니다. 특히 솔로몬 같은 경우엔 뭐냐 하면 자기가 왕이잖아요. 교회 교인수가 이천 명인데 자기가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어떻게 목회하다가 천 명이 되었다. 그러면 당회장 목사는 기분이 막 좋습니까? 전에는 영향력이 이천 명이었잖아요. 이천 명 대표의 당회장이잖아요. 지금은 반 토막 난 교회의 당회장일 때 그 사람은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이천 명 되는 나에요. 천 명 단위의 나는 이건 나가 아니란 거예요.

그러니까 솔로몬이 왜 우상을 섬기니까? 보다 많은 백성들에게 골고루 자기가 왕이란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그들의 비위를 맞춰준 거예요. 왜? 자기는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이스라엘이 쪼가리 나고 사분오열되어 얼마 안 되는 그런 왕은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다윗에게 주어졌던 인수받았던 그때 그 영광의 왕 됨이 나기 때문에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거기에 걸 맞는 나임을 계속 지켜내려고 한 겁니다.

육신은 하난데 나의 영향력의 그 범주는 그만큼 육신보다 훨씬 큰 거예요. 나의 영향력이 크다보니까 아까 성경말씀대로 우상들 수입해서 모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만 지금 소중한 게 누구에요?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여기 존재함에 곧 그자체가 가장 소중한 것이 이미 결정 난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로 가장 소중한 것은 이의 걸 것도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결정 난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만약 솔로몬 자리 앉았다 해도 마찬가지고 제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에요. 그럼 근원적인 문제점이 어디한테 있습니까? 바로 나에게 있지요. 건축을 벌이는데 어떻게 벌였다? 강압적으로 했다. 여기 오늘 역대하 10장에 보면, 왕의 부친이 멍에를 무겁게 했다고 하잖아요, 4절에. 그리고 11절에,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찌라 내 부친(솔로몬)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하리라 하소서” 채찍보다 전갈이 더 따갑다 이 말이죠. 전갈로 내가 너희들을 통치하겠다. 그렇게 결정한 겁니다.

열왕기상 11장 계속 봅시다. 11장 34절에,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그다음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36절,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그러면 다윗 이후에 내리막길로 간다는 뜻이거든요. 다윗 이후에 솔로몬부터 이거는 망하는 길로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하면 망할수록 다윗의 등불이 빛나겠지요. 이게 바로 구원의 원칙이에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가 제일 소중해요? 내가 여기 있음에 누가 소중해요? 내가 제일 소중하잖아요.

그럼 내가 소중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구원을 한 통로로 모으는 작업을 좁히기 위한 작업에 의해서 주님께선 누굴 제거해야 돼요? 구원받고자 하는 나를 제거할 필요성이 있겠지요. 바로 그 원칙이라니까. 나를 제거해야 나보다 더 소중한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신약에서 세리와 창기, 강도 그 사람들 하나님께서 배척했습니까, 구원했어요? 구원했지요. 특히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요. 두 강도 가운데 한 강도가 구원받지 않았습니까? 그 강도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릴 때 주고받는 대화를 보세요. 그 대화를 보게 되면 그 강도의 특징은 자기 것이 없어요. 절대적으로 주님에 의존적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힘없이 자기와 똑같은 신세로 아버지께 버림받아서 죽어가고 있는 입장이에요. 아버지께 버림받은 그분을 의존한다? 돈 빌려줄 때는 담보가 있어야 되는데 그게 신용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한테 무슨 신용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신용적이에요? 신용이 많은 분입니까? 예수님께 많이 얻어먹은 게 있어요? 예수님께 받아 챙긴 게 많아요? 주님은 주시는 분이 아니고 있는 것도 빼앗아 가시는 분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믿어요? 더 빼앗기려고? 내 소중한 것, 내 영향력 다 빼앗아 가라고요?

사람들이 저한테 가끔 묻는 게 있어요. ‘요즘 와서 신앙이 많이 떨어졌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요즘 와서 은혜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씀하는데 그거는 자기 자리를 떠나서 그래요. 우리 자리는 어디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 바로 옆의 자리가 우리 자리에요. 우리 자리가 십자가 그 옆에 그 자리 가야 구원되는데 그 자리 있지 않고 세상에 소풍을 나왔어. 소풍을 나와서 너무 많이 챙겼어요.

오디오 챙기고 김치냉장고부터 공기정화기, 아파트까지 차까지 너무 많이 챙겼어요. 남에 대한 영향력, 남이 나한테 오는 존경, ‘대단해요’ 이런 거요. 이런 것에 너무 길들여졌어요. 그 정도보다 더 많아져야 내가 생각하는 나답다고 생각하는데 진짜 성도의 본모습은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후딱 빨리 주님이 십자가 진 그 옆자리로 가야 돼요.

그래서 신앙생활 잘하려면 남한테 호감 얻고 돈 잘 벌고 주식 대박 나더라도 후딱 어느 자리 가야 돼요? 십자가 옆자리에서 대박 난 돈이나 세고 있으면 돼요. 그 자리에요, 그 자리.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자리, 이제는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그런 자리에서 은혜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어요, 거기서.

지금 엉뚱한 자리에서 미아처럼 헤매고 있으면서 챙길 건 다 챙기면서 요즘 신앙생활이 잘 안 돼요. 은혜가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긴요. 다시 십자가 찾아가야 되지요. 성령이 이끄는 대로. 빨리 올라와. 성령은 자꾸 올라오라하는데 우리는 기존에 내가 노동해서 얻은 그 자리를 포기 못하고 있어요. 그럼 어떻게 포기해서 그 자릴 가느냐? 10분 뒤에 하겠습니다.

 

 

20241206b 울산강의-역대기하(9강) 10장 16절 : 좁혀진 길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솔로몬 이후에 다윗언약으로부터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게 다윗언약이 아니에요. 다윗의 등불을 확보한 게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의 등불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라가 열두 지파가 돼야 하거든요. 그걸 좀 설명해드리면 야곱에서 아들이 열두 명 나옵니다. 이 열두 명의 아들은 어디에 종속되느냐 하면 야곱이 받았던 언약의 다양성입니다. 그래서 야곱도 예언하고, 그리고 모세도 예언하고.

예언을 한다는 것은 이 열둘이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가 되기 위해서 각자 하나로 지향하는 하나로 방향을 모으기 위한 각각의 역할이 열두 지파에게 준 복이라는 거예요. 복이란 하나로 끌어당기는 힘이 복이에요. 열두 개라는 다양성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 1, 2, 3, 4……12, 1과 2, 3, 4는 서로의 독자성을 잃어버려야 돼요. 야곱언약의 하나지 내가 하나가 아닌 거예요.

그런데 야곱이 죽고 난 뒤에 열두 아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야곱의 하나는 이미 돌아가시고 막벨라 굴에 안치된 거예요. 없어요. 없으니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내가 남아 있다 이 말이죠.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서 결혼해서 남아 있잖아요. 할 때 야곱과 나 사이에 점선, 언약이 나에게 과연 실제적일까요, 아니면 비실제적일까요? 둘 중에 어느 겁니까, 언약이? 실제로 내게 작용한다고 내가 인정합니까, 아니면 언약은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끝났고 내 인생은 내 노동으로 산다는 것, 어느 것이 현실적이고 실제적이에요? 내 노동으로 내 힘으로 내 인생 내가 사는 게 더 실제적이잖아요.

그러니까 열둘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 출발점이 뭐냐? 언약은 그냥 잊어버리는 겁니다. ‘언약 없다. 하나님의 약속 같은 것 없다. 중요한 것은 내 몸뚱아리가 중요하다.’ 이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유다지요. 유다 가정에 아들 세 명 있었잖아요. 첫째, 둘째 죽고 난 뒤에 며느리 이름이 뭡니까? 다말이죠. 유다가 다말에게 막내아들을 안 줘요. 왜 안 주느냐? 줘봐야 또 죽으니까. 그러니까 막내아들이라도 남아 있어야 야곱에게 받았던 복의 증거가 남아 있다, 이래 생각한 거예요.

창세기 그 대목 봅시다. 이게 열두 지파 나눠지는 것이 의외로 복잡해요. 간단한 게 아니고 거기 담긴 내용이 복잡합니다. 38장.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내려가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는 자의 딸을 보고 취하여 동침해서 아들 셋을 낳았잖아요. 유다에게 누가 뭐래도 살아남아 있는 아들은 셀라 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런데 38장 끝에 보면 거기 누가 나오느냐 하면 베레스가 나오지요. 그 뒤에 세라가 나오지요29, 30절). 베레스와 세라 엄마가 누구에요? 다말이잖아요.

이걸 유다가 사전에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지요. 자기는 자기 몸에서 나온 아들 셋 중 마지막 남은 셀라만 야곱의 언약의 정통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삑사리내버린 거예요. 인간이 생각한 것, 이것 참 중요한데…. 인간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그건 모르겠고 지금 살아 있는 건 나에요. 돌아가신 아버지 뭐, 중요한 건 내가 중요하다고요. 내가 중요하니까 내 인생은 뭐냐? 내 몸에서 나온 하는 모든 것이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내가 생각한 것이 나에게 제일 중요하다 이 말이죠.

그래서 야곱은, 십계명은 이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될 줄로 나는 믿습니다. 그러니까 셀라는 다치면 안 됩니다. 왜? 하나님의 언약대로 주신 아들이기 때문에. 이게 인간의 자기 생각이죠. 인간이 개시하는 시작하는 자기 생각이에요. 여기서 아까 베레스와 세라는 생각지도 못한 거예요. 이런 자식이 야곱언약에서 준비된 자식이란 건 상상도 못했지요.

그 자식이 태어나기 위해서 유다는 어떤 경로를 밟아야 합니까? 유다 자신이 이게 언약에 의하면 잘려야 마땅한 존재란 그 경로를 밟아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을 철썩 같이 믿는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내가 하나님께 제거돼야 한다는 사실, 제거되면 뭐 됩니까? 구원의 통로로 하나로 좁혀진 것, 그 하나가 하나지 나를 가지고 하나라고 숫자로 칠 자격조차 없다는 것, 나는 제로가 돼야 되지 내가 하나가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베레스와 세라는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에 나와요. 3절에,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여기 셀라 나옵니까? 나올질 않아요. 누가 예수님의 족보에 끼어들겠습니까, 누가 구원의 족보에 끼어듭니까? 우리가 무시했던 그 하나님의 언약이, 이건 좀 어려운 말인데 제가 여러 번 사용했지요. 나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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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보면서 살아 있다는 나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게 뭐냐? 새 언약입니다. 주님이에요. 눈에 보이진 않지만 더 살아 있어요. 이게 어렵다는 정도가 아니고 일반인들은 불가능해요. 어려운 정도가 아닙니다. 단절인데 뭐, 단절됐는데 어렵다는 게, 벽이 있어 통과를 못하니까 불가능한 일이에요. 도저히 인간으로선 있을 수 없는 결과가 성도에게서 배태가 됩니다. 이게 나타나게 돼 있어요. 그럼 성도는, ‘내가 한 게 아닌데’ 이러지요. 그래요.

여러분 나중에 구원받거든 이렇게 외치세요. “이것 내가 한 게 아닌데, 내가 노력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주여, 구원이 웬 말이에요? 저한테 어울리지도 않는 구원이, 어울리지도 않는 천국이 왜 이렇게 주어졌습니까?” 그럴 때 주님이 뭐라 하시겠습니까? “평소에 너는 너 혼자가 아니고 나와 함께 있었느니라. 임마누엘, 내가 너와 함께 있었느니라. 매사가 내 뜻대로 되었느니라.”

여러분 매사가 내 뜻대로 되었다는 이게 결과적으로 표현돼야 되지 이걸 원인으로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매사가 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니까 나는 뭘 해도 된다,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 걸 앞에 두고 내 행동을 정당화하면 안 돼요.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이걸 뒤집어요. 뭐든지 니 뜻대로 안 되게 만드는 것, 그걸 내가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네 원대로 안 되게 하는 것. 그럼 우린 왜요? 너 하나는 없애기 위해서.

1은 야곱에게 있지 여기 열두 지파, 열둘 아들들은 1로 쳐주지 않습니다. 전부 다 1 밑에 있는 1에서 파생된 제로, 제로, 제로, 제로에요. 1 밑에서 나오는 0, 0, 0, 0, 0, 0, 0, 0, 0, 0, 0, 0 열두 개, 그 0에서 나온 게 없는 게 나와요. 없는 것, 없는 것. 이걸 열두 단계를 거쳐서 영원히 이 단계를 유지하는 것이 뭐냐? 12×12×1000=144000이잖아요. 144000은 1의 다양성으로 표현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를 다양성 있게 표현하면 144000이에요. 내가 구원받았다는 소릴 못하는 자들의 집합, 이 구원은 내가 생각하고 내가 기대했던 그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기쁘게 고백하는 자들의 집합이 144000이에요.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구원의 통로를 하나로 좁히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담에서부터 시작하는 모든 인간들, 그 모든 인간을 주께서 제로로 0으로 만들지요. 왜냐? 마지막 아담이 오직 1이기 때문에. 사도행전 4장 12절에 나옵니까?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너희에게 준 적이 없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자, 이름은 동일한 이름이 몇 사람입니까? 동일한 이름은 한 사람에게 붙여지는 게 그 사람의 이름이에요. 그 이름이 있다면 그 사람만이 그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그분만으로 그분의 구원만이 구원이고 나머지는 구원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예수님만 구원받고, 아브라함도 구원 못 받고 야곱도 구원 못 받고 지옥 가고 그랬느냐,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렇게 생각 안 해야 될 이유가 야곱언약에 의해서 열두 지파가 복을 받았잖아요. 이 원리라니까요. 하나에서 나온 복이 그 하나로 다시 회귀하면서 다시 돌아가면서 돌아가는 과정에 속한 사람들은 1로 인하여 다뤄진 사람들이에요. 오직 누굴 위해서? 그 하나를 위해서 다뤄졌던 그 사람은 그 다뤄진 경로 때문에 그 한 분의 구원에 모두 다 복속이 됩니다. 합류가 되게 돼 있어요. 이게 구원의 원리에요.

그래서 우리들의 구원 방법은 뭐냐?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우릴 구원하는 겁니다. 나의 구원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아까 뭐라 그랬어요? 시편 22편,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지 아니한 자는 구원될 수가 없어요. 그럼 버림받았는데 내가 뭘 해야 되느냐? 당신이 하는 게 아니고 언약이 한다니까, 언약이. 다윗언약이 다윗을 구원하지 다윗이 뭘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다윗언약을 위해서 다윗은 제거됩니다.

어떻게 제거됐는지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베드로 설교 가운데 나온 건데 28절, 29절에 보면,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29절,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다윗의 묘가 있단 말이에요, 없단 말이에요? 있지요. 다윗은 죽었지요. 죽은 다윗은 죽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죽은 다윗이 그전에 살아 있을 때 다윗언약을 내뱉은 거예요. 다윗언약이 사도행전 2장 27절에,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다윗에게 해당되는 겁니까,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에요?

27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이 말이 다윗에게 해당되는 겁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님에게 해당되는 겁니까? 예수님에게 해당되지요. 왜? 다윗의 묘는 지금 그냥 죽어있으니까요. 다윗은 죽어줘야 돼요. 다윗이 살면 안 됩니다.

다윗을 살면 안 되고 셀라가 후계자 되면 안 돼요. 베레스가 세라가 후계자 돼야 돼요. 셀라는 안 돼요.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 속에서 다시 부활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다윗언약 속에서 다윗은 새롭게 창조되고. 무덤에 있는 다윗이 부활되는 이유는 다윗 속에 계시는 분이 선점해서 먼저 부활되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마치 인간 이전에 우리 이전에 아담이 먼저 있듯이.

여러분 앉아 계시는데 여러분 아버지가 먼저 태어났어요. 여러분이 먼저 태어났어요? 묻는 내가 나쁘지요. 아버지가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여기 있잖아요. 그럼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계속 끄집어내면 결국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뭘 부정 못한다? 최초의 조상 아담이 있다는 걸 부정 못하잖아요. 이건 믿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아담의 존재를 확실히 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만이 구원한다는 말은 구원받는 자에게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구원받아요, 하는 이 말은 뭐냐? 예수님이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나를 통해서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이 말입니다. 아휴 힘들어~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이 언약대로, 말씀대로 되지 내가 요구한 대로 되진 않아요. 내가 요구한 것은 뭐가 되느냐? 나 혼자 살고 싶은 생각이 나의 요구로 나와요. 예수님과 함께는 짜증나고 귀찮고 도움도 안 받고 믿을 만한 것은 나 혼자 제일 믿을 만하다는 거예요. 배고프다, 라면 끓였다. 믿을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진라면 밖에 없는 거예요.

역시 라면 끓여먹은 내가 있잖아. 그러니까 믿을 것은 내가 라면 끓였다는 그것만 믿을 수 있잖아, 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뭐라 합니까? “죽여 버릴래.” 그 라면 누가 줬는데? 팔 둘 깁스해보세요. 라면 끓일 수 있습니까? 주께서 함께하셔서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손 움직이잖아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나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게 다윗언약이에요. 다윗 때 그런 일이 있었어요.

유다에게 예상 못한 베레스와 세라가 자기가 생각한 셀라 노선이 아니고 다른 노선으로, 제가 0이라 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한 데서 실체가 나왔다는 거예요. 내 구원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데서 내가 어느새 구원받은 거예요. 그걸 성령이 임했다는 거예요.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날마다 주와 함께 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지 못한 길로 인도해요.

근데 내가 생각하지 못한 길로 인도하는 데 심각한 장애요소가 있어요. 그게 뭐겠습니까? 주님이 구원하는 데 장애요소가 뭡니까? 바로 나지요, 나. 내 생각을 고집하는 내가 장애요소인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두 발 옆차기로 차버리지요. 나를 맨날 찬다고요. 주의 뜻대로 돼야 되는데 주의 뜻을 누가 가로막습니까? 내가 가로막아요. 그러면 내 배후가 누가 있어요? 마귀가 있는 거예요, 마귀가.

그걸 오늘 역대하를 통해서 봅시다. 10장 16절,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도대체 윤석열과 무슨 상관있느냐 이래 된 거예요. 갑자기 윤석열이 왜 튀어나오는지….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야 치워라. 치우고,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온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아까 두 번째 시간 초반에 이야기했지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지금 그들이 백성들이 악인데 악이 뭡니까? 바로 언약을 개무시하는 거죠. 다윗언약을 개무시하는. 왜 무시하는 건가요? 본인의 생각이 출발점이기 때문에. 왜 본인의 생각으로 출발합니까? 내가 여기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여기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어 내 선택과 결정은 내가 내릴 권한이 있다는 겁니다.

“너 왜 그렇게 살아?” “내 생각이다, 왜.” “너는 네 생각대로 해. 나는 내 생각대로 할 테니까.” 이게 악이에요. 왜 그러냐? 숫자로 제로가 안 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최종적으로 1이 되면서 언약의 한 분과 뭐가 돼요? 라이벌 관계가 돼버려요. 그래서 인간의 마귀적 본성,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누굴 죽이게 돼 있어요? 예수님을 죽이게 돼 있습니다. 옛날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서 예수님 죽였잖아요. 요새는 총으로 쏴죽이죠. 칼이나 총으로.

모든 범죄의 원인은 내 생각이 여기 있음, 그게 바로 범죄의 온상입니다. 내 생각이 여기에 있음. 길거리에 왜 침을 뱉습니까? 내 마음대로입니다, 이거에요. 이게 근본적이죠. 부부싸움 어떻게 시작됩니까? 부부싸움 없으면 강아지와 어떻게 싸웁니까? 강아지는 강아지 생각 있고 나는 내 생각에 안 맞아서 싸우지요. 부부싸움이 왜 일어납니까? 출발이 뭐예요? 내 생각이죠.

여러분 신약성경에 쉽게 우리가 가볍게 넘어갈 수가 있는 내용이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옵니다. 이런 내용이 나와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재산 있는 자는 재산이 없는 것 같이 하라.” 자 제가 묻습니다. 아내 있는 사람 이혼하고 아내 없이 되면 구원받습니까? 재산 있는 것 다 주고 무소유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이것은 어떤 인간의 행동을 하란 이야기가 아니지요. 이거는 누구를 쳐다보라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인간의 본자리가 어디라 했습니까? 세상에 어슬렁거리는 게 본자리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좁혀진 구원의 길은 딱 하나에요. 십자가에요. 그 십자가 자리에 가 있도록 해주는 게 성령입니다.

십자가 자리에 주님 옆에 있을 때 우리는 가진 게 뭐며, 배운 게 뭐며, 남녀구별이 뭐며, 나이 성별 그런 게 관계있습니까? 없지요. 내가 어떤 조건이냐 하는 것은 자기 조건 걸 조건이 아무것도 없이 다 삭제됐어요. 그냥 죄인이에요. 그냥 죄도 없는데 매달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죄란 죄는 다 지은 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이유가, 모든 죄를 짓게 하시는 겁니다. 후딱 어느 자리 가라고? 천하제일의 무림의 고수 그런 게 아닙니다. 천하제일의 죄인의 자리를 이미 박아놨어요. 그 자리가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십자가의 대화가 유일하게 통하는 그 자리, 그 자리가 구원의 자리입니다. 다른 자리는 없어요.

거기서 그 강도는 누구만 쳐다봐요? 같이 매달린 주님만 쳐다보면서 기분 좋지요. 왜? 같이 사니까? 아니요, 같이 죽으니까. 인생의 끝을 주님의 끝맺음을 되풀이해서 그 주님의 죽음이 나에게 마지막을 장식해주는 그 기쁨, 주님은 죄 없이 버림받았고 나는 죄 있어 버림받았고. 그 버림받았다는 공통의 자리가 하나님의 약속이 약속대로 구현되는 자리죠. 성취되는 자리죠. 다 이루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나는 죽었다 이 말이에요.

이 과정, 우리의 본자리에 가기 위해서 성령께서 하는 조치는 이겁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조각조각 내버려요. 자식, 부모, 아내, 남편 마찬가지로 교우들 관계 다 조각내요. 왜 조각내느냐? 이미 조각나기 전에 우리가 남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이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내가 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게 나라는 1 숫자, 나는 내가 중요한 나에게 저 사람이 뭔가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우리는 관계를 열고 관계를 이어가고 유지하려고 애를 썼거든요.

그게 솔로몬한테는 뭡니까? 권력이었어요. 그게 르호보암한테는 뭐였습니까? 권력이었습니다. 뭐 하찮은 인간들에게도 나름대로 권력이란 게 있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건 약간 우스갯소린데요. 유대교 이야기인데 여기 세 사람 등장해요. 유대교 최고 지도자가 랍비잖아요. 랍비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이여 저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보잘 것 없고 아무 쓸모없습니다. 저는 아무짝도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이렇게 유대인들이 기도해요. 신명기에 나오니까.

그러니까 보니까 돈 많은 부자도, “오 신이시여, 내가 세상에선 돈 많지만 하나님 보시기엔 아무것도 없고 쓸모 짝 없는 인간입니다.”라고 했어요. 세 번째 진짜 가난하고 거지같은 인간이 기도하고, “하나님이여, 제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것도 없고 쓸모없는 인간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 부자가 화를 내면서, “이거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무것도 없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여러분, 이게 안 우습습니까? 진짜 아무것도 없으려면 유세깨나 해야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이게 의미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네가 건방지게 아주 시건방지게 진짜 아무것도 없는 게 뭘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함부로 그렇게 경망스러운 모독적인 말을 할 수가 있느냐? 나처럼 부자 되어서 많이 겸손하고 낮추어야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해야 이게 빛이 나지 진짜 아무것도 없는 게 왜 아무것도 없다고 하느냐? 막 나무랐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해요? 그 말에 일리가 있어요. 왜냐하면 진짜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아무리 가난하고 병들어도 다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것도 없다고 기도할 수 있는 저는 있잖아요.’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성경은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고 조 패는 건 누구 몫입니까? 그거는 내가 날 패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성령께서 패시는데 성령이 왜 패시느냐 하면 성령은 오직 하나만 고집합니다. 하나로 좁혀진 구원의 통로, 그 통로는 누가 가시는 길입니까? 주님 가신 길이에요.

다시 역대하 10장을 보겠습니다. 아까 온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갔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방금 설명을 했지만 이 설명을 안 들었다 치고, 모른다 치고 이 역대하 본문을 그냥 보세요. 그냥 보면 우린 어떤 마음이 듭니까? 단박에 이런 마음이 들어요. 이 르호보암이 잘못했네. 좀 구슬리고, “우리 아버지 솔로몬이 너무 힘들게 했지요. 우리는 여러분에게 고생한 걸 아니까 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러면 이스라엘이 열 조각, 두 조각 나뉠 필요 없이 다 보듬어주면 되잖아요. 그게 바로 임금이 해야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요.

실제로 역대하 10장 7절 누가 읽어보세요.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 만일 이 백성을 후대하여 기쁘게 하고 선한 말을 하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나이 많은 신하들이 뭐라 합니까? 왕이 백성을 후대하여 기쁘게 하고 선한 말을 하시면 영원히 왕의 종이 된다 했지요.

이런 말을 하는 이것이 왜 임금한테 통하질 않는가? 그 당시 르호보암에게 왜 이 말이 안 통합니까? 이거는 쉽게 말해서 임금이 백성의 종이 돼야 한다는 말이에요. 이거는 뭐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임금이 뭐예요? 지도자고 통치하는 자잖아요. 영이 서야 된다 말이죠. 그렇게 잘해줘서 영이 안 서면 어떻게 돼요?

그게 방금 한 거예요. 열왕기상 12장 7절에 한 번 더 읽어주세요.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지금 이 말을 르호보암이 못 받아들이는 이유는 말 자체에 모순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르호보암은 자기 할 일이 있어요. 뭐냐 하면 솔로몬 왕의 유지를 받들어 단절되지 않고 이어나가야 돼요.

근데 여기에 이 말에 의하면 이어짐이 아니고 단절을 요구하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백성의 종이 됐다 칩시다. 그런데 백성들이 계속 종으로 부리면 어떻게 할 건데요? 물어내라 할 겁니까? 내가 백성의 종이 됐는데 죽을 때까지 종으로 나를 여기면 어떻게 되느냐 이 말이죠. 일단 권력을 쥐고 그다음 보자,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교회 당회장 새로 오면 장로들이 전한다고요. 목사님, 처음부터 세게 나오지 마시고요. 어려운 사람 해서 우리 목사님에 대한 이미지 관리해서 인식이 좋아지게 되면 그때 우리 교인들은 목사님은 훌륭한 목사라고 잘 따를 겁니다, 라고 조언을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새로 온 목사가 백성의 종이 되는 게 목적입니까, 종이라는 걸 구실로 해서 나중에 교인들 장악하는 게 목적이에요, 어느 쪽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처음부터 종이 되고 내가 퇴직할 때까지 종이 되겠어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아니면 일단 호응을 받아놓고 그다음부터 하고 싶은 대로 해서 교회의 권력에 누수가 없도록 장악하겠습니다. 어느 쪽이에요, 인간은? 인간은 목적이 하나 딱 정해졌으면 그 방법에서 잠시나마 내려가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거기에 대한 노리는 게 있어요.

그건 뭐냐? 모든 원하는 것은 이거에요. 보상입니다, 보상. 교인들이 교회 가서 믿는 이유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이거 아니라니까요. 종으로 살 테니까 하나님이여 나한테 뭐 해줄 거요? 이렇게 된다니까요. 뭐 종 되려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까? 남 종 되려고? 그럼 내 몫은요? 미쳤어요. 나만 손해 보게. 바보 아니에요?

주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죽을 때까지 어떻게 해요? 결국은 자기 백성의 죄를 잔에 담아서 자기가 마셨잖아요. 죄도 없는데 그 저주의 잔을 마셨단 말이죠. 겟세마네 기도하고 난 뒤에 십자가에서 잔을 마셨잖아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백성에게 섬김을 받으려는 게 아니고 오히려 대속물로 주려한다 했지요. 그게 누구 뜻입니까?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있어요? 아버지와 함께 있어요.

그런데 지금 르호보암은 혼자 있지 아무도 같이 있지 않아요. 다윗언약도 같이 있지 않습니다. 이게 르호보암에게만 국한된 일일까요? 오늘 교회 오는 교인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지금껏 혼자서 살았다. 하나님께서 기도해서 내가 기도했다. 기도 응답받아서 내 것 내가 챙기겠다. 시작도 나고 결과도 누구한테 소환된다? 그 결과가 나한테 모여져야지 기도는 내가 했는데 남 잘되면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는데 그 꼴은 내 못 본다, 이거잖아요. 이게 다 아까 숫자로 뭐라 했습니까? 내가 0이 아니고 뭐가 된다? 영원히 절대적인 1, 1이 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제가 설교할 때 했는가? 어떤 강의에서 했어요, 강남강의. 인간은 No 1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Only 1이에요. 넘버 원 정도가 아니고 온리 원이에요. 너는 저 사람보다 잘한다. 그 기쁨보다 앞에 더 나가요. ‘내가 나답게 했다.’ 이걸 제일 좋게 해요. 내가 나했다, 이 말이에요. 내가 나의 절대적인 것처럼 했다.

이것을 지적하려 오신 분이 누구죠? 주님 오셨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모든 인간의 본성은 뭡니까? 칼끝은 어딜 향한다? 주님을 죽이는데 향합니다. 아담의 후손들 모두가. 제자들은 배신하고 도망가고 다 마찬가지고요. 그 주님의 영이 뭐죠? 성령이죠. 성령이 바로 우리에게 오셔서 네가 시작한 그 일이 결국은 너도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한 패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을 성령께서 하셔요.

그게 요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 죄, 의에 대해서 심판. 그 결과가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십자가 사건은 너희들의 잘못된 의, 잘못된 죄,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성령께서 오셔서 그걸 너희에게 도로 통보해줄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객관적 사역이에요. 그게 처음에 이야기한 하나님의 예언이고 말씀이에요.

르호보암이 지금 잘못됐습니까, 여호보암이 잘못됐습니까? 아니죠. 누가 잘못됐어요? 백성들이 잘못되었죠. 백성들 전체가 오직 자기의 부귀영달 외에는 아무 관심사가 없어요. 다윗언약에는 관심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쪼가리 났습니다. 쪼가리 났는데 여기 열왕기상 11장 다시 보면 11장 36절,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그러면 이 등불을 내 앞에 있게 한다면 솔로몬이 등불에 해당됩니까, 안 됩니까? 솔로몬이 이어지는 등불에 해당돼요, 안 돼요? 해당됩니다. 그게 뭐냐? 전도서입니다. 솔로몬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언약 입장에서 자기를 돌아보는데 썼던 글이 잠언, 전도서, 아가입니다. 그 전도서에 보면 여러분 아시다시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2장 4절에서 6절에 보면,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나오지요. 아까 채찍 때려가면서 사업 벌였지요.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누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다윗언약의 일인데 솔로몬은 그걸 모르고 자기가 최종적인 일로 여겼던 거예요. 그래서 자기 좋으라고 포도원 짓고 건축한 겁니다.

3절에 봐도,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자꾸 진리를 깨닫고자 애를 썼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왕의 자리가 진리가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왕의 자리가 진리를 가로막는 자리에 솔로몬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저와 여러분 자리가 진리를 가로막는 자리였어요. 성령이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 죽인 범인인 것을 알 수가 없어요.

그러면 솔로몬이 후계자 생각할 것 아니겠습니까. 전도서 2장 18절,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한한다는 뭔 뜻입니까? 참 후회스럽다, 후회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내 뒤에 오는 청년들아 정신 좀 차려라. 나 정신 못 차렸다. 너라도 정신 차려야지. 모든 것은 다 헛되다.

전도서 책 1장 1절이 뭐냐? “다윗의 아들”이에요. 자기 이름을 내세우지 않아요. 다윗의 등불, 다윗은 죽고 나도 죽지만 다윗의 언약은 등불처럼 진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끝까지 이스라엘 되게 해주신다 이 말입니다. 추진력이다 이 말이죠. 예수님 죽었잖아요. 돌아가셨잖아요. 예수님은 죽어도 예수님의 그 새 언약은 오늘날 자기 백성을 책임지고 건져내시는 거예요. 말씀으로 패가면서.

2장 19절에, “그 사람이 지혜자일찌 우매자일찌야 누가 알랴” 솔로몬이 르호보암을 지명해놓고 내 후계자가 나 죽고 난 뒤에 이게 지혜자일지 우매할지 어떻게 알겠느냐? 때로는 지혜자 등장했어요. 그 뒤에 르호보암 후에 나타났거든요. 하지만 나타나도 그건 뭐냐? 구원의 통로를 하나로 좁히기 위해서 이런 인간도 제거되고 저런 인간도 제거된다는 말씀이 예언이 다뤘던 사례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는 뭐냐? 성도들로 하여금 혼자 사는 게 아니고 주께서 같이 살게 해요. 같이 살아서 주께서 다루십니다. 어느 쪽으로? 십자가 쪽으로 가지요. 성령 받았다 하는 것은 바로 다시 내가 잊어버렸던 내 자리, 주님 자리를 십자가에 나란히 같이 죽었다는 그 자리로 수시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거예요.

이끌어주기 위해서는 우선 장애가 되는 게 있잖아요. 마귀한테 부추김 받아서 “이것 안 되면 나 죽습니다. 이거는 꼭 이루어져야 됩니다.” 이 여자만큼은 허락하소서, 임재범이 이야기한 것처럼 그런 것들을 주께서는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네가 제로인 주제에 감히 1이 되려고 하다니 내가 너 제로 만들어줄게.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주의 일이지 일체 너의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항상 회고적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게 성령의 일이고 언약의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뤄지는데 우리는 말씀 지키는 걸로 그걸 대체했다고 착각했습니다. 우리가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친히 말씀에 의해서 우리를 삭제시켜주는 그 은혜가 하나님의 구원의 길로 잃어버렸던 십자가가 크게 보이는 그쪽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날마다 감사하고 고마워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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