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덮쳐진 완전

아빠와 함께 2025. 3. 1. 19:27

2024년 7월 2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6:1-2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의 구원을 인간 손에 맡기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개입시켰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을 죽이시려는 겁니다. 인간 가운데 값어치 있는 인간이 단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 세계는 이로서 ‘위기’ 정도가 아니아 아예 ‘끝!’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 이 인간 세계를 다루시느냐입니다.

오늘 본문에 ‘도의 초보’가 나옵니다. 그리고 ‘완전한데 나아가라’도 나옵니다. ‘초보’에서 ‘완전’ 사이에 어떤 라인이 그려집니다. ‘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길이 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는 성도가 자기 구원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 자체도 ‘길’로 작용하기 위해서 나타난 자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길을 걷고 싶어 합니다. 자체적으로 ‘길’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본인이 길을 찾아나서는 방식의 구원을 인간은 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신의 근원에 깔려있는 원초적 문제점을 제거할 방식이 못 보여주게 됩니다. 여기서 초보가 무엇인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보란 난데없이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바를 뜻합니다. “나의 오랜 친구 어둠이여. 당신과 다시 애기 하려 왔네. 조용히 기어 다니던 환상이 내가 잠든 동안 씨를 뿌렸기 때문이다. 내 머릿 속에 심어진 그 환상은 침묵의 소리 속에 아직 남아 있어” -The sound of silence-

하나님의 계시의 찾아듬은 본인이 요청한 바가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의 개입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 세계에 개입하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개선할 그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초보적 하나님의 찾아듬으로 인해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희망을 갖게 됩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은 위해 살 듯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 상태는 예수님과 자신이 협력과 협조가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유지되는 겁니다. 제대로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를 하면서 만난 모든 자들은 모조리 초보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나 각종 귀신 들렸다가 나은 자나, 중풍병자나 세리나 창기나,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가족이나 12해 동안 혈류병 건릴 자는, 병고침 받은 38년 된 병자나 12제자나 세례요한이나 예수님 시킨대로 하겠다는 백부장이나 기타 등등 모든 긍정적 인물들이 다 초보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자는 누구일까요? 완전한 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께서 홀로 단독적으로 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아성을 유지하면서 완전을 발견해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완전’이 덮쳐져야 합니다. 인간은 자체 동질성과 동일성을 포기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동일시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죽는 그 순간에 천국이 입성되는 그 자아가 지금의 자아와 동일한 자아이고 싶어해서 구원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이러한 자아 동일성으로서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속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초보’와 ‘완전’은 모두 예수님의 죽음 내부에서나 이해될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 죽음의 동일성으로 이 땅을 심판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은 이 땅에서 안 죽을 그 어떤 권한도 없고 죽을 그 어떤 권한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을 처분할 그 어떤 권리가 애초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현 인간은 ‘애초의 그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낯선 죽음’을 위한 죽음의 힘으로 인간들을 살리내고 계시는 겁니다. 죽어라고 살리시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성경 단어로 직시하면 바로 ‘육신, 육’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육신으로 보십니다.

예수님과 제자 3명이 기도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요한복음 3장에서는 니고데모가 이런 의아한 반응을 예수님에게 보이십니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 3:4)

즉 이미 육신으로 태어난 몸을 어쩌란 말인가 라는 투정입니다. 육신이란 곧 짐승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승이란 먹을 게에 준해서 행동을 하는 객체입니다. 인간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양식을 바탕으로 해서 살아갑니다. 인간이 이해하는 목숨이란 바로 이런 본능을 따릅니다.

인간들은 부자되기 보다는 노동량을 줄이기를 원합니다. 그만큼 인간은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순적 고리에 갇혀 있습니다. “목숨 바치면 돈 줄게”이게 인간 사회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권능을 여기에 멈추지 않고 짐승이라는 위선의 지붕마저 뜯어냅니다.

그러면 그 안에 ‘악(惡)’이 나옵니다. 곧 자신을 자기가 처분하려는 악 말입니다. 이 길은 자기가 자기를 지켜나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개입의 연속성은 입은 자들은 예수님 자체가 길이 되시는 것처럼 그들로 하나님에 의해서 길로 만들어집니다. 멜기세덱의 족보 속의 세계처럼, 시작한 날도 없고 끝이 날도 없습니다.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은 꾸준히 홀로 살고 있습니다. 자기와 헤어질 생각을 못합니다. 타락하기 전의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방법을 모릅니다. 점점 자기 내부에 들어가서 독하게 홀로 살려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주도권을 쥔 길이 되어버린 자들은 예수님의 공로와 성과에 의해서 자신이 육신에 불과함을 아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원없이 봉사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욕설과 비난과 폭력 뿐인 것처럼 성도도 이 예수님이 당했던 그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봉사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비난뿐인 이 생활이 곧 이미 시작된‘천국 생활’입니다. 이로서 주님의 일관된 길의 동질성 속에 성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덮치는 겁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사랑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며 이 둘 사이에 완전한 권능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주님의 공로만 개입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6강-히브리서 6장 1-2절(덮쳐진 완전)24072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6장 1-2절입니다.

히브리서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 하나님에 대한 믿는 것, 신앙, 세례, 안수,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차 빼고 포 빼고 다 빼 버리면 이걸 버리라는 거예요. 이걸 버리라고 했을 땐  무엇을 버리라고 하느냐 하면, 방금 이야기한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내가 구원 받길 원하는 이것을 버리라는 거예요. 나 자신을 버리라는 겁니다.

성경을 통해서 확보했던 그 많은 지식과 진리를 장착하고 있는 너 자신을 버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하나님을 이용하겠다는 의도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마주치는 상황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유도하신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이렇게 말씀 잔치를 벌이니까 사람들은 하나 둘 씩 그것을 마트에서 물건 사듯이 포획해서 ‘아, 이 정도도면 내가 구원받는 데에 지장이 없겠고 내가 완전한 사람으로서 구원 받을 수 있겠다. 미래에 대한 확고한 보험이 되겠다.’라고 생각하는 그 의도를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런 일들에 대해서 버리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거기 너 있지?” “예. 있습니다.” “거기 네가 왜 있어? 거기 네가 왜 있는데? 거기 너 있으면 안 돼.” ‘하나님이 주신 교훈과 말씀으로 여기 있는 제가 받아서 하늘나라에 하나님과 함께 합류하겠습니다.’ 이게 인간의 바람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뜻은 ‘너 거기 있으면 안 돼. 너 없어야 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성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인간 세계에 개입했다는 거예요. 이 한 마디로 끝났어요. 인간들만이 사는 세계에 왜 예수님이 끼어듭니까? 다 죽여 버리려고 끼어드신 거예요, 다 죽여 버리려고. 다 없애기 위해 끼어드신 거예요. “예수님이 오셨다, 반기세.” 이게 아니라 “네가 왜 나를 반겨?” 지금 예수님께서 인간 세계에 개입한 그 취지를 몰라요. 예수님은 반길 분이 아닙니다. 반길 대상이 아니에요.

주님은 킬러거든요. 없애려고 오는데 무슨 착각을 해가지고 “야, 주님 오셨대. 다 같이 반겨서 찬양하세.”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그걸 네가 왜 반겨?” 주님 오시는 걸 왜 반기냐, 이 말이죠. 얼마나 주님이 하시는 일을 네가 오해했으면 주님을 반길 대상으로 간주합니까. 어떻게 뭐 한 번 살아보려고요? 어떻게 주님과 좋은 관계를 한번 이뤄보려고 하는 겁니까?

주님께서 이 초보라는 개념, 오늘 본문은 ‘도의 초보’이고 지난달에는 초보라고 이야기 했는데 초보라고 하는 그 상태, 그 상태부터 주께서는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그거 버려라.”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성경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초보의 문제, 특히 4-6절에 나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 대목, 이 대목과 연관해서 여러가지 억측들이 많은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에 참여하게 되고 은사를 받았는데 잘리나? 그래도 잘려?’ 그렇게 생각을 해서 이 말씀 볼 때 막 부들부들 떨려요. 너무 무서워서. 도대체 우리가 어디까지 해야 되는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거까지 해 봤냐, 뭐 그런 거 있거든요. 도대체 우리가 어디까지 해야 돼요? 어디까지 해야 구원의 커트라인을 넘어설 수가 있는가?

이런 것 자체가 바로 초보에 들어오지도 못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듯이 초보라는 것은 장성한 자 될 때 초보가 무엇인가를 새삼 이해하는 거예요. 초보 자체부터 주님께서는 초보 근처도 초보에 들어설 수도 없다는 사실, 한 마디로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개입했습니다. 인간을 다 죽여버린 거죠. 인간을 살려두지 않기 위해서, 구원 받고자 하는 인간을 다 제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인간 세계에 개입한 거예요. 그냥 우글우글 인간들끼리 모인 거 아무짝에도 소용없습니다. 주님이 우글거리는 인간 속에 왜 끼어드냐, 이 말이죠.

왜 끼어들었겠어요.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그냥 말씀만 하시면 되잖아요. 왜 친히 오시죠, 왜 친히? 뭔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엉터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개입해서 진짜 하나님의 뜻을 네가 직접 몸소 한번 느껴보라는 겁니다. 유대 민족에게 예수님이 오셨고, 그 뒤에는 계속해서 주님께서 이방 민족까지 날마다 수시로 개입하는 그 취지를 가지고 늘 우리 인생 속에 개입을 해 가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심이 유대 민족 그때 20년 전에 사실로 종결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우리에게 주님이 굳이 개입해야 될 그 취지가 우리 일상에 굳이 개입해요. 어렵게 말해서 우리의 동질성과 동일성을 항상 차단하게, 그걸 해체시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동질성 동일성이라는 어려운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이런 노래가 있어요. “낮엔 해처럼 밤에 달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희구를 표현하는 의문사가 딱 나옵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이게 왜 동질성과 관련되어 있냐면, 어제의 해처럼 달처럼 살았으면 그 인간이 오늘의 나와 동일한 인간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동일한 인간이기를. 동질성을 갖추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 가스펠 송인데요. 이 노래와 대비해서 초보가 뭔가를 다른 노래 가지고 설명 드리겠습니다. 하도 이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노래로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나의 오랜 친구 어둠이여 당신과 다시 얘기하러 왔네.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I've come to talk with you again)

조용히 기어 다니는 환상이 내가 잠든 동안 씨를 뿌렸기 때문이다.
(Because a vision softly creeping, left its seeds while I was sleeping)

내 머릿속에 심어진 그 환상은 침묵의 소리 속에 아직 남아 있어.”
(And the vision that was planted in my brain
Still remains within the sound of silence.)

이게 무슨 내용이냐면, 내 머리 안에 어떤 벌레가 밤중에 들어와서 내 통제를 받지 않고 머릿속을 밤새 기어 다니는 그것을 생각하는 거예요. 조용히 기어 다니는 환상, 내가 잠든 동안에 나에게 씨를 뿌렸다. 이 노래는 폴 사이먼과 가펑클이 불렀던 “Sound of Silence” 라는 팝송입니다.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나의 오랜 친구여”

뭔가 기어 들어왔는데 내 쪽에서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기어 들어왔어요, 밤중에. 그리고 이게 가만있으면 되는데, 수술해서 잡아서 집어던지면 되는데 이게 스스로 기어 다니면서 나에게 씨를 뿌려서…, 이게 바이러스도 아니고 일종의 곤충? 내 머릿속을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 통제가 안 되는 대상? 그것을 환상이라고, 그 환상이 내 머릿속에 기어 다닌다는 겁니다.

그때 이 폴 사이먼과 가펑클은 이 가사를 쓰면서 뭐라고 생각했냐면 이 세상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표현이 안 되는 어떤 침묵의 소리가 나에게 찾아왔다는 거예요. 계시가 나에게 도래한 거예요. 이게 바로 초보에요. 이게 초보에요. 뭐 성경 보고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의 신앙과 세례,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심판, 지금 그 모든 지식을 파괴시키는 거예요.

그 지식이 이 벌레를 대신할 수 없잖아요. 일방적으로 침투가 대신 될 수 없잖아요. 내 안에 낯선 게 들어왔어요, 낯선 게. 그걸 가지고 히브리서는 성령의 참여한바 되고 한번 비침을 얻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 다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초보도 안 되었어요, 초보도. 초보 안 되고 성경 공부하고 설교 듣는 거예요. 초보에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교회 다니는 게 일종의 취미생활이에요. 산악자전거 타다가, 축구 하다가, 테니스 치다가, 나이 들어 허리 아프고 이러니까 그거 다 그만두고 등산, 등산도 나이 들면 못하고 때 따라 뭐하느냐? 성경 공부. 성경 공부를 왜 이렇게 하냐면, 내가 내 인생을 통제하기 위해서 성경 공부 하는 거예요. 내가 내 인생을 통제하는 것.

이제 점점 나이 들어 죽음의 때가오니까 미래에 대해 대처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 나와서 성경 배우고 예배 참석하고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뭐가 문제냐면, 자신의 거짓이 성경 공부 한다고 수정이 안 돼요. 이게 제일 큰 문제입니다. 근원적인 내 거짓을 내가 성경 공부해서 뽑아내거나 파악이 안 돼요.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히브리서 6장에서 완전한 데 나아가라 하니까 이건 뭐 좋~다고 이런 식으로 교회 다니고 시키는 대로 하고 성경 공부해서, 그리고 수련회까지 참석 해가지고, 돈도 없는데 돈 들여서 기어이 완전한 데로 나아가고 싶었다는 그러한 희구, 희망이 있는 겁니다.

처음의 노래로 다시 가게 되면 “낮에는 해처럼 밤에는 달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하나님의 은혜 받음이 자기의 동질성과 동일성을 계속 붙드는데 하나님이 이제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내가 지금보다 더 괜찮은, 완전한 나로 탈바꿈 하는데 하나님 좀 도와주면 안 되겠어요?”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아까 폴 사이먼이 불렀던 ‘Sound of silence’ 그 노래 가사하고 어떤 점에서 차이 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팝송의 가사는 그냥 뭔가 벌레가 나왔어요, 벌레가. 내 온 마음을 헤집고 다녀요.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그 긴 가사를 계속 보게 되면 사람들은 기도도 하고 절도 하고 하는데 그러나 그들이 종교를 가지고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 믿고 백날 해 봐야 뭘 모르냐면, 네온사인에 나와 있는 인간의 언어가 구성된 일상생활 자체를 그들은 이겨내지를 못하고 있더라는 거죠.

그래서 자기가 받은 환상, 자기도 모르게 받은 이 환상의 계시, 소식을 세상 수 만 사람들에게 본인이 나서 전해보니까 사람들이 “그게 무슨 말이야?”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같은 교인인데 말을 못 알아들어요. 같은 교회 다녔는데 20년 30년 돼도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가사 끝에 보면 이렇습니다.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언어 구조 안에 빠져있기 때문에 이 낯선 환상이 이야기 하는 것을 못 알아보는데 그러나 침묵의 소리는 멈추지 않고 인간의 무시를 이겨내면서 나처럼 누구에게 찾아가 또 그 벌레가 그 사람 속에 환상을 심어놓고 있다. 그게 뭐냐,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침묵의 소리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게 초보에요. 이게 초보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 내가, 인간이 꾸며내서 말로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여러분들이 말로 토해본 적 있습니까? 그러면 이 초보와 완전에 대해 간추려서 나와 있는데 이게 너무 어려운 이야기라서 이걸 풀이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 풀이는 굉장히 쉬운 풀이에요. 일단 아까 이야기부터 다시 해봅시다.

인간들끼리 사는 세계에 예수님이 개입했습니다. 안 해도 되는데, 굳이 안 오셔도 되는데 뛰어들었어요. 왜? 왜 오셨는가? 그 분이 하는 모든 일은 이 인간 세계와 맞닥뜨려서 자신의 죽음을 쏟아냈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쏟아냈어요. 그 말은 옛날부터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모든 말씀은 죽음 안에서 해석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네 죽음 말고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만 해석이 돼야 된다, 그것을 알리기 위해 오신 거예요.

그러면 초보가 뭐냐, 완전한 건 뭐냐? 초보도 버리고 완전한 나란 뭐냐? 그 해석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만 해석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들은 죽음조차도 몰라요. 죽어 가면서 죽음조차도 몰라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려놓은 이유는,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 계속 살려 주신 거예요.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 살려준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안 죽어서 죽음은 몰라도 된다고 우기는 거예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는지 예를 들어 볼 테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트럭에 받혀 죽을래요, 외제 차에 받혀 죽을래요? 어느 게 좋습니까? 이왕 죽는 거 외제 차에 받혀 죽고 싶죠? 내가 살아있는 나의 가치 나의 동질성, 나의 동일성을 계속 고집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나의 동질성에 맞춰서 죽음을 이해하다 보니까 ‘이왕 죽는 거 구급차에 받혀 죽어서 폼 나게 죽고 싶다’는 거예요.

여러분 구급차에 받혀 죽는 것보다 더 폼 나는 죽음을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최근에 호주에서 어떤 박사가 기계를 하나 발명해서 독일에서 전시회도 했는데 그게 안락사 기계에요. 안마 의자 있잖아요? 그거랑 비슷한데 캡슐 형으로 딱 되어 있고 들어가서 닫게 되면 산소가 투입되지 않은 순수 질소만 있으면 고통 없이 죽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약간 무기력하다든지 몽롱한 느낌은 있지만 전혀 고통 없이 죽을 수가 있어요. 제가 보기엔 인간이 발명한 것 중에 제일 기쁜 소식이 아닐까 싶은데.

그런데 그 기계의 결정적인 면이 뭐냐? 한번 누르면 취소가 안 돼요. 취소 불가입니다. 안마에서 시원 할래요, 고통 없이 한 방에 갈래요? 어느 기계가 낫습니까? 사는 게 인간은 고통입니다. 이유는 모르고 안락사 기계로 해서 언젠가 죽고 싶어요. 죽을 때 그렇게 죽고 싶어요. 교회 가서 예수 믿는 것보다 노후에 대해 더 든든한 것 같습니다.

인간이 고통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온갖 짓을 다 해요. 부처도 믿어 봤다가, 예수도 믿었다가, 절에 갔다가, 교회도 가봤다가, 이래도 고통이 안 떨어져요. 떨어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께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거에요. ‘하나님 안 믿고 완전하면 안 돼요? 하나님 안 믿고 완전하면 안 됩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됩니까? 낮에 해처럼 밤에 달처럼 살면 되잖아요. 다만 하나님을 안 믿고. 하나님을 안 믿고 이웃 사랑하고 이웃 구제하고 어려운 사람 돌보고 착하다 착한 이는 다 동원해서 그렇게 살면 안 되겠어요?’

그렇게 노골적으로 살다 가신 분이 있어요. 최근에 돌아가셨는데, 김 민기. 예수도 연구하고 뭐 다 했어요. ‘금관의 예수’라는 노래도 만들었지만 마음의 고통은 사라지질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울 대 나온 그 김 민기 씨도 안 된다면 우리도 안 되죠. 안 될 수밖에 없죠. 김 민기 씨가 만약에 다시 살아온다면 교회 다니는 여러분 보고 뭐라고 하겠어요? “빨리 교회에서 나와, 이 바보 등신들아. 나 그거 다 해 봤어.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어? 나처럼 좀 용감해라. 하나님 안 믿고 그냥 나 자체로 완전하게 살면 되잖아. 성경에도 나오잖아. 완전에 이르라고. 그렇게 살면 되잖아.”

어쩌면 그 목소리가 우리 내부의 목소리와 합치될 수가 있어요. 그게 뭐냐면, 바로 내 인생을 내가 처분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완전은 뭐냐? 사람들은 완전을 발견하려고 해요. 그런데 완전은 발견되는 게 아니고 완전에 묻히는 겁니다. 완전히 덮쳐지는 거예요. 완전히 덮쳐지게 되면 인간은 뭐가 되느냐? 길이 됩니다, 길. 인간은 개체가 아니고 하나의 길이 돼요.

여호수아 1장 7절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다는 이 대목을 딱 떼 가지고 연상되는 것은 뭐냐? 길이 나있고요, 길 양쪽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광경을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면 됩니다. 중국의 오지에 가면 그런 길들이 있잖아요. 오지에 가면 절벽이 많다. 하여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나와 있을 때 어떤 길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의 개체가 되는 것이 아니고 길쭉한 길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오면 초보가 되고, 그 초보는 초보에 머물지 말고 기다란 길이 되는 겁니다. 그 길의 도착 지점은 천국이 되는 거예요. 이 비유가 적당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쌀 낱알 하나하나는 개체잖아요. 그 쌀 가지고 물에 푹 불려서 방앗간에 갖다 주게 되면 구정 때 떡가래 되죠. 나라는 것을 뭉쳐서 주님처럼 떡 가래가 되는 거예요, 떡 가래.

떡 가래의 특징은 뭐냐? 길의 특징은 시작 지점과 끝 지점을 중간에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럼 시작은 어디냐? 시작이 없죠. 개체에게는 시작이 있지만 개체가 아니라 시작은 없어요. 끝이 있는가? 내 끝은 없죠. 중간에 전선 자체가 무슨 끝이 있습니까? 전선 자체가 무슨 시작이 있어요? 전신주와 전신주를 연결하는 라인에 불과하죠. 그게 뭐냐? 멜기세덱의 족보에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

그런데 아까 했던 ‘나는 낮의 해처럼 밤의 달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이건 개체죠. 그래서 살아서, 뭐 자기 동일성 유지하려고요? 나 이렇게 살았다고 내세우려고요? 이게 들어보면 참 쉬운데요, 말하는 게 어려운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에 공생애 시작할 때에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 중에 부정적인 사람도 많지만 긍정적인 사람도 있었거든요.

백부장부터 해서 12년 동안 혈루병 걸린 여자, 그리고 귀신 들린 사람도 있고, 소경도 있고, 세리, 창기도 있고, 예수님한테 향수를 뿌린 여인도 있고, 백부장처럼 이방인이면서 ‘가라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그런 사람도 있고, 거지 나사로 말고 마르다 마리아 가정의 그 나사로도 만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잖아요. 시므온처럼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그런 사람도 있고, 임신이 된 마리아도 있고, 세례 요한도 있고, 열 두 제자 있는데 모조리 다 초보에요. 전부 다.

왜냐? 그 중에 누구 하나라도 십자가에 참여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 참여한 사람이. 초보라도 어디입니까, 그게. 주의 성령이 벌레처럼 도는 그게 어디에요? 대단하죠. 그러나 그들이 나는 은혜 받았다~, 나는 소경인데 눈 떴다~, 난 38년 된 병자인데 건강하게 되었다~, 결혼식에 포도주가 없었는데 해결했다~, 그걸로 끝이면 안 돼요. 그걸로 끝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길이 될 수 없어요. 그건 하나의 개체, 개인으로 남는 거예요. 길쭉~한 길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시작도 없고 끝이 없는 것에 합세 되어야 해요. 성도가 하나님께서 초보 더하기 완전히 덮쳐서 길이 되는, 그렇게 됨으로서 이 세상에 두 종류의 길이 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하나는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길. 또 하나는 말씀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길.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것은 어떤 성향이 계속 나오냐 하면, 자신의 권리와 자신의 권한 같은 것을 자꾸 가지려고 해요. 그러나 말씀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인간에게 도대체 권리나 권한이 있을 이유가, 가질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왜? 몸이 아픈 것도 주의 일이니까. 나의 일은 없어요. 오직 주의 일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 우리에게 설사하는 기쁨을 줘요. 맨 날 설사해요. 자아가 쑥쑥 빠지는 설사. 자기의 동질성과 자기의 동일성이 쫙쫙 빠지는 설사. 언젠가 제가 대장 내시경을 한 적이 있는데 준비과정에서 그런 심한 설사는 처음 해봤어요. 대장 내시경 해 본 사람은 다 알거에요. 대장 속에 하나도 남기지 말고 쏙 빼도록 약물을 집어넣어서 다 빼게 만들어요. 물만 나오도록.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말씀이 그냥 말씀만 나올 때 그게 길이 되는 거예요. 긴 내장이 긴 대장이라는, 장이라는 길, 길이 되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그걸 말씀으로 짬짬이 보여 줬어요. 이사야 6장 5절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망하는 백성 중에 하나입니다.’ 아, 그 이사야, 대단한 고백이죠. 초보입니다. 완전한 자는 누구밖에 없는가? 십자가 지신 예수님 밖에 없어요, 완전한 자는. 이제 완전함과 초보에 눈이 확 뜨이십니까?

완전한 자는 예수님 밖에 없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 그 때 뿐만이 아니고 그 이후에 모든 성도들에게 날마다 개입해요, 날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네 자아가 왜 거기서 나오지?” 날마다 개입하면서 말씀의 주도권을 계속 발휘하고 있는 상태, 그게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거예요. 나의 시작도 없고 나의 끝도 없는 멜기세덱의 족보에 합류한 사람의 특징이에요.

끝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 구약 에녹에 나옵니다. 에녹은 사라졌어요. 끝이 없어요. 엘리야가 사라졌어요. 끝이 없어요. 무슨 끝을, 나의 끝을 내가 왜 걱정합니까? 이 설사를 덜 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자를 자기 성도로, 초보로 만들고 특히 공생애 때 만났던 사람들, 그 사람들 중에서 열 두 제자가 대표적이 아닙니까?

열 두 제자, 가룟 유다는 아예 초보도 아니고요. 열 한 제자가 다 초보로서 돌리고 십자가에는 본인만 올라갔어요. 옆에 있는 강도도, 믿음 있는 강도도 초보고 십자가에 홀로 올라갔습니다. 그 누구도 완전한 자가 아님을 선포해버리는 거예요, 그 누구도.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인간 세계에 개입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자, 그러면 초보부터 완전한 자리로 나아가라, 할 때 이거 명령이거든요. 이 명령은 명령 자체가 말씀이라서 말씀이 주도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길이 될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가지고 매일 같이 우리에게 찾아오고 개입할 거예요. 개입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느냐?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없어요. 그럼 뭐가 되느냐? 성경에서는 그걸 육신이라고 해요, 육신. 인간이라고 여겼는데 인간이 아니고 주님은 육신을 다룹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기도하는데 제자들 3명을 데려와서 “우리 같이 기도하자.” 하고 엎드려서 같이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주무셨죠. 푹 주무시죠. 이게 주님 기도의 효과 아닙니까? 설교 음성 들을 때 잠 잘 와요. 이게 설교의 효과입니다. 그 때 뭐라고 하냐면 이렇게 해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다, 라고 이야기해요. 주님께선 제자들을 육신으로 다루십니다.

이 육신으로 다루게 되면, 이제 본격적으로 설사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 설사를 하게 되면 니고데모가 주님하고 만났던 그 현상이 놀랍게도 우리에게 그대로 입혀집니다. 니고데모가 모든 육신을 대표해서 이야기 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솔직하게 이야기 했는데 그게 뭐냐? 가룟유다야 사탄으로 가버렸고 주님과 대화하지도 않았고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거듭 난다는 말은, 하늘로부터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갈 수가 없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태어난다는 데에 니고데모가 딱 꽂혀 가지고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라고 이야기 했어요. 니고데모가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은 오늘날 우리보고 좀 정신 차리라는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 다니고 아무리 성공한 목사가 되고 신학교 나와도 이 거듭나는 것은 다른 문제에요. 인간이 노력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건 초보가 되어야 돼요, 초보가. 다시 말해서 벌레가 들어와야 돼요. 니고데모가 이야기 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이미 육신으로 태어난 걸 어쩌란 말입니까?” 이미 태어나기를 육신으로 태어났는데 뭐 여기 와서 저보고 어쩌라고, 생긴 게 육신인데.

니고데모가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 거거든요. 그게 뭐냐면, 수련회 때 이야기 할 것을 특별히 여러분께 미리 말씀 드립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신의 면면을 보여주는데요. 육신이란 뭐냐? 말씀으로 내 자아의 껍데기를 벗겨내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탈을 권능으로 벗겨내는 거예요. 말씀의 권능이 오지 않으면 인간들은 미용(美容)의 권능에 빠져 삽니다. ‘오늘 또 뭘 잡아당기고 뭘 하지?’ 항상 생각하는 것은 ‘모자를 어떻게 눌러 써야 폼이 나는지?’ 그게 인간이거든요, 인간.

그게 인간인데 광야에 집어넣어 버리면 미용이 날아 가버려요. 대만에서 ‘개미’라는 태풍이 와서 철판이 차 지붕으로 떨어져서 애는 중상, 엄마는 죽었다는 거예요. 건물에 붙어있어야 될 철 구조물, 딱 붙어 있어야 하는 철 구조물이 강제로 태풍의 권능에 의해 떨어지듯이 인간의 자아를 덮고 있는 것을 딱 떼어 내는 거예요. 인간의 자아가 딱 붙어있는 게 뭐냐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이게 철 구조물이거든요. 이걸 광야에 뜯어 던지면 사람은 짐승이 됩니다.

인간 속에 짐승 들었어요. 짐승은 본능인데 본능은 뭐냐? 밥이 있어야, 떡이 있어야 산다는 거예요. 아무리 교회 잘 나온 척 하고 뭐 목사 장로 집사 교인이라고 해도 사람이 돈 없고 양식 없으면 사람은 짐승화 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아람 나라가 북 이스라엘 포위할 때 그걸 보여준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 하고 찾던 그 사람들 하나님 대신 뭘 찾는가? “어제 내 아이 삶아 먹었지? 오늘은 네 애 삶아 먹을 차례야.” 그걸 보여줬어요. 인간은 짐승하고 똑같아요. 짐승은 영양분, 양식, 식량 없이는 못 삽니다. 이게 말씀의 권능으로 철근 구조물 뜯겨 나가니까 돈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거예요, 돈이.

여러분 올림픽이 뭐고 스포츠가 뭡니까? 이런 거예요. 명예와 그 뒤따르는 돈 줄 테니까 네가 죽어라고 싸워라, 이게 스포츠에요. “죽어라고 싸워라” 뭐 대충 설겅설겅 해가지고 목조르기 한 방으로 16강 탈락, 이런 식으로 하면 그 동안 세금이 아깝다는 거예요. 선수촌 점심 값이 아깝다. 여자 유도 이야기입니다. 32강인가, 거기서 떨어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싸울 때 죽어라고 싸우면 떨어져도, 지는 한이 있더라고 잘 싸웠다, 할 수가 있는 거예요. “네 목숨 바치면 목숨 값으로 너한테 명예와 돈 금메달 보상을 줄게.” 수영 할 때 그냥 하지 마라, 사지가 뜯겨 나가는 것처럼 팔을 이렇게 저으라는 거예요. 사지가 뜯겨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해보니까 동메달. 사지가 뜯겨나가는 게 그게 뭐예요? 그게 죽는 겁니다. 스포츠가 뭐냐? 사회의 축소판이에요. 모든 직장에서 요구하는 것은 뭐냐? 네 목숨 바치면 월급 줄게, 그거잖아요. 목숨 바치면 월급 줄게.

그러니 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그래서 인간의 해결책은 뭐냐? ‘돈만 있으면 일 안해도 되잖아.’ 인간은 부자 되는 게 목적이 아니고요, 노동을 줄이는 게 목적이에요. 이게 원래 인간이 담고 있는 본능입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태어나는 것은 인간아, 네가 아무리 애써도 창세기 6장 3절부터 5절, 네가 육신이 됨이라, 네가 육신으로부터 창세기 2장의 죄 짓기 전에 원래 인간으로 너는 못 돌아간다.’는 걸 말씀으로 보여 주는 거예요.

말씀은 지키는 게 아닙니다. 말씀이 와서 우리에게 벌레처럼 기어 다니면서 나라는 인간은 짐승에서 못 벗어남을 혹독하게 다 보여주는 게 말씀의 권능이에요. 그것이 바로 자아를 뭉개서, 지문을 뭉개서 우리로 하여금 짐승의 보편화, 균등화, 모든 인간은 다 돈 밖에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것, 그걸 균등화 시키는 게 말씀의 능력입니다. 인간은 없습니다. 짐승뿐이에요. 돈에 미쳐 환장한 짐승뿐입니다.

승진 안 되니까 회사 기밀 유출해서 승진 하고 돈 좀 벌어볼까, 시도하는 거? 진짜 천사가 감사할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것. 드라마 이야기 입니다. 왜 회사 기밀 유출합니까? 노동을 줄이기 위해서. 일 안 하고도 행복하기 위해서. 이것은 길하고 관계없죠. 그러면 이쯤 와서 핵심을 밝혀야 돼요.

초보와 완전의 차이는 뭐냐? 초보는 개인이 개인을 아직도 처분하려고 해요. ‘이 정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것 해가지고 내가 완전한 길로 한번 나아가 볼까?’ 본인이 아직도 본인에 대해서 손을 못 대고 있는 상태. 그러면 완전은 뭐냐? 완전은, 우리가 육신화 되어서 주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거예요. 그게 완전입니다. 이 이야기는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에 제가 세 번째 노래 가사 하나 해 드립니다.

초보가 뭐냐? 초보는 아까 했듯이 ‘Sound of silence’죠. 어떤 벌레가 와서 기어 다니면서 나를 계시 용도로서 쓰기에 그냥 나는 나의 통제 밖에서 쓰여 지는 거. 그 점에 초점이 있는 게 초보라면 완전은 어떤 사람인지 가사를 들어보면서 완전이 뭔가를 여러분 알려드리겠습니다. 말로 설명 드리면 어려워서.

“사랑 했다는 그 말도 거짓말
돌아온다는 그 말도 거짓말
세상의 모든 거짓말을 다 해놓고
행여 나를 찾아와 있을 너의 그 마음도 다칠까
너의 자리를 난 또 비워둔다.”

김 진용 씨가 작사 작곡 했던 노래, 조항조가 불렀던 유명한 노래, <거짓말> 이게 무슨 말이냐면, 완전은 둘이에요, 둘.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둘 돼요. 초보는 하나님이 들어와도 여전히 내가 주인공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일을 관찰해요. 그런데 이게 둘이 되게 되면 사랑의 관계가 돼요. 사랑은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다. 나는 뭐가 되냐면, 육신이면서 그 다음에 뭐냐? 육신의 단계에서 더 말씀의 권능을 뜯어보니까 그 안에 마귀가 들어있는 거예요. 귀신이 들어있는 거예요. 짐승에서 더 나아갈 때 귀신 되는 겁니다. 그럼 나는 뭐냐? 나는 거짓이에요. 나는 거짓입니다. 짐승 수준이 아니에요. 십자가 앞에서 나는 거짓이 되는 겁니다.

주님을 사랑했다는 그 말도 거짓말, 돌아온다는 그 말도 거짓말, 이 노래를 얼마나 잘 만들었으면요, 가사만 불러도 가락이 그냥 나와요. “사랑 했다는 그 말도 거짓말, 돌아온다는 그 말도 거짓말, 세상의 모든 거짓말을 다 해놓고 행여 나를 찾아와 있을 너의 그 마음도 다칠까.” 나는 너를 위해서 아직도 내 자리를 또 비워둔다, 사랑의 관계 입니다. 사랑의 관계.

고린도전서 13장 1-2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완전한 자를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는 뭐라고 보느냐 하면, 사랑의 관계로 봅니다. 사랑이 나로 하여금 내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거짓.

이 거짓이라는 예가 얼마 전의 사건을 통해서 너무나 적나라하게 다 드러났어요. 환불 사태. 위메프라는 본사에서 “내 상품 산 거 돌려줘”라고 새벽 세 시에 가서 돌려달라고 갔을 때 그게 환불 사태거든요. 환불 사태의 특징이 뭐냐? 내가 네 회사한테 속았다는 거예요. 인간은 속지 않으려고 하니까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인간은 자신의 거짓을 스스로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이미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거짓으로 살았는데 내가 어디를 봐서 거짓이냐고 하고 있어요. 어디를 봐서? 내가 죄 지은 건 인정하는데 거짓은 아니라는 겁니다. 과연 아닐까요? 과연 거짓이 아닐까요, 인간은?

마태복음 11장 17, 18절,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주께서 피리를 불어도 이게 춤 출 타이밍인지는 모르고, 애곡해도 주님이 왜 그렇게 아파하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왜냐?

내가 나를 처분하고 내가 나를 관리하기 때문에. 왜? 나는 누구하고 사랑 안하고 싶은 거예요. 나는 완전해지는 나랑 사랑하고 싶고 그걸 내가 안 놓치고 싶은 겁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식 알려드려요? 본인이 본인보고 이렇게 한 번 물어보세요. “내가 누구세요?” 남하고 헤어지지 말고요, 자기 자신하고 먼저 헤어져야 돼요.

성경 지식 이런 것들이 들어오게 되면 이것 가지고 어찌해본다고 시도하면서 점점 자기 자아가 단단한 돌멩이가 돼요. 나중에 보면. 행여 내가 다칠까 싶어서, 행여 내 신앙이 흠집 날까 싶어서, 기스 날까 싶어서. 남들보고 ‘나 당신하고 말 안한다. 저리가, 저리가! 나 내신앙도 감동 못하는데 당신까지 감당 못한다.’ 하는 거예요.

이것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합니다. 네가 봉사할 마음이 전혀 없다, 는 거예요. 주님의 봉사는 뭐냐? 주님은 해줄 것 다 해줬는데 돌아오는 것은 욕설만 돌아왔잖아요. 비난만 돌아왔지요. 바로 그 아픔, 주님의 아픔에 벌~써 참여하는 그 생활을 가지고 천국생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천국생활이란 자연인 되어서 혼자 기도해서 도 닦는 생활이 천국생활이 아니고, 자신의 레벨을 올려서 완전해지는 그것이 천국생활이 아니라 주님의 억울한 아픔에 참여된 상태를 천국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해줄 것 다 해줬는데 돌아오는 것은 욕만 돌아왔을 때 그 때 주님한테 항의할 때 “그러니까 너 그냥 봉사해. 도와주고 욕 얻어먹어.” 본인이 본인을 관리하는 사람은 그게 안 된다고요! 그게 안돼요. 자꾸 자기 지킬 요령만 부리고 남에게 변명할 것만 계속 연구하고 있는 거예요. 회개, 세례…, 세례라는 것은 구약의 정결의식을 말합니다, 안수, 부활, 영원한 심판, 이게 다 구약에 나오는 거예요.

구약에 나왔을 때 예수님을 기다렸던 많은 그 당시 사람들이 방금 말한 것들, 회개, 정결의식은 세례와 같은 거예요, 안수하는 것, 부활, 심판, 구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 이 중에서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해서 다니엘 12장에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2절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게 마지막 심판 때 에스겔 37장과 연관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다고요. 회개, 세례, 정결의식, 안수해서 깨끗하게 하는 것, 피로, 또는 기름을 발라서 죄가 씻어지는 것, 이게 세례 형식이거든요, 안수하는 것, 모세가 안수해서 여호수아로 하여금 일을 시키는 것, 이런 것이 다 있다 그 말이지요.

있으니까 사람들은 그걸 기대한 거예요. 왜? 본인의 동질성, 본인이 괜찮은, 완전한 상태가 되어서 이 완전한 내가 천국갈 수 있도록. 그런 시도를 꾸준히 해 왔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냐?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하나의 길이 된 거예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실컷 목숨 바치고, 실컷 봉사하고, 사람들에게 모든 진리를 이야기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욕설들, 거짓이다, 귀신들린 자다, 결국에는 목숨까지 빼앗겼잖아요.

그 모욕의 세월을 같이 감당할 수 있는 것,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완전한 거예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고…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는 겁니다. 사랑은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다. 말씀이 나로 하여금 네가 어떻게, 가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관계성, 사랑이라는 말씀의 완성의 관계성으로 예수님이 보여줬던 천국생활을 나는 너를 앞장세워서 보여주겠다는 것이 완전에 이르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다 좋은 말인데 세상 그렇게 산 사람 누구 있습니까? 그냥 봐주면서 눈 좀 감고 넘어가 주세요. 내 원대로 살도록” 이렇게 하는데 그런 사람 있어요. 고린도전서 2장 4, 5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지속적인 예수님의 지속적인 동질성이 나의 자아의 동질성을 대체하는 능력, 이게 성령의 능력이에요.

성령의 은혜 받았다고 해놓고 아직도 내 생각하고 있어요. 무슨 권한이 있고 무슨 권리가 있어요? 내가 살아야 될 권리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안 아파야 될 권리가 어디에 있어요? 없어요. 몸 아프거든 병원에 가시고 약 잡수세요. 왜? 그것도 주의 일이니까. ‘대충 살다보면 낫겠지’ 이건 너무 게으름 피우는 것이고요. 열심히 링거도 맞고 하세요.

고린도전서 4장 19-21절에서 좀 심한 말을 했어요.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매를 가지고 나아갈까, 아니면 사랑으로 갈까’ 이렇게 합니다.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말씀이 제말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세요. 그래서 우리에게 설사하는 기쁨을 주시기 바랍니다. 육신도 뜯기고, 그래서 ‘내 안에 귀신 들었네.’ 하는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내 속에 악한 것이 들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그것, 말씀이 덮침으로서 ‘내가 살아 있는 귀신이 따로 없네.’ 할 때 여러분이 ‘내가 바로 거짓이다.’

그래서 조항조의 <거짓말>

너에게 나를 사랑할 기횔 주어본다
어떤 사랑으로
나의 용서에 답할는지

오직 용서, 다 이루었다, 용서했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우리를 덮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 나오지만 속 마음은 ‘하나님 안 믿고 스스로 완전하면 되잖아요.’라는 치졸한 변명, 나 챙기는 것, 내가 나를 처분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귀신의 모습인 것을 이제야 발견하는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