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된 말씀환경 250112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9:23-26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3. Therefore it was necessary for the copies of the things in the heavens to be cleansed with these, but the heavenly things themselves with better sacrifices than these.
24. For Christ did not enter a holy place made with hands, a [mere] copy of the true one, but into heaven itself, now to appear in the presence of God for us;
25. nor was it that He should offer Himself often, as the high priest enters the holy place year by year with blood not his own.
26. Otherwise, He would have needed to suffer often sinc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but now once at the consummation of the ages He has been manifested to put away sin by the sacrifice of Himself.
죽음이라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그동안 숨겨진 하나님의 환경이 확대되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축구에 전반전 있고 후반전 있듯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반전이라면 이 전반전을 오늘 본문에서는 모형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형 보고 난 뒤에 이 세상 다 알았다, 하면 안 되겠죠. 모형만 봤을 뿐인데 마치 세상 전체를 아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면 안 되겠죠.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모형에 국한됩니다. 기껏 모형 가지고 주물럭대면서 여기서 인생이 뭐며, 구원이 뭐며, 이런 식으로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죠.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두고 끝이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반쪽만 보여준, 모형 쪽에서만 끝이죠. 모형 쪽에서만 끝이고 이제 본격적인 것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본격적인 현실을 저는 환경의 확대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환경의 확대, 환경이라는 말을 왜 하느냐 하면, 공기, 바람, 그리고 비, 구름, 파도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연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성경은 거기다가 하나 더 보태라는 거예요. 공기, 바람, 비, 구름이 우리가 원한 대로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공기는 이제 그만 와.”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이 환경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환경의 일부인데 그 환경에 말씀이라는 환경을 집어넣어 버리자, 이 말이죠. 말씀이라는 환경을 집어넣어 버리면 공기와 바람과 비 이런 것을 우리가 우리 손으로 주물럭거릴 수 없는 대상인 것처럼 말씀도 우리가 지키고 자시고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에요.
모형 시대에서는, 구약이죠, 모형 시대에서는 내가 말씀을 지킴으로서, 율법을 지킴으로서 정갈해지고 깨끗해지고 정화되고 우수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건 인제 그만해라.” 이 말이죠, “이제 그만해. 모형 가지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 이것은 모형적 태도에 해당됩니다, 모형적 태도. 모형인 주제에 모형인 줄 모르고, 내가 진짜인 줄 알고 내 가치를 높이려고 뭔가 해보는 것,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만하면 됐다.’ 그거 다 실없는 짓이었다는 겁니다. 23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모형은 이런 것들로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이제는 모형이 끝나면 그런 식으로 말씀 지켜서 나를 깨끗하게 하는 그 짓은, 하지 마. 할 필요도 없는 거야.’ 이런 뜻이에요. 모형을 백날 깨끗하게 해 봐야 모형이죠. 환경이, 모형적 환경이 다가 아니거든요. 이제는 그것을 확산, 확대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었던 그 율법이 스스로 어떻게 이 세상에 비와 구름과 바람과 마찬가지로 환경의 일부로 들어와서, 환경의 일부로 들어온 그 율법이 어떻게 스스로 자기의 몸집을 키우고 그 범주, 범위를 확산시켜 나가는지 그걸 주목하라는 거예요, 그걸. 그것에 주목하게 되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뭐냐? 너는 너를 위해서 정결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쓸데없는 짓 했다는 겁니다. 옛날 TV 프로 중에 그런 프로가 있었어요. <개그 콘서트>라고 아주 유명한 프로가 있었는데 거기 나오는 한 유행어가 이거에요.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 하지 말자.”라는 게 있어요.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 하지 말자.” 따라 한다고 개그 아닌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내가 정한 환경이 아니고 말씀이라는 그걸 위하여 말씀의 환경의 일부로서 우리가 모형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말씀이 주체고 우리는 거기에 따른 모형이라, 이 말이죠. 우리의 몸,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있으나 없으나 아무 의미도 없는 하나의 개그에요, 개그. 그냥 웃고 치우는 거죠. 원래 실없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시답잖게 보기 때문에 진지한 뜻을 몰라서 사람들은 개별적 유닛, 단위, 아침에 눈 뜨면 신경 쓰는 것이 내 인생 어떻게 관리하느냐, 이거에요. 우울증과 자폐증 증세를 벌써 시작해요. ‘내 것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안 다치게, 내 마음 상처 없게. 그런데 본인이 뭔데요? 그게 눈물 나는 개그에요, 그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데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이 세상 모든 인간이 개그라고 하는 것은 뭐냐?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있을 때는 심각한데 모여 있으면 같이 웃음을 띄우고 하는 것, 이걸 단체 사진이라고 합니다. 강제로 웃어야 돼요.
서로가 서로에게 오답인데 그 오답을 가지고 서로 컨닝 하면서 세월 다 보내고 있어요. 옆에 것 기웃거리고, 저것도 틀린 답인데. 정답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했는가? ‘세상 끝에 단번에 하늘에 들어가셨다.’ 그게 모형이 아닌 진짜 하늘에 있는…, 24절에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라는 그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를 우리가 이해하려면 우리가 평소에 개인적인 유닛으로 해서 나 자체 안에서 스스로 환경을 만들어내는 이 자폐증, 우울증 증세의 내막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돼요.
우리 자신이 ‘나’라는 개인적 단위만 생각해서는 이 히브리서 9장을 백 독해도 소용이 없어요. ‘나 잘되라고 주께서 말씀 주셨구나.’ 이렇게 이해한다고요.
천국의 주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왜 천국을 넘봐요? 주인은 따로 있는데. 히브리서 9장에서는 뭐냐? ‘자기 피로 영원한 성소로 들어갔다, 끝!’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결정했다는 말은, 이 땅에서 접촉점, 이 눈에 보이는 세계,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이야기했지요, 인간이 알 수 있는 환경과 보이지 않는 확대된 환경 사이에 분명한 증거를 준 적이 있어요. 말만 하신 게 아니고, 하늘나라에서 말만 하신 게 아니고 이 땅에 와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육신 가지고 남긴 증거가 있어요. ‘하늘나라 성소에 들어갔다.’라고 했을 때 이 증거가 있어요. 그 증거가 뭐냐?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십자가 피입니다.
예수님은 보편적 말씀이라는 환경의 확대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개별적이에요. 어떤 행동을 하고 결정하든 그 수익과 이익과 결과는 시도한 나에게 도착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하는 결정은 이것이 보편적이라서 모든 개별적 유닛을 오함마나 망치 가지고 다 부수는 겁니다. 모형은 개그일 뿐 따라 하면 안 돼요. 모형이 모형을 위해 하는 것은, 그것은 사기입니다. 우린 태어날 때 모형으로 태어난 거예요. 나 좋으라고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자기 결정에 의해서 만들어진 환경은 산불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걸 가지고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
모형인 내가 목숨이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기쁨을 줘요. 왜? 우리는 환경의 일부고 하늘나라는 환경의 전부고, 전부가 살아있는 한 환경의 일부는 마땅히 전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일부는 일부로서 하나의 개그로서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도리 아닙니까?
내가 가짜로 티 나는 게 당연한 도리 아니에요? 그래야 전체 말씀 자체의 완성된 환경이 살잖아요. 그런데 교회 와서 “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시작을 이렇게 하니까 뭐 사기꾼들은 좋다고 “제대로 된 선택, 결정을 하시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자, 이제 남은 것은 뭐냐? 정말 이 환경, 눈에 보이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확장이 되었다면 그래서 그 확장된 세계의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증거 남기고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성소로 가셨잖아요? 가셨다면 그분이 가시기 전에, 십자가도 증거지만 십자가 증거 이전에 남긴 말씀과 행동들이 있을 거란 말이죠. 그것들이 이제 성경에 있으니까 그 예수님의 행동,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를 십자가라는 최종 증거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주님이 자체적으로 자기 육신 가지고 뭘 남기고 뭘 외쳤는지를 우리가 보면 되겠죠, 이렇게 연결되니까.
“너희들을 위해서 율법 지켜서 말씀 지켜서 정화할 생각하지 마라. 그딴 것은 모형이 모형한테 헛짓하는 것이다.”라고 배제 했다면, 그게 모형이라면 유일하게 모형이 아닌 예수님은 자기가 남긴 말씀과 자기를 어떻게 결부시키는가, 이것만 챙기면 되는 거죠. 어차피 우리는 모형이고 개그니까요.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겁니다.
16장 16절에 보면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와~, 율법과 선지자로 조성된 환경은 세례 요한으로 끝났고!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기 전에 이 말씀을 주셨거든요. 이 말씀이 무슨 말이냐? 억지로 인간들은 그다음부터는 천국 가려고 밀려온다는 거예요. 침입한다, 하늘나라에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거예요. 사람들은 천국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아주 긍정적인 해석으로 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8장 1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허락하지 않는 자는 못 알아듣는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내가 하는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눅8:9-10)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이 유일한 증거가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고 예언을 해도 그 예언은, ‘모형은 모형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뚜렷하게 하는 그것이 이 땅에 미리 왔던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고 특징이라는 겁니다. “하늘나라 있으니까 들어오세요.” 이게 아니고 하늘나라는 어떤 장벽으로 작동하는 거예요, 장벽으로. 우리 자신을 밀어내는 것부터 하늘나라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 놓고 하늘나라로 도피하는 모든 자들에 대해서 주께서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하늘나라로, 천국으로, 종교로 도피를 하려고 하느냐? ‘환경이 우리를 못살게 군다.’ 환경이 우리를 못살게 굴어요. 세상 자체가 우리를 못살게 굽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합니다. “네가 모형인데 모형은 모형일 뿐 그걸 왜 네가 굳이 살리려고 하느냐?” 이렇게 나와요. 네가 모형을 살리려고 하니까 내가 전하는 복음도 ‘이 복음을 믿으면 살겠죠?’라는 식으로 선입관을 가지고 교회 나오는 거예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미 시작 자체가 사기를 갖고 있는 거예요. 개별적 유닛은 주님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작을 나의 미래, 나의 괜찮은 현실이라는 노림수, 시작부터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교회에 나온 거예요.
왜, 이유가 뭔데?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주님은 말합니다. “죽으면 안 된다고? 죽음이 이 환경의 일부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죽는 것도 환경의 일부고, 그 죽음을 내가 가져갈게. 어디서? 성소에서.” 성소는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기계입니다. 그 시스템이 성소에요. 그동안 모형적인 성소 안에서 백날 짐승의 피 발라봤자 그건 모형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모형적 행위의 반복이에요.
■진짜란 뭐냐?
주님은 우리를 하나의 시간이라는 환경의 일부로 담아버려요.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육체로 육신으로 보지않고 시간의 조각으로 봐 가지고 시간을 주님이 가져가 버립니다. 하나의 시간의 조각으로, 순간 같은 시간의 조각으로 봐 가지고 그 시간을 주님이 삼켜버립니다.
이러한 사건을 최초로 보여준 게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에게 적용되는 시간 노선 말고, 유월절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유월절 그 역사로부터 새롭게 카운트하는 시간을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낮이 아니라 밤부터, 그 밤 ‘여호와의 밤’부터 시간 계산이 되는 겁니다.
여호와의 밤에 동참하고 보쌈당할 때 여호와의 밤에 작동하는 것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환경 말고 확장된 환경이 그 안에 개시가 되는 거예요. 확장된 환경입니다. 그 환경을 따라서 마지막에 실체되시는 주님이 오시고, 다 이루시고,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율법에 따라서 그 환경을 완성을 시켜버리는 겁니다.
지금 개별적 유닛이 되니까 개인은 인간적으로 내가 사라진다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하는 거예요. 나의 죽음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평소에 세상에서 내가 제일 무섭다는 뜻이에요. 내가 제일 무섭다. 어디 가도 다치지 않을까, 어디 가도 아프지 않을까, 독감 걸리지 않을까, 이 세상에서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이 내 걱정 외에는 다른 걱정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인간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이해하는데 내 것, 내 재산 날아가는 게 죽음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것, 내 자식이 죽고 내 부모가 죽고 내 배우자가 죽는 그걸 죽음의 아픈 체험이라고 보는 겁니다, 내가 공들였고, 충성했고, 투자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
히브리서 2장 14절 16절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놓아주면 뭐가 되는데? 놓아주게 되면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아브라함 자손 되게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은 없어요. 왜냐? 인간들은 ‘아브람’ 자손밖에 없어요. 아브람 자손이 아브라함 되려면 시간을 흡수하고 완성된 새로운 환경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개입될 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변하는 거예요. 천국 가는 사람은 ‘아브람’ 자손이 가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 자손이 가야 되는데 ‘아브라함’ 자손은 없습니다. 있는 것은 죽기를 무서워 벌벌 떠는 ‘아브람’ 자손, 혈육에 속한 자들 밖에 없어요.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답변은 이겁니다. “사람은 할 수 없다”. “사람은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하시거든? 그 하나님 일을 하시기 위해 내가 온 거야.”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래서 하늘나라는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는 최고의 친절이 뭐냐? 우리를 죽여주시는 거예요, 밟아서! 짓밟아서 죽여주시는 거예요. 말씀으로 죽여주시는 거예요.
“죽여줄게.” 뭘로? “언약으로 죽여줄게. 말씀으로 죽여줄게. 시작을 네가 아는 환경 말고 전체 다의 환경부터 출발하도록 내가 너를 새롭게 만들어줄게, 말씀으로!” 환경을 너로부터, 개별적 유닛, 개별 단위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결정과 선택이 얼마나 모든 것을 이루었나, 그것부터 출발하게 만들어요. 네 결정 빼고, 네 선택 빼고, 네 결정 선택 빼면 어떤 결과도 네가 생각할 권한은 없고 그냥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의 선택과 결정의 결과에요,
말씀 활동의 방해물이 말씀 지키려는 내가 방해물이 된다, 이 말입니다. 왜 주어진 결과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고 내 쪽에서 뭔가 내가 납득되는 결과를 내 속에서 일궈내려고 애를 쓰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기를 당하는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22).
이것은 전체적인 환경이 말씀으로 만들어지고요, 그 말씀이 개별적인 체험으로서 우리 안에 침투가 된다는 겁니다. 환경 전체가 압축이 되어서 우리 안에 미리 담긴다는 이야기에요. 미리 담겨버리면 예수님의 그 언약에 의해 접수가 된 그런 존재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이 말씀하고 맺고자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히브리서 9장 26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세상 끝”,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게 무슨 말이냐?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주님 안에 있는 시간으로 봐버리면 그 시간은 예수님이 다 이루었던 그 한 날의 내용을 보여주는 환경으로서 오늘날 우리의 날이 분절돼요. 하나의 날과 날의 사이를 슬라이스로 끊어내는 것처럼 매일같이 나눠지는 그런 대상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아니고 ‘개체’도 아니고 그냥 주님의 것을 나타내는 슬라이스같은 시간으로서 우리 시간을 매일 할당 받는 겁니다, 매일매일을.
우리 자신을 육체로 보지 마시고, 세포의 덩어리로 보지 마시고 시간이라고 보는 거예요, 한 날에 해당되는 시간. 그러니까 첫날이 마지막 날이고, 마지막 날이 십자가 지신 날이고, 그래서 어떤 날이든 그 모든 내용이 새로운 환경 전체 환경과 연결되어 있는 어떤 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지 내 인생을 살고 있는 건 아니란 말이죠.
‘내가 잘 살았다, 못 살았다’를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그런 나는 없고, 주님이 다루시는 시간이라는 환경의 일부로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주에 의해서 안 죽고 살아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쉽게 말해서 우리 안에 말씀의 시간이 들어있고 눈에 보이는 육신은 거기에 대한 가현체, 그냥 전달체, 운반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바로 성소가 되고, 우리 안에 말씀이, 히브리서 9장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우리 자신에게 사기는 당하지 맙시다. 어디까지나 개그니까.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지켜서 해결해 보려는 그 자체가 마귀의 사기였다는 것을 저희들 깨닫게 해주시고,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 안에 이미 완성된 채 들어와 산다는 이 환경을, 새로운 환경, 완성된 환경을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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