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우리를 하나의 시간이라는 환경의 일부로 담아버려요.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육체로 육신으로 보지않고 시간의 조각으로 봐 가지고 시간을 주님이 가져가 버립니다. 하나의 시간의 조각으로, 순간 같은 시간의 조각으로 봐 가지고 그 시간을 주님이 삼켜버립니다.
이러한 사건을 최초로 보여준 게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에게 적용되는 시간 노선 말고, 유월절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유월절 그 역사로부터 새롭게 카운트하는 시간을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낮이 아니라 밤부터, 그 밤 ‘여호와의 밤’부터 시간 계산이 되는 겁니다.
여호와의 밤에 동참하고 보쌈당할 때 여호와의 밤에 작동하는 것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환경 말고 확장된 환경이 그 안에 개시가 되는 거예요. 확장된 환경입니다. 그 환경을 따라서 마지막에 실체되시는 주님이 오시고, 다 이루시고,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율법에 따라서 그 환경을 완성을 시켜버리는 겁니다.
지금 개별적 유닛이 되니까 개인은 인간적으로 내가 사라진다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하는 거예요. 나의 죽음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평소에 세상에서 내가 제일 무섭다는 뜻이에요. 내가 제일 무섭다. 어디 가도 다치지 않을까, 어디 가도 아프지 않을까, 독감 걸리지 않을까, 이 세상에서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이 내 걱정 외에는 다른 걱정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인간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이해하는데 내 것, 내 재산 날아가는 게 죽음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것, 내 자식이 죽고 내 부모가 죽고 내 배우자가 죽는 그걸 죽음의 아픈 체험이라고 보는 겁니다, 내가 공들였고, 충성했고, 투자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
히브리서 2장 14절 16절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놓아주면 뭐가 되는데? 놓아주게 되면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아브라함 자손 되게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은 없어요. 왜냐? 인간들은 ‘아브람’ 자손밖에 없어요. 아브람 자손이 아브라함 되려면 시간을 흡수하고 완성된 새로운 환경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개입될 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변하는 거예요. 천국 가는 사람은 ‘아브람’ 자손이 가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 자손이 가야 되는데 ‘아브라함’ 자손은 없습니다. 있는 것은 죽기를 무서워 벌벌 떠는 ‘아브람’ 자손, 혈육에 속한 자들 밖에 없어요.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답변은 이겁니다. “사람은 할 수 없다”. “사람은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하시거든? 그 하나님 일을 하시기 위해 내가 온 거야.”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래서 하늘나라는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는 최고의 친절이 뭐냐? 우리를 죽여주시는 거예요, 밟아서! 짓밟아서 죽여주시는 거예요. 말씀으로 죽여주시는 거예요.
“죽여줄게.” 뭘로? “언약으로 죽여줄게. 말씀으로 죽여줄게. 시작을 네가 아는 환경 말고 전체 다의 환경부터 출발하도록 내가 너를 새롭게 만들어줄게, 말씀으로!” 환경을 너로부터, 개별적 유닛, 개별 단위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결정과 선택이 얼마나 모든 것을 이루었나, 그것부터 출발하게 만들어요. 네 결정 빼고, 네 선택 빼고, 네 결정 선택 빼면 어떤 결과도 네가 생각할 권한은 없고 그냥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의 선택과 결정의 결과에요,
말씀 활동의 방해물이 말씀 지키려는 내가 방해물이 된다, 이 말입니다. 왜 주어진 결과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고 내 쪽에서 뭔가 내가 납득되는 결과를 내 속에서 일궈내려고 애를 쓰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기를 당하는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22).
이것은 전체적인 환경이 말씀으로 만들어지고요, 그 말씀이 개별적인 체험으로서 우리 안에 침투가 된다는 겁니다. 환경 전체가 압축이 되어서 우리 안에 미리 담긴다는 이야기에요. 미리 담겨버리면 예수님의 그 언약에 의해 접수가 된 그런 존재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이 말씀하고 맺고자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히브리서 9장 26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세상 끝”,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게 무슨 말이냐?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주님 안에 있는 시간으로 봐버리면 그 시간은 예수님이 다 이루었던 그 한 날의 내용을 보여주는 환경으로서 오늘날 우리의 날이 분절돼요. 하나의 날과 날의 사이를 슬라이스로 끊어내는 것처럼 매일같이 나눠지는 그런 대상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아니고 ‘개체’도 아니고 그냥 주님의 것을 나타내는 슬라이스같은 시간으로서 우리 시간을 매일 할당 받는 겁니다, 매일매일을.
우리 자신을 육체로 보지 마시고, 세포의 덩어리로 보지 마시고 시간이라고 보는 거예요, 한 날에 해당되는 시간. 그러니까 첫날이 마지막 날이고, 마지막 날이 십자가 지신 날이고, 그래서 어떤 날이든 그 모든 내용이 새로운 환경 전체 환경과 연결되어 있는 어떤 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지 내 인생을 살고 있는 건 아니란 말이죠.
‘내가 잘 살았다, 못 살았다’를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그런 나는 없고, 주님이 다루시는 시간이라는 환경의 일부로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주에 의해서 안 죽고 살아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쉽게 말해서 우리 안에 말씀의 시간이 들어있고 눈에 보이는 육신은 거기에 대한 가현체, 그냥 전달체, 운반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바로 성소가 되고, 우리 안에 말씀이, 히브리서 9장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우리 자신에게 사기는 당하지 맙시다. 어디까지나 개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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