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계시의 내용240707누락분

아빠와 함께 2025. 3. 1. 13:26

계시의 내용 

2024년 7월 7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5:1-4

(5: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5: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5: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5: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성경을 그 자체로 이해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해되려면 ‘계시의 영’이 따로 주어져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그만큼 우리 인간은 애초부터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연약함이란‘ 무식하고 미혹받음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대제사장’을 구분짓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인간들 나름대로의 삶과 세상에 대해서 구조륽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구조에는 하나님과의 끊어짐이 없이 노력하고 애쓰면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정신으로 그 최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시작점을 자기 자신부터 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나 창세기 3:24에서는 인간은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것이 막혀 있습니다.

천국 내용에 대해서 인간은 끊어져 있습니다. 인간은 구원받을 수도, 구원에 대한 그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상에 내려진 구조는 하나님의 단절되었음을 그대로 담겨 있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한 겁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1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즉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근원적으로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이 차이점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적용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3)

여기서 육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비워있는 구조 자체를 뚫을 수 없는 겁니다. 이 빈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조성하신 구조입니다. 그 비워있는 곳은 속죄제가 채우게 됩니다. 즉 비어있는 바는 하나님에 의해서 채워지는 것이지 인간의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개인 이름이 별 의미없습니다. 그 기능으로 말해줍니다. 그의 기능은 인간의 연약함으로 그대로 드러내고 노출시키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인간들은 나름대로 연약함의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연약함입니다. 천사처럼 날지 못한데서 오는 연약함이요 양식을 늘 먹어야 사람 구실한다고 믿는 연약함입니다.

하지만 이런 물리적 연약함은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받은 광야의 시험에서 그 전모가 밝혀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배만 부르면 제대로 사람구실 할 수 있으리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반대로 인간을 짐승의 레벨까지 낮추십니다.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왕하 6:28-29)

즉 식량 떨어지면 그 어느 인간도 더는 사람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짐승이 됩니다. 전쟁이 이런 본색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자신을 너무 모릅니다. 늘 자신을 좋게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립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삼하 15:3)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짐승이지만 배부르다 싶으면 사람 행세하려고 나섭니다. 따라서 전쟁하면서 사울왕은 아말렉을 냉정하게 처리시키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점이 사무엘에게 결린 겁니다. 사울왕은 자신을 여전히 괜찮은 인간으로 포장합니다. 여유가 생기니까 사람 행세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그 바닥에는 어두움과 통하는 관문 같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한 사람이 사단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연약함은 물리적 연약함이 아니라 계시적 연약함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 계시의 연약함으로 인해 인간은 미래에 대해서 희망 잔뜩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율법이 주어진 취지로 봐서 인간은 벌써 망한 자들입니다.

‘망한다’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에 근거해서 지금 형편을 망했다고 하는 견해가 있을 수 있고 또 하나는 미래가 미리 현재에 들어와서 미래의 기준으로 봐서 망했다, 아니 망했다는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곧 미완(未完)입니다.

온전치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타고난 것이기에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각자 제 갈길을 가게 하시고 그 제자들이 남긴 그 미완의 길에 속제제물로 들어섰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대속 제물로 들어서므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비워있는 그 자리는 화목제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26)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계시의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는 곧 성도는 자기 이름을 상실하고 그 자리에 제사장 기능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즉 주님으로 채워진 자는 그저 ‘다 이루었다’의 무한 채워주심으로 완료된 모습을 나타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의 계시를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3강-히브리서 5장 1-4절(계시의 내용)240707 -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5장 1-4절입니다.

히브리서 5:1-4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여기 ‘사람’이라고 되어있고, 따로 ‘대제사장’이라는 인물을 따로 내세웁니다. 대제사장과 사람은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대제사장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그러한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구약에서 계시받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지정된 사람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특별히 지정된 사람을 오늘 본문 4절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

그런데 이 신약에 오게 되면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성도와 그리고 인간이 차이가 납니다. 성도는 인간이 아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라는 점에서 차이가 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누가 들어도 욕을 바가지로 할 만한 대담한 발언을 사도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계시를 받아?” 아무도 받지 않은 계시를 네가 뭔데 왜 받느냐, 사도바울이 그런 욕을 받았는데 오늘날 똑같이 욕설을 당해야 될 자들을 가지고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계시라는 것이 너무나 대범한 발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뭐 공부해서 아는 게 계시가 아니거든요. 하늘에서 별똥별 맞듯이 뭔가 얻어맞아야 된다 이 말이에요. 갈라디아서 1장 12절에 보면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때는 예수님한테만 주어졌다고 생각하거든요, 계시 받은 예수님, 메시아. 그런데 이 예수님에게 주어진 계시가 확장이 되면서 예수님처럼 계시받은 자들이 출몰하는 현상을 보인다는 거예요. 당연히 예수님 가신 길과 동일하게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죠.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이고 사도바울뿐만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뿐만이 아니에요. 신학교의 교재라든지 책을 보게 되면 성경에 관해 축약하고 요약된 이야기들이 가득 있어요. 신학교에서는 그걸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내용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내용을 달달 외우고, 머리로 기억하고, 그걸 야무지게 지식으로 확보한다 할지라도 따로 주님의 계시가 없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이런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또 욕 얻어먹을 짓이에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좀 하자는 거예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애쓰고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것 좀 이야기해 달라, 그래야 희망이 있지 않겠나. 계시를 준다는 말은요, 인간이 희망을 갖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거예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을 희망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에요. 얼마나 계시를 안 받았으면 그런 상식선에서 그걸 계속 붙들고 있겠습니까?

에베소서 1장 17절에 보면, 이런 성경 내용 말고 계시가 따로 주어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 계시의 영이죠,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부르심의 소망이 주어졌음을 너희들이 깨닫게 함이라. 계시의 영, 성령이 따로 또 주어져야 돼요. 그게 또 주어져야 한다고요. 성경만 주면 안 되고 계시의 영도 같이 주어져야 돼요. 사도바울 때 교인들 뭐 믿는다는 사람이 한두 명이겠습니까? 요새도 많은데 그때도 굉장히 많았겠죠.

많을 때 사도바울이 뭘 점검하느냐면 갈라디아서 3장 2절에 나오는 그 사실을 가지고 점검해요.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어떻게 육체로 마치겠느냐. 사도바울은 상대가 성도라고,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나올 때 그 사람의 모든 마감재, 그 사람의 모든 행동과 말의 끝부분을 주시합니다. 그것이 자기를 집어넣는……, 자기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자기의 행함을 계속 살리고 있다는 뜻이에요. 자기 행함을 끄집어내는 것과 연관해서 이야기를 하는지, 자기 행함을 거부하고 이야기를 하는지를 사도바울이 판단하는 거예요.

“뭐 성령 받았다고? 성령 받은 것이 시작은 성령인데 끝은 왜 율법의 행위냐? 어떻게 행함으로 끝이 나냐? 그게 무슨 성도냐? 그게 무슨 계시 받은 거냐, 네 본성이지.” 따로 추가적으로 계시받은 게 아니에요. 타고 난 인간의 본성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살려보고자 하는 분투 노력이었죠. 애씀이었고 결사적으로 사투를 벌인 거예요.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과연 너 자신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서 사투하고 애쓸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너를 몰라.” 계시의 영을 받지 않았으니까 본인부터도 모르는 거예요. 오늘 히브리서 5장에서 대제사장과 사람을 따로 구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모든 시작을 자신의 있음, 자신을 집어넣어서 시작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자신을 집어넣어요.

자기 자신을 집어넣으니까 계시가 올 리가 있습니까? 자기가 벌써 일 시작했는데요. 하늘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구조가 달라서 그래요. 오늘 이야기는 그 이야기입니다. 네가 존재하는 구조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안 받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제사장을 주신 것은 계시를 받지 않은 일반 인간들이 이렇게 만들어내는 구조와 달라서 그래요. 여기 오늘 본문 5장 1절에 보면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했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을 율법을 주셔서 만든 그 구조는 하나님과 인간이 단절되어 있다는 것에 비중을 두고 거기에 시선을 모으는 구조에요. 끊어졌다는 것. 하나님과 인간이 끊어졌다는 것. 끊어졌으니까 연락이 올 리가 없죠.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생명 나무와 선악과 구조가 끊어졌잖아요. 이미 끊어진 거예요. 끊어졌으니까 인간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꾸역꾸역 모든 시작을 본인을 개입시켜 시작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오늘 본문 5장 2절에 ‘연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사장이 연약하다는 거예요. 연약하다는 그 말의 내용이 뭐냐? 2절에 ‘무식하고 미혹한 자’라고 되어있어요. 무식하고 미혹한 자. 몰라도 더럽게 모르는 거예요, 몰라도.

모르니까 맨날 미혹 받는 거예요. 뭘 모르는데요? 본인을 몰라요. 끊어졌다는 사실을 도통 인정할 생각을 안 해요. 무식한 데다가 고집까지 세다고요, 무식한 데다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규정 했습니다. 인간은 연약하다. 온전치 못하다는 거예요. 온전치 못하다고 이렇게 성경에서 하니까 사람들은 그걸 물리적으로 온전치 못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모든 인간이 그렇게 생각해요.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님 시험할 때에 인간들의 물리적으로 약하고, 물리적으로 모자라고, 물리적으로 신처럼 되지 못한다는 그런 인식부터 인간이 갖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일부러 성령께서 예수님을 40일 동안 굶게 했습니다. 40일동안 예수님을 굶게 했어요.

육체적, 물리적으로 연약함에 쌓이게 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사람들은 높은 곳에 가면 무서워해요. 높은 곳에 있으면 덜덜 떱니다. ‘떨어지면 나 죽어.’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냐면 누가 떨어질 때 ‘천사가 와서 발을 딱 받쳐주면 나 온전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 시작한 아이디어에서 펼쳐진 인간 구조입니다. 이 세상을 보는 구조에요. 그 구조 안에 인간은 거기 놓여 갇혀 살고 있습니다.

악마는 인간의 물리적인 약함, 한계성, 그것 자체를 인간에게 자꾸 부각을 시켜요. “너는 온전치 못하니까 그냥 연약함을 버텨라. 버티다 보면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을 거야. 너는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뭐 신께서 마저 채워줄 거야.” 이런 식으로 마귀가 계속 부추겨서 메시아 오기를, 하나님이 도와주기를 원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인간은요, 하나님과 끊어져 있습니다. 도와주는 게 아니고, 모자람을 채워주는 게 아니고 이미 끊어져 버렸다니까요? 이건 계시가 안 오면 몰라요. 계시가 오지 않으니까 마귀의 영이 자꾸 우리한테 부추기고, 격려하고, 독려해요. “열심히 해봐라. 뭐 될 거야. 천당 갈 거야. 천국 갈 거야.” 자꾸 그런 식으로 마귀가 외부에서 우리를 부추깁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예수님이 그러한 육체적인 연약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건 물리적, 육체적 연약이 아니라 계시적으로 연약한 거예요, 계시적으로. 물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약해도 괜찮아요. 약해도 괜찮은데…, 그거 뭐 힘 세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거든요. 악마가 마지막에 제시하는 것이, ‘나에게 절하고 이 모든 권세를 우리 함께 누리자’ 이렇게 되어있어요.

권세가 모자라서 연약한 게 아닙니다. 마귀가 감추고 있는 마귀의 라인, 마귀가 그 라인을 넘어서 인간이 못 보게 하는 거예요. 그게 무식한 거고 그게 미혹된 거예요. 마귀는 아는데 자기가 아는 것을 감추어서 인간은 못 보게 하는 겁니다. 마귀가 예수님 만날 때 제일 먼저 알았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죠. 우리를 멸하러 왔죠?” 알았지만 주께서 “그 입 안 다물어? 입 다물어. 난 너희들 구원하러 온 게 아니야.”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가 아니면 귀신 나와도 구원 못 받고, 병 고쳐도 구원 못 받고, 물 위를 걸어도 구원 못 받아요. 왜? 그런 것은 물리적인 연약함으로 마감되기 때문에 그래요, 물리적인 연약함으로. 물리적으로 연약하니까 ‘돈 좀 있었으면 좋겠다, 천사처럼 날아다녔으면 좋겠다, 안 아프면 좋겠다, 세상 권세를 좀 주무르면 좋겠다.’ 이게 본인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마귀가 그런 장난감을 던져주고 자꾸 놀라고 하는 이유가 ‘네가 막혀있다, 끊어져 있다는 점에 대해 제발 몰라라. 이건 마귀와 주님만 알고 있지 넌 알면 안 돼.’ 하고 악마가 계속해서 방어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과학의 발전과 의학의 발전 외에는 다른 낙이 없고 다른 희망이 없어요.

초등학교 애들에게 선행학습 시켜서 고등학교 수학까지 7개월 만에 다 떼게 하는 거, 그거 왜 합니까? 학원에서. 의대 준비반이거든요, 의대준비반. 나한테 모자람, 미완의 것, 완성되지 못한 미진한 것, 미완을 의사 돼서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 참, 기가 찰 일이지요. 그게 바로 중독된 세계에요. 세상 것으로, 마귀가 준 장난감으로 중독된 세계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 해요. 한 사람이 미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집단적으로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어요. 미친 사람은 가끔 보지만 집단적으로 미친 것은 늘 봐요. 정치꾼들이 그렇고, 축구 보는 사람들이 그렇고, 종교, 교회 가면 또 그런 사람들 많아요. 인간은 사적으로는 미치지 않지만 집단적으로 이미 미쳐있는 인간들이에요. 노동시위현장이 그래요. “딴~ 따 단 따 단 따 단~!” 그리고 여름에 도로의 폭주족들, 아주 미쳐있어요. 지구대에 백날 신고해도 소용없어요.

속죄제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 구조가 끊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성소나 성전 구조는 중앙이 비어있어요. 오늘 설교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비어있어요. 인간입장에서 진공 상태에 있어요. 비어있다고요. 거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비어있는 게 율법의 정수에요. 핵심이에요.

사다리 타고 올라갔는데 없어요. 끊어졌어요. 비어있어요. 길도 없어요. 구원받는 길은 없어요. 정말 없습니다. 그래서 애들 노래도 구원에 대해서는 뭘 하면 된다, 가 아니라 아니요, 로 이야기해요. “돈으로도 안 돼요, 뭘 해도 안 돼요, 안 돼요, 안돼요…”

끝에 있는 가사가 문제에요. 믿음으로 된다는데 믿음으로도 안 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인간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시작점에 자기를 내세우기 때문에, 이 내세우는 것이 인간 구조이고 하나님의 구조는 비어있는 것이 시작점이 돼요, 비어있는 것.

비어있는 것이 시작점이기 때문에 마지막 끝은 모든 것을 비워내는 거예요. 한 사람도 살리지 않는 것이 마지막입니다. 단 한 사람도 살아 있지 않은 상태가, 주께서 일을 툴툴 터는 게 마감이에요. 계시의 영을 받지 않으면 이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비어있다는 이 예수님의 사실을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 알려줬습니다. 알려주면서 너희들은 비어있다, 하지만 비어있어야만 채워질 것이 있는데 그 채워지는 것은 뭐냐? 속죄제에요. 그게 오늘 본문 히브리서 5장에 나옵니다. 속죄하는 제사.

속죄하는 제사는, 인간이 속죄하라는 말이 아니고 인간이 연약해서, 무식하고 미혹되서 인간의 속죄제는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얼마나 무식하고, 연약하고, 미혹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들춰내기 위해서거든요.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받는 자가 맞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예요.

그러면 인간은 시작점에 끼어들지 못해요. 하나님은 첫 끗발이 개 끗발 되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요. 첫 번째 되는 것을 빼버리면 마지막도 같이 훅 하고 빠져야 돼요. 뭐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그건 마귀가 이야기 한 거고요. 그건 욥기에서 빌닷이 이야기 한 거예요. 그건 무식한 욥의 친구가 이야기 한 거예요, 욥의 친구가. 마귀는 그런 계시를 우리에게 준 거예요.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여러분 집에 또 그거 액자로 해 놓은 집 없죠?

시작점에 있는 인간을 족집게로 집어내서 허물어뜨리는 그 일을 열두 제자부터 시작한 거예요. 열두 제자 몽땅 다 족집게로 끄집어내는 겁니다. 끄집어내야 빈자리 생기고 그 빈 자리에 예수님 본인이 열두 제자의 자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뭐하러? 속죄 제물 되기 위해서, 화목제물 되기 위해서 들어간 거예요. 이게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열두 제자, 그 카드 가지고 카드 쌓기 하다가 중심되는 카드 하나 뽑아버리면 중력에 의해서 와장창 다 무너지잖아요, 그 하나 뺀 게 뭐냐? 바로 가룟 유다를 뺀 거예요. 가룟 유다에게 이야기한 것이 모든 인간을 대변해서, 샘플로 해서 ’인간은 이렇다‘고 이야기 한 것이 바로 가롯 유다에게 이야기 한 겁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을 뻔했다. 이게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거 발견하면 유레카에요.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C 287년경-212년경)라는 고대 과학자가 목욕탕에 있다가 금과 금 아닌 것의 비중 차이가 물의 부력 차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됐어! 왕이 준 숙제 풀었어.” 하고 너무 좋아서 벌거벗고 튀어나온 거예요. 그때 “유레카!” 나는 알았다는 말이죠.

내가 가룟 유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 이게 바로 계시의 영이에요, 이게. 이래야 십자가가 의미가 있거든요, 십자가가. 이래야 율법이 행함으로 시작하더라도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 말이죠. 성령으로 시작한 것은 율법의 행위로 돌아설 수가 없어요.

인간은 이게 안 되니까 빈자리가 이게 미완,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이 껄끄러워 자꾸 뭘 채워 넣는데 뭘로 채우는가? 친구와, 가족과, 친지, 주변의 환경을 앞장세워 자기 속에 있는 빈자리를 메우려고 시도합니다. 친구와 가족과 친지에 의해 구성된 자아는 그다음부터는 점점 더 세상 것으로 채우려고 하죠. 자기의 욕망의 결핍을 채우는 겁니다.

이건 한마디로 말해 중독이에요. 세상 것을 더 가지지 못해 환장한, 마약의 효과가 떨어질 때 나오는 마약 증세를 모든 인간이 다 발휘하고 있으니 하나가 미친 것은 드물지만 집단이 미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세상 것으로 빈자리를 메꾸려고 하는 이 무식하고, 미혹하고, 연약한 것.

하나님의 구약의 제사장 방법은 이렇습니다. 마약에 찌든 형사로 하여금 마약의 커넥션을 수사하게 만드는 일이에요. 형사가 멀쩡해서 수사하는 게 아니고 본인부터가 마약에 쩔어서, 마약에 찌든 대제사장, 우리가 왜 망해야 마땅한가의 그 수사를 대제사장에게 의뢰하는 거예요. 맡기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본인도 연약에 쌓여 있는 제사장, 내가 드린 속죄제가 온전한 속죄제가 아니라는 사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속죄제, 내가 시작점으로 개입될 때 그것은 이미 망한 겁니다. 제사를 통해서 인간은 망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거예요. 그래야 속죄제가 의미가 사니까요.

망하는 게 두 종류의 양상이 있어요. 하나는 과거에 기준해서 망했다는 것, 이건 일반 인간들이 그렇게 알고 있어요. “망했어, 망했어.” 하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재산, 과거에 있었던 몸 건강한 것, 행복했던 시절, 지금은 폭삭 망했다는 것은 과거에 근거해서 망했다는 거예요. 이건 마귀 세계에서 세상에 중독된 거예요.

반면에 미래에 근거했을 때 망했다는 그 규정이 따로 있어요. 미래의 것이 미리 왔을 때 과거의 것에 의해 내가 망했다는 게 망한 것이 아니고 이게 복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사람은, 미래의 기준이 먼저 그 사람 속에 들어온 것을 가지고 계시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미래의 기준이요.

그 미래의 기준에 대해서 마태복음 3장, 세례 요한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천국에 가까이 왔다고 할 때, 설명을 해놨어요. 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3장 7절에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 임박한 진노, 가까이 왔다 천국. 가까이 온 천국, 임박한 진노, ‘임박’과 ‘가깝다’는 같은 말을 빼 버리면 남는 것은 천국=진노의 날. 이게 바로 선지자 요엘에 예언된 거예요. 멸망의 날이 왔다는 거예요, 멸망의 날이 왔다.

‘너희들 망했어.’ 이 뜻이에요. 처음부터 망했는데 망했다는 것을 근거 있게 제시하는 그 순간들이 드디어 찾아온 거예요. 안 망한 게 아니고 이미 망했는데 그동안 몰랐어요. 주님이 오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주님이 오고 난 뒤에는 ‘정말 망했구나, 망한 거 맞구나, 끊어진 게 맞구나. 생명 나무 있는 곳과 선악을 따먹은 우리하고 끊어지고 단절된 게 맞구나. 비어있는 게 맞구나.’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그 세례 요한의 외침을 누가 인수받는가? 예수님이 인수받아서 세례 요한은 외치는 것으로 끝이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같이 외치면서 그 빈 내용을 자기를 속죄 제물로 그 안을 채우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필요한데? 바로 망해야 될 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창으로 찔러야 되고 못을 박아야 되는 겁니다. 예수 같은 당신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는 발언들을 인간들 속에서 쏟아내게 만드는 거예요, 인간들 속에서.

울산 강의하면서 제가 재미난 이야기를 했어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너무나 큰 힌트를 준 자그마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 아내가 염색을 해줬는데 염색을 하고 머리를 감으려고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마침 점심시간이 돼서 점심은 내가 알아서 먹어볼까, 하고 설치다가 염색약을 싱크대에 묻혔어요. 묻혔을 때 제 아내가 이런 이야기 했습니다. ‘당신이 내 말 듣고 내가 해 준 점심 그냥 먹으면 되지, 당신이 점심 한다고 안 했으면 이런 염색약 묻힐 일이 없었지 않겠냐’는 거예요. 유레카에요, 유레카!

비로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일거에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점심을 먹는 이유는 배가 고파서예요. 그러면 처음부터 배가 안 고팠으면 됐어요. 배가 고프지 않았으면 점심 먹으려고 얼쩡대서 염색약이 싱크대에 묻는 일은 없을 거라 이 말이죠.

그러면 왜 배가 고프냐? 그건 안 태어났으면 이런 일이 없다니까요. 내가 안 태어났으면 싱크대에 염색약 묻힐 일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은 내가 안 태어나야 된다는 생각은 못 하고 이왕 태어난 거 염색이나 하자, 이게 지금 인간이 시작점부터가 잘 못 된 거예요, 시작점부터가. 여기 생활 팁으로 염색약은요, 어떤 것으로도 지워지지 않는데 락스로 지워져요. 이것은 알고 싶다. 락스로만 지워져요.

주님께서 인간들로 하여금 새로운 구조를 만드십니다.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데 제사장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도 제사 드리는 이 자체가 내 율법의 행함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만들어요. 제사장으로 하여금. 오늘 본문에 보면 제사장 본인이 남을 위해서는 속죄제를 드리는 동시에 본인을 위한 속죄제도 드려야 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떤 구조가 새롭게 만들어지느냐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끊어져 있다는 구조를 지금 연약한 인간을 통해 구성하게 되는 거예요. 주께서 구성하는 거예요. 이런 겁니다. 인간 속에는 본인이 알 수 없는 것, 어떤 검은 점 같은 것이 있어요. 물리학에서 ‘엘리스 링(Alice ring)’이라는 것이 있어요. 자석을 쪼개면 쪼갠 조각들이 전부 다 자석이 돼요. 쪼개도 또 쪼개도 북극(N) 남극(S)이 다 생긴다고요. 그러나 더 쪼개고 쪼개나가면 북극도 아니고 남극도 아니고 단극이 생기는 그 지점이 있는데 그 지점은 그냥 쪼갤 수 없는 검은 점이에요.

이상한 검은 점. 자석이 갖고 있는 모든 특이성이 날아가 버리고 물질이 아니고 반물질로 들어서는 관문같은 점, 특이점(singularity)이 거기에 있어요. 그런데 이게 인간에게도 있어요. 그게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는 악마와의 관문이에요. 사탄과의 관문입니다. 일부러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제자들 속에 집어넣었어요. 그래서 열두 제자의 체계가 다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물질이 아니고 영적인 것, 반 물질적인 것, 어떤 물질의 원칙도,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세상 살기의 어떤 원칙도 전혀 먹히지 않는 특이점 같은 것이 인간속에 있습니다. 악마의 시그널이 들어오는 구멍이에요. 악마로부터 신호가 수신되는 그것이 모든 인간 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들어있는 그 검은 점, 구멍을 주님께서는 인간을 샘플로 대제사장에게 옮겨서 거기서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거예요.

새로운 구조를 만들면 그 특징은 뭐냐? 이름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름이 전혀 필요치 않아요. 내 개인의 이름이 필요치 않아요. 뭐냐? 그 기능, 직분이 중요해요.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자기 이름을 야곱이라 한다는 것은 나만이 야곱이에요. 나만이 야곱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되어버리면 이스라엘은 야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특이점이에요. 야곱속에 집어넣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기능이 이스라엘이에요. 특이점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야곱이 손 못 댑니다. 인간의 욕망을 인간이 손 못 대요. 그래서 인간의 발걸음, 인간의 모든 행동은 누군가 시키는 대로 하지 내가 자유의지를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게 신비에요.

그런데 마귀는 뭘 로 바꿨느냐? 인간의 연약함을 물리적 연약함으로 바꿨어요, 물리적 연약함. 아람나라가 북 이스라엘을 포위 하니까 어떤 난리가 났어요. 열왕기하 6장 28, 29절에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이것 때문에 왕한테 고민거리를 내놓은 거예요. 인간은 식량이 없으면 짐승이 되는 거예요. 식량이 없으면 인간은 곧장 짐승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짐승인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이 만든 사태가 전쟁이라는 거예요. 점잖고, 착하고, 훌륭하고, 이 모든 것이 전쟁터에 나가면 짐승과 짐승이 돼요.

짐승의 특징은 무성(無性)의 존재, 무성의 기계가 돼요. 인간은 기계에요. 양식이 있으니 사람처럼 보이지요. 양식 빼버리세요. 개하고 사람하고 차이점은 전혀 없습니다. 개 대통령이 사람 대통령이에요. 인간은 바로 이것까지 알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뭔가 그럴싸한 게 있을 때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자비로워요.

그러나 양식 없으면, 식량 바닥나면 그냥 물질이 됩니다. 사물이 되고 기계가 돼요. 그게 바로 우리의 근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짐승이면서 아닌 척 하면서 고상한 선비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옛날 우리 조상들은 남편이 선비면 그 집안 아내는 죽어라, 고생하는 거예요. 일은 여자가 하고 글 보는 것은 남자가 한다는 거예요. 특히 예천 같은 곳의 촌에서. 이게 뭐예요? 타인의 잉여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 아닙니까? 윤리, 도덕 찾고 예술 찾는 것 ‘배부르구나!’ 배가 불러요.

뱀이 저주받을 때 그 내용이 뭐냐? 땅과 가장 근접하게 밀착해서 붙어있어요. 땅에서 못 떨어져요. 살아서도 땅에서 못 떨어지고 죽어서도 땅으로 환원되고 땅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땅이 저주받았으면 그 위에서 살아도 저주받은 존재예요. 이게 인간입니다. 식량 없으면 못사니까 이것은 선비라고 할 수가 없지요. 뱀과 인간과의 차이점이 없지요.

그래서 옛날의 모든 인간들은 땅에서 빌어먹고 살라는 뜻으로 그 이름이 땅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인의 성에 보면 산본(山本), 산 가운데 있다. 야마모토입니다. 그 다음에 강 입구에 있다(江口), 에구찌. 촌 중앙에 있다(中村), 나카무라. 숲에 거주한다(林), 하야시. 주위에 밭이 있는 산이 있다(山下), 야마시타. 서쪽에 촌이 있다(西村), 니시므라. 밭 가운데 있다(田中), 다나까. 이런 식으로 일본의 성씨가 10만개 정도 있는 거예요.

그만큼 이름을 지을 때 어쨌든 간에 ‘땅을 벗어나면 너는 죽는다’는 것을 부모가 의식해서 하는 거예요. 이름이 있는게 문제에요. 이름이 있다는 것은 각자가 나름대로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자기 이름을 갖는 순간 땅과 분리된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면서 자기 이름 붙들고 살아가는 이러한 위작(가짜), 자기 조작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진짜로는 땅에서 못 벗어나는데 마치 땅과 따로 내 이름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마련된 것처럼 스스로 착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본질은 ‘살아야 돼’ 그것만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주실 때 역사로 계시를 주셨습니다.

사무엘상 15장. 사무엘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할 때가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3절에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남녀, 소아, 어린이죠, 그리고 젖먹는 아이까지 다 진멸, 죽이라고 이스라엘에게 명령했습니다. 막상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에 사울 왕이 과연 그렇게 했습니까? 그렇게 못합니다. 못해요. 왜? 스스로 짐승되기 싫어서.

‘그래도 인간인데 불쌍히 여겨야지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느냐? 우리가 거둬서 살려야지.’ 짐승과 마찬가지인데 마치 아무 답도 없는, 미래도 보장되지 않고 이미 망했는데, 이미 끊어졌는데 끊어졌다는 생각을 못 하고 뭔가 이 땅에서 사람다운 사람처럼 살아보려는 의도를 주께서 아시고 아말렉을 보내서 네 손으로 과감하게 다 진멸하라는 지시를 했을 때 인간은 차마 그 지시에 따르지를 못합니다.

뭐가 문제냐?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이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어요.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아, 우리가 그동안 볼 것을 못 본 거예요. 볼 것을 못 보는 소경이었던 거예요. 제가 오늘 설교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계시의 영을 받아야 돼요, 계시의 영을. 계시의 영을 받은 것을 어떻게 아느냐? ‘우리는 벌써 태어날 때부터 진멸의 대상입니다.’ 그걸 굉장히 기쁘게 인정하는 거예요. 고개 끄덕이면서.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고 제사장의 직분으로 교체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제사장이 되는 것처럼 이것이 확장되면 신약성경의 모든 성도들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지자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의 특징은 사적인 개인의 이름은 아무짝도 소용이 없어요. 나카무라? 이시다? 필요 없습니다. 야마구찌? 필요 없어요. 내 이름을 주님께서는 빼버리고 거기에 기능을 집어 넣어주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기능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기능이에요. 내 이름이 필요 없고 주의 이름만 우리에게 작용을 하고 작동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교체하는 작업이 필요하거든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제사장이 되셨어요. 대제사장은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 의하면 교체하는 겁니다. 연약한 자가 드려야 될 제물, 제사, 속죄제, 그 속죄제 자리에 제자들이 떠나가고 난 뒤에 예수님 혼자 그 속죄제 자리에 자신이 어린양으로 들어가요.

예수님이 거기에 들어갔다는 말은 이겁니다. 더 이상 이제는 미완의 시절은 끝났다. 예수님 자신이, 죄 없는 본인이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미완의 시대가 아니고 이미 완성, 완료의 시대에요. 미완이 전혀 없어요. 모자람이 전혀 없어요. 그 자체가 완성입니다. 그걸 성도는 계시로 받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로 이미 화목제물, 속죄 제물 끝났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계시를 줬잖아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받은 계시가 사도바울의 편지 속에 녹아져 있다는 말이지요.

녹아져 있는 것이 사도바울의 삶으로 다 들어오는 거예요. 지식이 아니라 몸 안에 허락도 없이 그냥, 계시의 영을 받은,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이루었던 그 속죄제물, 화목제물이 자기 내부까지 이미 완전히 들어와 버린 거예요. 오늘날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 오늘날 성령 받은, 계시의 영을 받은 성도도 똑같아요. 이미 그 계시가 들어왔다는 말이지요.

뭐가 들어왔느냐, 뭐가? 뭐가 들어왔느냐, 그 들어온 것이 뭐냐, 그 말이지요. 그것은 바로 자기의 탄생과 예수님의 죽음이 섞여서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예를 들면, 6월 17일. 어떤 범인이 마약을 숨겼는데 그 금액이 4백억이 되는데 그 비밀번호가 불완전해요. 앞자리 번호도 있고 뒷자리 번호도 있는데 그걸 몰랐어요.

앞 자리 번호는 뭐냐? 보험금을 받는 그 여자의 생일, 6월 17일. 0617입니다. 자세한 것은 <커넥션> 마지막 회를 보세요. 0617. 그 뒤 네 자리 번호는 뭐냐? 친구의 날. 주께서 친구 되셔서 십자가 지심으로서 예수님의 몸이 되는, 여럿이 예수님의 몸이 되는, 친구가 되는 그 십자가 지신 그 날, 합해서 8글자 치게 되면 4백억이 문제입니까, 4백억이! 천국의 비밀번호인데, 천국의 비밀번호!

죄 있는 나는 죽고 주께서 십자가 다 이룬 것과 결합이 되는 그것이 천국의 비밀번호입니다. 일단 여러분의 생일이 있잖아요. 앞자리에 주민번호 치세요. 그리고 뒷자리는 십자가를 쳐야 되는데 쳐서 뭘 하면 땡이고요, 이미 비밀번호로서 우리가 작동돼야 돼요. 비밀번호로서.

그러면 어떻게 작동되느냐? 시편 137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37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이미 이스라엘은 세상에 포로 잡혀 있습니다. 포로 잡혔다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 바깥으로 못 벗어납니다.

그 때 사로잡은 자가 뭐라고 하느냐? “야, 너 찬송가 한번 불러봐라. 찬송 좀 불러봐” 하고 조롱하고 놀리고 있습니다. “너, 계시의 영을 받았다면서? 성령 받았다면서! 너 예수님에 대해서 알겠네. 이야기해 봐.” 이런 식으로 조롱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은 비어있는 게 없어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끊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는 노력 여하에 따라서 구원도 되고 게으르면 지옥으로 탈락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항상 미완이에요. 모자라요. 결핍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교회 다녀도 불안불안해요. 왜? 모자라니까.

그런데 성령의 특징은 뭐냐? 무한리필이에요, 무한리필. 무한리필시간이 있습니다.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무한리필이에요. 봉무공원에 샤브샤브 무한리필집이 있는데요. 고기와 함께 다른 것도 무한리필 주십니다. 단 80분 동안. 식당 들어가면서 계산서에 시간이 딱 기록되어 있고, 고기 가지고 왔다갔다 하면서 시계 잘 봐야 돼요. 마지막 수정과로 마무리하는 시간이 언제인지를. 80분 넘으면 돈 물어내야 합니다.

주께서 성령을 무한리필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up and down’, ‘나는 구원 받았다’ 하고 세상에 나가면 다시 우리는 ‘이게 뭐야? 내 인생이 이 모양이야? 왜 내 뜻대로 안 돼?’ 이 ‘up and down’, 이 굴곡이 계속되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거기서 뭐가 생산되는가? 예수님의 계시, 예수님의 살아 있음, 죄인의 의인으로 바꿔주신,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계속해서 생산되고, 생산되고 뽑혀 나오는 거예요.

시편 137편에서 이스라엘은 조롱받고 있습니다. “노래 해봐!” <바벨론 강가에서> 보니 엠이 불렀던 4인조 밴드가 부른 팝송이 있지요. 그런데 시편 126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꿈꾼다, 이게 뭐냐? 계시받은 자가 “내가 구원받은 것은 주님의 계시의 영의 솜씨고 능력이지 제가는 못 빠져나왔습니다.”라는 것을 무한리필 반복하면서 매일같이 경험케 하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자기증거 아니에요. 예수님 증거하라고 예수님 제사장 기능을 하게 하신 겁니다.

계시라는 것은 아주 대범하고도 시건방지고 모험적인 발언이에요. 무슨 뜻이냐? 계시 받았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하나님 뜻은. 계시로 충분해요. 네 인생을 어떻게 꼴아박든지 관계없어요. 계시를 받은 게 뭐냐?

마지막 때 심판 날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그 구조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예수님이라는 어린양 구조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제 끊어진 게 아니고 예수님과 그냥 한통속이 되어 있는 구조, 그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뭐가 보이는가? 우리 자신이 가룟유다같은 존재인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죄는 뭐냐? 죄란 어떻게 시작되는가? 내가 나를 살리려 할 때 비로소 죄는 시작이 돼요. 내가 나를 살리려 할 때. 그러나 우리는 나를 살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받은 계시, 십자가 계시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연락이 안 됐습니다. 우리 삶의 구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누군지 몰랐고 세상에 중독되어서 살아갔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영이 오니 비로소 우리가 처음부터 저주받은 존재였음을 이제야 발견하는 그 기쁨이 매일같이 날마다 반복되고 무한리필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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