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배설물
2025년 2월 1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10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배설물로 가득 넘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8-9)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옵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는 인간에 의해서 살해사건이 일어나야지만 비로소 발생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거룩은 모든 인간이 제조한 의를 거부함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자체적인 의를 생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저주로 보답하신다는 말입니다. 저영원한 저주가 인간에게서 쉴새없이 나오는 이유는 인간의 육신의 성경 때문입니다. 이 육신은 대대로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서 내려온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린아이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성인 남녀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말은 인간은 점차 발전한다는 뜻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은 커갈수록 더욱더 더러워진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더러움이 놀랍게도 완전한 거룩과 완벽한 의로움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5:20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소개하십니다. 그리고 ‘천국에 못들어감’도 소개하십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못들어가면 갈 수 있는 남은 곳은 어디일까요? 지옥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상 삶이란 최종적인 목표점을 위한 예비단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천국’과 ‘지옥’이 인간의 존재보다 선행(先行)하는 개념이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의 존재는 천국과 지옥의 분류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옥가야만 하는 자들은 복음이 들어오면 뱉아버립니다. 자기하고 안 맞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본인은 어떤 삶을 원하는 겁니까? 그들은 자기 삶을 자기가 관리하겠다는 겁니다. 이미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아니까 그것으로 온전한 선을 구축한 삶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미 시행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욥입니다. 욥은 가정이 화목하고 건강하며 부유한 사람입니다. 욥은 이러한 축복이 자신의 선행과 온전함에 기초하고 있다고 믿었던 겁니다. 욥처럼 생각한 사람이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모든 것이 무너지니까 다음과 같이 남편에게 제안합니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욥이 몰랐던 바는,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이 자기 육신의 기초해서 볼 때 복이 아니라 실은 화(禍)라는 사실입니다. 즉 자신의 육신에 문제있음을 몰랐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을 통해서 건강과 재산과 가정 화목을 걷어내니 욥은 남은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분출하게 됩니다.
바로 이 육신, ‘죄 있는 육신’을 예수님을 품고 오셨습니다. 스스로 하나님됨을 걷어내고 말입니다. 이럴 때 나타난 결과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입니다.(마 27:46) 즉 인간은 자신에게 뭐가 문제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선과 악으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거룩을 생산하면 되지 않느냐로 버팁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잘못된 세계관입니다. 이미 선악의식으로 무장된 상태에서 선악지식에서 기초한 ‘거룩’에서는 다른 거룩을 추호도 생각못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인간을 앞장 세워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이건 악이다. 악한 것은 악이다. 이건 선이다. 선한 것이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더러운 것이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은 어떻게 마련되는 겁니까? 민수기 35:11-21에 보면, ‘도피성’에 관해서 나옵니다. 도피성이란 ‘살아있지만 실은 죽은 자’와 ‘죽어 있지만 실은 살아 있는’가 같이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입니다.
우연이던 필연이던 어쨌든 타인을 죽인 자는 그 사회에서 살해 대상이 됩니다. 죽어야 될 자로 낙인찍힙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는 자들입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나는 그 장소가 타지역과는 달리 ‘격리장소’가 됩니다. 이 격리됨이 곧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차별됨, 구별됨, 따로 격리됨으로 발생하는 겁니다. 이승과 저장의 중간지역이며 제대로 된 생과 사의 갈림길입니다. 살인의 표적이 되는 이 인물은 우연이 일어난 살인 사건에 말려들어간 겁니다. 이것은 ‘거룩’이란 인간 손에서 점차 만들어져야하는 동사 개념이 아니라 이미 확정 난 선행하는 명사 개념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육신이 품은 죄악된 근원 성격을 충분히 드러내십니다. 악마를 통해서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육신을 기꺼이 즐겁게 포기하도록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전체는 그 줄거리를 보여줍니다.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그리고 사도는 말합니다. “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고후 5:8) 이것은 덮쳐진 사랑에 미쳐야 가능한 일입니다.(고후 5:13) 이제 기존의 육신말고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런 사람은 다음과 같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 5:19) 끝으로 중요한 것은 고린도후서 5:21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된 자가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혹은 ‘하나님의 거룩’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맞쳐서 조정해내가시는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육신을 갖고 아직 세상에 있는 한 악마에게 속고 있는 사실을 알고 그 사실을 즐기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만 살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상처를 발사하는 총기 되기 위해서 살려주심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4강-히브리서 10장 10절(거룩한 배설물)250216-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10절입니다.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예수님 없이 거룩을 얻겠다는 그것을 전제로 깔고,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거룩 말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원하시는 거룩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발생 되는 거룩, 그 거룩만을 하나님은 받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을 드리심’ 그 거룩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 여기서 어떤 큰 충돌이 일어나요. 거룩을 주시면 그냥 곱게 받으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 거룩, 주의 몸을 드리실 때 거기서 인간은 어떤 식으로 가담을 했느냐?
“당신은 아니야.”라고 가위표를 쳤죠. “당신은 하나님 쪽 사람 아니야. 우리가 하나님 쪽 사람이야.” 하고 예수님을 거부했던 그 일, 그 일이 뭉쳐진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거룩을 우리 인간들이 판정을 내렸는데 “그것은 거룩이 아니다.”라고 퇴출시켰잖아요?
그게 십자가 사건인데, 인간이 퇴출한 그것,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유일한 거룩이 바로 그 거룩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거룩을 퇴출하는 그 일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들이 바리새인인데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어떤 식으로 거룩이라는 것을 장만했는지가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 갈 곳은 어디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네가 어떻게 사는가’는 문제 삼지 않아요. ‘네가 지금 이 세상에서 어느 나라에서 사는가’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제 삼는 것은 이거예요. ‘죽고 난 뒤에 너의 영원한 자리가 고정되는데, 확정이 되는데 그 확정된 자리가 천국이 아니라면 그럼 어디냐?’ 지옥이죠.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천국이 있음을 거부하는 자가 아니에요. 천국을 사모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천국은 사모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룩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자기들을 거룩으로 몰아넣기 위해서 생각한 거룩은 자기가 만들어 낸 거룩이에요. 자기가 선악의 의식을 가지고 만들어낸 거룩입니다. ‘악을 줄이고 선을 늘이면 생겨나는 것이 거룩인데 그 거룩함, 거룩함이 우리를 천국으로 넣을 수가 있다.’ 그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냐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 천국을 만든 당사자가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했으면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게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런 말을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했느냐? 예수님을 제거했어요, 죽여 버렸어요. 마치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니까 악마가 나서서 ‘죽으리라’라는 그 선악과 자체를 아예 부재한 것으로 없애 버렸죠. 없애 버리면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을 이미 인간 쪽에서 없앨 것을 하나님께서는 사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인간 세계 사이에 충돌을 일으킨 거예요. 충돌을 일으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원하는 바는 뭐냐? 본문 히브리서 10장 9절에 나오는데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곧 나중에 오신 예수님이 모든 있는 것보다 선행해서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거예요. ‘우리의 생존보다 하나님의 뜻이 앞서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내가 이 땅에서 하는 일보다 먼저 앞서 있다는 것, 선행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계속 언급하는 거예요.
그 선행하는 일 중에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다는 것,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다는 그것이 네가 있다는 것보다 선행된다.’라는 겁니다, 네가 있다는 것보다. 내가 여기 있는데 그 있는 나를 어떻게 천국에 가게 할 것이냐, 이렇게 되어버리면 천국보다도 내가 먼저 선행하는 게 돼요. 내가 먼저 있는 게 됩니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을 위해서 내가 있다는 말은, 천국과 지옥이 선행되어 있는 그것을 확정 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용했다는 것밖에 안 돼요. 그냥 이용한 거예요. 그 자체가 인간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모독적인 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뱉으신 말씀 중에 가장 모독적인 것은, ‘나는 너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내가 죽었다.’라는 이야기에요. 나는 너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내가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얼마나 모독적이냐면요, 우리가 예수님의 사죄, 용서를 받는 순간부터 그 후의 우리의 모든 것은 철저하게 예수님한테 무시당하게 되어 있어요.
“주님, 우리한테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인생의 이런 어려움이 왜 생깁니까?”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래도 네 죄는 내가 사해줬잖아.” “내 몸이 왜 이렇게 아픕니까?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앞날이 막막합니까?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할 때 “그래도 네 죄는 내가 용서했잖아.”
이 말은 뭐냐? 내가 고민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아예 짓밟아버려요. 내가 고민하는 것, 걱정하는 그것까지 짓밟아버립니다. “시몬, 너는 아는가? 주님 앞에서 밟히는 소리를!”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밟아버리죠. 여러분이 길에 떨어진 과자 밟을 때 어떤 소리 납니까? 바사삭, 하고 부서지죠. 아주 매가리 없이 부서지죠.
어떤 의미나 가치를 일체 고려 안 하고 그냥 눌러서 부스러진 과자로 만들어버립니다. 악마가 이걸 알고 있어요. 예수님의 죄 용서가 인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무시한다는 것을 악마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마가 인간을 들쑤셨습니다.
주께서 “나는 너의 죄를 십자가 피로 용서한다.”라고 할 때 인간들은 들고 일어나죠. “누가 당신더러 내 죄를 용서하라고 했습니까?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하십니까? 퉤!” 하고 인간들은 그 죄의 용서에 대해서 거부하는 본성을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죄 용서가 되어버리면 내 인생 관리에 있어서 내가 어떤 관여도 하지를 못해요. 하나님이 관여하는 것에 대해서 왜 우리가 거부하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고 싶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우리는 그렇게 병들었어요.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는 겁니다. 누가, 어떤 외부인이 관리하는 것은 딱 질색이에요. 왜? 그 존재의 종이 되기 때문에, 노예가 되기 때문에 그건 우리의 천성과 안 맞아요. 우리의 본성과 전혀 맞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어떻게 하느냐? 복음이 들어오면 그걸 토해버려요. 토합니다. 불신자가 예수님 복음을 들어오면 토하는데요, 그런데 하나님도 똑같이 그렇게 해요.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보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토하여 내친다. 하나님께서 너를 내 손에서 토하려 내친다는 겁니다. 여러분 몸에서 역겨워서 더 두고 못 봐서 강제로 이렇게 밀어내는 것, 그걸 두 자로 변비라고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제로 밀어내요. 변비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그걸 ‘배설물’(빌 3:8)이라고 합니다.
더럽게 똥, 오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강제로 밀어내요, 주님께서. 우리 자체를. “너 내 몸 밖으로 좀 꺼져줄래? 좀 나가줄래? 내 몸이 너를 못 받거든? 받을 수가 없거든?”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 변비의 요인입니다. 하나님, 주님의 변비 요인이에요. 밀어내요.
그 끄집어낸 것을 주님이 어디에 모으는가? 그 모으는 쓰레기장을 가지고 ‘게헨나’ 다시 말해서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뭐냐? 영원한 불, 저주의 불에 타야 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인간이 영원히 배설물로서 저주받아야 마땅함을 알려주기 위해서 지옥을 만든 거예요. 이것이 우리의 존재보다 선행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행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는 것보다 먼저 앞선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밀어내는 겁니다. 밀어내서 영원히 저주의 불속에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지난 금요일 시내 영화관에서 영화를 한 편 봤습니다. 영화 시작이 오후 1시고 끝나는 시간이 오후 4시 45분이었습니다. 무려 3시간 45분 동안 상영하는 영화에요. 제목은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 2025)에요. 3시간 45분 동안 하는 영화 가운데 남는 대사가 하나 딱 있어요.
주인공 아내가 폴란드에서 나치에 곤욕을 당해 영양실조가 돼서 하반신이 마비가 되었습니다. 마비된 채 미국 뉴욕서 상봉하고 난 뒤에 살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비가 돼서 휠체어 타고 생활해요. 그런데 이 고통을 치료 못 합니다. “너무 아파 못 견디겠어. 어떻게 좀 해 봐.” 이 대사에요. “너무 아파 못 견디겠어. 어떻게 좀 해 봐.”
주인공 되는 남편이 진통제 가지고는 안 되니까 자기가 숨겨놓고 몰래 맞던 마약을 아내에게 주사해서 그 순간은 넘어가게 합니다. “너무 아파 못 견디겠어. 어떻게 좀 해 봐.” 여러분, 이 아픈 것이 한순간 아프다가 지나가면 괜찮은데 영원히 아파하는 곳에 간다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영원히 아픈 곳에 간다면 그 팔자가 어떻겠습니까? 지옥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히 아파하는 육신으로 부활시킵니다. 살아 있을 때 교회 안 나오고, 예수 안 믿고 그거는 아무 의미 없어요. 왜? 지옥이 선행하기 때문에, 선행하는 것이 지옥이기 때문에, 인간은 지옥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아파야 하고, 아프다가 숨을 거두면 그만이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아픈 것은 그냥 맛보기고 본격적으로 아픈 게 지옥이에요.
이미 죽어버린 육신까지 부활시켜서 영원한 아픔, 지금도 아파, 그다음도 아파, 아파, 아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아픔을 어떻게 처치할 수 없는 그러한 세계가 지옥이에요. 이유는 단 한 가지, ‘내가 준 용서를 왜 퉤, 하고 내뱉었냐?’ 이거예요. 기준은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준 용서를 왜 퉤! 하고, 거기 있어야 할 복음을 왜 퉤, 하고 내뱉었느냐?’ 단지 그 이유뿐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라는 철학자가 있는데 그 철학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내는 책들을 많이 썼어요. 지금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간주 됩니다. 그 사람이 암에 걸려서 너무 아프니까 도저히 참다못해 병원에서 링거줄 빼고 창문에서 뛰어내렸어요.
논리가 이렇습니다. 라디오가 있는데 라디오가 고장 나서 삐삐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하렵니까? 그 라디오 고칠 수도 없는 고물이라면? 간단해요. 라디오를 창문 열고 길에다 던져 부숴버리면 다시 평화가 찾아오죠, 고요함이.
인간은 자기 몸이 아프니까 기껏 이런 생각을 해요. ‘내 육신에 문제가 있으니까 창문 열고 육신을 집어 던지면, 내가 없으면 내 고통도 없을 게 아니냐.’ 이런 논리에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생각이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걸 몰라요. 왜냐하면 내가 없다면 평화로운 나도 없어지잖아요. 라디오는 없어도 우리가 살아있으면 조용함이 보장이 되지만 내 육신에서 일어나는 고통에 대해서는, 내가 없어지면 고통 뒤에 오는 평화를 누릴 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인간의 육신은 어떻게 손댈 수 없는 영원한 고통을 위해 만들어진 거예요, 인간의 육신은.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누가 그런 이야기 하더냐?” 하고 따질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자기 쪽에서 비워냈어요. 빈 여백을 남기고 하나님 자기 자리에다가 죄인의 육신을 집어넣었을 때 나오는 결과가 뭐냐?
아버지한테 십자가에서 고통 가운데 저주받는 그러한 체험이었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우리가 몰랐던 우리 육신의 진면목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그걸 보여준 겁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보여주기 전에 미리 그 육신의 고통을 보여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욥이에요.
욥이 너무 잘 살고, 건강하고, 가족이 화목하고 뭐 삼위일체죠. 잘 살고, 몸 건강하고, 가정이 화목하고. 욥은 선악 논리에 의해서 ‘내가 악하지 않고 의롭고 선하기 때문에 나는 이런 복을 받을 자격이 된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게 선악 체계고, 선악 의식이에요. 하나님은 착하기에 착한 자에게 복을 주게 되어 있고, 그 착한 자의 자기 행함이 자기에게 복으로 소유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욥이.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보내서 욥에게서 그 세 가지를 다 뺏습니다. 가정 화목 뺏어버리고, 돈 많은 거 다 뺏어버리고, 몸의 건강 다 뺏었습니다. 평소에 욥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이 욥의 아내였어요. 욥의 아내가 욥을 보면서 뭐라고 하느냐? 욥의 아내가 욥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어떻게 드러나느냐가 욥기 2장 9절에 보면 나옵니다.
욥의 아내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세요.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그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 말은, “창문 열고 라디오 던져서 부숴버려라. 네 육신이 없으면 고통도 없을 게 아니냐?” 욥의 아내가 욥을 뭘로 보냐 하면, 자기 옆에서 소음이 나는 라디오로 본 거예요. 뭐 부부가 한 몸이라고요? 한 몸 아닙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옆에 존재하는 게 배우자들이에요. 인간은 자기뿐이에요.
욥은 이걸 알아요. 나보다 하나님이 선행한다는 걸, 먼저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욥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 이렇게 아내를 달래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요. 그동안 복을 주셨으니 화를 주는 것도 마땅하지 않느냐.
그게 욥에게 아무런 문제 해결이 안 돼요. 욥기의 어려운 점이 여기에 있어요. 아는데 몰라요. 길을 걷는 것과 길을 아는 것과는 달라요. 교인들이 교회 와서 복음 들어요. 설교 들어요. 다 알아요. 그런데 인생에 아무 도움이 안 돼요. 문제 해결이 안 나요. 성경 백날 들어도 해결이 안 나요.
왜냐하면 설교 듣는 것이 자기 선한 쪽으로 가기 때문에 그래요. 욥의 생각이 그겁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날마다 기도하고, 날마다 예배드렸어요. 자식들이 어긋난 길로, 하나님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제사를 드렸는데 문제는 그것이 내 쪽의 선한 것으로 누적이 되고 축적이 되고 쌓인다는 거예요. 다 쌓여버렸어요.
자기 쪽에 선이 쌓이니까 인간이 선악 체계를 못 버려요. 못 버리기 때문에 내 쪽에 쌓인 이 선한 일이 나에게 행여 복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겁니다. 그게 바로 똥 같은 생각이에요. 이게 배설물 같은 생각입니다. 이게 바로 배설물이에요. 주께서 더러워서 강제로 밀어내고 싶은 생각들이 그 생각들이에요. 주님의 몸이라는 천국에 합류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에요.
악마는 말합니다. 악을 악이라고 이야기하고, 선을 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합니다. 그게 바로 더럽다는 거예요. 그게 더럽다는 거예요. ‘이건 나쁜 짓이고 이건 옳은 짓이다.’ 그 생각이 더럽다는 거예요. 욥의 잘못은 뭐냐?
자기가 잘 먹고 잘살고, 가족이 화목하고, 건강한 것이 자기 존재로 말미암아 그 자체가 저주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그게 화라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자기는 그걸 복인 줄 알았어요. 그게 행복인 줄 알았어요. 자기의 육신 자체가 문제 있다는 거, 근원적으로 육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욥은 몰랐습니다.
주님께서 잘 먹고 잘살고 화목한 것, 그거 다 걷어내니까 육신에서 드디어 이건 뭐 석유 터지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저주가 원망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다 터져 나온 겁니다. 그동안 잘 먹고 잘살았던 게,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저주 마귀의 반항심, 잘 먹고 잘살기 때문에 바로 그런 맨홀 뚜껑으로 강제로 눌러왔던 거예요. 눌러버린 거예요.
교회 잘 다니고 말씀 보고 이러니까 이게 뭐가 진척이 잘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지금. 그러니까 자기가 뭔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어려운 대목 하나가 뭐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어린아이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출생해서 어린아이부터 시작했지만 아담과 하와는 성인부터 만들었어요.
이 말은 그 뒤에 태어난 모든 아담의 어린아이들은 죄를 범한 성인, 아담이라는 성인의 모습으로 점점 더러워져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선악과는, 앞으로 더 말씀 공부하면 차츰차츰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더 성장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반대로 생각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육신이 있다는 것은 이 자체가 더럽기에, 너한테 일어나는 어떤 일도 더럽지 않은 게 없기에 어떠한 일이 생기더라도 네가 놀라지 말라.’라는 거예요. 더러운 거에게 더러운 일이 생기고 저주받을 일이 생기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그걸 뭐 깜놀? 뭐가 깜놀이에요? 무안에 뭐 비행기 떨어져서 179명 죽었다? 뭘 깜짝 놀라. 어떻게 교사가 우울증 걸려서 애를 죽이느냐? 무서워서 학교 보내겠는가? 이게 놀랄 일입니까?
인간의 존재 이유는 신약 성경에 보면 딱 두 가지밖에 없어요. 하나는 의의 병기(롬 6:13)와 악마의 병기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병기라고 하는 것은 둘 다 총알 떨어지면 죽어버려요, 총이니까. 계속 총질하는 거예요. 악마의 병기는 ‘네가 뭔데 왜 나한테 상처를 주느냐?’고 계속 총 쏩니다.
뭐 무슨 말하고 당겼다 하면 전부다 “네가 뭔데 나한테 상처를 줘?” 계속 쏘아대는 거예요. “나같이 착한 사람 어디 있는데? 나같이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 어디 있는데? 근데 왜 네가 날 힘들게 해?” 그러면 그 총질이 어디로 가겠어요? “하나님 욕하고 죽어라, 인간아.” 욥의 아내가, 마누라가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 욕하고 죽어라.”
그런데 의의 병기는 뭐냐? 계속해서 예수님의 상처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상처가 나와요. 그 상처가 안 나오면 어떡하느냐? 안 나오면 이제 하나님께서 ‘어? 총알 떨어졌네. 빨리 천국으로 보내자.’ 살아있는 한 주님의 상처가 나와요. 그 주님의 상처는, 인간이 주님을 힘들게 하고 못살게 군 거예요.
그 총이 다르니까 총알도 다르겠죠. 총알이 다르니까 불신자들은 복음이 들어오면 ‘이거 내 총알 아니네?’ 퇘, 하고 갖다 토해버리는 겁니다. 내뱉어 버리는 거예요. 복음을 전하면 내뱉어 버려요, 자기 총기랑 안 맞으니까. 자기 정당성과 안 맞는, 자기 의로움에 안 맞는 내용이 들어오니까 그냥 침 뱉듯이 내뱉어 버리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2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2장 14-16절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똑같은 복음인데 한쪽은 코를 막고 냄새난다고 밀어냅니다. “당신이 하는 이야기는 내가 추구하는 행복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만 하세요. 그만하라고 했습니다!” 하고 밀어냅니다. “‘인간의 몸 자체가, 육신 자체가 주님이 뽑아내야 할 그냥 똥에 불과하다는 냄새나는 똥에 불과하다.’라는 그 이야기 그만 하세요. 나는 내 인생 내가 관리하겠습니다.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인생 내가 만들어 내겠습니다. 하나님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들어주시겠죠.” 이런 거.
왜 기도하면 들어준다고 생각합니까? 기도하는 게 의라고, 선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게 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요. 따라서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걸 요약하면, 인간에게는 거룩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거룩이 없어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몸을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을 얻었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우리’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말하며, 거룩이 얻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거룩을 만들 때 이 땅에 먼저 심판이 있어요. 창세기 9장 13-16절에 보면 무지개가 나오는데 그 무지개 밑의 세계와 무지개 위의 세계를 주께서 나누십니다. 무지개가 형성되려면 그 무지개의 아래쪽에는 물의 심판이 있어줘야 무지개가 있는 거예요.
굉장히 아름답죠. 물의 심판 받는 이 세상이 주께서 보기에 그렇게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거예요. 세상이 물로 덮히는 것이 주님 보기에 아름다운 작업이었다는 겁니다. 왜? 무지개 위에는 고요니까, 고요함이니까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거룩은 명사에요.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 거룩은 동사입니다. 꾸역꾸역 내가 거룩해야 하고, 내가 거룩을 만들어 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이에요. ‘선도 알겠다. 악도 알겠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면 점점 더 거룩해진다.’ 하나님의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는 그 말씀대로 실천에 옮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줘도, 아까 제가 말씀한 것처럼 욥이 자기 육신이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모든 말씀을 왜곡되게 반대로 해석하는 거예요. 자기가 배설물이고 빠져나와야 할 더러운 것인데 자꾸 육신을 자기가 붙들고 어쨌든 덕지덕지 아름답게 인형으로 꾸며보고 싶은 거예요, 자기가.
저나 여러분 어릴 때 아는 동화 나옵니다. <신데렐라> 노래도 있지요. “신데렐라는 어려서~”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신데렐라는 계모하고 살게 되었고 그의 자식들인 언니들이 있었죠. 계모와 언니들이 신데렐라를 무시해서 하녀 취급하고 청소부터 해서 일 시키고 심하게 학대를 당했습니다. 노래에서 “구박을 받았더래요.”
그런데 하루는 궁궐에서 잔치를 벌인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언니들은 치장하고 파티장에 가고 신데렐라에게 자기들 돌아올 때까지 청소 다 해놓으라고 했다는 말이죠. 신데렐라가 그게 너무 부러워서 기도했더니 요정이 나타났어요. 호박, 도마뱀, 생쥐를 준비해 놓으면 호박은 마차가 되고 도마뱀은 마부가 되고 생쥐는 말이 되는 거예요.
요정이 또 드레스하고 반짝이는 유리구두를 준비해 줬습니다. 그래서 신데렐라가 파티장에 가는데 조건이 있어요. 12시 이전에는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 신데렐라가 왕자하고 춤을 추게 됩니다. 너무 예뻐서 그 파티에서 주인공이 되고 말았어요. 모든 사람이 신데렐라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12시 종이 치니까 후다닥 내려가다가 그만 구두 한짝을 흘리고 가잖아요? 여기서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 있어요. 왕자가 신데렐라에 반해서 그 유리구두의 한 짝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마을을 다 살핍니다. 언니들이 또 나대지요. 들어가지도 않는 걸 발을 막 집어넣고 한단 말이죠.
그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신데렐라 발이 유리구두와 딱 맞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거룩이 아니고 거룩이 맞춰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우리가 거룩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거룩을 거룩답게 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을 맞춰서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에 나와요, 5장에. 아가씨들 한 257명 모아놓으면 얼추 맞는 발이 나올 수도 있어요. 그런데 유리구두 자체가 안 맞도록 조정을 해버려요, 안 맞도록. 신데렐라 발이 유리구두에 딱 맞으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던 나머지 구두 한 짝 들고 와서 신고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동화는 그렇게 끝나잖아요.
이 거룩은 명사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거룩을 차지하기 위해서 동사로 움직입니다. “내가 뭘 행하면, 어떻게 말씀을 지키면 하늘나라 갈 수 있읍니까?”라고 자기 쪽에서 행위를 내세웁니다. 그것은 뭐냐? 자기 육신이 본래 지니고 있던 선악 의식을 본인이 스스로 부정하지 못해요.
이게 제일 큰 난제죠, 난제입니다. 자기가 육신만 있는 게 아니고 육신 자체가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아는 상태에서 선과 악을 포기해야 될 텐데, 선과 악을 포기해버리면 어떤 의미가 되느냐? 선과 악을 판정하는 주인공이 난데, 판정해서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데, 왕자하고 춤을 추는데 그 전체를 내가 포기해버리면 천국 가는 나도 소멸된다는 논리가 돼요.
이걸 포기하게 되면 내가 거룩할 수 있는 토대 자체가 애초부터 부재하게 되잖아요. 없는 게 되잖아요. 인간의 딜레마죠. 내가 없는데 거룩이 있고, 내가 없는데 의가 따로 있다? 그러면 그 의를 어떻게 따내느냐? 따낸다는 말 자체가 잘못이죠. 내가 없다면 거룩을 따낼 필요가 없죠.
‘의가 있는데 내가 그 의를 따내면 내가 의인이 된다?’ 나 자체가 배설물인데 거기다가 손을 내밀고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아서 구원받겠다는 이 자체가 쓰레기 같은 생각이 아니냔 말이죠. 그것이 쓰레기 같은 생각이라면 교회 다닐 이유가 없어요. 착해야 복을 받는데 복 안 받겠다고 교회 나옵니까? 복을 안 받겠다고, 저주만 받겠다고 교회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복을 받겠다, 저주받겠다, 천국 가겠다, 지옥 가겠다, 가겠다, 가겠다는 이 모든 자체가 이게 마귀 생각이라니까요!
자, 이쯤 해서 무슨 해결책이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할 수는 없는 문제고요. 해결책은 구약의 도피성에 있습니다. 구약 율법의 도피성. 민수기 35장 10-12절 “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도피성이 뭐 하는데냐? 살인한 사람을 구제하는 곳이 도피성이 아닙니다. 살인을 하되 우연히, 우연히 살인사건이 성립된 그 사람을 보호하는 데가 도피성이에요. ‘우연히’입니다. 필연이 아니고 우연히. 살인해도 죄 용서받고, 죄 용서받으면 천국 간다는 이런 통박은 굴리지 마시고요. ‘나쁜 짓을 해도 죄용서가 있으니 나쁜 짓을 마음대로 할래.’ 이런 얄팍한 계산은 하지 마시고요. ‘우연히’입니다. 우연히.
자기의 고의성이 없어요. 고의성이 없는데 뭔가 살인사건이 벌어져 버렸어요. 그러나 죽은 가족의 입장에서 “당신 우리 아버지 왜 죽였어요?” “저도 모르게 우연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가족을 잃은 피해자 가족에게 변명으로 통할 성싶습니까? 안 통합니다. “우연히 그렇게 당신 아버지를 돌아가게 했네요.” 그러면 그 죽은 사람의 자식이 뭐라고 하겠어요? “당신도 그러면 나한테 우연히 맞아죽어 볼래?” 이렇게 나오겠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연히 살인사건에 휘말린 그 사람을 도피성에 보호합니다. 도피성에서 보호하는 데 그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도망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곧 죽습니다. 도피성은 어떤 곳이냐? 도피성에 가면 누가 기다리고 있어요. 제사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피성에 가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만나야 할 어떤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제사장이에요.
살인한 사람, 살인사건에 연루된 그 사람은 살아 있지만 사실은 사회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이고요, 제사장은 하나님을 만난 자체가 죽은 것이기에 죽어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제사장이에요. 살아 있지만 죽은 자와, 죽어 있지만 산 자가 어떤 구별된, 격리된 장소에서 만나서 보호받는 장소가 도피성이에요.
그 격리됨, 그 격리를 두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 그것을 거룩이라 합니다. 거룩이란 차이 난다, 구별된다, 다른 영역에 산다, 다른 구역에 존재한다, 가 거룩이에요. ‘내 선을 쌓는다, 내가 선하게 된다.’ 이것이 거룩이 아니고, ‘착하게 된다’가 거룩이 아니라 ‘나는 이미 죽은 자로서 다른 구역에 산다. 살아 있지만 죽은 자로 간주 되는 구역에 산다.’ 그게 바로 거룩입니다.
이 거룩은 이승과 저승의 중간지역이고, 생과 사의 갈림길을 하나님 쪽에서 마련했어요.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을 특별히 도피성으로 마련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비로소 인간은 ‘내가 살았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은 자라는 것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줍니다. 이것은 내가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이 육신 자체가 죄 있는 육신을 그대로 인수인계 받아서 그래요.
부모로부터,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죽은 아담의 몸, 우리는 살아 있는 모양새지만 사실은 이미 죽었다고 확정된 상태에서 우리의 육신을 인수인계받은 거예요. 부모의 몸으로부터. 그것을 시편 51편에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하는 겁니다.
만년필의 펜촉에서 계속 시커먼 게 나오지요. 그러하듯이 죄에서 태어났기에 모든 말과 행동이 검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저주가 따르는 것은 너무나 합당한 조치인 겁니다. ‘포기해라. 네 육신을!’ 그거거든요. 이런 절차에 대해서 한꺼번에 스토리를 지은 대목이 고린도후서 5장입니다.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네 육신 내가 없앨거야. 없애면 다른 몸이 마련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땅에 있는 그 유니폼 말고 하늘의 영광, 예수님의 빛나는 영광의 옷으로 갈아 입을 것이다.” 탈의실이거든요. “그 탈의실을 거쳐서 네가 영광의 몸을 입을 거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또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네 육신이 무너지면 새로운 육신이 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따라서 나 같으면 빨리 죽는 것을 소망하겠다.”라는 대목이 8절에 나옵니다. 나는 소원이 있는데 그게 뭐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러면 그냥 거하면 되겠어요? 안 되겠지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곧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완전히 덮치고 있다. 일본의 삿포로에 4미터의 눈이 오듯이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덮쳐버렸다. 덮쳤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사랑 안에서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이 기쁘게 발견된다. 그래서 더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 이유가 없어졌다.’라는 그런 뜻이지요.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고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도피성 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살려주려고 도피성에 보낸 거거든요.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과거는 날아가 버렸으니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시공간을 적용받는 거예요. 어제는 어제까지 현재고, 오늘은 오늘만 현재고, 내일은 없어요. 내일이 되면 내일이 또 현재가 될 거예요.
새로운 현재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뤄지게 될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19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인간이 ‘죄 없다’가 아니라, ‘죄 안 짓는다’가 아니라 ‘죄 안 짓는 그런 시간도 있었다’가 아니라 뭘 해도 시커먼 잉크가 흘러나오듯이 죄만 짓고 뭘 해도 똥 같은 배설물 같은 짓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많은 죄,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신다는 거예요. 불신자 같으면 또 퇘, 하고 내뱉어 버릴 거예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이룰 거야!” 막 화를 내면서. 성도가 예수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지금도 계속 받고 있습니다. 어제도 전화를 한 시간 반동안 받았는데요.
“성도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뭐 하면 됩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기뻐하면 됩니까?” 아니요. 아니에요. 그것은 또 자기 자랑밖에 안 되니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뭡니까? 매일 같이 마귀한테 속는 즐거움을 누리세요. 마귀한테 속는 즐거움. 내 육신의 욕망에게 속는 즐거움을 가지세요. 우리의 육신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남 출세할 때 너는 뭐 하고 있었어? 남 좋은 것 챙길 때 너는 뭐했느냐고? 너도 열심히 해야지.’라는 생각이 내 맘에서 매일 같이 올라오고 있어요. 그걸 즐기세요. ‘마귀야, 네가 시키는 대로 해줄게. 네가 시키는 대로 해주마. 마귀야!’ 누가복음 10장에 자매가 나옵니다. 이 자매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이 무척 재미있어요.
누가복음 10장 40절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마르다의 세계관은 뭐냐 하면, 선악 세계관이에요. ‘귀한 주님이 오셨는데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야 주님이 힘이 나서 복음 전하실 것 아닌가?’ 이게 마르다의 세계관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마르다가 생각하는 천국이에요. 내가 열심히 행한 그것이 가치있게 자존감으로 남아 있어서 그것이 인정되는 세계에요.
그런데 이 마리아는 뭐하고 있느냐? 분주한 언니를 도와주지 않고 주님 발치에 딱 앉아서 주의 말씀만 듣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 10:39). 이걸 세자로 ‘싸가지’라고 하지요. 말씀만 듣고 있어요. 언니가 많이 참았지요.
마르다가 참다가 참다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4) 여기에 마르다와 마리아만 있는 것은 아니고 제자들도 있고 다른 사람들도 다 있지요. 마르다가 “주님께서 ‘가만히 있지 말고 언니나 좀 도와주라’라고 나무라 주세요.”라고 하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
제대로 선택했다. 마리아의 세계관은 자기를 상실한 세계관이에요. 마리아는 언니한테 욕 얻어먹을 것을 알고 있어요. 선악체제로 자기가 비난받을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원래 내가 그런 존재인 것을. 그것을 즐기는 거예요. 남한테 모독받고 모욕받는 그것을 즐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모욕할 기회가 없거든요. 지난 설교에서도 했지만 남이 나를 모욕할 때 배후에서 누가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마귀가 하더라도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바로 마르다는 ‘저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신다’는 주의 일을 마르다 본인이 지금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자기의 자존감이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오늘날 우리도 못지않게 마찬가지거든요. 우리의 육신이 그러니까 우리의 이 버릇을 고칠 수는 없어요. 이 더러운 똑같은 버릇을 못 고칩니다. 못 고치면 어떻게 해요? 못 고치면 즐겨야지요. ‘주여, 또 마귀 짓했습니다. 저에게서 나올 것은 이 마귀 짓 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네요.’ 헌금 한 백만 원 하면서 ‘주여, 또 마귀 짓 하고 있습니다.’ 봉사하면서 ‘또 마귀 짓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고린도후서 5장 끝까지 가봅시다. 20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그 내용이 뭐냐?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의인이 되는 게 아니에요. ‘의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된다니까요, ‘의’가! 우리가 거룩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고 거룩이 우리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거룩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더 높아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조정해 나가는데 조정 방법이 뭐냐?
우리로 하여금 우리 육신을 마귀한테 맡기는 방법이에요. 평생 우리는 주님한테 욕하다가 볼일 다 보고, 하나님께 원망하다 볼일 다 보고, 하나님께 씩씩거리다가 평생 다 보냅니다. 그게 욥의 남은 생애 아니었던가요? 욥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내용이 그거잖아요. 하나님께 욥이 원망하잖아요. “저에게 왜, 저에게 왜 그러시는데요? 저 아파요! 주님이 어떻게 좀 해보세요. 너무 아파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이걸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는 말로 안하시고 필담으로 해요. 필담으로 하십니다.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 2003)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고백하는 데 글을 써서 보여주는 식으로 합니다. 카세트에서 캐롤이 흘러나오도록 해놓고는
“…Let me say…”(이제 고백합니다)
“To me you are perfect”(내게 당신은 완벽해요)
“and my wasted heart will love you”(가슴 아파도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영화에서 이런 식으로 써서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보여주는 식으로 고백해요. 주님께서는 성경을 가지고 필답으로 하십니다. 인간들은 사는 게 너무 아프기 때문에 “아야! 아이고!” 말로 다 할 수없는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주께서는 “너무 시끄럽습니다. 조용히 꺼져줄래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성경 말씀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 5:19) 러브, 러브, 러브…….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러브, 러브, 러브…….
이 성경, 이 예언, 우리의 미래, 이 성경이 우리 존재보다 선행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그동안 육신이 시키는대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종교 생활 잘한 것 같습니다. 교회 생활 잘한 것 같고 신앙생활 잘한 것 같은데 신앙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 주님이 신앙생활 했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