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육신의 용도

아빠와 함께 2025. 3. 2. 17:32

육신의 용도 

2025년 3월 2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15-18

(10: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0: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0: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죄’에 대해서 인간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인간들은 죄가 뭔지를 모르면서 지은 죄에 대해서 반성하고 회개하겠다고 나섭니다. 마치 ‘죄 안 지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믿고서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부터 죄입니다. “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따라서 인간이 죄를 알아서 구원되는 경우는 근원적으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죄를 알려는 것도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죄가 스스로 해결될 수 없어서 예수님이나 하나님에게 도움을 도청하는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의 일의 시작은 인간부터가 아니라 성령님부터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부터 출발하십니다. 인간 세계에서 유난떨고 부산을 떠는 모든 이야기들도 하나님의 최후의 일 앞에서도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못합니다. 천사들의 나팔 소리에 인간의 귀는 멀고, 눈도 감깁니다. 인간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stop!”이 됩니다.

인간들이 죄가 뭔지를 모르는 이유는 자신들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시작은 우리 인간들과 같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분에 의해서 밝혀집니다. 그런데 그 오신 분은 구약의 말씀에 준해서 일을 벌리십니다. 레위기 12장에 보면, 인간의 시작이 어떠한지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륙 일을 지나야 하리라”(레 12:2-5)

여자가 아들을 낳을 때와 딸을 낳았을 때의 정결해지는 기간에 곱빼기로 차이납니다. 이는 그만큼 여성 쪽이 처음 선악과 사건과 관련의 희생의 강도가 두 배나 더 소모된다는 말입니다. 즉 딸 출산을 통해 여성이 먼저 선악과 과일을 따먹었다는 사실을 더 깊이 인식하게 하므로서 남성보다 인간들의 처음 사건에 더 가까이 여성을 두게 하신 조치입니다.

메시야는 ‘남자의 후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 나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모두들 죄 속에서 등장되는 것이 그들의 출생입니다. 과연 커나가면 이 사실이 희석될까요? 아닙니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율법에 속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식도 그려먹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레 11:2-4)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기를 위한 자기만의 세계를 갖춘 자격이 없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의도적으로 죄를 생산합니다. 과연 이 인간의 ‘이별의 끝은 어디있는가요?’로마서 6:2-3에 나옵니다. “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그 출발과 과정과 그 마지막 미래까지 전부 다 들어있는 세례에 한꺼번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쪽에서 먼저 인간 세계에 침노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맞아 죽는 사건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난 뒤 하나님은 외첬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핍박했고 결국 죽였다!”고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죄에 대해서 먼저 마주했습니다. 방법은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자’되시는 일입니다. 성령으로 인해 이 상황이 성도에게 밀려들어옵니다. 그런데 성도 안은 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관계가 형성됩니다.

죄가 성도를 공격합니다. “너는 왜 이런 죄를 지었어? 그리고서는 죄는 말합니다. 아 참 ,저자는 이미 나에 대해서 죽은자(고인故人)이잖아. 죄의 영향력이 소용없는 자이잖아”가 됩니다. 성도는 마음놓고 죄 지으면된다가 아니라 성도에게‘죄는 대해서 이미 죽어버린 자’로서 쓸모가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하신 일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달성하는 언약의 위력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표현하면 ‘죄에 대해서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고’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주의 말씀의 취지는 자기 백성을 파괴하는 겁니다. 파괴되지 아니하면 멸망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늘 정신차리면서 살려고 합니다. 자신의 이득을 놓치지 않으려고 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지옥불로 들어가는 겁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과 성도는 스노우볼 같은 세계 안에 이미 함께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 안에서 성도는 이미 예수님께서 친히 규정하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공유합니다.

‘과거의 현재’와 ‘현재의 현재’와 ‘미래의 현재’가 현 성도의 육신을 통해서 표출됩니다. 그래서 성도를 통해서 예수님이 분출되고 성도는 예수님의 조명기구가 됩니다. “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 1:16)

성령, 곧 주님이 일과 맞은 편의 죄와의 균형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예수님의 몫입니다. 인간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갔습니다. 그에게 있어 ‘미래의 현재’입니다. 하지만 사도의 육신은 사단의 가시가 박혀 있습니다. ‘과거의 현재’입니다. 이 두 현재를 다 지니고 있는 것이 ‘현재의 현재’입니다. 바로 성도는 오늘날 말씀이 스스로 발휘되는 선지자가 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최적화된 상태임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6강-히브리서 10장 15-18절(육신의 용도)250302-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15-18절입니다.

히브리서 10:15-18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마지막 언약은 하나님이 자체적으로 목적을 정했는데, 인간 쪽에서 제사드리지 않더라도 죄가 없어지는 상황을 주님은 생각 하셨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죄라는 것이 필히 조성 돼야 해요. 죄라는 것이 조성되어야 하고, 그 죄에 대해서 죄지은 당사자 인간이 손을 댈 수가 없어야 됩니다. 처리를 하면 안 돼요. 죄를 본인이 처리하겠다는 그것이 극단적인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이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방침을 수용해야 됩니까? 내가 어떻게 이걸 받아들이고 믿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주께 그렇게 질문하면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 질문, 시도 자체가 바로 죄다. 왜냐하면 시작을 너부터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게 바로 히브리서 10장 15절에 나옵니다.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출발을 성령부터 하는 거예요. 성령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있는데 우리 힘으로 해결이 안 되고 주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한다’라는 이 생각조차도 죄가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 ‘우리가 죄가 있고, 그 죄를 알고, 그다음에 주께서 해결자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사랑의 하나님, 구원자다.’라는 생각 자체가 죄가 되는 이유가, 우리가 죄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에 대해 뭔지도 모르면서 ‘나는 죄지었다. 나는 죄인이다.’라고 여기는 그것, 그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는 대원칙에 대해 우리가 자꾸 주제넘게 끼어드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창세기 8장 21절에 보면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출발을 거기서 합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인간이 하루에 8만 4천 번 생각한다는 거예요. 참 그걸 어떻게 계산했는지, 계산해 보니까 거의 1.7 1.3초에 생각 하나씩 하고 있는 거예요.  (84000/(60x60x18)=2.901

그러면 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또 행동에 나선다는 뜻이고요, 그렇게 8만 4천 번 생각해서 행동에 나서게 되면 그걸 가지고 뭘 하느냐? 자기를 지키는 힘을 모을 것이고, 그 힘을 모으면 그게 바로 죄가 되고, 결과는 인간이 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시작과 끝을 그 두 개로 모으면 ‘인간은 생각한다. 고로 망한다.’ 이거에요. 인간은 생각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본인이 망한다는 거예요.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 죄에서 나오는 생각인 것을 인간은 생각 못 해요. 감히 생각을 못 합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은 죄다.’라는 그것도 죄가 되는데, 그 이유가 뭐냐?

시작을 성령부터 해야 해요. 성령부터 시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거든요. 예수님의 마음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 시작점을 두고 “너 따로 시작하고 나 따로 시작하자.” 이렇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시작이라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어요. 인간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그것도 몰라요. 자기 생일부터 시작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인간의 시작점 자체부터 주님께서 관여를 하십니다. 죄있는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시는 그것부터 시작이 되거든요. 그 시작을 할 때 예수님께서 자기가 해야 할 작업의 근거를 율법에 토대를 갖고 개시하셨습니다.

레위기 1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레위기니까 율법이잖아요. 12장 2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일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오히려’라는 말은 “애 낳았다고 사흘 만에 밖에 일하러 나가지 말아라. 네가 네 고유의 활동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아직 되지 않는다.” 며칠이 지나야 하는가? “아기 낳기 전의 여자로 돌아서려면 33일을 기다려서 다시 아이 낳기 전의 너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가 있다. 그전까지는 네가 너 자신이고자 하지 마라.”

아이 낳고 난 뒤에 33일을 경유하는데 경유하면서 뭘 생각해야 하느냐? ‘내가 낳은 아들이나 그리고 그걸 낳은 나나 둘 다 다시 더럽다, 는 것을 반복하는 행위가 일어났다.’라는 겁니다. 출생부터가 더러움을 출생한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지 못한 것을, 애를 또 낳은 거예요.

그리고 그 아이를 낳을 때 아들이나 자기나, 또는 아이를 낳게 했던 자기 남편이나 다 같이 더럽다는 것을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재현케 하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용도죠. 그러면 왜 33일이냐? 그 뒤 5절을 보면,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륙일을 지나야 하리라.”

남자와 여자를 차이 나게 하는데, 여자 낳을 때 남자보다 곱빼기로 그만큼 더럽다는 거예요. 딸을 낳았으면 66일 동안 다시 딸 낳기 전에 자기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여인은 아이 낳으면서도 율법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임이 거기서 확인되는 거예요.

‘아, 내가 아기를 낳은 게 아니고, 율법에 해당되는 자식이 내 몸에서 태어났구나. 태어나는 동시에 나도 율법에 저촉되는 존재구나.’ 율법에 위반될 수밖에 없는, 율법이라는 게 주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율법은 왜 있는가? 죄를 생산하기 위해서 율법이 있는 거예요. 그 율법을 위해서 죄를 생산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인간은 숨 끊어지면 죽는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숨 끊어지면 죽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의 생각이고, 하나님 보기에 죽음이라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죄가 드러나면 그게 죽음인 거예요.

‘모든 인간은 죄인인데 왜 아들 낳으면 33일이고, 여자 낳으면 66일인가? 여자에 대해서 차별화시키는 게 아닌가?’ 그렇게 하는데 주님께서는 율법을 주시면서 처음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던 그 사건을 율법을 통해 재현하고 있습니다. 그때 남녀가 동시에 따먹은 게 아니고 남자와 차이 나게 여자가 먼저 따먹고 그다음에 남자도 따먹도록 해서 둘 다 선악과를 따 먹고 죽었다는 사실을 ‘남자와 여자가 살아있는 한 내가 계속해서 그걸 우려먹을 거야. 내가 들춰낼 거야.’ 이런 거예요.

그러면 ‘여자의 이 운명, 팔자, 여자의 인생이 참 슬픈 인생이 아니냐?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남자와 차별화가 되지 않느냐?’라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여자에게 주는 희생의 강도가 남자보다 곱빼기, 두 배라는 사실에 더 감사해야 되죠.

무슨 말이냐 하면, 남자보다 여자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 희생에 더 가까이 있다고 보면 돼요. 아들 낳으면 33일? 딸 낳으면 66일? 66일 동안 무슨 생각하겠어요? 내가 아들 낳으면 조기 제대했을 텐데 딸 낳아서 33일 넘어 40일, 50일, 60일 계속 갈 때 도대체 여자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남편은 멀쩡하게 사냥하고 놀러 다니고 나는 애 낳은 게 무슨 죄라도 되는 것처럼 이렇게 더러움에 노출된 상태로 66일 동안 계속 있는 거예요. 쌍둥이 낳았을 경우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죄가 깊은 데서 빠져나왔을 때 그 기쁨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죠. 죄가 더 깊이 있는 곳에서부터 빠져나왔을 때 ‘왜 하나님께서 악마와 싸우는 그 대상자가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인가? 여자가 첫 번째 사건과 관련된 강도(強度)가 남자보다 더 가깝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출생부터가 인간은 이미 율법에 의해서 원초적으로 죄와 관련되어 있어요.

레위기 12장에 처음 사건이 율법으로 해서 계속 지속됩니다. 선악과 따먹은 것이 그때 사건으로 유야무야 날아간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있으면서 그 첫째 사건이 계속해서 남자 여자의 자식 생산을 통해서도 묻어져 나오는 겁니다.

레위기 11장을 봅시다. 출생해서 이제는 좀 컸잖아요? 성인이 됐으니까 뭘 먹을 거잖아요. 먹을 때 11장 3절에 보면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성인이 되어서 그냥 양식 먹고 살면 될 텐데 주님께서 “이제 다 컸으니까 알아서 해라.”가 아니라 식사하는 데까지 관여합니다. 율법을 통해서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 줘요. ‘너희가 만약에 굽이 갈라진 것이나 새김질하지 못하는 것을 먹는다면 너희들은 나의 죄 사함과 무관한, 상관없는 그런 종족’이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에게만 그 이스라엘 육신에 특별히 용도가 있는데 장차 예수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과 연관성이 있어요. 육신의 용도라고 제가 말씀드리면 알기 쉽게 돼 있는 것이 고린도전서 7장 32-2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읽어보면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이게 육신의 용도잖아요.

방금 여러분 무슨 이야기 들었는지를 기억하십니까? ‘왜 장가갔느냐?’라고 따지는 거예요. “왜 장가를 갔느냐, 주님 버리려고 장가갔지?” 이런 거예요. “왜 시집을 갔어? 주님 버리려고 시집갔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게 들립니다.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지만 장가 가지 않는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 주를 기쁘게 할까?’ 한다는 거예요. 특히 ‘시집가지 않는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한다’는데 이런 총각, 이런 처녀 여러분이 보면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총각 이런 처녀를 봤습니까? ‘아, 나도 장가가고 싶다.’ 뭐 이런 총각만 있고, ‘아, 나 좋다는 남자 없나?’ 이런 시집가고 싶은 여자만 있지 무슨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정말 너무나 현실과 무관한,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잖아요. 참 그래 놓고 교회 와서 예수 믿는다고 하니까.

자신의 육신의 용도는 율법과, 언약과 관련돼 있고 언약과 관련돼 있지 내가 독자적으로 내 육신을 관리할 수 있는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성경을 워낙 안 보니까 ‘나 지금 장가가서 애 낳고 잘 살지.’ 이걸 자랑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예요, 지금. 성경을 안 보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죠. 탄핵이 어떠니,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떠니, 미국이 관세를 25퍼센트 때린다는데 한국은 뭐 먹고 사나, 이런 생각하는데 성경은 다른 이야기 합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나팔 소리가 난다는 거예요. 나팔 소리 나면요, 귀를 다칩니다. 그리고 그 광선에 눈이 멀어요.

주님의 꽝, 하는 나팔 소리에 우크라이나가 어떠니, 탄핵이 어떠니 그런 소리는 귀에 들어오질 않아요. 완전히 우리의 육신은 스톱이에요, 스톱! 소용없는 육신이에요, 그 주의 영광 앞에서. 성경을 안 보니까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 때문에 그게 논쟁거리가 되는 거죠.

나팔 소리 한 번 들려줘 봐요? 귀 한 번 멀어볼래요?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지금 딴생각하고 있어요, 딴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율법을 줘서 죄를 유발해요. 그 죄를 유발해서 그 죄에 의해서 너희들을 죽이겠다는 겁니다. 아니,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하나님의 작전은…, 아까 인간이 날 때부터 악하다고 했는데 물론 사람들은 그걸 인정을 안 해요. “바르게 살면 되잖아.”하고 우기는데 날 때부터 악해요. 주님의 작전은 이겁니다. 주께서 먼저 침노해요. 마태복음 11장에 주께서 먼저 침노합니다.

주께서 율법을 가지고 침노를 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만들어서 인간을 저주의 대상으로 확정시키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침입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침입한 걸로 덤터기 씌워버려요. 그냥 하나님은 하늘에 조용하게 계시고 인간들은 우리끼리 살겠다고 하는데 주께서 먼저 침입해가지고 인간들에게 온통 얻어맞아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얻어맞고서 하는 말이 “인간이 하나님을 잡았다!” 하고 고함질러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때려 죽였다!”하고 온 우주에 광고를 내버립니다.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율법을 먼저 주신 분은 하나님 쪽이에요. 이스라엘 자손은 돌판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율법을 그냥 준 거예요.

하나님이 유월절날 애굽에 침입했거든요. 가만히 있는데 맏아들이 다 죽었어요. 뭐 품격이 어떠니, 인간성이 어떠니, 그 인간은 효도를 하니 소용없어요. 그냥 맏아들은 다 죽였습니다. 누구의 침입이냐? 하나님의 침입이에요. 그냥 죽을만해서 죽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뿐만이 아니고 애굽에 살던 잡족중에서도 살 사람에게 약속을 줬는데 “집 앞에 명패를 붙여라.” 똑같은 내용의 명패를 붙이라는 거예요. 명패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 명패의 내용이 뭐냐? “우리는 죽었습니다.”라는 명패에요. 똑같은 명패에요. “우리는 죽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죠, 오늘날 십자가. 요새 뭐 십자가는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식의 교회 명패가 됐지만. “십자가를 하나님이 보이도록 걸어라.” 이 말은, 안에서 십자가라는 적외선이 나오는, 적외선이든, 자외선이든, 방사선이든 그게 나오는 사람이 성도라는 거예요.

어떤 집사님이 올린 글에다가 다른 집사님이 댓글을 달았는데 거기에 그 놀라운 성경구절을 달아놨어요. 갈라디아서 1장 16절, 이건 너무 중요한 구절이라서 제가 두 번 읽겠습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다시 읽습니다. “그 아들을” 예수님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이방 나라, 율법이 없고 예수님이 없는 그 나라에 전하기 위해서 “그를” 예수님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나에게 적외선이 나오는 거죠. 가시광선 말고, 눈에 보이는 광선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광선이 나오는 거예요.

“그를 내 속에” 곧 “예수님이 스스로를 내 속에서 방출할 때 나는 이 일을 위해 내 혈육과 의논할 필요가 없었다.”라고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도라는 거예요. 성도의 시작은 성령부터 시작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내 속에서 다른 빛이 나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성도는 예수님의 조명 기구가 돼요. 마태복음 5장 14절에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그리고 15절에 “너희는 내 등불이니” 이게 조명 기구잖아요. 전구 아닙니까, 형광등. LED, 주님의 LED. 내 것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서 스스로 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 어떻게?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범죄한, 아들이나 딸로 출생해서 더러운 존재로 태어났던 그 더러운 육신, 예수님께서 거기에 참여해요. 레위기에 근거해서 그 더럽다고 규정된 육신 속에 들어옵니다.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와요. 주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몸속으로 오십니다. 로마서 8장 3절에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그리고 8장 1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 정죄함이 없는 이유가…, “이걸 믿어라. 정죄함이 없다.”가 아닙니다. 믿는 것도 죄예요. 믿는 것도 죄라고요. 인간의 육신 자체에서 나오는 게 다 죄밖에 안 나와요.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 그것도 죄라고요.

구미 근처 동네에 사는 어떤 아줌마가 딸을 일곱 낳았어요. 그 시어머니는 담배 피우는 걸 즐겼어요. 옛날 일이죠. “뭐고?” “딸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을 안 했어요. 그래서 그 며느리가 돌아가신 시어머니한테 굉장히 고마워해요. 구박은 안 하고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요.

그 며느리가 ‘아, 어머니가 아들을 원하는구나. 아들을 낳아야지. 절에 가서 빌어보자.’ 해서 구미의 어떤 절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절을 새로 지을 때 지붕을 올린답니다. 지붕을 올리면서 지붕에서 아래까지 광목을 죽 길게 늘어뜨리는 그런 행사가 있는 모양이죠.

부처님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 행사 때 길게 늘어뜨린 그 광목을 잘라서 빤스, 이걸 표준말로 팬티라고 하는 거예요, 빤스를 만들어 입고 득남했답니다. 그 후에 시동생이 또 딸만 3명을 내리 낳고 있을 때 절에서 나오는 광목을 잘라서 시동생에게 줬더니 역시 득남했답니다.

죄란 무엇인가? 딱 두 가지에요. 죄란 내 강력한 생존 의지가 죄에요. 이미 율법에 의해서 죽었는데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강력한 생존 의지. 두 번째가, 이왕 사는 거 잘 살아야겠다는 거, 이 두 가지가 죄입니다. 거기서 종교가 나오죠. 절이 나오고, 광목이 나오고, 빤스가 나오죠. 사람들은 그걸 복이라고 이야기해요.

하나님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예수님부터 출발해서 율법을 가지고 어떻게 하시는가? 로마서 6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이 무엇인가? 우리 속의 죄가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로부터 이런 꾸중을 받습니다. “어찌 네가 그리 나쁜 짓을 했단 말인가!” 죄가 우리 보고 이야기해요. 양심이라고 하죠. “왜 그런 나쁜 짓을 했어? 앞으로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 결과를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런 나쁜 짓을 했어.”

그래 놓고는 죄가 “미안합니다. 당신 나에 대해서 이미 죽었잖아. 내가 이상한 소리 했네. 죽은 사람한테 왜 그런 소리를 했지?” 이게 죄에 대해서 죽은 거예요. 이게 인간의 힘으로 믿어지겠습니까? 이게 어디를 경유해야 하냐면요, 이미 죄를 해결하신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이 말을 이해해요.

예수님의 죽음에 합하지 아니하면 이 말을 도저히 이해를 못 합니다. 주께서 죄를 키워서 그 죄로 말미암아 두 종류의 인간을 만듭니다. 아직도 죄에 대해서 죽지 않은 자,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라서 죄가 더 이상 영향력을 줄 수 없는 자, 성령 받은 자, 속에서 적외선 나오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오는 자, 이렇게 성령 받은 자와 성령 받지 못한 자 둘로 나눠버립니다.

오늘 히브리서 10장의 내용이 바로 그거예요. 15절에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성령이 증거하는 것 자체가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는 거예요.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기록하시고 다 아셔서 이걸 죄로 규정 해놓고, 그 죄와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공로를 가지고 역기의 바벨처럼 그렇게 관계를 맺어가는 거예요.

역기에 바벨이 양쪽에 있고 그 중간에 연결하는 바가 있죠? 역기가 그렇게 생겼잖아요. 양쪽 둘 다를 살리는 거예요, 인간은 빠지고. 우리가 뭘 해도 죄가 아니란 뜻이 아니고, 우리가 뭘 해도 죄한테 지적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죄는 아직도 죄에 대하여 죽지 않아서 자아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영향력을 발휘해요. 그게 우울증이에요. 우울증은 지독하게 자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우울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우울하면 안 되죠? 나는 행복해야 하니까.

그래서 이게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 죄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은 자잖아. 내가 대상을 잘 못 골랐네” 이런 대상이 아닌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항상 정신을 차려요. 정신을 차려야 나에게 이익이 오니까 항상 정신을 차려요. 정신 차리면서 지옥 가는 거예요.

파괴되지 아니하면 멸망합니다. 나를 파괴시키지 않는 일은 주의 일이 아닙니다. 마귀의 일이에요. 갈라디아서 1장 16절의 말씀이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이건 미친 소리예요. 주님이 나를 사용해서 내 안에서 뭐가 기어 나오는데 이게 내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 것이 아니고 죄를 해결했기 때문에 기어 나오는 주님 자기의 빛이고 생명력이라는 거예요.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내가 가족과 의논할 필요가 뭐가 있느냔 말이죠.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서 하나님 법이 있다는 말은 법을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법이 알아서 스스로 활동한다는 거예요. 법을 지키는 것은 옛날 구약 때 일이고요. 이 이야기하고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가수가 심오한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을 딱 봤을 때 제가 답변을 잠시 못했어요.

뭐냐 하면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 만약에 양수경이라는 가수가 나에게 질문하기를 “목사님 이별의 끝은 뭡니까?”라고 물으면 얼른 답변이 안 나와요. 아주 심오한 질문이에요. 물론 이제는 답변하죠. “당신의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됐습니다.”

노래 가사가

무슨 이유로 떠나야 했나요
나 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그대가
왜 나를 떠나야 했는지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었나요
내 모습이 정말 싫어요
또 다른 사랑을 찾아야 하나요
내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얼마나 심오한지 몰라요. 함경문씨가 작사했는데 “아직도 눈물이 남아있나요.” 그다음에 나오는 “내 모습이 정말 싫어요.” 이게 우울증 아닙니까? “내 모습이 정말 싫어요.” 여기에 보면 “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그대가 왜 나를 떠나야 했는지” 이게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그대를 사랑했던 그 나를 사랑’했죠. 인간은 자기를 못 떠나는 거예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자가 있다.’ 그걸로 끝이 아니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그대를 내가 좋아했는데 이제 와서 왜 떠나야 하느냐? 그 이별의 끝은 어디입니까? 내가 눈물도 흘려봤는데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었나요?’

이제는 흘릴 눈물도 안 남아 있어요. 흘릴 눈물도 남아 있지도 않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런 내가 싫다는 겁니다. 기껏 대안이 “또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하나요. 내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물어놓고 답변도 안 하고 노래 끝나버려요.

여러분의 끝은 어디죠? 아주 심각하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끝은 어딥니까? 시작을 여러분들이 안 했어요. 그렇다면 끝도 여러분들이 안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시작과 끝을 물을 자격이 안 돼요. 시작도 주님이 시작해서 주님으로 끝나는 거예요. 말씀이 스스로 침입했고, 말씀이 스스로 이루었고, 말씀이 스스로 완성하는 겁니다.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에요. 이러한 말씀 자체적인 활동에 대해서 비슷한 이야기가 찰스디킨즈(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1870)의 소설에 나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1843)이라는 소설인데 국민학교 때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스크루지 할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스크루지 할아버지 이야기에서 어릴 때라서 뭔가 잘라내고 받아들인 게 있어요.

스크루지 사무실에 밥이라는 부하직원이 있었습니다. 그 직원이 하도 추우니 사무를 못 볼 지경이라서 석탄 하나 그것도 몰래 난로에 집어넣으려 하다가 걸린 거예요. “이게 어디서 춥다고 석탄을 넣으려고? 석탄 아까워. 집어넣지 마!” 그런 대사가 나와요. 물론 지금은 지옥 불을 지피는 그 원료가 우리 자신이지만. 우리 육체의 용도가 그거예요. 계속해서 죄를 집어넣어야 지옥 불이 활활 타올라요. 마귀가 주된 원료가 되고요.

직원이 석탄 좀 넣으려고 하다가 걸려서 “옴마야!” 한 거지요. 스크루지 할아버지가 “네가 나 아니면 밥 못 먹고 사는 것 알지?” 하는 식으로 석탄만 아까워하는 그 대목에서 어린 제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었습니다. 그런데 프레드라는 조카가 스크루지에게 “외삼촌!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함께 하시죠. 성탄절이잖아요.” 하니까 “크리스마스 그게 뭐라고! 돈 아깝다.” 그랬어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죽 들으면서 내가 못 받아들였던 것이 있어요. 넷의 유령이 나타났다는 그 점이에요. 그때는 교회를 안 다녔으니까 그걸 못 받아들였어요. 그 네 유령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갖고 온 유령들이었어요. 스크루지라는 그분이 모르는 자기의 과거, 잃어버렸겠지요, 그 자기의 과거를 모르지요, 자기의 현재도 모르지요, 자기의 미래도 모르지요.

인간은 어느 누구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릅니다. 이걸 누가 갖고 오느냐? 예수님이 자신의 육신으로 우리의 과거, 우리의 현재, 우리의 미래를 앞당겨 표출을 해줬어요. 표출을 해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그 세가지의 우리의 과거, 우리의 현재, 우리의 미래를 우리 속에 입력을 시켜놓은 겁니다.

우리는 생소한데, 우리는 낯선데 알지 못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님의 영이 들어와서 “네 과거는 이랬고, 네 현재는 이렇고, 네 미래는 이렇다”라는 것을 현재, 과거, 미래의 삼중적 시간관을 만들어서 집어넣은 거예요. 그게 뭐냐? 성령 안이에요.

그래서 성령 안은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스노우볼. 여러분, 스노우볼 알아요? 투명한 공 안에서 눈이 막 내리는 것이 있어요. 거꾸로 들면 눈이 막 내려오지요. 글리세린이라는 물질을 채우고 그 안에 이런저런 구성품을 넣어서 만드는 거예요. 이를테면 그 스노우볼안에 특별한 시간이 다 들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과거,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현재,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미래가 한꺼번에 다 들어있습니다.

들어 있는데 우리의 육신 대신 예수님의 육신이 죽어야 하는 그것이 일종의 과거 현재 미래가 햄버거의 패티처럼 중앙에 들어가 있어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게 로마서 6장이에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나와 함께 죽은 자는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자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안의 중심에 들어갑니다. 십자가가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의 미래와 우리의 과거는 없더라도 남아 있는 것이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중에서 ‘현재의 현재’를 우리가 육신으로 갖고 있어요.

우리의 육신이 예수님이 육신이 겪었던 것을 그대로 대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복제하고 있어요. 삶과 죽음이 같이 있는, 공존하고 있는 모습의 육신, 살아 있는데 이미 죽었고, 죽어 있는데 이미 살아 있는 그러한 체험을 현재 성령 받은 육신은 겪는 거예요. 그래서 사는 게 그렇게 힘들고 집요하게 생존의 의지가 우리 육신 속에 남아 있는 양 강렬해요.

그런데 그 육신 속에서 연결된 것이 뭐냐? 우리의 ‘과거의 현재’지요. 우리의 ‘과거의 현재’, 이미 죽었던 내가, 하나님께 저주받아야 마땅한 그 육신이 아직도 우리 속에 작렬하고 있습니다. 다시 친절하게 말씀드리면 우리 육신을 주님이 대신 먼저 담당하셔서 처리했어요. 그 육신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그렇게 된 거예요.

아버지에게 마땅히 버림받아야 할 육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과거라는 이름의 현재’에 그 육신을 갖고 있어요. 우리의 육신은 우리의 과거지만 우리가 느끼기에는 현재로 느껴지는 거예요. 이걸 말로 표현하니 상당히 힘든데요.

고린도후서 12장의 사도바울의 말을 보면 쉬워요. 사도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갔습니다. 1층, 2층, 3층천에 올라갔어요. 삼중으로 되어 있는 구조를 본인이 느끼게 된 거예요. 셋째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셋째 하늘이란 이미 자신의 미래의 현재에요. 현재인데 어떤 현재인가? ‘미래의 현재’, 미래에 내가 될 수밖에 없는 그 미래의 모습을 현재에 자기가 느끼고 있으니까 ‘미래의 현재’에요.

그게 고린도후서 12장 2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런데 12장 7절에는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현재의 현재’에요. 현재 사도바울이 갖고 있는 육신의 현재 모습입니다. 아파 죽어요. 질병 때문에, 사탄의 가시 때문에요. 너무 아프기에 사도바울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요. 몇 번이나? 세 번씩이나 기도했어요. 그 가시를 빼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답변은 너무나 냉혹하고 냉정합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 “사탄의 가시도 복이니까, 그것도 은혜니까 그냥 간직하고 있어라.” 왜? 지금 너의 용도는 복음이 나와야 하거든요. 주님의 살아계심이 나와야 해요. ‘사탄의 가시가 너에게 아주 최적화되어 있다.’ 적절하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현재 저나 여러분에게 처한 모든 환경은 성령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최적화된 겁니다. 무엇에 최적화되었는가? 주님을 섬기는 데 최적화된 그런 구조고 상황이에요. 그래서 ‘현재의 현재’의 육신은요, 경계선에 있어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성령 받지 않은 사람, 아직도 죄에 대해서 살아 있는 사람, 죄로부터 도망치려고 애쓰는 사람,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의 특징이 그거예요.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역기의 바벨처럼 한쪽은 언약이 있고 한쪽은 죄가 있습니다. 이 둘을 내가 균형 맞추는 것이 아니에요.

이 둘의 관계는 언약 관계에요. 주님이 주님의 언약을 새언약의 취지와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우리의 육신을 충분히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는 거예요. 죄가 계속 육신을 통해서 나오게 하시고, 그 죄에 대해서 일체 기억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성과가 이쪽 편에 있어요.

따라서 성도는 예언자가 된 겁니다. 공존하니까요. 현재와 미래가 한 몸에 공존하고 있으니까요. 이 말씀이 에스겔 37장에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에스겔을 죽음의 골짜기로 데려갔어요. 하나님이 죽음의 골짜기의 뼈들을 보여주시면서 말을 거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해요.

3절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라고 먼저 물어요. 대책이 없지요. 현재는 뼈만 있습니다. 그 미래가 어떻게 되겠는지를 물어요. 그러나 인간은 미래에 대해서 몰라요. 그때 에스겔이 하는 말이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즉 “그 미래는 주께서 아시잖아요.” “오케이”

그러고는 시키는 대로 하게 되는데 그 시킨 것이 뭐냐? 4-5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뼈들에게, 그것도 바짝 마른 뼈들, 그렇게 죽은 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뼈들아! 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 막히고, 코 막히고, 입이 막히고, 모든 것이 막혀 있는 이 죽은 자들아. 주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들었더니만 거기서 주께서만 아시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다 나오는 거예요.

이게 스노우볼이에요. 스노우 볼 바깥에 있다가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 안은 말씀의 세계에요. 이 말씀의 세계에 들어오게 된 이 사례, 이 경우를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으로 줬어요. 말씀을 줬습니다. 줬는데 그들이 실패했어요.

실패한 이유가 뭐냐? 그들은 스노우볼, 투명한 구의 생각은 못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지키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자아가, 내가 저 말씀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잘 되겠지’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모세는 다른 이야기를 해요. 모세는 선지자니까요, 미래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으니까.

신명기 29장 15절에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 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니” 곧 ‘우리와 함께 하는 이 언약은 지금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한 자들에게까지도 계속해서 지속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미래까지 가는데 그 미래의 모습은 신명기 32장 15절에 미리 이야기를 해요.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즉 ‘너희들은 나를 버릴 것이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너희는 사탄을 섬길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잘못은 뭐냐? 자기가 정규직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율법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으니 정규직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새언약이 올 때까지 그들은 비정규직이었습니다. “나가!” 하면 끝나는 거예요. 회사에서 나가라면 끝나는 겁니다.

오늘날 신약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정규직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말씀을 봅니다. ‘이 말씀대로 지켜서 나는 영원히 천국을 보장받는 사람’이기를 원해서 이 말씀을 보는 거예요. 성령이 오지 않을 경우에는 그래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비정규직, 옛날 율법을 대했던 이스라엘과 똑같은 사고방식인 것을, 탈락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오면 어떻게 되는가? 성령이 오시게 되면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 10:17)라는 이 말씀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서 내가 구원받았다’라고 우기는 것은 이 육신의 본성에 해당하는 것이고, 두 개 다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둘 다가 같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자가 되고 그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거든 설교 다시 들어보세요. 이 육신이요, 자아를 자꾸 구원시키려고 해요. 이 죄가. 자기를 구원시키려고 육신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나는 여기 있었고, 나는 언제 교회 다녔고, 언제 말씀을 봤고, 언제 성령을 받았다는 식으로 자꾸 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안에 작용하는 그것을 죄라고 규정하는 것은, 모든 시작은 예수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스스로 말씀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를 참여시킨 겁니다. 그래서 그 참여시킨 그것과,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이 욕망의 둘이 다 공존하면서 이 둘을 다 보게 하는 이것이 오직 내 구원받음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사용한다는 그 자체에서 기쁨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뭐냐? “죽은 자들아! 하나님의 말씀이나 들어라.” 말씀이 우리 안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완성하는 기쁨, 그 기쁨 외에 다른 기쁨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뭘 하셨느냐, 뭘 어떻게 하셨느냐에 대해서 도무지 우리가 관심이 없는 이유는 처절하게 우리 육신이 생존하려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집착 때문인 줄 압니다. 육신이 있는 한 이 집착을 버릴 수 없고, 미리 구원받는 그것도 계산해 내서 이득을 얻고자 하는 그 육신, 우리 손으로 처리할 수 없는데 이제는 주께서 처리해 주시니 그 자체로만 늘 감사케 하고 기쁨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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