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것
2025년 2월 9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8-9
(10: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두 개의 조치를 마련하신 것은 인간 배후에 있는 악마를 두 번 다시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오지 못하고 차단시키기 위함입니다. 첫 번 조치는 ‘율법 프레임’입니다. 즉 법을 지키게 되면 의로워지는 체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으로 모든 인간을 돌돌말아 찢으므로서 법으로 자신의 가치를 챙기려는 자는 같이 찢어집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4) 첫 번째의 것인 율법에서 우리가 빠져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챙기려는 식으로 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똑똑함’입니다. 벌써 악마는 우리 인간들을 똑똑하는 자존적 존재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운명은 자기 손으로 책임져보려는 겁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도 이런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 19:18-20)
이 말씀에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청년이 예수님께 물으므로서 이 부자 청년이 시도하는게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자기 힘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다 수행해서 그 근거로 영생을 얻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부자청년 자신도 알지 못하는 한계를 말해주십니다. “모든 것을 다 팔고 너는 아무 것도 없는 나를 따르라”(마 19:21)
이 부자 청년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게’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보다 더 심도 있게 예수님 곁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로 뽑아세운 인물이 있습니다. 가룟유다입니다. 또 한 사람은 예수님 마지막 순간을 함께 있던 자입니다. ‘독똑한 강도’입니다.
우선 ‘똑똑한 강도’부터 보겠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 23:39) 즉 이 똑똑한 강도는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신뢰하지도 않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쪽에서 자기를 신뢰할 만한 증거를 준다면 당신을 메시야로 믿을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다른 강도는 머저리, 바보, 등신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자 예수님도 자기와 똑같은 쓸모없는 형편으로 나란히 십자가에 달린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을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머저리 같은 강도는 ‘저희들과 같이 십자가 달리신 것은 주님이 주의 일답게 하시는 일이기에 이 일에 자신을 참여시켜 주님되심만 드러내어 달라’는 심정을 갖고 있습니다.
즉 머저리같은 강도는 결코 자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의 당연히 형벌을 받는다고 여깁니다. (눅 23:41) 하지만 저분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저분의 하는 일로 인하여 사형집행장에 합류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머저리같은 강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즉 바보같은 강도는 첫 번 프레임(갇히게 하는 액자)에서 두 번째 액자로 옮겨왔습니다. 이번에는 가룟 유다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생각은 다릅니다. 가룟유다의 모든 행위가 ‘예언’에서 진행된다는 겁니다. 즉 첫 번 프레임에서 둘째 프레임으로 넘어오는 모든 증거는 예수님께서 손수 장만하시는 겁니다.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5) 그런데 가룟유다는 스스로 예수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분이 과연 나를 구원할 구원자 맞을까”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굳이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는 제자를 뽑아 자기 곁에 두신 이유는 그에게 악마의 본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가 계속 예수님과 같이 하면서 한 일은 과연 예수님의 주장과 현실이 일치되는지를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었습니다. 내린 결론은 이러합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현실과 점점 상관없이 괴리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를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6:24에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움직임은 모두 사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예언된 내용이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이점을 빠트린 겁니다. 그리고 가룟유다 자신도 하나님의 예언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마 27:8-9)
그 뒤 제자들의 모든 행위도 전부 예언에 맞추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마 26:31) 진짜 예수님에 대해서 가룟 유다는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겁니다.
가는 끝까지 자기 인생을 자기 책임하에 두고 자결합니다. 예언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에 나머지 11제자도 예수님 버리고 다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왔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은 예언대로 되어짐을 알게 됩니다. 즉 두 번째 프레임은 십자가 사건없이 들어설 수 없는 곳입니다.
즉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일어난 십자가 사건은 최초와 최후가 그 현장에 같이 있습니다. 창세 전에 구원받기로 선택된 자(생명책)와 창세 전에 저주받기로 된 자(행위책)와 구분을 예수님만 행하실 수 있는 십자가 공로로 결정나버립니다. 이 사실을 역시 성령받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그런데 이 대상자는 인간이 선택할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일방적으로 부르심을 입어서 두 번째 프레임(천국)에 들어온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당연히 가짜가 있을 수 있지요.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8:35-36)
이 모든 것이 우리 인간이 무능하기에 발생되어야 될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자기 무능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어떤 경우라도 예언의 결정에 순응하면서 이 자체를 사랑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3강-히브리서 10장 8-9절(예언에서 예언으로)250209-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8-9절입니다.
히브리서 10:8-9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첫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기 위해서는 여기에 인간이 개입되는 것이 아니고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가 여기 삽입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 멈추느냐 하면, 첫째 것에서 멈춘다는 거예요. 첫째 것에서 멈추는데 첫째 것도 살리고 둘째 것도 살리는 게 아니고 첫째 것을 폐하시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첫째 것을 폐하신다.
이것은 뭐야 같으냐? 첫째 것을 가지고 멍석말이하는 것과 똑같아요. 둘둘 말아서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마구 패버리죠. 첫째 것 안에 인간을 보쌈하듯이 쌈 싸서 첫째 것, 율법을 폐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들어있는 인간도 찢어버리는 겁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왜 쓸데없이 하나님께 영광도 안 되는 네가 나서냐고 찢어버리죠. 찢어버리는 그 대목이 골로새서 2장 13-14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린다고 말을 이렇게 길게 했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이걸 찢어버리는 겁니다. 찢어버리면 첫째 것 가지고 구원해 달라는 모든 시도가 같이 찢겨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첫째 것이 뭐냐? 첫째 것은 8절에 보면 그게 바로 율법이에요. 법이에요, 법.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제자들에게 나중에 보면 정말 간단하게 알아듣게 이야기 한 대목이 나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모든 성경 말씀을 내가 인수인계 한다. 네가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인수인계해서 내가 완성한다.’
34절에 보면, 어떤 경우라도 너희끼리 맹세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늘로 맹세한다, 하나님 이름 걸고 맹세해라, 땅으로 맹세하라, 예루살렘에 맹세하라, 하는데 34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왜?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니까요.
예수님의 이러한 도발적인 설교는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분노를 낳았습니다. 이런 거죠. ‘뭐 이런 게 있어?’ 사람은 자기가 한 게 있을 때 자기 자긍심이 생기기 마련이에요. 자기 존재 이유가 채워지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자신을 보고 떠미는 거예요.
떠미니까 떠밀린 인간이 가만있겠습니까? 인간이 도로 예수님을 떠밀어 버리죠. 그런데 그건 예수님이 유도한 거예요. 떠밀도록 유도한 겁니다. 주님께서 떠밀려 가면서 발생한 게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떠밀려 가면서 그러함에 성령을 통해, 사도를 통해서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는 게 뭐냐?
너희들은 첫 번째 프레임에서 못 벗어났다는 거예요. 프레임이라고 하는 것은 그림을 고정 시키는 바깥의 액자를 프레임이라고 해요. “너희들은 어떤 액자 안에 갇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프레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첫째 안의 프레임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거예요. 중요합니다! 첫째 프레임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말은 둘째 프레임으로 건너올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듣는 인간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분이 나쁘죠. 그것이 예수님 돌아가시고 나서 사도 바울의 편지 속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무능하다.” 무능한 자는 저주고 복이고 해당 사항이 안 돼요, 자체가 무능하기 때문에.
둘째 것이 없으면, 예수님이 오셔서 제시하려는 둘째 것이 없으면 인간은 대단히 유능해요. 그리고 스스로 자기를 유능하다고 그렇게 간주합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왔을 때 자기를 유능하게 본 거예요. 그런데 그 부자 청년이 예수님과 대화합니다.
너 왜 왔냐고 하니까 “영생 얻으러 왔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하면서 그동안 자기 쪽에서 한 유능한 것을 제시해요. “나는 어릴 때부터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라고 자기 유능을 이야기하면서 그다음에 나온 20절의 말씀을 보면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합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해요, 부자 청년이 예수님 보고. “제가 아직 더 할 게 남아있습니까? 알려만 주시면 마저 채우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기가 차서, ‘너는 프레임에 갇혔다는 사실을 모른다.’라는 거예요.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교회 나와서 열심히 목사님 말씀도 믿고, 시키는대로 행하면 뭔가 자기는 유능하고, 유능하고 계속 유능해서 구원받는 데까지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너의, 그 청년의 프레임을 작살내는 거죠.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라오너라.” 아무리 자기가 유능하고 뭐든지 할 수 있고 ‘영생이라면 영생을 얻는데 뭔들 못하리.’라고 하는데 본인도 자기가 무능한 마지막 지점을 몰랐던 거예요. 주님만 알고 있었던 겁니다. “모든 것을 팔아라.”
그때 갑자기 청년이 근심하면서 “안녕히 계세요!”하고 떠나버렸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일관적 원칙인데요, 인간은 절대로 첫째 프레임에서 바깥으로 나오면 안 돼요. 그러면 예수님이 굳이 나중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유대인들이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잖아요?
속죄제와 번제를 드릴 때 그들에겐 희망이 있었습니다. 다른 민족하고는 특별하게 차이 나는 그러한, ‘하나님의 율법을 주셨는데 왜 줬을까, 왜 줬을까? 법을 왜 줬을까? 지키라고 줬을 것이다. 지키면 우리는 구원 되잖아.’ 굉장히 간단한 문제로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차후에 준비됐다는 사실, 그 취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이 선망하는 율법과 함께, 약속과 함께 그들을 찢어버릴 거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딱 정리되는 게 뭐냐? 하나님께서는 첫째 것과 둘째 것을 둘 다 준비했다는 그 사실이에요. 왜, 왜 준비하죠?
첫째 것과 둘째 것 사이에 순서를, 절차를 거기다가 깔아놨거든요. 첫째 것을 거치지 않는 자는 둘째 것에 올 수 없는데, 인간들은 첫째 프레임에 갇혀서 둘째 것으로 넘어올 수가 없어요. 넘어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인간은 자기한테 절망해야 하고 그리고 주님한테 희망을 걸어야 하죠.
이게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에게 절망을 해야 해요. 요한계시록에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 나오는데 그 심판의 기준에 대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여러분 잘 알다시피 책이 두 권이 있어요. 자, 마지막 심판할 때 두 권의 서로 각기 다른 책이에요. 이 책에서 저 책으로 못 넘어가요. 이 책에 있는 자는 이 책대로 운명이 결정되고 저 책에 있는 자는 저 책에 있는대로 이미 운명이 확정되었습니다.
두 책의 명단대로 가는데 그 두 책이 있다는 말은, 인간은 책 안에 갇혀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책 안에 갇혀 있어요. 첫째 책은 행함 책인데 나름대로 열심히 바르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열심히 사는데 그 책에서 못 빠져나와요. 행함책의 대가는 뭐냐? 행함책은 사망과 음부의 불 못에 던지는 게 행함책이에요.
행함책에 갇혔는데 지옥 불에 들어가요. 주의 뜻은 뭐냐? ‘누가 너보고 행하라고 했어? 누가 너보고 행하라고 했냐고? 행하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는 거야. 왜 네가 나대? 네가 왜 나서? 네가 나서는 이유가 뭐야? 네 행함으로 네 운명을 네가 확정 짓겠다는 그 의도잖아. 그건 내가 만든 인간이 아니야. 그건 악마가 끼어든 인간이야.’
그 인간을 내가 안 만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걸 천국에 넣어줄 이유가 없죠, 하나님께서는. “처음 만든 네 모습 가져와!” 못 가져오죠. 이미 마귀가 와서 “나도 신이다.” 하고 설쳐대는데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한다고 나서는 판에 ‘이건 내 게 아니네? 이건 짝퉁이다. 내가 만든 인간 아니잖아.’ 그러면 하나님이 친히 만든 인간은 어떤 인간입니까?
등신 되는 거예요. 등신, 머저리, 바보, 천치 그거예요. 지금 바보, 머저리, 천치 이런 존재를 누가 똑똑하게 만들었느냐 하면 마귀가 개입해서 똑똑하게 만드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두 강도를 배치해서 최초와 최후가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그 십자가 사건의 유지와 반복이에요.
거기에 강도가 둘 나오는 데 의도적이에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 옆 좌우에 배치를 했습니다. 강도가 나오는데 어떤 강도가 나오느냐? 똑똑한 강도가 나와요. 똑똑한 강도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나는 당신을 안 믿거든. 예수여, 나는 당신을 안 믿는데 나는 당신을 신뢰할 수가 없어. 그런데 나를 신뢰할 만큼 증거를 나에게 주면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당신을 믿을 용의가 있습니다.” 이게 똑똑한 강도에요. 아주 똑똑한 강도에요. “지옥에나 가라!”
요한복음 2장 2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세요. ‘내가 나 됨은 사람에게 증거를 찾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나는 사람에게 신뢰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첫째 프레임 안에 철저하게 갇혀야 하고, 행함책 안에 철저하게 갇혀 있어야 해요.
두 번째 속에, 두 번째 책 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을 통과해야 하느냐? 예수님의 십자가 취지를 통과하는 자만이 두 번째 프레임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 두 번째 프레임이 어떤 데냐 하면, 악마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장소에요. 악마가 올 수 없는 공간, 이게 두 번째 프레임, 두 번째 것이에요, 두 번째 것.
그런데 그 절차라고 했잖아요? 첫 번째 두 번째 중에서 골라잡아라, 가 아니라 첫 번째를 거치지 않으면 두 번째에 못 온다고 했잖아요. 첫 번째에서 두 번째로 오는 데 여기에 철벽수비가 있어요. 김민재, 우리나라에서 최고 수비수, 세계에서 제일 수비 잘 한다는 김민재처럼 철벽수비가 있는데 철벽수비에 대해서 제가 두 사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은 가룟 유다예요. 또 한 사람은 똑똑한 강도입니다. 똑똑한 강도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렸죠? “나는 당신을 신뢰할 수 없는데 신뢰하게끔 해주면 당신을 믿을 용의가 있다.” 가룟 유다는 좀 복잡해요.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 의해서 최측근으로 열두 제자로 채택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첫째 프레임, 첫째 것 안에서 예수님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가룟 유다에요.
가룟 유다는 나름 굉장히 진지했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구원받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 가룟 유다 입장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님 당신은 나를 실망시켰다.’라는 거예요. 가룟 유다는 계속 대조해 봐요. 예수님이 하는 말과 현실 돌아가는 그것과 계속 대조하고 대조하니까 그 차이가 점점 벌어져요.
‘내가 어디쯤에서 발을 뺄 것이냐?’ 다시 말해서 가룟 유다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배신하기 이전에 예수님이 본인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가룟 유다는 분노하고 있어요. ‘뭐야, 이게?’ 요즘 말로 하면 교회 50년 다녔다, ‘50년 다녔는데 이게 뭐야?’ 가룟 유다는 보통 사람 같으면 ‘에이, 잘 먹고 잘살아라. 나는 내 길 간다.’ 이러면 되는데 주님께서 제자가 되도록 심어 놨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친히 심어 놨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은 당신 갈 길 가세요. 나는 내 갈 길 가렵니다.’가 아니라 여러 가지 감정으로 한 묶음 되어 있어요. 독한 감정이죠. ‘당신이 내 인생 조져 놨다. 나 어떡할 거야, 이제 와서? 당신 말대로면 지금 곧 하늘나라가 와야 해. 안 오잖아, 하늘나라 안 오잖아. 당신 말대로 하면 지금 수많은 당신의 팬들이 나라를 뒤집어엎어서 당신은 왕이 되고 제자들은 장관이 되고, 이렇게 돼야 하잖아. 그런데 안 되잖아. 지금 점점 더 권력으로 밀리고 있잖아. 어떡할 거야? 3년 동안 내 청춘, 내 재산 다 버려놓은 것 어떡할 거야?’
가룟 유다는 똑똑합니다. 굉장히 똑똑해요. 그런데 가룟 유다가 놓친 게 있습니다. 그 놓친 것을 평소에 예수님께서도 계속 말씀하셨죠. 마태복음 26장 24절에 보면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뭐가 없는지를 지적합니다. 그게 뭐냐? 가룟 유다는 예언을 안 믿었어요. 결정적이죠. 예언을 안 믿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와야 한다. 예수 당신은 거기에 부응해 줘야 해. 왜? 내가 당신을 위해 애쓰고 있으니까. 이게 우리 사회잖아. 이게 인간의 정상적인 사회잖아.’ 뭐가 빠졌죠? 하나님의 예언하심을 빠뜨렸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1절에 보면 베드로가 칼을 빼서 예수님을 지켜주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 “칼을 도로 꽂아라.”라고 하면서 54절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네 뜻대로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예수님은 지금 계속해서 이 모든 경우들이 예언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다음에 56절에 보면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저들이 나를 잡으러 온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27장 8-9절에 보면 가룟 유다에 대해서도 예언되어 있어요.
27장 5절에 보면 가룟 유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해놓고 그다음에 8-9절에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뤄졌다는 거예요. 율법을 인간이 지켜서 구원받겠다, 주께서 율법과 같이 인간을 찢어버린 이유가 예언이 예언대로 되는 거예요.
예언이 예언대로 되면서 그 사이에서 인간은 뭐냐? 이래도 저래도 무능함이 드러나야 해요. 이 무능한 인간, 이 바보, 등신, 머저리 같은 존재, 천치, 바보 같은 인간인데 이게 처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바보, 머저리, 천치.
마귀가 거기다가 똑똑함을 집어넣었어요. ‘선악을 알면 네가 신처럼 된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다는 걸 아시겠습니까? 두 개의 책이 있는데 하나는 행위책이고 하나는 생명책이에요. “나 생명책 선택할래.” 그렇게 구원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둘 다 책을 선택할 입장이 아니고 생명책에 있는 사람도 예언대로 되고, 행위책에 있는 사람도 예언대로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담의 모든 인간은 행위책 안에 다 들어있어요. 따라서 생명책 안에 있는 자는 없어요. 없는데 주님께서 행위책, 다시 말해서 율법을 거쳐서 두 번째 프레임, 생명책으로 혼자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주님한테 어떤 권한이 생겼느냐 하면, 첫 번째 프레임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 두 번째 생명의 영생을 줄 수 있는 권한을 예수님이 갖게 된 겁니다.
그러면 그걸 갖는 첫 번째 모집된 사람이 열두 명이었어요. 열두 명인데 가룟 유다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같은 다른 열한 제자를 봐도 저들이나 나나 똑같이 모조리 위선자라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예수를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도 그게 “예수님을 이용하겠습니다, 이용하겠습니다.” 하는 위선자에 불과하다는 그걸 발견했죠, 가룟 유다가.
그래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 못 믿으면 같은 동료인 제자들은 믿어야 하는 데 스승도 못 믿고 같은 동료인 제자들도 못 믿었어요. 믿을 수가 없었어요. 아니 신뢰가 전혀 가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 똑같이 똑똑한 강도가 예수님에게 이야기했고, 가룟 유다도 못 믿겠다고 했던 그것이 첫째 프레임을 사수하는 철벽수비에 해당하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이 가룟 유다의 생각과 그리고 똑똑한 강도의 생각을 뛰어넘지 못하면 두 번째 프레임, 생명책에 들어온 자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가룟 유다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탄이라고 했단 말이죠. 여러분, 사탄보다, 악마보다 똑똑한 존재 있습니까? 없습니다.
백날 공부하고 백날 철학과 과학과 신학을 공부해도 사탄 아래쪽에 있어요. 가룟 유다 아래쪽에 있습니다. 사탄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어요. 가룟 유다의 생각을 우리가 진지하게 한번 받아볼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그게 우리의 한계거든요.
“믿는다는 것?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하고 있는 거잖아.”라고 철벽수비, 김민재 가룟 유다가 이야기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너나 나나 똑같잖아. 그런데 뭘 믿어? 자꾸 사기 치지 마. 우리 가운데 믿는 자가 어디 있어? 없어.” 가룟 유다의 발언이죠.
“나만 그래? 나만 쓰레긴가?” 열한 제자가 예수님한테 어떻게 했습니까? 열한 제자가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어떻게 했어요? 나름 바빴어요.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했고요. 베드로는 추후의 사태까지 감안 했어요. 예수님이 맥없이 죽었잖아요. 그럼 남아있는 잔당은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이 처형받은 식으로 자기도 체포되고, 구금되고, 사형당할 게 뻔한 데 사전에 어떤 조치를 해야 해요?
“나는 이 계엄에 반대했습니다.” 이런 이야기. 지금 계엄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모르겠는데요, “나는 애초부터 이 계엄에 반대했습니다. 계엄은 일방적인 예수님의 생각이고요.” 그러니까 재판관, 다른 사람의 시선이죠, 베드로가 거기에 대해 반응을 보이죠. “예수? 나 저주한다.” “안 믿는다고?” “저주한다!” “어? 아직 감이 안 오는데?” “내가 분명히 이야기한다. 예수님 저주한다, 됐냐!”
사람들이 “이야, 자기 스승을…? 우리가 저 베드로에 대해서는 계엄파에 속하지 않는다고 다시 고려해 볼까?” 이러고 있는데 “꼬끼오!!” 닭이 우는 거예요. 베드로가 뭘 빠뜨렸느냐? 예언을 빠뜨렸어요, 예언을. 모든 것이 예언대로 아무 하자 없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빠뜨렸습니다. 왜? 인간은 무능하기 때문에요. 인간은 무능합니다.
마귀가 무능한 인간을 유능으로 바꿔놨어요. 주님은 그 바뀐 유능을 무능으로 바꾸십니다. 무능으로 바꾸는 그 방법이 첫째 프레임 안에 가두어 두는 거예요. ‘네가 노리는 게 뭐야? 똑똑한 사람 되고 싶어, 바보 등신 머저리 되고 싶어?’ 이걸 마귀가 멱살 쥐고 흔들어 가면서 지금 우리한테 묻고 있는 거예요. ‘갈수록 똑똑한 사람 될래, 머저리 등신 바보 될래?’ 묻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머저리 같은 다른 강도는 말합니다. “나 바보 될래.” 저 똑똑한 강도는 “지금이라도 당신이 나를 구원하면 믿을 용의가 있습니다.” 이게 똑똑한 강도에요. 머저리 강도는 “주님의 주되심에 대해서 저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이게 하나님이 처음 만든 인간 모습이에요. “주님이 주님 된다면 그걸로 저는 오케이, 입니다.”
그런데 뭐가 방해했습니까? 저 똑똑한 강도처럼 자기도 조금 전까지 주님을 막 비난했거든요. 마태복음에 보면 나와요, 강도 둘이 다 예수님을 비난하게 되어 있어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44) 그런데 이제 와서 “주님, 저 똑똑한 강도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똑똑한 나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나는 내가 머저리, 등신, 바보가 돼야 비로소 나로부터 자유하다는 생각을 왜 한 번도 그동안 못 했느냐는 그 말입니다. 우리 존재의 의미가 뭔데요? 잘난척해 봐야 첫째 프레임, 행위책, 지옥 불 가잖아요. 마귀가 그렇게 만들어놨잖아요. 왜 자꾸 마귀한테 농락당하고 협박당합니까?
자기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사람들중 한 사람이 멜 깁슨이었어요, 영화배우 멜 깁슨. 얼마 전에 LA에 큰불이 나서 멜 깁슨 저택이 200억인데 홀라당 다 탔습니다. 멜 깁슨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나로부터의 자유로움, 나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그 전에 집 팔려고 내놨었는데 안 팔렸어요.
“집 팔래, 내가 태워줄까? 내가 다 태워버릴까?” 돌아서서 나중에 결과로 볼 때 주께서 내 집을 다 태우는 식으로, 똑똑한 나로부터 나를 빼내 주신 거예요. 지옥 가는 강도로부터 머저리 같은 강도로 빼내 주신 거예요. 첫째 프레임에서 두 번째 프레임으로 빼내 주신 겁니다.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돈 200억 벌어서 LA 고급 저택에서 살래요, 아니면 집이 불에 안 타는 게 좋습니까? 집이 안 타는 게 좋아요, 어느 쪽이 좋습니까? 200억짜리 집 없죠? 감사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복잡한 절차 필요 없어도 머저리 같으면 되잖아요.
“주님의 주님 되시는 일을 마무리하는 데 있어서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이게 머저리 같은 강도,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첫 번째 프레임에서 두 번째 프레임으로 새롭게 생성된 인간이에요. 왜냐하면 그 머저리 안에는 마귀가 있는 게 아니고, 그 전에는 마귀가 있었는데 지금은 예수님의 그 무엇이, 예수님의 공로가, 하신 일이 그 머저리 안을 채우게 된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 프레임과 둘째 프레임의 절차에 대해서 로마서 8장에서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결과부터 이야기하는데요, 로마서 8장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너희들 보고 ‘너는 지옥 간다, 저주받아라.’라고 누가 너희들 보고 정죄하느냐? 이미 너희들은 죄가 없는 거야.” 왜 죄가 없냐면요? 생명책 안에 있는 사람의 시간은 자기 시간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우리에게 주어진 그 시간이에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십자라고 하는 것은 최초와 최후를 다 갖고 있다고요. 최초는 뭐냐? ‘창세 전에 이 사람은 영생 주기로 이미 영생 프레임 속에 확정된 사람이다.’ 거기에 최초가 들어있어요. 로마서 9장에서는 그걸 이렇게 풀이합니다.
11-13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야곱이 뭘 한 것도 없이, 에서가 뭘 한 것도 없이 에서는 무조건 미움 받게 되어 있고, 저주받게 되어 있고, 지옥 가게 되어 있고 야곱은 무조건 천국 가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모든 것이 예언대로 되는 거예요, 예언대로. 예언이 예언대로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야곱은 무능하죠. 에서는? 에서도 무능합니다. 우리는 에브리바디 무능해요. 뭘 열심히 해도 아무 능력이 없다니까요? 모든 것이 말씀대로 예언대로 되는데 그 앞에서 우리가 우리의 능력 가지고 짤랑대는 것, “저는 이 정도 했습니다.” 짤랑대는 이게 뭐예요, 도대체? 상황 판단이 안 됩니까?
그게 김민재예요. 가룟 유다입니다. ‘주님은 나를 실망시켰다.’는 거예요. ‘열심히 해봤는데 주님은 내가 원하는 주님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내가 당신이 하는 말이 진짜 현실이 되었는지를 현실 속에서 면밀하게 찾아봤는데 전혀 현실이 아닌 비현실이에요. ‘따라서 나는 당신이 주님 되는 걸 증거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증인 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증인으로 남겠습니다.’ 방법은 뭐냐? ‘내가 죽고 사는 것, 이거 내가 결정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가룟 유다가 일반인이 아니고 예수님이 뽑아놓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잘 증거해야 할 자로 뽑아놓은 게 열두 제자인데 열두 제자 중 하나가 가룟 유다예요. 가룟 유다를 허투로 보지 마세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가까이 모셨던 사람이 가룟 유다예요.
예수님이 가룟 유다보고 사탄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사탄의 생각과 뜻을 가룟 유다를 통해서 다 대변해 주고 있으니까 얼마나 귀한 일을 했어요? 가룟 유다는 나름대로 열두 제자로서 제자의 그 일에 끝까지 충실했어요, 예언대로지만. 그게 뭐냐?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책임지기 때문에 스스로 단두대를 만들어요.
옛날 초창기 화장실에 보면 우리 밑의 화장실도 그래요, 당기면 물이 위에서 쏟아지는 거예요. 좀 세게 당기면 물이 넘쳐서 볼일 보고 있는데 물이 막 머리에 떨어지죠. 인간은 항상 뭘 갖고 있느냐 하면, 개인용 단두대를 제작하고 있어요. 일이 잘 안되면 당겨버립니다. 당겨버리면 칼날이 아주 장렬하게 내 목을 치잖아요.
그게 내가 마지막 버틸 수 있는 나의 자존감이에요. 철벽수비입니다. 첫째 프레임이 철벽 수비예요. ‘보아라, 나는 끝까지 나 됨을 지켰노라.’ 세상이 멸망해도 자기에 대한 패배감은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김민재, 오늘 김민재 여러 번 나오네요, 철벽수비, 철벽수비에요.
바보, 등신?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주님이 말하는 그 천국, 지옥, 심판? 개나 줘 버려라.’ 열두 제자? 모조리 위선자예요. 가룟 유다가 그걸 발견한 겁니다. 예수님 따라다니는 열두 제자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가룟 유다가 발견한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도망간 베드로, 도망친 사도 요한, 사도 요한은 멀찍이 있었고요, 나머지 사람들 ‘엄마야, 나 살려라.’ 하고 다 도망가 버렸어요. 첫째 프레임의 한계를 열두 제자를 통해서 명백하게 보여줬습니다. 어떤 자도 행함책에서 못 벗어나고, 어떤 자도 생명책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언대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그 성령을 주신 사람 중에 누가 있느냐 하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사울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이 되거든요. 사도 바울이 썼던 책이 바로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로마서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이제 사도 바울은 두 번째 프레임에, 영원한 천국책, 생명책에 이미 들어와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누가 우리를 고소할 것이냐?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오? 우리는 죽었다가 살리신 분과 함께 있는데 누가 우리를 고소하리오?”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이걸 보는 많은 사람들이 ‘나 이거 믿어. 기분 너무 좋아. 진짜 나는 이 복음 믿고 살래.’ 이런 경솔한 결심들을 해요. 그런데 어디서 이게 다 넘어지느냐 하면 그 뒤의 말씀 로마서 8장 36절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바로 이 대목요.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 편이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없어요. 어떤 경우라 해도 죄가 없어요. 죄가 없는 이유가 뭐냐?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에 그래요. 유능해도 죄고요, 무능해도 죄니까, 그걸 주께서 너무 아시니까 주께서 대신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죄 없음이 돼요.
죄 없는 이유는 주님의 죽음의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죽음이 시간을 저는 감말랭이로 봐요. 감말랭이가 뭐냐 하면, 슬라이스처럼 쪼개진 시간이거든요. 슬라이스처럼 쪼개진 시간이기 때문에 쪼개진 시간을 저는 감말랭이로 표현했는데 구약의 신명기 8장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했느냐?
하루치 양식이라고 했어요. 일용할 양식, 만나.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신 8:3)
하루치 양식은 하루치 시간입니다. 딱 하루치 분량밖에 안 줘요. 이것은 뭐냐? 하루치 예수님을 증거할 용도. 더 쉽게 말해서 단위별 시간이에요. 여러분, 목감기 걸려서 허병원에 가면, 허병원 간접광고 하는 것 같은데요, 허병원에 가면 비닐에 싼 빨간 색 약물을 줍니다. 하루치의 분량씩 들어 있는 그 물약을 복용하듯이 우리는 매일 하루치 주님의 시간을 공급받는데 그것은 뭐냐?
오늘 하루를 통해서 첫째 프레임에서 둘째 프레임으로 넘어온 것은 예수님의 공로라는 것을 증거하라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없어졌는가? 과거는 없어요. 미래도 없어요. 그날그날의 양식을, 주님의 십자가 양식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예언했어요. 마귀가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마귀가 가만두지 않으면 뭘 어쩔 건데?’ 이미 주께서 우리 죄를 없게 하셨고, 또 우리가 뭘 어떻게 해도 무능하기 때문에요, 죄가 없는 거예요. 설명이 필요하네요. 우리가 죄를 안 지어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니고, 죄가 뭔지도 모르고 살기 때문에 죄지었나를 묻지도 않고 무조건 일방적으로 죄 용서해 줘 버린 거예요.
“이건 죄다. 회개하고 반성하자.” 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이게 죄가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를 정도로 우리는 무능해요. 우리는 하는 짓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능해요. 스데반 집사가 이야기했지요.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예수님도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무능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는 ‘너는 유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가룟 유다고 똑똑한 강도의 태도에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챙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여, 당신이 나를 실망시키지 말라.’는 거예요. 철벽수비라니까요. 우리는 그것을 못 벗어나요.
그러면 이것이 어디서 걸러지는가?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롬 8:36). 여기서 지식으로 용서를 믿겠다는 사람은 다 걸러집니다. 다 걸러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걸러지느냐? “첫 번째, 율법으로 구원받을래?” “에이, 힘들어서 안 돼요.” “두 번째, 예수님 십자가 믿어서 용서받고 구원받을래?” “나 그거 할래요.” 본인이 고른 사람들은 다 탈락입니다.
절차가 있거든요. 첫 번째를 거쳐서 두 번째로 나아가는 거예요. 예수님도 그 절차를 위반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를 거치게 되면 어디서 막히느냐? 가룟 유다와 똑똑한 강도에 다 막히게 되어 있어요. 목사가 구원 못 받는 이유를 알겠지요? 신학을 해서 똑똑해졌거든요. 이 신학을 하면 구원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주권 사상, 개혁주의 사상 이것이 나를 구원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걸 교인들에게 전하고 있어요. 그것이 첫 번째인데요. 그러니까 목사가 나서서 교인들을 부자 청년으로 만들었어요. “목사님, 뭘 더해야 합니까? 뭐가 부족합니까?” 지금 이러고들 있는 거예요. 우리 교회 교인들은 아예 포기했기 때문에 그것이 없습니다만.
나는 예수님 십자가를 믿는데 왜 나는 종일 죽임을 당하는 양같이 죽음에 직면하고요, 수입이 제대로 있기를 하나, 하루하루 밥 먹고 사는 것, 미래가 깜깜해요. 특히 20대, 30대. 대략 난감이에요. 어디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직장생활은 어디서 해야 할지. 결혼은 어떻게 해야 할지. 언제까지 아버지 어머니에게 짐을 지워야 할지.
아버지 어머니는 “걱정하지 마. 우리가 있잖아. 급하면 찾아와.” 그렇게 하지만 막상 닥치면 또 철벽수비가 있지요, 자존심. “엄마, 그러지 마. 나 똑똑해. 나도 내 힘으로 자수성가할 거야.” 이놈의 똑똑한 강도 이거 어쩌면 좋아요. 바보, 등신, 머저리 되기 싫어해요. 세상은 똑똑한 사람을 원하니까. 나는 그런 세상과 헤어지기 싫어요.
세상과 헤어지는 것은 뭐냐? 내가 원하는 나의 똑똑한 모습에 대해서 내가 헤어지기 싫어요. 나는 철두철미하게 지혜롭게 살고 싶어해요. 그러나 그 지혜 중 최고는 누구다? 뱀이죠. 마귀한테 우리는 한 수 배운 겁니다. ‘나처럼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다.’ 하고 마귀한테 배운 겁니다. 마귀한테 배웠는데 마지막 내 안에서 준비되는 것은 단두대, 급하면 언제든 나 스스로 죽어버릴 단두대. ‘이거 털어 넣고 칵 죽어버릴까?’
모든 공포는 탐심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예수 안 믿고 하나님 안 믿는 것이 행복할지 싶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신자는 끊임없이 악마한테 협박당하고 있어요. ‘너 아직도 부족하다, 아직도 부족하다, 아직도 부족하다. 너 그러면 죽어.’ 주님은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너는 뭘 해도 무능해. 너는 뭘 해도 머저리야. 너 바보 천치야. 오케이?’ 이러고 있다고요.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 이것은 뭐냐? 절차를 문제 삼는 거예요. “너는 첫 번째 프레임을 거쳐서 두 번째 프레임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첫 번째 프레임과 두 번째 프레임 중에서 골라잡았느냐?” 이걸 묻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두 번째 프레임에 와서 영생을 얻었다면 주께서 마귀를 풀어서 계속 쑤시는 겁니다. 뭐라고? ‘네가 예수 믿고서 환란이 오는데도 아직도 예수냐? 미쳤어? 너 머저리야? 바보 아냐 너? 네가 강도질하다 체포되었는데 그때 완전범죄가 될 수도 있었는데 부끄럽게도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면서 예수 꼴을 봐, 예수 꼴을 보라고!’
똑똑한 강도가 말합니다. “예수 꼴을 봐, 예수 꼴을 보라고! 저게 우리를 구원할 자의 모습이야? 저 모습이? 네 신세나 저 예수 신세나 똑같잖아. 믿을 사람이 없어서 저런 사람을 믿느냐, 바보 머저리야!” 구원받은 강도는 ‘내가 머저리, 바보 되는 그것이 바로 저분의 일’이 된 거예요. ‘저분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주되심의 증거로서 내가 그동안 이끌림을 받은 것이다.’ 지금 이 싸움이에요.
바보 머저리 같은 성도한테는 모든 것이, 되어진 모든 일이 영생의 자기표현입니다. 영생이 막 돌아다녀요. 머저리가 될 경우에만. 은혜 아닌 것이 없고요.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다윗이 몰락했어요. 권력을 아들 압살롬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반란군에게 축출되었습니다.
압살롬은 쿠데타에 성공해서 권력을 잡았고 다윗은 다 털어먹고 왕궁에서 떠나가는 중이니까 그때까지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울의 지파 사람들이 욕을 해댑니다.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사울은 베냐민지파 사람이거든요)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무슨 말입니까? 가룟 유다는 저주당하니까 ‘에라, 당신 내가 팔아넘긴다.’ 이렇게 했지요. 똑똑한 강도는 주님 보고 끝까지 놀립니다. “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그런데 다윗은 뭐라 합니까? “저주하신 그것도 주께서 하신 일이잖아. 주님의 예언이잖아.” 저 사람 입에서 나를 저주하는 그것, 무능한 나에게, 무능함은 공백이거든요,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저주하는 그것은 주께서 지금 나에게 저주하는 거잖아요.
그 저주하는 그것의 실제 현실은 뭐냐? ‘환난이고, 곤고며, 핍박이고 기근이고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면 너 어떻게 할래? 아직도 예수 타령이고, 아직도 정죄함이 없다는 그런 것을 병신같이 아직도 믿나? 네 현실 꼬라지를 한 번 봐라. 이런 판국에 네가 아직도 정죄함이 없다느니, 주님은 사랑이라느니 그게 되느냐?’ 그 말이지요. 그게 됩니까!
어떤 경우에 돼요? 똑똑한 나를 머저리로 만드신 그것이 주님의 놀라운 사랑임을 아는 사람만이 그게 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처음 인간으로 돌아갑니까? 악마와 한통속인데, 내가 똑똑하다고 여기는데 어떻게 바보 등신으로 돌아갑니까? 못 돌아가요, 안 돌아가요, 돌아갈 수가 없어요. 그게 한계니까요. 우리는 가룟 유다를 이해해야 하고 똑똑한 강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생각이 같으니까요.
열한 제자도 다 도망갔습니다. 그들에게 나중에 성령이 왔어요. 성령이 오니까 열한 제자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야기했어요. “모든 것은 예언이 예언대로 되었다.” 여러분, 예언을 빠트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예언이 예언대로 된 것이다. 야곱이 한 것도 없이, 에서도 한 것도 없이 최초의 상황이 마지막 최후의 상황과 일치되는 그것을 미리 보여주는 현장이 십자가 있고 그 양편에 있는 두 명의 강도였습니다.
예언 빠트리면 안 됩니다. 여러분, 말씀 안 보면 안 돼요. 바쁘다는 핑계로 말씀 안 보고 그러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3장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5-6절에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제가 마지막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여러분이 기쁨과 감사를 놓쳤거든 어디서 놓쳤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어디서 놓쳤는가? 고린도전서 7장 23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와~! 그걸 오늘 설교 내용으로 집어넣어서 설명해 볼까요?
“너는 예수님의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무능한 자의 종이 되지 말라.” 저들도 무능하고 나도 무능한데 마귀에 속한 자는 자기가 무능한 줄도 모르고 있고, 나는 성령이 임해서 내가 얼마나 머저리 바보 천치인지를 이제는 아는 기쁨과 감사, 그게 뭐냐? 예언대로 된 거잖아요. 예언 속에, 말씀 속에, 여러분의 무능 속이 예언으로 꽉 차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하옵소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지금까지 살게 하신 것이 주의 은혜라면, 거저 주신 은혜라면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바보 같아서 거저 주셨다는 사실을 이제는 기쁨과 감사로 보답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