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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4-02-02 13:29 | |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가는 길은 측량치 못하고 찾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했을 때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이 ‘하나님께 구원받는 길은 인간의 지혜로서는 알 수 없다.’ 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이렇게 부요하고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데, “그렇다면 사도바울 당신은 어떻게 해서 아느냐? 모른다면 다 몰라야지 당신만은 별종인가? 당신은 통뼈인가? 왜 당신만 아는가?”라고 나올 때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28절에 준비된 대답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복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이렇게 되는 것이 복음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은근히 이런 식으로 구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했는데 마침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식이 바로 복음이다.” 하는 식으로 딱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복음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길도 모르고 측량치도 못하고 구원받을 길도 없고 천국 갈 길도 없었다. 그런데 복음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렇게 몰랐었는데 복음이 나타났다면 복음이 나타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내 쪽에서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구원을 받겠다든지 천국 가겠다는 것은 다 헛방이며 엉터리라는 것이 계속 유지되어줘야 되는 겁니다. 그게 유지되어 줘야 복음의 능력으로만 구원된다,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된다, 이것이 계속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이 나타났기에 이제는 알았다, 그게 아니고 복음이 나타났기 때문에 ‘아, 진짜 인간들의 모든 아이디어는 다 소용 없는 것이 맞구나.’ 이렇게 되어야 돼요. 그렇게 되어야 모든 공로와 구원받는 모든 능력은 주님께 돌릴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똑똑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서 구원 받았습니다.”가 유효한 거예요.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우리가 알기에 복음이 나타난다는 것이 창세기에 복음이 나타난 것이 아니거든요. 창세기에 천지를 만드시고 이스라엘 있고 하나님이 먼저 찾아온 나라인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있었는데 그 나라가 멸망한 뒤에 복음이 나왔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그들은 뭐 했습니까? 지금 전제가 뭐냐, 33절이에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지혜를 판단해서 알아채고 그래서 천국 가는 길을 발견할 수는 없다는 것이 확고합니다. 아무도 몰라요. 하나님께서는 사람 구원 못시켜서 안달 난 것이 아니고 오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안 되고 “왜 천국 가는 길이 막혔습니까?” 이렇게 질문해야 돼요. 복음이 나타났기에 구원받았다는 말, 이 정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왜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이 안 됩니까?”가 전제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오직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야만 구원되기 때문에 인간이 주물럭거려서는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확고히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인간의 능력, 종교적인 심성과 경건함, 거룩함은 왜 안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복음은 창세기부터 나타난 것이 아니고 미리 깔아놓은 나라인 이스라엘이 먼저 나타났어요. 이스라엘이 먼저 나타나서 그들이 나름대로 하나님께로 가고자 애를 썼습니다만 다 실패로 끝났고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멸망한 그 이유가 성경에 보면 30절에,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라고 되어 있고 그 다음에 32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등장시킨 이유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순종할 인간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순종치 않는 거예요. 순종치 못하는 겁니다. 제가 설에 처가를 갔는데 처가식구들이 컴퓨터를 만지기에 보니 첫 화면이 뜨는데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간의 완전한 순종에 이르는 것이다, 라고 되어 있어요. 그걸 보고 난 뒤에 “어, 이게 성경에 없는 이야기인데 이게 누구 이야기지?” 하니까 갑자기 화를 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앤드류 머레이의 말이었어요. 그게 바로 복음을 모르는 사람의 특징이에요.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간이 완전한 순종에 이르는 것이다.”라고 적어놓았어요. 굉장히 경건해 보이지요? 그런데 딱 보자마자 “저건 성경에 없는데.”라고 했어요. 그건 성경에 없는 이야기에요. 성경에 없는데 왜 그것을 감동받고 은혜 되는 쪽으로 적어놓았을까요? 아~!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을 안 해서 그래요. 하나님과 동행을 안 하니까, 하나님은 저기 계시고 자기는 여기 있으니까 “거기 계세요. 제가 따라 갈게요.” 킬리만자로 등산 합니까? 등산하듯이 올라가면 천국갈 수 있는 거예요?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잖아요. 그의 길을 찾지 못합니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못나왔어요? 글자를 몰라요? 하여튼 주님 되시는 어른이 이야기하면 좀 말을 들어줘야지요. 순종치 않은데 가두어 두었다면 인간의 내용은 순종치 아니한 거예요. 순종치 아니한 겁니다. 이게 동행하는 사람만 알아요. 순종치 아니했다는 것을. 평소에 명품 좀 꿰차고 다닌 사람이나 프라다가 좋은 줄을 알아요. 시장에서 장바구니나 들고 다닌 사람은 프라다? 그런 것 몰라요. 이스라엘은 알아요. 동행해 봤는데 나오는 결론은 뭐냐, 아, 순종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아까 앤드류 머레이의 말과 정 반대에요. 순종치 말라는 거예요. 하여튼 말을 정말 안 들어 처먹어요. 순종하지 말라는데 왜 자꾸 순종하려 드는 거예요? 순종치 말라고 분명히 했는데! 설날이 되어서 요리를 하는데 어른들은 요리 다 잘하지요. 그런데 예닐곱 먹은 애들이 부엌에 나와서 잡채 하니 뭘 하니 하면서 지지고 볶고 있으면 엉망진창입니다. 우리 진주가 외국에 나가기 전에 파스타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온 부엌이 파스타로 엉망 되었어요. 어설프게 하다 보니 파스타 먹는 시간은 십 분인데 치우는 시간이 30분 걸렸어요. 자기가 솜씨 부린다고, “하나님, 기다려 주세요. 제가 순종해서 천국에서 뵈올 겁니다.” 뭘 천국에서 봐요? 지옥에서 보지. 순종치 아니한다는 생각이 진짜 동행했을 때만 나타나는 복음의 능력을 입은 사람들이 일관된 고백입니다. “야, 순종할 수 없구나. 순종한다는 자체가 되바라진 생각이구나.” 하나님이 말씀을 준 것은 네가 때려죽여도, 죽었다 깨어나도 순종치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왜 그렇게 목사들은 순종하라고 사기를 치는 거예요? 성경에는 순종치 아니하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었다고 하는 거예요. 가두어 두었다는 게 뭐예요? 아예 꼼짝 못하게 해두었다는 거예요. 어떤 몸부림을 쳐도 매사가 순종치 아니한 거예요. 순종해서 구원받는다고요? 어디서 사기를 쳐요, 어디서! 사기 치는 사람도 나쁘지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그 사람도 나빠요. 다 나쁩니다. 하나님과 실제로 동행을 안 해보니까 자기 잘난 맛에, 자기가 날마다 향상되는 그 재미로 교회를 수십 년 다닌 거예요.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 교인들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오니까. 2013년보다 더 나은 2014년. 인간들이야 그런 착각에 빠지지만 저 해에게 물어보세요. 연 초에 늘 해에게 비는데 그 해에게 물어보세요. “해야, 해야, 2013년보다 2014년이 더 낫나?” 낫기는 뭘 나아요? 태양은 앞으로 15억년 지나면 폭발한다는데. 나아지기는 뭐가 나아집니까? 갈수록 폭발하고 갈수록 다 박살난다는데. 우리 인생도 방향이 이미 정해졌어요. 망가지게 되어 있어요. 시간에 갇혀서, 죽음에 갇혀서, 죽음의 힘이 날이면 날마다 더 강세가 심합니다.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요, 정말. 뭐가 더 나아져요? 화평, 온유, 사랑? 몸 아파보세요, 그게 되는가? 안되지. 순종하고 싶어도 이빨이 아픈데 무슨 순종이 돼요? 몸 아파보세요. “할아버지, 세배 받으세요.” “치워라. 몸이 아픈데 무슨 세배냐. 세배 돈이나 가지고 가라.” 만사가 다 귀찮아요. 설날이라고 우르르 오지요. ‘빨리 안가나? 귀찮아 죽겠다. 인사했으면 되었다. 각자 집으로 좀 가 줘.’ 사람이 왜 자기를 자꾸 속이십니까? 타인을 자꾸 속이려고 드는데,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길은 동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못 알아드는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순종치 아니하는데 가두어두었다는 말의 전제가 뭐냐,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법이 있었다는 말이고 법이 없었을 때는 자기가 양심껏 살면 하나님께서 예쁘다, 하고 복을 줄줄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법이 오니까 이것은 지키려야 도저히 지킬 수도 없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셔서 어떤 대단한 존재도 주의 말씀 하나라도 순종치 아니했다는 것이 확정 나 버렸어요. 순종치 아니한 이유가 본인이 순종 안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었기 때문에 내가 순종하고 싶어도 주변 상황이 받쳐주지를 않아요. 우리의 주변 상황, 내 육신부터해서 모든 것이 순종치 아니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진정으로 동행하는 사람은 늘 느끼는 것이 “하나님이여, 하나님은 저를 예쁘다 하시고 동행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제가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든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한 것은 전무합니다.”라는 고백을 내뱉을 때 그야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인간도 혼자 있을 때 자기가치를 높이려고 하지 나는 순종치 못한 더러운 존재라고 낮추는 인간은 없어요. 그런데 막상 “나 참 잘났어.”라고 하다가 동행하시는 주님을 보니까 “취소! 난 순종한 것이 없어.”라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의식하면서 살기 때문에 남의 시선 의식하기보다도 주님의 째려보는 그 시선, “너 까불래?” 하는 그 눈초리를 더 의식하기 때문에 “고백할게. 난 순종한 적이 없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동행하는 장소를 십자가 안, 또는 그리스도 안,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안이라는 것은 십자가 피를 바라보면서 ‘내가 얼마나 순종 안했으면 우리 주님을 저렇게 망가지게 했는가? 내가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으면 잔소리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친히 나대신 저주를 받아야 구원이 될 정도로 저렇게 망가졌는가?’하는 것을 느낄 때에 내가 뭔가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동행하는 자,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는 알아채는데 꼭 이 말썽꾸러기, 동행하지도 않으면서 동행하는 척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이단취급 받고 말 하려고 하면 말도 못하게 만들어요. 순종, 그런 것이 성경에 없는 이야기라고 나는 그냥 사랑으로 이야기했는데 “너무 그렇게 부정적으로 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말도 못하게 만들어버렸어요. 우리 십자가마을 송 재원 씨가 쓴 글 중에서 굉장히 인상 깊은 구절이 하나 나왔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오랜 만에 설에 아버지를 만났는데 아버지에게 복음 배틀을 했어요. “이게 복음입니다.” 하니 아버지는 “그게 아니다.” 싸우다가 이제는 마지막에 복음 모르는 아버지가 결론내기를 “예수는 자기 갈 길 갔으니 우리는 그냥 뒤따라가면 된다.” 한 거예요. 그러면 동행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은 십자가 지고 자기 갈 길 가버리고 우리는 십자가지고 그 길을 찾아가고 따라간다고요?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와서 성령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요? 그런 송 재원 씨 아버지의 생각이 지금 모든 교회 교인들, 목사들, 신학자들과 똑같은 생각입니다. 동행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계룡산에서 내려 왔나?” 이렇게 비아냥대고 동행한다는 소리를 하면 영지주의자라고 욕을 하고요. 착실하게 사는 자기 삶을 자랑하려고, 바르게 사는 자기 모습을 스스로 보고 감동받고 반해버리고, 그 재미로 교회를 나와요, 그 재미로.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 이 재미로 산다고요. 낫기는 뭐가 나아요, 낫기는! 그래서 사도바울은 순종치 아니하는데 가두어 두었다, 결론을 내려버렸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을 안 하니까 더 나아진다고 하지만 진짜 하나님이 복음의 능력으로 동행한다면 ‘아, 순종치 아니할 수밖에 없음, 그것도 죽을 때까지.’ 이 육신이 있는 한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순종치 못합니다. 우리 올해 표어로 정합시다. ‘2014년도, 우리교회는 순종치 못함.’ 순종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생활, 올 12월 마지막까지 순종치 아니함에 대해서 우리가 일기를 씁시다. 순종치 아니했던 경우에 대해서. 그게 주님께서 동행하는 방법이에요. “그러면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순종했기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까?” 순종했기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순종치 아니함은 그대로 가고 긍휼을 입었기에 구원받았다는 것이 본문 30절, 31절에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초등학생도 글자만 알면 다 아는 거예요.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복음에서는 긍휼이 나오고 불쌍히 여겨주심이 나오고, 그저 불쌍히 여겨주는 것, 매일같이 눈만 뜨면 불쌍히 여겨주고 밤에 잘 때도 불쌍히 여겨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 동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천국가게 된 겁니다. 순종했기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순종 안한 티를 팍팍 내게 만들어서 순종안함과 불쌍히 여겨주심과 결합시켜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뭐가 어렵습니까? 이게 굉장히 난해한 거예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렇게 판정을 내렸어요. “순종할 수 없다.” 판정을 내렸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모든 사람’이죠, 구원받는 모든 사람에게는 긍휼을 입혀서 데려가시는 겁니다. 그러면 불쌍히 여겨준다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보니까 우리가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면 그것은 죄인이 돼요.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저주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했지요. “이 세상을 왜 힘들게 살게 하십니까?”라고 했는데 창세기 3장에 보니까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요. 우리가 사는 이곳이 뭐냐, 이마에 땀 흘리고 살면서 모든 것에 저주가 넘치는 곳이에요. 저주가 있는 곳에서 저주받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문제지요. “이 세상 왜 힘들게 하십니까?” 한다면 그러면 네가 잘난 겁니까? 그거 아니거든요. 그러면 저주받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죄인인데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의인만 갈 수 있는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는가, 불쌍히 여겼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어디에 근거해서 불쌍히 여기는가? 그것을 로마서에서 설명을 해 줬습니다. 긍휼이라는 것이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나와요. 그것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모세와 그 자손들을 보고 이야기한 겁니다. 19절에 보면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나님께서 손에 돌 판을 들려주고 하시는 말씀이, 십계명은 계명대로 주고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십계명을 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십계명의 용도가 뭐냐 하면, 네 자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순종했습니다.” 그거 하라고 십계명을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문제를 보니까 도대체 우리가 구원이 안 되는 존재고 구원될 수가 없는 존재구나.” 하는 것을 분명히 하라고 십계명을 주신 거예요. 십계명의 제일 마지막 계명이 뭐지요? 탐내지 말라는 거잖아요. 탐을 안내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이것은 대책이 없어요. 도둑질 하면 손이나 끊어내면 되지만 탐이라는 것은 마음의 문제인데 탐이 나는 것을 본인이 어떻게 합니까? 대책이 없지요. 인간이 죄짓고 난 뒤에 대책이 없는 것을 아시고 십계명을 주시고 십계명만 주신 것이 아니고 십계명을 받아서 내려가는 모세를 향하여 “나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긴다.”라고 해서 긍휼히 여김 받는 그 집합체를 이스라엘로 본 겁니다. 경주 이 씨의 조상에 이항복이라고 있어요. 대전강의에서 착각을 해서 이율곡이라고 했는데 이율곡이 아니고 이항복입니다. 이 항복이라는 사람이 어릴 때 얼마나 총기가 넘쳤는지. 경주 이 씨 출신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이 건희, 이 병철, 그 쪽 계통입니다. 저는 돈 한 푼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만. 이 항복의 어릴 때의 유명한 이야기에요. 감나무 가지가 이웃집 대감댁 마당으로 넘어갔어요. 감나무가 심겨진 곳은 이항복의 집이고 가지가 넘어간 곳은 옆집의 대감댁이라는 말이지요. 하인들이 감을 따야 되는데 자기 집 감은 땄는데 담 넘어간 감을 따려 하니 법적으로 애매한 문제가 있다는 말이지요. 몇 몇 하인이 이웃집 대감댁에 갔어요. 딩동, 하니 그 쪽 하인들이 나왔겠지요. “우리 집 감나무가 대감댁 쪽으로 넘어왔으니 뜰에 들어가서 좀 딸게.” 하니까 하인이 하는 말이 “공간상으로 우리 집 쪽으로 넘어왔으면 우리 집 감이지 뿌리가 너희 집에 박혀 있다고 해서 다 너희 집 감이라는 법은 없다.” 하고 이 항복 집 하인들을 쫓아내 버렸어요. 여덟 살 먹은 이항복이 이 소리를 듣고 화가 났어요. 이것은 하인들 상대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고 그 집 대감을 직접 찾아갔어요. “대감마님 계십니까? 옆 집 사는 이항복입니다.” “웬 일이냐?” 그때 이 항복이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대신 문 밖에서 주먹으로 창호지를 퍽 뚫어버렸어요.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지 말고 얼굴 보여라.” 하니까 “대감님, 이 주먹이 제 주먹입니까? 대감님 주먹입니까?” 하니 “그야 네 주먹이지.” “그러면 우리 집에서 대감댁으로 가지가 넘어온 감은 우리 감입니까, 대감님 감입니까?” “그거야 너희 감이지.” 그 소리 듣고 담 넘어간 가지의 감을 다 따왔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 하면, 지금 몸통이 있잖아요. 몸통에서 뻗어 나온 가지는 그 몸통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그 몸통, 그 몸통 안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가 들어 있어요. 이것은 몸통에만 들어 있는 거예요. 몸통에만 은혜가 들어 있는 것을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자비와 은혜가 없는, 물론 다 같이 순종치 아니했지만 어쨌든 자비와 은혜가 없는 저쪽을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이 자리에 이항복을 불러다가 다시 강의를 하게 할 필요는 없겠지요? 은혜와 긍휼이 있는 쪽은 이스라엘이고 그렇지 않은 쪽이 이방인이에요. 따라서 이스라엘 속에 긍휼과 은혜가 있기에 사람들이 말씀에 비춰 순종치 않은 가운데서 은혜와 긍휼을 주옵소서, 할 수 있는 자격은 없는 거예요. 이 항복의 옆 집 대감이 이 항복 집에 와서 “여봐라, 감이 참 잘 열렸구나. 감 좀 다오.”라고 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공짜로 긍휼과 자비를 베풀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할 수는 있지만 내 집에 감나무 가지가 왔기에 그 감이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권리는 없어요. 왜, 몸통이 저 집, 이 항복 집에 있기 때문에 이쪽에는 몸통이 없어요. 그런데 문제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은혜와 자비를 받은 몸통이라고 이스라엘이 생각을 했잖아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에 모세가 합류를 안 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본인들이 몰랐어요. 모세가 그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줄 때 그들은 이스라엘인줄 알았습니다. 아니거든요. 모세가 이스라엘은 이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다, 할 때는 긍휼과 은혜……, 하나님이 지금 모세와 동행하잖아요, 하나님과 모세와 동행한 그 동행에 편입되지 아니하면 비록 만나를 같이 먹고 고생을 같이 해도 그것은 진짜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 눈에 보기에는 모세가 자기들과 함께 텐트치고 생활하니까, 자기들은 모세와 함께 있고 모세덕분에 자기들이 잘 되니까 자기는 이스라엘인줄 알았어요. 성경해석을 동행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동행한 줄로 착각했기에 모세의 모든 말을 다 착각하고 오해했던 겁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동행 할 때에 열 두 제자는 주님이 자기들과 함께 있기에 그것으로 동행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열 두 제자 가운데 예수님과 동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지나고 성령이 오니까 열 두 제자가 다 주님과 함께 동행 했습니다. 비로소 은혜가 무엇이며 긍휼이 무엇인가를 복음이 나타났을 때, 복음이 나타난 능력 속에 휩싸이니까 비로소 나는 순종치 아니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초월한, 종교적인 능력, 경건의 능력, 거룩의 능력마저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 곧 “주여, 저는 주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 없습니다.” 하는 고백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 이게 바로 긍휼의 능력이요 이게 자비의 능력이고 이게 바로 아무도 찾지 못한 그 길을 주와 동행하면서 가고 있다는 증표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와 함께 있을 때 티격태격, 이것은 외부와의 싸움 이전에 이스라엘 내부에서 구원자 모세와 구원받아야 될 이스라엘 사이에서 의견조정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열 두 제자들이 남들 보기에는 같이 뭉쳐 다니고 한 통속으로 보이지요?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의견충돌이 일어납니다. 의견이 안 맞아요. 남들 보기에는 예수 잘 믿는 사람처럼 보이지요? 그 사람 내부에서 의견조정이 안돼요. 속일 것을 속이세요. 주님도 안 좋아하면서 주님 좋아하는 척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주님이 좋아지는 순간은 어떤 순간이냐 하면, “내가 주의 말씀에 순종치도 않았는데 왜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왜 숨 쉬게 하시는 이 혜택이 다 어디서 오는 것인가? 놀라워라. 이것은 나에게 과분한 축복이다.”라고 느껴질 때입니다. 그게 바로 주와 함께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처갓집에서 말씀 가지고 이야기 하는데 장모님이 “예수 믿는 사람끼리 싸우면 안 된다. 싸우지 마라.” 지금 싸우지도 않았어요. 목소리도 높이지도 않았고요. 제가 이야기했어요. 김 진홍이니 뭐니 그런 사람 이야기가 나오고 금식이니 뭐니 그런 소리 하니 참……, “그런데 가지 마시고 근본적으로 햇빛과 공기를 왜 주시는가, 그것부터 생각해 보세요. 신앙인인체를 내지 말고,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잘 믿는다는 티를 억지로 내려고 하지 말고 햇빛과 공기를 왜 주셔서 숨 쉬게 하시는지. 지금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닌데, 다리 부러져서 동산병원에 입원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는데 왜 멀쩡한지를. 순종치도 않았는데 왜 이런 큰 은혜를 주시는지.” 동행이 안 되니 되도 않는 소리들을 하는 거예요. 본문 32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이걸 약간 어려운 용어로 하면 ‘등질성’ 질이 동등하게 같다, 모든 인간을 동일한 존재로 만들어버려요. 모든 사람이 순종치 아니 한다, 등질성이에요. 자, 이스라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 스스로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큰 오해를 한 거예요. 엄청난 오해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개개인 면접한 것이 아닙니다. “야, 너 착해, 안착해? 착하면 천국에 와.” 이렇게 개개인 면접을 한 것이 아니고 어디를 치느냐 하면 ……, 이제부터 중요하니 잘 들어보세요. 애굽의 대표자를 거론합니다. 누구냐, 바로 왕이에요. 바로의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들고 “아저씨, 착해요, 안착해요? 안착하지요? 지옥가세요.”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등질성, 지금 모든 사람이 질이 똑같아요. 똑같은데 어떤 인간도 다 고만고만하니까 어떤 인간이 착하고 덜 착하고 악하고 덜 악하고를 묻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뭐냐, 인간들이 순종치 아니하는 이유가 있어요. 인간을 그렇게 만든 어떤 대표자가 있어요. 그 대표자를 끄집어 내는 겁니다. 나중에는 대표자가 드러나요. 그게 마귀인데 그 전까지는 왕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하면 긴데 짧게 하겠습니다. 한 도시국가의 왕은 그 존재자체가 법입니다. 본인이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왕이 “어이, 네 집의 예쁜 딸 차출해라. 내가 왕비 삼겠다.” 이렇게 하면 자기 딸을 사랑해도 왕에게 딸을 내보내야 돼요. 왕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못살고 더 위쪽에서 강한 힘으로 억누르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라멕이 왕이 되어 있어요. 사람이 바르게 살고 싶어도 주변 환경이 짓눌러 버리면 숨도 못 쉬게 “예, 예! 전하, 뜻대로 하옵소서. 전하가 바로 법이십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 환경이 우리 인간들이 사는 환경이에요. 군에 가기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군에 가라고 하면 가야지 무슨 말이 많아요? 인간은 착하고 싶어도 착할 수가 없는 말 잘 듣는 기계, 하나의 메커니즘, 하나의 부속품처럼 다루어지는 것이 이 사회에요. 그 대표자가 바로 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쪽에서 보낸 분이 있어요. 모세입니다. 저쪽에서는 바로가 나오고 이쪽에서는 모세가 나와서 일대일로 붙어서 진 쪽이 이긴 쪽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예요. 바로에게 모세가 하는 소리가 뭐냐 하면, “내 백성 보내라.” 했어요. 그러니까 바로가 하는 말이 “네가 뭔데?” 당연한 소리지요. 그러니까 모세가 하는 말, “나는 내 이름으로 온 것이 아니고 여호와라는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 당연한 말이지요. 바로가 하는 말이 “여호와? 여호와? 그게 누구지?” 당연한 말이라니까요. 모세 입장에서는 답답한 게 내 백성, 저 50만 내 백성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그 백성을 쥐고 있는 세력과 바로가 꿈쩍을 안하네요. 개개인한테 물어서 “나갈래, 안 나갈래?” 하면 “그건 바로 왕에게 물어봐야지 내 맘대로 안 돼.” 이런다는 말이지요. 이래서는 일이 안 되는 거예요. 구원이요? 천국가고 싶다? 다 그런 마음이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나로 하여금 천국은 못 가게 만들고 구원 못 받게 만드는 힘이 작용합니다. 나보다 더 센 힘이 작용해요. “그 교회 복음 아니니까 나오세요.” 하면 “복음 아닌 것은 아는데 나오려고 하니 못 나오겠습니다.” 뭔가 힘이 작용해요. 내 맘 나도 몰라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이것처럼 뭔가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게 만드는 세상, 뭔가는 의식할 것이 너무 많아요. 하나님께서는 이 바로 왕에 대해서, 바로왕의 지배를 받는 모든 왕에 대해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립니다. 첫 번째 피, 두 번째 개구리, 세 번째 이, 네 번째 파리, 다섯 번째 악질, 여섯 번째 독종, 일곱 번째 우박, 여덟 번째 메뚜기, 아홉 번째 흑암, 열 번째 자기 집의 맏이가 죽는 것.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언약은 자연을 파괴한다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자연을 파괴한다. 그리고 출애굽기 12장 12절에서는 그 모든 재앙을 마치고 난 뒤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인간은 자연을 인격화해서 그것을 신이라고 하거든요. 인간은 그 자연, 곧 신에게 갇혀 있고 그것을 구체화한 것이 뭐냐 하면, 사회적인 통치자에게 눌려 사는 것이죠. 만약에 통치자의 말을 어기면, 김 정은의 말을 어기면 총살처형 당합니다. 바보 같아요. 망명 하면 될 것을 가만있다가 죽느냐는 말이지요. 사람은 명분에 살고 죽고 해요. 그러면서도 또 살고 싶어요. 남자는 명분에 죽고 살고 여자는 실리에 강하고. 안중근이 결혼 했습니까? 안중근은 왜 죽었지요? 뭘 위하여? 우리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했잖아요. 민족과 국가, 그게 마귀라니까요? 모세가 자기 민족 살리기 위해서 나대다가 누구한테 혼났느냐 하면, 바로 애굽인들에게 혼났고 주님한테 혼났어요. 그 방식, 힘으로 힘을 이기는 방식이 아니라는 거예요. 방식은 은혜와 긍휼을 아는 방식이에요. 어떤 인간도 자기 맘대로 나댈 수 있는 인간은 없어요. 왜, 순종치 아니하는 것은 저주받아야 되는데 저주받아야 될 주제에 무슨 자유를 원하고 행복을 원합니까? 벌 받아야지요. 따라서 인간에게는 구원이란 없고 천국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을 원해서가 아니라 원하지도 않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자비와 은혜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증명에 합당한 백성들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 하나님에 의해서 감행되는 겁니다.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 바로 너 나와.” 이쪽에서는 “모세, 너 나가.” 모세와 바로의 만남, 이것은 인간의 운명은 개인이 맘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왕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긍휼과 자비는 뭐냐, 그런 왕들 말고, 바로왕도 말고 그 다음에 모세도 나왔다가, 모세도 왕 같은데 아니다? 여호수아도 왕 같은데 아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많은 왕들과 사사들과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에스겔, 전부 다 메시아 같았는데 아니다? 전부 다 아닌 거예요. 진짜 숨어 있는 왕은 바로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만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이기에 그 안에 자비와 긍휼이 그 분에게만 있습니다. 왕이 주면 우리는 안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왕이 용서를 하게 되면 용서를 안 받을 수가 없고 왕이 자비를 베풀면 자비를 안 받을 수가 없고 왕이 긍휼을 주면 긍휼을 안 받을 수가 없는 겁니다. 없는데 그 자비가 자비가 되고 긍휼이 긍휼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옛날 망해버린 이스라엘 나라를 대표해서 열 두 지파의 운명이 함축적으로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비를 주시는 분인 예수님과 가장 근접해서 삼년동안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주님을 저주해서 모른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바로 그거예요! 베드로가 삼년간 그렇게 많은 혜택을 입었으면서도 왜 모른다고 했을까요? 주변의 강한 힘, 악마의 힘, 세상의 힘, 악마의 힘, 국가의 힘, 사회공동체라는 힘, 그 힘을 인간은 떨쳐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왜, 거기서 물들었고 그들의 생산물이기 때문에. 이 사회의 생산물이 나에요. 같은 분위기, 분위기가 같아요. 서로 생각이 통해요.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성령을 받고 보니 제자들이 알았어요. “아, 순종해서 구원받겠다는 그 자체가 마귀가 쳐놓은 덫에 빠졌구나.” 순종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세상의 힘에, 남들의 힘에, ‘정말 착하네요. 믿음 좋네요. 기도 많이 하시네요. 은혜 받으시네요. 복 받으시네요.’ 라는 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인간으로 변신된다는 사실, 완전하게 악마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아, 애초부터 순종하지도 못할 존재고 순종하지도 않을 인간이 그동안 어디에 귀를 기울여서 교회 좀 나왔다고 해서 순종해서 보다 더 나은 성화의 삶, 거룩한 삶, 착한 삶을 살아서 복 받는다고? 어떻게 그런데 빠집니까? 어떻게 그런 악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하나님은 완전한 순종을 원하신다고요? 하나님은 순종치 아니했다는 것을 파악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그럴 그릇이 못돼요. 우리는 애초부터 순종할 그릇이 못됩니다. 왜, 뿌리가 아담이기에. 뿌리가 이 항복 집에서 온 감나무거든요. 아담의 죄가 여전히 감나무에 걸린 감인데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이렇게 못난 존재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으니 세상에, 의인이 되어서 천국에 갈 줄이야.” 이게 다 우리 덕분이 아니고 우리의 왕, 새로운 왕,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왕이니까 백성은 가만있으면서 왕의 왕다움을 보여준다는 빌미로 ‘우리 왕 멋지지? 우리 왕 이정도로 대단해.’라고 왕을 증거 하는 조로 왕의 백성에 참여케 된 겁니다. 나 자랑하라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 예수님 정말 대단하고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 피로 다 이루었음, 그것 증거 하라고 예수님이 우리를 뽑아 세운 거예요. 그것이 바로 진짜 완전한 왕의 합당한 백성인 겁니다. 복음이 오기 전에는 아무도 몰랐어요. 그래서 말합니다. 34절에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사도바울의 이 한마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는가?” 누가 십자가지신 주의 마음을 알 수 있느냐?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이 오셔야 알 수 있는 것, 어느 누구도 순종한 적이 없으면서 구원, 천국으로 지금도 가고 있는 이 놀라움은, 이 부요함은 바로 우리 부요함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주님 안에 있는 주님 사랑의 넘쳐흐름을 우리가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마귀가 어떤 말을 하는지 골라 잡아낼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우리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를 절망에 빠트리는 술책인 것을 우리가 왜 진작 몰랐습니까? 다시 한 번 십자가 바라보면서 본디 순종치 아니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오히려 감사하면서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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