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도다
2014년 2월 9일 본문 말씀: 로마서 11:33-36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사람이 주님께서 드려서 그 성과로 인하여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이 아무리 해도 하나님의 일에 개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꾸만 하나님의 일에 자신의 행함으로 영향력을 줄 수 있다고 우기고 싶은 겁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들이 따로 ‘신’을 만들어 왔다는 말이 되고, 그 만들어진 신의 일에는 인간들이 행함이 가득 담겨 있다는 말이 됩니다.
오늘 본문 35절의 말씀이 구약에는 나오지 않고 이처럼 사도 바울의 편지에 처음 나옵니다. 구약 욥기 35:7에 유사한 말이 나오기는 합니다.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하지만 이 말씀에는 도로 대가를 받아낸다는 결과성까지 의미를 확대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구약 곳곳에 보면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복을 받는다는 대목이 더 빈번합니다.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곳에 복을 내리신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20:24에서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그렇다면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이 아니란 말입니까? 복받는 것이 인간의 어떤 행위에 기인한다면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아니한다면 저주가 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아무리 하나님께 뭘해도 복과 저주가 그 행위에 무관하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하시는 바가 됩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할까요?
이러한 하나님의 비-일관성에 직면하면서 나름대로 일관성을 얻기 위해 인간들은 다른 신을 창작하게 마련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 쪽에서 뒤틀린 것이 아니라 인간 본인이 뒤틀렸다는 사실이 간파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상인이라고 여깁니다. 이점은 옛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희들을 뭘 한다고 해서 그 행위를 대가로 얻어낼 것은 없다”는 35절의 말씀은 구약에 나와있지 않고 신약에 나와있습니다. 이는 이미 그 전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 자체가 어떻게 잘못되고 뒤틀어진 상황인가가 다 드러낸 이후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 본질 자체가 뒤틀려져 있음을 간파하지 못하고 ‘여호와’라는 이름의 신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 신은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정상적인 것으로 증명해줄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죽게 됩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인류의 막장을 보여주는 대변자 역할을 맡은 바가 됩니다.
인간들이 신을 만드는 이유는, 모든 것이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 영광’으로 순환되는 이 역사를 다치고 싶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주도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감정의 노동자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부르짖지만 정작 인간의 육체가 요동치는 것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일상 속에서는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감정은 ‘〜 하고 싶다’는 식으로 발산됩니다. 먹고 싶다, 잠자고 싶고, 놀고 싶다, 일하고 싶다,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가 나를 끔찍이 이쁘해주었으면 좋았다, 등등이 실제적으로 인간을 지배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에 대해서 인간의 몸은 ‘지나가는 기억’으로 간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기억이라는 것이 자꾸만 소실되고 소멸됩니다. 사람들은 자부합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인간들이 주변에서 유령처럼 수시로 소멸되고 심지어 인간은 자기 자신마저 자꾸만 기억에서 삭제됩니다. 누가 이런 현상을 유발한 겁니까?
전도서 1:11에 보니,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전도서 7:10에 보면,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기억하는 본인 자가 자체가 기억이라는 바다에 빠져서, 나중에는 기억했다는 그것조차가 기억 못한채 사라집니다.
신을 믿던 내가 사라지면 신이라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말씀의 예를 들어보면 모든 사태가 확연해집니다. 요한복음 6:39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내가 믿게 되면 그 ‘믿음’으로 인하여 내가 구원되는 겁니까? 믿는 당사자인 나도 사라지는데요? “나는 저 말씀을 믿었고 이 말씀을 믿었으니 그 믿음으로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나의 소멸과 함께 그 믿음도 사라지는 날에서 아무 것도 남는 게 없게 됩니다.
따라서 신은 없고 말씀만 영원한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 6:39 안에 계신 예수님, 곧 주님께서는 스스로 알아서 ‘아버지께서 보낸 자’만을 다 구원해내십니다. ‘하나님-인간’의 인식의 틀을 깨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바로 ‘주님-죄인’의 구조가 등장됩니다.
소가 그냥 밭을 갈면 소가 지나가는 밭은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 끝에 쟁기를 달게 되면 소가 지나가는 모든 곳에는 흙이 다 파헤쳐져 속살을 보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주님’이라는 쟁기를 달고 지상에서 활동케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이 신을 믿는 아니 믿든, 모두가 죄인임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자기로부터-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순환구조를 고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등장하므로서 이 세상은 십자가로 뒤짚히는 징후를 당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요나의 기적’입니다. 사람이 그냥 있어도 십자가 능력이 들이닥치면 그 현장이 곧 요나의 기적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곧 인간이 죄로 인하여 죽고 은혜로 인하여 영생을 얻는다는 기적 말입니다. 이때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깊이 있는 말씀이 작용하는 현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로마서 11:33-3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35절에 보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합니다. “받겠느뇨” 하는 것은 “먼저 드려서 받는 식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생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복을 받을 때 먼저 드린 것이 있었기에 “음, 네가 먼저 드렸어요? 그러면 내가 복 줄게.”라고 주고받는 식으로 생명을 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주께 먼저 드렸더니 “다른 사람은 안 주는데 네가 줬으니까 내가 특별히 너를 사랑할게.”라는 식이 아니라면,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 운영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어떤 협력자도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내 인생에 내가 기여하거나 어떤 보탬이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 지경, 이 자리까지 오는데 있어서 기도를 빡세게 했다든지, 헌금을 많이 했다든지, 주님께 봉사를 많이 했더니 그 결과로, 내가 하는 행위가 결과가 되어서 이런 혜택을 누렸다, 라는 것은 탈락입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제가 방금 탈락이라는 말을 했거든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그 노선에서의 탈락이라는 그 말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노선에서의 탈락을 의미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배참석하고 이렇게 신경을 썼더니만 하나님께서 복도 주시고 죽으면 천국에도 넣어주겠다는 그 이론은 탈락입니다. 천국에서 탈락입니다. 저는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이 말씀이 구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 나왔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약부터 이런 말씀을 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는 바쳐야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나와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율법대로 살아야 복을 받고 못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는 식으로 신명기 28장을 비롯해서 죽 나와 있어요.
구약에 나와 있는 그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른 분일까요? 같은 분이거든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 같은 분의 입에서 나왔다면 취지가 동일한 취지가 나와야 되는데 왜 구약에서는 “바쳐라 복 줄게 너희들은 특별한 백성이야.”라고 하면서 신약에서는 “누구야? 드린다고 해서 복을 받았다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거야?”라고 말을 바꾸어서 하는듯한 조의 언급을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전에는 드려야 복을 받는다고 하다가 지금은 드려서 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사기라고 나오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느낌을 갖고 있는 우리 자신이 뭔가 일관성이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왜 왔다 갔다 하십니까, 라고 하나님에게 지적 질을 하는 우리 몸이 마치 일관성이 있는 것처럼 평소에 살아 온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쥐어짜는 겁니다. 우리는 멀쩡하다고 주장하거든요. 우리는 ‘나에게는 하자가 없어. 나에게 아무 이상이 없는 거야.’ 아무 이상도 없고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를 상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래도 정상적이야.”라고 비틀어버립니다. 비틀게 되면 ‘아,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이 일관성이 없구나. 하나님이 일관성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일관성이 있는 하나님을 내 쪽에서 새롭게 만들어내야 하고 정리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만든 신은 내가 만들었기에 그 신은 정당하고 옳은 신이 되고 그런 신을 만들어낸 나도 더불어 내 존재는 항상 정당하다는 자기 존재의 정당화로 되돌아 올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에게서 나와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돌아가는 거예요. 세상만사가 내 위주로 출발해서 모든 것이 내가 원인이 된 결과고 그 모든 성과와 모든 영광은 내가 받아야 된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것을 편들기 위해서 신이라는 존재가 하나의 우리의 아우라처럼 주변에 만들어져야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이 말을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들어내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은 없다는 쪽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반대로 나가지요. “하나님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야기할게. 하나님은 없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말씀은 있는데 하나님은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은 없다고 칩시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없애버리면 이것은 뭐도 덩달아 없애는 것이냐 하면 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그 인간도 없애버리는 작업중의 일환이 되는 겁니다.
35절에 “누가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하는 이것이 신약성경에 나오지요. 구약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없어요. 없는데 점차 뭔가 구약의 낌새가 이런 쪽으로, 네가 원인이 되어서 어떤 실적을 얻는다는 식은 신약으로 가까이 가면서 엷어지고 사라져가고 있어요. 그래서 이 35절의 이 이야기를 먼저 설명을 드려야 하겠는데요, 설명을 드리면서 이렇게 출발하겠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할 때 전부 다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데 하여튼 하나님은 없어요. 신이 아예 없는 겁니다. 신이 없는데 인간은 자꾸 신이 없는 것을 감추는 방식으로 신을 믿었고 교회에 나옵니다.
신은 애초에 없는데 “아니, 신은 필요한 개념이라니까! 신은 없다는 것을 아는데, 만나본적도 없고 그냥 없는 것을 분명히 아는데 내가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존재라니까?”라고 하면서 신을 믿고 신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교회를 만들고 전도하면서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 와서는 신이 있다고 주장을 하지만 실제로 생활하는 것을 보세요. 믿음, 소망, 사랑, 그게 생활에 무슨 보탬이 되던가요? 오늘 있는 대로 다 노골적으로 다 깨고 이야기해 봅시다. 사람의 평소 행동은 신을 찾지 않아요. 그러면 뭐가 대신하는가 하면 ‘~을 하고 싶다.’가 나와요.
‘갖고 싶다, 사고 싶다, 먹고 싶다, 자고 싶다, 일하고 싶다.’ 일을 하면 또 ‘쉬고 싶다.’ 모든 인간은 감정노동자입니다. 신앙이 뭐냐, 거룩이 뭐냐, 믿음이 뭐냐, 그것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감정, 자기기분에 휘말려서 살아가게 돼요. 누가 칭찬해 주면 기분이 좋아지고요, 아무리 옳은 소리라도 누가 대놓고 하게 되면 기분 되게 나빠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인간은 이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믿음, 소망, 사랑, 이런 것은 겉절이 같은 것이고 없어도 되는 거예요.
이것은 필수과목이 아니고 선택과목이죠. 교회는 가도 되고 안가도 그만이고, 하나님은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그만이고.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게 주가 되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감정을 그때그때 뒤처리 하는 쪽으로 세월을 보내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전도서 1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이 말은 뭐냐? 사실 인간은 신이 필요 없습니다. 자식 낳는데 남편만 있으면 되지 신이 왜 필요합니까? 남자가 내 자식을 갖고 싶을 때 여자만 있으며 돼요. 신이 필요 없잖아요.
인간은 누가 만든다? 인간은 인간이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전도서 1장 11절의 말씀처럼 모든 인간은 기억 속에서, 기억의 바다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오늘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과거 기억이 나로 하여금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누가 기억하느냐 하면, 남들이 기억하고 주변사람들이 기억하는 거예요. 아들이 있어서 아버지라 불러줄 때 비로소 나는 아버지가 되는 겁니다. 아내가 ‘여보’라고 불러줄 때 나는 남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전도서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을 누가 만들었다고?” “예, 제가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신은 필요 없고 내가 사는 모든 살림살이는 내가 알아서 다 합니다. 신이 구태여 거기에 개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기억하느냐, 내가 기억한다는 말이지요. 내가 기억하고 또 동시에 누가 기억하느냐 하면, 또 남들이 기억해줘요. 그런데 전도서 1장 11절에 보면 아무도 너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전도서 7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기억의 흐름, 기억의 물결 속에 있는데 점차 너는 잊혀진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남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리고 점점 더 가까이 가면 내가 잘해줬던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리고, 그거야 자기 살기 바쁘니까요, 친구들이 떠나가고 잊어버리고, 그 다음에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는 그 자식들이 나를 잊어버립니다. 자식도 며느리도 찾아오지도 않고 이제는 남편이 떠나면 남편이 죽어버렸으니 나를 잊어버리고 급기야 내가 나를 잊어버리지요. 뭔가 우리는 자꾸 신이 필요 없다고 하면서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낸다고 하는데 그 만드는 내가 자꾸 소멸돼요. 그리고 나는 죽습니다.
누굽니까? 나를 죽이는 자가 누구예요? 나라는 것은 결국 소멸되고 난 뒤에 보니 사람이라 하는 것은 깎여 나가는 신체가 있을 뿐이고 그 신체가 말하는 것은 그냥 잠시잠간 있었던 기억이고 이제는 기억조차 먼지가 되어서 날아가 버리면 기억조차 없지요. 이것이 전도서 1장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전도서 1장 8절부터 보면,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모든 것이 기억으로 묶이면서 나중에는 기억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그 기억마저 우리 곁을 떠나버리고 우리는 그 기억의 바다에서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서 없어져버립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라는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세상은 “내가 나를 만듭니다.” 또는 “나는 내가 기억합니다. 내가 나를 만듭니다. 내 인생은 내가 꾸려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한 모든 것은 내가 해서 이루어진 결과이고 나의 작품입니다. 신은 겉절이고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사라지게 된다면 이런 나를 누가 사라지게 하는 겁니까?” 그 말입니다.
신이 그렇게 했다고요? 내가 사라지는데 내가 생각하는 신도 같이 사라지면 그때는 무슨 소리 하렵니까? 내가 사라지는데 신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가 있을 경우에는 ‘신이시여, 도우소서.’가 의미가 있는데 내가 사라지고 없는 마당에 신이 무슨 소용이 되고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신 자체가 없는데.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들어갑니다. 신은 없습니다. 없는데 신이 어디에서 생겼느냐 하면, 내가 있고 내가 기억하는 내가 있기에 우리는 신을 기억하고 있고 그래서 신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신은 나의 아우라, 내가 만들어낸 하나의 망상이 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이 없다고. 오직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 몰랐어요. 그래서 구약에 이 말씀이 없는 겁니다. “네가 신에게 드린다고? 하나님이 네가 드리는 것을 받겠느냐? 생각해봐라. 네가 드릴 때 ‘내가 하나님께 드립니다.’를 네가 기억하고 있는데 네 기억과 더불어서 네가 사라진다면 네가 드린 것도 날라 가 버리는데. 치워라!” 사람이 신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위선입니까? 이것은 자기 꾐에 빠지는 거예요.
나도 없는데, 나도 사라지는데 무슨 신이 있어요? 요한복음 6장 3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아버지로부터 내가 왔는데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 뭐냐,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면 삽니까? 이 말씀을 믿는다고 여기는 내 자신이 사라지는데 내가 사라지면 내 믿음도 사라져요.
내 믿음이 사라지면 내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그 계획도 같이 날라 가버립니다. 방금 읽은 그 말씀을 믿으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턱도 없는 소리, 구원 못 받습니다. 말씀 믿지 마세요. 신은 믿어도 그만이고 안 믿어도 그만인 것처럼 말씀을 믿어도 그만이고 안 믿어도 그만이고 내가 말씀 믿는 것이 하등 나에게 어떤 보탬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라져야 되니까. 이 전도서의 말씀대로 우리는 내가 사라진다는, 심지어 내가 사라진다는 그 기억조차 사라져버려요. 내가 허무하다는 그 허무감도 같이 사라진다니까요?
그러면 있고, 없고, 그 자체도 사라져버려요. 전에 맛있던 음식, 다시 그 집에 가서 먹어봐도 그 맛이 안 나지요. 왜? 우리는 기억만 있는 기억덩어리거든요. 그 때 기억이 살아 있는 이상은 똑같은 기억을 재생한다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재생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39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될 뿐이지 우리가 이것을 믿어준다고 해서 비로소 내가 사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6장 39절을 다시 보게 되면 “내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는데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린다.”는 이것은 누구 몫인가 하면, 예수님 몫이에요.
내가 그것을 믿어준다고 해서 내 믿음이 구원받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정말 어렵지 않아요. 굉장히 쉬운 이야기입니다. 모든 말씀은 그냥 말씀대로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는구나, 이게 정답인데 이 말을 어렵게 꼬이도록 한 것이 뭐냐 하면, “주여, 내가 그 말씀을 믿으면 믿는 나는 구원받겠습니까?”이 되도 않는 불순물이 끼어들어서 복잡해져 버린 거예요. 그것을 깔끔하게 세척해서 제거하면, 빼내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이 말씀, 요한복음 6장 39절을 믿지 말까?’ 이렇게 나오거든요.
믿는다는 것도 소용이 없는 이야기지만 이걸 믿지 않는다는 말도‘나는 전에 안 믿었어.’라는 것이 기억 속에 있기 때문에 그 기억도 날라 가기에 그 말도 하나 안하나 다 헛소리가 되는 겁니다. 안 믿을 필요도 없고 믿을 필요도 없는 거예요.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그냥 사라져 줍시다. 그냥 사라져 주면 돼요. 내가 사라지면 남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남는 겁니다. 이야기가 어렵지 않지요? 전혀 어렵지가 않습니다. 괜히 나대지 말라는 그 말이거든요.
깐죽대면 안돼요. 어떤 의미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이 깐죽대는 시간이 예배시간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거든요. “주여! 주여! 주여!”이러고 있다니까요. “주여! 믿쎱~니다.” 아주 참기름을 짜내요. “주여! 할렐루야, 할렐루야!” 갑자기 목소리마저 변조해서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믿쑵니까,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변비도 아니고, 참! 구약에서 이 말씀을 나타내지 않은 이유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인간으로 생각한 겁니다. 왜냐하면 본인들을 인간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본인들은 허무한 존재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요.
허무하지 않다고 여긴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네가 허무한지 아닌지를 내가 볼 거야.” 하고 법을 준 거예요. 지난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가두어두었다고 했지요. 하여튼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인간은 기억이에요, 기억. 되돌아서면 다 잊으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거기 정신 다 팔려서 주의 말씀은 생각이 안 나니까, 인간은 감정의 존재, 감정노동자니까요. 모든 것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몰랐어요. 자기들이 순종한다고 깐죽대면서 자기들끼리 누가 순종하는가를 경쟁했어요.
지난 시간에 한 것을 다시 해 볼까요? “예수님,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높습니까?” 이렇게 나왔을 때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리고 나왔잖아요. 둘 다 똑같아요. 둘 다 같은 거예요. 그래서 오늘 설교는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인간이 있다. 인간이 있느냐,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그 방정식을 깨버리세요. 그것은 마귀가 그렇게 우리에게 장착시킨 거예요. 인간이 있는데 인간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만들었다.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고 인간은 자기가 만들었어요. 자기가 만들어놓고 안 들키려고, 평소에 하나님을 안 믿고 있다는 것을 안 들키기 위해서 신이 만들었다고 우기고 있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것을 먼저 실습한 곳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한 겁니다. 자기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했는데 그 하나님에게 버림받을 줄이야 상상도 못한 거예요. 하나님께 이스라엘이 버림받으니까 이스라엘이 하는 짓이 뭐냐 하면, 버림받게 한 그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으려고 자기가 그 하나님을 계속 믿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 그렇게 그들이 만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굴 죽이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을 죽여 버렸어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마지막 막장 드라마가 이 드라마에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죽이는 막장 드라마, 하나님이 의도하신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한다.”는 그 말씀중 하나에요. 그 작업에 이스라엘만 말려든 것이 아니고 우리도 같이 말려든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정리합시다. 하나님이 있고 인간이 있다. 인간이 있고 하나님이 있다는 이 틀, 이 틀을 없애버립시다. 그러면 남는 것이 뭐냐, 주의 이름, 주님께서 등장하게 되면 주변에 반드시 악이 생겨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깨버리고 주님과 죄악의 관계, 죄와 주님의 관계로 설정하게 되면 모든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매듭이 확 한꺼번에 풀려버립니다. 제가 한 예를 들게요. 아까 한 장로님의 기도에도 나왔지만 강도, 분명히 강도는 나쁜 사람이 맞습니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물건 훔치는 나쁜 사람이 맞아요. 강도는 나쁘다, 나빴으니까 그 당시에 관원들이 강도 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두 강도 사이에 누가 들어갔느냐 하면, 예수님이 같이 매달려 있었거든요.
강도는 나쁘다, 의 연장이 뭐냐 하면, 강도도 나쁘고 예수 너는 더 나쁘고, 그 옆에 있는 강도 너도 나쁘고. 강도 나쁘고 중간에 서 있는 예수님 나쁘고 그 옆에 있는 강도 나쁘고, 세 사람이 다 같이 나쁘기에 사형언도를 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건이 십자가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 십자가 사건이 끝나고 난 뒤에 누가 나쁘냐 하면, 낙원에 가지 않은 강도가 나빠요. 강도가 둘 있었거든요. 그 두 사람이 같은 운명에 처한 것이 아니고 그 중에 한 강도는 낙원에 있는 강도가 되어버렸어요.
그러면 저쪽은 자동적으로 오늘밤에 낙원에 못 가게 된 강도가 하나 남지요.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으로 나쁜 자는 누구냐 하면, 낙원에 못간 그 강도가 나쁘고 낙원에 간 강도는 의인이 되는 겁니다. 죄냐 아니냐 하는 그 평가를 우리가 유보해야 돼요. 누가 등장할 때까지? 예수님이 등장할 때까지. 주라는 분이 등장할 때 까지는 우리가 나쁘다, 한 그것이 나빠요. “어디서 나쁜 놈이 나쁘다고 해?”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나쁜 놈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진정 나쁜 것이 아닐 수가 있는 그런 나쁜 짓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할 때에 다 가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나는 여기 있는데 나는 하나님이 만들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된다.” 이 틀, 이거 나빠요. 너무 나빠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 따라서 말씀을 지키고 믿자.” 이거 나빠도 너무 나빠요. 교회는 나쁜 짓을 옳은 짓이라고 왜곡시키는 곳이 교회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더 배나 지옥백성 만드는 곳이 교회에요. 이런 소리 하니까 저 멀리 있는 사위가 말씀은 좋은데 남의 교회 비판하지 말라고 해요.
전에는 딸이 그런 잔소리를 했었는데 거기에 하나 더 붙었어요. 딸의 남편이 덩달아서 하고 있어요. 걱정되는 사람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라. 사돈이 걱정되는지는 몰라도. 교회 오는 이유는 신도 안 믿으면서 신을 믿는 척 하기 위해서 교회 오고요, 거기에 더 나쁜 것은 나쁜 놈이 신을 믿고 말씀대로 살고 술 끊고 담배 끊고 장로 되고 목사 되어서 안 나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그 짓이 더 나쁜 거예요. 인간이 신을 만드는 공정이 있습니다. 외워 놓으면 편리한데, 첫 번째는 뭐냐 하면, 인간은 욕망을 만든다. 두 번째는, 욕망과 현실사이의 괴리, 갭, 결핍을 안다. 세 번째는 그 결핍을 메운 성공적인 사례를 찾아본다. 네 번째는 흉내 낸다. 다섯 번째, 얼마나 성공했는지 실적을 점검해 본다. 이 다섯 가지입니다.
다 잊었지요? 다시 할게요. 첫 번째, 인간은 욕망을 만들어낸다. 방법은 기도로 하면 되거든요. 욕망은 어떻게 만드는가? 보는 것이 다 욕망이니까. 갖고 싶다. 얻고 싶다. 나도 저 정도 되고 싶다. 내 자식이 저 정도 성적 올랐으면 좋겠다. 이게 다 욕망이거든요. 욕망을 불같이 이끌어내요. 그 다음은 현실과 욕망사이의 갭을 자기가 알아차려요. 애가 일등하고 싶은데 전국 수능 100등하고 싶은데 현재는 25만 번째에 있다. 그 다음에는 선배들이 기도를 빡세게 해서, 금식을 해서 그 괴리를 메웠던 사례를 찾아본다. 그것은 목사들이 해 주니까. 이렇게 복을 받았다는 사례들, 헌금하고 십일조하고, 그런 사례들을 찾아낸다. 네 번째는 그것을 그대로 흉내 낸다.
너는 하는데 나는 못할 것이 뭐가 있는가, 오기를 발동시켜서 해낸다. 다섯 번째가 어려워요. 그게 될 리가 있습니까? 안 되잖아요. 안 되는 것 자체가 부끄럽잖아요. 그럴 때는 ‘그래도 이런 가운데서 뭔가 깨달았다.’ 해서 자기가 한 실적을 점검하는 거예요. 이런 기도를 해서 내가 마음을 낮추었다든지, 하나님을 새롭게 알았다든지, 되도 않게 엿 부스러기 깨진 것이나 줍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 알면, 그래서 마음이 낮아지면 그 마음 낮아진 것 가지고 구원 받습니까? 안돼요. 그 모든 것을 가지치고 또 쳐서 다 쳐버리면 남는 게 뭐냐, 모든 것이 나로부터 와서 나로 말미암아 결국 내 자존심, 내 명예로 돌아감이라.
마귀의 이 노선에서 인간은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이 기차를 타고 가 보세요. 중부지방에 눈 많이 오면 경치가 너무 좋아요. 기차 타고 가면서 보는 경치가 좋더라도 기차는 절대로 자기 노선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바깥에 장식하고 신을 믿고 환상을 품고 아름다운 동화를 그리고 렛잇고, 렛잇고, <겨울 왕국>같은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처럼 해도 이 모든 것이 나로부터 와서 나로 말미암고 나의 명예와 영광과 이름을 높이는 이 노선은 절대로 벗어난 적이 없어요.
겨울왕국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면 거기에 아주 중요한 진리가 하나 나와요. 눈사람이 등장해요. 그런데 눈사람은 늘 겨울에 있거든요. 그래서 눈사람의 소망이 뭐냐, 여름에 놀고 싶다는 거예요. 풀장에서 수영도 하고 싶고. 그런데 뭐가 중요하냐면, 여름놀이는 하고 싶은데 막상 여름이 되면 눈사람이 녹아서 본인자체가 사라진다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천국 가고 싶지요. 우리가 눈사람이니까. 그런데 천국에 가면 이미 나는 나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거기에는 “내가 들어가고 싶습니다.” 혹은 “난 안 들어갈래요.”하는 그것조차 이미 사라진 상태에요.
그러면 천국은 누가 들어가는가? 아버지의 뜻대로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살려내지는 그 사람만 거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보냈지?” “주님이 보냈습니다.” 하는 곳이 천국이 되는 거예요. 그 천국에 가는 와중에 우리는 눈사람이 되어서 나의 기억속의 나도 사라지고 녹아지고 없어져야 되는 겁니다. 내가 없어지면서 내가 드린 십일조, 내가 한 봉사, 내가 한 강의와 설교, 이것도 다 여름 고온에 다 녹아 없어지듯이 다 없어져야 돼요. 내가 뭘 했습니다, 내가 뭘 했습니다, 하는 나조차, 내 기억조차 다 없어지는 거예요.
저는 우리 어머니를 보면서 그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다 없어져요. 몸도 없어지고 기억도 없어지고 다 없어질 거예요. 없어지기 전에 걱정했던 것은 없어짐과 동시에 걱정도 같이 없어져 버려요. 본문 36절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이 주 개념은 뭐냐? 바로 이스라엘을 통한 전쟁개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변나라와도 싸웠지만 정작 주님을 믿습니다, 하는 이스라엘이라는 대표자들과 싸웠고 그 싸움의 절정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를 믿는 자들이 주를 죽이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 겁니다.
그러면 이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하나님은 왜 방치하는가? 방치한 것이 아니고 먼저 구약을 통해서 일을 벌려 왔었어요. 그 중에 하나가 요나의 표적이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대가 신의 기적을 발견하고자 애를 쓰는데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적은 새롭게 추가되는 행운 같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이미 너희들 속에 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그들 속에 뭐가 있는가? 죄가 있고 악이 있잖아요. 그럼 죄가 있고 악이 있다면 이미 그 자체가 기적의 재료입니다.
여러분, 기적을 보고 싶어요? 기적을 느끼고 싶어요? 내가 이미 악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기적은 충분히 매일같이 나옵니다. 어떻게요? “주여, 나 같은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이 놀라운 요나의 기적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딴 데서 기적을 찾지 마세요. 맨 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의 기억 속에 있는 나의 욕망만 나오는 거예요. 이승훈의 빙상 5천 미터 기록이 6분 7초라면 스벤 크라머의 기록이 6분 10초대니까 이것은 자기 기록만 깨도 완전히 금메달이라고 생각하면 한 바퀴 돌때마다 가슴 졸이고 졸였는데 6분 25초, 그래서 12등인가 했죠.
그동안 내가 공들인 이 노력에 대한 성과는? 내가 여길 왜 왔지, 하는 그 손해 본 느낌, 그게 기적의 산물입니다.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내 욕망이 되는대로 그 결핍을 신께서 채워주면 되거든요. 욕망이라는 것은 내가 만들고 그 괴리를 메워주는 것은 신의 전문분야라고 생각해서 교회오고 있잖아요. 바로 그 자체가 요나의 기적을 이루는 재료, 하나의 시설물이 된다는 거예요. 시설물이니까 이미 우리는 주 안에 살고 있어요. 신이 아니고 주님이라니까요? 신이 아니고 우리 때문에 죽었던 그 분이라니까요?
우리가 만든 신이 아니고, 나를 인간으로 대우하는 신이 아니고 나를 죄인으로 다루는 하나님이라니까요? 여러분, 소가 그냥 밭을 지나가면 소는 아무 일을 못해요. 그런데 소의 뒤에 쟁기를 걸고 음메, 하고 가버리면 밭이 갈리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뒤에 쟁기를 달았어요. 그 쟁기가 뭐냐, 주의 이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달아버린 거예요. 십자가를 달아버린 거예요. 십자가 달고 하나님께서 지나가니까 그동안 우리는 “나는 잘났다. 나는 믿음도 좋다. 나는 영원하다. 모든 성과는 내가 노력한 성과다.”하고 자랑 질하다가 십자가 쟁기로, 원래 십자가가 뾰족하잖아요, 그 십자가 쟁기로 우리의 심령 밭을 다 뒤집어놓으니까 가는곳이 다 요나의 기적이에요.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거예요.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다 뒤집어서 보여주는 이것이 나의 작품이 아니고 전부 다 내가 예상 못한 주님에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작업인 겁니다. 하나님은 나하고 전쟁을 벌인 거예요. 내가 하나님 믿는다니까 멱살 쥐고 “네가 하나님을 믿어? 죄인이 믿는 그것도 하나님이야? 그건 악마야, 이 인간아.” 하고 “너는 지금 귀신을 믿고 있는 거야.” 하고 멱살을 쥐고 흔들 때 우리는 기뻐해야 됩니다. 이러지 마시옵소서, 가 아니라 너무나 좋아서 “점점 더 흔들어주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돼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해야 된다니까요. 그래서 신약에 최종결론으로 나와 있는 겁니다. “누가 드려서 갚음이 있다고? 웃기고 있네.” 이런 뜻이에요.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은 다 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에 그들에게 일어나야 할 요나의 기적이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교회 나오는 것도 우리가 해야 될 일이에요. 어떤 사람이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데 기도는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사태가 기도할 수밖에 없게 해요. 쥐어짜는데요. 쥐어짜면 기도가 됩니다. 물론 엉터리 기도지만 기도하면서 그 기도의 응답은 아, 모든 것이 주께로 시작되고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데 그 돌아가는 과정을 보니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가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말씀이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제공되었기에, 말씀이 하는 일에 내가 휘말려 들어가다 보니까 내 안에 주께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 내가 하는 일은 나의 일이 아니고 내가 하는 일이 곧 주의 일이라는 사실을, 말씀이 주도적으로 일으키는 말씀의 일인 것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사도바울과 동일한 고백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구원받았다고? 저한테는 그런 소리 마세요. 저는 뭘 해서 복 받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 돌아갑니다. 영광이요? 주님만 영원히 영광 받고 오직 주에게만 영광이 있습니다. 아멘.”
말씀이 문자가 아니라 우리의 몸을 통해서 실제로 발산되는 놀라운 요나의 기적이 벌어진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있기 전에 먼저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우리를 만들어놓았는데 우리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려고 헛된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악이고 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게 죄고 악이란 사실을 알게 된 그 자체를 도리어 감사하게 하옵소서. 십자가 앞에서 늘 죄인이라도 죄인 되어 있다는 그 자체가 요나의 기적의 일부라는 사실을 감지덕지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