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성전
2025년 1월 22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6:11-13
(6:11)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6:12) 네가 이제 이 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나의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6:13)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
솔로몬이 한창 성전을 짓습니다. 본당은 다 지었습니다. “전의 건축이 마치니라 그 전은 백향목 서까래와 널판으로 덮었고”(왕상 6:9)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사는 성전 건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에 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을 허락하신 겁니까?
성전없이 그냥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지키면 그만이 아니겠습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짓겠다는 것은 그 전의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다윗 후대에 보다 세밀화하시겠다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기본은 언약궤의 존재에 있습니다. 레위기 16:2-3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세 율법을 통해 지상에 ‘언약궤’라는 것을 만들 때, 그 언약궤가 놓여 있는 공간이 죽음의 공간이 된다는 점까지 인간의 건축술로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즉 인간은 ‘죽음’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지성소(=언약궤)가 있는 그곳에서 발산되고 있는 저주스러운 죽음을 커버하는 것은 흠없는 제물의 피뿐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만드는 솜씨를 가지로 이런 취지를 다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즉 인간의 자기 죽음을 초래하는 건축술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언약궤에서 발산되는 저주스러운 죽음은 인간의 건축술과 관련있는 것이 아니라 율례와 법도와 계명 준수와 관련있습니다. 따라서 언약궤 주변에 있는 저주의 힘은 항상 저주를 퍼붓기 위해 대기된 상태입니다.
열왕기상 8:12에 보면, “그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성소가 있는 곳은 어두운 곳입니다. 이는 인간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를 자연적 표현하면 결코 ‘인간 위주’가 아니라는 겁니다. 창세기 28:16-17에 보면,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땅이 연결되는 지점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수립됨을 알았습니다. 야곱이 이를 알았을 때, 야곱은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 꿈이 하나님에 의해서 현실이 되는 겁니다. 야곱은 고백은 이것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고 싶은 뜻이 계시기에 꿈을 통해서 찾아왔던 겁니다.
이점에 대해서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왕기상 3:14-15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수은제를 드리고 모든 신복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꿈을 통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과 이 지시받은 것은 아버지 다윗에게 미리 주신 약속의 실현 차원임을 알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과 하나님 사이에 약속하신 바가 솔로몬 자신에게 그대로 이어짐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래서 아버지를 취지를 이어받아 성전을 짓게 된 겁니다.
아버지 다윗왕은 사무엘하 6장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의 유일한 토대로서 언약궤를 주목했습니다.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삼하 6:12-14)
즉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언약궤 존재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낮아짐의 취지를 계속 지속하기 위해서 다윗은 언약궤에다 지붕을 만들고 벽채를 만들어서 어차피 이스라엘에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궤 취지를 보다 분명히 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하나님께서 이 인간이 만든 건축물에 계속 머물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율례와 법도와 계명에 가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이 지켜지는 조건 하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 성전에 계실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성전 지을 때에도 이런 취지를 살아 있어야 합니다. 열왕기상 6:7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는 출애굽기 20:25-26에 보면, “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단을 만들라고 지시하시면서 자연 그대로의 돌이 인간에 의해서 운반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때 인간도 자연 그대로의 인간임이 강조됩니다. 특히 인간의 부끄러운 요소인 하체라든지 혹은 인간의 예술적 감성이 개입해서 제단돌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킵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에 인간이 스스로 아름답게 느끼는 솜씨기 끼어드는 것을 금지하십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범죄할 때, 선악과 나무의 매력에 혹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28:12에 보면,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처참하게 땅에 꽂혀 망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결국 무너지고 불탑니다. 이스라엘이 다윗언약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 깊숙이 자리잡은 하나님의 저주는 이스라엘 전체를 무너뜨리고 더나아가 이스라엘을 삼킴 모든 이방민족에서 쏟아지게 됩니다. 스바냐 1:15에서는 이 날을 깜깜한 저주의 날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지금은 종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신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 말고는 모조리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성도 안에서 예수님의 피흘리심이 하나님의 저주를 복으로 바꿔줍니다. 이처럼 성도의 복이란 곧 하나님의 성전에서 영원히 함께 하는 겁니다. (시편 84편)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심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늘 새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강-열왕기상 6장 11-13절(깜깜한 성전) 250122-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6장 11-13절입니다.
열왕기상 6:11-13
“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네가 이제 이 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나의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
열왕기상 6장의 내용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그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6장 8, 9절에 “중층 골방의 문은 전 오른편에 있는데 나사모양 사닥다리로 말미암아 하층에서 중층에 오르고 중층에서 제 삼층에 오르게 하였더라 전의 건축이 마치니라 그 전은 백향목 서까래와 널판으로 덮었고”라고 되어 있어요.
성전을 건축하면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에 주목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나의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만 그럴싸하게 잘 지어놓으면 그것으로 율례와 법도와 규례를 지키는 것을 대체하고 대신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싶어해요.
왜냐하면 성전 건축에는 비용과 노력이 다 들어갑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은 사람의 손이 거기에 개입해서, 인간의 노력이 개입해서 ‘인간이 애썼다.’ 하는 그러한 흔적, 자국이 성전이라는 건축물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잖아요. 그런데 계명을 지키고, 율례를 지키고, 법도를 지키는 그것은 지켜봤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인간은 어느쪽을 선호하느냐?
건축물이라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에 눈앞에 번듯하게 있는 그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데 다윗도 마찬가지고, 솔로몬도 마찬가지고요, 오늘날 인간들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점에서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느냐? 이 성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지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인간이 지을 수가 없느냐?
그 성전 중앙에 뭐가 들어오는가 하면,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오게 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이 어떤 곳이냐? 레위기 16장 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성소 이야기인데 그 지성소에 법궤가 있고, 그 법궤 위를 속죄소라고 합니다. 죄를 씻어주는 장소인데 그 속죄소, 곧 언약궤를 인간이 간수하기 위해서 장소를 건물로 만든다는 것이 뭐냐? 인간이 들어가는 죽는다는 그 공간마저 인간의 솜씨로 설치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어떤 건물은 만들 수 있어요. 상자도 만들 수 있는데 그 상자를 만듦으로서 발생하는 저주의 힘, 들어가면 죽는다, 들어가면 죽어버린다, 하는 그러한 보이지 않는 힘까지 인간의 손으로 제작이 되느냐, 만들어지느냐 하는 겁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교회에 이런 것이 있었어요. 예배당을 지어놓고 거기에 강대상 위에는 남자만 올라오게 했습니다.
사찰 집사도 남자니까 올라올 수 있는데 여자는 일체 강대상 위에 올라오지 말라는 겁니다. 불경하다고. 그래서 여 전도사는 윗단에는 못 앉고 아랫단에만 앉아요. 윗단에는 뿔처럼 튀어나온 의자가 보통 세 개 놓여 있거든요. 삼위일체 자리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앉는 자리에요.
그런데 상상해 보세요. 거기에 여자가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전도사나 여권사님이나 앉아 있다고 한다면 옛날 분들은 기절할 거예요. “나와, 거기서!” 이렇게 할 거예요. 그러면 거기 앉아 있던 여권사님이 따지겠지요. “이 의자에 여자라는 이름으로 앉을 때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인간의 논리와 지혜로서 증명해 보세요.”
의자에 앉는다는 것은 엉덩이로 앉는다는 것이고 엉덩이는 근육으로 되어 있잖아요. 남자 근육은 괜찮고 여자 근육은 자동으로 저주가 온다는 것을 예배당 지을 때부터 계산하고 지었다면 뭘 근거로 계산했겠습니까? 우리가 지은 예배당은 여자가 강대상에 앉기만 하면 그 여자는 저주받는 그 저주의 요소까지 가미하고 그걸 고려해서 지은 예배당 봤습니까?
없지요. 없다고요. 하나님께서 성소를 지을 때, 성전 말고 모세 때 성소를 지을 때 성소 안쪽에는 인간은 누구든지 들어가면 죽는다, 심지어 제사장도 들어가면 죽어요. 1년에 단 한 차례만 허락되고 그 외에는 누구든지 들어오면 죽게 되어 있어요. 무슨 수로, 어떤 인간의 힘으로 그 죽는 공간을 설계하고 제작해 낼 수 있느냐 하는 말이지요.
거기에 압정을 막 뿌려놨어요? 안 그러면 지뢰를 막 심어놨습니까? 그러면 죽음의 공간이 인간 손으로 제작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보통 땅인데 들어가지 말라는 그 율례와 법도, 레위기 16장 2절, 들어가면 죽는다는 그 율례와 법도가 작동하고 있는 공간이 지성소거든요. 그런데 무슨 수로 인간의 건축술로 그 율례와 법도를 붙잡아 맬 수 있느냐 하는 말이지요.
안되지요. 그러니 성전 건축은 근원적으로 안 되는 겁니다. 성전, 거룩한 공간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사무엘하 6장 16절에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라고 해서 언약궤가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성전의 기본은 언약궤를 안치하는 곳입니다. 이 언약궤가 들어올 때 다윗의 태도는 이겁니다. 자기가 왕이라는 위신이나 체통을 다 버립니다. 언약궤 앞에서 누구든지 인간은 죽는 것이 마땅한 죄인의 모습으로 그 언약궤를 반겨야 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회사의 일반사원들이 회식을 합니다. 부장, 과장, 대리, 신입사원, 인턴사원까지 다 모였습니다. 부장이 특별 배려를 해서 “회식이니까 야자 타임 한 번 하지. 한 5분쯤이라도.” “부장님! 그래도 되겠어?” 초반부터 반말하면서 들어오지요. 이렇게 자기들끼리 분위기를 돋을 수 있는데 그때 그 회사 총수가 거기 들어왔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야자 타임도 하면서 분위기 살리다가 갑자기 부장이고 과장이고 신입이고 할 것 없이 다 똑같이 벌떡 일어나서 ‘어인 일로 행차하셨습니까?’ 하는 식으로 할 거예요. 다윗이 비록 왕이지만 언약궤가 들어오는 순간 다윗은 감히 내가 일반 백성들과 차이 난다든지 하는 것은…, 같은 인간들끼리에서는 내가 왕이지만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는 내가 옷을 벗고 춤을 춘다고 할지라도, 이것보다 더 비천하고 낮아진다고 할지라도 언약궤의 그 가치만 높아진다면 내가 뭔들 못하리, 이 자세가 다윗의 자세에요.
이 자세를 모르는 다윗의 부인 되시는 사울의 딸 미갈이 남편 바가지 긁다가 평생 애 없는 저주를 받았다고 되어 있지요. 자,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이 함께 있는 그것을 옭아매려고 성전을 짓는 것은 아니에요. 다윗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거예요. 확실하니까 확실한 그것에는 손 못 대고, 언약궤가 있으니 그 언약궤가 있는 확실한 공간을 칸막이라도 쳐서 언약궤의 가치를 높이려고 한 겁니다.
언약궤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유일한 장소거든요. 모세에 의하면. ‘그 만남의 장소를 더욱더 빛을 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드러내는, 다른 민족에는 없는 외곽구조물을 지어드리겠습니다.’ 해서 성전이라는 아이디어가 다윗에게서 나왔던 거예요.
창세기 28장에, 야곱이 형을 피해서 삼촌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는 중인데 어떤 장소에 가게 됩니다. 그 장소가 지금의 ‘서안지구’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가게 되면 일반관광객들은 잘 가지 못하는 벧엘이라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노숙하다가 꿈을 꾸었는데 야곱이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28장 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그리고 16절에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하나님이 무슨 뜻이 있어서 여기 나 있는 곳에 하나님이 같이 있다는 고백을 쏟아놓아요. 같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배었던 돌베개에 기름을 붓고 하는 말이 19절에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다. 하늘과 땅이 유일하게 통하는 장소가 바로 여기’라고 했어요. 그러면 여기서 야곱이 고백하는 것은 뭐냐?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그 만남의 장소, 만남의 장소는 결코 인간이 붙들거나 잡아맬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의 장소를 제공해 놓으면 야곱이나 다윗이나 거기에 대해서 증인 노릇 하고 그냥 고백하면 되는 거예요.
자, 그런데 다윗이나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사람들의 인식의 한계가 어떤 것이냐? 언약궤의 취지를 알고 ‘언약궤 있는 곳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괜찮아요. 그러면 괜찮은데 거기에 뭘 추구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우리의 노력과 우리 성의와 우리의 제물과 시간을 투자해서 우리가 그곳을 옭아맸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요. 인간이.
하나님의 계심이 먼저인데, ‘하나님이 계신 데 우리는 거기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지은 집에서 하나님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엄청난 망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솔로몬도 마찬가지고 다윗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야곱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이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주께서 지켜주시면 내가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창 28:21, 22). 이렇게 나온다고요.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자, 여기서 일단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봅시다. 하나님의 성전은 일단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함께 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 쪽에서 개시를 했는데 인간의 문제점은, 하나님과 인간이 항상 거기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오해고 곡해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론은 뭐냐?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 인간의 자리를 빼버리고 그 자리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있는 장소로 만들어 버리면 그곳이 영원한 성전입니다.
영원한 성전을 지상에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오해스럽게도 인간한테 성전을 허락하고, 그 성전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성전 완성의 경로, 절차를 밟아나가는 거예요. 그 증거가 열왕기상 3장에 나옵니다. 14, 15절에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꿈이더라.
솔로몬은 하나님에 의해서 꿈을 꾸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꿈을 통해서 그냥 인수인계 받아요. 사무엘하 7장에서 성전을 지어드리겠다는 다윗의 제안에 대해서 10절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입장은 이거예요. “분명히 하자. 성전 지으면 내가 거기에 들어갈 것 같으냐?” 이게 여러분에게 복잡할 수 있는데 쉽게 생각합시다. 여러분, UFO 있지요. 직경이 한 500미터나 되는 커다란 비행접시가 지묘동에 떴다, 우리 교회 위에 떴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UFO를 포획하기 위해서 인간 쪽에서 건물을 지을 수가 있습니까?
못 지어요. UFO를 체포도 못하고, UFO를 격추도 못하고요, 괜히 외계인에게 달려들다가 다 죽어요.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물체가 등장했을 때 인간이 그걸 고정화시킬 수 있는 건물이 가능하냐 그 말이지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전을 허락한 이유가 뭐냐?
성전을 허락한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이 만든 성전에 계시지만 그것은 조건부예요. 조건이 있습니다. 뭐냐? 다윗에게 내려준 계명과 율례를 지키는 조건하에, 그 조건하에 인간이 만든 성전에 하나님이 계실 수가 있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언약궤에 들어가면 너 죽어!”하는 그 언약궤, 인간이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는 죽음의 힘, 죽음의 능력, 그 죽음의 능력을 계속 살아있게 만드는 조건하에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성전 안에 들어오시는 거예요. 인간이 만든 건축물이 죽음의 능력까지 포획했다는 말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 쪽에서 겸손하게 봐주는 거예요.
“죽음의 능력까지 포함시켜서 내가 너희들이 지은 건물 안에 들어가 줄게.”가 돼요. 그러나 조건이 있어요. 언약궤의 정신, ‘이 언약궤에서 흘러나오는 윤리와 법도를 만약 위반하면 성전이고 뭐고 너희들 전부 죽었어.’라는 그 조건, 그 조건에 대해서 네가 동의하느냐를 묻는 겁니다.
솔로몬은 꿈에서 이 조건을 부여받고 드디어 아버지께 줬던 약속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제는 정식으로 인정했다는 식으로 성전을 짓습니다. 성전을 짓는데, 열왕기상 6장의 성전 짓는 대목에서 7절에 보면 “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대목을 놓치면 안 돼요.
이 대목을 왜 놓쳐서는 안 되느냐 하면, 모세 때부터 하나님의 제단을 쌓을 때는 그 제단의 기본 원칙이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줬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5절에,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하나님께서 제단 쌓으라고 해서 제단을 쌓는데 쌓을 때 네가 그것을 정으로 쪼개고 다듬고, 이러지는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무슨 뜻이냐? ‘성전을 짓기 위해서 자연을 이용하지 말고 자연이 성전 속에 스며들도록 해라.’
자연이 스며들게 돼면 여기서 뭐가 빠지냐 하면, 인간의 재주나 솜씨, 아이디어, 예쁜 것 그것은 인위적인 게 돼서 빠져야 하고, 인간은 그냥 자연의 일부가 되어서 자연 그대로 있는 돌을 자연의 일종인 인간이 나서서 자연히 자연스러운 인간이 자연스럽게 들고서 자연스러운 제단을 쌓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그 제단에서 제사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여기 ‘자연’이 몇 번 들어갔어요? 많이 들어갔죠?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왜 하나님께서 굳이 그렇게 하시는가? 인간이 좀 솜씨를 부려도 되지 않겠는가? 그것은 인간 속에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죄는 선악과를 따먹을 때부터 그 죄가 발현이 됐는데요, 선악과 모양에 대해서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그 선악과 모양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해서 인간이 보기만 해도 확 당기는 그런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과일인데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는 “먹지 마라”에요. 먹지 마라, 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하시는 그 취지가 뭐겠습니까? 에스겔 28장 11-13절에 보면, ‘두로’가 나오는데 그 당시에 제일 잘 사는 나라가 두로였어요. 요즘 같으면 도시 국가인데 싱가폴쯤 됩니다. 싱가폴, 제가 안 가봤습니다. 안 가봤는데 사진 보니까 그 멋진 건물들과 깨끗한 환경, 담배꽁초 버리면 엄청난 벌금, 나라가 자기들끼리는 멋지게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시민권을 제한적으로 줘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주지를 않아요. 나머지는 그냥 노동자로서 올 뿐이지 인구 늘리는 정책도 없습니다. 주인만 살고 다른 데서 온 사람들 그냥 일이나 하고 ‘돈 벌어서 너희 집 가라.’ 하는 식의 그렇게 계획적인 도시입니다. 그 싱가폴이 무역을 해서 잘 사는데 이 무역을 해서 잘 사는 에스겔 당시의 나라가 두로입니다.
이 두로가 너무너무 잘 살았어요. 그래서 말하기를 에스겔 28장 12, 13절에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이렇게 네가 아름다웠는데 교만했기 때문에 내가 너를 멸하고 땅에 던져서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만들게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아름답다는 것,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들의 아름다움이라는 노골적인 품성이 제단을 쌓는데, 건축을 하는데 늘 그것이 끼어들게 되어 있어요.
이게 주님 보시기에는 아름답지 못하다는 거예요. 그것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거예요. 하나님 성전의 그 의미, 성전의 가치는 세상에 대해서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취지, 흘러넘치는 그러한 건축의 취지가 살아있어야 그게 성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름답게 되어 버리면 성전 자체가 탐이 나고 아름답게 된 그 성전에 대해 인간은 매력과 미련을 갖게 될 거예요.
상당히 그 점이 어려운 대목일 겁니다. 열왕기상 8장 12절에, “그 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캄캄한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는 자기의 거주지를 만들면서 깜깜하게 만들었어요.
왜 깜깜하게 만드는가? 그 이유가 시편에 나옵니다.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할 그곳에 하나님 내가 여기 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하나님은 깜깜함을 감수하면서 깜깜한 데서 하나님은 인간의 대표와 만났습니다. “깜깜함을 주목하고 깜깜함을 살려주기 위한 건축물을 지어라.”
이게 성전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성전은 되게 화려하고 아름답잖아요? 진짜 성전의 취지는 그것과 정반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전을 이렇게 정반대로 지으시냐 하면, 하나님의 성전은 무엇을 살리는가? 내가 이 죄 많은 세상에 내려준 율례와 법도, 심판하는 율법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그걸 늘 분명하게 밝혀야 할, 그걸 알려야 될 그러한 장소로서 성전을 짓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그 UFO의 예를 다시 들어볼게요. UFO를 딱 봤을 때, 예를 들어 맨 아래층만 해도 직경 500m라 칩시다. 그런데 UFO는 못 건드려요. 건드리면 다 죽으니까, 외계에서 온 거니까, 인간의 모든 과학 지식을 능가하는 UFO니까.
하지만 인간들은 이 UFO를 신성시하게 섬기면서 이걸 위해서 건축물을 지을 수 있어요. 왜? UFO 비행체의 직경이 500m라면 직경 1km, 높이도 1km, 이런 식으로 지으면 되잖아요? 짓는 게 쉽지는 않겠습니다만 지을 수 있겠죠.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 1km가 안 돼요. 828미터짜리(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 있죠. 우리나라 롯데 타워는 555m밖에 안 되고요.
하여간 건축물 지어서 UFO를 떡 보관해 놓으면 인간들이 생각하기를 ‘드디어 UFO는 우리가 만든 건물에 갇혔어. 이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UFO를 만날 수 있어. 야, UFO 나와, 하면 나와야 해. 우리가 가둬놨으니까.’ 이런 생각을 인간들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누구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의 정성과 성의로 아름다운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이 건물의 아름다움이 아까워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만나는 것에 대해 우리를 내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시편에 나오는 말씀이나 에스겔에 나오는 말씀이나 말씀을 보면 인간들의 생각은 엄청난 오산이고 오해였습니다. 깜깜한 데서 그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심판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성전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시편 18편 9절에서 11절에,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하나님의 성전의 취지가 지성소에 있고, 지성소에는 그룹, 천사들이 있어요. 그 천사들은 대기상태입니다. 유월절 날에 애굽의 맏이들 다 죽이는 거 알죠? 그 천사들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대기된 상태에요. 시편 97편 2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데 그 앞이 어둡고 구름이 있고 흑암이 있죠.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그다음부터 밑에는 번개가 나타나서 심판을 해버립니다.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사면의 대적을 사르는도다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 같이 녹았도다”(시 97:3-4)
그보다 더 구체적인 것은 에스겔 1장과 10장에 나와 있습니다. 에스겔 1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이 나와요. “어디든지 신이 가려하면 생물도 신의 가려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라”
이 성전이 어떤 성전이냐? 움직이는 성전입니다. 한곳에 머물지를 않고 바퀴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가는 곳마다 불꽃이 나와서, 숯불이 나와서 이 세상을 다 태워버립니다. 그러니까 잔디 깎는 기계죠. 움직이는 심판 기계가 성전이에요. 에스겔 1장과 10장에 보면 나오는 성전, 그 성전을 솔로몬이 건물 지어서 가뒀다고요?
천만의 말씀, 못 가둡니다. 솔로몬이 아까 열왕기상 8장 말씀처럼 “전에는 깜깜하게 했지만 제가 밝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 솔로몬 성전, 이방 민족에 의해 가차 없이 타버렸어요. 주님이 깜깜한데 계시는 것이 주님이 하실 일에 합당한 성전이에요.
이 예배당이 성전이라면 불 꺼야 돼요. 여기 제단 있다면 불을 다 꺼버려야 돼요. 여기에 꽉 차 있는 어둠이 이제는 소위 밝다고 여기는 이 세상을 향해 넘실대면서 그 어둠의 무서운 저주와 심판이 인간 세계를 눈사태처럼, 그냥 모래가 내려앉는 것처럼, 산사태처럼 다 함몰시킬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오죠. 요한계시록 6장, 요한계시록 7장, 요한계시록 8장, 천사들이 이 세상을 3분의 1로 나누어서 다 심판해 버리는데 요한계시록 11장 19절에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바로 성전, 거기서부터 나오는 거예요.
이렇게 보시고 오늘 본문 다시 돌아가면, 이제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당부한 그 취지를 여러분들이 아시게 될 것입니다. “네가 성전을 건축했는데”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면서 거기다가 조건을 붙여요. “다윗에게 이야기한 내 법도와 율례와 규례를, 계명을 네가 지키면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내가 이룬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네가 이제 이 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나의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왕상 6:12, 13).
성전을 유지한다는 말이 아니고요, 내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한 약속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그 이루겠다는 다윗과의 약속이 뭐냐 하면, 모든 민족은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 못 하고 버틸 수 없지만 내가 다윗 자손의 가문만큼은 건져서 영원한 빛의 나라 천국으로 가도록 만들어 줄게, 라는 약속을 솔로몬에게 다시금 재확인하고 있어요.
그러면 솔로몬이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뭡니까? “하나님, 성전 지었습니다. 우리 거기서 만나요.” 지금 이런 말 하면 안 돼요. 안 되고, 뭘 해야 하느냐? “아버지에게는 허락하지 않은 성전을 저한테는 허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한 성전, 그 무시무시한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은 성전에서 우리를 만나겠다고 했으니 감히 그 은혜와 은총에 제가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다윗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와 규례를 왕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그걸 지킴으로써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허락한 ‘영원한 천국의 백성 만들기’에 솔로몬이 나서는 것이 지금 성전에 관한 하나님의 취지를 솔로몬이 제대로 아는 거예요.
피아노 협주곡에 보면 연주자가 단독으로 연주하는 대목이 있어요, 1악장과 3악장에. 그걸 ‘카덴차’(cadenza)라고 합니다. 그 카덴차라는 것이 뭐냐? 오케스트라가 있으면 “오케스트라 스톱!” 피아니스트가 자기의 솜씨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데 그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즉흥적으로 했었어요. 그런데 베토벤 같은 경우에는 “그 마음대로 하는 부분까지 악보에 적어둘 테니까 그 안에서 마음대로 해 봐.” 그런 식으로 연주하게 한 거예요. 카덴차는 독주죠, 단독으로 연주하는 것.
지금 솔로몬이 하나님께 허락받은 대목이 이거에요. 카덴차입니다. 다윗의 약속은 뭐냐? “네가 왕이냐?” “예, 왕입니다.” “네가 율례와 법도와 규례를 지키면 내가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나라를 보호해 줄게. 솔로몬아, 내가 다윗을 어떤 식으로 보호했는지 네가 알지?” 다윗은 가는 곳마다 적들을 이겼어요. 적들을 이기고 그다음에 “네가 지은 성전에서 내가 계속 만나줄게.” 만나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만나주심 안에 뭐가 있다고 했어요? 언약궤가 있죠. 언약궤 있는 곳은 어두운 곳이에요.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함부로 못 들어가요.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곳에 제사를 드린 그 피, 제물의 피와 만나는 그 순간만큼은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께 허용받습니다. 감히 무시무시한 외계인을 지구인이 만나는 것을 허용할 때 흠 없는 이 지구인이…, 지금 UFO로 설명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흠 없는 지구인이, 죄도 없는 지구인이 대신 죽었다는 그것, “우리 그냥 죽었습니다.”하고 그걸 들고 나오면 외계인이 만나준다는 거예요. 그 만남의 장소로서 율례와 계명과 법도가 살아있는 조건하에 이 성전도 그대로 건사하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 성전의 취지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에 보면, 이러한 다윗 언약에 의한 천국 백성 만들기에 이스라엘이 초를 쳐버려요. 하나님 계명, 이런 성전의 취지가 없고 다윗 언약 취지가 없는 이방 나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칼을 빼 들겠죠?
언약궤 있는 곳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은 이제 어떤 의미가 되느냐? “하나님의 심판이 상주하는데 너희들은 이 심판을 건드렸다. 그러면 상주하는, 늘 있는 하나님의 심판이 다른 민족에는 없는, 성전에만 있는 언약궤의 이 취지가 언약궤를 모시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강렬하게 심판하는지를 내가 본때를 보여주마.”
그것이 바로 스바냐 1장에 나오는 깜깜한 날이에요. 15절에,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드디어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날이요,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멸망을 촉구했던 바빌론, 그 바빌론 나라가 이방 나라잖아요,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삼킴으로써 모든 이방 나라에 하나님 언약궤의 심판의 취지가 오늘날 220개국, 전 나라에 퍼져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 언약궤의 정신을 모르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분노의 날, 깜깜한 날, 저주의 심판만 남아 있는 이런 세상 속 마지막 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는 뭐냐? 이미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살고 있는 자입니다.
왜? 하나님의 성전이 건물이 아니고 나중에는 언약궤가 어디로 들어가느냐? 예수님의 몸 안에 들어가요. 예수님의 몸 안에 들어간 그 언약궤, 그 십자가, 어린양의 피, 언약궤와 어린양의 피의 만남이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 성도의 육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고 규정하시면서 우리 안을 하나님의 움직이는 성전으로 삼으셨던 거예요.
그 성전 안에서는 하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율례와 법도와 율법을 다 지킨 게 돼요. 다 지킨 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것은 돈으로 환산해서 받는 게 아니에요. 그까짓 돈 없어도 생명이, 다 이루었다는 생명이 있으면, 우리가 영생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우리가 이미 받을 걸 다 받은 겁니다.
끝으로 시편 84편 읽고 마치겠습니다. 1-4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윤석열 대통령이 복권되는 그 나라에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성전 안에 살고 싶습니까? 그 안에 집을 짓고 싶습니까? 하나님이 심판을 무릅쓰고, 심판받아 마땅한 우리를 자신의 피로 감싸주는 그 영역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 어떻게 감히 인간이 주님을 모실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께서 먼저 시작한 일이 우리의 육신을 덮쳐서 이제는 우리 안에 주님의 십자가 피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영생이고 사랑인 것을, 성전인 것을 이제는 잊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