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성전
2025년 1월 15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5:1-6
(5:1)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 부친을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 신복을 솔로몬에게 보내었으니 이는 히람이 평일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
(5:2) 이에 솔로몬이 히람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5:3) 당신도 알거니와 내 부친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인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 원수들을 그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5:4)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5:5)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위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5:6) 당신은 영을 내려 나를 위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 나의 종과 당신의 종이 함께할 것이요 또 내가 당신의 모든 말씀대로 당신의 종의 삯을 당신에게 붙이리이다 당신도 알거니와 우리 중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자가 없나이다
솔로몬의 성전 이해는 아버지 다윗이 제안한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성소와는 달리 성전을 기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자신이 싸워왔던 모든 전쟁이 자신이 해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벌어진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전쟁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셨음을 다윗은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입장에서 이제 이스라엘이 안정권에 들어왔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 자신을 주권자로 한 이스라엘 완성 계획에 최정점에 이르렀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마땅히 최고 공로자요 영광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시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주할 성전을 지어드리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성소였을 경우에는 고정적이 아니라 이동용이었습니다. 해체하고 다시금 조립하면서 그저 최종 귀착점에 도달되기를 요구받는 그런 하나님의 이름의 임재공간이었습니다. 이게 그런 시절을 지나고 다윗 입장에서 드디어 최종 하나님이 영원히 거주하실 상황에 이르렀다고 본 겁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 작업에 합당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다윗은 생각했던 겁니다.
이 제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상하신 성전계획이 비로소 다윗에게 제시됩니다. 일단 다윗의 제안을 거부됩니다. 사무엘하 7:13-16까지 나와 있는 성전 계획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은 결코 최종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다윗이 준비한 건축 자재는 다윗 수준에서는 성전인 것을 감안하시면서도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생각해 두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가문'입니다. '다윗의 집안'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시려는 곳은 딱딱한 건물이 아니라 인간의 족보, 특히 다윗의 족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윗의 자손'은 하나님과 부자지간이 된다는 것도 또 하나의 조건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례와 법도에 충실해야지만 그 기문에 하나님께서 계실 수 있다는 겁니다. “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즉 ‘집’이 성전이 아니라 율례와 법도가 인격화되고 그 인격화된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경우에만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겁니다. 이런 사실은 모든 인간들이 고대하고 기대하는 바와 어긋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길 위의 여정’으로 여깁니다. 피곤하고 힘들 나날임을 느낍니다.
따라서 그만큼 힘든 생을 살았으면 자기 인생의 끝자락 편히 쉬고,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상태이기를 소원하게 마련입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위해 힘 되는대로 그는 성전 자재들을 끌어모았습니다. 하지만 시편에 나오는 최후의 성전을 보면, 인간들의 예상과 전혀 빗나가는 식으로 마련됩니다.
‘성전이 없다’가 아니라 ‘인간이 예상한 그런 식’의 성전은 아닙니다.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19-23)
즉 ‘사람의 손으로 짓는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원칙은 궁극적인 성전의 본질에 그대로 살아 있게 됩니다. 도리어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식으로 세워지는 성전’에만 하나님께서 영원히 머무는 그런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전일 경우에만 모든 사람들 눈에 기이한 성전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예상한 성전구상이 다윗 뿐만 아니라 하나님 믿는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구상해서 건축한 집에 거룩한 하나님께서 고정적으로 영원히 계신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왜 이 일이 거룩하게 느껴지는가 하며는 인간의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이 하나님에게는 통하고 수용할 만하는 것을 증명되니 감격스러운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모든 인간의 기대에 찬 행함은 하나님의 성전에 거부당합니다. 그 이유는 그 성전의 세계는 ‘의의 문’을 들고 들어가는 온통 완전한 의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상 못한 성전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2)
따라서 흔히 생각하는 ‘다윗의 자손’과는 다른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야가 오십니다. 다윗이 선조가 되고 그 후손이 되는 인간에 의해서 성전과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했다면 예수님께서 먼저 바리새인에게 질의하신 다음의 질문 취지를 접수해야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2-46)
다윗의 평범한 자손은 결코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메시야 사이에 ‘아버지 아들’관계가 수립되는 데는 필히 ‘하나님의 원수’, 곧 ‘악마’를 최종 굴복시키는 작업을 완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 수준의 족보에서는 이 악마를 빼낼 수 있는 능력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히 율법과 법도를 완수한 ‘다윗의 자손’은 아닌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능한 솔로몬 성전은 결국 붙 타 버리고 그 이후에 성령의 불 속에서 나온 성전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참된 성전은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겁니다.(마 21:4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안일한 우리 생각으로 십자가라는 머릿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강-열왕기상 5장 1-6절(진짜 성전) 250115-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5장 1- 6절입니다.
열왕기상 5:1-6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의 신하들을 솔로몬에게 보냈으니 이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 이에 솔로몬이 히람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당신은 명령을 내려 나를 위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 내 종과 당신의 종이 함께 할 것이요 또 내가 당신의 모든 말씀대로 당신의 종의 삯을 당신에게 드리리이다 당신도 알거니와 우리 중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자가 없나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때, 다윗이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성전이 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성전이 없으면 안계실까요? 성전이 없어도 계셔요. 그런데 왜 하나님의 이름을 모시겠다고 성전을 지었느냐? 쓸데없는 짓 한거에요. 다윗이 잘못 생각한겁니다. 이점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데요.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모세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성소와 다윗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성전의 차이를 알아야되요. 성소는 움직이는 거에요. 성소는 이동용입니다. 포터블. 성소는 해체가 가능해요. 해체가 가능하니까. 이것을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네 인생은 노상의 인생. 길 위의 인생이에요. 끊임없이 길을 찾고, 그 길의 끝에 내가 어디에 도착해야 내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는가를 계속 뚜벅뚜벅 길을 걸어가면서 평생토록 길을 가고 있습니다.
머물곳을 본인이 찾을 수가 없어요. 놀라운 사실은 목적지가 뭔지도 몰라요.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그냥 떠도는 거에요. 떠돌이에요. 목적지가 없어요. 다윗도 전쟁을 하는데, 전쟁을 왜하는지 몰라요. 다윗은 전쟁하는 이유를 몰라요. 그냥 적들이 쳐들어오니까 전쟁하는 거에요. 적들이 있으니까 전쟁하고, 쳐들어오니까 전쟁하는 겁니다. 왜? 몰라요. 싸우다보니까 피흘리지요. 그래서 다윗은 전쟁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은, 이 전쟁이 다윗. 나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전쟁이라면, “하나님이여 이 전쟁의 모든 것을 마무리지을 때에, 제가 고백하기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라고 하게하시고. 따라서 전쟁이 멈출 때 더 이상 우리가 떠돌이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냥 목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했는데, 하나님이 그 전쟁을 몽땅 승리로 해주실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이스라엘의 도착 지점으로 간주해서 제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집을 지어드리겠습니다”라고 한거에요. 그때 다윗이 고백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군사이기 때문에 전쟁만 할 뿐이고, 진짜 전쟁을 시키신 분은 왕되신 우리 여호와 이름 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했어요.
이거 다윗이 생각을 잘 한 걸까요? 저는 설교 초반을 둘로 나누겠습니다. 다윗이 제안한 성전과 진짜 하나님이 원했던 성전이 다윗의 제안을 통해서, 상호 틀리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알려줬습니다. 인간이 제안하는 성전 그것과, 하나님이 생각해 놓은 성전은 다릅니다. 이게 달라요. 어떻게 다른지. 다른 이유는 이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이 행동하고 활동할 때, 이 행동과 활동이 최종 마무리가 지어지고 완성이 되는 안식의 때를 사람들은 그리워하면서 그것을 목표로하면서 행동합니다.
수련회 9강이거든요. 9강으로 끝나기를 염두해두고 강의할 수 밖에 없어요. 목쉰 것은 생각도 못하고, 그냥 내용이 9강까지 딱 맞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이고, 내 생각이에요. 내 생각에서 문제점이 내가 기대하고 원하는 것을 내 생각에서 빼내지 못한다는 것이 인간의 잘못이에요. 인간의 오류입니다. 인간이 여기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 생각을 뺄 수가 없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지어준다니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지적하는데, 이 지적을 제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다윗아”,“예”, “니가 성전을 짓겠다는 것은 너의 독백이야. 너의 독백. 그런데 다윗아 염려하지마. 이제 나의 독백을 너에게 알려주마, 내가 생각하는 성전을 너의 독백을 내가 거부함으로써 내가 원했던 성전을 너에게 알려주겠다“ 이렇게 제안을 한거에요.내가 제안한 그 성전을 독백으로 너에게 주겠다. 독백이라는 말은 일방적이다. 일방적. 인간의 뜻이 전혀 섞이지않은, 다윗의 뜻이 섞이지 않은, 일방적인 독백의 뜻을 이야기하는거에요. 그러면 그 독백은 뭐냐? 시편 118편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시편 118편을 보면,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편 118편 22절)’
하나님이 생각한 성전은 먼저 어떤 절차가 필요한데, 그것은 뭐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통이의 머릿돌이 되는거에요. 하나님이 지은 성전은, 반드시 그 시작점에서 모든 인간이 기대하고, 목적하는 바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이 집밟힐 때, 그 집밟히는 것이 하나님이 생각하는 성전의 시작이에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새로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는겁니다. 이것을 다윗은 감히 생각을 못한거에요. 자기딴에 이정도 믿음 같으면 하나님은 그 성전에 계실 것이다. 하나님은 ”아니야 그거 아니야. 나는 사람이 집은 집에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 지은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는가, 사람에게 버림받은 집에 들어가요. 사람에게 버림받은 집.
이번 수련회 강의 내용에 이것과 비슷한 내용이 나왔어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미친 짓이에요. 왜 사람이 복음을 못 받아들이냐 하면은, 나의 목적이 따로 있기 때문이에요. 내 목적하는 바가 따로 있기 때문에, 복음을 안 받아 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이 생각하는 복음은, 인간이 절대로 못 받아들이는 내용을 복음으로 소개하는 거에요. 그런데 인간들이 받아들일 때,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거에요.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어떠한 기능이 있는지, 로마서 9장 33절에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3)“
다윗은 시온에서 성의껏 준비 다해서, 건축자재 준비 다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제안했어요. 하나님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자기 성의니까 하나님이 받아줄 것이라고 여겼던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제안한 그 성전은 어느 누구도 부딪혀서 넘어지는 성전 아니에요. 어떤 성전이냐? 잘 지었다! 멋지다! 최고다! 사람들의 심보는 이래요. 뭔가 잘짓고, 뭔가 성과있게 잘 되었으면 뒤에 칭찬 몇마디 하면서, 스믈쩍 거기 섞임으로써, 나 니하고 같은 뜻이야하고 대충 섞여들어가서, 자기의 목적을 편하게 훔친다고 할까요? 편하게 접수한다고 할까요? 편하게 자기 것 만든다고 할까요? 그게 인간이 이땅에 평생 살아오는 요령입니다. 인간은 요령꾼이에요.
자기가 희생하고, 자기가 박살나고, 자기가 깨지고, 그것을 근거로 뭔가 이루어지는 것. 인간은 딱 질색이에요. 인간은 복음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하나님이 다 하셨으니까 넙쭉 삼키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있어요. 쉽게 한다는 우리나라 속담가운데, 이런 속담이 있죠? ‘누워서 떡먹기’라는 게 있죠. 제가 그것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체하는 줄 알았어요. 쉽지 않아요 쉽지 않아요. 차라리 앉아서 떡먹는 것. 그것이 나아요. 누워서 떡먹는 것 너무 어려워요. 옆에 물가져다 놓고 먹어야해요. 안 넘어가요.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복음도 누워서 떡먹는 것보다 더 쉽게 넘어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거에요. 누구 좋아라고? 제가 하나님 좋아해요. 하나님 사랑한다고요.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영원한 나의 이 나그네같은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 천국에 넣어주세요. 내가 복음 믿을테니까 천국에 넣어주세요. 나 하나님 만나고 싶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안 받아들여요. ”나 니하고 만나기 싫다“. 심보가 그런 심보인데 왜 만납니까? 그 심보가 안바뀌었는데요. 시편 118편 19절에 해답이 나와있습니다. 우선 22절에.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118:19)“
여러분 다윗은 기이한 성전을 지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어요. 계획된 대로 화려한 성전 멋진 성전 대규모 성전. 그것을 다윗은 계획을 했고, 거기에 모든 건축 자재까지 준비를 다하고, 아들한테 부탁했습니다. ”내가 성전 지으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거부했다. 아들아 니가 내 대신 내가 죽고 나거든 니가 왕되고 난 뒤에 성전지어라.“
이렇게 유언으로 물려준거에요. 그런데 다윗의 사고방식 자체에서 무엇이 빠져있는가 하면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건축자들의 버린 모퉁이 돌이 되어야 하고요. 사람에게 버림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건축의 성전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성전을 새롭게 만든다는 이 사실을 다윗은 몰랐던 거에요. ”하나님 복음 잘 받았습니다. 이제 복음 들고 천국 가겠습니다“라는 사람에게 버림받아야 그것이 바로 복음이에요. 복음을 이용해서 천국 가려하는 사람한테는 그 복음이 아직 근처도 안 간, 먹히지도 않은 겁니다. 누워서 떡먹는 식으로 복음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야 23절의 고백이 같은 고백이 나와요. 어떤 고백?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자, 여호와의 행하신 것? 이것은 여호와 행하신 모든 것은, 우리가 상상도 못한 기이한, 시작도 기이하고 중간도 기이하고 마무리도 기이하고, 우리는 기이하고, 기이하고, 기이하고, 매 순간이 기이한 일들만 우리에게 들이닥칠 때, 그때 우리는 성전에 들어온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더불어서. 그 기이한 일이 뭐냐? 시편 118편 19절에 나옵니다.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118:19)“
이 구절이 오늘 설교의 핵심이에요. 목쉬더라도, 빨리 설교를 마치더라도 이것은 이야기해야겠어요. 이거 안하면 목 쉬게해도 소용없어요. 이거 설명해야해요.
하나님의 성전은 반드시 그 문안에 완벽한 의가 기다리고 있어요. 완벽한 의. 완벽한 의는 어떻게 만들어놓았는가? 로마서 9장 33절.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3)“
그러면, 믿지 않는 자는 뭐냐? 자기의 행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에 들어가려 하다가 모조리 다 자빠지고 엎어지고 난리도 아니에요. 하나님을 위해서 돈 모아서, 예배당 짓고 성전 짓고,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는 것. 기뻐하게 되면, 내가 예상하는 집을 지으면 그 속에 나의 의도 거기 섞이게 되요. 나의 의가 섞이게 되면, 건축자들의 버림받은 돌이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예상한 것이 기초돌이 되기 때문에, 가짜 성전이에요. 그것은 가짜성전이 된다고요.
제 말은 이거에요. 진짜 성전 앞에서. ”야 신난다 들어가자“가 아니라, 진짜 성전 앞에서, ”주님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이 심보가 참으로 더럽고 부끄럽습니다. 내가 왜이렇게 못됬고 내가 왜 이렇게 심보가 더럽습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그 자체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천국. 의의 나라. 천국은 사람에게 버림받은 분이 모퉁이가 되는, 첫 돌이 되는 곳. 그러한 아픔과 희생도 모르고, 누워서 떡먹는 식으로 ”이야 이거 땡잡았네. 복음 믿고 천당가자“. 뭐에요 그게? 하나님이니까 사랑을 해준다고요? 사랑받기 전에 심판받을 자라는 것을 인식하세요. 나는 심판 받을 자이지 사랑받을 자가 아닙니다. 그래야 기이함이 기이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에요.
사무엘하 7장 14절에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7:14)“
다윗이 ”성전을 지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언제 니보고 성전 지으라하더냐. 성전? 내 집말이야 내집?“ 성소는 비고정적이에요. 해체하고 움직이는 거에요. 그러나 성전은 성소와의 차이점이 뭐냐?. 영원히 고정적인 겁니다. 그 차이점이에요. 한번 박히면 영원히 박혀있는 거에요. 영원한 성전인 거에요. 성소는 이동용이지만, 성전은 ”그만. 도착점에 왔다. 드디어 도착지점에 도달한거야“ 이게 성전인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게. 하나님이 어떤 경우가 될 때 하나님 보시기에 스스로 “그만 다왔다. 이거야 이거. 이게 도착지점이야”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무엘하 7장 14절에서 보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가 완성될 때, 성전은 완성되는 겁니다. 모든 율례와 법도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이스라엘 자체가 고정적입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고정적인 것은 성전 안되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냥 공간적으로 광야지나서 고정되었다. 약속의 땅에 왔으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해서, “약속의 땅에 왔으니까 도착지점에 왔습니다”. 그렇게 생각할때에 하나님은 “얘들아 너희들 오해다. 율례와 법도가 완전할 때 도착지점이야. 율례와 법도가. 그냥 공간적으로 밥먹고 산다고. 젖과 꿀이 흐르는데 산다고, 이것이 도착지점이 아니고, 율례와 법도가 완성이 될 때 도착지점이에요. 그 완성을 누가 시키는가? 그것은 ”다윗 너 아니야“”그러면 제 후손 말이지요?“”니 후손은 맞는데, 니 후손은 그냥 집만 지어줘. 솔로몬은 그냥 집만 짓는거야. 그것은 성전 아니야“.
중요한 것은 그 솔로몬이, 사람의 손으로 지었던 그 집이 율례와 법도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 성전이 불타버린 다고요. 성전이 불타버려요. 인간이 지었던 그 솔로몬 성전이, 불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기이한 일이고, 불탄 다음에 나타나는 성전이 진짜 성전이에요. 불탄 다음에 나타나는 성전. 솔로몬 성전 불탔습니다. 지금 미국 LA. 잘사는 동네. 베벌리힐즈인가요. 불탔지요? 인간의 손으로 돈 들여 지었던 것이 불탈 때, 그것이 불탈 때, 영원히 불타지 않는 그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에요. 새 예루살렘. 새 이스라엘. 새 시온.
그러니까 이말은 뭐냐? 우리는 늘 우리 중심이고, 우리 행함을 못 잊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함에서 나오는 아이디어. 행함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를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가지고 계속 움직이게 하는거에요. ”이게 성전이다. 아니다. 이게 성전일까? 아니다. 이게 교회일까? 아니다. 이게 천국일까? 아니다“. 마치 성전 이전에 성소가 ”여기입니까?“ ”더 가야돼“ ”여기입니까?“”해체하고 다시 가야돼“”여기입니까?“”해체하고 다시 가“.
옛날 성소가 움직이는 것처럼 인간의 아이디어 끄집어낸 성전은 늘 해체되고 해체대상이에요. 그것은 온전한 의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목사님 뭡니까? 율례와 법도가 늘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율례와 법도를 우리가 못지켜요. 우리가 온전한 의인이 될 수 없어요. 그렇다면 그와 동시에 내가 생각한 천국과 지옥도 엉터리인거에요. 아! 이게 수정의 수정. 개정이 필요한 겁니다. ”아니구나, 아니구나, 아니구나“. 늘 우리 자신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구나와 아니구나의 연속이에요.
그러면 하나님 뭡니까? 12제자가 예수님 따라 다니면서, 그런식으로 따라다녔거든요. 주님께서 ”가만 있어봐.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진다. 가! 가! 일단 가있어요. 일단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일단 아니야. 저리 가있어“. 예수님께서 율례와 법도록 혼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버렸고,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실망해서 베드로도 3번씩이나 부정하면서 ”나 예수님 저주합니다“ 이렇게 했어요. 누가 천국 간다고요? 누가 천국가요? 아무도 못가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율례의 법도를 십자가에서 홀로 다 이루었어요. 홀로 다이루었어요.
그리고 46년동안 지은 성전. 지은 성전. 치워라. 내가 3일만에 성전 짓겠다.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납득이 안되었어요. 그런데 요한 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하고 난 뒤에, 비로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고, 예수님이 다윗의 집이고, 예수님이 다윗에게 이야기한 하나님의 성전 예언이였던 겁니다. 그게 사무엘하 7장 14절에 나옵니다. ”다윗아, 내가 너를 위해서 집을 지어주는데, 그게 뭐냐? 너의 가문이야“. 너의 가문이야. 다윗의 자손의 패밀리. 다윗의 자손의 패밀리.
자 끝으로, 마태복음을 한번 보겟습니다. 마태복음 21장 4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21:42)“
그러니까 이 성전, 사람에게 버림받은 돌이 아니면 성전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일은 어떻다했어요? 기이해요. 누구 눈에 보기에, 사람들의 예상밖에 성전. 어떤 인간도 예상도 못한 성전이였습니다. 그런데,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이 일을 누가 하느냐? 이제 마지막 어려운 것 남아 있어요. 마태복음 22장 41절에서 45절.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그 당시 바리새인들도 아무소리도 못했어요.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그래서 오늘 설교 마지막 대목에서 이 어려운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얼마나 어려운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마22:41-45)“
여러분 이 질문,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제 질문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한 질문의 취지를 여러분들은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취지부터 이해해야돼요. 이 취지부터. 지금 취지부터가 납득이 안되요. 주님이 어떤 생각에서 먼저 선빵을 날리고 질문을 던졌는지, 그것조차 지금 정리가 안되있는 거에요. 제가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보통 아버지의 아들. 그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에서 아들쪽으로 족보가 이어오잖아요. 그때 아버지를 선조라하고, 그 아들을 자손이라 하죠.
그런데, 시편 110편. 또는 마태복음 22장 44절에,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다시 말해서, 이런 질문이에요. 예수님께서 ”얘들아 들어봐라. 주님이 주님에게 아버지가 되고, 주님이 주님에게 아들이 되는 그러한 경우를 니가 알고 있느냐?“ 라고 묻는거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런 경우를 너희는 들어본 적이 있느냐?. 들어본적 있느냐?. 유대인들은 그런데 관심이 없어요. 뭐냐하면은, 다윗의 자손이 우리를 구원하러 온다는데?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다윗의 자손이 메시야다. 이것은요. 그들 사이에 전혀 기이한게 아니에요. 이상한게 아니에요. 그들은 성경보고 다 알고있는거에요.
다윗이란 인간이 메시야라는 다윗의 자손을, 혈육적으로 낳는다. 이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고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셔서, 하나님이란 아들을 낳는 이야기를 너희가 들어본 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없지요! 유대인들은, 오늘날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그거나 그거나. 구원하러 다윗의 자손 누구든 오면 됬지.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는 굳이 그것까지 알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 이렇게 생각할 거에요. 누가 됐든 어떤 관계든 관계없이, 다윗의 자손이 와서 우리를 구원하면 우리는 땡큐입니다. 이것만 생각하는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봐도, 이 본문의 주님의 취지를 우리는 놓치고 있는거에요. 주님의 취지는 뭐냐? ”너희들 혈육안에, 왜 인간이 인간의 메시야가 자손으로 오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너희들 육신에 하나님의 원수가 끼어들었거든“. 너희들의 상식에 하나님의 원수. 악마가 끼어들었다 이말 이지요. ”하나님 믿고 구원 받겠습니다“. 그게 마귀의 생각인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는 겁니다. 다윗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이여 성전 지어드리겠습니다. 오셔서 여기 계시면 나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우리도 좋고 다 좋습니다“. 그 생각 자체가 그 아이디어 자체가, 인간이 만든 집에 왜 하나님이 안 들어 오느냐 이말이지요.
서울에 성공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촌에서 고생 그만하시고요. 제가 옆에 아파트 하나 마련했으니까, 들어와서 사세요“. 아버지가 ”안들어간다“. ”아버지 오셔서 모시겠다는데, 집을 드리면 그 집에 사시면 좋잖아요“. 아버지가 하는말이 ”지금 아내와 너희 둘 사이에 애가 일곱이다. 결국은 아파트 사놓으면 다 키워라 이말이잖아. 너희들 맘편하고“. 예시가 좀 억지스러운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들은 성의를 다하면 하나님이 받아줄 줄 알고있어요. 성의를 다하면. 목 쉬어가면서 설교하면 하나님이 설교 받습니까? 아니잖아요. 자기가 성의를 다하면 하나님이 성의를 받아줄 줄 알아요. 그러나 그 성의를 다해서 하나님을 모신다는 그것이, 그게 마귀, 하나님의 원수, 악마의 생각인 것을, 악마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생각인 것을, 인간들은 감히 생각을 하질 못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 아들 말고, 하나님의 아들로 보내서, 해야할 일이 뭐냐?
너희들의 죄. 악마에 물든 죄부터. 내가 버림받는 식으로, 대속. 그것을 대신 처리해야. 비로소 나부터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그럴 때 너희들은 내 성령으로, 하나님의 집에 의의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면 너희들은 한결같이 ”이야 기이하다. 세상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천국이구나.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공로야.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야“. 그런 고백이 나오는 그게 성전이다 이 말입니다.
솔로몬도 오늘 본문에, 집지 었거든요. 이 집 다 탔어요 나중에. 두로한테 가서, ”당신은 벌목 잘하잖아. 우리는 그런 기술자 없어. 아버지의 유언이니까 우리 재능있으니까. 집 짓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집을 짓게 하신 이유는 그 성전이 불타고 망하게 하기 위해서 집을 지은거에요. 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그네같은 우리 인생을 왜 허락했습니까? 우리 나그네로 살다가 죽으라고 이 땅에 태어나서 고된 나그네 인생을 사는겁니다. 우리 아무것도 아니에요. 새로운 피조물을 피조한 거에요.
새로운 피조물은 수련회 제 9강에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사라지고 인자가 나타나는 것. 인간은 사라지고 그 사라진 자리에 인자가 등장하는 것, 그게 바로 인자의 나라, 아들의 나라, 그게 바로 천국이고, 그게 영원한 하나님과 임마누엘. 자기 백성들만 같이 있는, 십자가로 넘어지지 않고, 십자가를 비로소 아는 자들의 집합체. 그게 바로 영원한 성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아무리 살아도 철없고, 무엇을 열심히해도, 십자가 앞에서 걸려 넘어질 수 밖에 없는, 내 자랑과 나의 의와 나의 공로와 나의 희생과 나의 잘남이 늘 우리 인생에 섞여서 그저 편안한 도착지점만 고대하고 있는, 너무나 철없는 저희들입니다. 하지만 날마다 그 인생에 주님께 기이하게 개입하셔서,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것이, 내가 생각한 세계가 아니라, 주님이 홀로 이루신, 주님의 공로만 드러나는, 그 세계에 우리가 죄인의 모습으로 들어간다는 그 감격스러움이 계속 이어지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