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성전
2025년 1월 15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5:1-6
(5:1)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 부친을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 신복을 솔로몬에게 보내었으니 이는 히람이 평일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
(5:2) 이에 솔로몬이 히람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5:3) 당신도 알거니와 내 부친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인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 원수들을 그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5:4)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5:5)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위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5:6) 당신은 영을 내려 나를 위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 나의 종과 당신의 종이 함께할 것이요 또 내가 당신의 모든 말씀대로 당신의 종의 삯을 당신에게 붙이리이다 당신도 알거니와 우리 중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자가 없나이다
솔로몬의 성전 이해는 아버지 다윗이 제안한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성소와는 달리 성전을 기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자신이 싸워왔던 모든 전쟁이 자신이 해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벌어진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전쟁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셨음을 다윗은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입장에서 이제 이스라엘이 안정권에 들어왔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 자신을 주권자로 한 이스라엘 완성 계획에 최정점에 이르렀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마땅히 최고 공로자요 영광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시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주할 성전을 지어드리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성소였을 경우에는 고정적이 아니라 이동용이었습니다. 해체하고 다시금 조립하면서 그저 최종 귀착점에 도달되기를 요구받는 그런 하나님의 이름의 임재공간이었습니다. 이게 그런 시절을 지나고 다윗 입장에서 드디어 최종 하나님이 영원히 거주하실 상황에 이르렀다고 본 겁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 작업에 합당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다윗은 생각했던 겁니다.
이 제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상하신 성전계획이 비로소 다윗에게 제시됩니다. 일단 다윗의 제안을 거부됩니다. 사무엘하 7:13-16까지 나와 있는 성전 계획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은 결코 최종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다윗이 준비한 건축 자재는 다윗 수준에서는 성전인 것을 감안하시면서도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생각해 두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가문'입니다. '다윗의 집안'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시려는 곳은 딱딱한 건물이 아니라 인간의 족보, 특히 다윗의 족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윗의 자손'은 하나님과 부자지간이 된다는 것도 또 하나의 조건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례와 법도에 충실해야지만 그 기문에 하나님께서 계실 수 있다는 겁니다. “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즉 ‘집’이 성전이 아니라 율례와 법도가 인격화되고 그 인격화된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경우에만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겁니다. 이런 사실은 모든 인간들이 고대하고 기대하는 바와 어긋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길 위의 여정’으로 여깁니다. 피곤하고 힘들 나날임을 느낍니다.
따라서 그만큼 힘든 생을 살았으면 자기 인생의 끝자락 편히 쉬고,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상태이기를 소원하게 마련입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위해 힘 되는대로 그는 성전 자재들을 끌어모았습니다. 하지만 시편에 나오는 최후의 성전을 보면, 인간들의 예상과 전혀 빗나가는 식으로 마련됩니다.
‘성전이 없다’가 아니라 ‘인간이 예상한 그런 식’의 성전은 아닙니다.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19-23)
즉 ‘사람의 손으로 짓는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원칙은 궁극적인 성전의 본질에 그대로 살아 있게 됩니다. 도리어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식으로 세워지는 성전’에만 하나님께서 영원히 머무는 그런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전일 경우에만 모든 사람들 눈에 기이한 성전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예상한 성전구상이 다윗 뿐만 아니라 하나님 믿는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구상해서 건축한 집에 거룩한 하나님께서 고정적으로 영원히 계신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왜 이 일이 거룩하게 느껴지는가 하며는 인간의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이 하나님에게는 통하고 수용할 만하는 것을 증명되니 감격스러운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모든 인간의 기대에 찬 행함은 하나님의 성전에 거부당합니다. 그 이유는 그 성전의 세계는 ‘의의 문’을 들고 들어가는 온통 완전한 의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상 못한 성전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2)
따라서 흔히 생각하는 ‘다윗의 자손’과는 다른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야가 오십니다. 다윗이 선조가 되고 그 후손이 되는 인간에 의해서 성전과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했다면 예수님께서 먼저 바리새인에게 질의하신 다음의 질문 취지를 접수해야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2-46)
다윗의 평범한 자손은 결코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메시야 사이에 ‘아버지 아들’관계가 수립되는 데는 필히 ‘하나님의 원수’, 곧 ‘악마’를 최종 굴복시키는 작업을 완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 수준의 족보에서는 이 악마를 빼낼 수 있는 능력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히 율법과 법도를 완수한 ‘다윗의 자손’은 아닌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능한 솔로몬 성전은 결국 붙 타 버리고 그 이후에 성령의 불 속에서 나온 성전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참된 성전은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겁니다.(마 21:4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안일한 우리 생각으로 십자가라는 머릿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