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과된 지혜
2025년 1월 8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4:29-34
(4:29)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4:30)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4:31) 저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For he was wiser than all men, than Ethan the Ezrahite, Heman, Calcol and Darda, the sons of Mahol; and his fame was [known] in all the surrounding nations.
(4:32)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다섯이며
(4:33)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4:34)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지식이 있는 반면에 사람의 머리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지혜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지식말고 다른 지혜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혜를 제공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은 오로지 인간들만의 지혜로서 최선을 다하여 연구하고 끄집어내어 그것으로 같은 인간들 끼리 열심히 살아가면 그만이다고 말합니다. 굳이 하나님의 지혜를 필요치 않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란 인간이 필요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만물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필요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들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받은 지혜와 총명은 솔로몬이나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한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자신이 인간에게 주신 그 지혜를 자신에게만 적용하기 위해서 오시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이런 ‘인간의 지식을 초과하는 지혜’의 사례는 모세 때에도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5:30-33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가지 공교한 일을 하게 하셨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소를 만드는 설계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겁니다. 그 설계 도면대로 제작되어야 성소를 위하여 합당한 지혜는 브사헬과 오홀리압에게 특별히 임했습니다. 바로 이런 재주와 지혜가 인간의 지식을 능가하는 겁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이런 지혜와 총명을 특정 자를 지목해서 제공한 겁니다.
처음 인간은 아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 2:19) 아담이 사용하는 언어와 아담이 지닌 개념이 제대로 최종적으로 합치될 때 뽑아져 나오는 바가 ‘이름’입니다.
아담이 지닌 지혜가 아담이 지은 이름들로 의하여 다채롭게 펼쳐지는 겁니다. 이 정도에 머문다면, “인간도 지혜가 대단하다”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는 아담이 스스로 지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왜 이 세상에 나타난 겁니까?
그것은 ‘이름값’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름’이란 언어와 개념의 최종적인 합치에서 생겨나는 겁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하나님의 개념에 합치될 때, 아담이라는 이름은 그 완성을 봅니다. 바로 그 이름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그렇다면 그 마지막 이름에 해당되시는 분이 오실 때까지 구약에 등장하는 지혜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는 지혜입니다. 최종 지헤와 중간의 지혜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중간, 곧 구약의 지혜는 특정 인간이 지혜를 소지하는 겁니다. 반면에 신약의 지혜는 지혜를 본인이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 안에 삽니다.
그 지혜 안에서 성도는 지혜의 최종성을 주저하지 않고 원없이 만끽하게 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자신을 ‘죽음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즉 자신을 미련함의 극치로 여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갖는 겁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솔로몬의 지혜를 높이기 위해 ‘에단’과 ‘헤만’의 지혜와 비교합니다. 이 ‘에단과 헤만’이라는 사람은 다윗 시대의 다윗으로 인해 고위직으로 특채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의 지혜와 총명은 다윗언약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꾸미는데 있어 기여할 수 있다고 여겨 뽑힌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필요한 작사가요 작곡가입니다.
시편 88편은 헤만의 작품이요 시편 89편은 에단의 작품입니다. 다윗의 통치 취지에 부합되었기에 시편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제일 많은 작품이 들어간 사람은 다윗왕입니다. 따라서 다윗과 헤만과 에단, 그리고 솔로몬 모두가 동일한 취지의 찬양을 작곡/작사한 사람들인데 성경은 이들에게 인간의 지식을 초과하는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선 다윗부터 보면, 시편 39:5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헤만의 작품인 시편 88:4에서는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단의 작품인 시편 89:47-48에서는,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의 작품인 시편 127:2에서는,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 노고를 넘어서는 세계를 말하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에게 있어 이 세상을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기를 설명해 보라면 이렇게 하게 됩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
성도란 이런 초과적 지혜로서 유일하게 살아계신 주님 안에 사는 자를 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날마다 부수고 넘어서는 지혜로서 주님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강-열왕기상 4장 29-34절(초과된 지혜) 250108-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4장 29-34절입니다.
열왕기상 4:29-34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저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와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
솔로몬이 알고 있는 것들, 받은 것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총명이었고 지혜였습니다. 솔로몬이 이런 것을 받을만한 위인인가? 솔로몬의 자리가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 다윗 언약이 있는 그 자리입니다. 나중에 그 자리는 결국 하나님이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알고 있는 지혜는 장차 그 자리를 접수하실 하나님 자신의 지혜를 미리 솔로몬을 통해서 발산했다, 또는 그 시대에 적합하게 드러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를 초과하는 거지요.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뛰어남을 강조하기 위해서 솔로몬 말고 다른 사람을 같이 거론하는 경우가 오늘 본문 31절에 나옵니다. “저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와서”라고 하고 그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에단과 헤만이라는 사람이 여기에 속해 있는데요, 이 사람의 위치는 다윗의 신하였습니다. 유다 사람인데 다윗 시대에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지요, 이들을 최측근으로 두고 그다음에 그 위에 다윗이 왕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중에서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을 선별해서 그 지혜와 총명함으로 다윗 왕국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거예요.
다윗 왕국에 보탬이 된다는 말은, 다윗이 하나님이 주신 언약으로 백성들을 통치할 때 도움 되는 인물들을 택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전달되는 중간 경로의 자리에 꽂아 넣은 겁니다. 그러면 에단이나 헤만, 이런 사람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들이 무슨 일을 했기에 다윗의 언약적 통치에 기여할 수 있는 인물로 성경에 나타나는가? 도대체 그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지혜와 총명에 있어서 유별하게 똑똑했어요. 지혜와 총명이 유별나게 똑똑했다. 같은 인간이지만 다른 인간들보다 뛰어났다. 그랬어도 이 에단과 헤만이라는 사람은 단지 다윗의 부하직원이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에단과 헤만은 다윗이 하나님께 받았던 지혜와 총명과 같은 성질, 같은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고위공무원으로 채택을 했거든요.
그러면 솔로몬은 뭐냐? 솔로몬은 다윗의 부하가 아니고, 다윗이 앉았던 그 왕 자리에 솔로몬이 다윗 언약의 완성 상태로서 앉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솔로몬의 지혜는 다윗 때 한가락했던 그 두 사람보다 더 뛰어나다. 솔로몬 이전의 다윗 왕국 당시에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겠지요. “에단과 헤만같이 뛰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솔로몬은 그 사람보다 더 뛰어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에단과 헤만, 이 사람들이 뛰어나다 하는 것이, 아이큐가 한 150 언저리 되는가? 이들이 뛰어나다 하는 것이 어떤 점에 그런지를, 성경에 지혜가 있다, 총명이 있다, 뛰어나다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가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출애굽기 35장 30-33절부터 보면 성전을 만드는데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공교한 일을 하게 하셨고”
부살렐과 오홀리압 이 두 사람이 지혜와 총명이 있는데 이 사람들 재주는 어디에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성전 기구를 만드는데, 하나님의 성전 기구를 제작하는 데 있어서 뛰어났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은 인간의 재주를 능가하는, 초과하는 능력이 아니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준 성소 설계도를 어느 인간도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성소의 설계도를 주시는 것, 인간의 지혜가 아니지요. 인간의 지혜를 능가하지요. 그 능가하는 지혜를 실제로 세상에 있는 재료를 가지고 그대로 제작 완성하는 것도 사람의 지혜가 되지 않고 뭔가 외부에서 총명과 은혜가 주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 대상이 누구냐? 그 대상이 브살렐과 오홀리압이었다는 거예요.
출애굽기 36장 1절에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줄 알게 하심을 입은 자들은 여호와의 무릇 명하신대로 할 것이니라”
그러니까 사람은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와 총명을 줬다. 그러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AI네. 하나님이 자기의 지혜를 담아주니까 그 지혜대로 움직였을 뿐이에요.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 성신이 임했다. 그게 어딘데요? 인간으로서 이것은 초과적인 영광 아닙니까?
이런 게 바로 성경을 보면서 성령 받은 사람의 눈에 띄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너무나도 자기가 쓸모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점을 평생동안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은혜를 알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최고의 총명이요 지혜로 여기는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 쓸모짝도 없다는 거예요. 어쩌면 돌멩이보다 더 쓸모없는 거예요. 구약 때부터 그런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구약 때 정도가 아닙니다. 구약 때는 그래도 사람이 살아 있잖아요.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살아있다고요. 살아 있는데 “하나님, 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견줘볼 때 하나님의 자아 앞에서 우리의 자아는 티도 내지 말아야 해요. 존재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이게 구약적 수준이라면 신약은 그것보다 더 나갑니다.
없음보다 더 낮은 것, 있음에서 제일 낮은 것이 없어지는 것이거든요. 죽음이지요. 그런데 신약은 죽음보다 더 낮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주님, 저 죄인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십자가 이후에 사도바울의 편지에 나타나는 성령 받은 사람의 한결같은 고백입니다. “하나님, 저 죽어도 괜찮아요.” 이게 구약적 수준이라면 신약은 더 간단해요. “하나님, 저 죽었습니다.”
“저 독감 걸려서 죽으면 안 돼요.” 이것이 구약적 수준이라면 “독감은 살았고 나는 벌써 죽었습니다. 독감 바이러스가 온 것은 내가 이미 죽어 있음을 확인 사살하기 위함입니다.” 그 정도지요.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맘 놓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대로 사용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게 뭐라고요? 그게 지혜요, 그게 총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솔로몬은 아직 자기의 존재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았어요, 존재 밑으로는. 그러니까 사람들이 솔로몬을 오해하는 겁니다. 솔로몬은 “나는 왕이다.”가 되는 거예요, 나는 왕이다. 죄인이 아니라 ‘나는 왕이다.’ 그런데 “이 왕도 하나님의 은혜다.” 뭐 이 정도까지. 그리고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다.” 솔로몬은 그 정도까지 갑니다. 더 내려가지는 않지요.
하나님께서 신약의 최종 지혜, 마지막 지혜, 궁극적인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서 중간 기착지로 솔로몬을 사용해서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그 당시 최고의 지혜를 솔로몬에게 줬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지혜를 소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잘 들으셔야 해요. 구약은 하나님의 지혜를 주게 되면 지혜를 소지했어요.
그런데 신약은 뭐냐? 지혜를 소지, 갖는 것이 아니고 지혜 안에 들어가서 살아요. 이게 차이입니다. 아예 지혜안에 들어가서 살아요. 생명을 갖는 게 아니고 생명 안에 들어가 살아요. 생명 안에 들어가 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만나는 것마다 전부 다 말씀의 열매, ‘다 이루었다’의 열매를 선물로 받게 되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요. 나름대로 신앙생활, 복음 생활 하면서도 정리가 그때그때 마다 잘 안되는 것 같아요. 정리가 안되니까 정리하기 위해서 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요. “목사님, 신자가 뭡니까?” 나름대로 복음 많이 듣고, 공부도 많이 했는데 정리가 안되는 거예요. “대체 신자가 뭡니까?”
신자란 하나님의 약속을 사모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이게 누가복음 2장에 나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하거든요. 세례요한과 엘리사벳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의미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아기 예수가 왔다.’ 시므온이 그 아기 예수를 보고 마음을 놓았다는 거예요(눅 2:29).
그러니까 신자가 뭐냐 하면, 자기의 건강 문제 그걸 사모하지 않아요. 자기의 여유로운 노후, 그거 사모하지 않습니다. 다복하고 행복한, 화목한 가정생활, 그거 생각하지 않습니다. 넉넉한 재산 굴리기, 이런 것이 신자의 바람이나 희망이 아니에요. 특히 신자가 아닌 모든 인간이 바라는 것은 뭐냐? 남에게 인정받는 인생, 나라는 인생이 남에게 그럴싸하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 그걸 사모해요.
저에게 신자가 뭡니까, 라고 묻는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 이것은 아니다 싶지만 그런 것이 자꾸 차오르는 거예요. 남에게 인정도 받고 싶고, 노후 대책도 든든하게 하고 싶고, 가정도 화목하고, 몸도 안 아프고, 가족들도 다 아픈 사람이 없고, 자기 장래에 대해서도 뚜렷한 계획이 서는 이런 것들이 자꾸 들끓다 보니까 정리가 안되는 거예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그것은 알겠는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냐, 대체 뭘 사모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약속을 사모하는 자가 바로 신자예요. 하나님의 언약.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지요? 정리가 되었잖아요. 정리될 만한 사람한테나 정리가 되겠지요.
어제 꿈을 꿨어요. 꿈 이야기 잘 안 하는데 어제의 꿈이 오늘 설교와 이상하게 관련되는 것 같은 꿈이라서 메모를 해놓은 거예요. 어떤 아는 사람 집인데요, 옛 2층 가옥의 구조인 집이었어요. 요즘 건물은 2층으로 가려면 건물 바깥 계단으로 해서 올라가잖아요. 2층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올라간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집은 2층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이 2층에 가려면 주인이 사는 거실로 통하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누구 집인지는 정확하지 않은데 하여튼 그 집 거실에 쉬려고 누워 있는데 2층에 사는 사람과 일행이 거실 통해서 우르르 계단으로 막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후다닥 일어나서 아는 사람에게 물었어요. “저 사람들이 뭐 하러 저렇게 올라가는가?” 장막절을 지내러 간다는 거예요, 장막절.
그래서 제가 꿈속인데 ‘지금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모든 날과 절기를 다 지켰다고 했고 십자가에서 다 이뤘다고 했는데 아직도 장막절을 지켜야 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저분들은 왜 장막절을 지키지?’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왜 장막절을 지키는가? 그들은 자기가 해야 할 게 아직도 남아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해야할 게 남아있다는 말은 장막절을 지킴으로서 장막절 지켰다는 그 결실을 내 소유화시키는 거예요. 내 소유화를 시키려면 나는 버젓하게 살아있어야 돼요. 이미 내가 죽어 있으면 소유가 안 되잖아요. 내가 약간은 살아있어야 장막절을 지킨 그것을 보태서 “나는 장막절 지킨 사람입니다. 천국 넣어주세요.”라고 할 말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꿈속이지만, ‘아, 이분들이 성경 말씀을 누가 지키는지를 지금 모르고 있구나.’ 성경 말씀은 살아있는 분이 지키지 이미 죽은 자는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구약 때는 뭐 하는 거냐? 구약 때는 아직 신약이 아니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살아있는 듯이 계속해서 말씀을 줘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창세기 2장 1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흙으로 된 아담이 흙으로 만든 짐승들 이름을 지으라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아담에게 끌고 온 거예요.
오늘 열왕기상 4장 33절에도 솔로몬이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인간이 살아있는 거예요, 지금 구약이니까 안 죽었습니다. 살아있는 거예요.
신약에는 누가 살아 있느냐 하면, 예수님만 살아있어요. 살아있는 분이 지혜와 성령과 은총을 줘서 죽은 우리가 사는 것은 신약 시대에요. 그러나 구약은 아직 예수님만 살아있고 나머지는 죽었다는 그 최종적인 은총이, 지혜가 올 때까지의 중간 과정인 구약에 이 솔로몬이 있는 겁니다. 장막절 지키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으니까 아직 최종적으로 도착을 못 한 거예요. 지금 본인이 살아 있어야 하니까, 살아있어서 하나님 왔을 때 자기가 구원받아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사방팔방 하나님이 창조하신 여러 만물의 그 개념들이 인간의 언어와 일치될 때 그때 뽑혀 나오는 것이 이름입니다, 이름. 어려울 때는 다시 한번 해야 하죠. 인간은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데 그 여러 언어 중에서, 예를 들어 하나님이 아담에게 송아지나 개를 보냈을 때 인간의 눈에 들어오는 그 개념과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와 일치를 시켜보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래, 멍멍이가 괜찮네.” 멍멍이라고 할 때 그때 그 개는 아담에게 와서 비로소 ‘멍멍이’가 되면서 아담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꽃’이라고 했을 때 와서 하나의 의미 있는 몸짓이 되는 것처럼 이름이라는 것은 이름 지어진 자의 언어에 의해 그 개념이 합치된다, 최종 합치되었다는 뜻으로 그 이름이 되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름을 지으라고 했느냐 하면, ‘아담’ 자체가 이름이에요. 아담 자체가 이름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그 말씀, 아담이 아담에 가장 합치되는 쪽으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해 일을 벌여 나가는 겁니다. 어렵죠? 미리 쉬운 예를 들면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아담이 흙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흙이 되게 하는 것은, 1번, 하나님이 인간을 괴롭힌다. 즉 하나님께서 ‘욕 좀 봐라.’ 하는 하나님의 심술이다. 2번, 하나님의 이름이 이름값 했다. 이름이 이름값 하는 거예요. 아담이라는 이름은 아담이 지은 게 아닙니다. 스스로 지은 게 아니고 이름 지은 분이 따로 있어요.
그러면 인간의 기능과 존재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아담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그 취지에 부합되도록 그냥 놀아나는 거죠. 야곱의 이름이 있는데 야곱 이름을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바꾼 이유가 뭡니까?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꿀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계속 하나님의 언어를 주는 거예요. 그 언어가 약속이고 언약이고 말씀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최종적인 뜻에 합치되는, 이제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고 최종 합치되는 이름이 있어요. 그게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는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이야기 끝났죠. “인간은 왜 있습니까? 인간을 왜 만들었습니까? 목사님 우리는 왜 삽니까?”
주님의 이름이 주님이 이름답기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거예요. 우리 이름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게 아니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 거예요. 왜? 주님께서 인간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인자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주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의 이름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모든 초목과 동물에 대해서 자신의 총명과 지혜를 가지고 그 이름들과 합치될 때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드러내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솔로몬 보고 놀라는 것은 “야, 초목에 대해서…” 심지어 열왕기상 4장 33절에 보면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솔로몬처럼 합치 되도록, 딱 들어맞도록 설명 해주는 그러한 지혜와 총명은 다른 이 땅의 어떤 인간도 없고 어떤 왕들도 없어서 주변 왕들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얻고자 많이 찾아오고, 그 정도로 소문이 난 거예요. “이런 AI가 없다. 최고다.” 결국 솔로몬은 다윗 언약의 자리에 앉을 때 다윗의 신하들 정도가 아니고 더 뛰어난 왕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모든 피조 세계는 바로 다윗 언약에 계신 어떤 분을 구현 해내기 위해서 그들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피라미드 적인 거미줄 같은 촘촘한 관계성을 가지는 거예요. “집사님은 왜 여기 앉아 있습니까?” 물으면 이제는 뭐 딱 답 나왔죠.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집사님이 얻을 소득이 있습니까?” 그러면 집사님은 “예, 있죠.” “뭡니까?”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정도도 아니고 아예 죄인이다, 이것보다 더 똑똑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이게 고린도전서 1장 끝에 보면 나옵니다. 1장 26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불러내는 거예요. 주님이 불러낸 사람이에요.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그러면 아까 저한테 질문한 사람의 그 질문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목사님, 신자가 뭡니까?”라는 그 질문, “내가 이렇게 교인으로 또 신자라고 하면서 교회 수십 년 다녔는데 도대체 정리가 안 돼요. 한 마디로 해서 신자가 뭡니까?”라고 묻는 것은 그동안 내가 똑똑하고 싶었던 거예요.
뭐 여러 가지로 성경을 알고, 요한복음도 알고 사도행전도 아는데 뭐가 정리가 안 되느냐 하면, 한 마디로 신자가 뭐냐 하는 그 자체가 정리가 안 돼서 이것까지 정리가 되면 똑똑한 것 가운데 더 똑똑하다는 이런 욕심, 또는 호기심, 그런 욕망이 있어서 묻는 거죠. ‘이것만 알면 남보다 뛰어나게 똑똑하다.’ 이런 생각으로 묻겠죠.
그런데 성경은 이럽니다. 뭐가 신자냐? 미련할 대로 미련한 것, 천하에 나보다 미련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것, 그게 신자입니다. 왜? 약속만 다 이루심만 사모하기 때문에. 이게 견줄 수 없는 지혜에요. 인간이 알고 있는 지혜와 능력을 초과하는,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주셔야만 가능한 지혜…, 소지자가 아닙니다.
구약은 소지자죠. 신약에는 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그 지혜 안에서 사는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사람,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계실 성전 짓기 위해서 그 지혜를 줬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가, 신자가 곧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이 성전 값을 하려면 성전에 합당한 지혜와 총명 속에 놓여있는 사람이어야 되죠. 그 성전은 오직 주의 이름만 사모하는 사람이에요. 주의 이름, 주께서 다 하셨다는 것,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나에게 쏠리면 안 되고, 나에게 영광이 오면 안 되고 주의 이름의 영광으로 다 쏟아져야 그게 하나님의 지혜고 완성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자리에서만 아는 지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윗 자리에 앉아 있는 솔로몬은 그 정도, 이 정도밖에 안 돼요. 뭐 이 정도 해도 보통 똑똑한 게 아니죠.
자, 그러면 약간 더 구체적으로 다시 열왕기상 4장에 와서 에단과 헤만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이냐? 그 사람들이 똑똑하다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시편 88편 1절 위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고라 자손의 찬송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영장으로 마할랏르안놋에 맞춘 노래〕라고 해서 헤만 사람이 이 시편을 지은 거예요.
그리고 여기 시편 89편에 보면 〔에스라인 에단의 마스길〕, 마스길은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여기 에단, 에단이라고 하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 <미션 임파서블>의 주인공 이름이 에단이에요. 에단의 교훈이 시편 89편입니다. 그러니까 정리가 됐죠.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이라 하는 것은 다윗 시대에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있어서 작곡 작사가를 말하는 거예요. 왜? 찬양을 해야 하니까. 누구를 통해서? 성가대원을 통해서. 성가대원은 누구냐? 레위 지파죠. 레위 지파가 성가대를 구성할 때 작곡 작사가가 필요한데 그걸 레위 지파 후손들이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특채로 다윗이 뽑은 거예요.
이 에단과 헤만의 총명을 다윗은 어떻게 알고 그렇게 했는가? 다윗 자체에 주어진 총명과 지혜가 다윗의 시편을 낳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시편은 인간이 생각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줬던 지혜를 총집대성한 그 책이 시편이에요.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지혜와 총명, 하지만 인간에게 안 나왔다고 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인간에게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이 “나 여기 있다.”하고 주신 하나님의 지혜를 모아놓은 전집, 그게 바로 시편이에요.
그 시편에 누구 작곡과 작사가 제일 많은가? 다윗이죠. 다윗이 제일 많아요. 그러면 그중에서 하나만 보겠습니다. 다윗이 지은 시편 39편 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다윗의 시, 해놓고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총명을 받았기 때문에 내놓는 지혜와 총명이 뭐냐? “하나님 저 없습니다.” 이거에요. 사람들 앞에서는 내가 존재하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저 존재 없습니다. 없는 존재와 같습니다.”라는 고백을 다윗은 내놓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윗에 의해서 특채 받았던, 다윗과 똑같은 이 두 사람의 사고방식이 시편을 통해서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시편이라는 그 하나님의 계시를 만드는 데 있어서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하게 넘겨준 지혜가 다시 하나님에게로 거두어 지면서 만들어진 계시의 책이 시편이다, 이 말이죠.
그리고 오늘 열왕기상 4장 32절에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솔로몬은 왕의 자리니까 다윗의 신화 정도가 아닙니다. “너 시편 몇 개 들어갔어?” “몇 개 못 들어갔는데요.” 솔로몬은 “나? 삼천 개야.” 그 삼천 개 중에서 추려서 나온 책이 잠언이에요. 이건 하나님의 지혜죠.
하나님의 지혜란 것은 뭐냐? 하나의 예언이 돼요. 말씀한 그대로 마지막에 주님이, 하나님이 직접 왔을 때 하나님이 인간에게 넘겨준 지혜 따라서 스스로 자기의 업무를 완성시키는 그러한 일꾼들을 미리 앞에다가 주신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결과로써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니까 ‘미련한 자를 택하사 세상에 똑똑하다는 것을 부끄럽게 하시고’라는 그 작업에 총동원된 사람들이 바로 신자예요. ‘박신자’만 신자가 아니라, 그건 농구 선수고 신자, 성도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면 솔로몬도 초목을 아는데 오늘날의 우리는 신약 시대니까 솔로몬보다 더 뛰어나지 않느냐? 우리도 초목을 압니까? 알죠. 왜 초목이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나오잖아요. “모든 초목은, 해와 달과 별은 다 사그라지고 썩어 문드러지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흙이 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왜요? “죄지었기 때문에.”
이보다 더 뛰어난 박사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노벨상 받아야 해요, 노벨상. 퀴리 부인(Marie Curie, 1867~1934)은 그 집안에 노벨상이 여섯 개에요. 퀴리 부인 자체가 방사능 쬐어서 66세에 죽었죠. 큰딸은 58세에 죽었고요. 남편은 사고로 마차에 치어 죽고요.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해서 퀴리 부인은 노벨상을 2개나 받았습니다, 물리학상과 화학상.
세상에서 그걸 뭐라고 합니까? 그걸 지혜라고 하지 않아요. 세상은 그걸 지식이라고 하죠, 지식.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걸 택하사 그 지혜를 부끄럽게 하는 거예요. 그 노벨상 받아봤자, 상금 15억 받아봤자 같이 썩어 나가는 거예요. 이 세상은 주님의 십자가, 그 죽음의 힘에 의해서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철학과 과학자들은 몰라요. 모든 것은 죽어 나가는 힘이에요. 우리 신자는 그걸 보고 땡큐 죠, 땡큐! ‘아, 이번 독감에 갔어야 됐는데…’ 이런 거요. 땡큐죠. 탱큐! 죽은 인간이 죽는 게 얼마나 당연한 겁니까?
시편 72편과 127편, 솔로몬의 지혜가 시편에 들어가요. 솔로몬은 시편 27편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 있죠,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모든 노고를 넘어서는 세계, 안정적인 것, 인간의 모든 노고와 무관한 세계를 시편을 통해 미리 예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뭐냐? 그냥 일하지 말고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2절) 겁니다. 잠을 주시는 거예요. 우리 교인들 보면 오후 되면 많이 주무시잖아요. 잠을 주시는 것. 너희들한테는 영원한 잠, 죽음이 딱이라는 거예요.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죽이는 겁니다. 시편 127편 그대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기 때문에.
이런 안정성, 정서적인 안정감 이게 인간의 지혜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마귀는 안 죽으려고 해요.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십자가 지혜를 아는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주께서, 살아계신 주님이 주의 이름을 위해서 내 이름을 다루고 있는 그 매 순간을 우리가 지금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은혜를 뭐로 감사해야 될지요. 하나님이 지혜 다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은혜 다 주셨는데 또 뭘 달라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짜증을 부렸는지. 오늘이라도 죽을 수 있는 이 사랑을 이 세상의 어떤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라 여기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마음껏 증거하는 저희들 남은 생애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