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부귀 영화의 토대

아빠와 함께 2025. 1. 2. 07:39

부귀 영화의 토대

2025년 1월 1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4:20-21

(4:20)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

(4:21) 솔로몬이 하수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 지경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그 나라들이 공을 바쳐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섬겼더라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을 만나 신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부귀 영화가 솔로몬의 은퇴와 함께 소멸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도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부귀 영화는 솔로몬에서 온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깔고 앉아 있는 다른 토대에 의해서 주어진 겁니다. 그리고 그 토대의 진실을 위하여 솔로몬 시대가 저물면서 같이 소실되어야 합니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이것이 ‘탈피 대상’이라고 합니다. 대충 관찰하면 거기에 있어 그 상황을 장악한 것 같지만 가까이 가서 시선을 집중하면 그 대상은 그 현장에서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마치 신문지의 글자를 조금 떼어서 보면 뚜렷하지만 가까이가면 그냥 흑백의 자국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복의 토대를 그 시대에 솔로몬이 깔고 앉아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것도 한시적입니다.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본래의 자리는 오래 전에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예고된 현실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이 예언된 내용대로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인구가 엄청 불었습니다. 영토는 어떻게 될까요?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창 15:18-20)

이 영토 규모도 얼추 솔로몬 시대와 비슷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현실을 만들어놓으시고 눈에 보이는 솔로몬의 공로인지 아니라 언약의 공로인지를 일관된 노선에서 이탈하지 않으시고 물으십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복을 고맙게 받을 것이라고 여기고 감사할 준비를 할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관점에 본 시선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여망을 담고서 조성해놓은 일방적으로 ‘자기를 위한 시선’입니다. 언약이 이스라엘 내부를 걸쳐서 오면서 하나님께서 발굴하고 들추어내고자 하는 바는 미리 히 예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신 9:4-6)

즉 언약이 언약대로 현실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필히 ‘목이 곧고 교만한 자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자신의 애씀과 침착함과 조심스러움과 세밀하게 각가지 상황을 고려한 결과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이들은 현 자신이 누리고 지니고 있는 것이 자신의 완악함과 교만으로 가리워져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시편 73: 4-6에 의하면,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즉 내가 수고하고 고생해서 얻은 것을 ‘내 것이다’고 주장하는 것이 완악함과 교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태도가 언약 홀로 성취해가는 일관성이 원칙이 가리고 공격하는 성질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나 것 위주’가 되어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새떼가 비행기 엔진 터빈에 들어가서 승객이 179명이 죽었을 때, 그 누구도 인간의 비행체에 일방적으로 당한 새떼의 죽음에 애도를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새때나 나무들이나 해와 달과 별들은 모두 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자라나고 있고 때가 되매 죽습니다.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6-29)

반면에 인간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한 세상’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원래 주인이 오게 되면 그들의 본성과 본심과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즉 예수님께서 바로, 모든 인류를 경영하는 하나의 거대 동체 속에서 태클을 걸기 위해 가장 중심 부위에서 죽임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나 이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 2:5-9) 이것이 바로 언약적으로 “다 이루심”의 성과입니다. 이 분에 의해서 인류는 둘로 분리됩니다.

롯은 삼촌 아브라함에 의해서 강제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왔습니다.(창 19:29) 천사의 강제조치입니다. 그러나 이 가족 내에서는 또 분리가 일어납니다. 롯이 가담되지 못하도록 하나께서 술을 마시게 되는 와중에서 언약과 상관없는 두 민족인 ‘모압’과 ‘암몬’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육신에 대한 집착은 삼손의 경우도 해당됩니다.

하지만 삼손은 강제로 이방민족으로부터 힘의 원천이라고 여긴 것을 제거당하므로서 진정한 언약의 힘은 ‘선지자 자신의 죽음’의 바탕에서 나온다는 점을 보여주게 됩니다. 늘 ‘마땅히 죽을 수 있기에’ 비로소 언약의 성취가 보이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언약의 현실을 우리 존재가 막히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강-열왕기상 4장 20-21절(부귀영화의 토대) 25010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4장 20-21절입니다.

열왕기상 4:20-21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 솔로몬이 하수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 지경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그 나라들이 공을 바쳐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섬겼더라”

솔로몬의 통치하에 극상의 나라가 되어 부강하고 번영했습니다. 그 범위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터어키죠, 거기부터 지금의 이집트까지 영토가 확장되었습니다. 지금의 하마스가 있는 그곳을 블레셋이라 해요. 거기까지 전부다 솔로몬이 통치했고 인구도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자체가 오늘날 우리에게 미혹거리가 돼요. ‘나도 이런 번영과 부강을 누리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기 십상입니다만 사실은 나라가 이렇게 부강하게 된 것에서 솔로몬을 빼야 합니다. 나라가 부강한 것이 솔로몬 때문에 부강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왜 이 때에 이스라엘 나라가 부강되었는가?

그것은 이미 아브라함 때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한 것이 있어요. 창세기 15장에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4절)라고 하시고 18절부터 보면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지금의 유프라테스강)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18-21절) 이렇게 족속들이 죽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을 했어요. 그러면 약속의 토대는 아브라함도 아니에요. 솔로몬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 약속이에요.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누가 말립니까?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약속대로 펼치는 그것이 바로 구원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의 애씀과 노고와 노력에 의해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냥 진행될 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야, 이거 참 신난다. 이스라엘은 이제 망하기 없기, 그렇게 되는 것인가?’ 그런데 부귀와 영화는 솔로몬 때 잠시 반짝하다가 솔로몬 죽고 난 뒤에 사라져요. 없어집니다. 그것을 어려운 용어로 ‘탈피대상’이라 하는데 관찰하면 사라지는 거예요. 관찰을 안 하면 거기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너 있나?’ 하고 보게 되면 그 인간은 사라져요.

마치 신문지에 있는 글씨가 멀리서 보면 글씨인데 돋보기로 가까이 가게 되면 거기에는 검은 잉크 자국과 흰 종이밖에 없어요. 다 날아가지요. 대상이, 이미지가 있었는데 없어져요. 그걸 탈피 대상이라, 탈피되는 대상이다. 멀리서 보면 솔로몬이 있으니까 ‘야~, 솔로몬이 기도 응답을 받아서 잘 되었구나.’라고 생각하지요.

그것을 하나님이 언약을 세밀하게 비춰버리면 그 자리에 솔로몬이 복 받는 토대가 아니고 탈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솔로몬에 의해서 잠시 부각 되었던 이스라엘은 날아가 버려요. 이스라엘은 사라집니다. 잠시 솔로몬의 나라가 부각 되었으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와, 우리 이스라엘 참 잘됐다.’ 하는데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 그것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 이스라엘은 사라져줘야 해요. 하나님의 복이 사그라짐과 동시에. 왜 하나님께서 일을 그렇게 하시는가? 신명기 9장 5절에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6절에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목이 곧은 백성.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주 건방지고 오만하고 교만함을 박아 넣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천국은 인간이 개과천선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덮쳐버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 없다.’라는 것을 기쁨으로 파악을 할 때 그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 이야기에요.

그런데 이 인간 세상은 그것을 주목 못 했어요. 신명기 9장, 다시 말해서 네가 건방지고 교만하고 죄 많다는 것을 주께서 언약에 박아 넣고 빼냄을 통해서, 그 토대가 ‘네가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이 네 자리에 대체해서 들어가서 그 구원을 이룬다.’라는 겁니다.

그 좋은 예가 며칠 전에 무안공항에서 제주항공 비행기가 폭발했지요. 여러분, 그걸 보세요. 그 나와바리가 누구 나와바리냐 하면 새 떼 자기 구역이에요. 인간의 구역이 아니고 새 떼가 사는 곳입니다. 거기서 누가 희생되었는가? 새 떼가 희생된 거예요, 새 떼가. 인간이 시건방지게 그 자리에 끼어든 거예요.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시건방지게 새 떼가 있는 곳에 함부로 들어갔다.’ 이런 생각을 못 하고 ‘앞으로 새 떼 다 죽여야 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어느 언론, 어느 방송도 ‘불쌍한 새 떼, 인간들의 비행기라는 그 발명품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비행기 엔진 안에 끼어든 새 떼가 도대체 몇 마리인가? 우리가 그것을 애도하자.’ 그런 신문이나 방송을 봤습니까?

여러분, 마태복음 6장에 새는 누구 지시받고 사느냐 하면, 하나님이 지시를 받아요.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새는 죽었고, 아무도 애도하는 자가 없고, 하나님의 지시를 거부하고 만사가 내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인간들은 사고 나니까 새 떼 탓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만들었기 때문에 새와 나무나 모든 동물들은 죽자 하고 누구 말을 듣느냐 하면, 하나님 말을 들어요. 그런데 죽으라고 하나님 말을 안 듣는 자들이 누구냐 하면, 인간입니다. 인간은 모든 공로와 모든 성과를 자기가 잘나서 얻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사고 난 것이 아니고 새 떼가 사고 난 거예요.

이거 언론 수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새 떼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동물관련단체 뭐 하고 있어요? 아무런 성명서도 안 내고 있어요. 고양이 하나 죽었다고 그렇게 티를 내면서 새 떼가 집단으로 엔진에 박혀서 죽은 것은 언급 안 합니다. 비겁한 사람들이지요?

언약을 누가 훼방하느냐? ‘나는 나를 위해서 산다.’ 이런 인간들이 훼방하지 새 떼나 나무나, 대나무와 코스모스가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지를 않아요. 그들은 억울하게 인간에게 짓밟히는 겁니다. 인간이 만든 비행기 엔진 속에 난데없이 끼어서 죽게 된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예요.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다른 사람은 전부 다 자기 위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는가?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구역, 곧 나와바리 이야기입니다.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이 세상은 누구 것인가 하면 우리 인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인데 예수님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서 오니까 사람들이 “당신 뭐야? 죽이자!” 죽였어요.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포도원 주인이 따로 있는데 주인이 예수님을 보내니까 농부들이 “상속자다. 저거 죽이면 이 포도원은 우리 것이 된다.” 그렇게 했어요.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38절). 근원적으로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자’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잘 들으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자.’가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못 살아요. 못 사는데 이건 알아야 해요. 그게 곧 오만이고 그게 바로 교만이라는 겁니다. 교만과 오만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정체, 우리가 새 떼보다 못한,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 우기는 그 인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 구원을 이루었다는 이게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독한 방해꾼인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하고 거래하거나 우리하고 타협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일방적으로 오만한 자로 규정하면서 그다음에 주께서 준비한 천국을 우리에게 제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와서 흔히들 기적을 이야기하는데 기적은 뭐냐? 내 위주로 말고 나로 인해서 희생된 자 위주로 안목이 바뀌는 그것이 기적입니다.

여기 피아노 반주하는 분이 있는데 겨울에는 손이 시렵지요. 그런데 반주하지도 않는, 반주할 줄도 모르는 분이 전기스토브를 준비했습니다. 이건 뭐냐? 내 입장이 아니고 반주하는 분의 입장으로 바뀐 겁니다. 전기스토브 준비해 놓고 “비키세요. 내가 피아노 반주할 테니까.” 이것은 아니거든요. ‘나는 거기 낄 자가 못 됩니다.’라는 아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뺍니다. 솔로몬을 빼니까 어떻게 되는가? 와르르 그 부귀영화가 솔로몬 시대로 끝나면서 다 무너집니다. 잠시 나타났다가 무너졌어요. 솔로몬이 부귀영화의 바탕이 아니라면 솔로몬이 깔고 앉은 그분이 누구냐? 그분이 시편 51편에 나옵니다. 거기에 새 떼 또 나옵니다.

다윗이 간음하고 그 간음을 감추기 위해서 자기가 간음한 여인의 남편을 살해했어요. 다윗이, 성군이라는 그 다윗이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 짓을 한 다윗이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면서 기뻐해요. 이건 뭐 미친 것 아닙니까? 죄지었다는 것을 나단 선지자가 와서 지목을 하니까 갑자기 화색이 확 도는 거예요.

자기 인생 전체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어요. 내가 착해야 복 받는다, 내가 바르게 살아야 천국 간다, 이게 한꺼번에 다 날아간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8절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내가 바르게 사는 그것으로 즐거워하게 말고, 나 때문에 희생을 당하신 분이 있다는 것…, 우리아 장군입니다. 그리고 다윗과 밧세바가 낳은 아기가 죽었어요.

나 때문에 희생당하신 분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날 용서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이게 바로 관점이 바뀌는 기적입니다. 이게 기적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 시간에 알아야 할 것은, 그게 어떻게 바뀌느냐 하는 거예요. 이게 바뀌는 것이 기적인 것은 알겠는데, 태어날 때부터 나 위주인데 그것이 어떻게 바뀌는가?

나 같은 동체, 제주항공 비행기, 으스대고 서로 왕래하면서 돈벌이하는 나, 그런데 이 나 사이로 새가 들어오지요. 유명한 노래가 나옵니다.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 내 인생에 태클을 걸어주기 때문에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그런 일이 있고, 소위 복음 전하는 사람에게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나게 ‘나는 이제 복음 전하러 간다.’ 하고 룰루랄라 가고 있는데 누가 다리를 탁 걸어버리면 공중에서 두 바퀴 돌아서 바닥에 패대기쳐지지요. 그때 주님께서 딱 그 사람에게 묻기를 “복음 전할래, 죽을래?” 하거든요. 그때 답변을 잘해야 해요. “죽을래요!” 해야 해요. 살아서 복음 전하는 것은 복음을 가리는 겁니다. 죽을래요, 해야 합니다.

그게 어디 나오는가? 빌립보서 1장에 나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맞지만 내 소원은 복음 전하는 이것보다 어서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겠습니다.” 태클을 걸어줄 때 어느새 복음을 빙자해서 주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내 존재가 다 가려버리는 거예요. 내가 스스로 태클을 걸면 그것도 나의 자랑거리가 되니까 그건 안되지요.

시편 73편의 이 이야기는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됩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에게도 다 해당됩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보고 한 신앙인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2-6절)

특히 4절에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다고 했어요. 끝까지 만사형통하고, 끝까지 번영하고, 끝까지 남들 보기에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그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인하여 자기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점점 더 두껍게 막혀 있는 거예요. 자기의 본래 자리.

오만하고 건방지다는 것, 만사형통하니까, 아무 태클이 안 걸리니까 모든 것은 언약대로 주어졌지 너를 보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그 사실을 모르고 전부 다 자기가 애쓴 자기의 노력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인이 그걸 보고 미끄러질 뻔했어요. ‘아, 좋겠다. 나도 하나님 믿고 저렇게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제가 아까 남겨둔 그 숙제, 어떻게 하면 나 위주로 살아가는 나를 제거할 수 있느냐? 주님이 어떤 식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제거할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제가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첫 번째 예는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창세기 19장에 소돔과 고모라가 나오는데 그곳들은 하늘의 유황불로 다 망해버린 대단한 도시들이에요.

그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곳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어느 정도로 좋은 땅인가 하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에덴동산 같다.”라고 했습니다. 땅값이 오르지요. 너도나도 그 도시에 살기를 학수고대하고 거기 사는 것만으로도 출세했다고 할 정도로 유력한 많은 사람들이 그 도시에 집결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짐승 떼가 많아서 조카 롯으로 하여금 다른 땅으로 가게 할 때 “어느 땅 할래?” 했을 때 “나는 소돔과 고모라 그 땅이 좋아 보이니 거기로 가겠습니다.” 그래서 “그리로 가거라. 나는 반대쪽으로 가마.” 그래서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갔었어요. 왜 갔느냐? 거기서 터 잡고 살려고 간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터잡고 살려고.

그게 자기 위주거든요. 소돔과 고모라가 많은 사람이 있고, 부강한 나라고,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땅이라서 이 땅이 어떻게 될지는 그들 집단 중에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졸지에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질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집단적으로 다 오만한 거예요. 오만이 오만을 유포시키고 전염시킨 겁니다. 나처럼 되면 성공했다, 출세했다, 그런 이념과 의미를 옆 사람한테 계속해서 전파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아까 한 신명기 9장에 의하면 언약 자체만 의미 있지, 인간은 무가치하고 아무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하고 아무 의미 없는 인간을 하나님의 언약과 같이 만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그 언약대로만 될 뿐이라는 사실을 아무것도 아닌 무가치한 인간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거든요.

‘아, 내가 날 때부터 오만했구나. 이건 못 고치는구나.’ 그런데 그게 뭐다? 다윗처럼 기쁘고 즐거운 거예요. 내 인생, 나는 제대로 간다고 하는데 갑자기 새 떼로 하여금 엔진 안에 쑤셔 넣어서 나로 하여금 추락케 하는 거예요. 인간은 왜 태어나는가? 추락하기 위해서 태어나는 거예요.

문제는 언약을 남기고 추락하느냐, 언약 없이 추락하느냐, 그 차이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 롯도 그 좋은 도성을 추호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죽치고 앉아있을 생각인데 갑자기 심판을 관장하는 천사 둘이 갑자기 덮칩니다. 갑자기 덮쳐요. 언약의 덮침이거든요.

창세기 19장 15절에 보면 롯이 이 소돔과 고모라에 미련이 있어요. 천사의 말을 믿어야 될 텐데 자기가 살아온 게 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머뭇거리고 망설이고 있어요. 천사가 하다하다 안 돼서 강제로 끌고 나옵니다. 16절에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천사지요)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이게 무엇과의 충돌이냐 하면 “나 살래. 나 여기서 살래.” 이거하고 하나님께서는 “여기는 오만하고 교만한 자들의 하나의 집단이다. 주께서 이 땅 말고 다른 곳 준비했다.” 그 다른 곳이 어떤 곳이냐 하면, 나 위주로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이 모든 일을 주님의 언약, 주님이 하셨습니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끼리만 모여 있는 집단이 따로 있어요. 그것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천국 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어떻게 하느냐? 천사가 와서 말씀으로 “가자!”하고 잡아당기는 거예요. 강제조치 하는 거예요. 강제로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러면 천사는 왜 이렇게 강제 조치를 하느냐? 창세기 19장 29절에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보내셨더라.”

또 언약이에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던 그 언약의 효과로 하여금 소돔과 고모라에서 안 떠나려고 머뭇거리는 그걸 강제조치로 잡아당기는 겁니다. 그런데 롯의 처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 분리시키기 위해서 이런 조항을 달았어요. “떠날 때 절대로 뒤돌아보지 마라.”라고 했어요.

그런데 롯의 처는 그 부동산이 아까운 거예요. 다시 돌아올 수 있는지, 지금 내 좋은 빈집을 누가 차지하지는 않을지 미련이 있었던 거예요. 뒤돌아보니까 어떻게 됐다?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불 심판보다 더 혹독하고, 더 엄격하고, 더 가혹한 것은 분리입니다. 불 심판으로는 그냥 다 죽여 없애면 그것으로 끝나는데 이게 분리가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비행기 동체가 불에 타서 순간적으로 터지면, 죽은 사람은 안타깝지만 그건 이미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면 되는데 더 가혹한 것은 그 비행기 타지도 않았는데 분리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차라리 비행기 폭발하는 것을 현실로 보여주면 정신이라도 번쩍 차리겠는데 하나님의 언약을 알든 모르든 차이가 없어요, 똑같아요. 똑같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하나님 믿고 십자가 믿습니다, 해도 집에 가고, 또 직장 가고, 또 사회에 나가면 헷갈려요. ‘이게 내가 믿는 게 맞나? 천국 가는 거 맞아? 성경 이거, 뭔데? 성경이 뭐라고 이걸 다 믿어. 다른 책 믿을 것도 많은데 왜 유독 성경에 빠졌어. 내가 정신 차려야 돼. 정신 차려, 정신 차려!’ 하고 내가 스스로 정신 차리라고 독려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왜? 내 몸이 멀쩡하기 때문에. 안 아프고, 건강하고, 때로는 기침도 나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똑같아요. 세상 사람들하고 다를 바 없는데 ‘그쪽의 행선지는 지옥이고 나는 천국 간다.’ 이걸 뭐로 증거할 것인가? 이걸 증거하는 그 바탕이 죽 나옵니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인데 창세기 19장 30절부터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길기 때문에 제가 요약해 드리면, 롯의 부인은 죽었어요. 소금 기둥 돼서 죽고 남은 것은 세 식구가 남았어요, 롯과 두 딸입니다. 큰딸이 작은딸에게 이렇게 해요.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이런 제안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져내요. 롯을 생각해서 롯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 생각해서, 초청하지도 않은 천사가 아브라함 때문에 쳐들어와서 강제조치, 멸망에서 롯을 빼냈다는 말이지요. 멸망에서 빼내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계속 목숨 유지하고 있는데요? 그걸로 천국입니까? 아니죠.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구원하는데 반드시 문제성을 거기다가 집어넣어서, 우리가 문제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스스로 약속한 것은 문제 있는 우리를 넘어서서 이룬다는 그 일관된 법칙을 계속 끌고 가시는 거예요. 끌고 가기 위해서 이 롯의 가정에 언약과 상관없는 짓을 하는 두 딸을 하나님께서 행위 하도록 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손을 번식하게 했어요. 번식하는 기계죠. 자손을 번식하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술을 먹였습니다. 이건 아버지하고 성적으로 즐기겠다는 뜻이 아니고, 자식을 임신하기 위해서 잠시 아버지를 이용한 거. 그렇게 임신을 해서 아들을 한 명씩 각자 낳았습니다.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창 19:36-38).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느냐?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렇게 화끈하게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져서 “자, 살아남은 자 천국 가자.” 이러면 모든 일이 깔끔하게 정리될 것 같은데 아브라함 언약이 새 떼, 인류에 집어넣는 새 떼로 해서 그 언약이 계속 탈선하지 않도록 이탈하지 않도록 끌고 가야 돼요. 그 마지막 새 떼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에요.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의 몸이에요.

그러니까 솔로몬 때문에 나라가 부강한 게 아니고, 솔로몬 왕 몸은 솔로몬 왕과 함께 있어도 왕은 그 몸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솔로몬 몸이 있죠. 몸이 있는데 솔로몬 본인의 몸은 있더라도 솔로몬을 솔로몬 되게 하는 몸은 솔로몬을 제끼고 그 뒤에 오시는 예수님의 몸이 솔로몬 자리 밑에 깔면서 예수님까지 이끌어 내신다, 이 말입니다.

솔로몬이 “이야, 부강하다.” 하고 까불다가 나라가 폭삭 망하고 부귀영화 다 날리죠. 그때 솔로몬이 알아요. 오만한 자가 누구냐? “바로 나입니다.” 언약의 방해자가 누구냐? “접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가로막는 자가 누구냐? “접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훼방하는 자가 누구냐? “접니다.” 왜? 나는 나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요. 그게 우상이라는 거죠.

그래서 롯은 아브라함 때문에 구원을 받는데 하나님께서 롯의 두 딸과 그 족속은 구원을 못 받게 만들어요. 롯의 두 딸은 언약에서 배제 시킵니다. 배제 시키는 그게 뭐냐? 술이에요, 술. 롯의 두 딸이 아버지를 덮쳐서 자식 낳으려고 할 때 롯은 강제로 술먹힘을 당하기 때문에 거기서 배제당하는 식으로 빠지게 돼요. 모압과 암몬이 나오는데 있어서 아버지 롯은 술을 마시우고 뭔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자기 책임이 없는 거죠.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창세기 9장 20절 21절에 나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올 때 노아 여덟 식구 다 구원받는 줄 알았어요. “이야, 이제는 천당 간다.” 설마 우리 가운데서 지옥 갈 사람이 나올 거라는 건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어떻게 했느냐? 20절에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취했기 때문에 누가 저주받고 누가 복 받는지에 있어서 아버지 노아의 자격은 개입하지 않습니다. 누가 구원받고 누가 지옥 가느냐는 본인부터 해서 어떤 인간도 거기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이걸 아는 게 기적이에요. 내가 뭘 해서 구원되는 것은 없습니다. 왜? 날 때부터 우리는 오만한 자이기 때문에, 목이 곧은 백성이니까. 언약이 철저하게 구분하죠.

노아가 술에 취해서 벌거벗고 있을 때 아들들이 “아버지의 수치가 드러나지 않도록 우리 다 같이 힘을 합쳐 이불을 덮어드리자.” 이랬으면 전부다 아버지의 복을 그대로 인수받는데, 작은 아들 함이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자기의 잘남과 그리고 아버지의 못남을 비교하면서 “얼레리꼴레리!” 한 거예요. 자기 잘남 위주로 이미 정신 상태가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가 일어나서 “누구야? 나보고 얼레리꼴레리 한 게 누구야?” “전데요?” “저주받아라.” “또 너희들은?” “저는 뒷걸음질 하며 아버지의 수치스러움을 덮어드렸습니다.” 수치가 없는 게 아니고 수치가 있는데 수치를 덮어주시는 거예요.

빌립보서 2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이러한 행위를 왜 해야 하는가? 어떤 인간도 여기에 대해서 아는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열심히 살면 되니까요. ‘누가 내 죄를 덮어주기 전에 제가 성심성의껏 정당하고 바르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게 모든 저주받은 인간들의 공통점이에요. 자기가 내세울게 있어야 되니까요.

그런데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 덮어주는 거예요. 덮어주기 위해서 우리가 죽어야 될 것을 그분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피로 우리 죄를 덮어줌에 그냥 군소리 하지 말고 덮이라, 이 말입니다. 그거 못합니까? 그냥 곱게 덮으면 돼요. 예수님 피로 덮으면 돼요.

저도 옛날에 국화빵 구워본 적 있습니다, 경산시 남천면 삼성동 외갓집에 가서. 밀가루를 붓고 회전판을 돌려요. 그다음에 팥앙꼬를 넣는데 그건 내 마음대로예요. 많이 주고 싶은 사람 많이 주고, 적게 주고 싶은 사람은 적게 주는데, 거기에 대해서 옆에 있는 국화빵이 “왜 저는 적게 줍니까?” 하고 대드는 국화빵, 저는 국화빵 구우면서 그런 경험 없습니다. “주면 주는 대로 먹어, 주는 대로.” 그럴 때 그 국화빵은 만드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 기쁨이 성도의 기쁨으로 그대로 이전되는 거예요. 들어오는 거예요.

끝으로 한 가지 예를 들면 사태가 보다 더 분명해질 겁니다. 삼손 이야기에요. 삼손 이야기가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삼손이 여자를 사귀었어요, 세 명. 그 세 명이 다 특징이 있어요. 첫째 예뻤다, 둘째 여호와 믿는지 안 믿는지 그건 자기 안중에 없어요. 삼손이 예쁜 여자를 찾는 이유는, 에스더 1장 11절에 보면, 소위 그 당시 바사 나라의 최고 권력자 아하수에로 왕이 왕이면서도 그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잔치를 베풀 때 잔치를 베푸는 이유가 명확하게 나와 있어요. “내 마누라 이쁘지?” 그걸 자랑하기 위해 잔치를 벌인 거예요. “자, 이제부터 제 아내가 얼마나 빛나고 예쁜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내가 예쁘다고 하는 것은 내가 권력을 가질 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막상 잔치를 벌였는데 아내가 “거기 나가기 싫어!”(에 1:12) 이런 거예요. 아내가 싫어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육신의 한계를 삼손이 보여주고, 그리고 아하수에로 왕이 보여줘요. 사사기 16장에서 삼손은 ‘들릴라’라는 그 여자가 너무 좋아서 미치도록 매달립니다. 그런데 그 들릴라가 블레셋 출신이에요.

그래서 ‘이참에 삼손을 죽이자. 그런데 우리가 죽이려니까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모르겠다.’ 해서 들릴라가 “여보, 당신이 힘센 건 좋은데 그 힘이 어디서 나와?” 이렇게 삼손을 유혹해서 그 힘의 출처를 캐내는 거예요. 스파이죠. 정보를 캐내는 겁니다.

이것까지만 해도 그 들릴라나 삼손이나 너무나 육신적입니다. 자기 힘센 것을 세상 적인 데다, 여자를 차지하는 데다 소비를 하고 있으니까요. 자, 여기서 삼손은 뭘 놓치고 있느냐 하면, 여자를 좋아하는 게 본 자리가 아니고 삼손이 원래 나실인이에요. 나실인이 뭐냐? 사람인데 제물로 들어가야 될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삼손의 역할은 죽어야 자기 민족이, 이스라엘이 사는 거예요. 예수님 같아요. 삼손의 본래 자리는 여자 꼬셔서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니고, 자기가 죽는 자리에요. 자기가 죽어야 돼요. 그런데 삼손은 여자가 좋아서 안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강제조치로 그 여자로 인하여 산 것보다 더 못하게 만들었어요. 홀라당 깎아서 머리카락 다 없어졌어요. 힘이 없어졌어요.

그때 삼손이 알게 된 것은 뭐냐? 내 힘의 원천이 머리카락 때문에 막혔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내 머리카락에 힘이 있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언약을 방해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강제로 다 밀리니까 비로소 뭐가 보이는가? 자빠지니까 구원이 보이는 거예요.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날 천국에 보낸다는 사실을 그때 발견하는 거예요, 자빠졌을 때. 기꺼이 삼손은 자기의 목숨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찬스를 놓치는 거예요. ‘하나님의 힘의 구원은 내게 어떤 부분, 머리카락이나 이빨이나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목숨 자체를 제단에 바치는 것이다.’

그걸 알고 기회만 보고 있다가 16장에 부탁해서 “이제 마지막 죽는 마당인데 이쪽 기둥과 저쪽 기둥 사이에 좀 세워주면 안 됩니까?” 이미 눈알도 빠졌어요. 머리카락도 홀랑 다 빠지고, 그 상태에서 기둥 사이에 서게 했습니다. 여기서 삼손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제 목숨 바칩니다. 태어날 때 원래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제 죽음을 통해 이뤄지게 하옵소서.”

바로 삼손은 그때 블레셋 나라를 무너뜨리는 새 떼에요. 새처럼 사용합니다. 인간의 가동되는 모든 국가의 엔진 터빈을, 그걸 틀어막아 버리는 그 역할. 대통령,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계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미 언약대로 이루어지는데 언약도 아닌 게 거기 왜 자꾸 얼쩡거려요? 왜 거기에 신경 씁니까, 정치라는 데에.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는데요.

어떻게 복음 전할까, 하지 마세요. 그냥 매일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비로소 우리에게는 지금 내가 뭘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부지런히 우리에게 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돌이켜서, 과거도 돌이켜서 전부다 하나님의 언약 작용에 내가 놓여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이게 바로 복음의 기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다 하셨는데 새삼 설치지 말게 하옵소서. 그러나 때로는 설쳐야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오만하고 교만한 것도 아시니까, 설치든 안 설치든 그것조차도 주님께 맡겨서 다만 십자가만,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것만 우리에게 기쁨으로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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