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인간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독해요.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정도로 독해요.
불교에서 나온 선불교에 어느 늙은 중, 그러니까 스님이 제자를 불러서 제자를 가르친다고 선문답합니다.
“여기 회초리가 보이지?”
“예, 보입니다. 스승님”
“네가 회초리가 있다고 하면 내가 회초리를 들고 너를 때릴 거야”
이 말을 듣고 제자는 없다고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죠.
“만약에 네가 회초리가 없다고 하면 내가 회초리를 들고 너를 때릴 거야”
이 말을 듣고 제자는 아무 말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죠.
“회초리가 있다고 해도 때릴 거고, 없다고 해도 때릴 거야. 그리고 이것에 답변 못 하면 이 회초리가 너를 때릴 거야. 내가 때리는 것이 아니고 회초리가 너를 때릴 거야. 너는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이것이 너에게 내린 숙제다”라고 하는 거죠.
인간들이 얼마나 독하고 독한지, 내가 왜 여기 살며, 왜 존재하며, 나는 무슨 이유 때문에, 무슨 의미로 사는지를,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에게 집중해서 24시간을 오직 자기만 집중해서 ‘하나님이여, 뜻이 뭡니까?’라는 자기 집중을 전제로 깔고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외부인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이게 숙명이고, 슬픈 운명이에요.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 남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질문이 나오는 거죠. “진리가 무엇이냐?” 인간은 답변할 수 없는 끝장을 보면서 끝을 보면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알 수 있는 지혜와 진리를 다 확보하려고 선불교에서 그런 질문을 낸 거예요. 어느 누구도 답변 못 하게. 만약에 이 질문을 선지자나 세례요한이나 사도바울에게 질문하면, 그들은 어떻게 답변하겠습니까?
“당신이 만약 나를 때린다면, 이 자리에 당신의 제자는 없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나를 때리지 않는다면 당신의 제자도 없습니다. 아무 소리 안 한다고 때린다면 당신의 제자는 여기 없습니다”라고 답변했을 거예요. 이 말은 또 무슨 말이냐. 이 말은 여기 없는 분이 유일하게 계시고, 있는 자는 몽땅 없다는 뜻이에요. 이게 복음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없는 자 같은 존재가 자꾸 있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모닝이 벤츠 흉내 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찾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끌어당긴 거예요
나는 사람이 아니무니다. 그냥 힘이고, 나도 전쟁기계의 부속품인 것을 절실하게 느껴져야 돼요.
전쟁기계, 하나에 힘의 의지 특징이 뭐냐? 잘했다, 못했다는 평가할 수 있는 자격 자체, 대상이 안 됩니다. 잘했으니까 오래 살고 못했으니까 일찍 죽는다? 이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선과 악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모든 인간은 똑같습니다. 이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