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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부동산

아빠와 함께 2025. 1. 26. 16:28

영원한 부동산

2025년 1월 2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2:6-7

(32:6) 예레미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32: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구약 성경의 무대는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란 지상에 새겨진 하늘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그 약속의 땅은 사그리 비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도 살아서도 아니되고 살 수도 없는 땅이어야 하는 겁니다. 곧 이스라엘의 전면적인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희망은 없는 것일까요? 땅의 멸망으로 끝일까요? 아닙니다. 세상은 다 무너져도 말씀은 지속됩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그 말씀의 지속성을 위하여 도리어 약속의 땅은 비워져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 안에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더불어 70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말씀이 정확하다면 약속의 땅의 일부를 미리 예레미야가 사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 결국 이 땅을 차지하게 된다는 점을 말해주는 바가 됩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예레미야의 집안이라고 할 수 있는 조카가 예레미야에 와서 자신의 땅을 사두어라고 부탁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사람은 같은 사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을 때는 자신만만하게 홀로 살 생각도 해보지만 막상 옆에 아무도 없을 때의 상실감은 큽니다. 이처럼 주위에 ‘사람 없음’은 사람을 더욱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지독하게 사람을 찾게 되는 그 순간에서는 말씀은 한곁같이 자체적인 계획을 수정없이 밀어붙이게 됩니다.

즉 사람은 사람을 찾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인간의 행위에 일체 그 어떤 동정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 안에는 이 땅에 어떤 분이 오셨다가 떠난 그 행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사람을 끌어당기되 이미 확정된 그 내용을 그대로 지상에 퍼뜨리게 됩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히브리서 11장을 보게 되면 거기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자꾸만 이 세상을 떠나려고 합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7)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그렇다면 예레미야처럼 다시 돌아올 부동산은 어디있지요? 히브리서 13:14에 보면,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부동산은 이 땅에서 오셔서 모든 말씀을 다 이루신 예수님이 계신 바로 그곳입니다. 온전하게 말씀이 완성이 되어야 비로소 영원한 도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영원한 부동산을 함유하고 있는 그 말씀이 우리 마음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 말씀의 자체적인 힘에 의해서 우리 마음은 이 땅에서 영원히 기거할 마음을 품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안에서 영원하고 안정적인 중심처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패로 끝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 모든 곳이 하나님의 불의 심판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노아 홍수 때 노아에게 방주가 없었으면 노아도 물 속에서 멸망당하게 됩니다. 따로 방주라는 만들어 물의 심판성 위를 떠다니게 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곳에 부러워할 곳이 아닙니다.

오늘날은 불로서 다 당합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4-17)

따라서 성도는 그 안에 들어 있는 말씀에 의해서 늘 붕 뜬 삶이 됩니다. 그런데 그 힘이 어떤 일에서 나올걸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예레미야가 조카 땅을 사면서 ‘무른다’는 형식으로 사게 됩니다. ‘무른다’는 말은 피해입은 자에게 가해자가 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 정신과 결부되면 가해자도 아닌데 피해입은 자를 물러주게 됩니다.

룻기 4:6에 보면,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장의 잘못으로 하나님께 물러받은 전 재산을 말아먹은 가정에게 가해자도 아니면서 가까운 친척이 나서서 대신 상속을 땅을 사서 도로 땅을 잃어버린 자의 몫이 되게 하는 겁니다.

이 원칙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관련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 2:25)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도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가담될 수 없었습니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요 8:17-18) 하지만 이런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물러주시는 분이 되신다면 그때부터 성도는 하나님의 일에 가담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 증인의 내부는 더는 자신을 위한 삶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치 헬륨가스가 차 있는 풍선처럼 지상에서 발을 뗍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구원을 시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전달체가 됩니다.

수시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의지하려 할 때마다 말씀이 작동하면서 주님쪽으로 기울게 하십니다. 마치 기름이 들어있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신랑 만나기 전에 벌써 함께 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마 25:4)  기도합시다.

『 하나님, 혼자 살지 말게 하옵소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게 하시고 주님께서 이끄시는대로 움직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9강-예레미야 32장 6~7절(영원한 부동산)25012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2장 6~7절입니다. 구약성경 1102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7.  'Behold, Hanamel the son of Shallum your uncle is coming to you, saying, "Buy for yourself my field which is at Anathoth, for you have the right of redemption to buy [it.]"'

갑자기 선지자에게 부동산 투기를 유도하는 조카가 찾아왔습니다. ‘내 밭을 사세요. 이거 남는 장사입니다’라고 합니다. 이 밭이 어디에 있는 장소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라고 하나님이 규정하신 땅에 있는 부동산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동산 시세에 대해서 책임지시는 분은 누구냐.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왜 땅이 필요하지 않은 예레미야에게 땅을 굳이 사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날아가도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은 선지자의 말씀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참 신기하죠. 이 눈에 보이는 세상, 땅의 세계가 멸망했으면, 이건 모든 것이 멸망한 걸로 우리 인간들은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여지를 주셨습니다.

모든 것, 땅은 멸망한다. 그러나 말씀이 있잖아. 말씀 안으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노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으면, 노아도 다른 사람과 같이 물에 잠겨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새로운 부동산을 만들라고 했어요. 그게 노아 방주였습니다. 물에 다 잠겨버릴 때, 살만한 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 시공간에서 중심은 찾지 마세요. 이 세상 시공간에 어디를 가도 내 마음 둘 중심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모세가 나오는데, 27절에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라고 되어있어요.

24~2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가 지금 도망치고 있어요. 달아나고 있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말하지 않고, 이곳은 아니라는 겁니다. 어디로 가는지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은 무조건 아닌 거예요.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은 나의 중심지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13장 14절에 보면,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되어있어요. 여기 있는 땅이라는 부동산은 영구하지 않다. 영구한 도성은 없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도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은, 떠도는 이유가 떠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요, 증거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우리에게 할 말이 있는 거예요. 떠돌면서. ‘아이고, 당신들은 정차할 곳이, 머물 곳이 없네. 어디 한 곳을 정하세요’라고 할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우리는 지금 떠나는 중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의 과정, 노상의 존재예요. 길 위에 존재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데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지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그것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마음 내부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어떤 존재냐. 이 땅과 별개의 떨어져 있는 존재가 됩니다. 이 땅과 상관없는 존재로서 이 땅을 거닐고 있는 거죠.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것을 세 자로 표현하겠습니다. ‘전달체’ 하나님의 약속 운반체. 택배기사.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 안에 담겨있다, 또는 담지되어 있다는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무슨 헬륨가스를 집어넣었는지, 그 안에 있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두 발을 땅에 딛지 않고 통통 튀도록, 스카이콩콩처럼 통통 튀도록 하는 거예요. 말씀은 그래요, 말씀은. 제가 말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성경을 덮고, 맨날 덮지만, 성경을 덮고, ‘안 들었다~~, 난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라고 나왔을 때,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뭐냐. 그것은 타인입니다.

타인과의 연대감이 없으면 우리는 못삽니다. 혼자서 못 살아요. 산속에 가서 못 살아요. 떠나는 사람은 바로 이별이 되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계속 이별하는 거예요. 아파도 너무 아파요. 우리는 타인을 떠나지 못합니다. 남에게 의존하면서 삽니다. 보통 사람 설명할 때, 사람 인(人)자, 한자로 설명할 때, 작대기 두 개가 서로 기울어져서, 人, ‘네가 빠지면 나는 쓰러진다. 알아서 해라’라고 하는 것처럼 둘이 서로 받치고 있는 모습이죠.

그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의 삶에 어떤 식으로 세뇌 되어있느냐, 어떤 식으로 몸에 체질화되어 있느냐 하면, 사람 없이는 못 사는 식으로 체질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급할 때는 ‘도와주세요’라는 말밖에 나올 것이 없어요. “왜 도와줘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답변은 간단해요. ‘살아야지요’, “어디서요?”, ‘이 땅에서요’, “땅이 멸망하는데요”

‘나는 그런 건 모르겠고. 나는 그거 잊었습니다. 그거 모릅니다. 어~~~나는 안 들었습니다. 모르겠고, 나는 이 땅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야겠습니다’, “떠날 생각은?”, ‘떠날 생각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안에 운반할 하나님이 주신 운반 내용이 없어요. 아무 운반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 예레미야 32장에서 예레미야에게 조카가 와서 ‘삼춘! 이 땅 사세요’, ‘왜?’

‘삼춘 말대로 이 땅에 다시 돌아온다면, 삼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할 증거물인 삼촌의 부동산이, 삼촌이 죽고 난 뒤에 삼촌이 산 땅이, 그 부동산이 후대에 계속 전달하고 전달할 증거물로 계속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인 토지뿐만이 아니고, 그 땅에 살았던 예레미야까지 충분히 말씀을 위해서 이용합니다.

그러면 우리한테 질문을 해야 하지요.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어떤 물품이 들어있습니까? 그 물품은 이런 식이어야 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다가 이 땅을 떠났다는 내용과 관련이 된 물품이어야 하는 겁니다. 일종의 헬륨가스니까. 우리는 풍선이고 안에 가스가 들어왔으니까, 가스가 뜬다면 우리도 덩달아 이 땅에서 떠야 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나는 주님 가신 그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라는 이건 안 떴어요. 이건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억지를. 자기 앞가림을 자기를 위해서 미리 대비하는 자예요. 뜨지를 못했어요. 이 말은 뭐냐. 내가 알아서 주님께 가겠다는 것은, 안에 주님께서 직접 넣어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에요.

헬륨가스가 들어오면 자동으로 뜨게 되어있는데, 죽고 난 뒤에 자기를 대비하는 것은 보람상조나 하는 이야기죠. 보험회사 보험 들 때나 하는 이야기고. 그냥 뜨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말리겠죠. ‘너 뜨면, 네 자식은 어떻게 하고, 네 형제는 어떻게 하고, 네 친구는 어떻게 하느냐? 너도 알다시피 사람 산다는 것이 서로 의지하면서 사는 거야. 사람 없이, 남 없이 혼자 사는 것은 아니야. 네가 떠나버리면 남은 사람은 그 이별을 어떻게 감당하라고?’라는 식으로 붙들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놔라. 나는 혼자 간다’라는 식이 아니라,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되죠. 그건 종교적인 꼼수죠. 나도 알아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게 그냥 뜨네요. 내 속에 있는 게 나보다 더 강해서 나로 하여금 점점 더 뜨게 만드는 거예요. 마태복음 25장 11~12절에 보면, 제가 성경을 보면서 굉장히 슬픈 이야기가 많은데, 그중에 가장 난감하게 슬픈 거, 슬픔의 도가 가장 극단까지 이르는 대목이 나옵니다.

10절에 보면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와버렸어요.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리고 문이 닫혔어요. 그다음 11철에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하는 이 대목이에요. 문은 이미 닫혔어요. 닫혔는데, 문이 닫힐 때, 문을 닫아두는 하나님 쪽의 조치는 이렇습니다.

인간이 미리 대비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대비했기 때문에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신랑이 온다는 사실이 기름 준비와 관련성을 가지고 있고, 기름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신랑이 오더라도, 그 지혜로운 처녀에게는 이미 신랑이 나와 함께 있음을 간주했을 때, 나는 어떠한 모양새냐는 말입니다. 혼자 있을 때, 오실 신랑을 어떻게 맞이하냐가 아니라.

이미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신랑은 어떤 식으로 나를 신부로 알아보겠는가. 기름이 있어야 조명발이 있어서 ‘너 맞느냐?’라고 보면, ‘접니다’라는 식으로 기름이 있어야 조명 앞에 마주 볼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희망과 기쁨은 뭐냐 하면,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혼자 자기 조치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보다 먼저 존재하고, 그 존재 앞에 주님 존재의 일부로 자기가 그 앞에 있는 거예요. 동행이죠.

그래서 저는 이것을 ‘문밖에 있는 그대’라고 합니다. 노래 아는 사람은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두드려도 네게 줄 사랑은 남아 있지 않은 겁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가 구해서 얻어내는 그런 게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나중에 사랑합시다’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사랑이 먼저 우리 사는데 찾아와요. 먼저 찾아와서, 그분 하실 일은 뭐냐, 사랑밖에는 모르게, ‘사랑만 있으면 나머지 하나도 없더라도 상관없어요’라는 고백을 받아내죠.

그래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차지하지 않아요. 덥석 물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할 말을 잃어요. 주님 앞에서. 그래서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한마디 말~이~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는 사람아~’ 그다음에 보면 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나는 당신의 여자’

애모(작사 작곡-유영건, 노래-김수희)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세월의 강 넘어 우리 사랑은 눈물속에 흔들리는데
얼만큼 나 더 살아야 그대를 잊을 수 있나
한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는 사람아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드는데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여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드는데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여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드는데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여

지금 다들 기억나지요? ‘애모’라는 노래 기억나지요? 그해에 가사 상을 받은 노래입니다. 한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은, 말로 예수님을 옭아맬 수 있는 그런 짓은 저는 못 하니, 주님 앞에 말문을 닫겠습니다. 말문을 닫는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닫는다는 겁니다. 존재를 부정하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되느냐, 내가 주님 사랑 안에 있게 되면, 우리는 우리 안에 사랑의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은 서론입니다. 본격적으로 예레미야 32장으로 가봅시다. 땅을 샀는데, 여기에 무슨 내용이 있는가 하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7절에 보면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이 무른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한국말로 번역이 제가 보기엔 너무너무 잘 되어있어요. 피해를 입은 자가 가해자보고 ‘물어내. 물어내!’라고 하지요? 그 물어내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물어낸다는 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면, 피해자도 아닌데 아무 피해도 주니 않는 멀쩡한 나에게 ‘너, 잠깐 이리 와. 나 여기 이렇게 손해 봤다. 피해를 입은 그 사람을 대신해서 네가 다 물어내’라는 식으로 이게 활용이 됩니다. 그게 바로 룻기 4장 4절에 나옵니다.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보아스에게 나오미 집안이 완전히 거덜 나서 땅 주인이 따로 있는데, 그걸 도로 찾아오라는 말이죠. 하나님이 주신 땅을 도로 찾아와야 하는데, 나오미가 무슨 돈이 있습니까. 그런데 준재벌 되는 보아스가 나오미 가정의 땅을 도로 찾아서 나오미 가정에 돌려줘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냔 거죠. 도박해서 전 재산 다 날리고, 보증 잘못 서서 다 날렸는데, 엉뚱한 사람이 그 보증 날린 돈을 ‘내가 갚아줄 테니까 예전처럼 그것을 알아서 잘 관리 해라’라고 그냥 주는 거, 그걸 무른다고 하는 거예요.

가해자도 아닌데, 내가 가해자라 치고, 그걸 도로 물어주는 겁니다. 그러면 물어준 사람과 물음을 받은 사람 사이에 어떤 역할이 되느냐.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인데, 이게 증인이 됩니다. 증인. 성도가 안에 하나님의 말씀, 약속이 들어와요. 어떻게 들어온다고 했지요? 아까 사랑으로 들어온다고 했어요. 사랑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이 땅이 파괴되고 어떤 분이 이 땅에 와서 떠남으로써, 더 이상 이 땅에 대해서는 일체 미련도 두지 않고, 작살내고 불로 심판한다는 것을, 아직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우리가 주님의 하는 일을 물어주는 그런 노릇을 함으로써, 증인이 되는 거예요. 예레미야가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2장 2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증인을 찾는데,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 증인 하겠다는 것은 주님께서 거부하십니다. “가만히 있거라. 까불지 말고. 나대지 마라” 주님께서 우리를 물어주는 사람으로 찾아올 때, 비로소, 우리는 증인 되기 싫어도 증인 될 수밖에 없는 절차가 남아 있어요. “가만히 있어라. 네가 내 증인 한다고 나대지 말고” 내가 네 속에 들어갈 때, 비로소 너는 하기 싫어도 주님의 증인 되게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 뭐냐,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물어주신 분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의 계속적인 활동 상황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아까 보았던 본문을 다시 한다면, 마태복음 25장에서 신랑이 온다고 하면, 그냥 오면 되지, 신부가 열 명이면 그냥 오시면 되지, 기름 준비했다는 요소가 왜 걸림돌로 작용하도록 신랑이 왜 그걸 방치하시느냐는 그런 의문점이 들 거예요.

신랑 입장! 그리고 신부 입장! 이러면 간단하잖아요. 거기에 어떤 장애 요소가 없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 가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지옥 가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천국 가고 싶다고 넣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천국의 주인 되신 주님이 우리에게 뭔가 한 것이 있어야 해요.

한 것이 있으면 어떤 생각으로 정리가 되느냐 하면, 나는 천국 갈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고, 나는 갈 수 없는 존재인 것을 계속해서 그것이 우리 안에 생겨나면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전달하는 택배기사 노릇을 충분히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에요.

끝으로 요한복음 8장 17절에서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라고 하시는 것처럼, “너희들은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너희는 모르지만, 나는 안다”라고 하셨거든요. (요8:14)

그리고 5장 19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거든요. 왜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자기 친아버지라고 해서 죽이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거 하나로 증거가 다 되는데, 이것이 최종 증거는 아니에요. ‘유대인이 화났다. 예수님에게 욕했다’라는 것이 아니고, 화가 났으면 화를 멈추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어디까지 밀어붙여야 하느냐 하면, 죽여서 피를 내야 해요.

피를 내야 어떤 인간도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증거, 하나님의 증거’가 될 자는 이 세상에, 아담에 속한 어떤 인간도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쾌하게 드러나 줘야 해요. 드러나고, 그 패역무도하고 극악한 악마의 죄, 악마의 죄를 누가 물어주느냐. 예수님의 피가 물어줌으로써, 구원받을 수 없는 내가,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너를 위해 피 흘렸다는 그 피를 전달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 이게 영원한 천국이라는 부동산이 아예 우리 안에 옴팍하게 들어온 샘이 됩니다.

그 증거가 들어왔으니까, 그 안에서 주의 피가, 주의 능력이 자체적으로 임하니까, 우리는 매사에 이 세상과 늘 이별하는, 즐겨 바이바이(bye~)하는 그런 심정으로 우리는 남은 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저 세상의 모든 것은 무의미합니다. 미련 두지 마시고, 늘 붕붕 떠난다는 이런 가벼움으로 여러분이 설인지 뭔지를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하나님 주신 부동산이 있다는 거, 영원한 천국이 이미 들어와 버렸다는 사실, 얼마나 우리가 감격하고 감사해야 하는데, 우리는 책만 덮어버리면, 이 땅에서 내 살 곳을 찾아다니는, 이 세상에서 내 자리 마련하는 그런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주님이여, 그때마다 말씀으로 하여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두 발을 뜨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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