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편]
-다니엘서 속의 그리스도-
Ⅰ. 서론
1.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사는가?
(1) 상업자본과 산업자본
자본주의 역사는 이러하다. 서양에서는 절대 왕조와 맥을 같이하며 발전했던 상업자본의 황금기가 있었다. 바로 17세기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이끌었던 대항해 시대이다. 그런데 18세기 말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산업자본주의가 등장하자 상업자본주의 시대는 막을 고하게 된다.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은 이윤을 획득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다시 말해서 가격의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이윤을 획득한다. 가령 동해에 인접한 강릉에서는 오징어가격이 서울보다 싸다. 만약 강릉에서 오징어가격이 1,000원이라면, 서울에서는 2,000원에 팔린다. 그렇다면 상인은 강릉에서 1,000원에 오징어를 사서, 서울에서 2,000원에 파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는 1,000원이란 이윤을 남는다. 여기서 우리는 상업자본이 항상 각양 각종의 신기한 특산물이 나는 곳, 다시 말해 가격 차이가 나는 곳을 찾아 멀리 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7세기와 18세기 초까지 영국과 네덜란드가 경쟁적으로 동인도회사를 차렸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에는 유럽에는 없는 진귀한 특산물, 다시 말해서 엄청난 가격 차이를 보이는 상품이 많았다.
반면 산업자본은 상업자본과 달리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깁니다. 시간을 품으면서 비약적으로 가격이 뛰는 양주 같은 것. 혹은 기존에 맛보지 못한 새로운 맛이 가미된 빵과 음료나 음식 같은 것. 스마트폰 같은 것도 해당한다. 이 시간 차에 가게 사활이 걸린 것으로 도박과 같은 것이다.
이 도박 사회를 자본주의라고 고상하게 부른다. 스마트폰을 만드는 산업자본은 계속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서 기존 제품들이 유행에 뒤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비자에게 기존 제품을 버리고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존에 구입한 제품과 새로운 제품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유념할 것은 공간의 차이와 달리 시간 차이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는 행위, 다시 말해 새로운 유행을 만드는 산업자본 행위 자체가 시간 차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2) 에너지 유통 체계로서의 자연
지구 지표면의 에너지 작용과 그것이 결정짓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유기체들은 인간을 비롯한 원칙적으로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아들인다. 그때 초과 에너지는 체계의 성장에 사용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 체계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된다면, 또한 그 초과분이 그 체계의 성장에 완전히 흡수될 수 없다면, 초과 에너지는 기꺼이든 마지못해서든 또는 영광스럽게 재앙을 부르면서든 간에, 반드시 대가 없이 상실되고 소모되어야만 한다.
산업자본주의 발달이 결국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초래했는데, 이것은 과잉 에너지의 무조건적 소모로 이해할 수 있는 분명한 사례다. 하지만 전쟁이란 히틀러와 같은 부도덕하고 비합리적인 한 개인의 등장 혹은 우연적인 사건으로 돌릴 수 없는 이유다. 과잉 에너지는 반드시 소모돼야만 한다. 불유쾌한 파멸의 길을 따라 전쟁이나 사치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냥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인가?
(3) 산업혁명의 여파
1700년부터 1850년까지를 제국주의, 산업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 민족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의 근본적이고 지배적인 힘은 성장이었다. 세계 인구는 급성장하고 다양한 혁신이 이루어지면서 생산성, 무역, 경제, 도시와 농업, 산업, 문해력, 대중매체, 기술 등이 발전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어떤 제국은 팽창하고 다른 제국은 무너졌다. 급격한 성장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체제와 제도가 시도되었고 때로는 실패하기도 했다.
식민지화는 현지인에게 끔찍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미국은 원주민의 영토를 병합했고 호주에서는 원주민에 대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기술 발전은 전쟁의 규모와 사망률을 증가시켰다. 유럽에서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에서는 대규모 군대가 동원되었고, 뉴질랜드에서는 머스킷 총이 전통적인 마오리족의 전쟁 양상을 크게 바꾸었다. 인도에서는 소규모 유럽 군대가 더 큰 규모의 현지 군대와 싸워 이겼다.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무역을 하는 제국들이 새로운 무기와 서구의 노예 수요 덕분에 번영했다.
미국 중서부 지역의 경우 미국 동서 해안을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해 경제가 성장했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버펄로는 전멸했다. 아프리카 전역은 노예무역으로 인간이 감소했다. 남아시아에서는 영국 제국주의가 현지의 경제와 무역을 완전히 파괴했다. 중국에서는 통화와 상품 무역 때문에 아편전쟁이 발생했고 호주는 식민지 토지 강탈로 인해 원주민 인구가 많이 감소했다.
산업화는 적어도 수천 년 전 농업이 시작된 이후로 세계 경제사에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 18세기 말에 시작된 산업화 과정은 세계를 재편하는 지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18세기 말 이전, 서구 세계의 경제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인구 증가에 따라 정기적으로 경제가 확장되기도 했지만, 경제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 인구가 증가하면서 기아, 질병, 전쟁이 초래되었고 그 결과 인구 감소와 경제 축소가 뒤따랐다.
하지만 18세기 말부터 경제는 이런 덫에서 빠져나와 계속 성장하기 시작했다. 달라진 점은 경제 효율성이 계속 향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이라는 이런 근본적인 변화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차츰 다른 세계로 확산했다.
산업혁명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여러 시기에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경제 분야에서 조금씩 일어난 일련의 변화였다. 이런 변화 중 일부는 18세기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예컨대 13세기부터 물방아 기술 덕분에 모직물 제조에 작은 혁명이 시작되었다.
산업혁명은 인구 증가 때문에 뒷받침되고, 농업 효율성과 생산량이 극적으로 증가한 덕분에 가능했다. 토지 경작에 필요한 노동자가 줄어들면서 더 많은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도시로 이동해 새로운 공장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1,800년에는 세계 인구의 5%가 도시 지역에서 살았지만 1,925년에 이 수치는 20%에 이르렀고, 유럽, 미국과 같은 산업화한 지역은 인구의 71.2%가 도시에 살았다.
다른 요인은 노예제였다. 신대륙의 노예 노동으로 인해 면화 생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이 시대의 섬유 산업의 발전, 설탕, 담배, 그 외의 다른 원재료를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여기서 발생한 이익을 통해 부유한 중산층의 자금이 늘어난 것이다. 유럽, 나중에 미국의 금융 역량이 확대되어 자본을 투자할 수 있으면서 가내수공업이 세계적 산업으로 탈바꿈했다.
산업혁명이 또한 기술 변화에 힘입었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직물공장과 다른 공장의 기계의 동력이 공급되었다. 산림벌채로 목탄이 부족한 상황에서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연료 수요가 증가했지만, 석탄이 효율적인 대체재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기계는 남자보다 임금을 훨씬 더 적게 받는 여성과 아이들이 대부분 작동했고 이 과정에서 안전사고, 호흡기 질환, 청각 질환, 사망 사고를 유발했다. 여성들은 직접 재해로부터 적절하게 보호받지 못했다. 증기기관에 필요한 석탄 수요가 증가하자 이를 위해 석탄 채굴 기술이 개선되었고 처음에는 운하, 나중에는 철도를 통해 운송 수단도 향상되었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과 아메리카로 확산했다. 미국의 경우 철강업과 조선업이 처음으로 혁신적인 변화를 겪었다. 유럽에서는 벨기에, 프로이센이 산업혁명을 선도했고,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 탓에 초기에는 발전이 지체되었다. 1,870년대에 독일이 통일되면서 새로운 사업화의 물결이 일어났고, 1,900년에는 독일과 미국의 산업생산량이 영국을 앞질렀다.
교통 발달로 더 이상 공장을 원료 생산지 근처에 지을 필요가 없어졌다. 공장이 도시에 건설되면서 도시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1,800년 유럽에서 28개 도시의 인구가 10만 명이 넘었고 1,848년에는 그런 도시가 45개가 되었다. 하지만 도시 노동자들의 삶을 매우 열악했다. 임금과 생활 수준은 매우 낮고 주거시설도 지저분했다. 특히 산업혁명 초기에 불평등이 증가했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무역 형태가 등장했다. 교통 발달에 전신과 같은 통신 기술 발명이 더해지면서 세계 무역이 증가했다. 원재료가 더 값싸게 조달되고 완제품 시장이 확대되면서 무역을 통해 추가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다.
19세기에는 엄청난 이주 현상이 발생했다. 이주민은 산업화, 과잉 인구, 박해의 영향으로 더 나은 삶을 찾아 이동했다. 기계화된 새로운 사업은 이전과 다른 차원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유럽, 인도, 중국에서 경제적 곤경을 피해 떠난 이주자들이 노동력의 공급원이 되었다. 중앙 유럽과 러시아 제국의 정치적 격변과 반유대주의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8,000만 명 이상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이주했다.
해방 이후 남미의 많은 국가에서 베네수엘라의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 아르헨티나의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와 같은 군사 독재자가 권력을 잡았다. 1,910년의 멕시코가 그랬듯이 새로운 독재자가 통치권을 놓고 싸우면서 내전이 잦았다. 또한 신생 국가들이 영토 확장이나 귀한 천연자연에 대한 지배권 확보에 노력한 탓에 국경 분쟁도 흔했다. 볼리비아와 페루는 비료와 화약 제조에 사용되는 아타카마 사막의 질산염을 놓고 칠레와 태평양 전쟁(1,879~1,883년)을 벌인 뒤 영토를 잃었다. 브라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 파라과이 영토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1864~1870년).
남미 지역의 경제는 유럽의 급성장하는 산업과 소비시장에 대한 원재료와 식량 수출에 의존했다. 브라질은 커피와 고무, 칠레와 페루는 구리와 주석, 아르헨티나는 염장육과 내동육을 수출했다.
아르헨티나는 대서양 무역로의 혜택을 받아 빠르게 발전했다. 하지만 이 지역에 대한 외국의 영향력은 계속 유지되었다.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명백했다. 미국은 푸에르토리코를 병합하고 다수의 다른 국가를 점령하거나 보호국 상태로 만들었다. 이 지역의 철도와 광산에 투자한 영국과 미국의 기업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자 새로운 극단적인 정책이 인기를 얻었고 이는 끔찍한 제2차 세계대전의 발판이 되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빠르게 회복했다. 전쟁 수행에 사용된 공장은 소비 제품 제조로 전환되었고 1,920년대에 산업생산량은 2배로 증가했다. 많은 미국인이 흔히 돈을 빌려서 주식시장에 투자했으며, 이 호황기를 ‘광란의 20년대’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1,929년 중반에 문제의 징후가 나타났다.
실업이 증가하고 자동차 판매가 감소했다. 위기는 10월 24일에 터졌다. 주식시장이 11% 하락한 것이 공황의 시작되고 그다음 6일 동안 주식시장이 붕괴했다. 미국 노동인구의 25%가 실업자가 되었다.
주식시장 붕괴로 약 250억 달러가 사라지자, 사람들이 파산하고 공장은 문을 닫았다. 기업이 파산하고 임금은 떨어지고 노숙자가 급증했다.
1,932년 중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허버트 후버에 이어 대통령에 취임하면 사회정제 해결 프로그램인 ‘뉴딜정책’을 약속했다.
대공황은 전 세계로 확산해 대규모 빈곤이 발생했다.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국가는 소련뿐이었다. 미국이 독일에 막대한 차입금을 상환하라고 요구하자 독일은 더 빈곤해졌고, 이는 아돌프 히틀러 국가사회주의(나치)당의 인기를 치솟게 했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미국만의 사건이 아니었다. 미국이 지출을 줄이자, 수입 상품의 수요가 크게 감소했다. 미국에 수출하던 국가의 실업률이 증가했다. 기업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고용자를 줄였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소득이 감소하면서 이들 국가의 상품 수요도 감소했다. -열심히 일하면 산다-가 의미 없게 되었다.
시장 붕괴 이후 남미 일부 국가에서는 대미 수출이 70% 이상 감소했다. 콜롬비아는 커피, 바나나, 석유 시장이 타격을 받았다. 브라질의 커피 경제 역시 타격을 받았다. 설탕 수출에 의존하는 쿠바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파괴적이었다. 질산염과 구리를 수출하는 칠레는 최악의 타격을 받은 국가 중 하나였다.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는 비교적 빨리 회복했다.
1,920년 말에 호주는 이미 양모와 밀 가격 하락으로 오랫동안 무역이 악화하였다. 호주는 대외 부채가 많았고 실업도 증가했다. 대공황 시기에 호주 경제가 붕괴했다. 1,920 중반에 호주인의 32%가 실업 상태였다. 민주주의가 그저 밥 먹여주지 않는 것이다.
1,930년대에 스페인은 교회와 국가, 부자와 빈자, 도시와 농촌으로 분열되었다(1936~1939년 스페인 내전). 정치 역시 양극화되었다. 한쪽 진영인 좌파 인민전선(공화주의파)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무정부주의로 구성되었고 다른 진영은 우파 민족전선(민족주의파)은 스페인 파시즘 정당, 군주제 지지자, 카톨릭으로 이루어졌다.
전쟁 중 양측은 시민을 상대로 잔학행위를 저질렀다. 공화주의파는 교사, 변호사, 지주, 시장을 포함한 우파라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교회에 대한 증오심으로 많은 교회를 샅샅이 수색하고 파괴했다. 한편 프랑코(민족주의파)는 게르니카에서 시민을 잔인하게 폭격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폭력은 국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다른 유럽 국가의 국민도 정치적 의견이 우파와 좌파로 양극화된 자유주의 정치와 약한 정부에 대해서 환멸을 느꼈다. 우파 정치세력이 이탈리아, 독일, 일본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서기 476년에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로 유럽 통일의 꿈은 여러 형태로 존재했다. 1,951년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대규모 파괴를 겪은 뒤 6개 서구 국가가 통합 과정을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29개 회원국으로 정치적, 경제적 통합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세계적 차원에서 재화, 사람, 돈, 지식, 문화의 자유로운 이동을 의미하는 세계화는 한때 세계 빈곤의 해답으로 여겨졌지만, 불평등과 정치 불안으로 인해 대중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세계화는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각 나라는 수천 년 동안 서로 교역을 해 왔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술 발전, 무역 장벽 완화, 통신 발전이 결합하면서 국가들의 상호교류 방식이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세계화는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을 촉진했지만 실제로는 보통 산업들이 노동력이 비싼 부유한 국가에서 더 값싼 가난한 국가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다국적 기업들은 점차 세계화되어 낮은 비용과 세금을 줄이려고 해외에 생산공장을 배치했다. 인터넷의 증가로 사람들은 사무실을 떠나지 않고도 전 세계에서 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재화, 서비스, 금융 자본의 국제 거래는 그 어느 시기보다 더 확대되었다.
도대체 국가가 무엇인가? 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왜 이런 세상을 꾸리게 되었는가?
2. 산업 사회에서 형성된 정신
인간 본성은 다음 두 가지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정념적(감정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그것이다.
정념이란 자연생태의 정신을 말한다. 가족과 동료에게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대부분 정념의 본래 경향이다. 정념을 그러한 편향의 바깥을 향해 열어젖히고 넓힐 때 이것이 상상의 힘이다. 상상의 힘은 정념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정념을 두드리는 타악기와 같은 것이다.
상상력은 정념을 반영하고 자연스럽게 현실성의 한계를 뛰어넘게 한다. 이로써 외부와 관계를 맺어간다. 그리고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 내는데 이것이 경험으로 느끼는 새로운 관념이다.
A와 B의 관계란 A와 B의 중간이기도 하며 외부이기도 하다. 모든 관념은 사물과 사물 사이의 중간에서 나온다. 끊임없이 자기 동일성 바깥으로 나가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계속해서 결여의 자리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욕망이 작용한다. 여러 관계와 만나게 되는 촉발 때문에 신체의 활동력은 증대되는데 이 활동력이 촉진하는 것은 ‘기쁨’이며 반대로 그것을 감소시켜 억제하는 것은 ‘슬픔’이다. 감정이란 이 두 신체 촉발의 관념의, 실로 다양한 변화 그 자체다. 촉발 때문에 보다 널리 퍼지고 보다 강한 힘이 구성되어 완전성에 접근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반대로 힘이 손실되고 미립자의 구성이 해체되어 보다 불완전하게 되는 것은 ‘나쁜 일’이 된다. 이렇게 해서 인간 정신은 더 완전한 관념을 갖고 자유를 만끽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란 신체가 기쁨의 정동과 함께 활동력이 증대하는 상태를 말한다. 진리란 사회에서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실용성으로 가리킨다. 누가 진리를 원하는가? 그것은 늘 힘을 원하는 자이다.
인간은 인간 바깥의 힘에게 끊임없이 농락당하면서도 그것을 제어하고 조정하며 인간의 내부로 받아들이고 또 개인이나 집단의 다양한 힘 사이에서 농락당하면서 끊임없이 쾌락과 고통, 행복과 불행으로서 타자로부터 힘을 받아들이고 또 타자를 향해 힘을 행사하는 존재다.
그러나 힘 자체와 힘의 관계는 반드시 힘으로서 의식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권리와 의무, 선과 악, 정의와 부정, 유능과 무능과 같은 ‘규범’의 개념으로 힘의 현실을 치환하여 표상한다. 이렇게 하여 힘이라는 현실을 멀리하고 간접적으로 만들며 다른 다양한 관념으로 치환한다. 우리들의 사회는 힘을 위장하고 은폐하지만, 위장이나 은폐 역시도 힘의 현상이며 힘의 작용인 것이다.
이처럼 힘은 힘과 관계한다. 힘은 언제나 복수, 다수의 힘의 장이다. 힘과 힘의 관계에서 인간의 의지가 나온다. 의지는 적어도 의지하는 힘과 의지되는 힘 두 가지를 전제로 한다. 이 의지는 결코 의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의식은 힘의 의지에서의 ‘반동(反動)’으로부터 생기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의식은 힘의 의지가 스스로를 확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아는 것보다 힘을 추구하는 의지가 우선이다. 힘의 의지에 관해서 그것이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하는 식으로 본인에게 묻게 된다. 힘에의 의지는 능동적인 힘이 스스로를 긍정하도록 촉구하고, 또한 반동적인 힘이 다른 힘을 부정하도록 촉구한다. 이 의지는 힘 자체에 내재하면서 힘을 초월해 간다.
이처럼 인간의 의식 형성 그 자체가 반동적인 힘과 깊이 결부되어 있으므로 이 반동성과 부정성은 모든 생활 전반에 미치고 있고 신체 그 자체에까지 침투해 있다.
이 힘들의 관계로 인해 인간 사회는 ‘신성동맹’ 같은 것이 암묵적으로 맺어져 있다. 신이 오면 신을 죽이는 것이다. 설령 신을 죽이고 신의 죽음을 고했다고 해도 ‘신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되면 자신이야말로 신에 걸맞다고 주장한다.
이런 반동적인 힘에 벅차서 그 부정성을 극한까지 경험하고 싶어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파괴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된다. 도박이 바로 그것이다. 매사를 도박 정신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신체가 원하는 쾌감을 극한까지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완전히 획일적으로 금전에 대한 욕망으로 움직이고 있다. 금전을 얻기 위해 인간은 많은 경우 자기 욕망의 실현을 연기해서 노동한다. ‘자아실현’, ‘타자에 의한 승인’, ‘보수’, ‘새로 맺어지는 인간관계’와 같은 욕망의 회로가 펼쳐져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각자의 욕망을 끊임없이 분열시키고 또 분열시킨다. 자본주의 안에서 모두가 정신분열증 환자다. 분열증이란 자유로운 욕망이 바깥 외부성을 향하면서 내부를 찢어놓는 분열 현상이다. 인간은 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갈수록 기계가 된다.
Ⅱ. 본론
1. 줄거리
다니엘서는 묵시문학이 어떤 신학적 배경과 경위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었나를 보여주는 책이다. 즉 어떤 역사적 신앙적 토양이면 하나님은 묵시문학 형태로 계시를 전달할 수밖에 없느냐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먼 미래에 있을 일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신앙인의 위치에서 언약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대한 딜레마와 한계가 묵시문학이 아니면 속 시원하게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언약의 해석에 있어 역사적으로 설명했을 때 주어지는 모순은 묵시 문학적으로 풀어낼 수밖에 없다. 바벨론에 포로 잡혀 온 다니엘과 세 친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 속에서 역사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는 역사 스스로가 해결될 수 없음을 보인다. 바벨론에 포로 잡혀 온 유대인들은 3방향의 신학적인 견해를 가졌다.
① 국가 이스라엘은 이제 영원히 망해 버렸다. 이 견해는 다윗 언약의 상대자로서 이스라엘이 거부되었음을 통감하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쉽게 이방화되고 만다.
② 국가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다윗 언약의 상대자를 역사 속에서 실제로 다윗 왕조를 따라 난 왕은 70년 포로기 이후 다시 약속의 땅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성전이 건축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머물러 기도에 응답하게 되리라고 믿는 자들이다.
이들만이 70년이 끝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신봉하며 철저히 다윗 언약을 유다 지파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렘 29:10).
③ 국가 이스라엘은 반드시 망해야 하고 또 망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다윗 언약에 대한 위반 때문이다. 그러나 언약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존속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가장 선지자의 신학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다윗 언약 속에서 바로 역사 속에서 심판받는 이스라엘과 구원받는 남은 자로서의 이스라엘을 구분하고 나온 결과이다.
언약적 근거로서 다윗 언약에서 과거 모세 언약과의 관계와 또 하나 장래의 영원한 언약인 멜기세덱 언약의 두 사이에서 다윗 언약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남은 자’라는 것은 국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의 소멸을 바탕으로 했을 때 그다음에 등장할 수 있는 다윗 언약의 영속성과 연관이 있는 남은 자가 될 것이다.
이 남은 자들은 국가 이스라엘의 역사 속의 의미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약의 영속성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 이스라엘의 실패에 어떤 언약적 효용성을 걸고 있는가 하면 이 자체를 갖고 여타의 이방 민족을 역사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기조로 삼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남은 자에 대한 정의는 이 속에서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다니엘서는 이스라엘을 정죄한 그 심판의 언약이 이제는 그 심판 받는 이스라엘이 또한 이방 나라에서 언약의 온전한 구현의 도구로 사용하여 자리 잡은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즉 언약의 영속성은 달리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서 성취되고 있다. 남은 자는 이런 상황에서 언약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결국 전 역사가 정죄 받는다면 남은 자는 어떻게 살아남게 되나? 여기에 대한 해답은 역사와는 무관한 자의 등장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에 대한 정죄 자체가 언약이 되는 경우란 한 가지 경우밖에 없다. 그것은 역사조차도 극복한 언약 상대자에게만 그런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포로 잡힘은 바로 그분의 영원한 언약을 이방 나라에 선포하고 정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 점이 사실이라면 분명 다윗 언약은 그 진가를 현재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어떤 상태일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다니엘서의 흐름이다.
바로 다니엘서는 과거와는 단절이요 미래와는 개방된 상태에서 완성의 형식을 가지고 현재를 사는 언약 백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기존 역사와의 단절의 이유를 밝히는 것 하나와 두 번째로 그 단절의 언약적 근거를 제공하는데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다니엘 1장에서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1:8). 그 뜻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포로 잡힘이 결코 하나님이 이방화되기를 원함이 아님을 보이는 신앙고백과 같은 것이다. 이방화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이방 나라에 잡혀 왔는가 하는 물음이 연이어 나온다. 그 답변은 역사가 누구에게 종속되었는지 그 실상을 소개하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꿈의 해석에서 알 수 있다. 마치 요셉 시대의 재판을 보는 것과 같은데 문제는 꿈의 해석자에게 역사를 해석할 권리와 주도권이 있음을 공지하는 셈이 된다.
다른 말로 해서 이스라엘 언약의 하나님만이 진정 ‘주되심’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다니엘 일행의 잡힘은 야곱 언약의 성취를 위하여 요셉이 종으로 팔리는 것에 비견할 수 있다(창세기 27:29).
여기서 역사의 주와 그리고 역사에 대해 선재 하신 인자의 관계를 찾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 증거는 2:44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직접 주가 되시겠다고 하신다. 야곱이 아니라, 야곱이 이루어야 할 언약을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서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실패한 원인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직접 주가 되시는 언약적 근거라도 있는가? 다니엘 세 친구가 들어간 풀무 불 속에서 네 번째 실존자가 나타났다(3:25). 이 사실은 선재 하신 분의 주 되심을 역사 속에 선취하는 의미에서 벌어진 사건이 된다. 즉 이스라엘의 심판 속에 그분은 동참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말은 초역사가 역사 속에 들어올 때는 심판 가운데 들어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심판은 바로 초역사가 들어오는 자리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주 되심이 심판받는 그 현장에서부터 초역사적으로 선재(先在)하신 분이 자리잡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4:25).
그 자리는 인간 왕으로 대변되는 느부갓네살 왕의 실패의 자리요 심판받을 자리이기도 하다. 그 실패한 왕을 다니엘은 짐승이라고 표현한다. 즉 실패할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쫓길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 존재이다(7~8장).
그렇다면 영원한 권세의 상징은 무엇인가? 7 때를 지나서 나오는 위인이다(4:32). 7 때란 안식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안식이 이제는 가나안 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70년간 안식을 갖는 것처럼 이제 언약의 구현체가 이방으로 진출함으로 말미암아 이방도 안식을 요구받게 되었다.
70이레 라는 안식의 기간이 요구된다(9:24-27). 여기서 안식의 세 가지 차원을 엿볼 수 있다. 남은 역사 안에서 안식의 의미는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7+62+1=70에서 7이란 질의 안식이 있으며 62라는 안식의 질이 있으며 남은 1이레 때 보여질 안식의 차원이 있다. 이 세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안식은 완성이 된다.
그런데 그 차원의 안식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고난이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안식하게 하실 때 언약적 근거가 된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고난이 곧 이방이 안식의 근거로 주어지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황폐 당하기 위한 성전 건립. 이것은 곧 아브라함의 언약 즉 만유의 주가 되는 분이 어떤 과정이 요구되느냐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중대한 사실이 드러나는데 다윗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을 위하여 성전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다윗의 왕 됨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통치자인 이스라엘 왕의 실패의 자리에 가나안 땅을 안식케 하신(이스라엘을 추방함으로써) 그분은 결코 이스라엘의 인간 왕이 아니라 다른 왕의 존재와 언약에 근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땅이 안식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왕은 이스라엘의 왕의 죄책을 일임할 필요성을 지닌 분이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일임이 되나? 그점은 지금 포로 잡혀 온 다니엘의 운명을 통해서 미리(선취되어) 나타난다. 9장에서 이미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를 보았던 다니엘은 6장 다리오 왕 때 수난을 당하게 된다. 그것은 왕 이외에 어떤 신에게든지 절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왕이 신의 위치에 놓이는 순간이다(6:7~10).
다니엘은 이 사실을 알고도 계속 전에 하던 대로 기도한다. 이것은 이런 수난만이 인자의 나라가 도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자가 인간이 차지한 왕의 자리에 앉게 됨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경우란 인간이 신만이 차지하는 자리에 앉는 건방진 순간일 것이다.
바로 아브라함 언약의 상대자로서 언약 성취의 책임을 지고 있는 인자(人子)로 오실 분은 다니엘 안에서 자신의 수난으로 인자의 나라가 현실화함을 확증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전에 다니엘의 세 친구의 수난에서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다니엘 세 친구는 그들이 알지 못한 상태에서 들어갔지만 다니엘이 사자 굴 속에 들어가는 사실로 인해 자신의 무죄함이 확인되었다고 보는 것이다(6:22). 다니엘의 무죄는 곧 인간 역사의 유죄를 나타내는 징후다. 장차 오실 나라가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인자(人子)의 나라’다.
현실에서 무죄한 자란 어떤 자를 말하는가? 그것은 장차 올 인자를 내다보면서 지금 고난 속에 뛰어들어 거기가 주님의 자리임을 확인하는 자이다. 다니엘은 성전 수난의 장래 모습을 내다보면서 그 수난에 미리 참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을 부정함으로 가나안 땅에 안식을 이루신 그 방식 그대로 이제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에도 주어지는 안식의 완성을 위한 새로운 인자의 언약 상대자로서 개입되게 된 것이다.
역사 자체를 부정하고 그 역사 속에 그 부정의 이유를 초역사의 개입에 두었을 때 이 두 가지 과정을 상징적 역사 속의 언어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역사를 뛰어넘고 역사를 지배하는 계시다. 다니엘서는 그 수난의 기간을 한 때 두 때 반 때로 잡고 있는데(12:7) 이 기간은 3년 반으로서 남은 한 이레의 반 기간의 수난이 더욱 극심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계속 수난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Ⅲ 결론
신으로부터 훔쳐낸 쾌락이 최고의 쾌락이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파멸이다. 진정 존재하는 것은 시간상 제일 뒤에 온다.
인간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정녕 죽어야 하니까(창세기 2:17) 따라서 역사는 예수님 존재에 의해서 철거당한다. 그러면 뒷면이 나타날 것이다. 인간 존재의 뒷면, 그곳은 짐승의 세계다. 거기서 소위 ‘인간성’이라는 것이 공급되어졌다.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성에 맞아 죽으셨다. 이로써 역사를 가운데 두고 보이지 않는 두 힘이 작동해 왔다.
인간은 차라리 자기가 자신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면 누구로부터 간섭받을 일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믿음의 세계가 소개된다. 짐승의 얼굴은 곧 인간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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