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두로에 대한 저주(겔26;1-60이근호140129

아빠와 함께 2014. 1. 30. 09:47

두로에 대한 저주(에스겔 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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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1-29 21:02 
두로에 대한 저주

2014년 1월 29일                            본문 말씀: 에스겔 26: 1-6

(26:1) 제십일년 어느달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6:2)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을 쳐서 이르기를 아하 좋다 만민의 문이 깨어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무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26:3)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여 바다가 그 파도로 흉용케 함 같이 열국으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26:4) 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훼파하며 그 망대를 헐 것이요 나도 티끌을 그 위에서 쓸어 버려서 말간 반석이 되게 하며

(26:5) 바다 가운데 그물 치는 곳이 되게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가 이방의 노략거리가 될 것이요

(26:6) 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사람은 과거를 떨쳐버리고 미래를 바라보며 살고 싶어합니다. 자기 땅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러한데 남의 나라 역사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마치 남의 나라의 짜투리 역사 내용 같습니다. 알고 있으나 모르고 있으나 지금 우리들의 실생활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 듯이 보입니다.

우리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사항까지 기억하기에는 우리의 두뇌 용량이 너무 모자라는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 우리가 현실도 아닌 것을 현실로 구성해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여지를 봉쇄해버린 것입니다. 두로라는 기원전 6세기 경의 지중해 연안의 도시국가에 관한 이야기가 오늘날 현대인들의 환상을 깹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현실 속에 말씀의 현실이라는 질이 다른 현실을 발아시켜서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참된 현실인가를 물으십니다. 참된 현실이 가짜 현실이 막혀 배척당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예를 들면, 로마서 8:29에 나오는 말씀이 참으로 현실일까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분명, 이 말씀이 성경에서는 현실이다 고 선언하는 식으로 들어가 있지만 우리들의 실생활에서 이 말씀의 현실성이 깊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현실도 아니면서 우리가 눈에 보이는 우리의 관심사로 인하여 현실이 조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업은 바로 인간들에 의해서 왜곡된 현실성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말씀 자체고 곧 현실인 점을 나타내려 하십니다. 즉 두로 지방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선포는 오늘날 이 시대에도 동일한 원칙으로 작용하여 우리들에게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겁니다.

두로 지역은 다윗 때에 약속의 땅에 속합니다. 이는 곧 다윗의 권세 아래에 있었다는 말이요 이는 그들 두로 사람들이 다윗이 하나님께 받은 평화의 혜택을 입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무엘하 5:11-12에 보면,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란 사람만 사는 땅이 아닙니다. 정작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사는 이방민족은 이스라엘이 받은 혜택과 선물의 그늘 안에 얌전하게 있어야 저주를 받지 않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중개하는 중보자 기능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이방민족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다윗왕이 진정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이스라엘의 왕임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멸망당하지 않았던 겁니다.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의 이러한 관계는, 야곱과 에서의 관계의 반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계시에 대해서 한 세트가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이는 모든 인류는 바로 이 세트를 이루는 원칙에 의해서 분류됩니다. 사랑받기로 작정된 민족인 야곱의 민족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선물로 받습니다. 반면에 에서로 분류되는 이스라엘 외의 모든 민족들은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공격하므로서 저주를 받아야될 운명들입니다.

그들이 이런 저주를 받는 것은 단순히 자기네들과 같은 어떤 민족을 공격하고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 민족 안에서 참 하나님이 같이 계심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출애굽 당시 바로왕은 히브리인들을 함부로 대했습니다. 이는 곧 그들의 하나님이신 언약의 하나님을 건드린 셈이 됩니다.

애굽이라는 나라는 요셉에 의해서 7년 대 흉년 가운데서 도리어 크게 부강된 나라입니다. 그러한 혜택은 요셉을 통해서 전달되었고, 요셉은 야곱이 받았던 그 야곱 언약의 실행을 위하여 동원된 기능인입니다. 요셉을 바로왕이 인정해주게 되면 애굽나라는 아무런 문제될 게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죽고 난 뒤에 후대 바로왕은 요셉의 위상을 무시했습니다. 그러자 야곱 언약에 준해서 애굽의 모든 장자들은 출애굽 과정을 통해서 모조리 몰살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과 함께 있어, 구원되지 못할 자들이 핍박하면 반드시 보복이 취해지는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은 흔히 아는 선물의 땅이 아니라 전쟁터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그 선물 받는데 있어 전쟁이라는 형식으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점은 바로 사람들이 평소에 쉽게 생각한 그 선물방식이 아닌 겁니다. 아무 것도 아니해도 주기만 하면 받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구원 전쟁에 있어 무용지물인 것을 이해하게 하는 그런 전쟁을 통해서 선물을 무상으로 받게 됩니다. 예를 들면, 도둑이 보물을 터는 현장에 수백명의 경찰들이 있음을 보고서 깜짝 놀라지만 가만히 보니 모두 마네킹인 줄 알고 안심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은 ‘붙여주는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 ‘붙여주는 전쟁’에 참전하므로서 자신들조차 하나님의 약속에 살 자격이 없는 ‘하나님의 원수’같은 심성을 가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텅텅 비워있는 곳을 접수만 하는 식으로 ‘값없이 주는 은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현실’은 허위 현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새롭고 낯선 현실을 맞이하면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다윗 당시에 두로 왕은 다윗에게 성전을 지을 수 있는 기초 자재와 기술자를 제공했습니다. 결코 이스라엘이 착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새로 만드시려는 현실을 위한 일임을 은혜의 일환인 것을 이스라엘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혜택을 공유한 두로가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합니다.

이는 곧 자신의 은혜의 끈이 끊어졌음을 의미하고 자동적으로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가 십자가 사건의 희생으로 살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왜 세상이 저주 아래 있는 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든 현실을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베푸신 은혜 중심으로 현실을 늘 새롭게 짜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1-30 08:29 
76강-에스겔 26장 1-6(두로에 대한 저주)14012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6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90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6:1-6



“제 십 일년 어느 달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을 쳐서 이르기를 아하 좋다 만민의 문이 깨어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무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여 바다가 그 파도로 흉용케 함 같이 열국으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훼파하며 그 망대를 헐 것이요 나도 티끌을 그 위에서 쓸어 버려서 말간 반석이 되게 하며 바다 가운데 그물 치는 곳이 되게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가 이방의 노략거리가 될 것이요 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성경에 나와 있는 이 말씀은 마침 현실처럼 보입니다. “마침 현실처럼”, 방금 제가 이렇게 표현했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진짜 현실로 잘 안 들어오는 이유가, 따로 우리가 나 자신을 챙기기 위한, 우리나라 잘되기 위한 나 중심의 역사, 나 중심의 현실을 따로 만들어놓았기에 에스겔 26장에서 두로가 망한다는 것이 우리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26장에서 두로가 멸망한다는 이 예언은 기껏해야 현재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나 중요하다고 생각되지요. 다른 나라에게는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지요.



한국사람 에게는 36년 동안 일제 압박의 지배를 받은 것이 굉장한 상처로 남아 있지만 가해자인 일본의 젊은이들에게는 그 일이 자기의 역사 속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 수요일 밤에 에스겔 26장을 펼쳐도 꼭 이것을 알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먼저 들지요. 이것을 보면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 또 다른 현실을 추가적으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26장의 이야기가, 우리의 현재의 역사 속에 중요한 것,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 우리나라에 중요한 것, 내 가정에 중요한 것이 따로 확고하게 있는 이상은 이 에스겔 26장의 이야기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강하게 오지요.



2월에 무슨 계획이 잡혀 있는 사람에게 에스겔 26장의 이야기가 들어오겠습니까? 이게 내 역사 속에 중요하게 자리를 잡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갈수록 성경자체가 배척당하고 외면당하는 잘못된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제가 한 예를 들겠습니다. 로마서 8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로마서 8장 29절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이지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한다는 이게 현실 맞습니까?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아,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고 계시는구나. 미리 불러주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창세전에 미리 정했기에 불러줬구나.’라는 사실을 24시간 세상에 살면서 온 몸으로 느끼고 살아가느냐는 말입니다. 아침에 눈뜨면 하루 스케줄이 있다는 말이지요. 설인데 장도 봐야 되고요. 우선 서문시장, 그 다음에 평화시장, 이렇게 계획을 잡지요. 버스는 몇 번 타고 지하철 어느 정거장에서 내리고 어느 시장 어느 마트를 들르고 ……, 그게 보통 주부의 현실이잖아요. 명절에 주부들은 그 느낌을 알잖아요.



그런데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한다는 것을 서문시장이나 마트나 평화시장에서 느끼느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8장 30절의 말씀은 현실이 아닙니까? 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이 비현실이냐 그 말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것이 진짜 현실이라고 지식이라고 믿고 싶어도 우리는 성경을 배척해요. 성경에 나오는 현실을 현실 아닌 것처럼 외면하게 만들어버리고 내가 만들어나가는 현실이 가득 들어차 있으니까 내 자리에 성경 말씀이 끼어들 자리가 별로 안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현실, 현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보기에 우리는 꿈꾸고 있는 사람, 전부 다 몽상가입니다. 에스겔 본문이야기하면서 서론 격으로 이야기하는 이유가 괜히 걱정되어서 하는 이야기에요. 두로 이야기 실컷 해 봐야 ‘돌아서면 잊어버린다.’고 제가 수백 번도 더 했거든요. 전도서 1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전도서 1장에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죽 나오면서 1장 8절에서 하는 말이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전도서 1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기껏 남는 것이 뭐냐, 명예? 영광? 아닙니다. 하나님이 고생케 하는 그 고생만 남습니다. 고생고생 하다가 여기저기 아프다가 결국 돌아가는 것, 수고만 남아요. 그럴 때 나중에 다 돌아보면서 내 평생 살아온 것이 고생만 했구나, 할 때 ‘아차, 전도서 1장 13절, 14절의 말씀이 현실이었네. 한평생 피곤하게 사는 것이 현실이 맞네. 그러니까 전도서 1장 6절과 8절과 13절과 14절만 현실이 아니고 성경전체가 현실 맞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이 현실이 맞네. 그런데 나는 왜 명절에 그것을 잊어버렸을까, 왜 명절에 그것을 놓쳤을까?’ 하는 거예요. 명절에 그것을 기억치 않았던 거예요. 다시 한 번 본문에 대해서 말하면 에스겔 26장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했습니다. “두로라는 지방에 대해서 내가 예언한다. 그 두로라는 지역은 벌을 받는다.” 그 이유는 2절에 나옵니다. 1절에서 “제 십 일 년 어느 달” 하는데 이것이 BC586년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당하는 그 해 어느 날 초 일 일에 장차의 두로에 대한 운명에 대해서 예언을 합니다. 현실입니다. “두로야 망한다.”



제가 역사가는 아니지만 어느 제국이든 국가든 결국은 망합니다. 북한도 망하고 미얀마도 망한다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가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어요. 왜 망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제가 언급할 입장이 못돼요. 왜, 제가 북한과 미얀마나 필리핀이나 베트남을 만든 게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나라, 어떤 도시국가가 망한다고 할 때 그냥 언제든 망한다는 뜻이 아니고 그 망하는 이유가 오늘날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 그 구원의 원리에 그것이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리 정하시고 부르심을 받아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냥 나는 구원 챙겼다고 입 닦고 도망칠 것이 아니라 어째서 나 같은 인간도 천국에 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보다 깊고 넓고 길게 파악을 할 필요가 있어요. 내가 구원받는데 있어서 에스겔 26장에서 두로라는 나라가 멸망했던 그 사건이 내 구원과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을 해줘야 됩니다. “목사님, 그것을 파악해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요?” 그것을 파악해서 어디에 써먹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파악하게 되면 지금 내가 현재 이 세상을 읽을 때 두로가 멸망했던 그 원리원칙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유효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기에 주님이 살아 계시고 살아 계실 때는 그냥 살아 계신 것이 아니라 활동하실 것이고 그 활동하는 원리는 두로를 멸망시킨 그 원칙에 입각했을 것이고 그 원칙과 나의 구원과 주님 살아계신 것이 하나가 된다면 현재 이 세상 돌아가는 그 내막과 비밀을 예수님 안목으로 바라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그냥 하루하루 무심코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아하, 내 현실 무너지고 주께서 만드신 현실이 가슴에 밀려오면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는 겁니다.



서론이 무지하게 길지요. 그런데 이 서론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지식이 아니라 이 현실에 적용되는 원리를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두로가 멸망해야 되는데 그 원리가 뭐냐? 3절에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라고 하는데 이 “나 주 여호와”가 등장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대로 하신다.”라고 언약의 하나님으로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일을 하실 때 반드시 언약대로 일하십니다.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것은 뭐냐? 이번에 대전수련회에서 한 것을 다시 보게 되면 언약이란 하나의 상자, 박스거든요.



그 상자를 열면 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은혜 줄자에게는 은혜가 가고 저주 받을 자에게는 저주가 가도록 조치하시는 약속”이 언약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가 남남이지 않은가, 할 텐데 남남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천국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옥이 필요하고 지옥을 설명하기 위해서 천국이 필요합니다. 지난번에 했잖아요. 에돔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필요하고 이스라엘을 설명하기 위해서 에돔이 필요하다고요. 야곱이 뭐냐를 설명하기 위해서 에서와 야곱은 둘이 붙은채로 쌍둥이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게 모든 인류의 총체적 속성을 에서와 야곱, 야곱과 에서로 설명을 해 주시려는 것이 언약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사랑받을 자에게 사랑하고 미워할 자를 미워한다는 그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두로라는 도시국가를 멸망시킴으로서 누가 이 세상에서 사랑받고 구원받을 사람인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두로 지방이 멸망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예루살렘이 멸망하니까 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2절에 “아하 좋다.”라고 되어 있어요.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을 쳐서 이르기를 아하 좋다. 만민의 문이 깨어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많은 사람들과 거래했던 라이벌 되는 상점의 단골이 끊어져서 그 단골들이 이 두로 쪽과 거래를 해서 돈을 더 잘 벌고 더 잘살게 되었으니 “아하 좋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을 짓이 됩니까? 그러니까 설명이 필요한 거예요. 이게 어떻게 저주받을 짓이냐는 말이지요. 남 못되는 것 보고 “아하 좋다.” 할 수 있는 문제지 그것을 가지고 저주를 내린다는 말이 좀 이상하지요? 두로가 어디쯤 있느냐 하면, 보통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 남쪽에서 북쪽까지 300킬로미터로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300킬로면 어느 정도 되느냐 하면, 대구에서 서울까지? 약간 더 길게 잡읍시다. 부산서 서울까지 360킬로니까 울산서 서울정도, 그 정도 되는데 대충 대구에서 서울까지라고 치고 두로는 어디쯤인가 하면, 두로가 지중해 바닷가에 있거든요, 그러니 서해안의 서산쯤의 지역에 두로라는 도시국가가 있습니다. 그 뵈니게라는 도시국가는 얼마나 잘 사는지 무역을 해서 남는 이익으로 엄청 잘사는 나라였어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장사를 해야 돈이 남지 공직생활 해서는 돈이 별로 안 남거든요. 잘사는 나라의 특징은 다 무역을 했다는 겁니다. 지하자원이 풍부해서 잘사는 것이 아니고. 동쪽제국과 서쪽의 제국과의 교역을 담당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어요.



돈 버는 것이 나쁜 것 이겠습니까마는 하나님께서 이 두로를 저주한 이유는 단 한 가지, 그 두로지방이 원래 누구 땅이었는가 하면 본래 두로의 땅이 아니고 이스라엘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무슨 원리가 거기에 해당되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대로 모든 현실이 짜이는, 약속의 저촉을 받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약속의 땅을 무슨 땅으로 바꾸는가 하면, 전쟁터로 바꿉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선입관 하나 깨고 가실게요. 보통 약속, 선물이라고 하면 그냥 가만있는데 공짜로 주는 것을 선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그 말도 맞아요. “우리가 땅이 없었는데 약속의 땅에 들어갔으니 이 모든 땅은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것이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땅을 주실 때 여호수아 사사기를 보게 되면 그냥 주지 않아요. 어떤 방식이나 수단을 통해서 공짜로 얻게 하는 겁니다. 어떤 방식을 통해서 공짜로 주신 것을 얻게 한다고 할 때 이 말이 매끄럽지 못하지요? 공짜로 주면 그냥 공짜로 주던지, 어떤 방식은 빼든지, 그래야 하는데 제가 지금 뭐라고 했느냐 하면, 어떤 방식을 통해서 공짜가 공짜임을 깨닫는 방식으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 방식이 뭐냐, 그 방식이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준비된 선물을 받는데 있어서 우리는 줬다, 고맙습니다, 받으면 그것은 아무런 전쟁도 일어나지 않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전쟁터로 만들었어요. 전쟁터로 만드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상하다. 공짜로 준다고 했는데.’ 공짜로 준다고 했는데 막상 상황을 보니 공짜로 안줄 상황이에요. 자기는 메뚜기 같고 상대는 장대 같고, 이것은 살라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못 산다는 이야기인지, 공짜인지 아닌지는 둘째문제가 땅덩이 하나 얻을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게 한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흔히 영화에도 그런 것이 있는데요. 어떤 도둑놈이 비밀 지하금고를 털려고 하는데 사전정보에 의하면 거기에는 지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텅 비었다고 알고 막상 마지막 금고 방을 들어가 보니 경찰이 가득한 거예요. 그래서 도둑이 정보를 준 사람한테 “너 거짓말했지? 여기 경찰이 우글거린다.” 하니까 그 정보를 준 사람이 하는 말, “내가 가스를 먹여서 다 자고 있을 것이다.” 해서 그 이야기를 듣고 가보니까 분명히 경찰은 있는데 다 허수아비 같아요. 그래서 도둑놈이 경찰을 헤치고 들어가서 금고를 털어서 보물을 가지고 나왔을 때 비로소 자기는 뭘 느끼는가? 비로소 아무 대가없이 공짜로 선물을 얻었다는 느낌을 받겠지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는 그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있어도 구원은 그냥 주어지게 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구원은 주어진다는 이 문장, 이 이야기가 실제로 경험하지도 않았으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제한된 범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오해를 한 거지요.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기를 “그 땅은 너희에게 그냥 준다.”고 하니까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방식으로 그냥 주는지 알고 가보니까 적들, 그것도 만만한 적들이 아니고 강대한 적들이 있어서 난색을 표한 거예요.



“여호수아님, 못 이깁니다. 안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알아요. 여호수아가 공격하기 전에 하나님의 천사가 자기와 함께 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천사에게 굴복했지요. 이번 전쟁은 그냥 이기는 전쟁이라는 것. 그것을 가지고 신명기나 사사기에서 “붙여주시는 전쟁”이라고 하는 겁니다. 붙여주시는 전쟁, 구약의 많은 중요한 용어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아주 중요한 용어중의 하나가 ‘붙여주시는 전쟁’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조용하게 들어가서 사는 것이 아니고 전쟁이라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그 전쟁방식은 뭐냐? 붙여주시는 방식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통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방식을 사용하느냐 하면,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약속 안에서 살아야 하기에 자기가 애굽에서 가졌던 그 사고방식을 교체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내가 알던 공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건재하고 있고, 그냥 옛 마음 그대로 있고 거기에 보태는 공짜가 아니라 그 공짜로 인하여 내가 알고 있던 내 더러운 마음이 죄임을, 이런 마음으로는 도저히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이 다시 한 번 까발려지는 가운데서 공짜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모든 일을 주께서 선물로 실시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실행하는 가운데서 ‘나는 정말 아무리 촐랑대고 까불어도 죄만 나오는 것, 전혀 구원될 수도 없고 구원될 자격도 없고 지옥가야 마땅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고 또 느끼면서 은혜를 은혜로 받을 수 있는 품성,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두로 지방이 이스라엘과 관계없다고 했지요? 관계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5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 왕 때입니다. 다윗 왕 때 두로와 이스라엘이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사무엘하 5장 11절, 1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저희가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것과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아니라.”



이미 두로지방은 그러니까 서산지방은 대구지방, 예루살렘의 다윗왕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배를 받으면서도 평화롭게 지배를 받은 이유가 다윗이 보통 왕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직접 왕으로 삼으신,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의 택하신 왕이라는 것을 두로지방 왕이 인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혜택을 입고 있엇던 겁니다. 다윗 왕의 은총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는 약속의 땅의 다른 영토의 나라까지 이미 그 사랑의 혜택을 입은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다윗 덕분에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가지면서 “고맙습니다. 여호와하나님께 고맙습니다. 그리고 다윗왕은 진짜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왕입니다.” 해서 “이번에 성전 짓는데 좀 보태겠습니다.” 해서 나무도 주고 석수도 제공하고 목수도 주고, 그래서 그들이 솔로몬 성전을 짓는데 막대한 기여를 하게 되었고 그 도시국가가 바로 두로입니다. 약속의 땅은 전쟁터라고 했지요. 다윗 때는 전쟁이 이미 마감되었습니다. 평화롭습니다.



평화롭다는 말이 뭐냐 하면, 다윗 왕이 갖고 있던 하나님의 그 은혜의 혜택에 동참되고 있었던 겁니다. 좀 어려우면 쉬운 예를 들게요. 애굽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애굽의 주변 나라에 7년 흉년이 오도록 했을 때 애굽만 넉넉한 양식이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 덕분입니까? 바로 덕분 아닙니다. 요셉 덕분입니다. 요셉은 누구 덕분입니까? 야곱이 받았던 하나님의 언약덕분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덕분에 애굽의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고 바로는 그 양식 팔아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20퍼센트의 세금을 떼면서 큰 부자가 된 겁니다. 지금 2014년도의 대한민국, 누구덕분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덕분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오늘날 요셉 같은 성도뿐이에요. 에스겔뿐이고 여호수아뿐이고 다윗뿐이에요. 지금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어서 기독교를 핍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군데군데 핍박을 할 거예요. 지금도 핍박하고 있고 복음을 교회가 거부하고 있습니다. 바로 왕이 언제 벌을 받느냐 하면 바로 요셉을 잊어버릴 때입니다. 요셉을 잊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을 걷어찬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바로와 전 애굽의 장자는 다 죽어버리지요. 설교 처음에 이야기한 현실, 이게 바로 현실입니다. “명절이다. 장보자, 마트가자.”라고 하면서 우리가 뭘 놓치느냐 하면, 두로를 놓치고 출애굽을 놓치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는 그것을 다 놓쳐버립니다. 그저 내 노동, 내 수고 덕분에 이만큼 가졌다, 라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잠시 끊어져 버리면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 독자적인 존재가 됩니다. 나만 잘살면 돼요. 나만 잘 살면 될 때 그 상황이 오늘 에스겔 26장에 나오는 도시국가 두로의 심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멸망할 때 자기가 약속의 땅에 있으면서 예루살렘 때문에 그만큼 평화롭고 재산 불리고 부자 되었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아하, 잘 됐다! 꼴좋다. 덕분에 우리가 득 좀 보자.”라고 한 거예요. 내용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과 두로 도시국가의 관련성, 이게 현실이에요. 오늘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그 피 덕분에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현실이 성경에 있는데 그 성경을 안보고 덮어버리고 설교도 안 들어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남이야 죽든 말든 내 고생 덕분에 내가 살았다는 이 독자적인 자기영역을 그냥 고수하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저주받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놓쳐버리면 자기가 잘난 존재가 되어버려요.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그 과정 속에서 ‘아, 죄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산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뭔가 우리가 성경 잊고 말씀을 잊고 떠나고 외면해버리면 ‘누가 잘났는지 한 번 해 봐?’ 이렇게 독자적으로 나와 버려요. 그것 때문에 예루살렘과 관련된 이 두로의 멸망 예언들이 에스겔 26장에 나와 있는 겁니다. 이게 남의 역사가 아니고 현재 우리의 역사입니다.



자,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 두로 지방을 쓸어버린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누굴 들어서 쓸어버리는가? 그 나라를 바벨론으로 보는 겁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훼파하며 그 망대를 헐 것이요.” 여기서 그들이 누구냐 하면, 예루살렘을 공격했던 그 제국, 바벨론 제국으로 하여금 두로라는 도시국가를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그 뒤에 헬라,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두로 지방을 포위해서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지요. 이렇게 바벨론을 통해서 멸망을 시킬 때 그 의미는 뭐냐? 하나님 뜻은 딱 둘로 나누자는 거예요.



예루살렘이냐, 아니면 바벨론이냐? 세상을 야곱이냐, 에서냐, 이렇게 둘로 나누듯이 예루살렘 말고 다른 나라 말고 숱한 나라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깔끔하게 정리해요. 사랑받는 나라는 이스라엘, 그리고 그 외는 다 미움 받는 나라, 그 미움 받는 나라의 대표 격이 바벨론, 그래서 이 세상은 전쟁터. 미움 받는 쪽이 사랑받는 쪽을 공격케 함으로써 그 사랑받는 쪽에 하나님이 미리 와버리면 이것은 예루살렘을 친 것이 아니고 악마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친 것으로 모든 배치를 몰아세운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장치를 그렇게 한 겁니다.



네가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공격한 것으로 진행되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될 이유가 남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독자적인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공격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너는 남들처럼 독자적으로 살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된다.”고 하시는 이유가 거기 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하나의 기능인으로 살아야지 남들처럼 나도 예수 믿고 독자적으로 성공 했니, 출세했느니, 우리 교회 부흥되었다느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예를 오늘 에스겔 26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바벨론은 어떻게 되고 두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은 십자가 중심, 아직도 변치 않고 여전한데 우리는 십자가 알았다고 다시 세상 적으로 얼굴 돌렸습니다. 세상 속에서 피어나는 십자가의 희생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