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로의 운명
2014년 2월 5일 본문 말씀: 에스겔 27:1-4
(27: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7:2) 인자야 너는 두로를 위하여 애가를 지으라
(27:3) 너는 두로를 향하여 이르기를 바다 어귀에 거하여 여러 섬 백성과 통상하는 자여 주 여호와의 말씀에 두로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 하였도다
(27:4) 네 지경이 바다 가운데 있음이여 너를 지은 자가 네 아름다움을 온전케 하였도다
두로라는 것은 지명입니다. 특정 인물 이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마치 산 사람을 대하듯이 두로라는 도시를 대하십니다. 이점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여러 가지로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도시에는 인간들이 거주하기에 인간 집합을 총괄해서 그렇게 상징화시켜서 부르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허상이고 실상은 오직 그 도시 안에서 사는 주민들이라고 여깁니다. 즉 실제로 있는 인간만이 실체이며 그 외의 것은 인간을 대하듯이 대할 수 없는 선입견이 우리 인간에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3:9에서의 세례 요한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평소를 돌을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인간과 동등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돌을 수집하려 다니는 사람이라도 돌을 인격자로 볼 자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요 돌은 돌일 따름입니다. 이처럼 돌과 인간이 같은 부류가 될 수 없다는 이 인식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해석이 틀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겠다는 의도는, 결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그 의도가 같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겁니다. 아무리 성경을 보려고 해도 성경 쪽으로 자신의 뜻을 보이게 하지 아니하면 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성경이란 문자를 적어 모아 놓은 책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담겨 있는 뜻을 파악하는 것은 그 성경을 보는 인간 자신들의 자질과 능력에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류는 오늘 본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로라는 옛적 도시 국가의 멸망과 관한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어떤 교훈을 뽑아내려고 하면 이런 겁니다. “두로 도시는 망했다. 분명 하나님에게 잘못한 게 있어 멸망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두로 지방은 아주 멋있게, 뛰어나게 조성시켜주었지만 두로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방자하게 굴다가 망했다. 따라서 이 교훈을 본받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방자하게 굴지 말자”는 식입니다.
과연 이런 해석이 합당한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닙니다.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나쁜 짓해서 멸망했기에, 만약에 나쁜 짓을 아니했으면 두로 지방은 영원히 번창할 것이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한 것은 나쁜 짓을 해서 멸망했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바로 이런 의식에는 뭐가 깔려있느냐 하면 평소에 자기 자신을 독자적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욥의 친구를 생각해 봅시다. 욥이 고난 받고 있으니 욥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는 분명 이런 혹독한 벌을 받을 만큼 죄를 지은 것이 있다”는 겁니다.
과연 욥 친구의 이러한 견해가 진정 하나님의 뜻이었던가요 아니면 반대였습니까? 반대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잘못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욥의 고난과 엮여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가질 자유나 권리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데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독자성은 모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왜곡된 견해를 드러냅니다.
두로 도시의 멸망은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멸망’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멸망되어야 하기 때문에 멸망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에서 ‘우리들 중에 누가 높으냐’에 관한 문제로 시비가 일어났습니다. 즉 누가 더 착하고 누가 악하냐를 놓고 같은 어른 인간들끼리 논쟁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난데없이 어린아이를 하나를 데리고 나옵니다.
이 의미를 놓치면 아니됩니다. 누가 더 악해서 벌을 더 받고 누가 더 착해서 벌을 적게 받는다고 여기는 그 마음 자체가 성경이 보여주고자 하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해석하고 싶은대로 해석한 결과일 뿐입니다. 두로 지방에 관한 멸망 소식은 정작 두로 지방 사람들 당사자들의 의견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제 3자처럼 간주되는 유다 백성들의 의견을 자극합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이미 망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네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망했다는 식으로 자신들을 이해하게 되면, 앞으로 잘하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자기 희망만 발산될 뿐입니다. 유다가 망하는 것은 당연히 망해야 하기 때문에 망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인간도 그런 생각을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실체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입니다. 허망한 존재이며 평생 하나님에게 의미 있는 역할만 당당할 뿐입니다. 로마서 5:14에 보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되면 의미없는 존재에서 의미있는 존재로 탈바꿈되리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상 실체는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나머지는 결국 다 안개가 되고, 먼지가 되어 서라져야 될 임시적 존재에 불과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요한복음 10:30에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인간들은 이런 말을 하지를 못합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가 아니라 따로따로 분리된 채 각자 독자적인 존재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의 그림자로 보십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게 됩니다.
하나는 멸망해야만 하는 기능과 하나는 구원되어야 될 기능, 말입니다. 마태복음 21:19-20에 보면, 무화과 나무가 졸지에 말라비틀어지는 저주를 받는 대목이 나옵니다. 과수나무나 제철이 아닐 때는 열매맺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 철도 아닌데 과실이 맺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무화과 나무를 저주했다면 여기에 어떤 원리가 적용된 겁니까?
만약이 이 원칙이 우리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면, 아무런 잘못도 없이 저주받는 자가 발생한다는 경우가 일어납니다. 자, 이게 과연 불합리합니까? 자기 자신도 그저 그림자임을 아는 자에게는 감사할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존재임을 늘 생각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