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감사와 찬양은 행위가 아니다(박윤진)

아빠와 함께 2013. 1. 27. 20:30

시편은 하나님의 놀라운 성실하심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주체로 하여 성취하신 의(義)는 성도에게 두 가지 방향성을 만들어 냅니다. 그 두 가지 방향성의 이름은 각각 은혜와 감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성도를 몸으로 비유할 때(이것은 따로 존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머리에서 몸쪽으로 어린양의 피가 흐를 때 일어나는 방향성의 이름이 바로 은혜입니다. 

즉, 구원에 있어서 내가 그 피를 끌어당길 만한 어떤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나는 아무 한 것도 없이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자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구원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머리에서 몸쪽으로 구원의 은혜가 도달되었을 때, 몸 쪽에서 머리 방향으로 올라가는 방향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은혜와 짝을 이루는 관계는 바로 감사라는 의미입니다. 은혜를 내 몫으로 여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무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꼭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러한 감사는 은혜와 연결된 자연스러운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감사하라는 것이 법이 될 수 없으므로, 

성도라면 반드시 감사하는 행위가 있어야 하고, 그러한 행위가 없다면 성도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감사하는 행위 혹은 감사하지 않는 행위를 놓고 성도에게 도달된 은혜의 존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입은 성도는 이미 감사의 바다에 빠져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시편입니다. 시편 기자처럼 감사하지 못하고 찬양하지 못하면 무엇가 부족하고 열등한 성도일 수 밖에 없다거나, 아예 성도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이미 모든 감사함과 모든 찬양을 받고도 남음이 있는 완전한 언약 성취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감사와 찬양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감사와 찬양은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이 행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많이 기록된 "감사하라", "찬양하라"라는 말씀이 진정으로 이야기 하시고자 하는 바는, 그토록 엄청난 은혜를 입은 성도가 과연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감사와 찬양이 가능할까를 반문하는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적으면 이렇습니다.

"십자가 은혜가 그렇게 감사해?, 찬양할 만 해? 그래 한 번 감사와 찬양을 해 봐라. 시편처럼 해 봐라. 과연 이런 감사와 찬양이 네 육체에서 나올 수 있나 어디 두고 보자!!!"

즉, 감사와 찬양 조차 나를 중심으로 계산된 행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천명하시는 것이 바로 시편의 감사와 찬양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감사와 찬양의 말씀들은 다시 십자가 지신 어린 양에게 모든 공로를 돌리게 되어 있는 '예수 안'이라는 집의 구조인 것입니다.


당연히 감사와 찬양으로 응답해야 할 은혜의 속성 안에서도 이 육체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감사와 찬양을 시편을 통해 보여주시면서 

다시 한번 깊고 넓고 높고 크신 십자가 은혜의 든든한 피 장막을 재삼 확인토록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의 감사와 찬양을 

은혜의 성령의 법이 아닌,  행위의 법으로 이해하려는 아담의 속성이 어떻게 감사와 찬양의 도구로 사용되는 지는 오직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열심내어 달성해야 할 목표치가 아닙니다.

감사와 찬양까지도 우리를 죄 아래 가두워 두시는데 사용하시는 것은 

그 죄를 이기신 진정한 용사,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문들을 들어 올렸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분께만 모든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 정말 옳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