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상한심령과 찬양(박윤진)

아빠와 함께 2013. 1. 27. 20:40

시편 51편에 등장하는 '상한 심령'을 흔히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다윗의 반성 또는 후회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하고 있는 상한 심령이란 인간의 축 처진 심리상태나 슬픈 마음, 후회와 반성 따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상한 심령은 인간쪽에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상한 심령이란 언약이 언약과 관계된 인물들에게 준 상처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언약, 즉 영이신 말씀이 육으로 표상될 때, 육이 겪게 되는 육됨 자체에서 오는 한계상황을 의미합니다. 언약이 기피하고 거부해야 마땅한 죄인이나, 언약의 강권으로 인해 거룩을 드러내야 하는 도구로써 사용받는 인격체가 겪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인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서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으며, 많은 고난과 역경을 뚫고 왕의 자리까지 올라간 위인 정도로 이해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다윗은 스스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써 율법상 완벽한 인물이 되길 소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왕답게 행동하고 왕답게 거룩한 인물이 되도록 노력하면서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이 쌓아올린 거룩의 효험을 기대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약의 상대방으로 낙점된 이상 다윗은 다윗언약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는 입장에 서고 만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다윗언약을 홀로 진행시키고 계신 여호와가 왕이심을 자신의 육으로 드러낼 수 밖에 없도록 여호와께 붙잡힌 바 된 것을 그대로 쏟아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다윗은 간음이라는 행위 뿐만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죄악의 덩어리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죄는 이미 자신의 모태를 물들이고 있었으며, 자신은 그 죄악된 모태를 빌려나온 죄인일 뿐입니다. 자신의 어떤 행위도 항상 주 앞에서는 죄일 수 밖에 없으며, 주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판단하시든지 그것은 항상 의롭고 온전한 판단입니다. 왜냐하면 언약(말씀, 영)이 다윗 자신이 살아있음 자체가 죄임을 자신의 육과 대조시키면서 계속적으로 죽음의 자리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한 심령을 단순하게 인간의 심리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언약이 왜 흙과 같은 존재인 죄인의 심리상태를 주목해야 합니까? 그가 왕이던, 황제이던, 그 누구이던 간에, 그가 아무리 철저한 자기반성을 시도하고 철저하게 깨우쳤다 하더라도 언약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언약의 상대는 오직 언약에 의해서만 정해지며, 그렇게 언약에게 지목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은 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한 심령이란 언약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을 이렇게 이해할 때, 즉, 영이신 말씀이 육의 정체를 밝히 드러내는 것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상한 심령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그대로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육이 그 몸뚱아리로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을 수 밖에 없는 죄악의 산물이다라는 '버려짐'이 바로 상한 심령인 것입니다. 이러한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자신이 발견되는 곳이 바로 십자가이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신의 거룩만을 고집하시면서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시는 공간이 교회이며, 그 교회 안에서 제물이 되어 제사장에게 죽은 자로 난도질 당하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성도의 찬양이란 바로 이 때,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으로 그저 버려져야 하는 것이 백만번, 천만번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그 귀한 보혈의 피를 아낌없이 우리 머리 위로 쏟아 붓고 계신 것이 날마다 보이는 것입니다. 이미 죄의 삯을 모두 완불하시고 홀로 세상의 모든 저주와 고난을 짊어지고 계신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온 몸으로 받아내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 날마다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그대로 성도에게 적용하고 계신 것이 눈 앞에 똑똑히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눈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 때, 나오는 비명소리, 감사의 통곡소리, 예수 십자가만 영광받아 마땅하다는 성령의 울림이 성도 안에 메아리치는 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성도에게 적용될 때마다, 상한 심령과 찬양은 그렇게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돌아왔을 때, 다윗이 찬양했던 모습 역시 언약이, 말씀이 스스로 역사하는 것을 목격한 것에 관한 기쁨이 다윗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다윗이라는 인간의 흥겨움에 초점을 맞추면 안됩니다. 왕이라는 신분과 속살이 보이는 광경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로잡힌 자와 그 언약이 스스로 적군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기쁨은 너무도 잘 어울립니다. 그가 왕이건 거지이건 언약은 인간의 정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인간 역시 자신의 모습에는 관심을 둘 형편이 못됩니다. 속살이 보이는 것조차 모르고 춤을 추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상한 심령이던, 찬양이던 그것을 주도하시는 분은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인간적인 흥겨움과 왕이라는 체면과의 무게달기로 판단한다면 그는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다윗은 이런 인간을 저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언약이 투사된 사람이니까요. 

이렇듯 상한심령과 찬양은 모두 언약 중심입니다. 인간의 감정표출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언약에 의해 육을 알게 된 상한 심령이 자신의 한계를 뚫고 외부에서 들어오신 복음의 능력에 매달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터져나오는 것이 찬양이라고 할 때, 인간 쪽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연습하고 노력하고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가 찬양이라고 부른 것들과 소위 CCM이라는 하는 것들을 찬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그렇게 애절하게 전달하고 있는 메세지(가사)를 단 몇 분만 투자해서 살펴보시면, 과연 위에서 제가 말씀드린 '내가 버림받고 부인되는' 그런 상한 심령과 그것을 홀로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의심이 드실 것입니다. 나를 기쁘게 하시는 주님, 나를 강하게 하시는 예수님, 나를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 인간에게 참 유용한 좋으신 하나님을 염불하듯이 읊조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곧 나를 찬양하는 것이요, 결코 나 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지금도 나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담보하기 위해, 각종 문화권의 예배형식을 끌고들어와서, 열린예배, 영성예배, 침묵예배 등의 이름으로 가장한 거짓예배와 클래식, 팝, 국악 등 각종 음악으로 치장해서 찬양이라고 강제로 이름붙여진 거짓 찬양 사이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유일한 예배인 십자가 예배를 묵묵히 드리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그 십자가의 능력에 사로잡혀 모든 영광을 어린 양께 올릴 수 있도록 성도들을 주관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