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에 흑암에 권세 아래 있었다. 흑암의 권세라는 말은 우리가 종이었음을 알려 준다. 즉 흑암이 인간에게 가라, 와라 명령할 힘이 있었을 뿐이고, 인간은 흑암을 흑암으로 알지도 못한 채 흑암 자체로 존재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져내셨다.(골 1:13) 건져내심은 우리의 어떠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건져내신 하나님의 어떠함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건져내심만이 구원의 길이 되었다는 말은 흑암의 권세가 인간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알려준다.
중심은 성도를 건져내신 하나님이지 건짐을 당한 성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건져내심이 아니면 흑암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본질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흑암에서 옮겨놓으신 장소이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는 어떤 곳일까? 하늘에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에 유람선이 떠있고 저 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넘치는 곳일까?
아니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는 단 하나의 힘이 권세 있게 작용하는 영역이다. 그 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이라는 이름의 힘이다. 그래서 골 1:14은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성도의 변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의 결과인 죄사함으로 아주 명쾌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죄사함이다. 그 아들의 나라는 바로 성도를 구속하는 죄사함의 능력이 충만한 곳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이루셨다. 그 온전함이 바로 십자가이다. 사형 도구였던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사람은 한 두 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예수가 누구이길래 그의 피가 이 세상 모든 죄를 해결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그럼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보자. 과연 누가 십자가를 지셨는가 알아보자는 것이다. 그 십자가가 왜 죄사함의 충만함을 성도에게 지속적으로 부어줄 수 있는가 보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다.(15절)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다. 그런데 그가 보이도록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 이러한 관계를 아들이라고 한다. 그 아들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우주 만물에게 드러내셨다.
즉 온 우주는 그의 아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해서만 우주가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예수는 또 누구신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다.(15절) 이 말씀의 의미는 16절 하반절에 정확히 풀이되어있다.
모든 만물이 모든 정사와 권세들이 다, 하나도 빠짐없이, 온통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고 예수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이다.(16절) 결국 예수는 만물보다 먼저 계셨으며 만물이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17절)
창세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타락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히든 카드가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창조물, 그러니까, 해와 달, 바다와 땅, 모든 동식물 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타락케 한 사단까지도
모두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위한 소품들인 셈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분이다.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면 그 안에 들어가고 예수를 초청하면 그가 우리 안에 들어오는 그렇게 만만한 분이 아니다. 우리의 생노병사? 모두 그의 영광을 위한 사사로운 일이다. 나의 행복, 나의 국가, 나의 가족, 나의 목숨까지도 사사롭고 미미하여 성경이 인간을 향한 불렀던 구더기, 지렁이, 안개, 들꽃이라는 표현조차 아깝다.
바로 그러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몸을 교회라고 하신다. 친히 예수께서 직접 머리되시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가 교회의 머리되셨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머리가 혼자 살 수 없으니까 교회가 꼭 필요하다는 의미인가? 인간의 조직인 교회와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겠다는 의미인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다. 결핍이라는 것이 전혀 없으신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그가 직접 교회라는 몸의 머리가 되시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근본인 것임을 알려 주시겠다는 의미이다.(18절)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근본이라는 말씀은 교회가 다름 아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로서 만물의 으뜸 되신 분의 통치 하에 있다는 것이다. 왜 교회의 근본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안에서 찾아야 하느냐 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언약을 온전히 이루신 후 부활하셔서 그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적용받고 있는 대상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간판에 교회라고 적혀있거나, 신학대학교 나온 면허증있는 목사에 의해 운영되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속으로 건진 바 되어 그가 적용하고 계신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대상만을 그 이름하여 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겨서 되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그리스도 예수여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가 머리됨이 교회의 근본이며 그 교회의 근본은 죽음을 이기신 십자가의 능력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시는 유일한 근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안"을 고집하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이 근본이 된 곳, 그곳이 바로 예수 안이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만 화평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20절은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골 1:20)
그럼, 이제 하나님과 성도가 화평케 되었으니 과거는 잊어버려야 할까? 십자가는 어두운 과거이니까 이제 성령 받은 성도의 밝은 미래만 이야기해야 할까? 이제 성도는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시기 때문에(22절) 성도에게 아주 조금만 집중하면 안될까? 안된다! 골로새서는 성도가 누구였는가를 또 다시 언급한다. 성도는 하나님과 마음으로 원수였다(21절). 13절의 흑암의 권세라는 말씀에 이어 마음으로 하나님의 원수라고 다시 언급하는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성도와 화목하고 계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 때문임을 다시한번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의 원수에서 거룩하고 무흠하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오직 단 하나 만을 고백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입니다‘라는 내용의 고백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이 믿음이며 터 위에 굳게 서게 하는 것이며 바로 우리가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게 되는 유일한 능력이다.(23절)
이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무슨 의미인지가 분명해 진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교회를 거룩하고 무흠하고 책망 할 것 없는 자로 굳건케 하시기 위한 것이다. 즉, 육체로 죽으신 십자가의 피를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적용시키고 계신 십자가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화평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십자가 지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이다.
교회란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 즉 교회의 머리의 고난이 온 몸에 충만하여 창조의 화평을 이루시는 그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오해의 소지가 많은) '남은 고난'이라는 표현을 써야 할까? 남았다는 말씀은 십자가 사역의 보충이나 보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완성된 십자가 사역의 지속적인 적용의 차원에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에 대하여 지금도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계신 분량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십자가 사역을 보충하기 위한 사도의 단독 임무가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남겨진 사명은 더더욱 아니다. 지금도 교회의 머리로써 이미 완성된 십자가의 피를 적용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활동이다.
사도 바울의 육체는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충만하게 채워진다. 이것이 비밀로써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만 밝히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이다.(26절) 비밀은 바로 지금도 성도 안에서 십자가 피를 흘리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27절) 이 분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영광의 소망이다.(27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28절)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십자가 사건의 적용이 이루어지고 있는 대상으로서의 성도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위해서 자신 속에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따라 수고하였다.(29절)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교회의 근본이며 만물의 으뜸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은 자신의 육체에 충만하게 채워지고 있는 십자가의 피로부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활동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함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골로새서 1:28), 죄를 짓지 않는 하나님께 난 자(요한1서 3:9)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과 똑 같은 말씀이다.(롬 8:1) 위의 말씀들은 모두 한 결 같이 십자가의 능력을 지금도 성도에게 적용시키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의 결과물들이다.
가끔 이런 말씀들을 근거로 성화니 성도의 의무와 책임이니 교회의 남겨진 사명이니 하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모든 것은 머리의 통치아래에 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께서 십자가 지셨다. 머리는 십자가의 피로 흠뻑 젖어 있는데 몸이 다른 영광과 다른 책임과 다른 사명을 외치고 있다면 머리가 다른 것이다. 그냥 머리가 다를 뿐 다른 이유가 없다. 개혁이나 설득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저 머리되신 분이 알아서 하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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