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생명나무 080217

아빠와 함께 2014. 2. 16. 10:20

본문:요한계시록22장18-21절
제목:
생명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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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08-02-17 13:13 
생명나무

2008년 2월 24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2:18-22

(계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계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 본문에 ‘생명나무’라든지, ‘속히 오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용어들을 인간들이 내세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세웠습니다. 우리 중에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없습니다. 그만큼 이런 소식들은 인간들 마음으로 소용없다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생명나무’나 ‘주께서 속히 오심’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깁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자기를 위한 삶’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삽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바깥의 세계가 따로 있음도 모르고 그리고 자기 바깥의 세계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용어들이나 단어들은 우리 바깥을 장식하는 용어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세계로 둘러싸여 삽니다. 생명나무에 대해서 몰라도 되는 것도 아니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몰라도 되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모르고 우리는 살아도 헛 산 것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무관심한 생명나무나 선악과를 가지고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다루시겠다고 나서십니다. 우리가 이런 것에 대해서 몰라도 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모르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실 자체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현실보다 넓은 세상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구조에 맞추어서 일하십니다.

에덴동산에 두 그루의 중요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한 나무는 인간이 손에 댄 뒤로부터 사라진 선악 나무요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입니다. 이 두 나무가 왜 있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이 나무에 붙어 있는 이름으로 파악이 됩니다. 생명나무는 생명을 위해서 있고, 선악과가 달린 나무는 선악을 위하여 있는 겁니다. 이 선악 나무는 ‘누가 심판의 대상이 되는 악’의 편에 선 자들이냐를 판별해 내는 나무입니다.
인간들은 선악과 과실을 먹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볼 때 더 이상 선과 악의 기준으로부터 평가받는 것 자체를 제거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기대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즉 선과 악의 기준은 정하는데 인간들이 자기 선에서 결정짓는 권한을 갖는 식이 될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생명나무 과실을 떠먹으면 이러한 권한이 영원히 존속할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실을 따먹은 인간을 생명나무로부터 치단시키므로서 더 이상 인간에게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결정적 권한이 없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인간들로부터 하여금 저주스러운 환경으로 내쫓아내심으로서 그들이 그 세계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간에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에 불과함을 분명히 하십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이미 죽은 자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산 자’로서 인정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과연 죽었다면 그 가치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지만 만약 산 자라면 살아있을 가치가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이유도 없이 자신을 가치있게 봅니다. 하지만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가치있게 여긴다는 것은 결국 자기 외의 가치를 무시하고 미워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실시하는 모든 일을 자기보다 가치없게 여기고 결국에는 미워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소원은 오직 자기가 잘 되는 것, 이것뿐입니다. 즉 선악과 따먹은 주제에 영원히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주님의 고통과 슬픔을 모릅니다. 주님의 아품도 모릅니다. 오로지 자기 성공이 주된 관심사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들어오면서 하나님은 빈번하게 ‘사단’,즉 ‘악마’에 대해서 많이 언급합니다.

사단은 인간은 죽은 존재도 아니라 ‘살아 있다’고 부추겨줍니다. 그리고 그러니 더 살아 남아야 진리라고 가르쳐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기가 무서워서 악마의 종이된 채 살아간다는 말이 맞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아파하는 것이 두렵습니까? 십자가 피 복음이 안 알려지는 것을 걱정합니까? 아닙니다.

가정이 풍지박산 나고 사업에 실패하고 울화병이 나고, 불치병에 걸리고, 가정이 불화하고 성적이 내려가고, 장래가 불분명한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런 것을 사전에 방비하고자 종교 단체 안에서 몸부림칩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 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인간을 다루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은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뭘해도 이런 평가와 이런 지적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있으니 더 살았다고 여기고, 주님께서는 인간이 죽어있으니 더 죽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라는 이름의 단체에 가입하여 살아 있는 자기를 어떻게하든 더 살려내어보겠다고 나섭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자기를 위한’, 자신의 몸부림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하자 그 두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듭니다. 진작 자기에게 왔으면 오빠를 살릴 수 있었노라고 예수님의 처신에 항의합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게 우십니다.

이런 불신앙이 안타까워서, 그리고 이런 자기 밖에 모르는 것이 안타까워서 우셨습니다. 평소에 예수님께서 그토록 영생에 대해서 설교하겠지만 건성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악마에 휘돌려 있는 우리들의 믿음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그저 살고자하는 본능만 나올 뿐입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희안하게도 하늘의 별을 따라 왔다고 말합니다. 물리적인 공간 배치 안에서도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하지만 그들 동방박사는 그렇게 해서 비로소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서 믿은 자는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믿음은 예수님께서 친히 활동하심을 알려주기 위한 선물로 우리에게 생긴 현상입니다. 모두들 이 땅에서 자기 일에만 분주하게 움직일 때, “어디 소나기가 오려나?”하면서 하늘을 쳐다보게 되는 이 마음은 오직 샛별의 활동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란 곧 우리보고 “너희들 가만히 있어 내가 내려갈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즉 우리 쪽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움직여서 세상만사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소나기가 오듯이 약속 성취의 징후를 느끼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소에 예수님의 고통에 무관심한 삶을 용서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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