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행함 2008년 2월 3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2:10-15
(계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계 22: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계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오늘 말씀을 단박하게 대하면, 우리 인간은 위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사실 평소에 사람들은 옆만 보고 삽니다. 옆으로 확장해가고 발달해 가는 이 세상을 위하여 그는 실력을 키우기 위해 자기 내부를 파고 또 파는 생활을 합니다. 위에서 누가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안하고 삽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 세계에는 뚜껑이 없습니다. 훤하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사람들은 옆으로 퍼지는 세계에서 성공하고자 자신의 것을 개발하고 파들어가 보지만 아무리 자신의 것을 파도 ‘나의 것’이라는 밑바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밑바닥 자체가 없습니다.
뻥 뚫려져 있습니다. 거기서 바람이 솔솔 들어옵니다. 욕망의 바람이 나의 존재 기반으로부터 주입이 되고 그 욕망과 더불어 죽음의 세력이 나의 바닥을 통해서 침투하여 나를 잠식해버립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것은 위에서 볼 때나 아래에서 볼 때나 그냥 점일 뿐입니다. 점은 크기도 인정받지 못하고, 두께나 가치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냥 좌표만 차지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세계 구조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구조의 짜임새 중에서 과연 ‘나’는 무엇인가를 정립해야 합니다. 창세기 9:4-6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본인이 살고 싶다고 살아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한 구조 내의 법칙에 준해서 정해집니다. 만약 타인의 피를 흘려 죽게 하거나 아니면 짐승의 피를 먹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피, 곧 생명을 취하여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 사람은 이 세상의 구조에 따라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니 곧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존재 의미란 이 세상에서 조밀하게 짜여져 있는 생명의 힘과 죽음의 힘을 드러내는 역할로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체적으로 짜내는 옳고 그름의 원칙에 의해서 본인이 살고 죽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나는 과연 이번 일을 잘했을까 아니면 못했을까”를 따질 그런 처지에도 놓여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개별적으로 자기 가치를 자신이 점검할 권리가 인간에게 없습니다. 상당히 냉혹하고 비정하게 들리시겠지만 인간은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생명의 힘과 죽음의 힘을 측정하는 측정 기구로서 작용하라고 지음받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의 지배를 받아서 자꾸만 ‘자아’를 염두에 두면서 살게 됩니다. ‘자아’라는 것은 소유성으로 집합해서 만들어낸 상상 개념입니다. 즉 ‘자아’라는 보따리를 풀어헤쳐 놓고 보면, 이것저것 끌어 모아놓은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렇게 끌어모음이 가능하려면 우선 밑바탕을 마련해서 단단히 밑구멍을 틀어막아야겠지요.
즉 “나는 이러이러한 것들을 챙김으로서 나의 것은 시작이 된다”고 마음먹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이 되고나면 그 때부터 성경에 있는 온갖 것들을 실천에 옮겨서 거기서 획득된 자기만의 의로움을 차곡차곡 그 밑바닥 위에다 쌓아놓고서는 위에서 뚜껑을 닫아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밑바닥부터 위 뚜껑까지가 뭐가 되느냐 하면 곧 ‘자아’입니다.
이런 인간상은 애초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인간형이 아닙니다. 이런 인간형을 유지한다는 자체가 곧 죄입니다. 이런 죄악적인 인간상을 지니게 되면 그 안에서 열심히 ‘행함’이 일어나는데 그 행함의 성질은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과연 잘했는가 아니면 못했는가?” 점검하는 모습을 띱니다.
사람의 행함이란 그 사람이 소망하는 것에 의해 형성되어진 그 공간을 얻기 위한 노고입니다. 예를 들면, “ 고등학교 시절, 막 졸업식을 마치고 삭막한 겨울나무 사이로 붉은 졸업장 케이스를 손에 쥐고서 보도 불럭을 따라 교정 문을 나서는 졸업생 선배들을 보면서 무척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원숙한 교복차림도 뒤로 하고 어른이 되어 세상에 섞여 들어가는 그들이 고교 재학생들의 소망이 됩니다.
신병으로 막 배치 받은 날, 예비군 복장을 한 늙구스레한 일단의 군인들은 제대 신고를 막 마치고 가방을 둘러매고 작별 인사를 보낼 때, 신병들에게는 그 순간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꽂히게 됩니다.
젊은이들이 자기 장래가 불투명해서 고민 될 때, 도로 건설 현장에서 측량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측량 기사의 모습이 한없이 부러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평생토록 계측기만 들여다보며 살아도 밥 먹고 살 수 있다는 그 안정된 직장이 탐이 날 것이며, 그런 안정된 직업만 가져도 더 이상 욕심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나이 30이 넘도록 남자 친구 한 명 없이 세월 보내고 있는 여성에게 토요일 오후, 예식장 주차장에서 그 날의 주인을 기다리는 꽃으로 장식된 웨딩차를 바라보면, 새 신부의 안정된 미래가 부럽기만 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란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희망을 늘 휘감고 있습니다. 진리라고 말해도 자기를 위한 진리요, 운명을 언급해도 자기를 겨냥한 운명론이 됩니다. 자기를 빼고 생각할 줄 모른다. 자기를 중앙에 배치해 놓고서 생각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행함’이 나옵니다. 자기만을 위한 공간을 희망으로 가득 채우기 위한 것이 ‘행함의 시작’입니다.
참된 인간형은 마치 연탄 보일러 연통과 같아서 밑바닥도 없고 뚜껑도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용서하심의 속성이 생명이 되어 시원하게 우리를 경과하고 통과하게 될 뿐입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과 생명이 우리 몸을 통해서 외부로 번지게 되면 이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행함’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행함’이지 인간의 행함이 아닙니다.
로마서 15:16에 보면,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도는 그냥 제물일 뿐입니다. 주님의 소유로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가지고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원래부터 이런 이런 일을 위하여 인간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어디서 어디까지가 나의 것이라고 우기면서 살지 말고 현재 자신의 처지와 형편 모두가 하나님의 것임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그것이 행함으로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