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마귀 120608

아빠와 함께 2014. 2. 19. 13:24

2012-06-09 01:37:43 조회 : 1174         
마귀 120608 이름 : 이근호 (IP:117.55.13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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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 (IP:218.♡.193.60) 12-06-21 10:16 
안양-벧후2장(마귀)20120608a-이 근호목사

베드로후서2장하겠습니다. 민간에 거짓선지자가 나타나고 너희 중에도 거짓 선지자 있고 그 다음에 1절에 이단 등장하지요. 등장하는데 전체적으로 멸망으로 이끈다. 적어볼게요. 간단한 이야기가 깊은 내막이 포함돼 있습니다. 거짓선지자가 있는데, 아! 거짓선지자가 있구나! 로 끝나는 게 아니고 거짓선지자가 있었는데 거짓선지자의 결말은 뭐로 되느냐 하면, 임박한 멸망이죠. 멸망으로 이끌지요. 그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거짓선지자가 등장했다, 멸망으로 간다, 이걸 바로 가로교회에서 한 방식대로 시간을 항상 반대로 하라 했지요. 미래가 먼저 있고 과거가 있다 했지요.  그러면 모든 문제 다 풀려요. 멸망될 자가 있는데 그 자가 누구인가, 역으로 한 번 추적해 보자 이 말입니다. 오늘 베드로후서2장 1절에 보면 멸망이란 말이 나와 있고 거짓선지자 앞에 나와 있고 선지자 멸망 되어 있는데 그 중간에 거짓선지자가 뭐라 했습니까? 주님을 부인하지요. 시간을 거꾸로 하면 풀린다니까요.

거짓선지자가 있는데 주를 부인해서 멸망한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멸망할 자가 있는데 그들의 특징이 뭐냐, 주님을 부인하게 되면 이것은 선지자가 아니고 거짓선지자가 되는 거예요. 왜 거꾸로 돌리게 되느냐 하면 누구도 자기를 거짓선지자라고 이야기하는 선지자는  없습니다.  선지자치고 ‘나, 거짓선지자입니다.’ 라고 말하는 선지자 할 사람이 없다 말이지요.  전부 다 ‘우리는 참 선지자이며, 저쪽이 거짓선지자입니다.’ 라고 손가락을 저 쪽으로 다 돌리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헷갈린다 말이지요. 헷갈린다고 말하는 것이 어패가 있는 것이 ‘아~ 그래, 내가 거짓선지자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선지자라고 하지요. 그러니 거짓선지자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찾으면 되는데 그것이 베드로후서 2장 1절에서 뭐로 되어있습니까? 주님을 부인하는데 그냥 주님이 아니고 살아계신 또는 자기들을 사신(피로), 자기들을 사 주신 그런 주님을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 이리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본문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른다 치고 사탄, 마귀, 거짓선지자, 멸망 받을 자들, 그렇다면 우리는 덥석 생각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과 관련된 게 아니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속이고 하는 자들과 연관해서 이 거짓선지자와 주님을 배신한 자해서 이런 식으로 엮여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자존심이 있어서 그래요.

마귀냐, 아니냐, 참된 선지자냐, 아니냐를 성경으로 구분해야 될 텐데 우리는 꼴에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니가 나를 속였어? 니는 거짓선지자야. 니는 마귀야’ 라는 식으로 나올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서울시장 박원순 시장을 사탄이라고 누가 얘기했지요?  광명교회 김홍도 목사가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김홍도 목사는 미국을 찬양하는데 박원순 시장은 미국을 저주하기 때문에 사탄이라고 그렇게 언급을 하지요. 그러면 김홍도 목사나 다른 사람 말 듣지 말고 우리도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정의를 내려 봅시다.

사탄 또는 이단 또는 적그리스도, 멸망당할 자, 기준이 뭡니까? 특징이 뭡니까?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주되심을 부인하는 거예요. 이것도 어려워요. ‘예수님이 주이시다’ 할 때,  예수님이 주이시다를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 다니고 매일 주여, 주여 하면서 입에 달듯이 주여 하니까.  그런데 뭘 모르는가 하면 예수님을 주라고 이야기하면서 주님이 뭔 줄 모르면서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주님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주님이 아니고, 주님이 예수님이라니까요. 주님이라 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데,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인 나사렛 예수가 나타났잖아요. 그럼 딴 주님을 찾을 이유가 없어요. 이 땅에 오신 나사렛 예수라는 그 청년, 그 분이 우리의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왔느냐, 그걸 우리가 믿으면 되거든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면 믿으면 된다 말이지요.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사하게 놔두고 날 따르라, 그걸 믿으면 된다 말이지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믿으려면 무엇이 파괴되어야 하느냐 하면 평소에 내가 하나님 찾고, 내가 메시아 찾고 내가 주님 찾는 그 자리가 폭파, 파괴 되어야 됩니다.

오늘 2시간 동안 사단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대로 해 봅시다. 욕심 부리지 않고 천천히 나가면서 중간 중간에 정립하고 나가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27절 보면,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쉽게 말해서 너희는 아버지를 안다? 모른다? 모른다는 뜻이에요. 너희들은 모른다. 심지어 예수님 봐도 모른다. ‘날 만졌어? 그래도 몰라!’ ‘내 코, 눈 보고 있어. 그래도 날 몰라!’ 이런 뜻이에요. 이게 얼마나 무서워요. 그러면 ‘예수님이여!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아버지를 압니까?’ ‘내가 너희를 알게 할 때 너는 아는 거야.’ 이리 되는 거예요. 

우리는 누구를 보고 있고 내가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치 아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어요. 여기 예수님 계신데, 예수님 말씀을 보고 있다 말이지요. 저 분은 몸무게가 몇 키로 나가겠어? 저 분은 키가 얼마 되겠어? 인물은 누구 닮았지? 보고 있어도 그건 예수 믿는 게 아니다 말이지요. 아버지를 아는 것도 아니고 주님을 아는 것도 아니고 천국을 가는 것도 아니에요.

해외토픽에 보니까 요번에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통치 60주년 기념으로 축제를 벌렸거든요. 축제 중에 하나가 버킹검 근위병 웃기기가 있었어요. 여자가 애를 써서 웃기려고 해도 훈련을 잘 받아서 근엄하게 있는 거예요. 6살 먹은 어린애가 웃기니까 웃음을 터트려서 킥킥킥 웃는다 말이지요.  우리가 사람을 아무리 웃긴다 할지라도 저 쪽에서 웃어주지 아니하면 우리가 아무리 웃겨도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재롱잔치 벌려도 주님에게는 안돼요. 우리가 어떤 수를 써도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믿음이라고 간주를 안 처 줍니다. 그거는 믿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믿음은 예수님께서 출발해서 예수님께서 믿게 함이 내가 믿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믿게 하신다는 생각이 들지 아니하면 그 믿음이 없다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절망~ 절망이겠지요. 모두 한국교회가 자체가 절망이지요.  지가 지 최면을 거는 겁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씀니다, 이리 하는 거예요. 이거 10번만 하면 다 믿어져요. 알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렇게 하면 할렐루야 되거든요. 믿씀니다, 믿씀니다, 쌍시옷 서너개 들어가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소원이 너한테 닿아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소원이.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이거 닿은 사람은 뭘 아느냐 하면 내가 믿는 게 아니고 주께서 믿게 하셨다는 것을 감격과 환희 속에서 만세! 만세! 하는 속에서 진짜 심봤다!! 하는 외침 속에서 우리는 그걸 만끽하게 됩니다. 심마니가 산삼 발견했을 때 기름 값 올라가고 북한 핵폭탄 터져도 기분 좋아요. 그거 아무 상관없어요. 지금 지는 심 봤거든, 심 봤으니까. 더 이상 세상이 어떻든 간에 중국이 검열 2단을 하든, 그리스가 망하든, 비행기 날아가든, 지는 아무 상관없어요. 산에 와서 심 봤으니까.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의 기쁨 아닙니까? 나라가 두 조각나고, 세 조각나든 대통령 누가되든 상관  없어요. 심 봤으니까. 마귀를 반드시 언급할 우리가 심지어 믿는 자까지 뿌리 채 흔들어 댑니다. 뭐라고? 제발 예수님한테 손을 노라고. 언제까지 되지도 않는 희망도 없는 그 존재를 관념적인 추상적인 개념을 붙들고 있느냐, 제발 실질적으로 정신 차리고 현실로 돌아와라. 예수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예수를 왜 자꾸 믿느냐, 좀 놔라, 니 쪽에서 놓으면 다 놓은 거야. 마귀가 진~짜 집요합니다.

욥기에 보면, 항상 우리가 마귀 할 때 욥기를 거론해야 될 이유가 있어요. 욥은 마귀를 대할 때 그냥 지식으로 마귀를 연구한 게 아니고 실존적이었습니다. 삶 속에 직접 마귀가 관여해서 멀쩡한 자식 다 죽였습니다. 만날 말썽피우고 애들 왕따 시키고 애를 때려서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그런 아들 같으면 몇 명 죽어도 상관없겠지만, 욥의 자녀들이 얼마나 착했는지 요새 같으면 하나는 카이스트, 하나는 서울대, 하나는 경찰 대학생, 하나는 세무대학 최고, 하나는 하버드대학, 옥스퍼드 대학 아들들이 한꺼번에 다 죽었단 말이지요. 아버지 생신 맞이해서 외국에서 영국 옥스퍼드 대학, 하버드대학 아들 다 와있는데 갑자기 바람 불어서 지붕 무너져 다 죽었다. 몇 아이는 박사학위 2개 받고 있는데 다 죽었다, 우리는 애 하나가 죽어도 같이 죽자 하는데, 열 명 다 죽었을 때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마귀가 했잖아요. 하나님이 허락해서 마귀가 그렇게 했지요. 그 마귀보고 멱살 쥐고 마구 흔들고 싶지요. 죽으라고.

그러면 마귀는 멱살을 쥐어 준다는 사실, 이게 얼마나 지혜로운지, 뱀처럼 지혜롭다고 했잖아요. 마귀가 멱살을 쥐어줘요. ‘그래, 니가 이래서 속 풀리면 흔들어라.’ 이래서 흔드는 거예요. 왜, 마귀는 성공했으니까. 결국 애 죽었다고 화 낼 때는 이미  마귀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겁니다.  으쌰! 으쌰! 좋다고 우쌰! 우는 사자같이 한 놈을 또 넘어뜨린 거예요. ‘뭐~ 하나님을 믿어, 에~라 개코같은 소리 자신을 믿었잖아.’ 그걸 마귀는 아주 자신 만만한 거예요. 어느 인간이 하나님을 믿어요?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지 자식 믿었고, 돈 믿고, 건강 믿은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은 건강 믿고 돈 믿으면서도 뭐라고 핑계 댑니까? ‘하나님이 축복 주셔서 그렇습니다.’ 남들이 언뜻 들으면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지요.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믿고 있지요. 왜, 남의 축복이 아니고 누구 축복으로 되기 때문에? 내 자식이고, 내 건강이고, 내 돈이기 때문에. 그 자식 다 죽이고 재산 다 날리고 마지막 최후 남은 내 건강마저 조지고, 그걸 누굴 앞장세워서 합니까? 마귀를 앞장세워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마귀 지혜로서 지게 되면 마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결국 니하고 나는 한 통속이 되는 거야, 니가 내 멱살 잡을 입장이 못 된다, 니와 똑 같네 결국은. 그래서 우리가 마귀의 시험을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이기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의 소원대로 믿음을 받은 사람만 구원받는 겁니다. 얼마나 간단한 구원입니까? 너무 간단해서 문제지만, 하여튼 무지 무지하게 간단하지요. 물론 머리에서는 간단한데, 실제 적용되면 내 인생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보통 복잡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마태복음11장 27절에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그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알 자가 없다 했는데, 그 앞에 보면 25절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뭡니까? 숨기시고, 야~~ 참, 어렵다. 숨기시고. 왜, 이 말이 어렵냐 하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에게 숨긴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우리식으로 과거, 현재, 미래로 따져 버리면, 슬기로운 자에게 숨기시니까 우리는 뭐 안하면 됩니까? ‘저 지혜 없어예, 저 똑똑하지 않습니다, 스마트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우리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하라고? 미래에서 결과를 가지고 설명하라 했지요. 그러면 숨긴 사람이 아무리 본인이 겸손의 티를 내도 주께서 숨겼다는 말은 니는 백날 겸손한 척을 해도 니는 자칭 스스로 자기를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로 자청한 인간이다 이런 뜻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하면 지키려고 하잖아요. 그게 뭐냐 원인과 시간과 과거, 현재 이렇게 흐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원인을 제공하면  결과는 반드시 주워 진다. 이렇게 생각한다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결과를 먼저 던져 놓고 그 결과의 원인은 니가 조종할 수 있는 입장이 안 되고 결과에 결과를 결과 되게 하기 위해서는 니는 결과를 결과로 높이기 위해서 너는 어쩔 수 없이 그 원인에 원인 자리에 놓여서 그 결과가 정당함을 보여주는 너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거꾸로 생각하면 돼요. 만약 어떤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가리워졌거든 그사람이 도를 닦고 ‘나는 부족합니다.’ 백날이야기해도 성경대로 하면 그 사람은 교만하고 자칭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로서 그 낙으로 인생 산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법정스님 이런 사람들, 신부들, 수녀들, 도 닦는 사람들 있잖아요. 도 닦는 사람들이거든요. 성철 스님이라든지, 공자, 맹자, 다 이런 사람들, 같은 류라 보면 돼요. 왜냐, 그 사람이 못 돼서가 아니고 숨기시니까. 주님께서 자기를 안 나타내시니까.

슬기 있다, 니는 교만하다, 교만하지 않다, 어린애 같다, 천진난만하다, 그 기준은 사실 우리가 그 기준을 결정 못하고 주께서 결과물 보고 너는 천진난만해야겠네, 너는 교만해야겠어, 너는 지혜로 와, 주님이 알아서 결정하는 거예요.  우리가 겸손 한다고 해서 주께서 우리가 착하다고 칭찬받는 거 없습니다. 아예 우리 자신에게 손대지 맙시다. 청도에서 이야기했듯이 누누이 이야기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손대지 맙시다. 권사님도 자주 손 안 대도 주변에서 구역예배 드리며 다 손댑니다. 세상 흘러가는 것이 주변에서 잔소리 들려오듯 되어 있어요.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야 생기는 이유가 우리와 주님사이를 마귀가 가로막혀 있어가지고 우리 힘으로 자식 사랑하고 이런 인간은 없기 때문에 주께서 예수님 오셔가지고  믿음을 입에 쏙 넣어주셔야 그 믿음가지고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자식 사랑한다, 이거 거짓말입니다. 돈 안줘 봐요. 사랑 안 하지. 돈 줘 봐요. 사랑하지. 어머나, 감사합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하지 않아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지만 지 몸 아파 봐요. 막상 이빨 아파보면 모든 게 짜증스럽고 귀찮고 예수도 귀찮고 다 귀찮아요. 온 몸이 아프면 만사가 다 귀찮아요. 마귀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예요. 우는 사자와 같이 마귀가 마지막 발악을 한다고나 할까요. 소금에 절인 미꾸라지 모양으로, 미꾸라지 추어탕할 때, 미꾸라지를 잡을 때 뭘 집어넣습니까? 소금 집어넣으면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몸부림치지요. 그거 마귀입니다. 왜냐, 이미 멸망하기로 작정되어 있기 때문에.

3절에 나옵니다.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저희 멸망은 잠자지 아니한다. 요즘 현대용어로 하면 그들의 멸망이 취소 된 적이 없다 이 말입니다. 멸망이 취소 안 된다는 사실을 누가 아느냐 하면 바로 마귀 본인들이 알아요. 그래서 소금 쳤던 미꾸라지처럼 발악을 하는 거예요. 어느 인간이든지 다니기만 해봐라, 발악을 치는 거예요.

뭐라고?  다른 거 요구 안합니다. 마귀가 요구하는 게 다른 거 요구하는 게 아니고 돈 받쳐라 이것도 요구한 게 아니고 제발 예수 좀 놔라, 예수 믿는 걸 좀 놔 버려라, 믿지 말아라 이 말입니다. 예수 믿는걸.  예수 사랑은 믿는데, 예수 행함심으로만 구원 받는걸  놔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높여라, 찬양하라 다해요. 다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주님께서 홀로 다 하셔가지고 예수님이 다 하신 공로로만 건짐 받고 우리가 교회가든, 구역예배가든, 심방가든 다 구원받는데 관계없다는 것을 이제는 스스로 그걸 접어라, 잊어버려라, 포기해라, 그리고 니 구원은 니가 알아서 해야지 니가 안 챙기면 아무도 챙겨줄 사람이 없다. 마귀가 늘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발 좀 상식으로 돌아와라, 상식으로. 남들처럼 살아라, 남들처럼.  그렇게 별나게 해서 뭐하느냐, 남들 봐라,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하기 때문에 복 받는 것도 내가 복 받을 짓을 하면 복이 오고, 저주받을 짓을 하면 저주가 오고, 상식 중에 상식 아닙니까? 그 상식을 목사들이 외치는 거예요. 전부 다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 추임새를 놓는다 말이지요. 그런데 그걸 ‘아니요!’ 라고 나선다면 목사 마귀부터 해서 눈꼴셔서 ‘좀 별나지 마소.’ ‘그러다 사회생활 못합니다. 별나지 마이소.’ 그렇게 하겠지요.

사탄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악마, 요한계시록 20장2절에 보면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마귀지요. 마귀. 귀신 하는데 귀신은 아닙니다. 마귀, 또는 옛 뱀, 이 전체가 그냥 뱀이 아니고 옛 뱀이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악마의 실체가 하나님의 언약의 주어지는 경로를 따라서 요렇게 다양하게 그 특성의 모습으로 그동안 꾸준하게 활동해 왔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그래서 악마의 활동 없이 하나님의 구원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악마의 작업 없이는. 추어탕할 때 미꾸라지에 소금 뿌리는 것이 필요하듯이 그동안 하나님께서 마귀를 소금용으로 계속 뿌려온 거예요. 왜, 뿌려왔을까요? 그것은 구원받은 선택을 빛내기 위해서는 너는 구원에서 제외되었어! 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절차가 있어 왔었습니다. 

여호수아 11장19절,20절 읽어보겠습니다.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 싸워서 점령하였으니  27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뭐라고요? 그들로 뭐 받게 하기 위해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 이었더라“  여기도 진멸되어 있고 베드로후서는 멸망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어제도 가락교회에서 강의했지만, 이스라엘 야곱 안에 누가 들어있다고 했습니까? 야곱 안에 예수님 들어있지요. 야곱이 이스라엘 되고 이스라엘에서 예수님 나오잖아요. 인자가 머리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한다 했잖아요. 이야기해줘야 기억이 나지요. 한 번 들었던 것은 잠재돼 있는데 이야기해 주면 다시 생각나잖아요.

그 당시 이스라엘이 나온다는 것은 방금 이야기한 논리에 의하면 그 안에서 예수님이 살아계신다 보면 되거든요. 장차 오실 예수님이. 그러면 그들이 이스라엘을 대든다는 말은 결국 신약에 와서는 누구를 대든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에게 대드는 세력이 이미 구약 때부터 있었던 겁니다.

모세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환경이 마련돼지고 환경이 마련되면 누구는 대적하는 자가 되고 누구는 거기에서 공격을 받는 자로서 두 영적주체가 윤곽이 드러나는 식으로 사용되는 겁니다. 한 쪽은 이스라엘이 공격받는 쪽이 되고 다른 한 쪽은 주변의 이방나라가 공격하는 쪽이 되지만, 이걸 그대로 신약성경으로 가지고 와서 껍질을 벗겨버리면 마귀는 예수님을 공격하는 세력이 마귀가 되고 예수님은 마귀한테 공격 받는 자가 되지요.

다시 말해서 마귀라 하는 것은 내 돈 떼먹고 도망친다, 나 욕하는 사람, 그게 마귀가 아닙니다. 자꾸 내 몸을 가지고 마귀라고 따지지 마시고 우리나라 공격한다고 마귀라 하면 안 되고 마귀는 분명하게 노리는 게 있어요. 누구만 공격합니까? 예수님은 주가 아니다. 주님은 예수가 아니다, 라는 것만 공격하는 거예요.

이걸 사도바울이 나중에 이야기하지만 사울이 알게 된 악마의 실체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의 공로, 복음만 공격하는 게 악마입니다. 복음만. 제가 마귀라도 그런 짓 하겠지요. ‘니 몸은 니가 챙겨라, 이 세상에 니가 안 챙기면 챙겨줄 사람 없데이, 니가 예수 믿는다고 잘되는 거 아니야.’ 관심을 자꾸 예수님에게 두지 않고 자신에게 자꾸 돌려. 요거 마귀가 이렇게 합니다.  마귀는 아주 자기 일에 성실한 존재입니다. 굉장히 성실해요.  농땡이 아닙니다. 내가 뭘 해야 되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는 자예요. 그렇다면 마귀의 종들도 자기역할을 성실하게 잘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믿어야지, 예수의 십자가는 이미 물 건너갔다, 믿지 말고 교회부흥을 믿어야지, 아주 성실한 사단의 유혹입니다. 우리는 그 성실을 인정해 줍시다.

새벽기도 나가는 철야하는 그 성실은 인정해 줘야 돼요. 새벽기도 나가는 이유는 뭡니까? 주님이 해결안해주니까 내 힘으로 하겠다고 새벽기도 나온 거예요. 말은 이렇게 해요. 예수님한테 빈다하는데, 아닙니다. 거짓말입니다. 집에서 기도하다가 안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나한테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기어이 성전까지 나가야 돼 내가.  내 몸이 바쁜데, 잠자는 것 깨워가지고 ‘내가 이렇게 새벽제단 쌓아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내 소원대로 해 줄 거예요. 그러면?’ ’정말 심해도 너무너무 심해, 정말.‘ 이런 식으로. ’이제 나와서 기도합니다. 안 해주기만 해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이구, 십일조 한 번 떼어먹었다고 벌 내리나, 아이구 더러워라, 더러워!’ ‘이 십일조 할게. 십일조가지고 왔다. 이름 썼어, 이름 썼어. 자, 이제 복 줘.’ 이런 식으로. 사탄은 우리의 일 수족 일 수거를 이미 다 꿰뚫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의 범위에서 못 벗어납니다. 꼭 여자들이 신는 그물 스타킹 같아. 그 다리가 그물스타킹 밖으로 못 벗어나요. 그물스타킹이 얼마나 촘촘한지 무좀도 못 벗어나요. ㅎㅎ

못 벗어나는데 예수님의 믿음이 올 때만 그것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니까요. 우리가 예수님 믿음을 눈치 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냥 그 자리에 있어, 내가 쳐들어갈게.’ 주님이 쳐들어와서 우리 주님의 소원대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 나의 구원이고 나의 소원이 아닙니다. 괜히 오버하지 마세요. 주님의 소원입니다. 주님이 자기 백성을 자기가 답답해서 알아서 건지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별로 답답해하지 않아요. 돈 없어서 답답하지, 딴 것은 답답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우리 구원의 문제는 진짜 답답하신 분은 우리 예수님이 답답해요. 예수님이.

그래서 주께서는 상황을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좁은 길로 가도록 영생이 보이는 천국이 보이는 그 길로 가도록하지, 천국이 안 보이는 길로 인도받는다면 그거는 참 곤란합니다. 이것도 악마가 알고 있어요. 악마가 알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도 알고 있다는 거예요. 아시는 분이 두 분밖에 없어요. 마귀가 알고, 주님이 아시고.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발언은 우리에게 하는 게 아니고 마귀보고 하는 얘기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 한 번 봅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다음에 뭐가 나오지요?  멸망 나오지요. 아까 베드로후서 2장에서 멸망이란 말 썼지요. 결국 적그리스도는 멸망의 길이잖아요. 멸망으로 가는 길 분명히 있는 겁니다. 그리로 가야될 자들이 있고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우리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에요. 이걸 안 믿는다면 이건 참 곤란한 문제입니다. 우리 이 말씀 믿읍시다. 이걸 동의한다고 될 문제는 아니지만. 정말 이 말은 믿읍시다.

많은 사람들이 찾거든 그 쪽에 안 가면 돼요. 하나의 요령입니다. 많은 사람이 아멘할 때 분명히 악마가 그 짓하고 있다고 보면 돼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되어 있지요. 이 이야기가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거 보면 마치 우리한테 결단을 죽 하는 것 같은데, 그 뒤 말씀을 보세요.

무엇을 삼가라?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되어 있지요. 자, 거짓 선지자를 이야기하고 방금 이야기한 좁은 문, 넓은 문 이야기해 보면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거짓선지자가 우리한테 외치는 것은 뭡니까? 결국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마음속으로 원하는 편하고 행복하고 넓은 길 그 쪽으로 설교하는 사람, 이렇게 고난 받고 저렇게 고난 받고  어떻게, 어떻게 하지만 마지막은 여러분들은 여러분 소원대로 될 겁니다. 고거 사탄입니다. 마귀고, 악마입니다.

제가 심방할 때, 좁은 길을 할 때 있었어요. 아마 영주 부교역장으로 총신다니면서 있을 때, 한 적이 있었어요. 좁은 길 설교한 거 같은데. 아마 그 이야기가 당회장목사까지 소리가 들어간 것으로 느낌이 들어요. 전도사가 대심방하면서. 대심방할 때는 바빠서 다 못 오니까 나눠서 듣거든요.  그러면 이 쪽 구역은 내가 돌잖아요. 좁은 길 한 기억이 나요. 대덕교회 있을 때도 한 적 있어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도 사람들이 안 믿으면서 믿는다, 믿는다, 하니까 진짜 믿는지, 안 믿는지 심방 때 한 번 보자, 해서 얼굴색이 변하는지, 아니면 듣고 싶었습니다! 이 말 나오는지 보자 이 말입니다.

당회장목사가 다른 말로 하면 마귀가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통치하는 이 단체에서 나와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이거는 저주를 해버립니다.  내가 이야기한 거와 다른 목소리를 내면. 그만큼 예수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진리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진리라 하는 것은 상술이고, 사실 노리는 것은 자기 가게입니다. 무엇이 옳으냐가 중요하지 않아요. 저 영혼들이 어디 가겠느냐, 천국과 지옥 관심 없습니다. 그냥 돈만, 복채만 떨어뜨리기를 바랄뿐이에요. 전부 점쟁이들입니다. 봉투에 복채만 떨어지기를 바라는 거예요.

거짓선지자의 패망은 이미 결정됐습니다. 넓은 길로 가라. 그리고 많은 사람이 아는 것이 진리다.  소수는 항상 비진리가 될 가능성이 높고, 많은 사람이 동의하면 상식인 것이 진리에 가깝고, 비상식은 거짓에 가깝다. 이런 겁니다.

마태복음7장 15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하는 이리라.” 자기가 이리입니다. 하는 이런 바보 같은 이리는 없어요. 노략을 하려면 약탈을 하려면 자기하고 다른 겉모습, 사람이 안심할 만한 표정과, 제스처가 필수적입니다. 설교를 딱 들어보면 모릅니까? 알잖아요. 다 좋은 소리 해 놓고 돈 내놔라, 교육관 지으니까 돈 내라 그 말 아닙니까?

정석훈 목사님이 한참 교회 짓는 교회가가지고 ‘여러분, 이거 성전 아닙니다. 헛짓하지 마세요.’ 이래 가지고 3개월만인가 6개월만인가 쫓겨났어요. 처음에 올 때 목사님이 전도사를 자기 손에 삼기위해서 나, 너한테 이렇게 신경 쓴다, 보여주기 위해서 사모님보고 중국 다 팔고 이사와 가지고 인천서 같이 있자, 했어요.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은 너를 버려도 나 당회장은 너를 안 버리기 때문에 우리 같이 하면서 제발 이 단체에서는 다른 목소리를 내지 말자,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정석훈목사님이 잠시 흔들렸다 해요. 그런데 그 사모님이 반대했지요. 여자 말 들어서 안되는 게 없어요. 다 돼요. ㅎㅎ

갔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다 날아가 버렸지요. 그러니까 그 목사가 뭐냐 하면 상식선에서 어느 부 목자든 자기도 그랬으니까, 당회장목사가 든든히 받쳐주면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그 배려를 해 준 사람에 대한 마땅한 아랫사람의 정치적인 도리라고, 자기도 그렇게 살아왔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본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목사는 몰랐던 거예요.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은 몰랐던 겁니다. 예수의 소원대로 믿음을 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성경에는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한 거지요.  이 이야기 들으면 정석훈 목사님 기분 좋겠다. ㅎㅎ

정석훈 목사님은 기분 좋은데, 다른 목사님은 화내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요? 나는 믿음 아닙니까? 이렇게 나오면 곤란한데. 하여튼 말하기도. ㅎㅎ 어떻든 간에 하나의 예니까. 그러니까 우리 권사님도 집사님이 그렇게 해도 이해해 주셔야 되는 게 뭔가 특이해야 돼요. 좀 심해서 문제지. 뭔가 다 상식 같으면 맞아요. 교회라는 것도 하나의 모임 아닙니까? 그러면 적어도 주인 되시는 분이 그 정도는 배려를 해 줬으면 맞춰주는 그게 있어야 교회가 안정이 되고 안정이 되면 교회도 짓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 초를 치는 건 뭡니까? 초 칠거면 니 혼자 목회할 것이지. 그러나 정목사님은 생각한 거예요.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사람만 있는 세상이 아니고 그 배후에 누가 있다? 옛 뱀, 사단, 마귀, 악마 이게 없으면 성경에 안 나온다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은 게 누구한테 받았습니까?  사람한테 받은 게 아니거든요.  그것은 분명히 마귀가 있고 천사도 있고 성령도 있잖아요.  있다면 그런 존재를 끌어당겨서 지금 자기 행동이 어떤가 살펴야 되는 겁니다. 성도의 보는 눈이 넓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저 돈만 준다 하면 헤헤거리고 이건 뭐를 빼는 거예요. 악마의 존재를 빼는 거예요. 모든 신학자들의 특징이 그거예요. 사람들에게 지 유식한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악마를 안 믿으니까 악마를 아예 빼는 거예요. 악마를 빼놓고 삼위일체 이야기하고, 악마를 빼고 예수 이야기하니까 이게 무슨 예수입니까? 말도 안 되지요.

신약성경은 사도는 전체를 악마를 다 집어넣어요. 인간은 다 뺀다고요. 목회성공하기 위해서. 상식은 뭐냐 하면 ‘도덕적으로 살면 복 받는다.’ 이거예요. 선하게 살면 뭐 받는다? 복 받는다. 너무나 상식적인 겁니다. 이 말을 하는데 마귀가 동원될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것을 세자로 이야기합니다. 이게 뭐냐 ‘자기 의’입니다. 이게 악마라는 거예요. 근본부터 악마예요. 처음부터 악마를 조심하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니 속에 악마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모든 말씀을 보란 말이지요. 모든 게.

그래서 언약이 깨진 거예요. 이스라엘 언약이 깨진 것이 유지되는 것은 언약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고 처음부터 백성들은 모세를 떠나고 보니까 우상을 섬기게 될 수밖에 없었어요. 모세가 있을 때는 참고 있었는데 모세가 떠나고 난 뒤에는 애굽에 신을 섬겼던 폼 있잖아요.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의식이라든지, 어떤 행사를 할 때는 옛날에 들었던 풍얼 가지고 해요. 새롭게 아이디어 창안할 것 없이요.

여러분, 어느 것이 신비롭습니까? 신비로운 비슷한 것, 인간이 만들어 내는 재주가 있어요. 보고 만지고 느끼면서 오감만족하면서 지가 뿅 가도록 하게 하는 자기최면, 그런 게 있거든요.  천주교신자들 보면 마리아 심장에 십자가 그려놓고 있잖아요. 마리아 숭배가 처음부터 기독교에 그런 게 없었습니다. 마리아 숭배란 그런 숭배 자체가 없었어요. 에베소공회 할 때, 523명인가요, 그 때 처음 결정한 거예요. 마리아 그림 신자해 놓고 칼 하나 꽂힌 거 봤지요. 그들의 이야기 들어보세요.  이게 있는 거 하고 없이 기도하니 기도 안 되던데, 이 그림을 보면서 하니까 기도가 참 잘되더라 하는 거예요. 그게 가짜예요. 그러니까 가짜예요. 그게 가짜란 뜻이에요.

예수님의 믿음은 십자가에서 오는 믿음이 믿음인데, 그런 믿음이 없으니까, 없으면 허전하니까 억지라도 종교적인 폼이라도 내야 되지 않습니까?  그걸 보통 옛날 발동기 돌릴 때, 경운기, 방앗간 발동기 돌릴 때, 처음 휙 휙 하듯이 부흥회할 때, 발동기 하잖아요.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삼창하잖아요. 휙휙해서 발동기 돌아가는 것처럼. 그 짓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찬양 인도해 가지고 박수치고…,  이게 무당 집단도 아니고 그것이 발전되게 되면 아예 걸어 다니는 성자로 만들어버려요. 복장부터가 달라요. 일제시대 때, 학생들 복장 보면 복장부터 로망칼라하지요. 어깨엔 계급장 달고 하지요. 이런 걸달면 보기만 해도 느낌이 필링이 팍팍 오도록 그 놈의 느낌, 마귀가 준 느낌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마귀가 하는 일을 마귀라 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19장에 보면 이리 되어 있어요. 누가 누굴 잡느냐 하면 예수님이 거짓선지자와 짐승과 그 이적을 행하는 자와 우상의 표를 받는 자들을  잡아버려요. 그러니까 마귀의 하는 말을 우리가 예수님의 주되심은 그냥 주되심이 아니고 무얼 잡았다? 악마 옛 뱀을 잡았다 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는 말은 톡, 그 안의 내용물을 꺼내보면 뭐가 잡혔다는 말입니까? 마귀가 이미 잡혀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나, 예수님 사랑합니다.’ 이러면 안 되고 주께서 뭘 잡고 있다는 거. 주님께서 잡음으로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주께 잡힌 괴물이 사실은 어디에 있었다? 사실은 내 안에 있었다는 말이거든요. 내 안에서 일곱 귀신이 설쳤는데 주님이 빼내주신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주되심을 알려면 우리가 마귀를 모른다 하면 안 되지요. 그동안 마귀생활 했는데, 아~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하면, 이건 전두환이가 한 거고. 그러면 안 되지요. 새삼스럽게 마귀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하면 ‘니가 육으로 한 짓이 다 마귀가 한 짓이야.’ 그렇게 이야기할 때,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 아~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내가 이런 짓을 했네, 했어. 자기 의 세우려고. 목사한테 칭찬받으려고, 여자가 새댁이 시집을 가면 시아버지에게 칭찬받으려고 심지어 교회가면서도 ‘저, 교회 안 갑니다. 절에 갑니다.’ 이래가지고 속여서 그저 사랑받고 칭찬받으려고 그게 기쁨인 줄 알고 그 짓을 하는 이유가 바로 권력에 대한 복종이잖아요. 밥이나 먹고 살려고.

농경시대 때 여자가 시집간다, 결혼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시가집이 꿀벌을 한다. 일손이 모자르잖아요. 그 새댁이 결혼하기 전에 무슨 직장에 다녔던지, 무슨 일을 했던지, 관계없이 꿀벌에 종사해야 돼요. 왜냐, 시어머니가 ‘야, 야, 나 죽거들랑, 이게 6대 내려온 가업이다.’ 하거든요. 또, 토기 만드는 거.  6대째 토기를 만든다면 그 시집왔으면 다른 거 하더라도 그림 그리고 음악 하더라도 다 접어야 돼요. 밀양의 어떤 새댁은 노래 잘해도 소 키운다 합니다. 소는 누가 키우는가, 며느리가 다 키워요. 그 집의 가업을 잇기 위해서 옛날 농경시대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런데 토기를 만든다 합시다.

토기를 만들 때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기술점을 배운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 종교부터해서 예를 들어서 어른이 할아버지가 토기 만들 때 토기를 처음 그냥 만들지 않고 돼지머리 잡고 돼지 코에 만원이든 오만원이든 코에 넣고 촛불 켜고 제사 할 때,  며느리가 옆에 서서 우리 주 예수~ 찬양만 부르면 시집에서 되겠습니까? 안 되잖아요. 시어머니가 ‘야, 야 잘 봐나라. 이거는 미신이 아니다. 절대 예상 밖에 토기가 잘 나오더라. 전에 안 하고 했더니만 산신령이 노해 가지고 시커멓게 돼서 상품가치가 없었다. 잘 봐나라.’ 그러면 토기기술만이 아니고 뭐도 따라주는 거예요. 거기에 연관돼 있는 그러한 재례 라든지, 의식도 같이 따라 주는 거예요.

영화 찍는 사람들 뭐합니까? 영화 찍거나 로켓 쏴아 올리는 거, 공장 지을 때, 정초할 때 뭐합니까? 전부 다 돼지잡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흔히 말하는 관행이요, 관습이라 하지만 사실은 그게 뭡니까? 그게 바로 옛날 예수 믿기 전에 우리 속에 이미 우리에게 강하게 강요했던 상식선에서의 종교, 악마의 종교,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성령이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됐다는 말은 뭡니까? 내가 바로 마귀새끼입니다. 내게서 나올 것은 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토기를 따라가다가 어느 날 남편이 의처증해 가지고 여자보고 ‘니 바람피웠지?’ 이리 나오면 그 여자가 ‘어머님, 쫒아내지 마시고 이 토기나 잘 배워주시고 이 산신령께 제사지내는 이거는 잘 배우겠습니다.’이렇게 나옵니까? ‘에~라, 내가 그동안 하기 싫은 거 간신히 했다.’ 하고 여자가 나오지요. 그러면 결국 뭡니까? 결국 모든 우상이라 하는 것은 귀신을 위함이 아니고 결국 누구 위함이다? 자기 자신의 생존과 자기 자신의 체면과 자기의 잘남과 정당함과 의를 위해서 주변에 있는 환경과 사회성을 그냥 따라가 준 거예요.

그러니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결국 귀한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나 밖에 없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이고 그게 바로 예수님 앞에 원수가 된 모습이에요. 예수냐, 나냐, 중에서 우리는 항상 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죄를 위해서 아들의 소원대로 우리에게 믿음을 준 겁니다. 10분쉽시다.
 공은주 (IP:218.♡.193.60) 12-06-21 22:01 
안양-벧후2장(마귀)20120608b-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에는 본격적으로 사단이 역사적으로 또는 성경전체에서 어떻게 진행되는가 한 번 봅시다. 여자들은 보통 남자들이 보기에 여자들은 아무리 못됐다, 못됐다하지만 여자들이 악하다는 생각은 안하거든요.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남자들은 보통 과격하다, 그러나 여자는 특징이 순하고 그렇게 나쁜 짓은 안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성경전체를 보게 되면 그렇다면 여자는 벌을 적게 받아야 되고 지옥도 여자는 적게 가고 천국은 많이 가는 것이 정상이고, 나쁜 놈들은 남자들이니까 지옥에는 남자들만 있고 그러면 재미 하나도 없지요. 남자들만 있어서.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수다 떨며 노니까 재미있다 한다니까요. ㅎㅎ

이상하게 천국에서는 남자, 여자 그런 점에서는 차별이 없는 거예요. 그게 왜냐, 여자가 적극적으로 나쁜 짓은 안하겠지만, 여자가 옳고 그름 자체에 대해서 이거는 분위기에 따라 완전히 고개 숙이는데 도사라, 외쳐야 될 때, 외치지 못하고 ‘예, 제가 뭐 압니까?’ 다 떠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유별나게 바른말하는 사람은 독특해요. 룻, 훌라라는 선지자 있어요. 이사야에 나오는.  여호수아에 보면 드보라, 특정한 사람은 있지만 대부분은 뭐냐 하면 남자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가는 이유는 여자가 그다지 나쁜 짓은 안 하지만 적어도 그 편을 들지 않아야 될 때도 ‘아이고, 편한 게 최고지요. 제가 뭘 알아요.’ 우르르 다 따라가는 경우.

그러니까 창세기2장에 선악과 심어놓고 여자한테 그걸 유혹했다는 말은 그래서 여자는 약한 자라 나와요. 베드로전서3장 7절에 보면, 아내는 연약한 자라 되어있지요. 또 고린도전서7장에 보면 여자가 남자 덕분에 구원 받는다하는 그런 대목도 나오거든요. 여자는 수동적이면서 하나의 자기 짝에 대해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 다른 말로 하면 자조적인 의사가 결여되어 있다.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그런 이미지가 오히려 구원한테는 뭐냐 하면 모든 구원받는 사람은 신부가 되는 이유가 신부가 자기 운명을 결정 못합니다. 신랑이 와서 자기 운명을 다 결정해 놓고 우리는 공짜로 ‘니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냥 오라. 몸만 온 나.’ 몸만 가서 구원 받는 식으로 구원 되는 겁니다.  신부를 위해서 단장할 것은 남편이 준비할 것이지, 신부 본인이 준비하지 않아요. 그것이 구원의 표상을 보여 주는 것인데, 이 땅에서 여성이란 역할로 잘 대비가 되는 겁니다.

어쨌든 선악과 하는데 있어서 뱀은 남자한테 찾아가는 게 아니고 여자부터 먼저 접근했다하는 이 대목에서 마귀의 수법이 나오는 거지요.  마귀는 뭐 하느냐 하면, 의미를 줍니다.  물론 마귀가 알고 있던 의미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의미를 제공하지요.  그런데 그 의미라는 것이 주 예수님을 위해서 엮여져 있는 전체 덩어리 속에서 의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악마 속에서 의미가 나와 버리면 그 의미를 받는 여자나 남자는  이 말씀 전체에 소속돼 있다는 생각은 없고 단독적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챙겨버리면 그런 현상에 빠져버립니다. 저거 먹고 싶지? 할 때, 먹고 싶거든 먹어라, 하는 것이 선악과 전체의 말씀 속에 없잖아요.  그런데 먹고 싶다, 탐심 먹고 싶다, 그것을 노린 것은 개인적인 개별적으로 할 때는 이걸 누구한테 물어보지 않고 개별적으로 내가 먹고 싶은데, 먹고 싶다 할 때는 독자적으로 만들 때는 악마 쪽에서 의미를 가하는 거예요.

그러면 죄가 뭐냐, 우리 독자적으로 의미를 두는 것은 다 의미가 없는 거예요. ‘저는 어떻게 돼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말씀에 관계없는 거예요. 주님이 어떤 분이냐, 중요하지 내가 어떻게 되느냐 중요하지 않거든요. 의미 없는 것에 의미 두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죄란 의미가 없는데 그 의미를 비중을 가하는 것이 그게 바로 죄입니다. 그러니까 의미가 있는 곳에 윤리가 생기지요.

내가 나빴을까? 내가 좋았을까? 착했을까? 이건 악한 것일까? 그래 이런 나쁜 짓하면 죄야. 아니거든요. 나쁜 짓해서 죄가 아니라 이게 나쁜 짓일까? 좋은 짓일까? 생각하는 자체가 죄가 된다니까요. 그게 죄가 돼요.

아가씨가 어떤 남자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 남자가 결혼을 미룬다. 아가씨가 막 몸이 달았어. 전에 보다 더욱 메시지 보내고 한다. 본인도 ‘내가 왜 이러지?’ 할 정도로  자기가 주체 못할 정도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외부에서 보게 되면 의미가 없는데 본인은 그게 자기 목숨보다 더 중함을 여길 때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의미는 우리가 낼 자격이 안 됩니다. 의미를 내릴 분은 예수님이 내려야 되는데 왜냐 하면 모든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은 피조물을 위해서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 만들어진 창조주와 관계가 엮어진 상태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겁니다.

‘주님이여, 제가 이런 지혜를  갖고 있는 것은 주님한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래야 하는데 ‘저 사람은 부자 되고, 나는 왜 가난뱅이 됩니까?’ 라고 독자적으로 자력적으로 그 사람과 나와 비교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만의 의미를 만들어 버리면 거기서 아무리 바르게 살고, 깨끗이 살고, 나쁜 짓 하등에 관계없이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은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우리가 못 다하는 잘했다, 못 했다, 서운하다, 실패했다 이 모든 것을 싹쓸이하기 위해서 오셨다 말이지요. 그것은 니 소관 아니고 내 소관이야. 라고 오는데, 마귀가 처음부터 인간을 선악과 때부터 유혹했기 때문에 마귀는 뭐냐 하면 그 의미를 놓치지 말라고 우리에게 닦달하는 거예요. ‘니가 니한테 의미 있어. 예수가 중요한 게 아니야 니가 중요한 거야. 니가. 남한테 중요한 것은 소용없어. 니한테 중요해야 돼.  살아도 니가 살아야 되고, 사랑받는 것도 니가 사랑받을만하니까 너의 의미를 세웠을 때 이렇게 복 받는 거야. 자꾸 우리 자신에게 의미를 버리지 말고 의미를 더욱 더 공고히 하라고 하는 거예요. 누가? 교회 목사들이.

교회 와서 인간 더 버리는 거예요. 공들인 만큼 십일조한 만큼 헌금한 만큼 예배  참석한 만큼 더 이상 포기 못할 것이 자기인 거예요. 너무나 공을 들였으니까.  제가 아내하고 산에 가는데 동학사 가는데 정성탑이 있잖아요. 정성탑. 절 근처에 가면 있잖아요. 돌로 쌓은 것, 발로 푹 차버렸어요.  10년 된 것 같아요. 발길로 다 무너뜨려 버렸어요. 아내가 화를 내면서 당신하고는 등산 안 간다. 그거 의미가 없는 거 놔더라. 그래서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오늘 이걸 안 부수면 주의 종으로 역할 못하는 것 같아서 한다. 발로 차 버리면 돌이 굴러가서 다시 그 높이만큼 쌓으려면 10년 넘어야 돼요. 일부러 또 찾아요. 혹시 그런 거 없나하고 또 찾아갑니다.  찾아가지고 높이가 낮은 것은 손으로 치면 다 무너져요.

왜 쌓느냐, 그게 자기가 자기한테 최면을 거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 행동이 자기한테 반드시 보상이라는 의미로 되돌아 올 때,  자기 행동에 기쁨을 갖게 돼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한 이것이 혹시 나에게 재미로 하지만, 더 깊은 것이 혹시 나에게 산에까지 와서 절에까지 와서 공들인 이것이 보상으로 돌아올 어떤 구조가 있을 것이라는 그 꿈이 꿈으로 하여금 피곤한 이 몸을 그만큼 들어주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렇게 길들여 진 겁니다. 누구한테? 마귀가 그렇게 길들인 겁니다. 너에게  의미가 없으면 이 세상사는 의미가 없다. 어떤 것이라도 너에게 유리하고 너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라. 공리주의 아닙니까? 너희에게 손실이 오지 않고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여라. 이것이 상식이고 이것이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양새입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선악과 이야기는 선악과로 하여금 악마의 복제판이에요악마의 복제판이 뭐예요? 인간입니다.  악마는 뭐냐 하면 독립 선언한 거예요.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라. 악마는 각시탈이라,  양의 탈을 썼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니 할 일 하고, 마귀 나는 너한테 간섭 안 받는다. 나는 내 존재로서의 존재가치를 따로 챙기겠다. 이게 철학이고 과학입니다.  문명이고 학생들이 배우는 과학이 이거예요. 초등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전부 다 이겁니다.

나한테 무슨 의미 있느냐, 젊은 부부들은 결혼해도 몰라요. 신혼여행 갔다 와도 몰라요. 언제 헤어질지 몰라요. 이게 뭐냐 하면 평소에 나한테 의미 없는 것은 결혼 같은 것은 안하겠다. 이혼한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뭐가 안 고쳐진 채 이혼한다 말입니까? 결혼할 때도 자기만을 챙기고 이혼할 때도 주를 위해서 이혼하면 괜찮아요. 그게 아니고 독자적인 자기만의 의미를 포기 못해서 이혼하겠다는 겁니다.

악마가 한 그것이 악마의 복제판이 악마가 계속 찍어내는 거예요. 원숭이가 자기 머리털을 뽑아서 훅 불면 원숭이 몇 마리 나옵니까? 원숭이 수천마리 나오지요. 그거예요. 마귀가 훅 불면 그거 사람 되는 겁니다. 그걸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그래, 인간 다 드러나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마귀 잘했다.  짝! 짝! 그래, 잘했어. 다 죄 만들어 놔.

그러면 악마는 어떤 인간도 욥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예수라 할지라도 내 손아귀에서 못 벗어나는 것이 이 세상의 규칙이다. 그 규칙이 진리다. 맞는 이야기예요. 맞아요.  그런데 그 진리를 깨는 진리가 예수님의 소원대로 믿음이 주어지는, 선물로 받은 믿음이다.  그 진리를 깨는 거죠. 진리가 아니라 하면 안돼요. 그러면 우리가 성경 해석 자체가 잘못 됐어요. 맞습니다. 악마가 이야기하는 것은 쪽 쪽 다 맞는 이야기예요. 맞다고 고개를 끄덕끄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마귀는 우리 편이에요. 다 우리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이왕 선악과 따 먹었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챙기고 내가 노력해서 내가 밥 먹고 사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하지, 하나님이고 신이고 다 안 중요해요.  내가 있고 난 뒤에 하나님이고 내가 있고난 뒤에 예수지, 나를 지옥 보낸다는 것은 나는 그런 하나님 싫어! 라는 식으로 전부 다 마귀의 복제판으로 다 만들어 놓은 거예요.

악마는 이미 멸망받기로 작정됐습니다. 제가 아까 미래를 먼저 돌리라 했지요. 미래에 멸망되기 위해서 악마를 만들어 놓은 거예요. 악마는 이미 알기 때문에 인간은 뭐냐 하면 악마는 멸망하되, 그 악마가 날아가는 중에서도 너 나와, 너 빠져 나와, 너는 천국 가. 뽑아낼 자가 있기 때문에 전부 다 깔아놓는 겁니다.  데살로니가 한번 봅시다. 오늘 이왕 나온 김에 악마가 어떤 짓하는지 한 번 붙어봐야 돼요. 데살로니가 이거 보고, 마태복음 24장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9절에 보면,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여기에 모든 기적과 불의의 속임수로 하지만 이게 속임수인지, 진짜인지 하는 것은 인간은 판별 못합니다. 그 다음에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지요. 그러니 멸망하는 자들은 멸망하기 위해서 누가 열심히 활동해 줘야 되는 겁니까? 이 땅에서. 마귀가 활동하는데 그 마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으로 작용한다니까요.  멸망하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은 딴 게 아니에요. 나는 이만큼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 그들의 기쁜 소식이에요.  예수이야기 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남이니까. 왜? 자꾸 남의 이야기하느냐 말이지요. 예수 믿으면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느냐 이걸 이야기해 줘야지. 왜 자꾸 우리 이야기는 빼놓고 예수 이야기, 그러면 나는 뭐고? 나는. 이게 바로 멸망하는 자들의 외침입니다. 하소연이고.

목사는 뭔 줄 압니까? 예수 복음 전했는데 교회 잘 따라 줘서 좋다. 그럼 복음 좋은데 예수 좋은데 아직. 예수 복음 전했는데 나는 뭔데? 그거 마귀거든. 기쁨을 다른데서 얻는 거예요. 여기에 보면, 불의의 모든 속임수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하는데 성경에서는 자꾸 불의와 속임수 하는데 막상 그런 기적이 일어나면 남의 집에 돈 벌었다 하면요, 이거 속임수 불의 아닙니다. ‘아이고, 우리 집은 언제 오노? 언제 오노?’ 한다니까요.  성경에서는 불의고 속임이라고 하지만 베드로후서 같으면 호색이라 하지만 이거는 나쁜 의미로 썼지만, 막상 그런 혜택을 입어 보면요, 나쁜 의미가 아니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춤을 출 이야기라니까요.  춤을 출 이야기.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눈 돌리게 되면 그건 뭡니까? 이젠 그만큼 돈 벌어났으니까 이젠 예수 안 찾아도 된다. 그동안 돈 버느냐고 수고 많았는데 이젠 니가 알아서 해도 된다. 이제는 네 영혼 걱정하지 말아라. 이 만큼 쌓였으니 이제 된다, 하더니 그날 밤에 영혼 데려갔잖아요.

데살로니가후서2장11절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여기 유혹돼 있잖아요. 막상 보면 유혹이 아니고 우리가 원했던 바입니다. 유혹은 우리가 기다렸던 게 유혹이 돼요. 우리가 유혹 못 이깁니다. 전에 이야기 했던가요? 유혹을 이기면 유혹이 아니에요. 감당할 유혹은 유혹도 아닙니다. ‘아이고, 그 까짓 거 꼬시려고.’ 아니잖아요. 유혹이란, 우리가 감당이 될 그 이상의 것으로 밀려오는 게 유혹입니다.  그래서 유혹은 아무도 못 이깁니다. 이길 것 같으면 유혹이 아니지요. 못 이기니까 유혹이지요.

그 유혹은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예수 그리스도 분께서 그냥 아들의 소원대로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믿게 하신 그것 앞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것은 우리는 마귀에게 속했다. 나는 마귀에게 속한 사람 맞습니다. 그러니까 내 힘으로 구원 안 되고 주께서 기도해 주셔야 됩니다. 라는 것이 엮여지지 않는 한 우리는 모든 이유가 유혹입니다.  모든 유혹이에요.

공부하고 있는데 ‘엄마, 1등 했어.’  기분 좋습니다. 성경말씀만 기분 좋은 게 아니에요. 기도했더니 응답됐구나! ‘엄마, 결혼식 날자 잡았어.’ ‘그래, 잘됐어.’ 그러니까 우리는 몰라요. 우리가 어디에 기뻐하는지를 우리가 아직까지 미련을  담고 있습니다. 또 새로운 기쁨이 오게 되면 예수고 뭐고 간에 만세! 내 힘으로 살 수 있다. 우리의 소원은 어떻게든 내 힘으로 사는 그 자유함, 이게 바로 피조물 악한 마귀가 예수님과 싸우고 추방된 이유가 그겁니다. 나는 더 이상 주님을 의지하지 않더라도 나의 영광과 내 이름과 내 명예를 위해서 독자적으로 나만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것을 해탈 또는 극락 또는 천국이라고 우리는 부르고 있지요.

예수님은 아십니다. 주기도문에 뭐라고 하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그 모든 것 그것은 이미 인간들이 어디에 지금 빠져 있다는 것을 아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리 이야기하면 벌써 듣는 사람들이 풀이 푹 죽어가지고 그럼 우리는 마귀 아닌 게 없지요. 그럼 우리는 사는 재미도 없네, 하는데 제가 처음부터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소원이 우리한테 오게 되면 우리는 마귀 짓을 한다는 것이 슬픈 게 아니고 발각되는 기쁨이 있다니까요. ‘아! 이러니까 예수님이 피를 흘렸구나!’  내 피 안 받고 하나님이 예수님 피만 받는 이유가 여기 있구나, 어린양 피 안 받고, 염소피 안 받고, 소 피도 안 받고, 구약 때 그렇게 마음껏 연기피우며 지내던 모든 제사와 예배와 번제 안 받고 예수님 피만 받는 이유가 바로 이거 알라고 이 꼬라지 니가 그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피를 흘렸구나! 알게 되면  이 부족한 미천한 인간이 자기 의가 아니고 예수님 의를 증거 하는 도구로 쓰인다는 것, 이거 아무나 주어진 혜택이 아닙니다. 이거.

우리가 무슨 몸으로 주의 영광 돌리겠습니까? 등산가서 시커먼 몸 되어가지고 주의 영광 돌리겠습니까? 다시 우리의 의를 높이잖아요. 이 어떤 몸이 되든 선크림을 바른 어떤 몸이 되든 중요한 것은 시커멓냐, 안 시커멓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민소매 입었느냐, 안 입었느냐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의가 나온다는 사실, 이게 안 나오는 건데 인간에게는 나올 수가 없는데, 인간은 지 자랑하지, 안 나오는데 예수님의 의가 나온다는 거예요.

마귀가 아주 미치지요. 지 안 나올 게 나온다 말이지요. 이 정도 욥을 때려줬으면 욥이 이 정도 맞았으면 주를 원망해야 될 텐데 뭐라 합니까?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시는 자도 하나님이라, 마귀가 약 올라서 이제 니 몸 한 번 당해봐라 이리 나온다고요.

그러니 우리는 본의 아니게 하나님과 마귀 싸움판에 말려든 거예요. 저는 그걸 뭐랴 하느냐 하면, 세탁기 수조안의 빨래감 이예요. 빨래감.  휘이익~ 정신없이 돌아가요. 정신없이 막 돌아가요.  정신없이 돌아가니까 우리의 관심사는 주님이고 예수님이고 다 잊어버리고 살림하고 사는 거예요. 애보고 살고, 마귀가 계속 돌린다니까요. 마귀가 예수 생각할 틈을 안 줘요. 막 돌기. 한 숨 돌리고, 또 사건 터지고.  그런데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누구한테 얘기한 적이 있는데 예수님 옆에 강도 있잖아요. 그 강도가 부자였으면 강도질 안했을 거 같아요. 내가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어릴 때부터 비천한 가정에 태어나가지고 그 짓 아니면 못 먹고 사니까 한 거예요. 소급해서 생각해 보니까 강도가 강도 짓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 거예요. 주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은혜니까. 강도질해서 어떻든 간에 예수님 옆에 딱 붙어서 구원 받은 거예요. 오늘 밤 낙원에 있으리라.

소급해서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것밖에 없다니까요. 강도질한 것도. 요한일서에서는 마귀를 뭐로 보느냐,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마귀가 뭐냐에 대한 정답, 악마가 뭐냐, 이걸 정답을 어떻게 내릴까? 요한일서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은 다 적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아닙니다. 주의할 것이에요. 하나님 존재를 부인하는 게 아니고, 도리어 하나님을 앞장세우잖아요. 가룟 유다도 그렇고, 유대인도 그렇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 했던 그 바리새인들도 눈만 뜨면 여호와예요. 눈만 뜨면 하나님 여호와예요.

결국은 마귀가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적-그리스도니까, 적 줄 긋고 그리스도니까 예수님의 그리스도됨,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흠집을 내는 쪽이 바로 궁극적으로 최후의 모습, 악마의 마지막 모습은 그리스도의 흠집을 내는 거예요. ‘목사님, 그런 예가 적당한 게 있습니까? 있으면 알려주세요.‘ 하면 교회를 내세우는 목사들, 아주 적절한 예가 되겠지요. 교회를. 교회에다가 교회에 관심을 두게 만드는. ’여러분, 이 교회 없어도 예수님 믿으면 됩니다.‘ 말 못하는 목사들.  지가 아무리 점잖을 빼고 경건에 모습은 그건 쉬운 겁니다.

여름 되면 용접하는 사람 애먹습니다. 일당 6만원 준다는가, 8만원 받고 온도가 몇 도입니까? 수백도 앞에서 얼굴을 덮어쓰고 찐다고요.  그렇게 해도 그 사람이 직장을 못 버리는 것은 그렇게 해야 지가 밥 먹고 사니까. 그러면 목사는 뭐 먹고 사는 겁니까? 뭐해야 먹고 삽니까? 청춘을 돌려다오. 청춘을 교회에다가 받쳤잖아요. 그거 하려고 부교역장부터 아부란 아부를 다 배워서 올라왔고 그런 아부들끼리 모여서 노회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거기서 못 빠져 나오지요. 지난여름에 한 거 다 아니까. 빠져 나오지를 못하지요. 그렇게 한 그것을 ‘여러분, 이 교회 신경 쓰지 말고 예수님께 신경 쓰세요.’ 라는 말이 안 나오지요. 용접하는 사람이 힘들어도 그 직장 못 빠져나오듯이 자기 힘들여서 그 교회에다가 모든 새벽제단의 무릎 다 까지도록 기도한 이유가 교회 키우려고 했는데  그저 50명 돼라, 50명. 50명 되면 기본 2~3백은 되기 때문에. 50명만 돼라, 50명만.

그래서 교회에서 다른 목소리내면 안되잖아요. 만약 부교역장 들어왔는데 처음 약속과 다르듯이 다른 목사 버리면 목사는 계산하지요. 저 인간 가서 20명 떨어지면 몇 명 남지? 이렇게 환산한다니까요. 뭐가 진리인가 관심도 없어요. 저 인간 와 가지고 20명 바람 불어서 20명 선교해가지고 떨어져나가면 몇 명 남지? 이리 되는 거예요. 오! 30명 남지. 안 돼! 그러면 저 놈 부터 먼저 잘라야 되겠어. 이리 되는 거예요. 머리에 들은 게 그게 전부입니다. 그게 전부예요.

물론 그거 안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주여, 제가 바로 마귀입니다.’ 하면 되는데 ‘안 그러는 목사 누가 있겠습니까?’ 이러면 되는데 ‘제가 적그리스도 짓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주께서는 수요일날 설교했잖아요. 회개한다는 말은 손을 떼는 것을 말하거든요. 지금 뭔가 덮쳤으니까 덮침 앞에서 십일조하고 뭐 하고 뭐하고 목회 잘하고 이거 소용없는 거예요. 그냥 당하는 거예요. 주여! 그냥 물속에 들어가듯이 그냥 당하지요.  ‘저 잘못됐습니다.' 강도처럼 회개하는 거예요. 우리는 매일같이 손 벌리고 회개할 것 밖에 없어요.

다시 합니다. 요한일서에서 내린 결론은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셔서 피와 성령과 물을 흘린 것을 그 효과와 의미를 부정하는 자는 그것이 최종적인 마귀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여호수아 11장 했고, 그 이후에 가봅시다. 사무엘상에 보면 사울과 다윗이 나오지요. 사울이 미쳤어요. 갑자기 자기 몸이 아프다 말이지요. 몸이 아파서 누구를 초청합니까? 다윗을 초청하는 이유가 그 전에 다윗이 노래를 하고 대중가요 유행가를 부른 게 아니고 노래와 더불어 계시를 발휘해요. 계시가 나타나니까 다윗이 찬양하니까 몸이 편하더라, 이런 게 있었기 때문에 아플 때마다 다윗을 부르지요. 그런데 언젠가 부터인가 악신가 임하니까 갑자기 창을 들고 다윗을 겁을 주려고 친 게 아니고 안 피하면 정면으로 죽이는 거예요. 다윗도 이상한 거예요. 다윗은 자기 안에 예수있는 것을 몰랐지요. 어릴 때니까. ‘왜, 이러십니까?’ 이럴 뿐이지 왜, 죽이느냐 말이지요.

한 번 봅시다. 다윗이 요새로 하면 성신 받았다 합시다. 다윗은 성신을 받았잖아요. 사울은 악신을 받았지요. 그렇다면 악신과 성령의 싸움은 인간은 몰라요. 숨어 있으니까 인간은 몰라요. 영의 싸움은 인간은 모른다 말이지요. 모르는데 성령과 악신의 싸움은 마지막에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일이잖아요. 그런데 미리 앞당겨서 성신이 임한 자는 그냥 창이 날아오고 악신이 임한 자는 그냥 창을 던지는 거예요. 둘 다 무슨 짓인지 몰라요. ‘미쳤지, 미쳤지, 내가 왜 던졌지?’ ‘왜 저 양반이 나를 죽이려하지?’ 이것은 결국은 뭡니까?  ‘죽음’이지요. 죽음. 창을 겁주려고 던진 것이 아니고 너는 죽어야 돼. 죽으란 말 아닙니까? 이 말은 다윗은 장차 다윗언약을 받을 사람입니다. 그걸 사울은 모르고 사울 속에 악신이 임하니까 사울도 지 맘대로 못해. 못해가지고 장차 일어날 일을 노선을 미리 잘라야 되거든요.

헤롯이 지도 미쳤어. 멀쩡한 두 살 애를 왜 죽입니까? 동방박사에게 뭐라고 물었습니까? 위치가 어디입니까? 하고 물은 게 아니에요. 언제 어느 때에 나는가 묻는 거예요. 그거 왜 묻습니까? 위치 베들레헴은 알아놨으니까 문제는 뭡니까? 고 애 시점만 간파하면 되겠지요. 장소 알겠다, 시간 알겠다, 공간 알겠다, 폭격이에요. 폭격. 두 살 아래 다 죽여 버리잖아요. 왜 그런 짓 했습니까? 헤롯한테 물어보세요. 헤롯한테 물어보면 뭐라 합니까? 몰라~

지금 목사들이나 마귀들이 몰라요. 인간은 지가 알고 행동한 게 아닙니다. 오늘 강의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요, 지가 알고 행동한 게 아니에요. 복음 듣지 말라고 남편이 말리는 것도 지가 알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에요. 논리가 있는 게 아니에요. 괜히 그러고 싶어. 안 그러면 찝찝해. 이게 성경에 나오는 거 아닙니까? 헤롯이 2살짜리 애마다 평소에 애 안고 얼마나 귀여워했겠어요. 하지만 그날만큼은 달라요. 본인도 본인을 종잡을 수가 없어요. 성령 받은 사람도 본인이 종잡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의가 생각나서 예수님의 의를 증거 하는 존재가 된 것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본인이 연기하려고 눈물을 흘릴 수가 없어요.  자기가 어쩔 수 없어요. 악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색을 언제까지 감출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본색을 꾸미란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나오게 돼 있습니다. 10년 복음 들었다고 11년째 무슨 짓 나올지 모릅니다. 이거는 많이 경험하셨지요. 십자가마을을 중심으로 해서 많이들 경험하는 거예요. 12년 들어도 13년째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가룟유다가 언제 가룟유다 답습니까? 바로 사단이 들어갔을 때, 사탄이 들어가 봐야 인간은 자기 본색을 찾아요. 그 전부터 마귀가 역사했지만 특별히 예수 잡아 체포하는 소리 소문 없이 군중들 반란 일으키니까. 세례요한 잡을 때 얼마나 반란이 나타났습니까?  통치하는 입장에서 곤란한 거예요. 조용하니 처리하기 위해서 내모자 공모자의 반란으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누가 밀고자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쳤다라는 예수 죽일 수밖에 없다라는 쪽으로 정치적인 해석을 가하기 위해서 가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예수님 죽일 때, 빌라도의 마누라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날 밤에 꿈이지요.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마귀 들렸던, 성령 들렸던, 인간이란 족속은 지가 지 맘대로 살 수 있는 인생이 못 됩니다.  술 쳐 먹는 것도 지 맘대로 안 되고, 개판치는 것도 지 맘대로 안 되고,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권세가 필요한 거예요. 로마서 13장에 권세 있는 자에게 힘을 줘가지고 이 마귀 같은 세계에 무질서하니까 복음을 위해서 교통정리를 할 필요가 있어요.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는 어느 정도 질서가 유지돼 가지고 복음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복음 증거 하는 자를 보호해야 되고 복음을 전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권세를 천사의 능력으로 그들을 하는 거예요.

우리도 그런 경험을 많이 하지만, 복음을 전하다 보면 여호와증인, 안식교, 통일교 교인들이 많이 도와주고 심지어 중들이 많이 도와주고 하지요. 운전하다가 빵구 났다 이런 경우 물건도 흔쾌히 사주는 것도 이단들이 그렇게 해주고 수돗물이 안 나온다 이단들이 와서 해주고 본인은 모르지요. 그래서 다 필요한 겁니다. 자꾸 이단 욕하지 마시고 사주면 맛있게 잡수세요.  그것도 영양분 채우라고 주신 얻어 먹을 것은 먹고 이단은 이단이고 얻어먹었다고 구원받는다고 할 필요는 없는 거고요.

그래서 성도는 목사도 마찬가지로 복음만 전하면 돼요. 무엇을 내가 행동 똑바로 예의 없다 따지지 마시고 복음만 제대로 전했으면 되는 겁니다. 사람이 행동 똑바로 해서 복음 전한다, 언제 어느 세월에 똑바로 합니까? 어느 세월에. 욱하고 나오는데 언제 똑바로 합니까? 욱하고 나오는 걸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툭 튀어나오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뭐~ 예의 차려가지고, 바쁜데 안 되지요.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다윗은 본인도 몰랐지만 죽음엔 노출됐지요. 그러면 그 죽음은 일상적인 죽음이 아니고 낯선 죽음인데 그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인데 이걸 사무엘상에 갔다 덮쳤다. 또는 예수님의 긴 그림자가 사무엘상이라는 역사적인 현장을 일부러 만들어내게 된 거예요.  그 만들어진 상황을 언약이라 하고 그 언약에 여러 사람들이 집결해서 그들의 움직임과 관계를 통해서 장차 오실 예수님의 수난과 고난에 대해서 미리 앞당겨서 그들이 보여줬지요.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복음 전하는데 좀 편한데 살고 싶다 생각이 들겠지만 우리가 세탁기 속에 들어있으면서 복음이에요. 그냥 독야청정하면서 소나무처럼 외진데 수도원하면서 그게 아니고 세탁기 속에 빨래감 속에 같이 이단하고 삼단하고 같이 섞여서 복음이라니까요.

로마서1장 14절 봅시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했지요. 언제 돈 빌려줬습니까? 사채놀이 언제 했지요? 사도바울이.  사도바울이 사채 썼습니까? 솔로몬한테 사채 썼어요. 뭐라 합니까? 빚을 갚아야 되겠다. 누구한테? 모든 사람에게. 왜 그래요? 모든 사람에게 먼저 은혜를 주신 분이 있어요.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나 구원하려고 사도된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는 택한 자에게만 택한 자 모두를 위해서 피를 흘렸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그중에 한 사람 나에게 사도라는 직책보다도 역할이 더 적합해요. 역할. 드라마하면서 지 역할 안하겠다고 하면 안 되잖아요. 지는 탤런트는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역할은 지가 좋아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울어야 될 때는 울어야 되고, 웃어야 될 때는 웃어야 되잖아요.  직책 같으면 사무보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의 역할, 직책은 넥타이 매고 회사 앉을 때 직책이 되지만, 역할은 꿈을 꾸거나 다니거나 목욕가거나 헤엄치거나 산에 가거나 그것도 다 역할 아닙니까?  존재 자체가 역할이거든요.

나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로다, 그 빚은 돈 빚이 아니고 오직 복음이지요. 복음의 빚인데, 모든 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인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계층과 구애 없이 박혀있는 예수 그리스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빚진 자가 되는 거지요. 그럼 뭘 전하면 그 사람이 ‘아이고, 형제여! 자매여!’ 알아보겠습니까? 복음만 전했을 뿐이지요. 요 모습이 바로 에스겔 모습이지요.  에스겔에게 주께서 뭐라 합니까? 살릴 영혼을 죽이고 죽일 영혼을 살리는데 너는 그러지 말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라, 복음을 전하기 전에 ‘아서라, 너부터 먼저 말씀을 먹자.’  말씀을 찢어서 먹어요. 찢어서. 참 하나님도 에스겔한테.  찢어서 먹어요. 역할도 희한한 역할이 있어요. 성경을 찢어서 먹는 역할을 한다고요.  먹는다고 소화불량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먹고, 아내가 죽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럼 아내는 뭐예요? 가만있다가 죽어버렸어요.

먹었으니까 나올 것은 뭐 밖에 없습니까? 내가 어떻게 사느냐, 이거 어떻게 해서 월급 얼마 받겠는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아니고 주의 역할만 나오는 거예요. 그 역할을 사도바울이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유명인사냐, 수입이 얼마냐, 없지요. 사명이 나의 존재보다 더 세요. 내가 내 존재에 신경 쓸 때마다 사명이 더 강하게 귀때기를 싸대기를 때리면서 정신 차려, 너는 로마에 가야 돼! 로마에 갈 때도 곱게 가면 좀 어떻습니까? 죽게 만들어서 로마에 가게 만드는 것은 그게 또 뭐예요. 그냥 곱게 편하게 앞으로 가면 고생 안 할 건데, 맛있는 거 먹고, 카지노에 가서 좀 치고, 춤도 추고하면 되는데 배가 희한해서 풍랑을 만나서 뒤집어지고 배도 없어요.  로마에 복음은 전해야 되겠고 로마에 갈 배는 없고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 복음 전할 사람이 로마뿐만 아니고 그 중간에 멜리데 추장한테 복음을 전해야 되거든요. 그리고 또 복음을 전했으면 사람이 받은 게 있으면 주는 염치가 있어야 되는데 그 다음에 전했다는 소리도 없거든요. 사람이 뭔가 베풀어 주면 떠벌려서 사도바울 최고다! 하고 있어줘야 효과 좀 있어야 하는데 요셉도 아니고 요셉 때문에  꿈 때문에 성전 복귀해 놓고 입 싹 다물고, 요셉은 잔뜩 기대했잖아요. 하여튼 세상 더러운 세상이에요. 뭔가 염치도 없어요.

사도바울은 뭐라 합니까? 내가 전한 것은 얻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는 이 땅의 쓰레기 같다. 우리는 죽고 너희는 잘 먹고 잘 살아라. 너희는 살고 우리는 죽을게. 그런 이야기를 고린도전서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인간 맘대로 될 일입니까?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안 된다는 말이 애초에 역할이라는 사명역할 입장에서는 안 된다는 게 성립자체가 안 돼요.  빚진 자 라는 말에는 못하겠습니다, 안 된다는 게 성립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주께서 다루기 때문에 안 되는 것도 그것도 사명이에요. 안 되는 일을 안 되게 하시는 거예요. 안 될 놈은 안 돼! 하잖아요. 안 되는 것도 사명이라니까요. 사도바울이 오지랖 넓은 게 아닙니다. 베드로한테 베드로 찾아가서 ‘형님, 그러면 안 되지요.’ 하는 것도 이것도 오지랖 넓은 게 아니고 그게 사명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말씀에는 원칙이 없습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한 번 써먹을 원칙이 없어요. 율법 있는 자는 율법대로 없는 자는 없는 대로 어떻게 종잡을 수가 없어요. 왜, 사도바울 본인도 종잡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로마 가는 방법도 몰라. 어떤 아가보에 딸들이 예언하면서 허리띠 풀어서 뭐라 합니까? ‘당신이 지금 예루살렘가면 잡힙니다.’ 우리 같으면 뭐로 이야기하겠어요? ‘아, 나를 살리려고 성령께서 미리 주께서 조치, 피하라고 했구나!’ 이렇게 했을 건데, 그게 아니고 뭡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됐다, 됐어, 그냥 죽을게.  간다 말이지요.

이것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고 그 때 그 때마다 주께서 일을 만드셔요. 일을. 붕어빵이나 찐빵을 만들 때 우리는 똑같은 걸 틀에 끼워 만드는데, 틀이란 자체가 없어요.  복음이라는 것은 맞는데 십자가 같은 복음인데 이걸 증거 하는 방식과 방법에 대해서는 본인도 장담을 못한다니까요.


여기 써먹은 것을 저기 써먹을 수가 없고, 주께서 그냥 막 써먹는 겁니다. 오래 살아도 소용없고 일찍 죽고자 해도 안 죽고, 이건 그냥 써 먹는 거예요. 이런 모습들이 오늘날 마귀가 설치는 그 가운데서는 우리는 그만큼 융통성이 있어야 돼요. 뭔가 우리가 이 원칙대로 하면 반드시 되더라하면 마귀가 마구 쏘아대는 하나의 법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이여,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보자기가 더러워서 먹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시험을 자초하는 거예요. 나는 이제 술을 안 먹습니다. 때려 죽여도 담배 안 피웁니다.  때려 죽여도 등산 안갑니다. 등산가면 나는 개다. 이거 그냥 역할로 가는 거예요.  때려 죽여도 마누라 팬다 하면 곤란하지만.

복음을 위해서 너는 먹든지, 마시든지 뭘 향해서? 복음을 위해서. 남 때리는 것은 하지 마세요. 지 때리세요. 내가 나뻐.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오해할 소지는 사도회의에서 그런 것은 말고 목 베인 것과 짐승 이런 노골적으로 하는 것은 말고 팔레스타인이 유대인이 알았어요.  아, 사도바울은 이건 우리가 규칙가지고 우리가 잘했다, 못했다, 우리가 판단할 대상이 안 되는 겁니다. 주께서 대책 없이 다루기 때문에 이방인들 구원은 우리가 어떻게 율법적인 잣대로 잴 수 없구나! 그렇다면 성령한테 맡기자.  성령 임하면 무조건 구원 받으니까. 의인되니까.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뭐가 나와야 된다? 십자가 복음이 나온다면 감사할 일입이다. 그게 바로 이 마귀가 설치는 세상에서 우리가 율법적으로 안 당할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아버지, 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법대로 했다고 자기 정당성과 자기 잘난 자기 의를 챙기는 우리의 심보를 너무나 잘 아시고 그 법을 깨시고 그걸 박살내시는 주님,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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