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교회 080210

아빠와 함께 2014. 2. 16. 09:33

본문:요한계시록22장16-17절
제목: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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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08-02-10 13:24 
교회

2008년 2월 10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2:16-17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교회는 없습니다. 현재 교회라고 여기는 것들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된 교회는 인간의 손으로 등장될 수 없고 만들어질 수도 없고 유지되지도 못합니다. 인간의 손으로 등장되고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교회는 아무리 점차 훌륭하게 나아진다고 해도 가짜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종말이 되기까지는 이 지상에 없었습니다.

종말이 되었다는 증거로서 교회라는 것이 발생되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님은 구약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을 ‘광야교회’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곧 절대로 인간의 손에 의해서 유지되거나 지켜질 수 없는 그런 특수한 집단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맹세대로, 자신의 약속대로 뭔가 이런 특별한 단체를 만들어내시고 유지했습니다.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 자손은 매일 아침마다 낯선 음식물을 주워왔습니다. 그것은 만나입니다. 이 만나 주심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에 의해서, 맹세에 의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도저히 예상 못할 일을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통해서 자발적으로 성취시켜 나가시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예상하고 있는 교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교회라고 주장한다면 가짜입니다. 그래서 ‘교회 가자’라는 말은 이상한 말이 됩니다. 교회가 특정 공간을 점유하고 있어서 교회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로서, 교회가 된 자라서 그냥 모여드는 것이 교회의 나타남의 양상입니다.

왜 교회가 없어야 할까요? 그것은 사람들은 종말을 원하지 않습니다. 종말 대신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서라도 자신을 지키고 싶고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참된 교회란 종말이 되어야지만 비로소 등장되는 겁니다. 구약 요엘 2:28-32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끝장내려고 합니다. 그 직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특정 사람들에게만 보내어서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그들만 구원하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짜신 종말 시나리오입니다. 이 시나리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하나님은 일을 진척시키십니다.

따라서 교회가 나타났다는 말은 곧 세상에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종말이 아니면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 바로 오로지 ‘주의 이름’만 부르면서 구원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 전에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과 성실성에 호소해서 신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몸부림을 쳐 왔습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이 주신 말씀을 몸소 실천에 옮기게 되면 구원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의 노력들이 결코 세상이 끝장나는 사태를 지연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마지막이 들이닥쳤다는 말은 하나님의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육은 ‘죽음의 세력’에 휩싸여져 삽니다.

늘 노출되어 있습니다. 갓난 아기도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영문도 모르는 채 늙어가고 있습니다. 죽음의 세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시도 때도 없이 인간 주변을 둘러싸고서는 모든 것을 뜯어냅니다. 철거하고 말소시켜 버립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아담의 죄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 순간도 아담의 죄가 발생되지 않는 순간이 없습니다. 아이스크림이 녹게 되면 그 자리에 그냥 주저 앉아 진득진득 눌러붙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이 아담과 그런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결코 아담과 남이 아닙니다. 아담이 당한 것을 우리가 늘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일부입니다.

이런 육을 가지고 성령을 소지하거나 성령을 다스리려고 하지 마세요. 도리어 주도권은 성령에게 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다”고 말입니다. 육이 영이 될 수 없습니다. 육은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합니다. 사는 것은 성령 덕분에 살지 육이 달라져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입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은 끝장날 시점에 돌입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과 끝장 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끝장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교회랍시고 만들어서 맨날 애들 손꼽놀이 하듯이 권세를 행세하는 식으로 교회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 자체를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합니다.

중력에 의하여 무한정 저 낭떠러지에 떨어질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에 대한 무능성을 알게 됩니다. “아, 내가 나를 위해서 할 게 아무 것도 없구나”라고 말입니다. 요나가 그러했던 사람입니다. 물에 빠져 죽은 요나를 하나님께서 고기를 통해서 고기 안에 갇히게 합니다. 거기서 요나는 죽음보다 더 큰 죽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즉 ‘사람이 살만큼 살다가 눈만 꽉 감으면 그만이겠지’라는 안일한 죽음은 애초에 없는 죽음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보고 ‘정녕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둘째 사망’으로 나타납니다. 죽음이 주는 그 지독함을 요나 선지자는 알게 됩니다.

즉 인간이란 자신의 죽음마저 자기에게 속한 사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5:28-29에 보면,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요나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식으로 자기를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철저하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야 함을 죽음 속에서 알게 됩니다. 낭떠러지에 떨어졌을 때, 성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값없는 생명수’입니다. 거기에 “첨벙!” 떨어지게 되면 비로소 그동안 자신이 값있다고 여겼던 것으로 인해 진정 값있는 ‘값없는 생명수’가 얼마나 고귀하고 중요한 일인지를 아는 겁니다.

교회란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가 발렸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구원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하여 자신의 피를 우리 몸에 성령으로 발라주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소중하다는 그것으로 인해 정작 소중한 ‘값없는 생명수’를 하찮게 여기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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