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나라 2008년 1월 13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2:1-5
(계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계 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이 성경에 보니 나오네요. 성경에 있다면 있는 겁니다. 지옥에 간 부자는 이 성경에 나와 있는 사실을 거부했습니다. 반면에 거지는 성경에 나와 있는 이 천국의 실제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천국에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 있어, 성경에 천국 이야기 나온다는 이 사실 자체가 지독한 무서움이 됩니다.
더욱더 무서운 사실은 그 천국에 지금도 살고 있는 같은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가지 않는다면 아예 갈 사람도 없어야 되는데 내가 가든지 아니가든지 이미 거기에 가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예를 들면, 거울이란 거울 바깥에 있는 나를 그냥 되비쳐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거울 속에 나 말고 어떤 자가 그 안에 들어가 살고 있다면 참으로 공포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그 거울 속으로 들어가 살기 위해서 손톱으로 후벼파도 실은 불가능한 일에 해당됩니다. 무서운 일은 나에게 불가능한 그 일을 그 거울 속의 어떤 인간은 이미 실현해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거울 속의 인물은 흔히 우리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인간임에도 뭐가 다른 게 있기에 그 ‘다른 것’으로 인해 천국에 들어가게 된 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이미 천국가 사는 자들의 이미에 뭔가 적혀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즉 그동안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온 자들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삽니다. 태어날부터 그러합니다. 오로지 자기만 최종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놓고서, 기왕에 사는 이 세상을 천국처럼 살기 좋은 세상이 되고자 시도합니다.
하지만 진정 인간의 이름의 내막은 ‘흙’일 뿐입니다. 그저 흙의 속성만 되풀이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았던 사람은 구약에서 이미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택하신 아들이요 백성들입니다. 그들 가운에서는 ‘하나님의 이름’, 즉 예수님께서 작용하고 계셨습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슨 행위를 하셨기에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그 세계에 들어가 계신 것입니까? 출애굽기 24:8에 보면,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언약의 백성을 위에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려버립니다. 이 피는 흠없는 피입니다. 피없이는 천국도 없습니다.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이제 인간들 간의 주체들의 차이성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이 되어버렸습니다. 즉 면상에 피가 묻어있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너와는 다른 개성을 지녔다는 사실은 천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기차역 대합실과 같습니다. 낮에 가보면 많은 사람이 움집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이란 극히 짧습니다. 곧장 자신이 타야만 하는 기차를 타고 어디론지 뿔뿔히 헤어져야 합니다. 그곳에 장기적으로 기거하는 자들은 노숙자들 뿐입니다. 이 세상이란 어디론지 또 떠나야 하기 위해 잠기 대기하는 대기소입니다.
가야 할 곳은 딱 두 곳으로만 정해져 있습니다. 지옥 아니면 천국,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란 대기소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처소이기에 자력으로 자신의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디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천국에 들어갈 사람으로 결정난 자들이 바로 너희들이다’라는 사실을 성경은 말해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로부터 피를 일괄적으로 받게 되는데, 이로 인해 피가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렸습니다. 앞으로 그들 위에 작용하는 모든 하나님의 일이란 그 짐승의 피로 대변되는 그 분의 실제로 누구신가를 알려주는 방향으로 실시가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피를 면상에 받았다는 말은, 더 이상 자신이 자기에게 투자해서 구축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들이대지 말라는 말입니다.
남녀 노소, 직업을 불문하고 흠없는 분의 피가 아니고서는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약속’이라고 하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포도주로 표현된 피를 나누었습니다. 이 외에 다른 새로운 약속이란 없습니다. 왜 하필이면 피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저주가 예수님에게 임했을 때, 이 때 벌어진 일이 ‘피 흘리심’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피가 우리 얼굴에 묻힌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 자신들이 우리에게 퍼부은 온갖 시도와 투자와 노력들이 하늘에서는 인정해주지 않는 바임을 말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란 자기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찾아오고 예수님을 생각하면 기쁨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잘되든 못되든 자기를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꽁닥꽁닥 걱정 근심이 몰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천국에는 저주가 없다고 했습니다. 저주가 없다는 말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지켜보겠다는 시도하는 모든 것이 다 별일 아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저주가 더 이상 없으니 신경쓸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죽을 때까지 오로지 자기 자신의 것을 사수하기 위해서 자기에게만 신경씁니다.
성경에서 좁은 길로 가라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을 선호합니다. 성경에서 하라하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다 합니다. 마태복음 10:19-20에 보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에서 누군가 오셔서 직접 우리를 데리고 가야지만 저 천국에 갑니다. 그 가면서 우리는 더 이상 너의 소유가 아닙니다. 주님의 피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목자이기에 더 이상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겁니다.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소망이 소망인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속성’이 퍼져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을 우리가 모독하거나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