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와 성도와 천사
2008년 1월 27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2:8-9
(계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계 22:9)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사도 요한이 성도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천사를 그에게 보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성도라는 것은 그 개인을 위해서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과연 내가 성도 맞나?’라는 것을 점검하는 점검표 역할을 하게 하는 취지도 담겨 담겨 있습니다.
분명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1에서 ‘장차 속히 될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19에서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 제하여 버리면 그 사람을 생명나무에서 제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도’라는 존재는 인간이 원해서 나타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에 의해서 생겨난 존재들이라는 겁니다.
즉 사람이 구원받고 싶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재료로 삼아 성도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성도’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자들이 따로 생겨난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12-13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집에 있는 땅콩을 가지고 강정 만드는 집에 가서 ‘땅콩 강정’ 만들어 달라고 하니 그 가게에서 거부합니다. 거부하는 이유는, 자기네들이 사용하는 땅콩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즉 외부 반입이 안되고 오로지 자신들의 자료로서만 ‘땅콩 강정’을 만들어야 제대로 된 ‘땅콩 강정’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성도도 이와 꼭 같습니다. 인간들이 구원받고 싶어 자신을 아무리 하나님께서 드려서 성도 만들어달라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일체 거부하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의해서 일방적으로 성도를 따로 만들어버리십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구원 욕구가 천국에 스며드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리십니다. 즉 종교란 그 어떤 식으로도 인정 못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들의 종교란, 자신들이 죽어서 가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천국을 가짜임을 밝히시고 인간 몰래 미리 와버린 천국을 제시합니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는 겁니다. 즉 이미 와버린 천국에 들어가 있지 않는 자라면 죽어서 가는 천국도 그들에게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미 와 버린 천국은 마치 금고와 같아서 열쇠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열쇠라는 것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없습니다. 천국은 금고와 같이 잠겨있고, 열쇠는 우리 인간에게는 없고. 참으로 기가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작업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고 사역하셨습니다. 즉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염두에 두시고 일하셨습니다.
하나는, 천국이란 잠겨있음과 그리고 거기를 열 수 있는 열쇠는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두 가지 사실을 예수님은 사도 바울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라디아서 1:8)
따라서 사도 바울의 말처럼 ‘다른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 그 둘 사이의 차이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진정 사도 바울과 같이 성도라고 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외침은 곧 하나님에 의한 ’세상 파산 선고'를 의미합니다. 세상이란 어떻게 되든 이미 저주받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참된 복음이란 ‘십자가 피’로 말하는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면서 천국의 화려함과 찬란함으로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식으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정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된 통으로 저주받는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기에 나오게 된 피입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 때문에 저주의 피를 흘렸습니다. 따라서 참된 복음을 아는 자들은 자신이 구원된 것이 흔히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원하는 사랑과 위로의 힘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의 힘으로 구원되었음을 압니다.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아는 자들, 즉 “어찌 할꼬”라고 외칠 수 있는 자에게만 이미 십자가의 사랑과 위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찌 할꼬’를 외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몸을 재료로 하여 ‘구원될 몸’으로 바꿀 생각을 갖고 있는 자에게는 항상 ‘다른 복음’만 찾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세상을 향해 우리 몸을 돌려봅시다. 거기에는 각자 자신의 ‘노동의 가치’만을 알아달라고 아우성치는 구덩이입니다. 심지어 교회 다니는 것도 ‘자기 노동’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교회 다녔다는 그 노동의 가치를 신께서 대가로서 제공해야 한다고 여기게 됩니다. 성당이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모두 ‘자기 노동의 가치’를 신이나 타인들이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그 몸을 십자가 앞으로 돌려서 그 십자가 앞에 세워보시요. 거기에는 묵묵히 피만 흘려내립니다. ‘나 대신 죽으신 분’이 내뿜는 언약의 피입니다. 이 십자가 앞에서 이미 우리는 죽은 자요 더 이상 산 자가 아님을 압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말은 아무런 활동을 못하는 시체라는 뜻이 아니라 뭘 해도 죄밖에 나올 수 밖에 없기에 주님 보시기에 이미 죽은 자라는 판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이런 몸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돌려놓으면 다시 우리는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이 노동의 주체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든 것을 자기쪽으로 응집시키므로서 날이 갈수록 자신의 자존심을 더욱 단단해지겠지요. 참된 성도는 이런 자아의 단단히 토대 밑에서 뽀족한 십자가의 능력이 올라오면서 자신의 존재 바탕이 조각조각 나버립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고쳐볼까나 하고 나올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가져가면서 날마다 우리 자신이 왜 죄인일 수밖에 없느냐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구원의 공로를 오직 예수님에게만 돌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와 성도와 천사의 공통점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삶이다는 점에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염두에 둔 천국이 왜 가짜 인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