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2008년 1월 20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2:6-7
(계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계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사람들만 분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말입니다. 성도는 모든 삶의 구석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느낍니다.
사도 요한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1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보게 되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결코 자신이 애쓰고 노력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어서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처럼 복이라는 것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로서 사도 요한은 복받지 못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모든 생각들이 그냥 헌 하늘과 헌 땅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헌 하늘과 헌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어떤 일도 사도 요한이 얻게 된 복을 취소시키거나 무효화 시킬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이 성경 말씀을 보면서도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이 성경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취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옛 하늘과 옛 땅에서 형성했던 자기 생각을 여전히 고수하면서 성경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의 그 어떤 말씀도 자신을 훌륭한 자로 만들어버리는 근거로 작용하게 됩니다. 즉 “나는 성경을 보기 전까지는 죄인이지만 이제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으면 의인되고 거룩한 자로 변모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오직 ‘복을 주셔야만’ 구원이 가능한 이 이유를 모릅니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 본성에 대해서 인간 본인도 모릅니다. 살다보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가 노출되게 됩니다. 사람들의 모든 스트레스는 ‘자신의 의로움을 사수하는데’서 생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3:10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서 3:23에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즉 인간이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해도 죄가 되고 하나님을 잊고자 하여도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 가운데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설교를 하든지 예배 참석을 해도 그것조차도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가 관여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인간은 자기 의로움을 기어이 사수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리고 있습니다. 즉 ‘나는 잘났다, 나는 위대하고 관대하고 훌륭하고 착하고 사랑스럽다’라는 것을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게 되면 사람들은 마치 이왕에 훌륭한 자신을 더욱더 훌륭하게 만드는 방법을 하나님이 주신 줄로 착각합니다.
이런 의식이나 사고방식이 모두다 옛 하늘과 옛 땅에서 배운 것들이요 모방한 것들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거룩한 말씀을 주신 것은 예리한 칼을 인간을 향하여 들이미는 일입니다. 물론 칼자루 쪽은 하나님이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날카로운 칼날 부위를 자기 손을 덥석 쥐면서 그 말씀을 지키므로서 모처럼 찾아온 천국에 들어가 보겠다고 나섭니다.
하지만 날카로운 칼날은 쥐면 쥘수록 피만 날 뿐입니다. 하나님의 예리한 칼은 더욱더 깊숙이 그 인간을 향하여 쑤셔버립니다. 어떤 남자가 임신하지 않기 위하여 날마다 피임약을 복용하고서는 나중에 “나 피임을 성공했다”라고 혼자 좋아들 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인간이 뭘 해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1:1에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나는 죄인이다”와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노라”를 연결시킬 수 있는 겁니까. 즉 죄인이면서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 7절에 나오는 ‘복이 있으니라’가 정답입니다.
성경을 구약부터 훑어보면, 세상 모든 자들이 옛 하늘과 옛 땅의 버릇으로 하나님을 찾고들 있는 것 가운데서 참 하나님은 오로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이스라엘에 찾아오셨습니다. 그 찾아오셔서 알려 주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바로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존재로 인간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없는 자’에 불과하고 ‘죽은 자’에 불과합니다. 즉 있어도 있으나마나 하다가 결국은 없어지는 존재로 보고, 아무리 우리 인간들이 살겠다고 발바둥쳐도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일 뿐입니다.
즉 우리 인간의 힘으로 자신을 ‘있게 되는 자’ 혹은 ‘산 자’로 바꿀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평가를 생각지 않고 그저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불 수도 그 세계에 발 딛딜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슨 최선을 다해도 다 소용없고 무의미한 일입니다.
사도 요한이 외치는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노라” 앞에서 이런 최선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바로 말씀이 이 하나님의 행동 원칙을 실어서 주셨습니다. 오직 복을 받아야 될 너희들에게는 없는 자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의 12아들에게 이 복의 내용으로 축복을 했고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이 복의 내용으로 축복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의사소통하는 유일한 대화 내용은 딱 두 가지입니다. “회개하라. 내가 용서해줄게”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유를 막론하고 “하나님 제가 잘못 되었습니다”라고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해 두신 아들이 죽으신 그 피로만 용서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거부하고 자꾸만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봐주소”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고 기피하는 악마적 본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외부 현상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오직 회개와 용서만으로 대화가 이어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을 다가도록 고백할 말,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를 말할 수 있는 기쁨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