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겨울수련회 에베소서강해 제 9강 : 내부전쟁 - 이 근호 목사
9강 시작합시다. 에베소서 6장 10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렇게 되어 있죠.
구약에 있어서 전쟁에 관한 한 전형적인 틀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마련해주셨습니다. 전쟁을 할 때 하나님이 주도하는 전쟁의 형태는 이스라엘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형태의 시스템이 그대로 신약까지 이어집니다.
마귀와 전쟁할 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에베소서 6장을 보면서 이 성경말씀이 구약과 연계하는 전쟁이 아니면 우리는 내 구원을 위한 사적인 전쟁이 되어버려요. ‘마귀를 이겨야 내가 구원받는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대상도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전쟁을 빙자한 나의 전쟁에 국한되죠. 그런 식으로서는 성경을 도외시한 자신의 구원 야심이 강하게 작동했을 때 그런 오류가 발생됩니다.
그럼 구약에서의 전쟁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 민수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이 벌이는 전쟁에 이스라엘 안에 갖추어야 될 틀이 나옵니다. 민수기 2:3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네 진영으로 나눠 열두 지파를 동남서북 사방으로 분산시키고 각 면, 외부의 적과 접하는 일종의 막이죠, 이 선에 대해서 열두 지파를 배정해놨어요.
세 지파가 한 조가 되게 해서 각 쪽에 조장을 두었습니다. 동쪽 조장은 유다이고 그다음 잇사갈, 스블론. 남쪽은 르우벤이 조장이고, 시므온, 갓이 남쪽에 있어요. 그다음 서쪽 조장은 에브라임이 조장입니다. 그다음 므낫세, 베냐민이 조원이 되는 겁니다. 북쪽은 단 지파가 조장이 되고 아셀, 납달리가 북쪽에 속하죠. 이상스럽게도 아셀, 납달리가 이스라엘 북쪽 진영에 있습니다.
이렇게 배치를 하게 되면 이것가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움직입니다. 움직이면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방민족들이에요. 자, 이방민족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없는, 언약이 존재하지 않는 민족이 이방민족이에요. 언약이 없으니까 그들의 신은 당연히 우상이 되는데 우상을 쉬운 말로 고치겠습니다. 헛된 신. 아무 내용이 없는 신.
우상.내용이 없는 신이니까 내용은 원래 하나님 쪽에서 채워야 되는데 ‘우리는 신을 믿습니다. 신을 인정합니다.’라고 인간 쪽에서 요청했기 때문에 내용은 허한 거예요. 그럼 이방 신에게 신의 내용은 누가 채우겠습니까? 인간의 야심과 욕심이 채우는 거예요. 죄와 허물로 가득 차 있는 신이나 그 인간이나 전부다 한 통속이 되는 신입니다. 이게 우상이에요.
그럼 참된 신은 뭐냐? 하나님 쪽에서 채웠기 때문에 우상을 배제한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이 자기 신의 속성을 채웠다는 말은 인간과 진짜 하나님 사이에는 틀어지는 요소가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당연히 그 신은 인간에게는 배제당하고 하나님은 그 배제당할 것을 아시면서 내용을 메운 겁니다.
그래서 흔히 “신을 믿는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들으면 여러분들은 이제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오기 때문에 ‘아, 우상숭배자구나. 우상숭배자가 교회 만들어놓고 모였구나.’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아, 우상숭배자구나.’ 하면 돼요.
내용은 인간들이 로마서 1:21절, “하나님을 알되” 있잖아요. 그게 우상이거든요. 내용은 빠져있고 신은 자기의 확산, 확대, 자기존재의 확대에서 신까지 무한까지 접수하려는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접수하려는 그러한 의도인데, 그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거기에 담겨 있질 않습니다.
이런 신이 다른, 참된 신으로 인하여서 서로가 지향하는 신이 다르다는 최초의 사건이 살인사건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나한테 연결된다 했습니다. 가인이 생각했던 신이 진짜 신에게 거부당하자 그 가인 마음속에 있는 악이 일종에 선전포고를 한 거죠. 동생을 죽임으로써. 한번 붙자. 그게 전쟁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주변에 무수한 이방민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숫자가 얼마 안돼요. 소수이고 대다수의 이방민족은 큽니다. 이걸 마음의 지도에서 마이너스 쪽으로 확 축소시켜서 결국 전 지구를 수평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은 그냥 점에 불과한 거예요. 이 이스라엘을 누가 기다리나? 이스라엘을 전체 이방민족이 다 기다리고 있어요. 이건 뭐 전쟁해봐야 누가 이기겠어요? 이방민족이 이기겠죠. 그래서 신명기에도 나와요. 너희들 숫자를 의도적으로 내가 적게 했다. 적게 해야 숫자 대 숫자로 시합해서 우리가 이겼다는 소리를 못하기 때문에. “적은데 이겼네? 이거 희한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는 지도를 확대해보겠습니다. 좁게 보겠습니다. 좁게 보면 이 안에 뭐가 있느냐?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여기 열두 지파가 있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분으로 한 지파를 남겨두었습니다. 그게 레위지파에요. 레위지파가 하는 일은 진영 가운데 언약궤가 있는데, 언약궤는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는 상자를 말합니다, 그 상자 주위에 또 하나의 띠를 형성하고 또는 막을 형성하는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그러면 이 레위지파가 하는 일은 뭐냐? 레위지파가 하는 일은 언약궤에서 나오는 특수한 죽음, 언약궤에서 특수한 피를 흘리면 인간들에게 있는 피와 특수한 피를 구분 짓는 기능을 레위지파가 해야 돼요. 레위기 17장에 보면 인간들은 피를 흘려선 안 된다. 이 거룩한 곳에. 인간은 피를 먹지 마라. 내가 피를 흘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죽여 버린다고 나오면서 “피는 생명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레위기 17장을 여러분들이 보면서 피가 같은 피가 아니라는 것을 감 잡아야 돼요. 희생 제물에서 나오는 피, 특정 장소, 언약궤 있는 곳에서 잡는 특정 피와 그 외의 피를 날카롭게 구분 짓고 있는 겁니다. 특수한 피와 일반 피, 백성들이 갖고 있는 인간의 신체에 흐르고 있는 피와 양의 피라든지 염소 피, 소의 피 같은 제물의 피를 냉혹하게 냉정하게 가리는 거예요.
가려서 민수기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민수기 3: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외인을 가까이 하면 너희가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민수기 1:51절에도 “장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장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찌며 이스라엘 자손은 막을 치되 그 군대대로 각각 그 진과 기 곁에 칠 것이나 레위인은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그러니까 레위지파가 한 일은 특수한 죽음의 피, 이 피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이 육체에 갖고 있는 이 피에게서 아주 냉혹하게 접근을 금지하는 거예요. 그럼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이스라엘 전쟁은 결국 뭐냐? 내부 전쟁.
지금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 싸운다고 하는 거잖아요. 이방민족과 싸우는 게 이스라엘 목적이 아니에요. 이방민족은 허수아비고 들러리입니다. 들러리. 지금 이 싸움이 본 싸움이 아니고 진짜 본 싸움은 이스라엘이 과연 하나님의 특수한 생명을 보존할 거냐, 아니면 내부 전쟁에서 패배해서 궤멸당할 것이냐 이 내부 싸움이 진짜 싸움이고 이 내부 싸움이 실패하게 되면 특수한 피가 이방민족을 작살내는 것은 시간문제죠.
이스라엘이 외부민족까지 가기 전에 내부 전쟁부터 철저를 기하면서 열세 지파를 만들고 한 지파가 열두 지파로 하여금 보초 서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궤에 피가 있으니까 생명이 여기 있다고요. 그러면 생명을 다른 것이 차단한다는 말은 여기에만 생명이 나오고 다른 쪽에는 생명이 있다, 없다? 이건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생명이 없는 거예요. 죽은 목숨이라고요. 하나님께서 전쟁을 할 때 생명과 죽은 목숨과의 차이성을 남기는 그 차이를 위한 전쟁을 하나님께서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평면으로 해서는 잘 모르니까 제가 손으로 위로 싸악 당겨볼게요. 곱게 한번 당겨볼게요. 그럼 평면이 수직이 되겠죠. 그럼 수직적으로 한번 봅시다.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수직적으로 당겼으니까 가운데가 쏘옥 올라오겠죠. 그러면 제일 정점에 언약궤가 있고 여기서 피가 중력에 의해서 아래로 내려오죠.
이러한 이미지가 현대 경제학에서도 나와요. 경제학에서 ‘낙수 경제론’이 있습니다. 낙수 경제론이라는 것은 국가가 기업의 세율을 감면시킴으로 말미암아 기업이 갖고 있는 여유자금이 시설투자로 내려가게 하는 겁니다. 국가가 돈을 풀어서 기업가의 세금을 감면함으로써 기업가의 여유자금이 시설투자로 내려갈 때 국가가 기업과 함께 정점 위치에 있으니까 이걸 ‘낙수 경제’라고 합니다.
그럼 기업이 여기 시설투자를 하게 되고 시설투자를 한 만큼 고용증대가 되면서 이 고용증대로 인하여 노동자들이 수입을 얻게 되고 수입을 얻은 노동자들이 소비층을 형성하게 되면 생산된 제품의 구매력을 갖게 되죠. 구매력을 갖게 돼서 경제가 내부적으로 선순환 서클을 이루게 된다는 겁니다.
풀렸던 여유자금이 생산설비 투자로 들어가면 여기서 점점 더 노동자 수입이 많아지니까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중산층이 두터워지면 고정된 구매층이 두터워지게 되고 이렇게 해서 풀었던 세수(稅收)가 국가로 소환되어버리면 외국기업에서 국가의 국채와 채권을 구입하게 되고 신용도가 높아지면서 환율 차이에서 오는 기업의 부담을 줄여줄 수도 있는 문제에요. 하나를 먼저 풂으로써.
그럼 다른 데 국채와 채권을 통해서 신용도가 높은 국가가 투자 들어오게 되면 이걸 가지고 국가는 간접자본으로 항만, 철도, 도로의 포장 그런 것도 쓸 수가 있고 그다음에 중산층이 두터워지게 되면 외국투자에 따라 취직을 하게 되면 빈곤층이 낮아져서 빈곤층에서 발생되는 치안경비도 많이 감소가 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낙수경제에요. 물을 떨어뜨리는 경제라는 거예요.
자, 이걸 그대로 적용시켜봅시다. 피가 위에서 내려올 때에, 피가 내려오게 되면 사람들은 이 거룩한 피와 자기가 살고자 하는 목숨과의 극렬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차이를 보여주면서 언약궤의 피가 중요하지, 내가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죠.
그런데 레위지파의 숫자를 비교해서 민수기 3:39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을 좆아 레위인을 각 가족대로 계수한즉 일개월 이상 남자의 수효가 이만 이천명이었더라” 레위인 숫자를 따로 왜 세우느냐 하면, 민수기 3:1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의 핵심부분은 누가 유월절 양과 교체해서 살았느냐를 가지고 나는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받은 새로운 이스라엘로 규정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규정을 위해서 레위인의 숫자가 3:39절에 보면 이만 이천명이죠. 이만 이천명인데 43절에 보면 “일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처음 난 남자의 명수의 총계가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에요.
그러면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과 이만 이천명의 차이가 얼마냐 하면 이백 칠십 삼명 차이나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일대일 대응, 쪽수 맞추기에요. 쪽수 맞추기인데 레위지파의 숫자와 대신해서 레위지파가 원활하게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로서 태어난 자는 유월절 그때 취지가 아직도 이스라엘 내에 움직일 때만 비로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다는 거예요.
열두 지파 이것은 하나의 경비 부대이고 중요한 것은 레위지파와 그들 존재, 그들의 목숨과의 차이를 이스라엘이 느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서 레위지파가 온전하게 위에서 내려오는 낙수 정책에 의해서 언약궤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을 부여받은 새로운 생명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 태어났다는 거예요. 레위지파는 이만 이천명이고,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명수는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고.
쪽수를 맞추는데 왜 이게 딱 안 맞는가? 이게 딱 안 맞아야 이게 쪽수가 맞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머지 273명을 위해서 여기 46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 칠십 삼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매명에 오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
그러니까 273명의 존재는 ‘인간의 쪽수가 맞다’가 아니라 새 생명,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레위지파가 일하는 직장, 레위지파가 어디서 일하죠? 성소죠, ‘성소의 존재가 새 생명과 관련성 있다’를 증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숫자를 맞는 듯 아니 맞는 듯, 맞는 것 같은데 약간 다르게. 그 약간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의도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농협에서 가을철에 쌀 수매할 때에 품질을 보기 위해서 농협 직원이 가마니를 푹 쑤시죠. 푹 쑤시면 보고 “아, 이건 1등급.” “2등급.” 이렇게 하죠. 그런데 아주 구두쇠 같은 농부가 농협 직원이 가마니 한 구석을 푹 쑤셔서 낱알 한 열댓 개 뽑았다고 해서 “손해 물어줘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거 없죠.
수박 먹을 때, 요새는 모르지만 옛날에는 삼각형으로 뽑아서 맛보잖아요. 삼각형으로 뽑아서 주인이 “이거 답니다. 완전히 익었어요. 한번 뽑아볼까요? 먹어보세요. 얼마나 단지.” 먹었습니다. 그럼 사는 사람이 “그 삼각형 빼고 값 따져서 싸게 해야죠.” 이런 사람 있습니까? 야박한 사람 있어요? 없죠.
샘플(sample)로 뽑잖아요, 샘플로. 샘플로 뽑는 것은 전체를 대표하잖아요. 그러니까 샘플로 뽑는다는 것은 이 성소의 존재가 현재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샘플이 된다는 뜻이에요. 이게. 그러니까 전쟁은 지금 이스라엘 내부 전쟁이 제대로 원활하게 돌아가느냐의 성패(成敗)에요. 나머지 이방민족 이거는 전부다 좀비 같은 거예요. 숫자 많아도 소용없어요.
유튜브 보면 이런 게 있어요. 그래픽으로 해서 좀비 200만명과 자동소총을 가진 로마군인 200명 중 누가 이길까? 이런 게 나와요. 좀비 200만명이 달려들어요. 자동소총 이건 총알이 무한정이에요. 놀며 해도 이겨요. 놀며 해도. 그걸 보고 이스라엘 전쟁이 바로 저 전쟁인데 그걸 ‘붙이시는 전쟁’이라 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들 말고 나머지를 좀비로 봅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어도 산 게 아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구분 안 되는 것. 기다려 봐. 너희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게 생명인지 아니면 그냥 죽을 목숨인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셔서 확인 차 들어갑니다. 거 봐. 죽잖아.
그러니까 이스라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그러면 민수기에서 말하는 이 군대 진영이 무기가 되는데 이 무기에 명칭을 붙이고 싶어요. ‘단일무기’. 무기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언약궤가 하나니까요.
그럼 그게 에베소서의 전쟁과 관련이 있나? 연속됩니다. 관련 정도가 아니고 연속되죠. 그게 바로 에베소서 4장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4:4절에 보면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자, 여기 보면 하나가 계속 나오죠. 4:1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3절에 나옵니다. 성령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라는 거예요.
하나 되어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 되어야 그게 무기에요. 우리 구원은 없어요. 무기로 사용하는 거예요. 하나 되는 것. 독수리 형제가 형제 간에 몇 입니까? 독수리 5형제, 다섯 명이죠. 그러나 언제 그게 하나가 돼요? 전쟁할 때. 크로스!
그러니까 모든 현대인들은 self control이기 때문에 가족이라도 하나가 아니죠. 다른 가족들 어디 갔어요? 나는 나 하나로도 충분하다는 거예요. 괜히 다른 식구가 식구란 이름으로 비비지 말고 들어오지 말라는 거예요. 내부 통치죠. 자기 self 통치에요. 국가도 싫고 결혼도 싫고 다 싫어. 그냥 나는 나를 지키는 단일 무기로 자기를 생각해서 하여튼 말을 해도 연필 깎는 것처럼 뾰족하게 이야기해요. 이걸 ‘방어기제’라 하는데, 말하기만 해봐. 찔러버린다. 항상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요. 샤프하게 갈아가지고 까이기 전에 깐다는 취지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무기화되어서 본인만을 위한 무기화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에베소서 1장에서 우리가 했듯이 이미 단 하나로 통일되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언약의 무기에 집결하면서 철저하게 자기 안에 나는 나밖에 모르는 내 안에다가 주님의 하나가 여기서 그 틈과 그 차이를 인정하는 내부 전쟁의 연속을 가지고 에베소서 6장에서 ‘전신갑주’라 하는 거예요.
중세 때 기사처럼 복장을 하는데 그 복장이 어디서 왔습니까? 인간은 자기 몸인데 에베소서 6장을 봐요. 그 복장을 잠시 봅시다. 중세 돈키호테 복장 있잖아요. 전신갑주를 취하죠. 허리 띠를 띠고. 그러니까 허리 띠를 띠면 안돼요. 이건 자기를 지키는 거예요. 자기를 지키는 무기가 되면 안 되고, 자기가 무기인 거예요. 진리로 허리 띠를 띠게 되면 이것은 하나가 되는 독수리 오형제가 되는 거예요.
여기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 그다음 믿음의 방패, 화전을 소멸하는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이것 다 어디서 낙수된 겁니까? 어디서 온 겁니까? 인간이 공장에서 만든 거예요? 아니죠. 문방구에서 산 겁니까? 아니죠. 이거 보면요. 마치 여기 있는 무기가 컴퓨터 게임의 캐릭터 같아요. 돈 한 200만원 주면 하나 더 추가해서 주는 것 있잖아요.
이것은 내 것이 아닌데 내 안에 뭔가 이질적인 것이 들어온다는 것, 어떤 사람만 이것이 쉽게 용납되겠습니까? 주님과 나 사이에 차이성을 발견하는 거예요. 차이성. 그래야 내부 전쟁에서 우리가 주님 앞에 철저하게 종속되고 주님 앞에서 패배자가 되는 즐거움 될 때 우리는 주님과의 밀착된 결합력을 유지할 수 있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기가 나만 복장 갖춰서 연병장에 집합하는 것 같은데 총사령관 앞에 집합해보니까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은 돈키호테 복장을 하고 왔단 말이죠. “너 그거 어느 시장에서 구매했나?” 물으니까 “구매하기는 뭘 구매해? 나도 주님이 다 이루신 것을 그냥 입었지.” 그러면 이것은 나와 너 사이에 학력, 인품, 수입, 남자, 여자 관계없이 똑같은 것을 뒤집어쓴 거예요.
갈라디아서 3:28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7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뭐 입었다? “옷 입었느니라”
그 옷 입은 대상을 보니까 다 달라요. 살아온 과거가 다르고 가정환경도 다르고요. 건강상태 다르고 성격 다르고 출신성분 다 다르고 사회적 계층 다 달라요. 중산층, 하층, 빈곤층 없습니다. 상류층 없어요. 그거 상관없어요. 공통점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민수기 3장에 이스라엘의 전쟁 형태입니다. 좀비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세상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다 그런 건 아니지만 20대, 30대 젊은 사람들을 보게 되면 제가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침몰하는 타이타닉 배 밑에 붙어있는 빈대, 그냥 빈대에요. 배는 이미 좀비 배거든요. 좀비들이 만들어놓은 이 배는 지금 침몰하고 있는데 거기서 성공하겠다고 빈대처럼 딱 붙어있어요. 요새 빈대 막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요. 안 떨어져요. 저 성공 내 성공 되겠다고 붙어있어요. 그래서 싸움을 해야 된다고, 경쟁을 해야 이긴다고요. 어디에 붙어서? 침몰하는 배에 붙어있는 거예요.
침몰하는 배에 붙어서 손흥민 열세 골 넣고요. 열세 골 넣으면 뭐합니까. 침몰하는데. 바람의 손자는 지금 메이저 리그에서 뛸 거예요. 이정우인가 유격수로 뛰는지 모르겠어요. 뛰면 뭐합니까. 침몰하는 배에서 메이저 리그로 뛰고 있는데요. 내년에 총선하죠. 국회의원 뽑잖아요. 하니 뭐 하겠노. 소고기 사먹겠지. 당선됐다고. 침몰하는 거예요.
방향이, 이쪽의 특수한 피 쪽과 내 쪽과의 차이가 불연속적으로 갇혀있다는 거예요. 완전히 막혀있다는 걸 알아야 돼요. 막혀있기 때문에 아무리 여호와 부르고 해도 우리 쪽에서 올라가는 것은 위쪽에서 차단해버려요. 위에서부터 내려오니까요. 그것도 완료된 상태에서 내려와요. 완료된 상태에서.
무기를 이렇게 적용하면 또 우리 마음에 슬그머니 또 올라오는 것이 우리 자신들의 걱정이죠. 나오는 질문이 “목사님” “왜요?” “내가 과연 성령 받아서 주님 군사의 돈키호테인지, 중세 기사로 모집되었는지 내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하여튼 맨날 확인 못해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이 왜 존재하는지를 감사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1장과 디모데후서 1장에서 언급한 이야기를 우리가 수고스럽지만 양쪽 두 개를 결합시켜보겠어요. 디모데전서 1:13절에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전’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경우에 내 인생이 토막 났다는 것을 스스로 지금 인정하고 있는 거예요. 내 인생 엿가락 쪼개지듯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로 이어진다고 예상했는데 난입한 천국에 의해서 성령의 영역에 의해서 언약 십자가 그 피에 의해서 내 피를 보존하는 내 목숨 연연하는 이것을 두 동강 내는 일이 있었다. 그게 바로 “전에는”이라고 하는 거예요.
전에는 어떠했는가? 핍박자요 폭행자였어요. 생각해보세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깡패 출신입니까? 조폭 출신이에요? 아니잖아요. 사도 바울 자신이 폭행자요, 핍박자라 하는 경우는 이 경우를 누구 쪽에서 유발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사울은 괘씸해서 도저히 이런 이단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그다음부터는 예수님 소문 듣고 화가 나서 분노를 절제할 수 없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체포해서 죽이는 데 가담했고 스데반 죽이는 데에 가담한 거예요.
그럼 그 동기 유발자, 점잖은 나, 바리새인처럼 학자인 나, 서울대학 출신인 나를 왜 이렇게 폭행자로 몰아세웠는가? 자기는 폭행자가 아니라, 이것만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유일한 일이라 생각했고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이 이단 척결이니까 하면서 주의 일에 말려들었어요.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할 때는 말려들었다 하지 않고 의당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이죠.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났을 때, 비로소 주님한테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전에는 긍휼이 없었는데 지금은 긍휼을 입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게 내게 주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스로 자기 안에 내부 전쟁을 겪은 사람은 지금 누가 뭐래도 천국백성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례로 보여줬기 때문에. 내부 전쟁이에요. 나도 어떻게 감당이 안돼요. 내 인생이라고 생각해서 전에는 내 인생을 감당했는데 이제는 내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모든 사람’이라 했으니까 ‘사도 나는 구원받았다. 끝.’ 이게 아니라 동일한 현상들이 나를 통해서 내가 전한 복음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주께서 이루도록 했다는 겁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샘플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옷가게에 있는 마네킹으로 앞에 철따라 옷 갈아입히는 마네킹으로 쇼윈도에 내세우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사도로 우리 앞에 등장시킨 거예요. 나 죄인 중에 괴수인데 내가 입은 전신투구 이것 봐. 이거 내 구원용 아니야. 주님이 하시는 전쟁이 어떤 전쟁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불렀다는 거예요. 이게 디모데전서 1장 이야기에요.
그럼 이걸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에서는 더 심화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9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보세요. 디모데전서 1장 이야기하고 다르죠. 디모데전서 1장에서는 뭐냐? 자기가 폭행자요 내가 핍박자라 해서 무엇이 강조되었느냐 하면 내가 주님을 핍박했다는 쪽으로 강조했는데 이제 더 심화되어서 그것마저 내가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 말은 주님이 스스로 자기를 친 거예요. 킹콩처럼. 우갸갸갸. 뭐냐 하면 이 민수기 구조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 것으로 가져가서 자기 내부에 불연속성으로 주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자기 안에 내부 전쟁을 먼저 일으키고 그 내부 전쟁을 바깥으로 전개시키는 그게 바로 비밀이 역사 속에 확장되는 그러한 원칙입니다.
우리에게 나의 전쟁이란 있을 수 없고 나한테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 라면 끓인다고 물 얹어놨다가 물 넘치는 것까지 전부다 주님의 전쟁입니다, 이게. 소소한 것, 정말 하찮은 것. 아들 수능 망친 것, 너무나 하찮은 이야기. 아버님 돌아가신 것, 하, 너무나 하찮은 이야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장사지내게 하라. 이게 우리보기에는 대단한데 주님은 “그게 대단해? 그건 네 명예의 싸움이고 네 가문의 싸움이잖아. 너의 싸움이잖아. 지금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너의 전쟁과 불연속적으로 끊어내기 위해서 하는 거야.”
네가 너를 지키는 전쟁은 이 민수기 3장의 구조에 의해서 단일 무기에 의해서 자기 지키는 전쟁과는 차이가 나야 돼요. 내부 전쟁이에요.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주님의 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누가 묻기를 “너 뭐야?” “나? 적이야.” 이러면 돼요. 뱀이야~ 나오잖아요. 적이다~ 주님의 적입니다.
깡패 나오는 <친구>라는 영화 있잖아요. 볼때기 잡아당기면서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이때는 또 위협적으로 선생님이 손목시계를 풀어요. 안 풀어도 돼요. 안 다치는데 내 각오가 대단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시계 풀면서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깡팬데요.” 이걸 번역해줘야 돼요. 번역하면 ‘저 깡패 새낀데요.’ “이게 어디서 샘 앞에서 농담하려고 하는데?” 다른 친구들이 다른 돈키호테들이 “맞는데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 십자가마을한테 “너 뭐야?” “저 이단인데요.” 왜 말을 못해! “너 이단이지?” “어떻게 알았어?”
교재 결론부분 한번 봅시다. 교재 결론부분은 이 정도보다 더 심각하게 적어놨어요. 제가 다시 한번 읽어봤는데 이렇게 심한 말을. 교재 p.10 밑에서 7번째 줄에 [성령이 오셨다. 십자가를 반복하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을 그때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순간이었음을 알려주신다.] 누가? 예수님이요.
[새삼 추가시킬 신비는 없다. 그저 ‘고귀한 거짓말’만 제시하신다. ‘출현된 어리석음’에 우리 정신이 부딪쳐 깨어지기를 요구하신다. 십자가가 십자가를 낳겠다는 것이다.] 어디 안에? 배태하는 장소는 우리 안에. 죄인 안에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 안에 집어넣는 낙수 원칙을 적용시키는 거예요.
언약궤의 피가 현재 네가 보존하는 네 생명과의 차이성을 두면서 너는 이제는 유월절 대신해서 목숨 바뀐 새로운 생명을 출현시키는 그 전쟁에 네가 초대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정들었고 우리 목적과 삶의 희망으로 삼았던 이 좀비의 세계, 이 세계에서 난 이겨서 내가 여기서 성공자 되겠다는 이 세계는 뭐냐? 그쪽 세계는 아까도 말했지만 그것과 이제 헤어져야 되죠. 그 전쟁이에요.
그 전쟁한다고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내 복음을 왜 안 들어? 들을 귀가 없어.’ 이렇게 할 게 아니라, 자기 내부 전쟁에서 내가 살아도 내 것이 아니고 사나 죽으나 내가 나의 구원이라는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욕되게 했는지. 나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다니고 복음 연구한 게 얼마나 나쁜 짓이고 마귀 짓인가를 발견하는 거예요. ‘하나님 사랑합니다. 복음 사랑합니다.’ 해놓고는 자꾸 우회해서 결국 노리는 건 뭐였습니까? 나 천당 가게 되었어. 애초부터 그것은 나 사이에 불연속성이 없었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주께서는 그걸 통해서 있는 우리 모습보고 “언약궤 바깥에서 기다려라. 내가 다 이루었느니라. 성령을 통해서 위에서 성령을 흘려보내줄게.” 그렇다면 이 구원은 무기가 내 무기 있고 네 무기 있는 게 아니고 ‘우리끼리 경쟁하고 게임하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밖에 없는 단일 무기여야 돼요. 독수리 오형제. 주님을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겁니다. 새 생명. 주님께서 주신 거예요.
세상과는 어떤 관계에 있어야 되는가? 그것은 세상에 나온 찬송가가 말해줄 거예요.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결국 우리는 매일이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잊혀진 계절을 우리가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왜냐하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에게서 무기를 들어낸다고 합시다. 주께서 진리의 무기, 전신갑주를 벗겨내면 우리는 똑같아요. 불신자도 자기 죽어서 좋은 데 가길 원하고 나도 천당 가길 원하고. 우리가 새 생명 얻은 것은 주님 혼자 단일체로 통일체로 만든 그 무기가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럼 10년, 30년, 40년 동창으로 살았던 그 동창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헤어져야 돼요. 헤어지게 하셔요. ‘그날에 쓸쓸한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 마디 변명도 없이’ 결국 인간은 이 좀비는 주님 세계에 허락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노래하는 세상 노래가 따지고 보면 다 복음과 관련되어 있는 노래들이 나온 거예요. 좀비 작사, 좀비 작곡이라도 우리 보기에는 이중성, 내가 전에는 폭행자였던 그것마저 주께서 행하신 일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 사는 것에 여러분 구애받지 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침몰할 것 아닙니까. 구애받지 말고. 미련 둘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투구 쓴 순간, 예수님이 세례 받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 신세’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 이단으로 죄인으로 태어나 이 땅에 누워 해 저문 노을을 바라다보는 겁니다. 어디에 눕는데요? ‘저 빳다에 누워서’ 해 저문 노을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고 그게 성령이에요. 아, 침몰하는구나. 어느덧 우리의 강의도 서서히 끝나가는구나.
우리가 바로 예수님 몸에 합류해서 예수님과 동일한 운명으로 예정되어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중 구조로 위와 아래 두 개의 시선을 다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전까지는 나의 전쟁밖에 없었고 남한테 안 지는 것이 사는 이유였습니다. 이제는 질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세상이 침몰하는 것도 주님의 안목으로 발견하게 되었사오니 이것이 창세 전에 이미 주 안에서 계획된 주의 일이지, 어느 하나 나의 일이 없음을 도리어 홀가분하게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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