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말씀
- 신명기 속의 그리스도-
Ⅰ 서론
1. 못 알아먹기
사람은 타인은커녕 자기 자신도 못 알아먹는다. 그것은 자기를 낳은 근원을 후차적으로 조성하기 때문이다. 곧 자기가 태어난 자궁을 태어난 후에 만들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성 회복이다. 변화 많은 비본래적인 일상생활에서 본래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인간의 현존재는 끝없이 지금의 자신과 다른 그 무엇이 되어 가는 과정 속의 존재자일 뿐, 영원히 자기동일적으로 남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점차 다가오는 죽음, 따라서 나의 죽음은 내가 생각한 죽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힘은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고 집체적으로 주어지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무차별적 상황이 죽음이다. 따라서 죽음 안에서 따로 ‘나’라는 개별자의 가치를 끄집어낼 수 없다. 결국 인간은 이 세계와 철저하게 무연관적이다. 끝까지 ‘나다운 나’를 뽑아낼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늘 비-본래적이기에 스스로 극복할 대상조차 의미 없다. 어떤 식으로도 나는 나의 편을 들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고통과 죽음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면서 만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유용하다거나 해롭다고 여기는 해석은 부질없는 일이다. 진정으로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사태를 못 알아먹는다.
2. 꿈
꿈 이야기를 듣고도 해석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는 같은 꿈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 번 더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흥미롭게도 두 번째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어딘가는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게 된다.
먼저 언급한 꿈 이야기와 나중에 한 꿈 이야기의 사소한 말 바꾸기는 인간이 무심코 무엇을 감추면서 살고 있느냐가 드러난다. 즉 인간은 자신이 들키지 않으려는 것을 본인조차도 알지 못하다가 꿈에서 무심코 드러난다. 꿈에 대한 억압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꿈에서 깨고 난 뒤에 그 꾼 꿈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게 되면 증상의 뿌리에 가까워지기에 내부의 저항이 강해진다. 여기서 어떤 꿈을 꾸었느냐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가 중요하다.
더 이상 그 꿈은 지난 밤에 꾼 그 꿈이 아니다. 지금 그 꿈을 가지고 강력하게 현실에 대처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 현실을 대신하고 싶은 것이다. 꿈의 카탈로그에서 꿈을 꾸는 사람은 어딘가 ‘하나의’ 장소에 할당할 수가 없다. 꿈의 모든 카탈로그 안에서 주체는 ‘모든 장소’를 돌출한다. 이는 주체는 꿈의 세계에서 자신을 분산해서 현실에 대해서 과잉적으로 방어하는 것이다. 즉 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꿈꾸는 본인의 변신물들이다. 꿈속에 나오는 모든 지인들은 곧 자기 자신이다. 그 이야기를 하는 행위의 주체이다.
이 언어의 장(場)이 곧 인간들이 이해하는 현실 세계이다. 꿈은 곧 현실 세계의 일부가 되며 현실은 확장된 꿈이다. 주체가 해석해 놓은 결과물이다. 이것이 본인이 그동안 구축해 놓은 언어의 영토이다. 이 언어에 걸려든 모든 타인은 본인의 해석망에 걸려든 타인들이다. 곧 자신의 변신들이다.
인간의 이런 세계 구성은 어머니를 인식하면서 시작된다. 생물학적인 어머니로 인하여 등장한 어머니는 먼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위치에 있다. 먼저 말하는 존재,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네 오는 존재가 어머니다. 이 어머니와 마주하는 경험을 통해 아이는 어머니가 사용하는 언어의 세계로 들어간다. 어머니는 아이를 언어로 이끌며,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만 어머니는 아이에게 있어 최초의 남이 된다. 곧 타인의 욕망에 뭔가 반응을 보여주면서 인간은 언어에 언어적 반응을 보이는 ‘나’가 된다. 즉 언어 망 안에는 인간은 타인과 나로서 언어(말)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 관계 안에서 욕망은 피어난다. 무슨 이유로 욕망이 생겨나서 실어 나르는지도 모르면서.
인간들의 욕망은 누군가의 욕망과 만난 결과로 생겨난다. 그렇기에 우리가 소망하는 것에는 반드시 타자가 욕망하는 존재, 즉 타자에게 어떠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되길 원하는 근원적인 욕망이 내재해 있다.
경험을 말로 한다는 것은 욕망의 망으로 얽혀 들어가는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꿈으로 구성된 현실성과 엮어보면 이렇게 된다.
‘왜 꿈을 꾸는가?’ → ‘왜 꿈을 깨는가?’
즉 왜 현실은 꿈이 아닌 것처럼 여기게 되는가? 이것은 욕망이 꿈으로 구성된 현실 속에서 유일한 현실다운 현실로서 지배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꿈은 인간이 꾸지만, 해석은 욕망의 주도적인 지도를 받아서 하게 되는 것이다.
욕망이란 우연한 현실 속에서 유일한 현실다운 현실이다. 잠을 자서 꿈이 생길 때까지 깨어있을 위인은 없다. 따라서 욕망이 도리어 꿈의 현실을 이용해서 모든 해석을 욕망 안으로 끌어당긴다. 따라서 인간은 아무리 해도 영원한 욕망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깨어남-
눈을 뜸으로써 잃어버리게 되는 현실이 있다. 그것은 욕망으로 가득 찬 세계를 바깥에서 바라보면 시선으로 인하여 비로소 알게 된 세계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기존의 ‘나’도 상실된 세계이다.
‘꿈→수시로 발굴되는 본래적 경험→심리적 현실→환상 ⇏ 실재계’가 된다.
실재계란 개인의 말로 뚫어낼 수 없고 더 이상 거슬러 나아갈 수 없는 지점을 갖는다. 바로 이 세계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정신적으로 트라우마(상처)를 지닌다. 아무리 해도 그 세계에 관해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치료될 수 없는 정신적 상처이다.
무언가에 대해 끊임없이 어긋나게 말하는 것, 아무리 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그냥 껴안고 있는 것, 이는 말하는 모든 주체에게 동등하게 부여된 조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바로 그때부터 구조적으로, 트라우마(마음의 상처)를 품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마음의 상처로 인해 인간은 이 환상적 세계에서의 자기 부재(不在)가 증명되지 아니한다.
3. 자폐증
광기는 구체적 개인이 부재(不在)하는 겹친 다른 세계의 흔적이다. 정신병 환자가 보이는 벙어리 증상은 자신의 말을 박탈당한 다른 정신의 등장을 말해준다.
늘 엄마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아이가 잠시 엄마가 현장에 없으면 아이는 다음과 같이 놀이를 하게 된다. 아이가 실타래를 침대 밑으로 던져 놓았다가 보이지 않게 되면 ‘오, 오, 오’라는 소리를 내고, 실타래를 끌어내어 보이게 되면 ‘다’라고 발성한다. 이것은 엄마 부재(不在)와 엄마 현전(現前)에 대응하는 표현이다.
아이는 실타래를 끌고 나와 ‘있다’라고 발성하고서는 부재한 실타래에 대해 현전하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는 현전이 부재에 대해서 명령하는 것이다. -여기서 환상(우상)이 발생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아이는 자신의 부재를 전혀 예상하거나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어머니의 입장에서 아이가 곧 부재 혹은 현존의 대상이 됨을 아이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어머니의 현전과 부재로 인해 자신의 생사가 좌우되고 있고 아이의 모든 호소는 전능한 어머니를 대상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미 성인이 된 어머니가 볼 때, 아이의 이러한 마음가짐은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다. 이 미성숙이 언어 사용과 더불어서 실리게 된다.
자폐증의 사례로 들어본다. 적절히 양육을 받지 못해 방치된 아이가 하나 있다. [(모든 인간은 망상한다) pp 387-389]
그는 짜임새 있는 문장을 말할 수 없었고 단어만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특히 불안감을 느낄 때, “늑대!”라는 단어를 외치는 모습이 자주 관찰된다.
예를 들어 그는 화장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보호자에게 문을 닫으라고 요구한다. 그래 놓고서는 갑자기 “늑대!”라고 외친다. 그 아이는 대변이나 소변을 배출할(자기 신체로부터의 분리) 때 불안해하고, 변기에 담긴 분뇨를 버릴 때도 “늑대!”라고 외쳤다. 대체로 이 ‘늑대!’라는 단어는 어떤 경우에 외치는가?
즉 문이 열린 공간에 구멍이 뚫리거나, 변기 안에 내용물이 버려져 무(無)의 공간이 생기는 것에 대해 심하게 불안해했으며, 그 불안감을 ‘늑대!’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늑대!’라는 단어는 그 아이에게는 “주여!”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계속 관찰하면서 이 ‘늑대!’라는 단어는 ‘파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유아 방기로 인해 주거와 시설, 병원을 전전하며 살아야만 했던 아이에게는 문밖으로 나가는 것, 배설물을 처리하는 것(버려지는 것)은 파괴를 의미했고 ‘늑대!’라는 단어는 빠져 있는 공간을 메우기 위한 단어였다.
그 아이는 이 ‘늑대!’라는 반복성 단어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다른 단어와 연쇄되지 않고 분절화된 단어다. 이런 단어만 존재한다는 것은 그 아이가 나름대로의 ‘현실’을 살고 있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아이에게 ‘늑대’라는 단어는 최종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단어다.
당연히 다른 사람과의 의사 교환은 전혀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체적인 향락을 유지하려는 수단이 된다.
이처럼 자폐증 아이는 내재적인 언어의 효과를 부여받고 있다. 그의 ‘늑대’가 실제 ‘늑대’와 일치되느냐 여부는 본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자신의 생사 한계에 직면할 때와 관련해서 외칠 수 있는 최종적인 단어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는 독자적으로 자신이 최종적 존재요 궁극적인 존재이다. 이 자폐증 아이를 제외한 모든 인간도 이와 같지 아니한가? 나름대로 거의 무한에 가까운 다양한 언어를 지니고 자유롭게 적절하게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자폐증의 확장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숱한 융통성을 보일 수 있는 단어가 결국은 하나의 의미에 다 연계되어 사용되기 때문이다.
언어의 연쇄 고리에서 아무리 단어를 달리해서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그 어떤 최종 권위에 멈춰 서는 것이다. 어떤 권위적인 단어도 모든 전체 단어를 보증하는 입장에 있지 않다. 인간에게 있어 자기 외에 최후적 입법자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실제로는 자신이 최후의 입법자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마치 자기 말고 자신이 의지하고 최종적인 절대 권위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사기꾼 행세를 하며 살고 있다.
쉽게 말해서 이 꿈의 세계, 환상에 세계에서는 ‘이 세상에 진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점을 증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불러낼 최종 권위자가 자기 말고 없기 때문이다. 나만 존재하기에 내가 내뱉은 말이 진리며 그래서 내가 최종적 존재자, 곧 신인 것이다. 모두가 자폐증 환자들이다.
5. 예수님의 부재(不在) 증명
예수님에게만 아버지가 계신다.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9).”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요 8:38).”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인간들로부터 ‘알지 못하는 존재’임을 분명히 하신다. 그리고 그 증거가 그들 눈에 예수님의 육신이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나타남과 존재성은 인간 세계에서 ‘아버지 없음’을 보이는 증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요 5:31-32).”
부재(不在)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만이 예수님의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을 부재하는 존재로 여기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과 예수님의 세계에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자들임이 증명된다. 즉 인간들만 있는 이 환상의 세계는 애초부터 엉터리 세계요 그야말로 허상의 세계였다.
만약에 이 허상의 세계를 하나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언약적으로 활용당한다면 이 세상은 예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세계’이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5-46).”
여기서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가 구별된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8-39).”
이 ‘말의 세계’는 ‘말씀의 세계’의 바탕과 재료로서 동원된 것이다. 따라서 모세는 ‘말의 세계’와 ‘말씀의 세계’가 중첩되어 있는 언약 안으로 들어선 자이다. ‘말의 세계’는 필연적 실패를 전제로 한다. 언약에 의해서 봉쇄당한 처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요 12:38-40).”
‘말의 세계’의 실패를 전제로 해서 ‘말씀의 세계’가 언약을 통해서 제시된다. 따라서 언약은 끊임없이 실패를 만들어 내면서 그 속에서 ‘말씀의 세계 완성’을 이룬다.
해석은 ‘설명에 의한 안심’이 아니라 ‘반복적 충격에 의한 반복적 동요’로 실행된다. 언약은 성도를 규정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임을 유지시켜 주기에 이 점을 즐기고 감사해야 한다. 삼손처럼.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삿 15:18-20).”
삼손이 그 시대의 계시가 되고 언약 해석이 된다. 오늘날 성도도 이런 입장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신 5:2-3).”
Ⅱ 줄거리
이스라엘의 존재는 여호와 입장에서 볼 때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 이 신명기에서 압축된다. 왜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필요로 하시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루기 위함이다(1:8).
이스라엘로 하여금 꼭 그 땅을 얻게 하시려는 것은 언약의 성취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모세가 처한 입장은 그 많은 백성들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었다(1:9). 그러나 모세 홀로 짐을 다 질 수 없어서 지파의 두령들을 세우고 천부장을 뽑은 것이다(1:12-15).
모세와 더불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모세에게 준 율법을 고수하는 것이고 그 율법을 준수할 때 비로소 언약의 공동체로 존속되는 것이다(1:18). 그러나 여호와의 능력을 멸시한 쪽으로 돌아섰고 유월절 정신의 상실이 나타났다(1:31-32). 그럼에도 여호와께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자체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여 어느덧 40년의 세월이 흘러 약속된 땅을 마주 보는 지점까지 도달한 것이다(3:25).
여기까지 와서 모세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으로 유지되려면 여호와가 명하신 규례와 법도를 그대로 행하는 데 있다(4:4-8). 왜냐하면 그것이 약속이기 때문에 그러하다(4:23).
약속 밖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인정해 주시지 않았다. 오직 열조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 자비의 약속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4;24-31). 그 자비가 권능을 베풀어 애굽에서 나오게 했으며 함께 있어도 이스라엘이 생존할 수 있었으니, 모든 율법과 규례는 이 여호와의 자비를 제대로 이해하느냐에 달려있다(4:32-40).
여호와께서 이집트에서 건져낸 자들은 여호와의 언약을 준수하기 위한 자들이었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그런 자들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고 한다(6:20-25). 그 규례와 법도에 담긴 뜻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애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또 각양 기적을 받을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다른 민족과 비교했을 때 수효가 가장 적은데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사는 이방인들을 정복할 수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7:1-7).
그것은 여호와의 사랑 때문이었다. 바로 이스라엘은 이런 사랑의 베푸심 위에서 사랑을 배워 나가야 하는 것이다(7:8,12-15). 그런데 이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확실한 반응은 여호와께서 붙이시는 민족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진멸하는 것으로 나타나져야 한다(7:16).
그들을 두려워한다든지 그들의 수(數)에 대하여 공포를 가지면 애굽에서 나타난 여호와의 이적과 사랑을 거부하는 셈이 된다(7:14-26). 이와 같은 여호와의 이스라엘에 대한 요구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가 보는 세상관과 같은 세상관을 가질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위해 지난 40년간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실습을 미리 받았다. 만나를 끊임없이 내려준 것도 모든 승리는 결코 이스라엘이 잘해서 승리한 게 아닌 것을 보이게 함이다(8:16-18). 모든 것이 여호와의 의로움 때문이다(9:4-6).
이처럼 이스라엘은 낮아진 마음으로 여호와의 계명에 순종해야 하는데 특히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를 돌보아 줌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전에 애굽에 있을 때도 같은 신세임을 행동으로 고백하는 셈이 된다(10:18-19).
이런 명령은 모든 규례에 다 적용이 되는데(24:14-22) 그것은 모든 절기나 제사법이나 가정생활, 정치제도에 있어 앞으로 들어가서 살 땅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제도와 풍습과 불일치를 가져오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민족으로서 유월절 정신이 살아 있기에 여호와의 사랑에 근거한 이웃사랑으로 충만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14:28-29/16:14/24:17-22/26:12-13). 결국 이와 같은 철저한 율법에 대한 순종 요구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기업(基業)으로 삼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32:9).
여호와는 그들 편에 서서 복수하시고(32:35), 그들을 여호와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33:27). 이제 12지파 모두가 복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복은 이스라엘이 잘한 것이기보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셔서 그런 것이다(33:3).
이제 이스라엘의 미래는 이 기준에 의해 이루어진다(29:15). 율법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28:1-14) 만일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게 되고 남은 자가 얼마 되지 아니한다(28:15-62). 하지만 다시 마음을 돌이키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저주받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다시 모아서 약속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단다(30:1-4). 그래서 여호와가 사랑하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 영원히 존속된다.
Ⅲ 결론
인간들에 의해서 추방당한 자를 굳이 다시 소환할 필요가 있을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세웠다는 말은 인간들의 지혜로 충분히 이 세상을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만이 모든 인간에게 무리 없이 수용 가능한 최종적 의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것만이 건전한 것이다.
따라서 새삼스레 말씀을 대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감히- 참으로 감히!- 거역하는 태도이다. 곧 자신이 자신의 본성을 배반하는 무리한 짓을 시도해 보는 것이 된다. 마땅한 다음과 같은 최종 결론에 도달된다. “한낱 지나간 역사 이야기에 불과하니 많은 의미를 담는 위험한 행동은 삼가라.”
우리 자신 안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 “주의하라. 말씀을 건성으로 받아들이는 조건에서만 말씀을 대하라. 진리라고 여기는 경솔한 짓은 하지 말라. 다 지나간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심심하거든 보라. 굳이 몰라도 되는 내용이다.”
그렇다.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다. 내가 나에 대해서 남이 되는 자들에게만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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