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2강-에베소서: 통보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우리가 타인의 방에 들어갈 때 이렇게 묻지요. ‘들어가도 됩니까?’ 그에 답변은, 인간은 둘 중에 하나에요. ‘들어오세요.’ ‘못 들어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못 들어온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미 만들어진 인간이 창세전의 상황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창세전에는 인간이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인간이 산 채로 뚜벅뚜벅 그 세계 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럼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먼저 들어간 사람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엘리야라든지 모세. 엘리야, 모세 예수님이 변화산에 있을 때 같이 등장했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들은 거기서 노는 거예요. 못 들어간다는 데 그들은 들어갔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 묻지요. ‘저 사람은 못 들어가는데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이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은 선택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 사람들은 드디어 ‘내가 그들을 선택해서 들어갔다’ 이 답변 자체가 인간들은 자기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이 답변을 자기한테 장착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럼 나도 선택해주세요, 라고 이야기를 하게 돼요. 그러면 ‘그러니까 너는 못 들어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선택이란 말을 인간들이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택이란 단어가 두 가기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선택을 거부하는 방식이거든요. 선택은 너와 합작해서 하는 게 아니고 한쪽이 선택해버리면 다른 것은 그 결과에 좋든 싫든 따라가는 게 선택입니다. 선택을 공유하고 놀고 탁구공처럼 그렇게 되는 게 선택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한 그 기능을 우리가 그것을 우리에게 써먹을 수가 없어요. 사용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선택했다는 말은, 너는 너를 선택할 수 없다는 이야기에요. 이미 한쪽 선택이 결정 났기 때문에.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입니다. 도 마찬가지고. ‘빨간 선을 끊느냐, 파란 선을 끊느냐?’ 지금 뉴욕이 폭발할 직전에 어느 선을 끊는가? 영화에도 비슷한 것 나오지요. ‘파란 약 먹을래, 빨간 약 먹을래?’ 나오지요.
그 선택은, 하나님의 어떤 선택은 인간을 비껴갑니다. 다시 말해서 선택 안 해도 괜찮은 조건을 주께서 주셨습니다. 제 말 잘 들어야 돼요. 우리가 굳이 천국을 선택 않더라도 우리가 지옥 갈 수 있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나보고 지옥 가래요. 나보고 주님께서 ‘너 지옥 가’ 이걸 풀이하면 아브라함과 이삭, 모세, 엘리야한테는 이 말을 이렇게 풀어요. 모세와 엘리야, 아브라함 보고, ‘너 지옥 가’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지옥 다녀와’ 이런 뜻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바로 저주의 세계 음부까지 갔다 오셨잖아요. 그러니까 ‘너 지옥 가’가 이게 욕이 아니에요. 'You are hell' 욕이 아니라니까. 주님이 우리한테 어떤 지시를 내리든 그 지시가 곱게 우리 안에 남아있으면 우리 안에 말씀이 남아있는 거예요. 말씀이 들어온 거예요.
주님이 우리에게 통보를 해주거든요. 통보의 아주 적절한 예가 이거에요. 예수님이 쓰셨던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데,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아먹고 난 뒤에 자살했잖아요. ‘너는 자살하게 될 거야.’ 그래놓고 하시는 중요한 말씀이, ‘차라리 너는, 앗싸리 네 입장에서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이야기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가룟 유다한테는 아무리 예수님이 말씀을 해도 가룟 유다가 자기 선택을 그냥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내 목숨을 끊고 말고는 내 의지에 달렸다는 그대로 고수하는 고집하는 그 결과를 주께서는 그걸 아셨던 거예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선택하심을 곱게 받아들이는 자가 아니라 주님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일단 나의 세계, 아까 무슨 세계라 했습니까? 솜이불 속. 일단 나의 세계에 와서 나에게 검사를 받아야 돼요. 이게 나한테 유리한지 불리한지 내가 천국 가는데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내 판단을 점검해서 거쳐야 돼요.
그렇게 거치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의 선택에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천국 갈 자의 선택과 지옥 갈 자의 선택이 돼 있어요. 요한복음 6장 끝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70절) 가룟 유다라 하지 않고 그냥 사탄이라고 돼 있고, 요한복음 17장에도 내가 그들은 끝까지 지켜준다. 단 멸망할 자는 빼고. 요한복음 17장 볼까요? 지금 이 이야기가 듣는 너희들이 신이 나야 돼요. 기분 굉장히 좋아야 돼요.
요한복음 17장 12절에 보면,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자식의 선택을 이야기할 때 누가 멸망할 자냐 하면, ‘주께서 지켜준다는 데 주께서 말만 하고 안 지켜주면 나 어떡해요’ 하는 사람이 멸망할 자에요. 그러니까 주의 말씀은 반드시 무슨 결과를 낳느냐 하면 반드시 멸망할 자를 낳는 식으로 주께서 은혜를 사용하는 거예요.
성도한테는 뭐가 중요하냐 하면 주님께서 어떤 결과를 낳든지 간에 주께서 결정했다는 자체에 대해서 자기 선택을 그 앞에서 깨어지는 걸 의미합니다. 주님이 선택했다는 것은 내 선택이 와장창 다 박살나는 거예요. 깨져버리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대처하고 지키지?’ 이게 박살나버려야 돼요.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자체가 정말 건방진 일이구나’ 본인이 자인하고 자백해야 돼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게 바로 나의 고질병이었다는 것, 이거는 못 고쳤다는 데 못 고친 인간 주께서 부셔버렸구나. 우리는 자꾸 병을 고쳐 달라 하는데 주께선 병을 고쳐주는 게 아니고 우리를 깨뜨려버리죠. 우리 자아를. 치료하는 광선을 보내서 찌지직 우리 자신을, 자아를 폭파시켜버리죠. 우리가 폭파되면 우리의 선택, 우리의 결정, 판단 이 자체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산산조각 나있지요. 깨져있는 상태라니까.
‘내가 사용한 언어의 조합은 무의미’ 내가 사용한 언어의 조합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저한테 이야기했지요.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어요. 내가 보기엔 의미가 없어요. ‘너나 잘하세요’ 이게 정답인데 이건 실례가 되니까 ‘나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사람이 내 말을 끝까지 들어야 돼요. ‘내가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써 구원받습니다’ 이걸 이야기한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는다는 나의 판단이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나는 다 파편화돼야 돼요. 유리창 깨지듯이 깨진 파편 된 언어들만 갖고 있습니다. 누가 나의 언어를 깼습니까? 주의 말씀이 나의 언어를 다 와장창 깨고 말았어요.
극단적인 어떤 목사 같은 경우에, 극단적인 사람 많아요. 설교하라 하니까 제가 예를 들어 눈감고 하겠습니다. 눈감고 펼치니까 뭐가 나왔느냐 하면 벨사살 왕, 다니엘서 5장이 튀어나왔네요, 우연히.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여러분 다 같이 기도합시다.’ 성경을 그대로 읽었어요. 그런데 설교시간이 너무 짧잖아요. 그러면 그다음 구절을 또 읽어요. 그래도 짧다 하거든요. 또 읽어요. 그래도 짧다 하면 더 읽고요. 그래서 성경 한 열 장 읽어버리면 50분 지나갑니다. 성경대로 읽었어요. 이게 설교입니까?
여러분 이렇게 하면, ‘너무 심하지. 그거 말도 안 되지’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설마 그런 사람 있을까? 설마 광고 하나, 이번 주 김장합니다. 그런 것 하나 넣었겠지’ 그런데 여러분 어떤 사람이 한글성경 말고 신약 헬라어로 읽었고 그걸 파싱이라 해요. 분석해서 이거는 가정법 과거완료가 어떻게 남성형, 여성형 하고, 그래서 50분 때웠습니다. 그거 설교입니까? 그건 설교에요? 아니지요.
설교는 딴 게 아니고 자기가 말씀에 의해서 이 성경말씀 두고 자기가 알던 말씀해석이 이런 식으로 깨어졌습니다, 라는 고백이 설교에요. ‘주께서 이런 식으로 다녀갔습니다’를 소개하는 게 설교라고요. 나는 이 성경을 통해서 내게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순결한 마음으로 순진한 믿음으로서 하나님을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이 말씀대로 지키고 하나님 믿고자 했던 이것이 바로 가증한 멸망의 자식들이나 하는 짓거리였습니다, 라고 나타나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 자신이 매개자 되는 중보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 여기 계시고 우리가 여기 있는데 주님께서 중보자, 매개자로 우리한테 와요. ‘너 말씀 잘 지켜라. 나는 볼일 다 봤다. 난 아버지께로 간다.’ 이게 아니고 나 속이 아닌 우리들 속에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여기에 상주해버려요. 성령을 통해서 상주를 한다고요.
그러면 껍데기는 우리의 모습이고 안쪽에는 아버지와 중보자 사이에 창세전에 연결된 그 케이블은 여전히 살아 있지요. 이게 침투 아닙니까. 천국의 침투.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직접 천국이 와서 우리를 영적 전쟁을 벌여서 이걸 침투해서 공격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공격당한 패배자로서의 모습. 패배자의 모습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설교지요. 이게 설교란 말이죠.
‘나는 패배자 맞습니다, 나는 죄인이 맞습니다.’ 또 이렇게 성급하게 결론부터 말씀하지 마시고 또 살살 물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어느 대목에서? 뭐 어째서 죄인이야?’ 그러면 또 벌써 속임수 쓰는 게 들통 나지요. 하여튼 자꾸 정답만 나와. 정답만 이야기하려고 해. 정답만 이야기하게 되면 설마 정답 이야기한 나를 내칠까, 이런 꼼수, 요령꾼, 모사꾼. 기묘자요 모사라 하는 것은 주님한테 해당되지 간사한 자에게 해당되면 안 되지요.
우리가 실패하고 우리가 죄인 되는 것을 주께서는 이걸 실감나기 위해서 고맙고 친절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뭘 준비했느냐 하면 역사를 준비한 겁니다. 교재 준비가 안 돼서 역사를 이야기 못하겠는데, 역사를 준비한 거예요. 인간의 역사라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정했다는 것을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싶어서 인간은 역사라는 것을 쥐고 있는 겁니다.
역사는 매개입니까, 매개 아닙니까? 윗동네와 연결돼요, 안 돼요? 연결 안 됩니다. 올라갔다가 이게 김정은이 미사일처럼 전부 다 동해에 올라갔는데 다 빠져버려요.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믿을 것은 역사밖에 없습니다. 과학이요? 과학은 역사 아닙니까? 과학사. 패러다임에 의해서 계속 발전한다는 그 과학의 인식이 바로 그 자체가 역사잖아요. 권력? 역사입니다. 민주주의? 역사에요. 이 세상에 인간이 믿을 것은 역사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 내 일기장 다 역사잖아요. 교회의 역사, 가정의 역사, 가문의 역사. 우리가 여기 온지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어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역사가 뭐로 구성돼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역사의 구성요소는 법입니다. 율법.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각 나라로 흩어졌지요. 주로 이집트에 많이 갔어요. 물론 바벨론도 많이 가고. 바벨론 갔다가 이집트에 간 사람도 있고. 후다닥 애굽으로 빠진 사람도 있고. 하여튼 본토는 완전히 궤멸됐어요. 완전히 본토인들은 궤멸되고 이주민들이 혼혈아들이 유대 땅을 차지하고 특히 사마리아 같은 경우에는 앗수르의 정책에 의해서 혼혈아들이 왔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세요. 계시가 끊어졌다. 어떤 계시? 메시아가 온다는 약속과 지금의 형편, 자기 나라 이스라엘이 끊어졌다. 그러면 메시아는 어느 계통으로 오느냐 하면 다윗이란 혈통으로 와요. 다윗의 혈통. 그러면 이스라엘은 자연적으로 어디를 집중하느냐 하면 끊어진 계시를 뭐로 이을 겁니까? 역사로 잇겠지요. 이게 바로 중간기라는 거예요.
성경에 말라기 이후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계시를 끊어놨는데 인간이 못 견디는 거예요. 정통성이 없으니까. 그래서 역사적으로 메우려고 하는 거예요. 대제사장 제도를 취하는 데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 당시에는 왕국이 없으니까 왕이 없고 율법을 다루는 대제사장을 찾았던 거예요. 율법을 다루는 제사장.
이것을 합해서 다른 나라에서는 포로 된 나라에서는 회당제도, 시나고그(Synagogue), 회당이란 걸 사용해서 율법 중심으로 제사를 대신해서 율법을 가르치면서 역사를 대대로 이어가겠다는 거예요. 그럼 그 역사를 잇는 맥이 뭐냐? 다윗의 혈통입니다. 다윗의 혈통으로 계속 이어나가겠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다윗의 혈통이 육신적인 DNA의 생식세포에 연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혈통의 연속일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이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나옵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가 나오지요. 여기에 ‘~에게서’란 말이 네 번 나오는데(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이건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한 거예요. 42대 족보. 그 ‘에게서’ 나올 때마다 외부에서 투입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혈통의 순수성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순수성에다 옆구리 치고 들어와요. ‘하늘의 혈통이 개입된다.’ 유대인들이 원했던 건 그거였어요. ‘아니야, 아니야. 너희들이 무시했던 이방인의 혈통이 주도권을 가지고 투입돼요.’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 다윗의 혈통이란 것은 뭐냐? 이건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그 이방인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 이쪽은 밀리게 되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 바리새인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 예수님이 이 말씀 왜 하셨습니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들이냐. 주께서 이런 질문하는 것, 또 특히 마태복음에서 8장에서 결정적으로 때리시는 게 뭐냐 하면, 본 자손들은 천국에서 다 쫓겨나고 백부장 같은 이방인이 차지한다. 주께서 그런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에베소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에베소서 하는데 보게 되면, 우리가 할 작업이 보통 많은 작업이 아니에요. 여기 에베소서 2장 11절부터,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러니까 뭐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자에요. 약속이 없는 자가 약속 있는 자에 왜 주제넘게 끼어듭니까?
이거는 인간의 혈통 위주로 봐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됩니다. ‘너 같은 건 지옥이나 가라.’ 이게 적절해요. 유대인들이 이방인 보고, ‘너는 개 같으니 지옥이나 가라.’ 그러면 구원받은 이방인은 뭐라 합니까? ‘우리는 이미 지옥을 다녀왔지만 너는 지옥 가지도 않았잖아.’ 이래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지옥을 한 번씩 갔다 와야 구원을 받아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지옥 속에서만 구원이 있어요. 지옥 바깥에 나가면 구원이 없습니다. 죄인 속에 있어야 의인이 돼요. 죄 안 지으면 그거는 지옥 갑니다.
그게 에베소서 2장 2절에 뭐냐?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에 불순종하고 저주 안에 있고 진노의 자식으로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뭘 주장합니까? 그 하나님의 저주받으면 되는데 인간은 뭔가 참지 못하고 법을 내세우고 혈통을 내세워서 법과 혈통이 만나서 뭐가 됐습니까? 건전한 history, 우리의 전통적인 역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재를 우리가 못 받아봤습니다만 그 교재에 보면 인간들은 그 유대인들은 아주 결사적이에요. 혈통을 위해서. 혈통을 위해서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느냐에 모든 사례는 거기 다 나옵니다. 혈통 하나를 잇기 위해서 이방인에게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 혈통만 유지된다면 나라를 이방나라한테 팔아먹어도 우리는 상관없다고까지 나와요. 아주 독하지요. 독하지만 오늘날 우리만큼 독할까요?
창세전이라 하는 건 여기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창세후가 태어납니다. 주님의 언약은 창세전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데 인간들은 창세후의 자꾸 환상을 따라서 갑니다. 이건 뭐냐 하면 내가 현재 있음을 내가 없는 쪽으로 돌리기 싫은 거예요. 우리는 그것을 내가 소멸되는 것으로 간주해서 내 죽음은 죽기보다 싫은 거예요.
‘나의 죽음은 죽기보다 싫다.’ 이게 인간세계에서는 성립이 돼요. 다른 말로 하면, ‘죽으면 죽었지 나는 안 죽는다’ 이걸 자살이라 하는 거예요. 아 독하지요. 되게 독해요. 어떤 경우도 내 죽음, 내가 어떤 경우를 돌아가기 싫어요. ‘이왕 생긴 것 좀 봐주소.’ 그래서 인간은 자아를 두고도 이렇게 장난치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언어는 뭐냐? 장난입니다. 뜻은 있는데 의미는 없어요. 뜻이 있다는 것은 나 좋으라고 발설하고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요즘 이태리 날씨는 뭐하지요? 습하게티? 아하 이거 아재 개그인데 장난치는 거죠. 정치가들 연설, 전부 장난치는 거예요. 장난인데 배후에 쥐고 있는 게 있어요. 나의 역사는 내가 포기 못한다. 심지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살아남기겠다.
비록 나는 죽지요. 하지만 내 이름은 국립현충원에 대전에 가든지 서울 가든지. 이게 가문의 영광이 아닌가. 어, 자기는 죽는데 뭐는 살아 있다? 내 몸 하나 희생되어 뭐가 살아요? 가문이 살잖아요. 다윗의 혈통이 살잖아요. 몸 바쳐서, 논개는 몸 바쳤는데. 몸 바쳐서, 몸 바쳐서~ 우리 대한민국은 일체 넘어가지 않도록. 임진왜란 때 몸 바치고, 진주 논개 맞지요.
여러분들은 왜 삽니까, 하면 대의명분, 명분이란 걸 내세워요. 왜 사십니까, 왜 존재합니까? 날 위해서. 이건 너무 티 나잖아요. 그저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식 하나 보고 삽니다. 자식 막 뛰어다니고 난리치고 하는데 말썽꾸러기인데 난 자식 하나 보고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 자식 죽으면 눈을 못 감는다. 눈은 의사가 감겨줘요. 나중에 감겨준다고요.
모든 인간들은 본인이 지금 내막도 해답도 모르고 장난치고 있다는 장난치면서 평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부정하고 싶어 해요. 습하게티? 내가 갑자기 정신병자 같다.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 의미 없는 것을 주께서 사용해주신다는 거예요. 그걸 리싸이클 산업이라 하는데 폐품재활용해서 그걸 순환시킵니다. 이스라엘 봐라. 다 쪼다잖아요. 하지만 그 쪼다를 통해서 이방인들이 보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반항하고 할 때 율법 알면서도 망했지만 우린 아예 율법 모르는 채 벌써 망했다는 거죠. already 이미 망했다는 사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바로 언약도 없고 약속도 없는, 그리고 12절에 보면, 나라 밖의 사람이고 약속 없는 외인이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어요. 근데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3절) 뭐로 가까워졌다? 그리스도의 피로.
사도 바울이 쓰는 언어를 보세요. 뭐 하나님의 사랑으로 했다든지 하나님의 도와주심, 긍휼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피를 내세워요. 피는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피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은 시간 세계에서 시간이 나왔던 그 세계와 유일하게 연결되는 그 시공간이 바로 ‘피’입니다. 피 흘림의 사건이에요. 피의 사건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얽힌 관계망, 뭐 불교에선 인연이라 하는데 인연이든 뭐든 좋은데 인연이라 해도 관계라 해도 같은 말이기 때문에 했는데 모든 것은 중심이 있는 거예요. 그 중심이 뭡니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중심을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스도의 피’라고 이야기합니다. 피 안에 사는 자가 영생이고, 피를 모르는 자가 피를 볼 거예요, 아마. 피를 모르는 자가 저주받을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좋은 그릇, 나쁜 그릇 두 종류로 결정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다시 한 번 여기서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창세전의 결정은 주님만이 매개자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매개자기 때문에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을 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통보를 해줘요, 말씀으로. 통보해서 받으면 되는데 인간은 통보를 받는 게 아니고 본인이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해요. 본인이 성경을 연구하니까 통보 없는 해석이 나와버리니까 이게 바로 멸망의 자식입니다.
제가 과감하게 그런 건방진 주제 넘는 그러한 과장된 표현을 많이 쓰지요. 신학교수 중에서 믿는 사람 하나도 없다고.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진짜 없는 게 아니고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사람은 그 신학교수 가운데서 내가 성경을 파고 연구하는 이것이 내가 가져야 될 내 죄라고 고백을 안 해요. 어느 교수도. 그런 교수 봤어요? ‘나 오늘도 열심히 죄 지었어요. 하하.’ 이런 교수 봤어요? ‘우리는 특별히 가르치는 영을 받았다.’ 아이고 참. 어디 갖다 붙일 것을 갖다 붙여야지.
세례 요한은 항상 노선이 달라요. 기존의 다윗의 혈통의 노선이 아닙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이 침투를 해요. 구약에는 세례 요한까지 침투를 한다니까. 세례 요한이 드론입니다, 드론. 침투를 하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 세례 요한에게 뭐라고 질문하느냐 하면, ‘너 어느 신학교 나왔어? 너 제사장이야, 네가 선지자야? 네가 뭐야?’ 거기서 세례 요한의 답변은, ‘나는 무엇이다’가 아닙니다. ‘나는 무엇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들의 기초, 토대가 되는 발산되는 언어체계와 내가 몰고 온 언어체제가 다른 거예요. 세례 요한이 날 때 아버지가 사가랴, 맞지요. 아버지 사가랴가 말을 못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뭐, 뭐? 말을 해.’ 말을 안 합니다. 이름 바꾸라고 석판에 썼어요. ‘요한이라 해라.’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기존에 알고 있던 흘렀던 모든 역사에 대한 부정이 세례 요한 아버지부터 이미 주어졌고, 성령을 통해서 성령이 예언한 대로 세례 요한이 태어난 거예요. 노선이 그쪽 노선이에요.
그 노선으로서 에베소서에서는 바로 에베소서 2장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그렇게 지어진다. 성전이 성령의 전이라고 그렇게 이어지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은 주의 뜻은 말씀은 무엇과 싸운다? 인간의 역사와 싸운다. 인간의 역사는 뭐라고 돼 있습니까? 인간의 법 또는 인간의 언어+인간의 혈육/혈통으로 구성돼 있는 것이 역사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서 그들은 이것들을 모아서 이것이 뭐냐 하면 힘, 에너지인데 정치적 에너지에요. 중간기의 모든 내용들은 우리 집안에 있는 다윗의 혈통으로 제사장 세우기 위해서 외국군인들, 불신자 군인들, 셀류쿠스 왕조라 해서 북쪽에 아람나라 있잖아요. 헤즈볼라 그쪽에도 손잡고 군사적 힘을 동원하는 이유가 오직 하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서예요.
그것 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것이 그들은 끊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이 역사가 대체함으로서 우리 유대교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정통성을 가진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계파가 사두개인, 바리새인, 쿰란공동체, 열심당원, 파가 한둘이 아니고 여러 개니까 대표적 것 네 개 정도하면 그 정도 돼요.
거기다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같이 상원, 하원 모아서 만든 국회에요. 그걸 장로들의 회의라 해요. 그들의 서기관들. 그들이 다 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죽이는데 한 뜻을 모아서 예수님을 죽이고 거기서 나온 게 뭡니까? 거기서 짜서 나온 게 뭐예요? 피가 나왔지요. 모든 역사에 대해서 피가 고발합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이 있는 자리(역사)에서는 의미 있는 선택이 안 나온다. 도리어 이 선택을 피하는 방식으로 선택을 한다’ 이게 마태복음 1장 족보입니다. 다윗이 살인하고 간음해서 선지자가 찾아왔을 때 다윗은 자인합니다. “나 잘렸다. 난 의인도 아니고 완전히 잘렸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너의 혈통이야. 창세전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네가 방금 고백했잖아.” 그러니까 창세후에서 메시아를 하나님의 언약만이 창세후 있는 존재를 뭐로 돌립니까? 창세전의 상태로 돌리는 거예요. 하나님과 주의 이름만 있던 그 상태, 예수님만 있던 그 상태로 돌릴 수가 있는 거예요. 언약이 없으면 돌아가질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정신병을 다 피해서 그것과 결부하지 않고 인간은 전부 다, 가수 임영웅이 콘서트하면 무대에서 곱게 하면 되는데 후반부에 좀 흥이 난다 싶으면 고맙소, 고맙소 하면서 마이크 쥐고 나오잖아요. 그러면 아주머니들이 곗돈 탄 것 털어서 십만 원, 십오만 원 주고 오는데 손잡으려고 선택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뭐가 있느냐 하면 임영웅은 역사를 이룬 거예요. 인간의 선택이 살아 있는 것, 내가 주님을 선택한 선택을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가했다는 자기 달램, 자기 허함을 달래주는 그런 식으로 그동안 인간들은 성경을 봐 왔던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피해가십니다.
여기에 에베소서 1장 5절을 보겠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됐습니다, 됐습니다, 그만. 그 기쁘신 뜻이에요. 주님의 뜻이 아니에요. 주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어떻다? 주님은 기뻐서 선택한 거예요. 그 기쁨과 공유돼야 돼요. 그 기쁨에. 주께서는 기쁜데 주의 뜻이 너한테 넘어가면 나는 슬퍼. 이게 뭐 뭔가 변질된 이상하지 않습니까?
음식을 냉장 밀키트 잘못 샀는가? 돈가스 샀는데 전부 다 썩은 것, 대게 샀는데 대게 다리가 썩었다든지. 주님께선 곱게 줬는데 귤 까먹다가 귤이 썩었어. ‘귤 어디서 샀어요? 누가 산 거야.’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 우리 자체를 문제 삼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나는 기쁜데 너는 안 기쁘지. 네가 문제거든. 네가 문제였었어.’ 그러면 ‘제가 문제면 제가 고칠게요. 어디가 문젭니까?’ ‘너는 네 피 흘려봐야 소용없는 피고, 네가 죽어봐야 소용없는.’
나의 죽음이 매개가 아니에요. 나의 죽음이 나를 살리는 매개가 아닙니다. 나의 죽음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은 곧 같은 말이 나의 평생 살아감이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살다 죽는 거잖아요. 나의 죽음이 나의 최종 인생 마감이 의미가 없다면 안 받아준다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나한테 안 받아주는 거예요. 이 안 받아주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어디 있습니까? 나만 기쁜가? 내가 뭘 해도 주께서 안 받아주는 것이 얼마나 홀가분한 일이에요?
딸이 그림을 그리는데 자기를 정신을 다해서 정성을 다해서 그림을 그려요. ‘엄마, 나 그림 잘 그렸지.’ ‘음. 잘 그렸어.’ ‘엄마 보고 이야기해, 보고. 건성으로 하지 말고 보고.’ 엄마가 하는 말이, ‘네가 어떻게 그렸든지 내가 잘 그렸다고 하는 것은 내 기쁘신 뜻이야, 됐냐?’ 네가 어떻게 살아도 나는 기쁘단 말이죠. 그 기쁨이 우리 속에 이미 합류돼 있기 때문에 주님은 자기 피를 보고 기뻐하는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는 하는 것보고 기뻐하는 게 아니고.
주님을 자기 기쁨을 솎아내는데 우리의 행함으로 방해받지 않습니다. 우리 제치고 방해하고 업어 치기해서 기어이 자기가 준 것을 자기가 소급하면서 스스로 기뻐하는 주님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과 같이 동반해서 주어지는 게 있습니다.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냥 기뻐 안 해요. 못 기뻐합니다. 왜? 사람이 고집이 있고 자존심 상해서 안 기뻐하니까. 주께서 은혜를 주는데 그 은혜의 출처가 어디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그다음에 곧 이미 죄 사함이 완료가 돼버렸어요. 완료가 되었다고요.
야아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도 바울도 정말 대단해요. 대단한 사람이에요. 이 말을 거침없이 해요. 인간을 개 취급도 안 해요. 그냥 예수님 하는 이야기만 계속 쑤시고 들어갑니다. 기뻐하는 뜻도 겨냥하는 것도 예수님의 피, 은혜가 풍성히 오는 것도 예수님의 피. 결국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그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 사함을 종결시켜버렸어요. 끝내버렸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남은 일은 뭐냐? 주께서 끝내버린 그 죄가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느냐? 그 피를 전하기 위해서 우리로부터 우리의 육신대로 살 수밖에 없지요. 우리가 육신대로 산다 하니까 ‘우리가 이제부터 죄 지으면 되겠네’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가만있어도 육신은 죄가 나오게 돼 있어요. 여러분들 애쓰지 마세요.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다 죄가 됩니다. 얼마나 모든 것이 자동시스템이 돼서 숨 쉬는 것부터 해서 귤 까먹는 것, 물 마시는 것 전부 다 죄만 나오게 돼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다 주의 기쁘신 뜻을 위함입니다. 이미 판단은 끝났으니까요.
그러면 이 사실을 창세전의 이야기기 때문에 우리는 창세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육신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못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9절에서는 ‘비밀’이라고 했어요. 골로새서도 마찬가지고 로마서에도 나오는데 이 비밀의 특징은 공개되었다는 점. 이게 공개되지 않으면 비밀이 있는 줄도 몰라요.
비밀이 공개되었기 때문에 비밀을 아는 측과 비밀을 모르는 측이 비밀이 기준이 되어서 갈라서게 돼 있고 서로 간에 대화가 되질 않습니다. 한쪽은 창세후의 인간 이야기가 나오고, 한쪽은 창세전의 비밀이란 그리스도가 이야기되기 때문에 대화가 될 리가 없지요. 대화가 되지 않으면 뭐가 반복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 사건이 반복됩니다.
오늘밤에 주무시면서 이 피 사건이 꿈속에도 반복되기를 바라면서 강의를 끝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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