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주님의 현존성

아빠와 함께 2024. 10. 27. 18:06

주님의 현존성

2024년 10월 2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0:1-3

(30:1)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니라
(30: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30: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어차피 돌아올 곳이라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없는 이방나라로 포로잡히게 해서 돌아오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약속의 땅이 당연히 자신들의 살 땅이라는 곳이라는 생각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에게는 ‘약속의 땅’이란 없는 곳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죽고 벌받는 것이 진정 마땅합니다.

그 이상을 생각하는 것이 탐욕에 불과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오면서 백성들 스스로 전에 자신이 생각한 자아가 아님을 알게 하시면서 데려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자아가 깨어지는 데는 말씀만한 것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이 개입되면 자아는 그 앞에서 붕괴됩니다.

자아가 붕괴되지 아니하면 그 자아는 하나님의 ‘다 이루심’을 가리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는 것은 말씀, 혹은 말씀 다발이지 인간 자아가 아닙니다. 따라서 말씀이 다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도 없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도 없는 겁니다.

결국 이래나 저래나 약속의 땅은 인간에게 없는 곳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말씀을 못 지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못 지켜서 말씀이 없는 나라에게 살게 된 이스라엘 민족과는 달리 말씀을 다 지켜내신 분이 계십니다. 모든 말씀을 다 이루어내시므로 서 그 분만이 들어설 수 있는 약속의 땅이 마련됩니다.

이 약속의 땅은 인간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이 ‘아들의 나라’에 들어서려면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음’이 상태로 된 몸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죄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원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성령이 오시게 되면 성도의 내부는 말씀의 ‘다 이루심’이 자리잡게 되고 성도의 육신은 껍질에 해당됩니다. 곧 성도의 모든 활동이 모든 말씀의 ‘다 이루심’의 활동이 되는 겁니다.

이런 상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이것이 주님의 현존성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도는 주님과 함께 하십니다. 이 함께 있는 상태에 대해서 마태복음 7:24-27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성도뿌리부터 머리끝까지 말씀이 통으로 들어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성도와 함께 계신 주님께서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내시는데 그 모든 일은 오로지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현존성의 양상입니다. 성도가 따로 일을 꾸밀 필요가 없이 모든 상황에서 주님께서 일을 벌리십니다.

그 일을 통해서 성도는 더욱더 주님의 현존성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애초부터 자기 백성을 아에 약속의 땅을 떠나게 하시지 않게 하실 수도 있는데 왜 약속의 땅을 떠나고 나서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백성의 교체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새로운 피조물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구원받겠다는 자와 구별짓기 위함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더는 자기를 위한 삶이 존재하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시편 90:5-11에 보면,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 돌아올 자는 더는 자기를 위한 세계는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점을 잘 보여준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행전 26:16-18에서는 그는 왜 주님에게 호출되었는지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두움→빛, 사단의 권세→하나님의 권세, 죄있음→죄사함, 더러운 존재→거룩한 백성이 되눈데 있어 결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을 남들보기에 홀로 로마로 가는 배를 타게 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27:23-24에서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면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실시한 체험이 아니라 주님이 실시한 체험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예루살렘에 있으니 다른 이방지역에 있으나 그는 혼자가 아니라 주님을 함께 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은 약속의 땅에 이미 들어선 사람들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만이 있음을 늘 잊어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6강-예레미야 30장 1~3절(주님의 현존성)24102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0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1095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의 말씀을 굳이 책으로 기록해야 할 이유가 책은 결국, 모든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지적할 수 있는 율법적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전에 이렇게 이야기했잖아”라고 인간의 기초를 파헤칠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에 사라지는 말이 아니라 영원토록 남아있는 기록된 말씀으로 그렇게 제작되도록 주께서 만들라고 하신 거예요.

창세기 때 무슨 일이 있었고, 천지창조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거기에 대해서 모세를 통해 이미 창세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최초의 인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창세기입니다. 그 뒤에도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에게 편지를 남기게 하셨고, 주께서 사도바울로 하여금 그걸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마지막에는 기록된 말씀 외에 다른 말씀을 전하면 내가 생명나무에서 제해버린 사람으로 간주하겠다. 생명나무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은 특징이 기록된 말씀을 넘어가고 기록되지 않은 말씀까지 끄집어낼 때, ‘너는 짤렸어’라고 보시면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성도가 뭐냐. 기록된 말씀이라는 공간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고 거기서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자가 성도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죠.

그 말씀의 내용을 응축해 보면 그것은 “다 이루었다”예요. 말씀에 기록된 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이고 그 다 이루었다는 것이 능력으로 너를 살렸다는 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 되신 거예요. 미진한 일이 남아있으면 예수님은 아예 부활 되지도 않았습니다. 성도가 부활 되었다는 것은 부활 된 성도 안에 모든 말씀이 다 이루어진 거예요.

신명기 28장에 모든 말씀이 다 이루어지면 주어진 것은 복, 조금이라도 흠이 있거나 이루어진 것이 없으면 저주. 굉장히 간편해요. 하나님이 굉장히 일을 간단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에 보면 인간이 관심 두지 않는 대목을 주님께서는 관심 있게 보라는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 성도는 기초부터 위에 지붕까지 전부 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으로 통으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검증할 수 있느냐. 그것은 그 사람의 몸에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통으로 기초부터 머리까지 전부 다 말씀으로 무장되었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가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행동이나 일상의 사사로운 일 가운데서도 무엇이 섞여 나오느냐 하면 “다 이루었다”입니다.

11월 2일에 우리교회 정봉식 집사님 아들 정희욱 군의 결혼식이 대구 라온제나호텔 7층 컨벤션홀에서 있습니다. 결혼식 다 이루었습니다. 결혼하기 전부터 다 이루었고 끝나도 다 이루었고, 그 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이루었습니다. 왜냐 하면 결혼식이 어디에 붕 떠 있느냐 하면, “다 이루었다”의 파생된 현상으로써 그 위에 정희욱 군의 결혼식이 있는 거예요.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다 이루었다”라는 사건에서 삐져나온 거예요. 그래서 결혼식을 앞두고 있는 혼주 측에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건 또 음식값 비싸다고 부조 안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거. 결국 돈 걱정이지 다른 걱정이 뭐가 있습니까. 뭐 가을철인데 비가 쏟아져서 그날 하객들이 열댓 명이나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신랑 측 아버지에게 축사하라고 했는데, 말을 더듬어서 우리 남편 우사스럽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걱정하지 마세요. 다 이루었습니다. 평소의 우리 마음가짐이 통으로 말씀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다 이루었다”라는 것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다 끝났죠.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의외로 굉장히 어려운 말씀인데 정말 들어보면 엄청나게 어려운 말씀을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보겠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노래방에도 함께 계시고, 나이트클럽은 좀 그렇지만? 어디에 가도 함께 계십니다. 이것을 주님의 현존성이라고 하죠. 보이지 않지만 함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왜 함께 계시는가. “다 이루었다”라는 그 사건을 함께 있는 자기의 새로운 피조물을 통해서 계속해서 나타내기 위해서 현존성, 함께 있는 거예요. 침대에도 함께 계시고, 노는 자리에도 함께 계시고, 해외 여행가도 함께 계시고, 아주 끈질기죠. 끈질겨. 자기 백성에게서 떨어지질 않습니다. 왜냐 하면 자기 백성이거든요.

성도는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고 이미 다 이루었다는 확정, “너는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다”라고 확정 지으신 그분이, 그냥 내 것이라고 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같이 계시면서 일을 벌여나가고 예상 못 한 상황이 터지면서 ‘함께 있음, 함께 있음, 같이 있음, 같이 있음’이라는 상황을 계속 드러내는 그런 상황 속에 성도는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이건, 바로 성도 개인이, 개인의 계획, 미래 계획은 더 이상 없습니다. 사라졌어요. 인간은 이상스럽게 내일을 기약하는 단어만 기억하는 버릇이 있어요.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자기에게 손해 되는 것은 자꾸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이죠. 그 점에 대해서 함께 있는 성경은 우리 형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편 90편 6~10절에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김수미 한번 보세요. 김수미 아십니까? 나이 75세에 죽었어요. 당뇨로 죽었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지금 현존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따라서 그동안 결국은 현존하지 못할 나를 위해서 나 자신 붙들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 관리인지요. 정말 인생을 잘못 사는 거예요.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아요. 내가 현존하면 안 되죠. 말씀 다발이 현존해야지.

다 이루심이 우리 안에 있고 껍데기만 우리 육신으로 나타내는 거죠. 그래야 하죠. 오늘 본문에서 책에 기록하라고 해놓으시고 “내가 너희들을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 이 말을 듣는 사람들,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고,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아, 그들이 포로 생활 끝내고 다시 돌아오니까 얼마나 기분 좋겠느냐’라고 자꾸 생각해요.

이렇게 생각해버리면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주님의 현존성이 가려져요. 나의 현존성으로 인해서. ‘그래, 조금만 기다리자. 이제 이 생활을 제대하게 되면 나는 잘되잖아. 약속의 땅에서 잘 먹고 잘살 수 있데’ 그러나 약속의 땅에서 성전 짓게 되는데요, 그 성전 지어봐야 성전 날아갑니다. 소용없어요. 주님의 다 이루셨다는 것은 자꾸 나의 현존성, 내가 여기 있음을 바쳐주기 위한 다 이루었음이 아니에요.

너 말고 내가 끝까지, 내가,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내가(이건 큰소리로) 너와(이건 모기소리처럼 작게)” 나에 대해서는 굉장히 작은 소리로, 주님에 대해서는 큰소리로. 주님 좋으라고 돌아오는 것이지, 나 살기 좋으라고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6장 17~18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엄청난 이야기를 해요. 이것은 인간이라고 여기는 모든 인간은 다 들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여기에서 설교하는 대로 지금 껍데기는 사도바울이지만 속에는 다 이루었다가 사도바울의 육신을 통해 바깥에 나타날 때, 어떤 식의 고백이 나오는지를 한번 들어보세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게 사도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평소에 여러분 입에서도 자주 나오지요? 평소에 여러분 입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인지 한 번 더 읽어 보겠습니다.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압력, 힘)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예수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천국)을 (유산으로)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 ‘나’라는 껍데기가 아직도 이 땅에 살아가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어요.

여기에 돌아온다고 되어 있어요. 오늘 예레미야 30장 하고 있잖아요. 30장 3절에도 마찬가지로 “돌아온다”라고 나와요.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라고.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 잡히게 하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그러면 돌아오면서 뭐만 생각하면 되냐면, 우리가 왜 포로 잡혔지? 왜 우리는 여호와가 없는 이방 나라, 성전이 없는 이방 나라에서 가혹하고 혹독한 포로 생활을 왜 했지? 그걸 생각하면서 돌아오라는 거예요. 이것은 돌아오는 사람의 마음속에 가득히 들어있어야 할 말씀 자체의 진행 과정입니다. 여러분, 돌아왔습니까? 돌아왔다면 당연히 나올 질문은 이거예요.

어디서 돌아왔습니까? 어디서, 어디서 돌아왔지요? 집에서 돌아왔어요. 집에서 돌아온 것은 안 믿습니다. 왜?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거니까. 교회에서 돌아왔어요? 그러니까 돌아갔다, 돌아온다는 이게 수평적인 인간의 삶에서는 돌아간다, 돌아온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왜냐 하면, 이 지점이나, 교회라는 지점이나, 집이라는 지점이나, 어디 있더라도, 갑자기 당뇨가 심해서 김수미처럼 죽어버리면 어디로 돌아가죠? 죽음으로 돌아가죠.

죽음은 뭐냐? 죽음은 죄로 값을 치르는 것이 죽음이잖아요. 죄지은 인간은 잠시 살았다고 하지만 용수철 잡아당기듯이 도로, ‘이 자리가 네 자리야’라고 죽여버리는 거예요. “정녕 죽으리라” 이게 본래 우리 자리입니다. 살아있으니까 깝죽대고 뭘 하지만 죽는 자리가 원래 자리예요. 잠시 살아서 11월 2일에 결혼식도 하고 하지만, 결국 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의식은 장례식이지, 결혼식이 아니지요. 돌잔치 아닙니다.

전도서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지금 결혼식 앞두고 악담하는 것이 아니고요. 너는 가려거든 장례식에 가거라. 그게 네 모습이다. 이게 왜 우리가 이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안 느껴지느냐. 혼자서 살기 때문에. 혼자 현존하기 때문에 그래요. 혼자 있기 때문에. 뭐 결혼했으면, 남편과 아내가 같이 있지요. 물론 각자도생이지만. 눈에 보이는 인간만 자꾸 현존한다고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주님이 현존한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렇지 않아요.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27장 23~2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면 망망대해, 로마로 가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볼 일이 있는데, 그 볼일은 아까 사도행전 26장에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자들 중에 나를 택하사, 이방인들에게 보낸 이유가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성도되게 하기 위해서” 사도바울로 하여금 배에 올라타게 한 거예요.

남들 보기에 ‘참 네 팔자도 참 험한 팔자다’라고 할 때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 혼자 있는 거 아니거든. 너는 지금 내가 혼자 있는 것으로 보이냐? 그리고 사도행전 27장 23~24절에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절에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사도바울은 바빠요. 다 이루었다는 주의 말씀대로, 말씀이 현존 되어 있고, 말씀을 주신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자기는 뭐가 바쁘냐. “말씀대로, 말씀대로” 어떤 손님이 오거나 또는 누구를 만났을 때, 밖에 나가서 어떤 일을 할 때, 이 자체가 하나하나, 전부다 “말씀대로, 말씀대로”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의 일환으로써, 하나의 양태와 양상으로써, “다 이루었다”의 하나의 파도로써, 물결로써, 사도바울은 그걸 체험하기 바빠요.

우리는 무슨 체험을 하지요? ‘아, 가을이구나. 낙엽이나 한번 밟아볼까?’ 혼자 살아요. 혼자 밥 먹고, 혼자 TV 보고, 혼자 책을 읽고, 혼자 춤을 추고, 혼자 놀러 가고, 매사가 심지어 군중 속에서도 고독해요. 외로워 죽겠다는 거예요. 지금 외로울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매사가, 매 환경이 어두운 것을 체험해서 나는 빛인가 어둠인가를 체험하라고 어두운 세계를 주셨잖아요.

지옥같은 세계에 놓이게 하셨단 말이죠. 어떤 분이 지금 통장(統長)도 하고 계시는데. 이 악한 지옥같은 세상에서 왜 그 직책을 맡았겠어요. 체험하라는 거예요. 어두움에서 빛으로. “다 이루었다”를 모르는 사람에게 “다 이루었다”라는 것이 뭔지를 증거하라고. 하루하루가 우리는 안 바쁜데,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되게 바빠요. 이로써 우리의 일은 하나도 없어요.

어떤 것도, 심지어 나의 장례식도 나의 일이 아니고, 어떤 경우도 나의 일은 없고, 전부 다 함께 계신 주께서 맡기신 일입니다. 여러분이 직장이나, 어떤 일, 뭐 장사를 하든, 집에서 백수하며 노는 일이든, 그게 어떤 일이든, 내가 어디서 돌이켰느냐를 보는 거죠. 나는 딱 어둠이죠. 죄의 무게를 감당 못 해서 혼자서 자기 잘난 체하고, 그저 입만 열면 자기변명, 자기 핑계, 자기 의로움, 누구를 만나도 그것만 튀어나오고, 자기 자랑만 나오는 거예요.

함께 계신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연극은 끝났다” 연극의 모든 세트장은 어떻게 되는가. 하늘로 휘감겨 올라갑니다. 베드로 후서에 나오죠. 3장 12~13절에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새로운 피조물이 갈 곳은 새 하늘과 새 땅 외에는 못 갑니다.

그 땅에 가기 전에 지옥이나 실컷 체험하세요. 내가 살았던 사고방식, 내가 봤던 현실관 속에 그대로 놓여서 뭣도 모르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한번 보라고요. 거기에서 돌이키게 하신 하나님의 다 이루심, 십자가에 다 이루심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그런 식으로 약속의 땅, 오늘 본문에 약속의 땅에 돌아가는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내 사적인 것을 어떻게 하는가.

감자샐러드, 조그만 절구에다가 감자 삶아서 집어넣고, 사정없이 주께서 말씀으로 팍팍 으깨버리죠. 으깨요. “아직도 네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막 얻어터지면서 ‘주께서 살아있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해도 “아직 멀었어. 더 으깨져야 해”라고 하시면 말씀으로 팍팍 으깨시죠. 항상 내가 현존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현존한다고 생각하면서 주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무지 순간순간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타고난 우리의 죄 성이요, 육신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시고,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을 십자가로 감당하셔서, 다 감당했다는, 다 이루었다는 소식이 매 순간 지옥 삶을 통해서도 늘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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