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2024년 11월 1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0:12-17
(30: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창상은 중하도다
(30:13) 네 송사를 변호할 자가 없고 네 상처를 싸맬 약이 없도다
(30:14)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허물이 크고 네 죄가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대적의 상하게 하는 그것으로 너를 상하게 하며 잔학한 자의 징계하는 그것으로 너를 징계함이어늘
(30:15) 어찌하여 네 상처를 인하여 부르짖느뇨 네 고통이 낫지 못하리라 네 죄악의 큼과 죄의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였느니라
(30:16) 그러나 무릇 너를 먹는 자는 먹히며 무릇 너를 치는 자는 다 포로가 되며 너를 탈취하는 자는 탈취를 당하며 무릇 너를 약탈하는 자는 내가 그로 약탈을 당하게 하리라
(30: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상처는 험담을 듣게 되는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에 파급됩니다. 이스라엘은 전체적으로 선지자에게 대듭니다.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에게 상처가 돌아가겠다고 다짐하십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도 모릅니다.
그들은 인간들이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을 정립하는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요령이라는 게 있습니다. 타인에게 있어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게 보이고, 반대로 자신의 치부를 얼마나 교묘하게 감출 수 있는가를 감안해서 삶의 기술을 연마하고 터득해 왔던 갑니다.
그런데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실망스러운 미래상을 부여받게 됩니다. 당연히 마음에 상처를 받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상처를 의도적으로 집어넣어주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장차 하나님이 받으실 상처 안에서 새롭게 구상해서 끄집어낼 새로운 완전한 이스라엘이 따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처를 경유하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인간들 아이디어서 나온 모호한 하나님의 이미지하고는 결별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상처주시는 하나님을 믿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인간들은 세상을 살면서 재미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세상 재미일까요? 그것은 타인에게 자랑할 게 있다는 것이 세상 사는 재미입니다. 만약에 세상에 대해서 내세울 게 없으면 살 맛이 나지 않고 지루해집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타인 앞에서 별 볼일없는 존재가 되는 것에 상처를 입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 편이고 자기를 지켜주신다는 것을 자부심을 갖는 동시에 평소에 인간 본성에 나오는 사는 재미까지 하나님을 동원해서라도 비축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도리어 된통으로 자신이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철석같이 하나님만을 믿고 쳐다보고 사는 이스라엘에서는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따라서 차라리 예레미야 자체를 참된 하나님으로 오신 선지자가 아닌 것으로 이해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번에는 선지자 본인이 백성들로부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자, 과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었던 겁니까? 신약에 와서 전반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인간 평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10-11에 보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전제로 신약을 봐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자기 땅’이란 바로 먼저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바로 ‘영접지 아니했고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못 알아보고 영접아니했다 는 말은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그 누구도 구원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신은 자기쪽에서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2-13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영접을 하던 주님의 이름을 믿던 하나님의 자녀가 되던 그 모든 것은 결코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난 자들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그들은 순전하게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 결코 믿음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식으로 그들의 역사는 몰락되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은 이사야 10:5에 보면,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마치 자기 반 담임선생님이 자기반 아이들을 때리는데 옆집 반 아이를 동원해서 때리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을 때 옆반 아이들은 얼마나 자만을 떨고 교만스워하는 지를 보라는 겁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사 10:15)
실제로 이사야 36장에 보면, 앗수르 군대장관이 유다나라에 쳐들어와서 성밖을 포위한 뒤에 예루살렘 성 안으로 날려보내는 발언이 나와 있습니다. 이 발언은 고스란히 하늘에게는 녹음이 다 되어 있습니다.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경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나는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사 36:7-8)
오늘날 이 불신자들이 복음을 믿는 자들을 향해 날리는 이 조롱의 발언을 듣게 되지만 실은 그들의 발언을 수시로 우리 내부에서 늘 올라오는 발언이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 20장은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장담했습니다. “나는 보지 않고는 안 믿는다”
이때 주님이 보여주시는 바로 주님의 상처였습니다. 부활의 능력, 부활은 힘은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상처에서 나옵니다. 아무도 구원되지 못함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부활이 나오므로서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 주님의 상처가 삽입되어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바로 인식이 곧 부활의 능력입니다. 더는 자기 자랑으로 세상 살지 않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무너짐을 이제는 안타깝게 여기지 말게 하시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8강-예레미야 30장 12~17절(상처)24111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0장 12~17절입니다. 구약성경 1097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창상은 중하도다, 네 송사를 변호할 자가 없고 네 상처를 싸맬 약이 없도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허물이 크고 네 죄가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대적의 상하게하는 그것으로 너를 상하게 하며 잔학한 자의 징계하는 그것으로 너를 징계함이어늘, 어찌하여 네 상처를 인하여 부르짖느뇨 네 고통이 낫지 못하리라 네 죄악의 큼과 죄의 수다함을 인하여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였느니라, 그러나 무릇 너를 먹는 자는 먹히며 무릇 너를 치는 자는 다 포로가 되며 너를 탈취하는 자는 탈취를 당하며 무릇 너를 약탈하는 자는 내가 그로 약탈을 당하게 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구약이거든요. 구약의 특징은 이방 나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인간과 인간끼리는 눈에 보여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을 상대할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요령을 부릴 여지가 있어요.
물론 이스라엘도 인간을 상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해버리면 평소에 인간을 상대하는 그 방식이 좌절됩니다. 거기서 인간은 상처를 받아요. 그리고 인생의 고통을 느끼고, 아픔을 느끼고, 절망을 느낍니다. 그렇게 할 때 인간은 가만히 있느냐. 가만히 있지 않아요. 그 원망을 누구에게 쏟아내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 쏟아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주신 햇빛과 공기, 하나님이 살려주신 거, 한평생 살아가는 거 다 잊어버리고, ‘왜 나를 아프게 합니까’라는 쪽으로 연필심을 갈면 뾰족해지듯, 그 감각으로 하나님께 대들 듯이 나서게 되어있습니다. 평소에 살아가는 것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조금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 아픔이 오게 되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하나님께 대드는 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이스라엘은 몰락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함이 좋아서 찬양 부르던 그 모습과, 끝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몰락하는 그 모습은, 성도가 뭔지도 모르고 교회 다니는 걸로 성도 된 듯이 여기는 사람들의 일대기를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잘될 때 하나님께 원 없이 찬양하고 감사헌금하고 예배 참석 즐거이 해드렸죠.
그러나 그렇게 예배 참석하고, 헌금하고 찬양했던 그것이, 자기는 순수하게 드렸다고 했는데, 인간에게 무슨 순수가 있습니까? 인간은 반드시 자기 노동에 대해서 대가를 노리고 행동하게 되어있는데, 그렇게 하나님에게 뭔가 준 게 있으면 은근히 하나님께 노리는 것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게 제때 수급이 안 될 때, ‘나, 당신과 안 놀란다’라고 삐져서 나가버리죠.
그래서 종교라는 것은 오락입니다. 소꿉놀이고요. 신부들 복장 보세요. 여러분도 어릴 때 하던 장군 따먹기 생각 안 들던가요? 복장에 훈장 달 듯이 달고, 색칠한 것 보면, 아직도 어린아이들 같고, 옛날 동화 속에 게임 하듯이, 거룩한 게임을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스스로 거룩한 행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게임 중에 ‘체스(서양식 장기)’ 같아요.
체스판에 보면 말들의 모양 보세요. 기사, 왕, 이런 것들을 말에 조각을 해놨다고요. 천주교가 자기를 자기가 스스로 조각하는 거예요. 인격적인 조각을 해서 남들 보기에 눈에 보이는 거룩한 모습으로, 한창 정서적으로 예민한 사춘기 아이들 성당으로 오게 해서 그 아이들을 계속 어른 될 때까지 키워서, 어릴 때부터 복사시켜서, 신부 되든지, 성당 봉사하게 하든지, 그중에 열혈사제(드라마)도 하나 있고요.
그렇게 해서 남들 보기에, 일반인들 보기에 ‘저 동네 뭐 있다. 저 동네에 천국 가는 길 있는 거 같아. 저기 가면 천국 따낼 것 같아’라는 업종 장사용 컨셉(concept)을 만든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거룩한 소꿉놀이로 인해 가려지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의 상처입니다.
주님의 상처는 스스로 자해한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찔렀지요. 도마가 부재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 봤다. 우리에게 다녀갔어’라고 할 때, 못 믿겠다. 나는 주님 보고 믿겠다라고 할 때, 도마는 뭘 빼고 주님을 생각했느냐 하면 상처 빼고 주님을 생각한 거예요. 멀쩡한 주님. 그러나 인간에 의해서 이미 죽임을 당한 이상은, 살아있을 때 주님이나 부활한 주님이나 멀쩡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접근 불가합니다. 접근되지 못하는 주님, 그게 부활하신 주님이에요. 상처를 앞장세우는 주님이기 때문에. 그 상처는 어느 누구도, 구원되겠다는 욕망을 갖고 있는 누구에게도 천국은 용납되지 않는다. 어떤 누구에게도. 우리가 구약을 거쳐서 신약을 봐야 할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구약이죠. 하나님이 자기 땅에 오신 거예요.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왜? 왜 그들은 영접하지 않았지?’ 그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상처를 입히는 존재일 거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상처를 감안해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영접할 수가 없었어요. 그저 자기 잘난 체, 자기 우수한 체, 자기 우수함으로 주님을 맞이하려고 했어요. 인간들이 왜 사는가. 그 사는 동력이 뭐냐. 사람들에게 왜 사냐고 물어보면, ‘재미를 얻기 위해서 삽니다’라고 하거든요.
그건 어느 정도 생각 있는 사람이면 긍정해요. ‘이왕 사는 거, 재미있는 게 제일 좋아요. 재미있게 살랍니다’라고 하죠. 그러면 ‘재미가 뭡니까?’라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입을 다물어요. 왜? 거기서 더 나아가면 자신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본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인간의 재미는 어디서 오는가. 자기가 자랑할 것이 있을 때만, 재미있어요. 자랑할 게 있을 때만 재미가 나요.
‘엄마, 나 수학 빵점 맞았다’라는 것을 절대 재미로 여기지 않습니다. ‘엄마, 나 수학 백 점 맞았다. 반에서 일 등 했다’라고 하는 그 아이는 지금 사는 재미가 펄펄합니다. 남에게 내세울 게 있을 때, 사는 재미가 나와요. 그러면 인간에게 사는 재미는 상처 입은 하나님이 필요치 않습니다. 내 자랑을 받아주고, 내 자랑을 부러워할 타인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인간은 오로지 인간만 상대하고, 하나님도 우리 인간 같은 인간의 연장선에서 나타난 그런 신만 섬깁니다. 하나님이 인간 같았으면 좋겠어요. 인간들의 생각은 그래요. 인간들의 생각을 들어주고, 받아주고, 북돋워 주고. 인간의 생각과 동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인간은 갖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 믿는 것도 내 자랑거리의 리스트에 들어가고 싶은 거예요.
딴 것도 자랑스럽지만, 게다가 ‘하나님 믿었다. 어릴 때부터 믿었다’라는 이거. 그러니까 그 집안에 목사 하나 나오면, 그걸 수치스럽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 사회적인 포지션 가운데, 목사라 하는 것은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부도 물론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2절에 계속 보면 “영접하는 자” 그러니까 아무도 영접을 안 했어요.
아무도 영접 안 했는데, 불쑥 12절에 “영접하는 자”가 나옵니다. ‘어, 그런 사람 없는데’ 맞아요. 그런 사람 없습니다. 없는데, 없는 이유가 나와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는 자도 없어요. 그 이름을 믿는 자도 없어요. 하나님의 자녀도 없어요. 그런데 13절에 보면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바로 이것은 요한복음 처음부터 끝까지가 뭐냐, 나의 상처 안에서 새롭게 난 피조물이 하나님의 성도가 되는 거예요. 주님의 상처 안에서. 주님의 상처 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성령이 나오는데, 성령은 죄인을 하나님의 백성 만드는 능력이 거기서 나와요. 그게 부활의 능력이에요. 상처가 없는 부활은 없어요. 그런 부활은 없어요.
상처에서 나오는 능력. 상처가 되어야 비로소 나오는 생명의 능력이에요. 상처에서 나오지 않는 부활의 능력은 없습니다. 목사가 사람들에게 설교하면서 보통 두 가지를 이야기해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너무나 참혹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아픔을 겪었습니다’라고 하면 교인들은 ‘우짜노. 주님이 고난받았구나’라고 하면서 눈물 막 흘리고. ‘낡고 오래된 십자가’(원어 제목) 아침에 불렀던 찬송가 135장(갈보리산 위에)이죠.
그 뒤에 설교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부활로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 기쁘다’라고 하죠. 이제 문제 나갑니다. 십자가냐, 부활이냐? 어느 쪽이 좋습니까? 사람들은 부활의 새 생명을 선택합니다. 인간이 새 생명을 선택할 때 그걸 사자성어로 ‘바리새인’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이 부활을 믿었거든요. 부활을 믿는 그들은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지옥으로 쫓겨나고, 울며 이를 갊이 있다고 나와요.
부활을 믿었는데, 부활을 소망했는데, 장차 희망을 소망했는데,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 같은 이방인이 천국을 가고, 소위 천국 간다는 너희들이 쫓겨나서 어두운 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님이 백부장을 칭찬하면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지 못했다고 했어요. 왜냐 하면 영접하는 자가 아무도 없으니까. 마태복음 8장 12절에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대목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 지옥 환경의 조명발은 어둡다는 겁니다. 지옥은 무척이나 어둡다는 겁니다. 어두우니까, 자기가 자랑할 거, 남에게 보여 줄 자랑거리가 있어도 어두우니까 남에게 보이지 않겠죠. 다시 말해서 지옥이란, 바로 오늘날, 이 세상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지옥 가야 지옥이 아니고, 이 세상부터 바로 지옥은 시작되었습니다.
남에게 자랑하면서, 자랑거리로 사는 재미를 느끼는 거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뭘 주느냐. 상처를 줍니다. 나는 남에게 잘했는데, 남들은 나에게 상처를 주는 거예요. 그래도 ‘고맙소’가 돼요. 노래 가사에 나와요. 김호중이가 불렀던. 지금은 쓸쓸한 데 가 있지만. 나는 남에게 잘해줬는데, 그들은 상처를 줬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가사에서 ‘내가 그동안 세상을 몰랐나 보다’라고 하는데, 세상을 몰랐던 것이 아니고, 네가 너를 몰랐던 거예요. 실망스럽다는 거거든요. 지금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부터 이스라엘 전체가, 예레미야의 상처로부터 이스라엘 전체로 퍼지게 되어있습니다. 선지자의 상처가 일반인의 상처로 번지고, 그 일반인의 상처 안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상처를 남기고 그 일반인 중에서 주님 상처의 의미를 아는 자가 율법대로 완성된 천국의 백성으로 만들어진다는 내용이죠.
그중에서 뭐냐. 선지자의 상처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선지자의 상처가 이스라엘 상처 전반으로 퍼진다는 예언을 오늘 본문에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떻게?’ 그리고 ‘왜?’ 왜인지는 뻔히 알죠. 맞을 짓 해서 맞는 거니까. 그러면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가. 하나님의 방식은 이렇습니다. 몽둥이를 사용합니다.
이사야 10장 5절.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이스라엘의 담임선생님께서 자기 반 아이들이 떠드니까, 선생님이 직접 몽둥이를 들고 치는 것이 아니고, 만약 3학년 2반 담임인데 떠든다면, 선생님이 직접 아이들을 때리는 것이 아니고 3학년 1반 아이를 가지고, 담임도 아니고 아이에게 몽둥이 들고 3학년 2반 아이를 패게 합니다.
자기 반 아이를 칩니다. 그러면 여기서 발생 된 상처는 뭐냐. ‘아프다’라는 게 아닙니다. ‘저분은 그동안 우리를 사랑 안 했어? 우리 담임선생님 아니야?’ 집에 가면 부모님 있고, 학교에 가면 담임선생님이 부모인데, 왜 부모가 나를 때리지? 그러면 흔한 말로 뭐라고 합니까. 다 잘되라고 때리는 거라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뭐가 문제냐 하면, 잘되는 게 뭔지를 몰라요.
잘 되는 것은 뭘 거쳐야 하느냐 하면, 자기 절망을 거쳐야, 자기 절망을 거치기 전에, ‘나 잘될 거야’라는 것과 확연히 달라요. 내가 자기 절망을 거치지 않을 때, 내가 잘되려고 하는 것은 ‘내 자랑거리, 사는 재미, 사람들에게 보여 줄 만한 그럴듯한 사는 재미, 나 인생 이렇게 성공했어’라는 그걸 잘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연속성을 유지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앗수르라는 몽둥이, 바벨론이라는 몽둥이 가지고 자기 백성을 개 패듯이 패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가 잃어버렸던, 놓쳐버렸던 그 내용을 생각해야 해요. 어느 강의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수요 말씀에서도 이야기했는데, 여러분, 하나님이 폭력적이라는 생각을 감히 못 했지요? 왜?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은 사랑이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너무 그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듯이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폭력적이라는 말을 잘 안 들었어요.
쉽게 말해서 “어디서 내 앞에서 눈물 찔찔 흘려?”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폭력은.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라는 이것이 얼마나 폭력적입니까? 때려서 아픈 것이 아니고 내가 믿었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에서 온 좌절감이 더 큰 상처가 되죠. 그때 저절로, 나도 모르게 오는 고백이 있어요.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사실 이 고백은 예수님만 하실 자격이 되지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는 게 되지만,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이게 아직 덜 처맞았구나”라고 하시는 거죠. 아직 입이 산 거 보니까, 네가 덜 처맞았구나. 현재 너의 것이 있다고 믿고, 배가 열두 척이 있다고 믿으니까 지금 나에게 개개지? 내가 한 척도 남지 않게 할 거야. 그때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보자. 이게 바로 구약의 욥기입니다.
욥기에 욥이 얼마나 말이 많은지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요?’ 이사야 10장 15절에 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들고 이스라엘을 치면서 너를 치는 앗수르, 네가 의지했던 바벨론, 이게, 그들이 얼마나 교만한지를 네가 실제로 패배하면서 경험해 보라는 겁니다. 네가 다른 민족에게 ‘이스라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너희들 부럽지?’라고 남에게 자랑질 하고 싶은, 듣고 싶은 그 대상, 그 대상을 통해서 하나님이 몽둥이질을 할 때, 그 몽둥이에 해당하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얼마나 너에게 악질이었고, 냉혹했고, 비정했고, 같이 상종할 인간 아닌 것을 네가 혹독하게 한 번 경험해라.
그들이 때리면서 앗수르나 바벨론에서, 특히 앗수르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이사야 36장에도 나오는데, 랍사게가 말하죠. ‘야, 너희가 여호와 믿으면서, 너희 여호와가 너희들 지켜준다고 했잖아’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믿지 마. 너희들 믿은 게 오락이야. 너희들도 알잖아. 너희가 하나님 믿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안 믿고 있는 거 우리가 먼저 안다니까. 너희들은 솔직히 안 믿고 있으니까 믿지 마’라는 기회를 누가 줬느냐.
믿지도 않으면서, 세상 것에 온 정신 다 팔려있으면서, 교회 와서는 믿는 척하는 이중성. 귀신을 속이세요. 하나님이 그것에 속아 넘어갈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절망하게 해버려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못 믿게 만드신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이런 말씀 나오죠.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얼마나 폭력적입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냉철하고 냉혹해요. 주를 사랑한다는 말은 너를 미워하라는 뜻이거든요. 태어난 인간 중에서 자기를 미워할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저주는 타고난 우리의 팔자이고 운명이 되고 말았어요.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 쪽에서 사랑의 폭을 넓혀버려요. 사랑의 폭을 넓히면 바벨론이 몽둥이 역할로 이스라엘에게 상처를 줘요.
상처를 주는데 오늘 본문 끝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 상처받았지?”라고 하니까, ‘예!!’ “누가 상처 줬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처를 줬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준 상처를 보고, 상처가 있기 때문에 그 상처를 건져줄게. 그러면 너희들은 구원받을 거다” 이 방법을 주께서 사용하십니다. 그 방법이 예수님 십자가 사건 안에 다 들어있어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기에, 아버지로부터 영혼을 다시 받으시는 영혼이시고, 그 영혼은 상처 입은 영혼이었어요. 그것을 복제해버리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마지막 아담에 속한 새로운 아담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상처 덕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에게 자랑할 것이 없어서 입 다물고 있고, 자랑할 것이 있으면 떠벌릴 수밖에 없는, 그게 사는 즐거움이요 재미로 살아왔던 저희들, 그래 놓고 하나님 믿는다고 우겼던 우리 자신, 하지만 주께서 일하시는 것은 말씀으로 일하심에 감사합니다. 그 말씀의 완성이 우리가 아니고, 바로 십자가에 예수님이 완성했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완성하신 상처의 능력으로 주님의 상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