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언약의 시공간
2024년 11월 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0:8-11
(30:8)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버리며 네 줄을 끊으리니 이방인이 다시는 너를 부리지 못할 것이며
(30:9)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30:10)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고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얻을 것이라 너를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30: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진멸한다 할지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공도로 너를 징책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이 무슨 대책을 세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친히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갑니다. 인간들은 자기네들 아쉬운 것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당연히 하나님보다 도와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개인 위주가 아니라 새로운 ‘우리’를조성하려고 하십니다. 즉 개인 위주로 살다가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어 도로 다른 이방나라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때는 결코 개인 위주는 용납될 수 없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기밖에 모른 식으로 사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삭제가 가능한 채로 약속의 땅으로 도로 들어올 수 있겠느냐하는 겁니다. 우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대해서 과연 ‘자기 위주’로 이해하는지 아니면 ‘자기 위주’가 아닌 태도로 이해하는지로 나뉘어집니다.
그 약속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으로 나와 있습니다. ‘다윗왕’은 옛날에 70세로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 왕’이 다시 살아난다구요? 여기서 우리는 ‘개인 위주’로 해석하는 것과 개인 위주로 벗어난 해석하는 것이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개인이 살아있는 식으로 ‘우리’가 아니라 ‘나’가 삭제당한 채로 구성되는 것이 ‘우리’가 되려면 삭제당하는 그 나를 대신할 초월적 ‘나’가 따로 마련되고 나머지 ‘우리’의 각 구성원들은 그 초월적 자아와 ‘우리’라는 자격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초월적 나’는 시공간적으로도 개인이 느끼고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능가하는 안목을 갖게 됩니다.
다윗은 비록 죽었지만 죽은 다윗 안에, 다윗이라는 개인을 능가하면 초월적 다윗 존재가 있어서 그 다윗은 부활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 자손의 부활’ 혹은 ‘다윗 언약의 영속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언약이란 노아의 방주와 같은 겁니다. 비록 노아의 가족들도 다 물 속에 빠져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시적인 언약체 방주를 만들게 함으로서 그 안에 들어가서 살 수가 있었습니다.
방주 안에서 이미 노아 가족은 이미 죽은 자로서 자신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삭제’를 통해 언약의 살림이 증거 가능합니다. 다윗 언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므로서 다윗 언약이 주어지고 내내 그 자체에 시간이나 공간이 ‘개인’은 버리고 ‘우리’를 새롭게 살리는 기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나→우리’가 가능한 기능을 위한 낯선 시간과 공간이 다윗 언약이 진행되면서 펼쳐집니다. 우 선 공간적으로 보면 이러합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일 같은 겁니다. 결코 물맷돌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물맷돌로 이겼다면 골리앗에게 이긴 후 전 이스라엘 군대를 물맷돌로 무장시킬 겁니다.
시편 8편에서는 소년 다윗이 전쟁을 이긴 이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시 8:1-2)
하나님의 전쟁의 참전자는 한없이 작아지고 낮아져야 합니다. 마치 전혀 내세울 것없는 어린아이와 젖먹이처럼 말입니다. 승리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서는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자아 삭제의 조건을 갖추게 됩니다. 이는 인간 자신이 알아서 자진해서 포로된 데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 삭제가 된 채로 돌아와 ‘우리’ 안에 편입되는 것을 말합니다. 과연 시간과 공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천국을 설명하면서 어느 임금의 자기 아들 혼인잔치를 알리고 백성들을 초청한 대목이 나옵니다. 개인위주로 살던 일반인들은 자신의 다급한 일을 제처두고 임금이라는 타인의 행사에 참석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임금은 길거리에 나가 아무나 데리고 와서 혼인잔치를 참석케 하라고 임금은 종에게 지시합니다.
그런데 혼인잔치 이야기를 통해 천국의 내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임금의 인식과 동일한 공통의 자리임을 강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2:11-13)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리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
14) 즉 자기 의식을 유지하면서 천국에 합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자기 의식으로 무장된 것은 천국의 예복도 가리지 않는 그 한 사람은 천국에 강제 퇴장 당한 겁니다. 이번에서 다윗 언약의 새로운 시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러합니다.
마태복음 24:14-15에 보면,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분명 주인은 먼 타국에 갑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섯 달라트와 두 달란트 받은 직원은 주인이 먼 타국으로 간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현재 같이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일합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직원만이 주인이 먼 타국에 간 것을 여깁니다. 자기 의식에 무장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올 때에 그래서 고이 간직한 주인의 것으로 도로 내어놓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분노합니다. 그것은 악한 종이 자기 위주의 시간 의식으로 무장된 채 그동안 감히 주인의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복음의 ‘다 이루심’이 주입되어 자신이 이미 주님과 새로운 시공간함을 느끼는 자라야 가능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나를 위대하는 쪽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7강-예레미야 30장 8~11절(다윗언약의 시공간)24110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0장 8~11절입니다. 구약성경 1097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버리며 네 줄을 끊으리니 이방인이 다시는 너를 부리지 못할 것이며,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고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얻을 것이라 너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진멸한다 할찌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공도로 너를 징책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계획이 먼저 있고, 세상은 그 계획 따라서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쪽에서, 유다 쪽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맞추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계획은 이 땅에서 두 가지 요소로써 성취되는데, 하나는 시간의 자리, 하나는 공간의 자리입니다. 공간적으로 이 말씀이 이루어지고 시간적으로 이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우선 공간적으로 보게 되면, “내가 너희들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해서 이방 나라로 가게 했다” 그러니까 우선 약속의 땅, 공간이죠, 그리고 이방 나라의 땅, 공간이죠.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는 약속의 땅에 살아야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방 나라 가게 되면 백성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땅을 잃어버렸으니까, ‘우리는 끝났어. 우리는 안 된 거야.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새로운 공간이 주어지면, 그 공간은 심지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있으면, 그 공간이 하늘나라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돌아오게 하셨다는 조건이 그 안에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내가 똑똑하고 내가 말씀 연구해서 돌아왔다’라고 이렇게 나오면 그건 이방인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잃어버림의 경험을 줬고, 그 잃어버림은 우리 탓이 맞다.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잃어버림이 마땅하다’라는 그 체험, 그 체험을 지니고 그 상태에서 다시 돌아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조치도 하나님에게 합당하고 돌아오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합당합니다’라고 되는 거예요.
이게 공간적인 말씀 완성인데, 이 공간적인 말씀 완성을 제일 처음 누구에게 이야기했느냐 하면 바로, 다윗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9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라고 나오거든요. 다윗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서 다윗이 힘으로 이겼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됩니다.
힘으로 다윗은 골리앗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무기가 출중해서 그렇다? 이것도 잘못되었어요. 만약에 돌팔매를 잘 던져서 이겼다면, 그다음부터 사울 왕이 전군에 지시해서 미사일 대신, 핵폭탄 개발 대신, 돌팔매 들고 연습하라고 했을 거예요.
사사기 마지막에서 베냐민 지파가 두 차례나 정의를 외쳤던 다른 열한 지파 연합군을 이겼는데, 그때 열한 지파를 이긴 베냐민 군사들이 왼손잡이였습니다. 사사기에서 에훗 선지자도 왼손잡이였습니다. 성경에서 왼손잡이는 장애인입니다. 장애인 올림픽에 나가야 해요. 왜냐 하면 하나님은 오른손에서, 하나님의 오른손의 능력이 왔기 때문에, 인간의 오른손에 능력이 도달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왼쪽 손잡이는 뭔가 버린 자식으로 여겨지는데, 버린 자식이 오른손잡이를 이겼습니다. 이게 바로 다윗이 갖고 있는 요소입니다. 다윗이 지었던 시, 시편 8편 4~5절에 보면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고 나옵니다.
못한다는 말을 끄집어내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그 전쟁에 의해서 못 한다고 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로 못하느냐, 8편 1~2절에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어느 정도로 낮추시느냐 하면 젖먹이와 어린아이처럼 낮추는 결과물을 낳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에게 돌아온 것은 뭘로 돌아오는가, 잘난 인간으로 까불다가 쫓겨 나가서, 돌아올 때는 어린아이와 젖먹이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래 놓고 하는 말이, ‘주님이여, 왜 저를 이렇게 생각해 주십니까, 저를 생각 안 해 주셔도 되는데, 저를 왜 이렇게 생각해 주십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다윗 언약을 통해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공간!
무슨 공간? 다윗 언약이라는 공간. 다윗 언약이라는 공간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 사람을 뽑아서 집어넣어 준 공간. 이게 다윗 언약의 공간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30장을 보면서, 그 당시 유대인이나, 오늘날 우리들도 참 이상하게 여기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9절에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다윗은 이미 돌아가신 분입니다. 다윗이 아직 살아있고 그런 게 아니죠. 이미 죽은 사람이 왜 왕이 될까. 설명이 필요할 수밖에 없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이미 죽었는데, 죽은 다윗이 어떻게 살아나느냐. 만약에 다시 살아난다면 조건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죽은 다윗이 부활 되면 되죠.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다윗이 부활 된 것이 아니고, 다윗 언약이 부활 된 겁니다.
그게 에스겔 37장 23~24절에도 나와 있는데, 아주 분명하게 나와있어요.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라고.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다윗은 분명히 죽었는데, 다윗은 분명히 죽었는데, 죽은 다윗이 왜 등장합니까. 말라기 4장에도 나와 있어요.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5절) 엘리야는 이미 불 수레 타고 하늘로 갔어요. 불 수레 탄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겁니다. 지금 이걸 인간들만 생각했을까요? 오늘날 현대인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당시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사람들이 49절에 보면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언약적으로 봐야 하는데, 언약적으로 본다는 말은 하늘에 있는 언약이 땅에 투영된 것이 역사예요. 그런데 인간 역사 속에서 훈련받은 인간들이 역사 안에서만 자기가 납득가는 개념들만 가지고 계속 설명하니까, 그게 인간의 한계인데,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의 한계를 노리고 이렇게 말씀을 주세요.
왜냐 하면 인간은 자기의 개인적 구원에 정신이 팔려서 성경을 보면서, ‘저 살려주세요’라는 관점으로 계속 보기 때문에, 살지도 못할뿐더러, 오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었는데, 잃어버렸어요. 주머니 안에 넣어놨는데, 버스 안에서 잃어버렸는지, 집사님 집에서 잃어버렸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카드 잃어버렸다. 큰일 났다. 이 카드에 있는 돈 다 날아갔다’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가만히 다시 생각해 보니까, 원 짱이 따로 있어요. 원(元) 장(長). 카드와 통하는 통장이 따로 있고, 카드들은 통장이 있음을 보여 주는, 그러니까 원 짱이 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흔적같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엘리야, 이들이 전부다 뭐냐. 신한은행의 카드들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발 카드가 원 장을 가리지 마라.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카드를 상실하게 만들어요.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16장 24절 “자기를 부인하라” 원 짱이 이 땅에 오셨는데 네가 왜 원 짱 되시는 주님을 자꾸 가리느냐. 자기를 부인하고, 요한복음 12장에는 “자기를 미워하고”(25절) 자기를 미워하게 되면 비로소 생명이 보일 것이다.
카드를 잃어버려야, 내가 시초가 아니라는 거, 내가 처음이 아니니까 끝도 아니에요. 내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창세 전부터 진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이지, 내 죽음이 아니에요. “정녕죽으리라”는 말씀은 주님만이 그 체험을 갖지 우리는 못 갖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주받았어요. 버림받았습니다. 그게 진정한 죽음이에요. 우리는 그냥 버스 카드에 불과한 거예요.
원 짱인 우리 생명은 하늘나라에 따로 있기 때문에, 여기서 몸이 아프든지, 잠이 오든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니까, 이건 뭐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카드 숫자 많다고 원 짱이 달라지고 그런 거 없습니다. 내 인생이 부도난다고 해서 원 짱도 부도나고 그런 건 없어요. 그러면 중요한 것은 원 짱과 카드 사이에 무슨 연결 고리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원 짱 따로 있고 나는 카드다’라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실제로 주는 것은 뭐냐. 언약을 주는데, 언약은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예가 좀 난폭한 예가 되겠습니다만, 복음을 위해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약을 투입하는 약물 키트, 마약은 너무 지저분하니까 마약 빼고, 우리 속에 약물을 투입하는 키트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지가 스스로 주사약 따서 주사기로 몸에 넣으면 뭐가 투입되느냐 하면, 복음이 투입되죠.
십자가의 능력이 투입됩니다.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와서 그렇게 해 줍니다. 해 주게 되면, 십자가 안에는 다윗 언약의 공간적인 문제와 시간적인 문제가 십자가 안에 다 완료가, 완성이 되어있습니다. 이제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아까는 공간이었습니다. 공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라는 그분을 공간적으로 보내줬어요.
공간도 어렵죠. 예수님은 한 분인데, ‘자체적으로 공간이 그렇게 넓을 수 있나’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예수님 자체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납득이 안 가는 거예요. 내 몸은 내 몸 따로 있고, 주님은 주님 따로 있는데, 어떻게 합칠 수 있느냐. 그래서 여러분은 잊으셨을지 모르지만, 제가 다시 말씀드리면, 나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우리에 편입돼요.
그 예가 뭐냐 하면, 집에서는 귀한 아들이지만 군에 가면 나를 상실합니다. 나를 상실하는 방법이 우선 머리부터 홀라당 깎아요. 입은 옷은 전에 ‘나’라는 이름으로 내게 맞춰 입었던 사제 옷을 집으로 우편으로 보내버립니다. 너의 입었던 옷은 끝났다. 머리 깎고, 옷 집에 보내버리고, 군에서 필요한 모든 물품은 군에서 다 줍니다.
내가 좋아하는 신발 못 신고, 운동화 못 신어요. 군에서 다 제공됩니다. 군에서 군화 준다고 그거 좋다고 군에서 말뚝 박을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내 것 줘. 내 것. 내 것 갖고 싶어. 우리 것 말고 내 것 갖고 싶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죠. “이게 아직 약물 투입이 덜 되었네. 약물 더 투입해!” 나를 잃어버리고 우리에 편입되는 게 공간이에요.
그런데 시간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성경 두 군데를 찾으면서 시간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를 마태복음 25장 14절을 보겠습니다. 상당히 어려워요. 공간은 그나마 쉬운데, 공간 하나 먼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12~13절에 예수님께서 천국을 이야기하시면서 임금님의 혼인 잔치 이야기하죠. 혼인 잔치를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 우리라는 공간 문제를 다뤄요.
어제도 결혼식 치른 분 계시는데, 결혼식을 할 때 임금의 결혼식이에요. 내 결혼식 아닙니다. 내 결혼식이 아니고 임금이라는 타인의 결혼식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임금님이 자신의 결혼식에 초청하니까, 어떤 사람은 소를 시험해 봐야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혼인 잔치 가야 하고, 다른 사람은 밭을 사러 가야 해서 참석을 안 한 거죠.
참석을 왜 합니까? 자기 일이 있는데 참석을 왜 해요? 내가 삭제 안 됐잖아요. 내가 여기 멀쩡한데, 우선 내 것부터 챙기고, 그게 일 순위예요. 내 것부터 챙기고 그다음에 임금 챙기는 것이 인간세계 상식 아닙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게 몸에 뱄잖아요. 아직 복음이라는 마약이 안 들어와서 우리는 내 위주로 살아가는 몸을 갖고 있단 말이죠.
초청장을 보냈죠. “내 아들 결혼식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이 “안 간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거리에 가서 아무나 데려오라고 한 거죠. 이야기가 ‘아무나 데려와서 그들이 참석하게 되었다’라고 끝나면 하늘나라 아니죠. 하늘나라는 공간 문제이기 때문에.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22장 12~13절에 “임금이 손(손님)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웃음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 지금 누가 참석하고 싶어서 왔어요? 강제로 끌려와서 참석했잖아요. 그러면 참석한 것을 임금은 고마워해야지 않습니까? ‘아이고, 손님도 없는데 자리 채워줘서 고마워요’라고 나와야 하는데, 참석 시켜놓고, 참석한 이것이 화근이라. 수족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데로 갑니다. 다시 말해서 “왜 너는 임금의 혼인 잔치에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 다시 말해서 “너라는, 너 개인의 모든 위상을 모조리 가리지 아니하였느냐? 예복 밑에 너를 왜 감추지 아니하였느냐?”라는 말이죠.
인간은요, 자기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요. 오랜만에 네일아트하고 동창회 참석하면 ‘아, 머리 아파’라고 하면서 손톱 열 개가 다 보이게 머리를 감싸고 그러고 있다고요. 그래야 네일아트한 것이 잘 보이니까. ‘나’라는 공간을 벗어나질 못하죠. 이것이 바로 인간은 상상도 못 한 노아의 방주라고 보면 됩니다. 방주가 언약입니다. 심판 가운데 방주만 동동 떴단 말이죠.
마찬가지로 언약은 동동 떠요. 인간이 심판을 전제로 해서 동동 뜨는 겁니다. 그게 바로 다윗 언약이에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뭐냐 하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절) 적다는 말은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너는 특혜를 입었다’라는 뜻이에요. 이건 보통 특혜가 아닙니다. 김건희의 특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번에 어려운데, 시간적 요소예요. 언약적 시간은 어떤 것이냐. 마태복음 25장 14~15절에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이 본문이 굉장히 어려워요. 어렵기 때문에 이 본문 앞에 시간적인 요소를 하나 더 붙인 것이 뭐냐. ‘열 처녀 이야기’입니다.
열 처녀가 전부 다 신랑 만나러 왔다가, 두 조각 났죠. 이건 제가 울산강의에서 설명했습니다. 두 조각 날 때 자기끼리 회의해서 그렇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이건 타이밍을 맞춰서 신랑이 반반 나눠질 타이밍에 들어와 버린 겁니다. 타이밍. 시간 요소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이라는 것은 배제를 전제한 천국이다. 지옥을 전제해서 만들어진 것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이 세 명의 직원 가운데서 타이밍 맞춰서 갈라지게 할 거예요. “오랜 후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이것은 중간에 끼어들어서 시간을 어떻게 한 것이 아니고 주인이 타국에 갔다가 왔어요. 충분히 넉넉한 시간을 주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돌아왔을 때 지금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이상합니다. 이 직원들이 이상해요. 왜냐 하면 주인이 분명히 공간적으로 없어요. 떨어져 있으니까 없어요.
아까 공간 이야기할 때는 함께 있다고 했잖아요. 그러나 시간적으로 볼 때는 함께 있지 않고 먼 타국에 갔습니다. 그러면 시간적으로 타국에 가게 되면 주인은 언제 오느냐. 주인은 나중에 오겠지요. 왜? 지금은 타국에 가 있기 때문에. 멀리 미국에 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오시겠지요. 어쨌든 간에 중요한 것은, 팩트(사실)는 여기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카드가 있다는 것은 원장이 있다는 거죠. ‘카드가 있으면 나중에 은행가면 원장을 보겠지’라는 것은 시간 요소잖아요. 인간들의 시간 요소예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원장있고, 카드 있고, 동시에 같이 있어요. 지금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멀리 있더라도 이미 시간적으로 주인이 떠나지 않고 함께 있는 시간으로 파악한다는 거예요.
이게 언약 안의 세계입니다. 열 처녀 이야기는 신랑이 함께 있지 않고 열 처녀만 있다가 신랑이 타이밍 맞춰서 두 조각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 달란트 천국 비유 이야기는 분명히 하나님이 시간 적으로 없고, 나중에 옴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를 떠난 적이 없고 함께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일했던 사람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냐, 주인이 떠나 있던 여기 있든 간에, 나의 삭제, 나의 잃어버린 데서 종이 되었다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뭐냐 하면 ‘주인 없~~다’가 되는 거예요. 주인이 없으면 누가 있어요? 내가 있는 거예요. 주인이 없으니까, 장차 오실 때, 오실 때, ‘제가 주인 것을 잘 모셔서 이렇게 다시 드립니다’라고 할 마음이에요.
왜냐 하면 그 주인공은 주인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내가 주인공이니까. 거기에 대해서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26절에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종은 그렇게 알았죠.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은다” 주께서는 그렇게 종이 생각하는 줄 아는데, 내가 이렇게 하고 난 뒤에 해 주신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우리 존재는 벌써 완성이 된 거예요.
주께서 떠나있으나 여기 있으나, 한결같은 존재로 말씀에 의해서 완성된 존재로 우리를 이미 심어놓은 겁니다. 그걸 왜 심어놨는가. 지옥 가는 사람과 대조하기 위해서. 이게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왜 구원받습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아닙니다. 구원받지 않는 사람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발견함으로써, 그 사람과 우리 사이에 차이점에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늘 계제 되어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대로 공간, 말씀대로 시간, 다 이루었다고 아무리 주님이 이야기해도 무슨 뜻인 줄을 몰랐는데, 우리의 삶, 내 위주로, 내 입장으로, 내 중심으로 살다가 와장창 깨질 때, 비로소 주께서 함께 있음을 느끼는 기쁨과 감격이 밀려옵니다. 늘 우리 자신은 못났고, 그때마다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고 깨쳐주시는 이 사랑을 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