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불러주지 않는 자

아빠와 함께 2024. 10. 20. 19:25

불러주지 않는 자

2024년 10월 2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9:27-32

(29:27) 이제 네가 어찌하여 너희 중에 자칭 선지자라 하는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
(29:28) 대저 그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편지하기를 때가 오래리니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29:29) 제사장 스바냐가 스마야의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읽어 들릴 때에
(29:30)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29:31) 너는 모든 포로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느헬람 사람 스마야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스마야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로 거짓을 믿게 하였도다
(29:32)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을 인하여 이 백성 중에 거할 그의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선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두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예레미야와 스마야입니다. 그런데 이 예레미야는 그당시 바벨론 포로잡혀온 집단에게는 ‘자칭’ 선지자로 통합니다. 선지자도 아닌게 선지자 흉내내고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스마야 선지자는 참 선지자로 통합니다. 이 스마야 선지자는 유대 백성들에게 산 맛을 줍니다.

희망을 주는 선지자가 스마야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밝힙니다. “나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왜 그당시 현지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는 선지자를 그토록 신뢰하는 걸까요? 그것은 이제 자신들에게 ‘탈출’이라는 것은 더는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부합니다. 이미 애굽에서 탈출을 한 적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탈출의 탈출’을 해서 도달해야 할 그 미지의 영역에 대해서 그들은 도무지 않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의 ‘약속의 땅’으로 도로 그들이 들어가게 된다면 이는 ‘탈출’에 해당되지 않고 ‘접수’에 해당되는 겁니다.

자기 것을 당연히 돌려받는 것이 된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 약속의 땅은 언제든지 이방인의 땅이 아니라 자신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그 약속의 결코 당연히 쟁취하는 땅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도대체 뭘 기다려야 하고 이번에서 또 무엇으로부터 탈출을 해야 하는 걸까요?

그것은 신약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 흔적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을 인하여 이 백성 중에 거할 그의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선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7:32)

벌을 받는 대상이 곧 인간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즉 전에 그들이 세상 이방 국가 권력의 종이었지만 신약에 오면 인간은 율법의 종이 되어져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율을 외치지만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모든 인간을 율법 안에 가두어두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안에서 망하고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망합니다.(롬 2:12)

특히 이방인들의 아예 율법이 없으니 자신들이 무엇으로부터 탈출해야 될 하등의 이유를 모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그 이방인들 손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으로부터 탈출은 하나님께서 으레 미리 선조에게 약속하신 대로 당연히 자신을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은 그 약속이라는 율법 자체로부터의 탈출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남은 유대인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미 오늘 말씀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주체 못한 진실보다 거짓에 쏠려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은 자신들이 알아서 다스릴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욕망이란 비주체적이고 비인칭적입니다. 즉 욕망은 아이나 어른이나 남자나 여자 가릴 게 없이 한결같이 작용하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 욕망의 주인이 아니라 욕망이 인간의 주인입니다. 이미 이 사실은 창세기 4:에 나오는 가인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창 4:6-7)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경우를 통해서 의도적으로 가인을 통해서 인간의 실상을 밝혀주셨습니다. 만약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서 열납되지 않았다면 굳이 하나님께서 아벨을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인간을 장악한 욕망의 성향이 밝혀진 겁니다. 악마의 욕망으로 인해 선과 악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없는 순수한 인간을 자기의 볼모를 잡았습니다.

그 결과가 데살로니가후서 2:9-12에 나옵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인간에게 있어 욕망이 인간의 주인이 됩니다. 인간은 이점을 극복하고자 자신의 자율권을 동원해보지만 이는 마치 짐승이 주인이 휘두른 채찍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때린다고 해서 짐승이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악마가 그 인간을 놔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0:1-3에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즉 호명입니다. 주님께서 양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양은 그때부터 자기가 그동안 지켜오고 불러왔던 자기 이름과 그 환경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환경을 주님의 환경으로 전환됨을 감사하고 놀라워합니다. 누가 성도인가요? 이 호명의 경우가 구약 사무엘상 3:3-5에서도 나옵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어린 사무엘은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언제든지 엘리 제사장이 부르면 쫓아갈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어린 사무엘은 자기 자율성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불러주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엘리 제사장은 악마가 심어놓은 자율성을 그대로 잘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멸망받을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이름을 수호하고 그 가치에 매달리는 바가 호명되지 못한 자의 특징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5강-예레미야 29장 27~32절(불러주지 않는 자)24102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9장 27~32절입니다. 구약성경 1095페이지입니다.

“이제 네가 어찌하여 너희 중에 자칭 선지자라 하는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 대저 그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편지하기를 때가 오래리니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제사장 스바냐가 스마야의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읽어 들릴 때,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모든 포로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느헬람 사람 스마야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스마야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로 거짓을 믿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을 인하여 이 백성 중에 거할 그의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선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두 사람 나오지요. 예레미야라는 한 사람 나오고, 그다음에 스마야라는 선지자 한 사람 나오고, 또 한 사람 나온다면 스마야와 같이 한 패가 되어 마음을 같이해서 스마야를 도와주는 제사장 스바냐가 또 여기 나옵니다. 2 대 1이죠. 그런데 그 당시에 바벨론에 포로 잡혀갔던 그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가 어떤 대우를 받느냐 하면 ‘자칭 선지자’예요.

선지자라고 하지만 절대로 우리 보기에 선지자 같지도 않은 선지자, 엉터리 선지자, 스스로 선지자, 혼자 선지자,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그런 선지자로 예레미야가 평이 난 겁니다. 반면에, 그 당시 제사장 스바냐가, 물론 포로 잡혀가고 난 뒤에 포로 잡힌 그들, 남의 땅에 있는 포로 잡힌 자체 유다 집단 속에 선지자 스바냐가, 그 집단 속에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선지자 스마야와 한통속이 되어서 지금 예레미야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공격 내용이 뭐냐 하면 “너희들은 오랫동안 앞으로 약속으로 땅으로 못 간다”라는 거였어요. “희망 접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약속의 땅에 돌아가게 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약속의 땅으로 오랜 후에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예레미야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낙담시키고 절망케 했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고 희망을 꺾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레미야를 이렇게 평하자는 거예요. 선지자가 아니고 자칭 선지자, 가짜 선지자로 평하자고 자기들 스스로 동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편지가 예레미야에게 도달될 때, 예레미야가 그 당시 스마야라는 선지자에게 그런 대우를 받고 욕을 얻어먹고, 백성들도 그들과 한통속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계시를 준 내용이 오늘 본문 31~32절에 나옵니다.

한마디로 이렇게 나와요. “나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나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인기 있는 선지자 스마야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북돋아 주는 그런 선지자는 내가 보낸 적이 없다. 그런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 선지자, 예레미야와 스마야 선지자 중에서, 우리는 누구를 따라가겠습니까? 솔직하게 생각해서 누구를 따라가겠느냔 말이죠.

놀라운 사실은 이거예요. 아예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예레미야 쪽이에요. 그리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스마야 쪽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이 희망적인 것을 내용으로 했을 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 하나님의 말 그대로 못 받아들이고, 왜 우리는 나의 잘됨과 나의 희망으로 마중 나가느냔 말이죠. 도대체 우리가 우리에게 그런 권한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고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내가 하나님 믿으면 나에게 좋은 일 생기고, 나는 사랑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나님이 거절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래요? 오늘 본문에서 도대체 인간들이 뭐가 문제냐. 인간들의 문제는 딱 하나예요. 그들이 포로 잡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이 탈출한 데서 탈출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중에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 갔을 때, 이방 나라에 복음은 뭐냐. 탈출하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방 나라 입장에서는 왜? 왜 우리가 탈출해야 해? 여러분들이 삼성 그룹에 이재용 회장에게 가서 ‘탈출하세요. 탈출해야 합니다’라고 하면 이러겠죠. ‘뭐? 나 탈출했어. 얼마 전에 마누라에게 탈출했어. 그거만 하면 되잖아. 뭘 또 탈출해? 무슨 소리야? 그동안 잘살아왔는데 탈출을 왜 해?’라고 이야기하겠죠.

유대인에게는 ‘탈출하세요’라고 하면 ‘탈출했어. 우리는 애굽에서 탈출했다고. 뭘 또 탈출할 것이 남아 있어?’라고 되잖아요. 우리는 이방인이니까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우리는 왜 탈출해야 하는가. 그러면 우리는 난감하죠. 탈출 같은 것은 생각도 안 했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포로 잡혀 있다는 것을 언급해 주는 거예요. 포로 잡혀 있다고.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데 무슨 포로 잡혔느냐. 간섭 많고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에게 ‘너는 탈출해야 해’라고 하면 뭐라고 인식되느냐 하면 ‘가출해야 해’라고 인식된다고요. 그런데 이미 결혼해서 자기 자리가 안정되어 있는데 ‘탈출하세요’라고 하면 뭐 다니는 회사 사표 내고 개인 사업하라는 말인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어디서부터 탈출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탈출되어야 합니다. 이건 놀라운 사실이에요. 여기 보면 우선 탈출하기 전에 굴레부터 먼저 이야기하죠. 3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을 인하여 이 백성 중에 거할 그의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그러니까 그들 편이 지금은 많아도 결국 한 사람도 없을 거라는 말이죠.

그리고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선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다”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스마야 선지자에게 여호와께서 벌을 주신다는 거예요. 벌을 주신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벌 받을 체제 아래 인간이 갇혀 있다는 뜻이에요. 인간은 혼자 살고 싶어 해요. 바벨탑을 통해서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 스스로 자율스럽고 싶어 해요. 자율. 자유가 아니고 자율.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20장 5절에 보면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되어있어요. 나 외에 어떤 다른 형상에게 절하는 것은 삼 사대까지 내가 죄를 갚게 하겠다고 저주하겠다고 하시는 거죠.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인간을 저주할 권한이 있는 분에게 매였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율적으로 살고 싶어요. 그러나 인간은 뭘 모르느냐 하면 욕망이 비(非)주체적인고 비(非)인칭적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욕망에는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남자든 여자든, 그런 구분이 욕망 안에는 없다는 겁니다.

욕망은 비주체적이에요. 내가 욕망을 주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욕망이 아니에요. 오히려 욕망이 나를 갖고 노는 겁니다. 욕심이라는 게. 그런데 인간은 욕망조차도 이성적으로 내가 장악하고 조절하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는 자율 자이고 자기는 절대 신이니까 내가 정신 차리면 욕심도 조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욕망이 이미 인간을 장악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욕망이 장악한 인간을 그냥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저주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저주를 준비하면서 준비한 것이 뭐냐. 율법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는 저주 아래 있고 징벌받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날 때부터 지옥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탈출하려면 어느 굴레에 있는지 그것부터 감을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기 때문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거예요. 내 팔 내가 흔든다. 같은 말로 ‘내 돈 내 맘대로 쓰는데 네가 왜?’라는 식이죠. 여기서 과연 욕망이 주인인지, 아니면 인간이 욕망이 되어서 주인 노릇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해요.

일단 인간의 욕망이 딱 정해져 있으면, 인간은 욕망을 갖고 놀 수 있어요. 욕망이 인간의 손아귀에 있으면 인간은 맘 대로 요리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손아귀에 있는 것을 자기가 다룰 수 있다는 방식으로 인간이 하는 행위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옛날에 집에서 가축을 키웠어요. 가축을 키우면서 무슨 요소를 발견하냐면 가축 안에 짐승의 본능을 발견해요.

그래서 인간들은 가축은 짐승이고 나는 짐승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알다시피,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람 선지자가 나오지요. 22장에 발람 선지자가 나귀를 타고 갑니다. 발람 선지자는 평생토록 나귀가 자기에게 잔소리할 나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나귀는 자기 손아귀에 있고 자기는 나귀의 주인입니다.

여러분이 이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여러분이 키우는 가축이 주인을 가만히 관찰한 거예요. 보니까 주인이 자기를 때릴 때, 가축이 ‘아, 때리는 자가 주인이고 맞는 게 가축이다’라는 생각이 든다고 칩시다. 그런데 가축이 채찍을 들고 자기 자신을 때려버리면 가축은 주인으로부터 해방되는 겁니까?

때리는 자와 맞는 자가 주인과 종의 관계라면, 그러면 가축인 내가 주인이 그동안 때리던 본인을 본인이 채찍을 쥐고 때려버리면, 그다음부터는 가축을 주인으로 해 줍니까? 가축은 그렇게 안 하죠? 그런데 그 일을 누가 하느냐. 노벨상 탄 사람이 한다니까요. 노벨상 탄 사람. 인간이 자기를 패요. 내가 이렇게 엉망진창이고 죄인이라고 하면서 패면서 자기 내부를 바깥으로 드러내면서 비로소 자기로부터 온전한 구원과 해방을 추구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사람들은 다 박수를 보내고요. 그게 노벨문학상이에요.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도와줌으로써 우리는 자유를 얻는다. 나는 같은 남자끼리 결혼하겠다. 왜? 그건 내 자유니까. 이게 뭡니까. 인간은 그냥 무작위로 만들어진 원소들의 집합체이다. 과학이 그렇게 가르치죠. 인간이 뭔지를 몰라요. 처음에 마귀는 자기가 이미 하늘나라의 십자가 프로그램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자기가 죄인 되기 싫은 거예요. 죄인 되기 싫어서 도망을 치는데, 반란을 일으키려고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이 죄도 모르고 의도 모르는 순백하고 순수한 인간에게 가서 인간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인간 이야기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그게 창세기 2장입니다. 인간을 자기와 똑같이 만들었어요. 선과 악을 몰라야 하는데, 몰라야 순수한데, 악마는 인간에게 선과 악을 알아야 네가 신처럼 된다고 꼬시는 겁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스스로 자유로운 신이 된 것이 아니고, 악마의 노예가 된 겁니다. 악마의 노예 특징이 뭐냐. 자기 안에 죄에 대해서 본인이 다스릴 수 없게 된 겁니다. 그게 창세기 4장에 가인에게 일어난 현상이에요. 7절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If you do what is right, will you not be accepted? But if you do not do what is right, sin is crouching at your door; it desires to have you, but you must master it."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네가 죄를 다스려? 반대일 걸? 죄가 너를 노리고 있다는 거예요. 죄가 너를 장악하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억울하게 죽은 아벨을 통해서 가인의 실상을 까발린 거예요. 네가 죄를 조종해? 네가 욕망을 조종해? 죄가 네 맘대로 움직였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안 받을 때는 그냥 아무 문제 없는 거 같았어요.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사를 받음으로써 형은 발작을 일으킨 겁니다. 네가 없어야 내 속이 편하다. 맞지요. 속 편하죠. 자기가 정상으로 돌아오니까. 자기가 정상이기 위해서는 동생을 죽여야 하니까. 예수님을 죽여야만 우리가 정상이 됩니다. 예수님이 무슨 상 탔습니까? 상은커녕, 바라바라는 살인강도보다 더 무가치한 취급을 받았어요.

살인강도를 살려야 할 필요가 있었어요. 살인강도를 살려야 인간들은 자기가 의롭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살려내 버리면 자기는 졸지에 죄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무식한 자가 되는 거예요. 탈출해야 해요.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도 탈출 못 하고, 이방인들은 더구나 탈출할 생각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자칭 선지자, 자칭 선지자가 예레미야라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말하는 거짓 선지자 예레미야를 내가 보냈고, 진짜 선지자라고 자칭하는 스마야는 내가 보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너희들이 만들어 낸 선지자예요. 인간들이 선호하는 선지자, 인간들이 같은 마음으로 섬기고 모신 선지자예요. 자칭 선지자는 탈출을 말합니다. 자체의 탈출을 말하기 위해서 자칭 선지자라는 억울한 취급을 받는 주님이고 주님의 종들이죠. 이들은 뭘 이야기하느냐. 율법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 율법.

그 말은 네가 선하고 자 하는 것도 마귀짓이라는 거예요. 네가 악하고 자 하는 것도 그게 악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는 무지 속에 갇혀 있어서 뭘 해도 너는 ‘모른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마지막 해결책이 있어야 하겠죠. 데살로니가후서 2장 9~10절에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라고 되어있어요.

뒤에 11~12절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씀에 대해서 빼달라고 나오면 안 돼요. 빼달라고 한다면 빼달라 할 수 있는 자기의 권한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데, 여기서 빼달라고 하는 것은 또 자기가 자기 단속하는 것밖에 안 돼요. 이 말씀에서.

‘이 말씀을 그냥 그대로 우리에게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해야죠. 왜냐 하면 나의 존재보다 말씀이 우선되니까요. 그렇다면 아직도 해결책은 안 나타났죠. 이건 절망 중의 절망이 되어버리니까 그게 무슨 해결책이냐. 요한복음 10장 1~3절에 드디어 해결책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유일하나 목자가, 다른 길은 없어요, 유일한 목자가 드디어 천국 길이 있는데, 그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먼저 알고, 먼저 불러요. 먼저 부르게 되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그동안 인간들이, 특히 이방인 같은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 이름을 알고 자기 이름을 평소에 관리해요. 그러나 이 이름 말고, 내 이름있는 존재인 나 말고, 다른 외래에서, 외부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게 되면 우리는 아낌없이 내 이름을 포기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내 이름을 불러서 구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름만 남고 내 이름은 내 속에서 삭제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주의 이름을 한번 부르고 마느냐. 그게 아니고 주님께서는 율법과 말씀을 계속해서 공급합니다. 공급하면서 그 율법과 선지자와 말씀과 복음에 누구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느냐. 주의 이름으로 찾아옵니다.

그러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느냐. 내가 여기 존재함은 결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의 자기 일을 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 소재로, 하나의 재료로 여기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합니다. 왜? 그래야 그분만이 목자이지, 내가 나를 건지는 목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목자이고 내가 양이 되는 관계가 탈락하고 제거되어야 해요.

목자는 따로 있고 나는 그분의 종속된 종이 됩니다. 노예가 된다고요. 주님의 노예가 된다고요. 어차피 매이는 거, 죄의 종보다 의의 종이 낫지 않습니까. 그분의 하는 일을 드러내는 양이 되는 겁니다. 이게 주님께서 준비한 해결책이에요. 그러면 끝으로 이런 해결책이 구약에서 과연 이루어졌는가. 이루어졌습니다.

사무엘상 3장 3~5절,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가 두 가지를 생각하면 됩니다.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언약궤 있는 곳에 누웠습니다. 엘리는 따로 있고요.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지금 사무엘이 누가 불렀는데 단번에 달려가요. 이유가 뭐냐 하면 사무엘은 자기가 자기를 지키지 않는 어린 사무엘, 어린이 사무엘이기 때문에 그래요. 어른이 부르면 후딱 일어설 줄 아는 어린 사무엘. 그러니까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른 줄 알고 후딱 갔어요. ‘저 불렀죠?’라고 하니까 ‘아니, 안 불렀어’라고 엘 리가 대답하죠. 이런 일이 네 번이나 반복됩니다.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5절)

이게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는 사무엘이 하나님이 불러서 구원받았다는 이런 생각에 치중하지 마시고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은 것을 아느냐. 예배 끝나고 문 열고 세상으로 나가세요. 하나님이 부르지 않은 사람을 한번 보시고 찾는 즐거움에 매진하시길 바랍니다. 부르지 않은 자.

그걸 어떻게 만날 수도 없고. 걱정하지 마세요. TV 틀면 나옵니다. 유튜브 보면 다 나옵니다. 하나님이 부르지 않을 때, 인간이 자율적으로 스스로 자기를, 자기 자신을 구원하려고 매진하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리고 철저한 단절, 철저한 그들과의 건너갈 수 없는 단절, 그것은 바로 주님이 부르기 전에는 내가 저들에게서부터 절대로 주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매일같이 확인하고 점검하면서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린 사무엘, 정말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 실감 납니다. 자꾸만 어른 되려고 하지 말고, 누가 불러주기를 바라고, 누가 살려주기를 바라고, 누가 인도하기를 바라는 어린 아이같은 심정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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