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새로 생긴 열매

아빠와 함께 2024. 10. 6. 16:57

새로 생긴 열매

2024년 10월 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9:1-4

(29: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내었는데
(29:2) 때는 여고니야 왕과 국모와 환관들과 및 유다와 예루살렘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29:3)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의 손에 위탁하였더라 일렀으되
(29: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이스라엘은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농부가 되셔서 계획적으로 만들어 내고자 했던 열매입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사 5:1-2)

그런데 오늘 분문에서 이스라엘은 다시 이방나라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전에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가 되어서 살던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유민으로 만들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농사는 완료될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다시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고 약속의 땅에서 얻을 열매나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계획적 농사가 실패로 끝난 겁니까? 과연 하나님의 열매는 이 지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잡혀 있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편지를 전합니다.

이것은 애굽이나 나와서 약속의 땅에서 살게 하신 이 과거사는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진정한 열매,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은 인간이 고대하는 바는 넘어선다는 점을 말해주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시는 열매는 일단 인간이 고대하는 자신의 열매성과 결부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5: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열매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단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이 먼저 포도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로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열매로 받지 않겠다는 바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것은 곧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경작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꾸만 자신을 인간으로 간주해서 “인간이라면 인간의 기본 도리는 해야한다”는 정신을 인간 자체가 자기보다 강요한다는 점입니다. 즉 내가 바라고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자신이 원하는 열매상을 인간이 짐작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열매상을 받지 않으신 겁니다. 이상적인 인간상?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만 해당됩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있던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애굽에서 벗어났을 때, 그들은 자신만을 위한 자아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었을 때, 그들은 그 율법을 가지고 자신이 기대하는 자화상을 완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복만 주어진다고 되어 있지 않고 위반했을 때 저주도 주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저주받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정할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이와같은 사고 방식은 구약이 끝나고 신약에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16:20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가요? 그 다음 말씀이 안 나왔으면 이 글에 담긴 내용을 모를 뻔했습니다. 즉 제자들이나 구약 백성들이나 하나님 덕분에 자기 안녕을 고려한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늘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이런 은혜 베푸심에 호응해서 원하는 바를 얻으면 된다는 식의 마음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인간이 얻고자 하는 것은 자기가 기대하는 완전한 자아상입니다. 따러서 베드로도 우리 주님의 멀쩡하게 활동하셔야 자기들에게는 이런 실익이 주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사람 손에 죽는다고 말씀하시니, 베드로가 이런 본성에 입각해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안전되게 지켜주어서 그런 비극이 닥치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장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런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즉 인간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의 한도를 넘어설 수가 없었던 겁니다. 자기 보호, 자기 보존, 자기 안녕, 자기 이익, 이런 것들을 관련되는 메시야를 원하고 구했던 겁니다. 누가복음 11:9-13에도 마찬가지 취지를 나타내 주십니다. “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도대체 인간들이 간절히 구하고 기도하는 내용이 뭐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고대하는 자기 잘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내용은 기껏 아비가 자식에게 해가 되는 것을 제공하는 것에 해당된다고 하십니다.

자식에게 뱀을 주고 자식에게 전갈을 주는 아비가 악한 아비가 되는 것처럼, 자신이 생각해놓은 열매는 못버리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자는 이런 수준에 머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은 인간의 한도를 넘어선 겁니다. 쉽게 말해서 김치는 없는데 ‘예수 안’이라는 김치냉장고부터 들여놓고 그 안에서 김치를 만들어내는 식입니다. 성령님께서 이 일을 성사시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구상하는 일이 주님의 일의 방해가 되고 훼방됨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3강-예레미야 29장 1~4절(새로 생긴 열매)24100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9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1097페이지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내었는데, 때는 여고니야왕과 국모와 환관들과 및 유다와 예루살렘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후라,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보내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가게 한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의 손에 위탁하였더라 일렀으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요한복음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구약에도 같은 취지로 나와 있는 내용이, 하나님 자신이 농사를 짓는다는 겁니다. 자기 백성을 감람나무라고 여기고, 또는 포도나무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장 1~2절에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요한복음 15장 1~2절에도 포도나무가 나오죠.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이 짧은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은 농사지으시는 분인데, 적절하지 않은 과실은 제거하고 적절하고 기대한 과실만 맺게 하신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은 하나님만 생각하고 있어요. 자신의 농사하는 열매 맺게 하시고 끝! 이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포로 잡힌 자가 나와요. 농사 그냥 지으시면 되는데, 왜 자기 백성을 이방 민족에게 포로 잡혀가게 하시느냐. 그 연관성, 관련성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해요.

그래야, 농사짓는 방법을, 하나님의 농사지으시는 절차를 우리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포로 잡혀간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농사에 필요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 농사를 짓고 있었단 말이죠. 자기가 원하는 열매를 맺어서 그걸 남들에게 자랑질하려고 하겠죠. 우리 민족 대단하다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근본을 모르는구나. 바닥을 모르는구나. 너희 바닥은 아예 너희가 없는 존재였다. 이 약속의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들은 살 자격도 없어”라고 거기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추방된 겁니다. 추방되게 되면 어떤 상황이 되느냐. 다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고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면 내가 원하는 나의 열매를 애초에 맺히게 할 그러한 권한도 없고 그런 자격도 안 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열매가 되어야 하지, 내 인생에 모든 자존심을 걸고 내 인생을 가꾸겠다는 이런 것은 가차없이 주님은 열매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포로된 자에서 끄집어내는 그 과정 하나, 두 번째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과정 하나, 세 번째는 다시 포로된 데서 다시 끄집어내는 과정 하나. 이 세 가지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적절한 과실, 열매를 얻고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열매라면, 이 시간에 이 세 가지의 과정을 다 알면 되죠. 그러면 두 번째부터 시작합시다. 왜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다가 쫓겨났는가. 쫓겨난 이유가 뭐냐. 현대적으로 제가 바꿔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기본 도리를 하기 위해서 깝치다가(까불다가) 쫓겨난 거예요. 인간이 인간다운 도리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마귀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하는 그런 대목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마귀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도 알잖아. 인간답다는 거. 알지? 모르고 있는 게 아니지?’ 그러니까 그걸 살려내고 완성에 이르라는 거예요. 너의 완성, 너의 완전한 인간성을 구현하라는 겁니다. 마귀가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마귀에게 그런 소리 듣고, ‘참, 맞지. 내가 사람이지. 내가 인간이지’ 인간은 인간다울 때 가장 상식에 맞는 거고, 그게 진리가 맞다고 여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다시 포로 잡혀가게 만들어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네가 어느 대목에서 사람이라고 여기느냐? 네가 어떤 점에서 인간이고 사람이지?”라고 물으시는 거예요.

‘저 사람인데요’라고 하면 “어떤 면에서? 뭘 했다고 사람이냐?”라고 하시면 우리는 화가 나서 되묻죠. ‘그러면 하나님이 생각하는 인간은 무엇이고 사람은 뭡니까?’라고 막 대들 거예요.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이다” 그게 바로 신약에 나옵니다. 세 번째 과정이죠. 예수님부터 해서 새로운 열매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면 세 번째부터 본격적으로 진짜 천국 사람, 천국 백성이 된다면,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뭐냐. 이건 사람도 아닌 것이 사람 행세했다는 것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 한계를 드러내고, 인간의 배후에 인간을 부추기는 어떤 요소가 있다는 그것이 구약의 스토리입니다. 구약의 긴긴 구약의 내막입니다. 따라서 이런 작업. 인간이라고 여겼던 거, 이건 상상도 못 했죠, 내가 인간이 아니고 흙에 불과하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죠.

상상도 못 한 그것을 주께서는 추방시키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 내는 그 작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포도나무에 연결되어서 생겨난 포도나무의 결실, 예수님의 열매다”라고 그렇게 하시면서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잡한 하나님의 작업을,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작업을, 간편하게 설명하면 이렇게 됩니다.

집에 김치는 없는데 김치냉장고 마련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김치냉장고를 사 갈 때, ‘아이고, 김치 익을까 봐 사가십니까?’라고 할 거예요. ‘김치 없는데요’ 김치가 없는데 김치냉장고를 왜 삽니까? 그러면 성도 같으면 어떻게 말하겠어요? ‘주께서 채워줄 줄로 믿습니다’ 순서가 바뀐 거예요. 김치 없는 김치냉장고부터 먼저 마련하고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냉장고로 말미암아 새록새록 순이 돋고 김치가 발생 된다면 김치냉장고 안에 모든 김치의 솜씨는 우리 김치의 소관이 아니고 주님의 소관으로 넘어갑니다.

주님의 소관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간이라고 자처하면서 약속의 땅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약속의 땅에서 포로 잡히고 쫓겨나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기초 자체가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계셔서 나를 통해서 자기 일을 벌인다는 이런 관점으로 완전히 인간이 바뀌었으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인간 입장에서는 그것이 성사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성사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아까 제가 세 번째 경우를 이야기했는데, 실제로 일하게 되면 첫 번째와 두 번째를 경유해야 비로소 세 번째로 돌아오는 것에 의미가 발생 돼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이 오후 되어서 점심 잡수시고 슬슬 잠도 오고 하니까, 제가 들었던 이야기를 해서 이 대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처가에서 조상 대대로 벌초를 했어요. 처가가 의성 안동권씨에서 유명한 독립투사입니다. 독립투사라서 지금도 돈이 좀 나와요. 우리에게는 안 나오지만, 그쪽 아들 계통을 통해서 돈이 나온다고요. 의병 활동을 크게 하셨거든요. 이건 뭐 나라에서 돈을 주니까 묘지는 있어야 하고요, 독립의 역사를 증거로 남기기 위해서 국가에서 자금도 대고 비석도 세우고 했습니다.

그래서 벌초가 잘 되었는지 돌아보려고 갔는데, 거기서 저보다 연세가 훨씬 많은 큰 처형한테 들었던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독립투사 중에 권사연[權士淵, 1881~1925] 독립투사의 내력을 이야기해요. 이야기하면서 처형님이 강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독립투사라서 우리가 여기 온 것이 아니고, 그분은 이 동네에 최초로 교회를 세우신 분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쭉 그 내력을 설명해 줬어요.

그 내력과 오늘 본문에 포로 잡힌 것과 관련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했느냐 하면 우연히 장에 가다가 선교사가 설교하는 것을 들었대요. 장에서 선교사가 설교하는 그 집회를 보고 난 뒤에 단박에 그 자리에서 예수 믿기로 작정했는데, 그분이 증조할아버지예요. 권사연 증조할아버지. 그분이 누구랑 살고 있느냐면 처가의 고조할아버지와 살고 계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분의 아버지죠.

아버지는 아주 고지식하게 집안의 유교적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자식들에게 가르치던 사람인데, 아들이 와서 강력하게 교회 간다고 하니까 그때부터 ‘니도 고집이 있나? 나도 한 고집 한데이’라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면서 아들이 가는 예배당에 뒤에서 예배를 방해하신 거예요. 뒤에 진치고 담뱃대로 이것저것 툭툭 치며, 소리 내면서 그렇게 온갖 예배 훼방질을 하신 거예요.

증조할아버지는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그다음 주일에 아버지가 계속 핍박하니까, 아버지 보는 앞에서 상투를 잘라버렸어요. 상투를. 그렇게 내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시위하듯이 몸으로 보여 준 거죠. 그러면 그분의 아버지는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아이고, 너는 그 정도야? 나는 더 세’라고 하면서 교회 가서 더 핍박한 거예요.

그날 밤에 고조할아버지에게 어떤 허연 분이 나타나서 귀싸대기를 때리면서 ‘네 아들 교회 다니는데, 왜 방해하느냐’라고 하니까, 고조할아버지가 그렇게 꿈에 귀싸대기를 한 대 맞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 고조할아버지가 자진해서 그 교회를 나오는데 그 증조할아버지와 고조할아버지가 세운 그 교회가 석탑교회입니다. 이건 실제 역사이고 팩트(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교회 이름이 광암교회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훼방질하던 담뱃대를 녹이고 담배도 끊어버렸어요. 예수 믿고 나서 다른 사람은 담배도 끊는데... 하여튼 그렇게 담배도 끊고 술도 끊었겠죠. 그렇게 했을 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왜 그런 기적은 오늘날 안 생기냐는 말이죠. 내가 교회 나오고, 아버지랑 엄마가 교회 안 나오면 밤중에 하나님이 친절하게 찾아가서 귀싸대기를 날려서, 네 자식 교회 가는 거 방해하지 말라고 하면, 아버지 엄마도 같이 구원받고 이게 얼마나 좋아요.

왜 그런 기적은 안 생기느냐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성경 볼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기적이라 하는 것은, 지금 구약에서는 첫 번째, 두 번째 경우입니다. ‘애굽에서 나왔다. 약속의 땅에 살다가 쫓겨나왔다’라는 이 판이 무슨 판이냐 하면 지리적 판이에요. 눈에 보이는 자연의 공간 판입니다. 구약의 기적은 여기까지입니다.

지상에서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까지 준 기적은 이게 다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어디까지나 나의 육신이 잘 되고, 내가 죽어서 구원받는 것이 인간의 생각으로써는 그게 한계입니다. ‘하나님 덕분에 지옥 갈 뻔한 내가 천국 갔으니, 나는 이 땅에서 포로된 자에서 벗어나서 이 육신은 천국 간다’라는 이해가 교회 처음 나오면 이 정도 레벨의 이해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어려운 것은 신약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대신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 육신의 간수, 육신의 멀쩡함, 몸 안 아픔, 부자 됨, 이런 것은 예수님께서 그 범위마저 그걸 넘어서 버린 거예요. 십자가에서 죽을 뻔했다가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몸소 보여 준 기적은 예수님이 몸으로 보여 준 거예요. 이 몸에서부터 부활의 몸으로 바뀌는 것이 최종 기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제까지, ‘과거에 말이야, 내가 예수를 믿는데 어떤 허연 분이 와서 우리 아버지 귀싸대기를 때렸다’라는 것으로 계속 먹히면 안 돼요. 나 건들이면 남이 죽는다는 이걸로 먹히면 안 되고, 문제는 내 육신을 갖고 있는 내가 예수님을 괴롭히는 주님의 원수 됨을 발견하는 기적, 과거의 어떤 것에 집착하면 안 되고, 이것 붙들고 이것이 다라고 여기면 안 되는 그 기적. 교회도 그 기적을 넘어서야 하겠죠.

‘목사님, 그러면 그 기적이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라고 하시면, 김치는 없는데 김치냉장고부터 마련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뭐냐? ‘내가 김치인데 김치를 잘 보관해서 하나님에게 맛있게 드리기 위해서 김치냉장고를 사줬구나’라고 ‘나’라는 존재가 먼저고 날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그것이 일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한국 교회에 딜레마예요. 한계예요.

그런데 주님부터 먼저 계시고, 아예 백성이 없는데 주님의 공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김치가 만들어진다는 거, 열매가 맺힌다는 여기에 주어지는 기적은 신약에서 따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개념이 확장되죠. 뭐냐. 포로 잡힌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 나를 포로로 꽁꽁 묶어놨는가. 우리는 어디에 갇혀있는가. 그것을 말씀드리고 설교를 맺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0절에 약간 난해한 구절이 나와요.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얘들아, 입 다물고 내가 그리스도이고 구세주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주께서 당부했어요. 왜? 팬들을 확보해야 하는데 왜 입을 다물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뭐냐.

해석이 안 되는데 그다음을 보게 되면 해석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고난받고 죽게 된다고 했을 때, 그때 유명한 구절인 베드로가 비로소 나섭니다. 22절에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은 제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기적 범위를 넘어서서 진짜 그리스도의 기적은 너희들이 아는 그리스도에 머물면 안 되고, 너희도 네가 아는 너의 그 세계에서 너도 나처럼 빠져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빠져나올 생각은 안 하고 ‘우리 주님을 존경합니다.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저를 구원하실 분이잖아요. 저를 천국 보낼 분이잖아요. 절대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제발 멀쩡하시고 주님의 몸은 건실하셔서, 우리를 건져내셔야죠’ 이게 그 당시 제자들의 한계였습니다. 주님이 멀쩡해야 우리도 같이 덩달아 멀쩡한 사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죽어버린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군급하게 한 것이, “주여, 그런 일은 생기지 않도록 우리가 조치하겠습니다”라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23절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생각하는 열매, 네가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회복, 네가 생각하는 모든 구원, 그것은 네 성에서 네가 갇혀있는 한계라는 말이죠.

너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다. 너는 너의 안위와 너의 보호 받음과 너의 안녕과 너의 영원한 구원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생각을 추호도 못 해요. 김치만 생각하고 김치냉장고는 김치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걸로 생각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한국 교회에서 맨날 시작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여러분이 회개하면 구원해 줍니다’

시작은 자기 안녕과 자기 존재의 보존부터 출발하니까, 지난날의 설교처럼 존재에 머물고 있으니까, 기능이 안 되는 거예요. 주님의 기능이 작동 못 하고 있는 거예요. 존재에 막혀서.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11장 보겠습니다. 9절에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참 기도원에서 많이 이용하는 구절이죠.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열립니까? 발로 차면 열립니까? 구하면 주십니까? 그리고 찾으면 찾습니까?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뒤에 11~13절에 이 해답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왜 두드리는데? 왜 찾는데? 무엇을 찾는데? 무엇을 위해 너는 기도하고 있는데? 그 주님의 질문이 여기에 담겨있어요. “구하라” ‘네, 구하겠습니다’ “뭘? 뭘 구할 건데?”

“찾으라” ‘네, 찾겠습니다’ “뭘? 뭘 찾을 건데?” “두드리라” ‘네, 두드리겠습니다’ “뭘? 뭘 위해 두드리는데?” 뒤에 11~12절부터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들이 구하는 것은 지금 뱀을 달라는 것을, 전갈 달라는 것을 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너희의 한계를 못 벗어나니까.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고, 주님은 좋으신 분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거 주께서 주실 거죠? 그렇죠?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건 네가 생각한 네 열매지, 하나님이 애초부터 생각한 포도나무 열매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 뭘 주시는가. 좋은 걸로 줄게. 좋은 게 뭔데. 13절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과 함께 고난받는 능력을 주시지 않겠는가. 성경 전체, 간단하죠. 하여튼, 고조할아버지의 꿈인, ‘이게 어디서 방해해?’라고 귀싸대기 때리는 것에서 머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걸 주께서 시작했기 때문에 부인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서 머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에게 머물면 안 되죠. 성령을 주시면, 아, 김치에 머물면 안 되고, 김치냉장고부터 있고 난 뒤에 그 안에서 김치가 숙성되고 전환되고 변환된다는 거, 그것을 가지고 “예수안으로 구원”

세상 안에서 예수 안으로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 세 번째 절차였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보면서도 우리의 오해되는 점이 자꾸 발각되고 튀어나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세상에 나가 살면서 그동안 몰랐던 우리의 착각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살 생각해야지, 날 위해 살 생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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