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선지자의 맞은 편

아빠와 함께 2024. 9. 30. 10:00

선지자 맞은편

2024년 9월 2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8:1-4

(28:1) 이 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 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년 오월에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28: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28:3)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오게 하겠고
(28:4)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

인간은 시간이 자기 자신보다 더 길고 세상을 통제하는 환경임을 잘 압니다. 그 시간 안에서 인간이 해내는 것은 ‘내가 나’가 되는 일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과거가 지나가고 현재가 되어도 과거의 그 ‘나’를 현재의 ‘나’로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간이 주는 새로움이 전혀 없는 겁니다.

참된 선지자인 예레미야는 바로 이 ‘과거의 한때 나였던 그 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정없이 거부당함을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새로움에 가져다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늘 ‘현재’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 과거를 붙들고 사는 인간 세계에서 과거와 연결없은 새로운 ‘현재’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과거에 만들어진 그 ‘나’ 현재에서 우기므로서 현재를 곧장 ‘과거’로 만들어버리고 심지어 미래까지 ‘과거’로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장래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겠고 단지 지금 자기를 지켜주면 그것이 곧 ‘장래’라 되기라고 우기게 됩니다. 과거에 없는 현재는 참 선지자가 외치는 것이고, 과거에 있는 현재와 미래를 말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곧 ‘하나님의 요소’가 없는 자입니다. 이 ‘없는 하나님의 요소’에 과거의 인간상이 들어서게 됩니다. “잘 될거야”라고 위로입니다. ‘잘된다는 말’은 이미 과거가 자리잡고 있고 그 위에 현재를 얹지는 식으로 ‘잘된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나’를 잘 살려낼 것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참 선지자의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워낙 참된 선지자로 알고 있기에 꾹 참고 듣고 있는 중에 용감한 거짓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냐라는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가 이 ‘약속의 땅’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외쳤지만 하나냐는 2년만 참으로 다시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이 땅이 70년이 지내야 자기 백성을 받아준다는 것은, 이 약속의 땅 자체가 사람들 끼리 사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더불어 사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사는 공간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충족되는 조건이 완성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와 상관없이 항상 말씀이 주어진 현재에서 세상 변형이 일어나는 겁니다. ‘새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요소’가 계속해서 발산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이 새로울까요? 그것은 인간이 진정 무슨 죄를 품고 있는지가 새롭게 펼쳐진다는 겁니다. 이 점을 알려주는 계기가 바로 거짓 선지자, 곧 하나님의 요소가 전혀 없는 하나냐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그 사람의 등장은 그동안 인간들이 참 선지자에 대해서 대단한 불만을 품고 있었음을 노골화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70년 만에 돌아오는 것을 하나냐에서는 2년 만에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 땅은 과거의 ‘우리들’이 계속 살 권한이 있음을 거짓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과거에 속한 백성들은 당연히 거짓 선지자의 말을 택하게 됩니다. 게다가 거짓 선지자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들고 있는 나무로 만든 멍에를 보란 듯이 부셔버립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쇠 멍에를 만들어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이벤트 같은 것이 현재 참 선지자가 있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우리 인간이 성급하게 참 선지자편에 설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참 선지자의 말을 이해한다고 해서도 아닙니다. 출발을 거짓 선지자편에서서 이해해야 합니다. 왜 백성들이 참 선지자의 말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발하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점을 파악하는데 있어 이사야 선지자의 글이 유용합니다.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이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얼굴 가리개와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반지와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사 3:18-23) 이사야 선지자가 사치를 부리는 귀족 부인에 대해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또한 이사야 5:11-12에 보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라고 전했습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자기가 고생해서 버린 돈으로 좀 사치하고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요? 이 험한 세상에서 힘들어 돈 벌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자기에게 투자하는 것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나쁜 짓인가요? 이와같은 반발은 선지자편에 서지 말고 선지자 반대편에 설 때나 새롭게 인식됩니다.

즉 인간의 자기 내부는 거짓 선지자가 백성들을 선동하는 것이 얼마나 무심코 우리 본심과 합치되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과거의 ‘나’를 포기못하는 인간의 심성상 인간은 참선지자의 말보다 거짓 선지자의 말에 동조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말씀이 오기 전에 이미 형성되어 구축되는 마음이 마치 성채(城寨)와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잠 18:19) 또한 잠언 16:32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즉 타인의 마음과 통한다는 것은 마치 단단한 성을 빼앗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들 마저 자기 성에 ‘문빗장’을 채워놓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체하지요? 요한복음 1:29-31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 세례 요한은 어떤 행위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사람을 수장하는 행위입니다. 사람을 죽여버리고 다시 건져내는 의식을 행합니다. 이것은 장차 성령이 왔을 때 바로 이런 능력으로 작용하므로서 ‘과거의 나’를 제거하고 현재 주님과 함께하는 ‘나’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런 식의 자아는 감히 천국에 살 수 없는 자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에 의해서 과거가 다른 늘 새롭게 만들어지는 공간에 놓여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122강-예레미야 28장 1~4절(선지자의 맞은 편)24092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8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1095페이지입니다.

“이 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년 오월에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오게 하겠고,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

사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 28장 본문 전체를 다 읽어야 합니다. 전체 내용은 하나냐라는 거짓 선지자가, 자기 자신은 참된 선지자라고 생각해요, 이 거짓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에게 희망찬 희망을 제공하는 예언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아니라고 하니까, 그 하나냐라는 사람이 오버를 하는데, 예레미야가 멍에를 메고 우리 민족은 이처럼 무거운 멍에를 메고 포로가 된 채로 다시 바벨론 가니까 이 땅을 포기하라고 한 겁니다.

이 땅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우리가 포로 되어 가는 것이 약속이라고 한 거예요. 아주 과감한 이야기를 했지요. 예레미야를 그중에 믿는 사람 같으면, ‘감사하리로다. 찬양하리로다. 주께서 우리를 망하게 하셔서 너무 고맙습니다’라고 이렇게 나올 건데, 예레미야도 그렇고 그 백성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조용했어요. 그 말을 듣고.

분명히 예레미야가 선지자고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골라 듣겠다는 거예요. 자기에게 실익이 있느냐, 아니면 손해냐를 따져서,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을 내가 들을 만한 것만 골라 듣겠다는 이 심보, 이 심보를 겨냥해서 거짓 선지자가 끼어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2년 만에 돌아옵니다’라고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들고 있는 멍에를 사람들 보는 앞에서 그것을 아주 부숴버렸어요.

‘이딴 멍에는 신경 쓰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멍에나 하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라고 그 멍에를 부숴버렸죠. 그러니까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언급하기를 “하나냐가 너의 목에 있던 나무 멍에를 부쉈지?” “예” “내가 쇠 멍에를 만들어서 이스라엘에게 짊어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냐는 곧 죽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예레미야는 금 년에 하나냐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예레미야의 예언이 앞당겨졌습니다.

5월에 이 예언을 했다면 6월~12월까지 7개월 남았잖아요. 하나냐가 2개월 후에 죽었습니다. 5개월 앞당겨서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28장에 나온 내용입니다. 28장 내용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예레미야가 남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니라고 버티는 거, ‘아니야. 그렇게 되면 우리가 너무 불행해져. 싫어. 나는 내가 불행하고 절망하는 거 싫어’라는 그것으로 인해, 더 혹독한 쇠 멍에가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것을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말을 거부할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말씀에서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말고, 하나냐의 말을 들어야 해요. 왜냐 하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망하는 것을 희망으로 삼을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뜻이면, 내가 망하는 것도 즐거워요’라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주제넘게 믿음도 없는 주제에, ‘난 예레미야 편에 설래. 난 예레미야에게 한 표!’라는 주제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예레미야만 있었더라면 억지로라도 ‘예레미야 선지자가..~’라고 편에 서겠는데, 예레미야에 대해서 과감하게, 과도하게 하나냐라는 선지자가 와서 ‘예레미야는 틀렸고, 이게 옳습니다’라고 나오니까, 하나냐 선지자는 몰표, ‘네가 선지자 해라’라고 그쪽으로 몰표 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이 말씀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기에 비교가 되는 거짓 선지자의 등장이 필수적이라서, 모든 인간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 중에서, 참된 선지자의 말을 버리고, 거짓 선지자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속성이 각자 자기에게 있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하나냐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내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거짓말을 지어냈는가. 그것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냐 선지자 속에 하나님의 요소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냐가 없다면 그러면 우리는 있느냐. 도대체 하나님의 요소가 뭐냐? 하나님의 요소는 간단해요. 말씀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벌 받는 거. 이것이 하나님의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하는 행세 보세요. 우리가 이미 조상부터 잘못 만나서, 잘 만나도 마찬가지고, 조상은 하나밖에 없는 조상,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는 그 안에서 태어났어요. 우리는 죄 안에서 태어났어요.

그걸 진짜로 그대로 인정한다면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도 호강에 겹고 넘치는 이야기입니다. 거지가 되어서 개들이 핥아야, ‘아, 이에 나에게 딱 어울린다’라고 해야 해요. 개들이 헌데서 고름이 나오니까 그것을 핥고 개들까지 그렇게 무시해야, 딱 우리에게 적합한 거예요. 거지 나사로는 그것을 적합하다고 인정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기피 했고 도저히 겁이 나서 도망쳤고, 개까지 놀림을 받았고, 도대체 우리의 합당한 자리, 우리의 자리가 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이겁니다. 말씀이 주어지면 세상이 변한다. 어떻게 변하는가. 세상이 제대로 변해요.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헛된 망상으로 세상이 돌아가게 되어있어요. 예레미야 선지자가 제대로 이야기합니다. 약속의 땅과 우리와 이제는 상관이 없고 관계없다고.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올 때, 그들을 포로 잡힌 데서 뽑아냈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깊이 있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과거의 한때 우리는 나 였다’ 과거의 한 때, 나는 나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누구의 포로가 되었다. 나는 나답고 싶어서 애굽에서 애굽의 바로의 포로 된 자들이었어요. 히브리인들이. 그때 포로 되었을 때, 애굽의 포로, 자기가 힘 세다고 하는 자의 포로가 되었다는 말은, 번역을 해보면 ‘나는 나 안에서 못 벗어난 상태였다’라는 뜻이에요.

나는 나였고, 나는 나에게 갇혀있었고, 나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나에게서 빠져나가지를 못했고, 나는 나에게서 탈출이 불가했다는 거예요. 그런 자들이 모였는데, 그런 자들이 모인 가운데서 바로의 권세에 히브리인들은 눌려 살았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찾아왔다는 뜻은 뭔 뜻이에요? 하나님은 나 스스로 계신 분이에요.

하나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3:14)라는 말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만큼 나 스스로 되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나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아니에요. 이 세상이 내 위주로 사는 것은 나는 아닙니다. 오직 나 스스로 계신 하나님 위주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한 때 우리가 내가 나였다는 시절은 끝나고, 지금 하나님과 묶여있다면 더 이상 나는 내가 아니에요. 나에서 벗어난 나죠. 그게 뭐냐. 하나님께 종이 되고 하나님의 노예가 된 상태의 나가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겁니다. 도대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약속의 땅에 간다고요?

약속은 하나님의 땅이지, 자기 땅 아니에요. 요한계시록 11장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구조를 한번 보세요. 하나님의 언약궤가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 있어요. 그 밑에는 땅이 있겠지요.

언약궤에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이것이 뭘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궤 빼놓고는 전부 다 저주받을 동네라는 뜻이에요. 밑에는 약속의 땅이 없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찾는 이 지상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늘로 올라 가버렸고 이 지상에는 없어요.

그러면 천국은 뭐냐. 천국은 언약궤 따라가면 되지요. 참 쉽지요. 아침에도 이야기했는데, 방역차 따라가면 돼요. 하나님의 천국 간다는 말은 누구를 따라간다는 말이에요. 누구를 따라간다는 말은 더 이상 내가 나 따라가는 것을 끝냈다는 거예요. 더 이상 나는 나를 추종하지 않고 나를 따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질 테니까 속으로 답변을 해보세요.

이사야 3장 16~26절까지 보면 좀 긴데, 이것을 짧게 이야기하면 먼저 16절에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리고 18~23절에 보면 “주께서 그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반지)과 코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거울과 세마포(아무 비싼 옷감) 옷과 머릿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이런 것들을 소위 부잣집 아낙네들이 이걸 했단 말이죠. 이걸 가지고 선지자가 지적했단 말이죠. 교만하다고.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이 지적한다고 자꾸 선지자 편에 서려는 경향이 있는데 반대로 돌립시다. 선지자 편에 서지 말고 선지자에게 지적받는 편에 서서 그들의 심정에 같이 합류해서 오히려 선지자를 한번 공격해 봅시다.

선지자에 대해서 한번 반발해 봅시다. 그게 우리 심성에 딱 이에요. 딱 맞습니다. 힘들여서 돈 벌어서, 내 돈을 내가 쓰는데 그게 뭐가 문제가 되죠. 이게 제 질문입니다. 돈 벌어서 옷에다 뭘 장식하고, 뭘 치장하든지, 내 돈이잖아요. 내 돈. 내 돈을 내가 쓰겠다는데 그게 뭐가 문제냔 말이죠. 이사야 5장 11~12절에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내 돈 내가 벌어서 비싼 독주와 포도주 사서 기분 좋게 밤새도록 마시겠다는데, 이사야야, 네가 뭐 나에게 돈 보태준 적 있어요? 술값 준 적 있어요? 우리가 이사야 편 말고 이사야 맞은 편에서 생각해 봅시다. 은근히 부아나지 않습니까? ‘뭐야? 네가 언제 술 먹으라고 돈 준 적 있어?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데 네가 왜? 나 이제 교회 안 간다. 기분 나빠서 교회 안 간다. 나 이제 말씀 안 본다’

부아가 나서 말씀을 못 봐요. 부아가 나서. 왜 우리는 자꾸 이 출발점을 애써 감추냐는 말입니다. 하나냐 선지자가 등장한 것은 우리가 자꾸 어설프게 인생 실험을 해요. 속으로는 이제 나는 나밖에 안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그러면서도 찝찝하니까 자기 인생 실패를 자꾸 실험해요. ‘그래도 신이시여, 내가 인생을 몇 번이나 실패해야 하나님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실패하고 나니, 이제야 속이 후련하십니까? 내가 내 돈 벌어서 쓰겠다는데, 이게 뭐가 그렇게 잘못된 거예요’ 이제 하나님에게 못 따지니까 목사 붙들고 따지죠. 그런데 우리 교인들은 저에게 따지는 사람 없어요. 감추는 기술이 발달해서, 아주 능수능란하기 때문에 그냥 어설픈 믿음 가지고 자기 인생에서 실험용으로 사용할 뿐이지.

실제 본심은 참된 하나님, 참된 선지자와 이미 맞은 편에 서 있습니다. 그걸 돕기 위해서 하나냐 선지자가 등장한 거예요. 얼마나 감사한지. 딱 마음이 통하는. 서로 통하는 선지자가 등장한 거예요. 우리는 태어나면서 마귀와 친하고 마귀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좌절하지 말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늘 했어요. ‘하나님 믿으면 잘될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너를 안 도와줄 일이 있나. 다 도와줘. 네가 마음을 겸손하게 먹고 낮추면,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찾듯이 다 도와주는 거야’

이걸 도와주게 되면 오늘 오전 설교처럼 그게 존재가 돼요. 존재가 강화됩니다. 완강하게. 그래, 내 존재. 하나님까지 키워준 이 존재를 내가 버릴 수가 있나. 하나님은 버려도 내 존재는 포기 못 하죠. 그 이유에 대해서 이사야 5장 12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이게 정답입니다.

계속 자기에게 관심이 몰빵 되어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하는 일은 관심이 없어요. 어려울 때 슬픈척하면서 나올 뿐이지, 평소에는 하나님께 관심 없어요. ‘아이고, 피곤하다. 집에서 쉴란다’라는 이것뿐이에요. ‘아이고, 허리야’라는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 뭐 했는데? 나에게 뭘 도와줬다고? 뭘 도와줬다고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신경 써야 해? 그것뿐이에요.

이런 것을 아주 쉽게 도와주기 위해서 하나냐라는 선지자가 도와준 겁니다. 이 거짓 선지자가. 하나님의 일은 얼마나 절묘한지 몰라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나님의 선지자 하나냐가 대신 다 이야기 해줘요. 한국 교회 목사가 대신 다 이야기해 줘요. 그 교회 안 갈 수가 없죠. 희망적이니까. 도리어 교회보다 세상의 노래가 인간의 서글픔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해 줬어요.

내가 노래 가사를 하나 찾아봤는데 들어보세요.

인생은 연기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박인희 씨가 불렀던 ‘모닥불’이라는 노래입니다. 이걸 세상 사람이 이야기해요. 세상 사람이. 하나님의 스토리는 하나님이 하고 나는 죽을 때까지 줄 창 내 이야기만 하겠다는 거죠. 이게 하나냐 선지자 아닙니까? 딱 우리를 이렇게 투명하게 제대로 이야기 해주고 있잖아요. 하나님은 관심 없어요. 눈만 뜨면 내 이야기 해요. 심지어 내가 화장터에 재가 되는 그 순간까지. 시체가 되어 불 속에 막 들어 가면서도 벌떡 일어나서 ‘너 지금 나 죽을 때, 부조 얼마 했어?’라고 막 따질 것 같아요.

인간은 하나님 일에 합세 못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일단 나가 있으라는 거예요. 일단. 뭐냐 하면, 너는 세상의 포로, 너의 포로로 일단 가 있어. 천국 갈 생각하지 말고. 철저하게 세상 사람 되고, 철저하게 너 자신에게 미쳐버려. 그게 과거의 나였던 그 과거에 너에게 미쳐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과거의 나에게 미련을 갖고 있는 거예요.

어제로부터 계속 이어져 온 과거의 나에게서 우리는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잠언서에서는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이 성경 하나하나가 어떻게 뭘 버릴 수가 없어요. 잠언 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인간은 자기 마음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빠져나와서 다스린다는 건데, 인간은 그런 인간이 없다는 거죠. 잠언 18장 19절에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이게 오늘 설교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이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성채(城砦)로 만들었어요. 성으로 만들었어요. 성같은 아파트. 롯데캐슬. 성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문빗장을 했어요.

문빗장을 해놓고 그 안에서 자기가 갇혀서 밖에 안 나와요.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이 성채의 특징이 뭐냐. 성채의 특징은 그렇게 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벽 위에 휘장들을 꽂아놨어요. 이 성(城)은 우리 것이라는 티를 내요. 그걸 가지고 ‘태극기 휘날리며’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나는 나다’라는 식으로 여기에 휘장을 꽂아서, 이거는 나라고 표현하며 휘장을 휘날려요. 이 말은 그 성 둘레에 장벽을 쳐버려요. 다들 그렇게 살아요. 그런데 그렇게 말한 하나냐 선지자가 2년 만에 돌아온다고 하거든요? 예레미야는 70년이라고 했어요. 예레미야는 70년 만에 돌아온다고 하고 하나냐는 2년 만에 온다고 하고.

2년 만에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사정을 봐줬다는 뜻이고, 예레미야가 70년 만에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일체 인간 사정 봐주지 않고 하나님의 자기 사정을 위해서 70년 후에 돌아온다고 했어요. 안식이 완성될 때 돌아온다는 거예요. 그 70년이 70 이레가 되면서 그 돌아오시는 분이 누구냐. 우리 대신 다른 분이 돌아오시죠. 내가 아닌 하나님과 관련성 있는 분.

예수님이 약속의 땅을 아예 안에 지니고, 언약궤가 있는 약속의 땅을 지니고 예수님이 언약궤를 이루면서 우리에게 찾아왔죠. 우리는 그 앞에서 태극기 휘날리죠. 말해라. 안 듣는다. 백날 말해도 나는 안 듣는다. 주님에게 소리치죠. ‘찍지 마라’ 주님께서 보여 주는 희망은 “같이 죽자”라는 겁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30절에서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이게 진짜 선지자죠.

예레미야의 계통을 밟아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 선지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봅시다. 예수님과 마주 했어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니까 마주하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거든요. 누구나 알고 있는 말씀이죠. 중요한 것은 그다음입니다.

31절에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이것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뭐냐. 내가 물로써 너희에게 세례를 준 것은 어디까지나 중요하지 않고 폼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기 때문에.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따라서 너희들 맥아지(멱살) 쥐고 물속에 집어넣어서 물 바깥에 너희를 없애겠다. 이것이 세례요한 내가 할 일이라는 겁니다. 없어지지 않는 너를 없어지지 않는 채로 심판이라는 물속에 집어넣는 거, 물속에 집어넣어서 수장시키는 이것, 물론 집어넣어도 얼마 있으면 다시 기어 올라오지만, 내가 너희를 물속에 집어넣는 것은, 자아를 없애고 주님 성령세례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절차를 내가 너희에게 보여 준다는 겁니다.

이 성령세례가 불세례가 되면서 십자가 위에 예수님에게 불세례가 되면서 십자가를 통과할 때, 성령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런 선지자. 바로 우리는 망하는데, 주께서는 바로 그 망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찾아오시는 거예요. 성령을 가지고 찾아와서 주님의 세계로 인도받습니다. 마태복음 22장 14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많이 청합시다. 얼마나 적은 지를 알기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우리를 죽은 자로, 절망적인 자로 간주하고 들어온다는 사실을 이제는 우리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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