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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개입

아빠와 함께 2024. 10. 13. 17:57

하나님의 개입

2024년 10월 1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9:15-19

(29:15)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하므로
(29:16) 여호와께서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29: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게 하겠고
(29:18)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열방 중에서 저줏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29:19) 이는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힘으로 삽니다. 비축한 힘이 많을수록 삶에 여유를 부릴 수 있습니다. 그 가진 것 중에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땅(토지)입니다. 땅이 없이 살면 떠돌이 신세가 됩니다. 여기 가면 여기서 치이고, 저기 가면 저기에서 치입니다. 추방당하고 배척당합니다. 도무지 안정적인 삶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 결사적으로 땅을 소유해야 하고 일단 소유가 되면 목숨걸고 지켜내려고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통적으로 땅 차지하기를 벌리는 투쟁의 역사입니다. 하나의 민족으로 대를 이어 자기 후손을 남기기 위해 땅은 필수적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이 본성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내어 약속의 땅에서 나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남겠다는 주장들이 예레미야를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고 배척했습니다. 즉 그들이 이해하는 참 하나님은 자신들의 생존 욕구를 충족시켜는 하나님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시키시는 겁니까?

그것은 그들의 비축된 힘을 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힘을 자신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훼방하기 십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성전도 파괴하시고 또한 왕도 없고 나라도 없애버려서 더는 이스라엘이 힘을 비축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는 곧 국가도 종교도 없는 나라가 된 겁니다.

즉 자기네들 쪽에서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조치를 내리시는 이유는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1-13)  "Yet there will be a tenth portion in it, And it will again be [subject] to burning, Like a terebinth or an oak Whose stump remains when it is felled. The holy seed is its stump."

특히 이 대목에서 ‘십분의 일’이라도 삼키게 된다는 겁니다. 이는 인간의 그 어떤 각오와 결심도 하나님의 구원에 섞이지 않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계시를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이스라엘이 구원되는 방식은 하나님의 개입 뿐입니다.

이러한 개입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은 하나님의 계시의 연속성에 가담되도록 조치해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 2:17-18)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에 가담된 백성들은 이사야 6장에 나오는 그루터기의 절단면을 유지하게 되는 자들입니다. 그 절단면에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을 하십니다. 그 시작에 해당되는 사례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죽음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3-4) 참으로 차갑게 냉정하게 들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이 죽던 말던 자신의 영광만 챙기는 분으로 이해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계시 차원에서 보면 나사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는 겁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 이 말을 듣은 제자들은 아직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고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의 계시 차원을 자신들의 육신적인 상식 차원에서 해석해 버린 겁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분명 죽었습니다. 이미 죽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지경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도마는 다음과 같이 자신만만해 합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 11:16)

즉 인간은 자신의 이해성이 하나님의 계시로 인하여 싹뚝 단절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못받아들입니다. 나사로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자신이 죽음을 전제로 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평소 삶이 타인들과 상대해서 끊임없는 대화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아무도 자신을 찾지도 않고 또 자신이 찾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이미 죽은 자에 해당됩니다. 그 어떤 변화를 추구할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어떤 골짜기로 인도받는데 거기에는 산 사람이란 전혀 없고 오로지 선지자 본인과 하나님만 계셔서 대화가 됩니다.

그 대화의 효과는 어떨까요?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겔 37:1-5)

이렇게 부활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이스라엘입니다. “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겔 37:10-11)

즉 하나님의 계시 완성의 능력이 임한 바로 그것이 약속의 땅에 영원히 살 백성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통해서 매사에 하나님의 개입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24강-예레미야 29장 15~19절(하나님의 개입)24101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9장 15~19절입니다. 구약성경 1095페이지입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하므로, 여호와께서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게 하겠고,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열방 중에서 저줏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을 안 듣는 거예요, 선지자를 보냈는데. 선지자를 보내도 말을 안 듣는 이유가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가 살고 싶어서 자기 쪽에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선지자가 말하는 어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를 자꾸 골라잡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조치를 내리시느냐 하면 땅과 관련된 조치를 내리십니다. 땅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살기에 필수적인 요건이 되는 겁니다. 땅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가 없습니다. 남의 땅에 산다는 것은 고역이죠. 남의 땅에 산다는 것은 타인의 영혼에 볼모잡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남이 시킨 대로 사는 거, 남이 시킨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그 굴욕감,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 짓은 못하겠다는 것이 인간이잖아요.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몸이 있고 자기 땅이 있다면, 이제는 하나님도 필요 없다는 생각으로 굳히게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역사라 하고, 전통이라 하고, 그것을 관례라고 합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역사라 하는 것은 자기 몸뚱이 안정성, 그 중심이에요. 예를 들면 그 땅에 가뭄이 들어서, 국가에서 다른 땅을 줄 테니 그 땅을 포기하고 이쪽에서 살라고 국가에서 조치한다면, 보통 젊은 사람들은 자기 살길 찾아서 그쪽으로 가겠다고 하는데, 꼭 연세 많은 분들이 자기 고향 땅을 안 나가요.

‘우리 아버지 무덤이 여기 있는데, 우리 이씨 가문, 이가 가문이라고 해야지, 이가 가문이 선조 때부터 있었는데, 내가 여기에 몸을 바쳐야 하지, 왜 떠나?’라는 식으로 버티기를 합니다. 이게 관행이고, 역사라 하고, 전통이라는 겁니다. 고향을 버리면 자기 존재 기반조차도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거. 그래서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를 보내서 “이 땅 나가라. 이 땅에 희망 없다”라고 하죠. 약속의 땅에 그동안 살아온 것은 인정하는데, 이 땅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제 추방하겠다는 거예요.

다 나가고, 고향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바벨론에 가서 포로 생활하라고 선지자를 보냈건만, 그들은 고집으로 버티고 못 나가겠다는 겁니다. ‘예레미야 당신이 가짜 선지자잖아. 진짜 선지자라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니까 어떤 경우라도 버티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선지자이지, 현재 오랫동안 살았는데, 이 아브라함의 땅, 이삭의 땅, 야곱의 땅, 이것을 버리고 다시 우리로 하여금 약속의 땅 없는 걸로 치라고 나와버리면, 당신은 가짜 선지자 같다’라고 예레미야에게 대들었던 사람들이 가질 않았습니다.

가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여기 보복 조치가 주어지죠. 이 땅, 그러니까 포로 되어 가지 아니한 땅, 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라고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전염병과 염병에 걸리고 기어이 전 세계로 포로 잡혀가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모욕을 당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내리겠다는 겁니다.

19절에 “이는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듣지 않았어요. 보내는 족족 ‘이 땅은 내 땅인데, 조상님의 땅인데 못 버린다’라고 버티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2가지를 생각해야 해요. 하나는 안 가는 땅, 안 가고그 땅에 사람들이 버티는 이유가 뭔지,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그들이 땅 없이 포로 생활을 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원래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은 어떤 모습으로 구성되는지, 이 2가지만 알면 되겠죠.

첫째, 그들이 이 땅을 나가지 않는 이유는 힘을 빼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야. 이것은 내 재산이야’라고 할 때 이미 그 사람은 힘을 비축하고 저축한 사람이에요. 부부가 열심히 남편은 돈 벌고, 아내는 살림 잘 살아서 아파트 하나 샀습니다. 이제 명의를 정해야 하는데, 남편은 ‘내 돈 주고 샀는데 내 명의로 하자’라고 하고 아내는 ‘공동명의로 하자’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나오는 거죠.

이건 차를 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 하면, 힘 빼는 것이 절망이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 아파트 명의 당신으로 했는데 헤어지게 되면, 나는 한 푼도 없잖아. 당신에게 구걸해야 하고. 그건 죽기보다 싫지. 공동명의로 하자. 나중에 연금할 때, 연금도 반으로 가르고.

힘을 뺀다는 거.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이 뭐냐 하면 힘을 빼야 한다는 거예요. 힘을 빼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으면 안 돼요. 첫째는 국가를 포기해야 해요. 내가 어느 나라에 국민이라는 것을 포기해야 해요. 두 번째가 더 어려워요. 뭐냐 하면 내 종교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는 성전이에요. 그런데 성전이 있는 땅을 포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찾아갈 수 있는 매개, 연락 장소가 내 손에서 떠났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다시 찾아주면 되는데, 내 쪽에서 하나님을 찾아갈 일은 하나님 쪽에서 차단했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오죠. 내 쪽에서 뭔가 해서 하나님께 이쁨받고 내 쪽에서 뭔가 해서 구원받을 시도를 포기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것조차 힘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 백(뒷배) 있다’라는 그것조차 나에게는 나를 지켜내기 위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은 뭐냐. 그것마저 포기한다면, 국가 포기하고 종교 포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기에 선지자를 보내서 우리로 하여금 “힘 빼라”라고 나오시는 이유가 뭐냐.

그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알려준 바가 있습니다. 이사야 6장 12~13절에 보면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게 벌을 내려서 멸망시킨다. 오케이! 동의합니다. 그거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고 내가 버티면 되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추방했지만, 이건 우리가 죗값을 치르기 때문에 추방되어서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불러주겠지’라는 결심과 각오와 신앙을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게 십분의 일(1/10)에 해당합니다. 그 십분의 일이 어떻게 되느냐. 작살납니다. 십분의 구(9/10)가 날아가도 우리가 십분의 일(1/10)에 머물면 우리는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간다는 그 생각까지 주께서 놓치지 않고 작살냅니다. 십분의 일이 남을지라도 그것은 오히려 삼키우 게 될 것이다. 자기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고, 절망하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맞습니다. 나는 못났습니다. 당해도 쌉니다. 나는 지옥 가야 합니다’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진짜?”라고 하시면 갑자기 태세 전환하죠. ‘뭐, 말은 못 합니까.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요...이런 고백이 나를 도로 구원할 수 있는 바탕이 될까 싶어서 이렇게 한 소리 해보는 겁니다. 신앙적인 멘트를’ 인간은 이런 꼼수를 쓸 수 있어요.

그러나 이사야 6장 13절에서는 “네가 너희들 모를 줄 알아. 다 알아”라고 하면서 그것마저 작살내세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작살내었다는, 잘라내었다는 표면, 나무 기둥을 톱으로 자르잖아요. 나무를 톱으로 잘라내는 거예요. 십분의 일도 잘라냅니다. 그렇게 잘라내면 절단면 나오잖아요. 절단면. 절단면에서 새로 시작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꼼수를 쓰지 말고 잘려” 하지만 그 잘렸다는 사실에서 주께서 새롭게 시작하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이미 편하게 잘 알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저 죄인 맞습니다’ 이것은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나쁜 짓 해서 죄인이 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아, 이건 맞아. 하나님마저 버림받았다면 우리는 당연히 버림받지’라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절단면, 잘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그 잘린 면에서 새로 시작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구원 방식입니다. 이걸 남은 자라고 합니다. 그게 바로 13절에 나옵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그루터기를 남기듯이 잘라내고, 십분의 일도 잘라내고 하는 거죠. 이 그루터기는 내가 더 이상 나에게 손쓸 수 없는 지경을 의미합니다. 손 쓸 수 없는 지경. 그러면 이제 손 쓸 수 없는 지경에서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구원을 해내느냐.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나오는데, 그 놀라운 말씀이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에 자기 백성을 집어넣는 예언을 하세요. ‘하나님이 계시하신다. 하나님이 예언 하셨다’ 그 예언을 구성하는데, 자기 백성을 집어넣어서 구성하는 대목이 사도행전 2장 17~19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모든 육체에 부어준다고 되어있어요.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내가 계시에 말려 들어가는 셈이 됩니다. 나의 평소에 무심코 하는 생활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에 일부로 하나님이 이걸 활용하겠다는, 사용하겠다는 뜻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뭐 내세울 것도 뭐도 아무것도 없는데, 그렇게 하신 거예요. 마치 거지나사로처럼. 거지 나사로는 거지가 되어야 하고 아파야 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계시로 사용하겠다는 비유를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면 성령이 예수님에게 오심으로 예수님이 계시가 된 것처럼, 이제는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가 계시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우리를 통해서 계시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고요. 완성된 계시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증거물로 사용한다는 이 말입니다. 왜냐 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다 이루어진 이후에 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을 통해서,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할 텐데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에스겔 37장도 아울러 보면서 설교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4~17절에 나사로가 죽어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죽인다고 나옵니다. 11장 4~5절을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죽을 병이 아닌데 죽어요. 죽을 병이 아닌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죽여버려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나사라고 죽든, 병들든, 죽은 척하든 관계없이 예수님만 영광을 얻으면 끝난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들은 예수님 믿고 덕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런데 디두모라 하는 도마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열두 제자 중에서 도마라는 사람이 아주 특이한 사람인데, 예수님은 계속해서 나사로는 죽은 게 아니라 잠자고 있다고 하시고(11절),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12절에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라고 해요. 제자들에게는 절단면, 그루터기 절단면이 없어요. 이게 인간이 죽어야 내 힘으로 어떻게 꼼수 써서 내 힘으로 구원받겠다는 시도를 아예 근원적으로, 원천적으로 차단 되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렇게 하시거든요. 주님의 계시가 되려면 우리가 죽어있어야 해요.

자꾸 살아있으면 내 쪽에서 계시를 붙들고 살 생각을 한다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계시 차원이에요. 그리고 실제로 죽는 것은 나사로가 인간적 입장에서 실제로 죽었어요. 그리고 잠든다고 한 것도 계시 차원이에요. 실제로 남들 보기에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되었어요.

이 차이, 우리 생각의 차이, 주님의 단어를 이해하는 우리 생각의 차이가 제대로 구분되어야 절단면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을 못 알아듣게 되어있어요. 그걸 인정해야 해요. 못 알아듣기 때문에, 우리는 죽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주께서 “너는 잠자고 있지”라고 하셔도 우리는 그것을 위로로 여기지 않아요.

살아있어도 잠자고 있고, 그 잠자는 것의 연장이 죽는 건데, 주님은 계시 입장에서 잠자는 건데, 우리는 자꾸 죽음 이후에 끄집어낸다는 생각을 못 하고 죽음 직전에 살게 될 것이라는 이러한 우리 발상을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마라는 사람이 엄청난 말을 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11장 16절에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이건 뭐 더 신이 났어요. 죽는 것이 잠자는 것이라면 우리가 주와 함께 자도 되네. 이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왜? 잠자는 거니까. 그래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용감하게 그냥 내뱉어요. ‘야, 우리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여튼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있어요. 그다음에 17절에 예수께서 와서 보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 된 거예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난 사람은 국가도 없고, 성전도 없으니,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하나님도 없고,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국가도 없어요. 거기서 그냥 사는 거예요. 그냥 사는데, 그냥 사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계시의 일종이, 예언의 일종이 된 겁니다. 얼마나 사는 게 편해요. 중국집 가서 ‘짬뽕 먹을래, 짜장면 먹을래?’ 짬뽕 먹어도 계시고 짜장면 먹어도 계시예요.

어느 순간도 주님께서 개입하시니까. 이미 우리가 죽었으니까. 예언적 차원에서는 이미 우리가 잠들었으니까. 엄청나지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같은 말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데리고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에 들어갔습니다. 뼈들만 가득하니까, 거기서 살아계신 분은 두 사람밖에 없어요. 에스겔과 하나님, 두 분만 대화합니다.

인간 대 인간은 왜 뼈들이 있느냐. 인간은 모든 일상이 남과 상대하며 살아가게 되어있어요. 상대하려면 타인도 살아있어야 하고 나도 살아있어야 하고, 살아있고 살아있는 것을 통해서 계속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사람의 보람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찾지 않고 아무도 자기가 찾아갈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살 이유가 없어져요. 이래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노인정에도 가고, 운동하러도 가고, 뭔가 누군가 발견해야 하고 그 사람과 대화가 되어야 해요. 부부가 왜 결혼하느냐. 대화하려고 결혼하는 거예요. 대화가 안 되면 끝난 거죠. 계속 대화 되면 살고 대화 안 되면 끝이에요. 그것은 바로 내가 산다는 이유가 누구를 상대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남긴 것이 뭐냐. 인간의 자기 이야기예요.

그래서 에스겔에서는 주님께서 골짜기에 뼈들로 가득 채워요. 그리고 살아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에스겔밖에 없어요. 두 분 사이에 대화가 뼈들로 하여금 힘줄이 생기게 하고 뼈들이 조립되어서 뭐가 되느냐. 에스겔 37장 10절에 보면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이게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대화하지 말고, 그게 하나님이 원하는 백성이 아니고, 죽어서 나오는 하나님의 계시도 아니고, 인간이 하는 모든 대화가, 백날 대화해봤자 죽은 시체와 죽은 시체 사이의 대화에 불과한 거예요. 그것은 계시도 아니고 예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겁니다. 주님과의 대화, 잠자는 자를 깨우시는 주의 말씀, 그 말씀으로 늘 주님과 교제하고 대화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그러면 성도와 성도가 어떻게 부부생활하고 직장생활하고 사회생활 하느냐. 성도의 일상 가운데는 하나님이 개입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저번에는 짬뽕 먹었는데 이번에는 짜장면 먹게 했다. ‘주께서 그걸 댕기게 하시네’라고 굳이 말할 필요는 없어요. 마음속으로, 주님의 개입으로 해서 내가 계시가 나타나는 부분으로써 하나의 엄마, 아빠, 자식, 아내, 남편.

하나의 계시에 일부로써 그 가정에 작용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가정, 하나님의 제3의 그분, 예수님이 함께 하는 가정이 되는 겁니다. 오늘도 주께서는 목숨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가정을 통해서 계시, 하나님의 말씀을 살리는 그런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가라 하는데, 힘을 못 빼서 나갔습니다. 내 힘으로 내가 살고자 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저주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를 위한 인생 살지 말고 주께서 원하시는, 주께서 사용하시는 삶이 되고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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