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날개
2024년 10월 9일 본문 말씀: 말라기 4:2-3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4: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니니” 치유가 되기 전에 이 세상은 온통 어두움입니다. 흔한 태양은 매일같이 떠올라도 치유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날개 있는 태양’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운 태양’이 떠오르게 되면 이 세상은 온통 심판과 저주로 가득차 있음을 드러날 뿐입니다.
그래서 말리기 4:1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즉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는 심판이 합당한 것이 이 세상 형편입니다.
의로운 태양이 떠오르면서 전면적인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히 정당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심판을 굳이 유대민족에서 언급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말 1:2-3)
한 번 사랑하신 그 사랑은 끝까지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대편에 포진된 부류는 끝까지 저주받도록 조치하십니다. 이 원칙대로 시행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태양을 떠오르게 하십니다. 그들에게 왜 율법을 주었는지, 율법을 통해서 어떤 결과로 양분되는지는 알려주십니다.
율법에는 복도 있지만 저주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점을 의아해 하십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사랑한다면 처음부터 저주를 삭제하는 주시는 것이 인간들 입장에서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은 어디까지나 인간들 중심입니다. 그것도 이미 타락한 심성 중십니다. 심판이란 나에게서 하나님이 떨어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내가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도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필요한 것에 우리가 들어붙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공의’입니다. 완전한 의입니다. 인간들이 구원에 대한 욕심은 욕심이 아니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이미 범죄한 심성에서 나온 것이기에 다 욕심이요 그 끝은 사망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
의로운 태양 앞에서 모든 이들은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죽어가고 있고 또한 이러한 조치가 마땅한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특별한 대상이 되었다는 겁니다. 즉 저주가 주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도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는 특별 기회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의로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2:12에 보면,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나 이방민족이나 모두 망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저주에 합당한 자가 됩니다.
그런데 구원이란 저주를 바닥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데려가시는 겁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모든 시도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누가복음 18:25-27에 보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하나님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 이 저주로 가득 찬 세계에 들어와서 환란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수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각자 자신의 욕심 차원에서 천국에 들어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심판받의 대상자임을 전제로 하지 못한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레위언약은 언약궤 중심에게 실현성이 있는 효력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의 날개 사이에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은 천사와 동거하고 있었던 겁니다.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18-22)
이 언약궤 있는 천사의 날개에서 ‘재앙을 덮어주는 기능’이 나옵니다. “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주님께서 친히 재앙 속에서 벗어난 언약궤적인 기능을 완수하셔서 그 효력을 성령을 통해서 자기 백성 속에서 집어넣으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0-22)
이 결과로 백성은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적인 사람이 된 겁니다. 성령이 이끄는 대로 전혀 구애받지 않고 거침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치료 후의 성도의 모습입니다. 마치 악 외양간에서 출생된 송아지가 거침없이 뛰노는 것과 같습니다. 쉽게 말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바로 하나님께서 영원한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말고 십자가를 사랑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9강-말라기 4장 2-3절(주의 날개) 241009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4장 2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여기 2절에 이 말씀은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한다” 그렇게 되어있는데, 이 말씀은 의로운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 의로운 태양이 떠오르는데 그 태양에 날개가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광선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날개라는 뜻입니다. 태양의 날개니까 빛나는 날개죠. 날갠데 그 날개에서 무슨 능력이 나오느냐? “치료하는 능력이 거기서 나와서 너희들이 그 치료하는 능력을 받게 되게 되면, 외양간에서 막 나온 송아지같이 거침없이 뛰놀게 될 것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그러니까 이 치료된 상태가 어떤 특징이 있느냐? 거침없고 주저하지 않는 그런 모습. 자율이 아니고 자유, “스스로 내 마음대로 한다”가 아니라 외부에서 마음껏 사용함에 따라서 거침없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대로 움직여나가는 그 자유함. 구애받지 않는 그 모습, 그걸 뛰노는 송아지, 외양간에서 막 나와서 뛰노는 송아지로 표현한 거에요. 간단하게 말하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누군가가 나를 새롭게 갓난아이처럼 흠 없이 만들어 놨는데 그 흠 없음이 거침없이 흠 없음을 마음껏 발산하는 모습이 치료 이후의 모습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왜 치료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이 말라기 자체가 이거는 이방 민족을 위하여 쓴 책이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레위 언약, 제사를 말합니다. 레위 언약을 주신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에요. 하나님께서 그 유대민족, 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레위 언약, 제사하라고 지시했는데 그들이 그 제사의 의미와 취지를 잃어버려서 그들은 이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멸망 당하게 된거에요. 뭐 다시 돌아왔지만 모든 것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치료라는 말을 사용하는 거에요.
“원래 너희는 안 이랬잖아. 원래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했잖아.” 그래서 말라기 3장 7절에 보면,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께서 이 말라기를 듣는 사람에게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전부터 나와 너희는 서로 아는 사이였잖아. 지금 이방인들 보고 돌아오라는 소리를 하는게 아니에요. 쌩둥 맞는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도 없는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줘놓고 그 율법을 따라서 “나한테 돌아오라. 우리 서로 아는 사이 맞잖아.”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돌아갑니까? 라고 돌아가는 방법도 모르겠다는 식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내가 너를 치료해줄게.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치료가 주어지는 때, “치료를 언제 주십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4장 1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극렬한 풀무불, 전 세계가 불타버리는 때죠.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가 초개같이”, 지푸라기같이 다 타버리는 그때에 내가 너희를 치료하는 그러한 의로운 날개가 너희에게 펼쳐서 너희로 하여금 치료가 되도록 그렇게 해주겠다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그 대상을 하나님이 율법을 줬다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한테는 율법을 주지 않고 왜 이들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을 주었느냐? 그게 말라기 1장 3절에보면,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했다.”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는 쪽과 주시지 않는 쪽을 분리했어요.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 해서 이 하나님의 치료,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이라해서 다 주는 게 아니고 사랑의 증표로, 사랑한다는 뜻으로 너희에게 주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면 치료 대상은 누구냐? 야곱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에게 하나님의 치료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야, 이스라엘 사람 좋겠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 복되다. 어떻게 다른 민족에게는 주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살아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왜 그렇게 듬뿍 받냐? 그들이 돌아오지 않을 때는 치료까지 해주니 세상에 이런 혜택이 어디있느냐?”라고 다른 사람들은 부러워하기도 하고 또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겠죠. 그런데, 그것은 오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사랑하신다면서 준 게 뭐냐 하면 바로 제사거든요. 근데 이 제사의, 레위 제사법에, 레위 언약에 의하면 제사를 제대로 하지 않을 때는 그들이 풀무불 속에 들어가게 되어있어요. 지옥간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라기 1장에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다.”할 때 미워하는 건 모르겠고 사랑하는 사람의 대상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이것은 하나님이 나중에 치료하는 그 사람이 애초부터 꾸준히 한결같이 사랑했던 대상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 나 사랑해달라.” 이게 하나님 사랑이 아니고, 치료까지 완료가 될 때 이건 애초부터 창세 전부터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한테만 치료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봐야될 게 뭐냐 하면, 왜 치료 방법이 의로운 해가 떠오르냐는 그것, 그냥 해가 아니고 의로운 해가 왜 떠오르는가? 그리고 구체적인 치료 방법이 뭐냐? 세 번째, 치료가 완료된 상태를 어떤 상태를 치료되었다고 볼 수 있느냐? 치료는 누구나 받고 싶은데, 자진해서 “나 치료 받았어.”이런다고 치료가 되는게 아니거든요. 하나님 보시기에 치료가 된 상태가 어떻게 된 상태가 치료냐? 그것도 알아야 돼요. 제가 잠깐 언급했지만, 이건 뭐 거침없이 살아갈 수 있는 그 정도의 자유를 만끽하는거에요. 자율이 아니고 자유에요.
지 맘대로 사는게 아니고 마음껏 사는거에요. 주님의 뜻안에서 마음껏 사는것이지 내 뜻대로 마음껏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껏 살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된다면 도대체 그들을 치료하는 날개, 또는 치료하는 광선 안에 뭐가 들어있기에 마음껏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살 수 있게 되었느냐? 그런 것들을 오늘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정리를 해봅시다. 정리를 하는데 이 말라기 자체가 4장 1절에 나온 것처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이” 이렇게 되어있죠. 이거는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이 율법에는 제사법이든 무슨 법이든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는 “복이 있다.” 그것만 자꾸 생각하는데, 저주도 함께 주어져 있음을 그걸 빼먹으면 안 돼요.
왜 하나님이 주신, 사랑한다면서 주신 그 법안에 저주는 빼고 줘야 사랑인데, 우리 인간들 생각에는, 저주도 집어 넣는게 이게 왜 사랑이냐는 거죠.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사랑은 심판을 전제로 해서 사랑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판 받기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이걸 바닥에 깔고 그 심판 중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건져내니까 이게 제대로 된 사랑 아니냐?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러면 그 뜻을 인간들이 생각하게 되면, “그 뜻을 알죠. 무슨 뜻인지 아는데 자꾸 찝찝한 게 있어요. 그래도 아예 처음부터 저주와 심판은 빼고 가시죠.” 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저주 가운데 구원해준다. 기쁘지 아니하냐?” 기쁘지. “예, 기쁩니다.” 하면서도 별로 안 기뻐요. 왜? 그 저주와 심판 없으면 더 기쁠껀데? 안심 푹 놓고 사랑을 받을건데, 그 저주, 심판을 왜 겸해서 주시는가?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거에요. 그게 선악과 심은 것도 마찬가지에요. 선악과 심었는데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했다. 나중에 예수님을 통해서. 그게 찝찝한 거에요, 그게.
애초부터 선악과 없었으면 그런 뒤에 복잡한 뒤치다꺼리 없어도 되는데 선악과 심어놓고 “이걸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점이 찝찝하다 이 말이죠 그게. 이게 사랑인지 협박인지 공갈인지 잘 구분이 안 되는거에요. 왜 그러냐 하면, 이미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마귀와 한통속 범죄하고 난 뒤에는 인간들이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찝찝하게 되는 겁니다.
뭔 뜻이냐 하면, 심판이라 하는 것은 나로부터 하나님이 떨어져 나가는 게 심판이 아니고 심판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 그게 심판이에요. 중심을 하나님에 두고 내가 떨어져 나가는 거에요. 그게 심판이에요. 근데 중심을 내 한테 두고, 하나님이 떨어져 나간다면, “안 그래도 하나님 믿기 귀찮아 죽겠는데, 잘 떨어져 나갔다. 그럼 따로 삽시다. 하나님은 하나님 따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면 되지.” 이게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심판이 있다 해도 뭐 별로, “심판 받으면 심판 받지. 지옥 가서 내 혼자 살지 어차피 버린 몸.” 뭐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에요.
나로부터 하나님이 떨어져 나가는 게 심판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 중심으로 생각해가지고 내게 필요한 것이 주어지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내가 천국을 원하는데 천국을 내게 주는 게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한 것에 우리가 들어 붙는게 구원이에요. 하나님이 필요한 거에요. “아 나 죽어서 천국이 필요한데, 천국 주실꺼죠?”이게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뭘 필요로 하느냐?
거기에 본의 아니게 들어 붙은 게 바로 구원인 거에요. 그러니까 심판과 구원은 내 중심은 일체 없어요. 그럼 하나님은 뭐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해가 떠오르는데 그 해가 뭐냐? 의로운 해에요.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은 의로움입니다. 의로움. 의로운 해가 떠오른다. 의로운 해가 떠올라 버리면, 그럼 우리는 치료가 되고 구원을 받느냐? 아닙니다. 의로운 해가 떠올라 버리면 거기에 뭐도 같이 떠오르느냐 하면, 여기 치료하는 광선 되어있지만, 보통 ‘성경 1’ 해놓고는 광선이라 하지 않고 날개라고 되어있죠. 날개에서 치료하는 태양의 빛나는 능력이 나온다 해서 여기선 광선이라 했는데, 날개. 의로운 해에서 날개가 나옵니다. 날개.
의로운 해에서 날개가 나온다는 말은, 이게 무슨 취지로 이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 이게 말라기가 레위 언약에서 언급하거든요. 레위 언약은 제사입니다. 그럼 이 제사를 드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 앞에서, 옛날에 율법 처음 줄 때, 어디 앞에서 제사를 드렸느냐 하면, 언약궤 앞에서 제사를 드렸어요. 다른 장소는 용납이 안 됩니다. 반드시 언약궤가 있는 그 앞에서 모든 백성이 제사를 드려야 돼요. 대제사장이 물론 대표로 나가지만. 그러면 그 언약궤가 뭔데 그 앞에서 제사를 드려야 되느냐? 그 언약궤에 두 날개가 있어요. 천사의 날개입니다. 그러니까 이 날개가 있는 곳 앞에서 제사를 드려야 돼요.
천사의 날개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출애굽기 25장 18절에서 22절까지인데요.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찌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천사들의 기능이 날개를 쫙 펴진 날개를 통해서 어떤 기능이 나온다는 것을 여기서 예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날개 없는 천사는 천사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 언약궤에 있어서는, 그룹들이 날개를 폈어요.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이름 그대로 죄를 용서하는 장소, 지점.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이렇게 되어있어요.
속죄소라 하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은 뭐라 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거에요. 죄인에게는 율법이 주어지면 이게 심판받게 되어있습니다. 심판을 바닥으로 깔고 그 위에 천사의 날개가 쫙 펴있는 그 형태가 속죄소에요. 속죄소, 죄를 용서하는 거다 이 말이죠. 죄를 용서하는 기능이 날개에서 나온다는 뜻이거든요. 그다음에,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그러니까 천사가 하나가 아니고 왜 둘이어야 하는가? 두 개의 천사가 되면 거기에 between, 사이라는 게 성립이 돼요. 그 사이에. 간격 사이에서 천사 사이에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네게 명할 모든 일을 이스라엘에게 내가 이르고, 모세에게 말하고, 모세는 백성에게 이르게 된다.” 이 공간입니다. 이 공간.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사와 동거 생활하고 있는 거에요. 홀로 있는 인간들끼리의 집단이 아니고 천사가 단지 섞이는 게 아니고 천사가 그냥 도와주는 게 아니고 수호천사가 아니라 아예 천사 중심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왜냐하면 천사 중심, 그 두 천사 사이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요. 천사의 두 날개는, 물론 모형으로 제작했지만, 그 눈에 보이는 거죠. 그럼 천사의 두 날개는 보이는 인간들 집단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이에 연락책이 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분에게 연락할 수가 없어요. 어디 계시다고 연락을 합니까? 구체적인 방향과 그 절차와 경로가 천사와 백성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게 확정이 되는데 그 천사가 있는 언약궤로부터 백성 쪽으로 쏟아지는 게 뭐냐? 제사에요.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사. 그게 하늘나라 가는 문입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통로에요.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 길에서 율법을 줬거든요. 그럼 율법을 줬는데 율법은 복과 저주 두 개 다 가졌다 했죠. 그 율법을 통해서 복을 받은 방법이 뭐냐? 율법대로 살면 거기서 생산되는 게 뭐가 생산되느냐 하면, 공의, 의로움이 만들어져요. 율법을 통해서 의로운 율법대로 살면 이게 의가 돼요. 그러니까 인간의 양심, 인간의 선악 지식으로서는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율법대로 살아야 의가 돼요. 그 의가 사는 조건 하에 복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게 천사의 두 날개 사이에서 그 지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겁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오직 택한 백성, 사랑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지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말라기 당시나 그 전에 이스라엘 민족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켰느냐? 만약에 율법대로 못살면 의로움이 없는거고 의로움이 없을 경우에는 필히 뭐냐 하면, 저주 받게 되어 있어요. 멸망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심판받게 되어있어요. 로마서 2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망한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한다는 거에요. 인간이라고 생겨 먹은 자체가 하나님과 동행하든 천사와 동행하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든 간에 인간은 망할 수 밖에 없다는 그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는 천사를 통해서 동거하게 되어있고 이방인에게는 그냥 내놓은 자식으로 저주받게 되어있고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의인을 원하는데 인간에게는 의가 없어요. 율법이 있는 자도 의가 없고 율법 없는 자도 의가 없고요. 하나님은 아주 찾지만 정작 의로움이 없이는 하나님 찾아도 오히려 하나님 응답보다는 오히려 저주가 합당합니다. 심판이 주어지는 거에요. 그렇다면 원래 이스라엘에 그렇게 저주받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구원하시고 건져냈는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다른 민족 말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 날개, 이 말은 뭐냐? 이스라엘 백성은 저주, 이방 민족도 마찬가지지만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지만, 저주받기에 합당한 인간으로 태어난 거에요. 그런데 왜 이스라엘에게는 이방인도 저주받기 합당하고 이스라엘도 저주받기 합당한데 왜 이스라엘에게는 저주 받기 합당한 걸 알면서도 왜 율법을 줬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날개라는 것이 저주받아야 합당한 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율법을 아는 기회를 허용하는 그 자비하심이 날개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상당히 이야기가 복잡하죠. 복잡한데 출애굽기 19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심판받는 애굽 나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져냄을 당한 것은 날개 덕분이에요. 날개. 이 날개가 도대체 뭔데 그게 그들이 애굽 사람과 심판받지 않게 되느냐? 그거는 시편 57편 1절에서 그 본질이 확연하게 그 해답이 아주 깔끔하게 드러납니다. 뭐라 되어있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날개 그늘 아래서 피하리이다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뭐가 그리 깔끔하냐 하면, 모든 인간이 재앙 속에 있어야 마땅해요. 재앙 속에 있어야 마땅한데, 그 재앙이 주어지지 않는 조건을 날개가 품고 있고 그 날개의 혜택을 입은 자 만이 재앙을 면하게 된다는 거죠. 재앙을.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 말라기 이후에 마지막 때에 이 날개를 동원시키는 거에요. 심판받아 합당한데 이 날개를 통해서 심판에서 면제되고 모면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단 그 날개에서 뭐가 되느냐? 공의의 태양이니까, 의로움의 태양이 떠올랐으니까 그 날개는 뭐냐? 의로움이 우리 속 까지 날개의 능력으로 들어올때에 따라서 그 의로움이 우리로 하여금 저주가 복으로 바뀌는 혜택을 주는거에요.
자, 그렇다면 그 날개 아래 있는 그 의는 어디서 만들어지고 어디서 생산되고 그거는 누가 주어질 수가 있느냐 하는, 누가 제공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말라기 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 이스라엘 백성, 야곱, 야곱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거기에 같이 뛰어들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백성들은 의로운 자가 없어요.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뛰어드느냐? 인자, 예수님이 합세를 해요.
합세를 해서 그들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지금 율법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의가 없기 때문에 심판과 저주 가운데 있어요. 저주 속에 자기 백성을 반드시 건진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구현하기 위해서 인자, 메시아께서 이 저주 속으로 들어와 버려요. 저주 속으로 들어와서 누굴 건지느냐? 잃어버린 자를,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 사랑하기로 작정된 자가 잃어버린 자에요. 하나님의 점찍어놓은 택한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들 속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들어오게 되면 이거는 예수님께서 심판과 저주 속에 들어온 게 돼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은 환란 속에 들어온거에요. 환란 속에. 예수님이 환란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예수님이 환란 속에 들어왔다는 말은 인간의 능력과 인간의 힘으로 구원받는 길은 없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8장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이 영생 얻으러 왔다가 그냥 근심하고 돌아가는 그걸 보고 주님께서 부자가 하늘나라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제자들이 말하기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했어요.
그러니까 이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도 구원받고자 해도 구원 받을 수 있는 자가 없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제자들이 그 취지를 알고 “그러면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겠네요.” 하는 식으로 되물은 거에요. 그럴 때 주께서 하는 말이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 지금 이 제자들이 이 말을 믿어야 돼요. 자기 자신을 믿지 않아야 돼요. 나는 못해도 하나님은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데 그 당시 제자들은 이 구원, 하나님이 구원한다는 사실을 믿지를 못했습니다. 왜 믿지를 못했는가? 그 믿지 못한 이유가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되어있어요.
구원을 하실 때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 속에 오게 되면 이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겠다고 보증금을 우리 속에다가 집어 넣은거에요. 보증금을. 이 말씀을, 이게 얼마나 깊은 말씀이고 어려운 말씀인지 이거는 쉽게 말씀 드려야 가능할 거 같아요. 이거는 쉽게 예를 들어야 돼요. 52세대 나이 많은, 대구 시내에 수성구 복판에 있지만 너무나 오래된 수성아파트 허름한 수성아파트. 너무 오래돼서 콘크리트 떨어지는 그 아파트에 건설업자가 찾아가서 “이 아파트의 땅과 건물을 우리한테 주시면 확정지분제, 확정해서 여러분의 24평 새 아파트를 여러분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모든걸 우리한테 넘기시면 새 아파트에서 남은 여생을 살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했어요. 건설업자가. 이거는 조합이죠. 조합 해가지고 주택 재건설하는 것, 그걸 언급하는 거에요.
늦으막에 돈도 없는데 이게 웬 호강인가 싶었어요. 왜냐하면 새 아파트에 사니까. 그래가지고 이제 모든 걸 넘겼어요. 해가지고 그러니까 다 짓고 난 뒤에 아파트 한 채씩 나눠가시면 됩니다. 왜? 집 한 채가 당신 지분이니까 그 지분이 확정된 지분이니까요. 그렇게 하는데 쭉 하다가 갑자기 공사비가 올랐다 뭐 시공사가, 시공사는 뭐냐? 아파트나 오피스텔을 지으면서 거기에 대한 추가 개발 이익은 시공사 내가 가지는 조건하에 계약을 했는데 공사하다가 시멘트 값오르고 인건비 올랐다고 돈을 더 내래요. 추가 공사비를 92억을 더 내라고 하는데요. 추가 공사비를 내라고 하거든요. 그 70, 80된 노인들이 무슨 돈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돈 없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렇다면 확정 지분제 파기하고 도급제로 하겠습니다. 도급제가 뭐냐 하면, 시공사가 시공은 해주되 도급해서 시공은 해주되 모든 비용은 52세대 당신들이 알아서 다하세요.” 그리고 또 뭐가 있느냐 하면 PF대출 이자까지 나가야 돼요. PF대출 이자가 뭐냐 하면, 이게 프로젝트 파이낸스 하는건데 큰 부동산 개발할 때 돈 없잖아요. 돈 없으니까 금융회사한테 가서 이거 개발되면 이익 있으니까 그 이익을 담보로 해서 급조하듯이 급전으로 금융회사 돈을 빌리는 거에요. 주로 새마을 금고가 거기에 많이 걸려들어요.
그러니 그게 PF인데 이게 이자가 높아요. 왜냐? 그만큼 위험부담이 많기 때문에. 근데 그걸 누가 떠안아요? 그 52세대가 다 떠안아라는 거에요. 다 떠안아라. 그리고,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우리는 못한다” 하니까, 공사를 중단했어요. 공사 자체를 중단해버렸어요. “그럼 나도 모르겠다.”하고 공사를 중단했습니다. 그럼 공사 중단할때에 이 노인네들이 어디 가느냐? 각자 5천만원 정도 해가지고 전세 얻었는데 전세 쫓겨 나가게 생겼어요.
이게 구원하고 무슨관계가 있느냐 하면, 인간들이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 힘으로 하늘나라에 아파트 못 삽니다. 어떻게 하나님 해주세요.” 할 때, 여기서 사기 구원이 주어져요. 사기 구원. “이렇게 이렇게 하면 구원 해 줄게. 네 모든걸 내 한테 맡기면 내가 너를 위해서 피흘려주면 그 피 해가지고 니는 그냥 천국에 그냥 산다.” 이게 사기 구원이에요. 중심이 뭐냐 하면 내 구원 중심이에요.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구원이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라고. 내 중심이 아니라고요.
교회치고 사기 단체 아닌 교회가 있겠어요? 구원을 미끼로 사기를 치는거에요. 이 수성아파트는요 말로, 서류로 했잖아요.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증금으로 집어넣은 거에요. 성령의 보증금을. 그런데 이거 뭐 시공사가 “내 배째라.” 하고 추가금 내야 된다고 하고 이자 물어내야 되고, 그것도 안되니까 공사 중단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게 수성아파트 노인네들이 뭐냐? “우리 돈, 나도 내 몰라, 물어내. 이거 계약 취소.” 이렇게 버티고 있는데 문제는 성령을 우리 속에 계약금으로 넣어줘 버리면 이게 토해낼 수가 없어요.
왜? 예수님이 피로 준 성령이기 때문에. 예수 믿고 편안하게 살려고 했는데 예수 믿고 집이 거덜나게 되어있고 “내 이럴 것 같으면 나 천국 안가. 나 교회도 안 나올거야.” “교회 나오다 안 나온 사람 많잖아요. 이렇게 힘들고 이렇게 어려울 것 같으면 나 안 할거야. 물어내. 어어 나 처음부터 예수 안 믿었다. 나 교회 안 다닌다. 세례한 거 다 무른다.” 이게 안 되는 이유가 성령께서 보증금을 줬는데 그 성령이 뭐냐? 바로 히브리서 10장 28절에,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저주받을 자가 구원에 대한 욕심은 그거는 선악과 따먹는 욕심과 똑같은 욕심이라는 거에요. 선악과 따먹을때에 이익 볼려고 따먹었잖아요, 아담이. 그 아담의 자손들이 누굽니까? 오늘날 인간들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천국 이야기 하니까 전에 아담처럼 선악과 따먹는 그 심보로 구원을 따낼려고 예수님을 믿었던 거에요. 근데 그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는 것이 욕심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거에요, 인간들이.
야고보서 1장 14절 15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인간치고 욕심이 한순간도 안 나오는 순간이 없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예수 믿고 천당가려고 하는거에요. 그러나 진짜 구원받는 사람은 주님 쪽에서 와서 주님 쪽에 들어붙는거에요. 주님 쪽에서 온게 뭐냐? 환란 받은 예수님이에요. 환란 중의 예수님.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서 안 오셔도 되는 이 저주받은 이 저주를 감내하시고 저주 속에 자기 백성 끄집어내기 위해서 십자가 죽는 환란까지 그 고난까지 받으시는 그분이 그분의 그 영이 보증금으로 들어가 있다는 거에요. 우리 안에 보증금으로요.
계약 끝났어요. “물어내” 안 됩니다. 없어요. 이제는 우리의 목숨이 날아가고 병이 아프고 치매 걸리고 재산 거덜나도 그게 구원이에요. 그게 복이고. 왜? 이건 주님의 의지지 내 의지하고 상관없기 때문에. 그게 바로 뭐냐? 공의로움이라는 거에요. 그게 공의로움이라는 거에요. 공의로움이고 그 공의로 우리 안에 그 성령이 박혀있으니까 우리는 뭘 해도 주저없이 할 수 있고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는거에요. 왜? 내 인생이 아니니까. “내가 어떻게 어떻게 조심스레 살면 천당 간다.” 이런 게 없어요. 그냥 보증금이 보증금 답게 십자가가 십자가 답게 작동하는거에요. 우리 안에서. 어떤 경우라도 계약이 깨지지 않는 것.
히브리서 6장 6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어요.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계약금은 물어주면 돼요. 이건 주님의 자기 일이에요. 구원은 우리 일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일이라고 다 확정 지으면서 자기 일이라고 단정지으면서 자기의 성령을 우리에게 집어넣었기 때문에 보증금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건 빼도 박도 못하고 주님의 사랑에 포로된 자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에. 한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 그 사랑이 우리한테는 죄밖에 지을 수 없는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이 다 공의로움이, 공의로운 의로운 해가 우리 안에 치료를, 안에 날개에서 나오는 재앙을 벗어나서, 재앙에서 벗어나서 독수리 날개로 구원하듯이 자비로움, 사랑으로서 날개에서는 사랑이 우리한테 박혀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살아가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를 것을 권장합니다. 제가 노래 가사를 적어왔어요. 영어로 되어있는데 좀 어려울 거에요. “You are my sunshine.” 당신은 나의 햇살. “My only sunshine.” 나의 유일한 태양. “You make me happy when skies are gray” 날씨가 흐릴 때도 당신은 나를 행복하게, 자유롭게 했습니다. “You'll never know dear, how much I love you.”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Please don't take my sunshine away” 제발 이 태양을 나에게서 앗아가지 마소서. 집에 가서 You are my sunshine. 그 노래 한번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다 생각했습니다. 그게 사기 구원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