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이 섬김
2024년 9월 18일 본문 말씀: 말라기 3:13-15
(3: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3: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3: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선지자를 통해서 말을 건네는 민족은 이스라엘, 즉 유대민족입니다. 말을 건넨다는 것은 의미를 주고 받고가 가능한 관계라는 겁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율법이나 선지자의 말씀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말을 건네시고 그 반응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민족은 이스라엘 역사의 끝자락에서 끝까지 남아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견해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견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대적’에 관한 겁니다. 하나님의 대적이란 그동안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민족이라고 그동안 이스라엘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의 끝자락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대적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견에 대해서 유대민족은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숨기고 있는 본심을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호소입니다. 인간들이 호소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쪽에서 먼저 호소하시는 겁니다.
왜 인간들은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못하는 걸까요? 그것은 시편 116:11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 그렇습니다. 인간들은 처음부터 거짓말장이었습니다. 인간은 거짓말장이가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상에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출생 자체부터 이미 망해야 될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안에 시작과 끝, 모두가 응축되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에게 건네게 되면 그 건넴을 받은 인간은 자신 안에 자신의 최초와 최후 모두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인생이란 바로 응축된 시작과 끝을 발산하고 펼쳐보이는 생애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행위의 반복입니다.
행여 자신이 하나님 믿음으로 어떤 효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면서 꾸준히 하나님을 믿고 섬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서 나름 성실하려고 해도 자신이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러합니다.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
맞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대했던 바입니다. 거짓말쟁이인 인간으로서 마땅히 도달하고마는 결과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대적자였던 겁니다. 그동안 꾸준히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라는 허무한 결과에 당도하지 않기 위해서, 뭔가 하나님쪽에서 성의를 표하기를 기대하면서 믿었지만 결국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에 당도하고 마는 겁니다.
성도가 되었는데 그냥 성도가 아니라 교회에 착실한 교인이 되었던 끝으로 내려지는 결과는 한결같이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입니다. 그렇다면 불신자가 성도에게 다음과 같이 의문을 가지고 물을 수가 있습니다. “소용없는데 하나님 왜 믿어?” 성도는 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성도는 비로소 자기 자신이 거짓말쟁이로 태어난 인생을 그동안 살아온 것에 기뻐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저로 하여금 하나님 믿는 것이 소용있는 일이 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가 저주받은 자라는 사실을 왜 굳이 저에게 알려주시는 겁니까?”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건네주시는 그 말씀의 취지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과 같은 마음, 같은 시선을 가진 한 식구가 되고 한 가족이 되고 한 울타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저주받는 같은 울타리의 성도를 껴안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곧 자신이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사실을 아는 자만이 구원과 생명이 보인다는 겁니다. 즉 내가 오래 살아남아야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끌어가시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맹세입니다. 노아 홍수 아래서 구원받은 자는 노아와 세 아들과 그들의 가족입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에서 저주가 발생됩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창 9:24-26) 홍수에서 구원받았다고 해서 저주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라지는 것은 인간들입니다.
영원한 것은 저주와 복입니다. 지금 말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멸망 이후의 하나님의 말씀을 건네 받을 자는 누가 될까요? 신약에 오면 하나님의 영광은 비참한 저주와 결합이 됩니다.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목자에게 비친 영광은 실은 그 영광이 아기 예수님이 출생에서 비롯된 겁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산의 영광은 예수님께서 처참하게 망가지는 십자가 처형 공간과 결합에서 비롯된 겁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너무 좋아서 거기에 머물겠다고 자처했지만 막상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이고 나머지 제자들은 황급히 현장에서 피해 숨었습니다.
시작과 끝, 그리고 최초와 최후는 이제 예수님 한 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7-10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인생에게 있어 굳이 실수나 실패 같은 것, 성공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뭘 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인간은 사라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나타나고 지속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과 약속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 잘 알아서 주님 오신다는 약속만 기대하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외에 다른 현실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강-말라기 3장 13-15절(헛되이 섬김) 24091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3장 13절에서 15절까지입니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아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대적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이 말라기는 줄곧 하나님을 믿어왔던 그 이스라엘 민족 유대민족에게 마지막 멸망되기 전에 마지막 예언을 한 것이 바로 이 말라기 선지자를 보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쪽에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거에요. “너희들 니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된다.”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너희들은 남의 백성이 아니라는거에요. 너희들은 내 백성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줬고 그 율법을 너희가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너희들 민족만이 나와 대화상대가 되는 겁니다. 대화상대가 된다는 것은 한 울타리가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부부가 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되는 것은 대화가 될 때에만 부부가 돼요. 대화가 안 되는데 부부 관계가 될 리가 없어요. 부부가 이루어질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식구처럼 여겨서, 한 가족처럼 여겨서 내가 준 이야기, 그 이야기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을 나타내고 어떤 식으로 그게 하나님 앞에 자기 느낀 것을 이야기하는지를 주고받는 그 관계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선 허락하셨습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이런 호소도 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내 너희들 안다. 특별히 안다.”는 조건하에 이 말씀을 주신거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를 위해줬기 때문에 하나님의 적은 우리 민족이 아니고 다른 민족이 하나님의 적이다”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적은 바깥도 물론 적이지만, 내가 너희를 아끼지 않고 말씀을 줬던 너희들이 하나님의 적이다. 나를 대적하는 적이 된다.” 근데 그 적이라도 어떤 점에서 다른 민족과 틀리냐 하면, 다른 민족은 아예 말도 통하지 않으니까 입 다물고 있지만, 너희들은 나를 대적하면서 뭔가 중얼거리면서 할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하나님의 대적의 실체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했습니까?” 13절에 나오죠.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했습니까? “하나님이여 왜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 취급합니까? 우리가 무슨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까?”라는 그러한 반응을 하나님 쪽에서 의도적으로 유도하신 거에요. 하나님의 적이 뭔가는 이방민족을 통해서는 모르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고 말을 건냈던 그 유대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대적의 본 모습, 본질에 대해서 나타나게 하셨던 겁니다. 거기에 대 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4절에 보면, “하나님 섬기는 것이 헛되다.” 하나님 섬기는 것이 헛되다는 거에요. 맞죠. 맞잖아요. 이게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하나님 섬기는 것이 헛되잖아요. 이스라엘이, 유대인이 왜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 섬기면 다른 민족보다 더 나을 것이다라는 것을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시험을 해 온 거에요. 테스트해 온 겁니다.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추가되는 나의 이익은 뭘까를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자동적으로 그걸 시험해 온 겁니다.
15절 끝에 보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나님을 테스트해서 그 테스트하는 의도가 하나님 덕분에 우리 인생에 화를 미칠 것을 저주가 오는 것을 미리 커버할 수 있지 않은가? 행여 그렇지 않은가? 행여 하나님의 덕을 볼 수 있지 않은가 해서 그들은 끈기 있게 인내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테스트하고 테스트해 온 겁니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테스트 한거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 쓸모가 있고 보탬이 있는가를 테스트해 온 겁니다. 근데 그들은 이미 테스트하면 테스트할수록 점점 그들은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확신이냐 하면 14절, 하나님 섬기는 것이 헛되다. 하나님 섬기는 것은 아무 쓸데 없는 일이며 헛된 짓이다. 맞죠. 그걸 이제 알았어요, 그래? 그걸 꼭 시험을 해봐야 아는가요?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의 유일한 간증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섬겨봐야 소용없고 헛되다.” 이 간증보다 더 최고의 간증은 없습니다. 그동안 인간들이 교회 나와서 하나님 섬긴 것은 하나님 섬기는 것이 헛되지 않을 수 있도록 속으로, 속으로 하나님께 부탁한거에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 섬길 테니까 제발 하나님 섬긴데 아무 짝도 쓸모없네.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도록 하나님 쪽에서 좀 도와주면 안 돼요?” 이런 식으로 애걸복걸했는데 결국 인간 쪽에서 증명하고 내린 결론은 하나님 섬기는 것은 다 부질없고 다 헛된 짓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참 저는 이거보다 성경에서 더 시원한 말씀이 또 있을까하는 생각. 이것 받아들이면 성도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경 자체가 시편 116편 1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건 성경 자체가 이야기하는거에요.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에요. 인간이 자기가 거짓말쟁이인 것을 알지도 못한 형편에서 자기는 “거짓말쟁이일 순 없어 나는 항상 진실만을 추구하니까”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이여 내 섬긴 값은 어느 정도 있어 줘야 그렇지? 하나님 존재하지 하나님은 뭔가 복을 주시지 라는 것이 증명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1년 섬기고 2년 섬기고 3년 섬기고, 58년 6개월 동안 섬기고.
그래서 내린 결론은, “헛것이다. 다 헛거야.” 하나님 쪽에서, 박수를 보냅니다. “니가 이제 이야기가 통하구나. 이제 니가 이야기가 통하는구나 이제.” 정말 이거 하나님 찬양해야 돼요. 하나님의 작전에 대해서. 뭐를 노리고 하나님 믿었어요, 그래? 이 거짓말쟁이가. 인간은 처음부터 거짓이 지배하는 세계, 거짓된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태어났어요. 그걸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고 해요. 악마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쟁이의 심보를 가지고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고대하는 것, 기도하는 것, 기대하는 것, 소망하는 것, 이 전부 다 출발점이 거짓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 속에다가 뭘 집어넣는가? 말씀 속에 시작과 끝을 응축해서 집어넣었습니다. 최초와 최후를 응축해서 거기다 집어넣었어요. 저는 집어넣을 때마다 즐겨 드는 예가 뭐냐 하면, 대통밥이에요. 대통밥. 대나무 마디 끊어서 밥을 꼬깃꼬깃 잡곡밥을 집어넣잖아요. 대통밥 너무 써먹으니까 식상하면 그럼 바꾸겠습니다. 성냥갑. 성냥갑 안에 말씀으로 다 집어넣어요. 그 집어넣는 게 뭐냐? 너희는 거짓말쟁이다. 이걸 집어넣는 거에요. 거짓말쟁이가 기대하는 하나님, 거기에 대해서는 거짓말이 나와야 되죠. 거짓말이 나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역사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에요.
로마서 3장 18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그 대목을 쭉 이야기하면서, 18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애초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시험의 대상이니까요. “두려워할까? 말까? 이건 내쪽에서 테스트하고 내가 결론을 내리리라.” 이게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본인을 몰라요. 본인은 모르는데 고맙고 친절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르는 것에 대해서 오늘 말라기 3장 13절과 15절을 통해서 정확하게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 것을 하나님 쪽에서 알려줍니다.
“너희들은 나를 테스트하는 존재고 그 존재의 결론은 너희들 입에서 분명히 그 결말을 이야기했다.”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 그건 하나님이 원했던 바에요. 하나님이 그걸 원했던 겁니다. 그걸 그래 58년 동안 체험할 것 뭐 있어요, 교회 두 번만 나오면 다 아는 건데. 그리고 14절 거기서 계속 보면, 하나님을 이제 기쁘게 해준다고 스스로 자기를 슬프게 “하나님 죄인입니다. 하나님 저 애통합니다. 저 회개합니다.” 슬픈 척을 하면서, 슬픔이 뭔지도 몰라 막 찡그려가면서 이렇게 하면서 이렇게 해놓고는 그래도 하나님 쪽에서는 아무 낌새가 없잖아요.
낌새가 없으니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 하리요.” 회개하고 뭐 가슴 치고 금식한 게 우리한테 무슨 유익으로 돌아왔느냐, 돌아온 게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또 하나님께서 박수를 치면서, “이제 니 자신을 알겠어?”라고 하는 거에요. “또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교만한 자가 복되다,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이렇게 되어있어요. 하나님을 안 믿고 용감하게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 창성이란 말 알아요? 창성교회도 있어요. 번창하는 것. 악을 행하는 자가 번창하는 것, 맞지요.
그거 맞는 말이잖아요. 이재명이가 어디 하나님 믿어요? 정몽규 축구협회 회장이 뭐 나가라 해도 안 나가는데 하나님 믿습니까? 전도사 했으면 국회의원 하면 돼요. 성경 믿는 것은 탈레반이다. 그런 소리 하면서. 성경을 믿는 게 탈레반이랍니다. 그 말이 맞죠. 국회 청문회 하면서 전도사 출신이 성경을 믿는 것이 탈레반이라는거에요. 얼마나, 보세요.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에 대해서 뭐 그것 시험할 것도 없어요. 매일 보는거에요. 매일 보는거.
이 말은 하나님 뜻은 이거에요. 너희들은 이미 태어난 것부터 망했다는 겁니다. 태어난 것 부터 망했다. 이제 하나님 쪽에서 시험하는 것은 인간은 자기가 망했다는 것을 인정을 안하고 있거든요. 하나님도 믿고 뭐 예수님도 믿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저 인간 정신 못 차리지, 그래 믿어봐. 한 50년, 60년 동안 교회 다니면서 믿어봐.” 성경 한번 100독 하면서 믿어봐. 결국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뭐냐?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 그래. 바로 그거야. 하나님 믿어도 소용 없는거에요.
그게 성도가 이야기할 수 있는 마지막 간증은 그것뿐이에요.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 이것 보다 더 대단한 간증은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에요. 그러면 이제 불신자들이 이야기하든지 안 그러면 그냥 꾸준히 교회 나왔기 때문에 그냥 주일되면 짜증나지만, 또 한번 테스트 하는, 혹시나 또 도와줄까 싶어서 “테스트 한번 더해보지 뭐. 여기서 중단해도 되는데. 그래도 나도 끈기가 있는 인간이라. 교회 나와서 도와줄까. 또 혹시 구원시켜 줄까 한 번 나가보자.” 해서 이렇게 쭉 나오면서 스스로 이야기해요. 소용없는데 왜 여기서 관두지 않는가?
그럴 때 성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도. 아까 이야기한건 교인이고, 성도는 이렇게 합니다. “그러게 말이야.”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 이 자체를 나는 복음으로 사랑하고 있거든.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는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왜 하나님 믿어도 소용 없는게 그렇게 기쁜 소식이 될까요? 그동안 내 태어난 내 이 인간이라는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얍삽하고 얼마나 거짓말쟁이인지 하나님을 이용할 그러한 악마적 의식을, 사고방식을 가지고 여태껏 내가 살아왔다는 거에요. 말라기 3장을 통해서, 이제는 구약의 끝날을 통해서 비로소 발견한 거에요.
그러니까 이 대통밥이나 성냥갑에 말씀 하나를 가지고 집어넣어도 이거는 최초, 시작과 끝을 한꺼번에 응축해서 말씀 안에 집어 넣은거에요. 말씀 안에 시작과 끝이 같이 있고요, 그 안에다가 하나님이 자기 존재 성도 존재를 거기다 같이 압축해서 말씀의 세계 속에 집어넣는거에요. 말씀 속에 경험하게 하는거에요. 내가 곧 시작이고 내가 곧 끝이 되는 거에요. 내가 엉터리라는 것이 내가 망하기 위해서 태어난 게 시작이고 결국은 망하는 자의 입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해서 망해야 마땅합니다”라는 나의 최후의 모습을 말씀 하나라도 같이 느끼고 같이 그게 경험되도록 드러나도록 조치하는 이 능력이 바로 말씀의 능력이잖아요.
그냥 말씀이라는 대통밥안에 그냥 들어가는 거죠. 들어가 있죠. 순간이죠. 인생은 순간이고 순간이지만 그 안에 나의 시작과 나의 끝은 그 안에 같이 있고, 동시에 주님의 말씀의 시작과 주님의 말씀의 끝도 거기에 함께 있는 겁니다. 다시 설교를 해보겠습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한 울타리에 있는 거에요. 한 울타리. 사실 오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점이에요. 말씀을 건냈다는 것은, 대화 대상으로 말씀을 건냈다는 것은 그 말씀과 내가 어쨌든 간에 운명을 같이 하게 되었다는거에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저주한다는 것은 그 저주에 말씀을 주신 이 하나님 “나도 같이 들어갈 게, 같이 합류할게”라는 뜻이에요. “같이 합류할게.” 니가 말씀 지키고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나 이걸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존재는 나라는 육신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악마에 의해서 망가졌기 때문에 평생 살면서 내놓는 것은 거짓말하는, 주님의 대적의 모습으로 평생을 보여준다는 이것, 이것 하나만 우리가 보여줄 수 밖에 없어요. 문제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육신을 보여줄 수 밖에 없는 그 육신을 하나님은 자기 식구로 삼았다는 거에요.
그걸 말씀을 주셔가지고, 말라기를 주시고 로마서를 주시고 갈라디아서를 주시면서, 데살로니가 후서 1장을 주시면서 그것을 한 식구처럼 여겼다는, 한 식구처럼. 방금 제가 거론한 로마서 2장, 갈라디아서 3장, 데살로니가후서 1장, 차례차례 한번 보겠습니다. 로마서 2장 12절에 보게 되면,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율법 없던 자도 심판받고, 율법 있는 자도 심판 받고, 율법은 다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되어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주님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말라기도 율법이잖아요. 구약성경 전체가. 구약 전체가 율법으로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우리가 저주받기 합당하다는 것을 아는 자, 아는 자는 이미 저주 아래에 있는자에요. 율법 아래 태어날 때부터 저주 안에 있었던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보면,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안에 가두었다. 죄라는 저주라는 대통밥 안에 다 집어넣었다는 뜻이에요.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게 되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저주 아래에 있다는거에요.
이게 우리가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주님께서 말씀을 줘서 한 울타리로 간주했던 사람에게만 특별히 우리 자신이 저주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니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어떻게 돼요?”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이미 저주 아래에 있기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다음 질문이에요. 왜 저주 아래에 있는데 저주 아래에 있다는 이야기를 왜 저한테 해주십니까? 하는거에요. 왜 남들에게 이야기 안하고 저한테 해주십니까 하는 이야기.
그것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사라지지만, 복과 저주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사라져요. 그러나 복과 저주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의 세 아들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부터 9장까지 사람들은 흥미 잃지 않고 잘 봐요. 인류의 최초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어떤 형편에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지금 레위기 앞 까지는 잘 나가요. 레위기 와서 그다음엔 잠 와서 덮어버리지만. 창세기까지는 봐요. 창세기 9장에 보면서 사람들은 의문점을 낳습니다. 왜냐하면 노아 방주에서 살아남은 자가, 흔히 말하는 구원 받은 자가 몇 명이냐 하면, 여덟명이고 그 여덟명 중에 세 명의 아들이 다 들어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선입관이 뭐냐 하면, 방주 안에 세 명의 아들이 다 들어 있으니까, 설마 세 명의 아들 가운데서 저주 받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갖게 돼요. 그런데 창세기 9장 25절 27절에 보면, 3명의 아들 가운데서 함과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요. 9장 25절,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이렇게 해서 복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왜 홍수에서 세 아들 다 구원받아 놓고 구원받았으면 저주는 없어야 되잖아요. 근데 구원은 받았는데 구원 가운데 저주 받는자가 발생 되었다?
갑자기 이 대목 보면서 본인에게 확 위기가 오죠. 구원받아 놓고 저주받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을 찾아가 가지고 묻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그냥 넘어가요. 왜 넘어 가느냐? 성경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이유는 성경 말고 다른 현실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다른 현실에. 성경 속에 세계는 그냥 참조할 뿐이지 자기가 돈 벌어먹고 사는 세계가 이게 진짜 현실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성경은 “넘어가, 넘어가, 넘어가, 넘어가.” 맨날 넘어가요.
맨날 탁구 치나, 맨날 넘어가요. 58년째 넘어가요. 안 물어요. 묻질 않아요. 오히려 교인이 목사님한테 성경 물으면, “니 내 말 안 들으면 쫓겨 나간다.” 이런 식으로. “니는 항상 곤란한 질문만 하더라” 뭐 이런 식으로. “그냥 믿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윽박지르죠. 노아 가족 중에서 방주에서 나왔던 사람은 8명이 방주에 실린 게 아니고 약속이 실린 거에요. 그 약속 안에 저주도 살아있고 축복도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런 노아 세 아들은 뭐냐? 사라지는거에요. 사라지는 것. 잠시 실렸다가 사라지는거에요. 인간은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지는 존재에요. 인간은 사라져도 하나님의 저주와 하나님의 복은 계속 살아있어요.
그 계속 살아 있는걸 가지고 뭐냐? 뱀의 후손이고, 계속 살아있는 것을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겁니다. 약속입니다. 그 둘을 합쳐서 약속이라 하는거에요. 아까 질문 다시 하겠습니다. 우린 이미 저주 안에 태어나서 어떻게 해도 저주에요. 근데 왜 내가 저주받은 것을 왜 저보고 저주받았다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는거에요. 그것은 저주의 주도권이 예수님한테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한 식구가 되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예수님과 한 식구가 되기 때문에, 우리의 식구 되는 예수님께서 “니 저주 받았다, 니 죄인이야.”라고 말을 건내면서, 주님께서는 그 저주받은 죄인을 자기 품으로 안아 버리는 거에요. 안아서 내 저주받은 것에 대해서 섭섭해할 필요 없는 것이 나를 안은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가 지옥 갈 저주받을 지옥을 십자가에서 함께 껴안고 받은 거에요, 저주를. 그러니까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하죠. 주님마저 저주받았는데.
그러고 난 뒤에 데살로니가후서 1장 7절에서 10절을 보겠습니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게 데살로니가 1장 7절에서 1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도 우리한테 건내는 거에요. 그러면 이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인생을 잘 살았다. 의미 없어요. 못살았다. 의미 없어요. 성공했다. 의미 없어요. 실패했다. 의미 없습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후서 1장 7절에서 10절만 기다리면 되는 거에요. 인생 참 편하게 되었어요. 아니 저주받은 자가 무슨 성공이 있고 저주 받은 자가 무슨 새삼스럽게 실패가 있습니까? 우리가 실패라 하는 것은 실패 안 할 수도 있었는데가 있을때만 실패라는 게 의미가 있는데 인생 자체가 실팬데 무슨 실패가 있습니까?
이래도 실패고 저래도 실패고, KTX 시간 놓쳐도 실패고, 생일 뒤에도 실패고 생일 남 안 알아줘도 실패고. 생일 케이크 부는데 다른 사람이 후 불어도 우리는 데살로니가 1장 7절에서 10절만 기다리면 되는 거에요. 10절만. 어떤 사람은 “당신은 췌장암 걸려 가지고 일찍 죽으면 우야노.” 일찍 죽고 안 걸리고 백 살 산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데살로니가후서 1장 7절에서 10절만 있으면 되죠.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요 도대체?
주님이 건내는 것은 주님에 의해서 다 이루어질 하나님의 자기 약속이에요. 자기 약속. 이스라엘 백성, 이 구약에 말라기 3장을 우리가 보고 있지만, 그 전에 얼마나 두꺼운지 몰라요. 온갖 이야기가 다 있어요. 온갖 이야기가 다 있는데 그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이겁니다. 하나님의 맹세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에게 주었는데 이스라엘이 도중에 자꾸 다른 길로 샙니다. 약속으로 가야 되는데 인간이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나님 도움 아니었으면 우리는 애굽에서 못 나올 뻔 했습니다. 다 내가 이렇게 잘 먹고 잘사는 것은 하나님의 덕입니다.” 말은 그렇게해요. 말은 하면서 자기의 본색은 뭐냐? 하나님 이용하기였습니다.
나 성공할 가치 있고 나 실패 하면 안돼, 나 꼭 성공해야 돼. 그 정도로 나는 의미 있는 존재야. 이것을 하나님의 약속을 받으면서도 그 약속의 뜻도 모르고 그걸 계속 유지해왔던 겁니다. 그 많은 예중에서 한가지 예를 들게 되면, 민수기 32장 1절에서 5절,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더라” 있었어요. 근데 가축 떼가 있었는데 이제 약속의 땅을 곳 앞두고 이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보니까 들어가는 입구에 요단강 건너가기도 전에 뭐 땅을 본즉,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 목초지가 나온거에요.
그러니까 갓지파와 르우벤 지파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요단강 안 갈래요.” 이런 말이 나옵니다. 5절에 보면,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여기에 누가 합세하느냐? 므낫세 2분의 1 지파도 여기 합세해요. 그러니까 그들은 요단강을 굳이 건널 필요가 없다는거에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요단강을 왜 건넙니까? 우리 가축 나눠서 가축 잘 먹이고 우리 거기서 생존하게 되면 되죠. 이게 바로 그들은 하나님을 좋은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고 소망하고 사랑하면서, 실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가 저주 받은 자 아님을 측정하고 확인하고 싶었던 거에요.
“나 가치 있어, 나 저주 안 받아도 될 정도야.” 그걸 확인하고 싶은 거에요. 그게 바로 이 말라기 이전에 민수기에 이미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요단강을 건너간다는 하나님 쪽의 약속의 취지는 나 모르겠고 나는 내가 하나님을 찾을 때 기대했던 욕망 있잖아요. 그 욕망만 달성하면 난 오케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말씀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심이었어요. 자기는 헛되이 사라지는 것은 자기가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게 구약이거든요. 그럼 신약에 오게 되면, 이제 구약 이걸로 말라기로 끝났다 합시다. 신약 복음은 하나도 없다고 칩시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만약에 말라기로 끝나고 “그래서 유대인은 이제 망했다.” 끝나면 그 뒤편에 우리보고 뭘 신약을 써라고 하면 뭘 어떻게 쓰겠어요? 이스라엘은 그렇게 철딱서니 없어서 망했지만,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똑똑해서 믿음이 좋아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겼다. 뭐 이렇게 쓰고 싶죠.
그게 소설이잖아요. 그게 바로 팩트가 아닌 환상이죠. 망상이죠. 신약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목자가 광야에서 밤에 양 떼를 먹일 때에 하늘의 영광이 나타났어요. 근데 그 하늘의 영광이 나타날 때 영광이 어디서 근거해서 영광이 나타났는가, 그걸 표적이라 하고요. 천사가 말하기를, “니가 이러한 영광을 맛보는 그 근거가, 출처가 표적인데 그 표적을 보여줄게” 강보에 누인 아기를 보리라 했습니다. 짐승들이 태어나는 그 마굿간, 마굿간인지 양의 우린지 거기서 태어난 아기가 천사가 목자에게 준 영광의 출처가 되는거에요.
초라한 탄생과 온 하늘이 훤하게 밝아진 영광과의 결합. 이것이 하나님이 신약에서 마련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또 하나 이야기하면, 마태복음 11장에 변화산 이야기합니다. 모세, 엘리야, 예수님이 해같이 빛났어요. 해같이 빛나게 했던 그들, 그러나 그 영광, 하늘의 해같이 빛난 그 영광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처형 장면과 이게 결합이 돼요. 그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사람들 도망 다갔어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있을 때는 베드로가 도망을 간게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여기가 좋사오니”하고 이렇게 그 자리를 못내 아쉬워하면서 그 자리에 머물고자 했어요. 근데 십자가 질 때는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고요.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우리는 죽어야 된다는 거에요.
사도행전 9장 36절에 보면,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이렇게 되어있어요. 병들어 죽었다. 지금 하나님께서 선행을 많이 하는 그 여자가 참 선행해서 예수님 증거 한다. 이걸 지금 하나님이 약속으로 그 도르가한테 준 것이 아니고 선행을 많이하고 구제를 많이 해도 죽어야 된다는 거에요. 이게 그 여자는 원래 죽어야 돼요. 지금 선행 많이 한다고 그러니까 그 사람은 괜찮다. 이렇게 보면 안 돼요.
죽어 마땅한 인간이에요. 그런데 베드로가 와서 죽은 자를 다시 살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뭐냐? 니가 저주 안에 있는 자 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한 울타리, 한 식구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 하는 거에요. “니가 제발 저주 안에 있으면 비로소 니가 부활이 보일 것이다.” 하나님 58년동안 믿어도 소용없다는 이야기를 그걸 즐겨 기쁨으로 그걸 간증하란 말이죠. 아무 짝도 소용없더라. 아, 너무 기뻐. 이렇게요. 이게 바로 내 본모습이고, 나는 바로 사라져야 될 인간이 앞으로 계속 살 것처럼 착각해 가지고 마귀의 마음이 들어서 나는 그 생각을 그게 내가 애초부터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고백한다.
착해도 소용없더라 안 도와주더라. 뭐 더 시험할 것도 없어요. 모든 인간은 이렇습니다. 그래야 되고요. 마땅하고. 사도행전 20장 7절에 보면, 이 말씀 잘 들어야 돼요. 전에부터 내 하고 싶었던 이야긴데, “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강론을 할 때 밤새도록 한거에요. 밤새도록.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사도바울은 성령으로 인하여 밤새도록 강론하고 유두고는 자불고있었고, 졸고 있었고,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이거 무슨 하나가 끄떡끄떡 쓰러지는걸 보고도 무슨 고집이 이런 고집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죽었어요.
강론하는 사도바울도 죽고, 강론 듣던 유두고도 죽고, 그런데 사도바울이 살렸습니다. 이건 뭐냐하면, 뭐 말 잘해서, 설교 잘해서 살린 게 아니고 지금 이 현장이 강론 듣다가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는 이 현상까지, 말씀이 작동하는 현장이라는 거에요. 말씀이 작동하는 현장. 유두고가 말씀 듣고 안 살아나도 괜찮아요. 안 살아나도 천국 가요. 그 길로 천국 가도 되고 살아서 다시 살아서 천국가도 되고, 중요한 것은 그때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은 사라질 뿐이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되고 주님의 복음은 계속되고, 산자나 죽은 자나 데살로니가후서 1장 7절에서 10절 말씀. 산자나 죽은 자에게 주님께서 영광중에 천사와 함께 오실겁니다. 그러면 됐죠. 그러면 됐잖아요. 교인 몇 명 왔느냐, 그게 무슨 문제겠어요.
두 사람 와서 교회 되겠나.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두 사람이든 한 사람이든. 어차피 우리는 죽을 인간이잖아요. 약속만 살아있으면 되잖아요. 하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하셔서 살아 계시고 그 죽었다가 살아난 그 복음을 계속 전하는데 있어서 때로는 우리를 더 살게 하고 때로는 우리를 생각보다 일찍 죽게 하고, 이래도 주님의 성공이요, 저래도 주님의 성공입니다. 그래서 이제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성도는 뭐냐? 자기를 지키는 자, 성도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서 복음을 믿는 자, 성도 아닙니다. 자기 지키기 위해서 복음 믿는게 무슨 성도겠어요. 그럼 뭐냐? 그냥 복음이 나와요. 뭐를 지키는 게 아니고, 복음이 그냥 나온다니까요. 꾹꾹 눌려서 나오는지, 삶 속에서 그냥 복음이 나와요. 어떻게 나오는가? “나 하나님 믿는 것, 이거 거짓말쟁이가 하나님 믿는거야. 내 이야기 해줄게,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 난 근데 이 사실이 너무 좋아. 왜? 나는 죄인이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말씀은 살아있는데 자꾸 건방지게 우리가 끼어들어서 우리를 살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불신앙적인 모습인지, 우리가 불신앙이라는 시인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